코뿔소 지나가다
1. 짐승 발자국
승강기 문이 닫히면서 너의 몸은 천천히 수직으로 상승하고 있다. 현관 입구에서 사내와 부닥치긴 했지만 무사히 집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 그가 치근대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 너는 무늬가 박힌 스테인리스 벽에 머리를 대고, 유난하게 침착함을 유지한 그의 태도에 대해 생각한다. 사내가 왜 말 없이 등 뒤에 서 있었을까. 직접 해코지를 한 적이 없지만 그의 집요함을 경멸한다. 벌써 몇 달을 귀찮게 따라다닌 남자다. 짐작컨대, 그의 머릿속에 그려있지 않은 집 호수가 이제 막 드러날 상황이라는 것을 갑자기 깨닫는다. 그는 아래층에서 승강기가 정지되는 위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걸 눈치 챈 순간 너는 다시 버튼을 누른다. 7에서 15로 숫자를 바꾼 뒤 필요 이상의 상승에 몸을 맡긴다. 이럴 때 만약 승강기가 고장 난다면 어떻게 될까? 편하게 누울 공간도 없는 곳에 감금되어 버린다면? 잠깐 최악의 경우를 상상한다.
길게 느껴지는 감금시간이 끝나고 문이 열린다. 희미하고 어둑한 복도가 눈앞에 펼쳐진다. 너는 그 속으로 발을 옮긴다. 한 손으론 발코니를 잡으며 복도가 끝나는 곳까지 걸어간다. 두려움 대신 쓸쓸함을 쥐고 있는 손바닥이 차다. 가까운 벽에서 물소리와 그릇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난간을 잡고 서 있다. 아파트 단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건너 뒷산에 있는 송신탑은 여전히 불빛을 깜박거린다. 그것은 방송국에서 만들어 놓은 것인데, 꼭대기에 경고등을 달아 야간 비행하는 항공기와의 충돌을 피한다고 한다. 하지만 너는 방공 대피 훈련하는 날을 제외하고는 어떤 날도 비행기를 본 적이 없다. 지난여름 한낮 아파트 단지 위를 낮게 지나가는 두 대의 전투기를 본 게 전부다. 너는 광섬유 끝에 맺힌 빛의 장식을 보듯이 어둠 속의 피어난 불빛을 넋 놓고 내려다보고 있다.
야경에 홀려 있는 동안 사내가 다가오는 것을 너는 눈치 채지 못한다. 침을 뱉으면 닿을 거리에 이르러서야 발소리를 듣고 비로소 사내의 존재를 알아챈다. 너는 발코니의 끝에서 본능적으로 주춤주춤 두어 걸음 물러서지만 이내 벽을 느낀다. 억눌린 용수철처럼 긴장하며 사내의 움직임을 쏘아본다. 미간을 잔뜩 찡그린 너는 지금 숨이 매우 가쁘다.
“나를 따돌리기 위해 지금 여기 있는 거죠?”
사내가 웃으며 말한다. 그러나 너는 대답하지 않는다. 엉뚱하게 일이 꼬여버린 것에 대한 홧증을 고집스런 침묵으로 드러낼 뿐이다.
사내의 작은 키가 꽃다발에 묻혀 점점 너에게 다가오고 있다. 너는 신경질적으로 침묵을 깬다.
“언제까지 이러실 거예요?”
너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조용한 어둠을 깨트린다. 그리고 너는 발작하듯 꽃다발을 나꿔채 사내를 후려친다. 꽃망울이 퍽, 터지며 사방으로 흩어진다. 꽃 이파리가 허공에 떠올랐다가 느릿느릿 떨어진다.
그가 얼굴을 감싸 쥐며 주저앉는 사이 너는 놀란다. 갑작스럽게 시간이 늘어나 버린 듯한 느낌 때문이다. 특별한 긴장감이 감각을 비정상적으로 왜곡시켜버릴 때가 있다. 동작이 작은 토막으로 분해되어 느리게 풀려나가는 비디오 화면처럼 말이다.
일그러진 표정으로 그가 웃고 있다. 하지만 너는 감정을 숨긴다. 손가락이 아릿하다. 손을 휘두를 때 손바닥에 장미가시가 파고들었는지 모르겠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한다.
“저, 이건……”
너는 그에게 말할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버럭 소리를 지른다.
“도대체 왜 자꾸 이러는 거냐구요.”
밤공기를 가르는 목소리에 악이 받쳐 있다. 집안에 틀어박혀 있던 사람들이 하나씩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다. 너는 뒤에서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할 마음이 전혀 없다. 사람들은 둘 사이에 끼어들지 못하고 반응을 지켜보고 있다.
너는 그가 뒷걸음질하는 것을 본다. 만약 그가 사람들이 없다 해서 사이코패스처럼 억지로 무슨 짓을 하려 했다면 심각한 일이 생겼을지 모른다. 네가 죽기 전에는 어떤 남자에게도 당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극단적인 상황은 상상으로 족하다.
다행히 그는 얌전히 물러선다. 호기심을 채우지 못한 사람들이 문을 닫고 사라진다. 조금 후, 인적의 부재를 확인한 너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갑자기 사위가 훤해진다. 누군가가 현관 앞 스위치를 올린 모양이다.
너는 콘크리트 바닥에 시선을 떨어뜨린다. 그에게 대응하는 방법이 조금 과했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발아래 파편처럼 붉은 꽃잎들이 흩어져 있다. 도대체 벌써 몇 번째란 말인가?
집에 들어와 샤워를 하면서 너는 왜 사내가 집요하게 구는지를 곰곰이 생각한다. 너의 잘못은 아니다. 물론 그가 지나친 게 사실이다. 언니가 예전의 정신이라면 영리하게 처신하는 방법을 설명해 주었을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언니는 아이처럼 소파 위에 몸을 접고 달게 자고 있다.
지난여름 태풍이 온다는 날이었던가. 약에 취해 풀린 눈으로 언니는 외출을 하고 싶어 했다. 함께 지내면서 한 가지 걱정스러운 것은 언니가 언제 사고를 낼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언니는 아직 젊은데 많은 기억을 잃어버렸다. 기억을 잃어버렸으므로 말의 조리가 서질 않고 그래서 사람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을 수가 없다.
그날 너는 언니의 팔을 붙들고 아파트를 나와 느림보 걸음으로 한 블록을 걸었다. 둘 다 짧은 바지와 그물로 짠 것 같은 셔츠에 샌들을 신고 있었는데, 관광객인 듯한 중년 사내 둘이 무슨 관심이 일었는지, 혹시 인근 호텔에 파친코 하는 데가 없느냐고 물어 왔다.
잘 모르겠는데요.
그럼 골프 연습장은 있습니까?
글쎄요. 한번 찾아보세요.
무슨 빌미를 붙여서라도 치근대려는 한심한 두 남자를 떼어놓기 위해 너는 산책길의 방향을 바꿨다. 언니를 앞세워 해변으로 가는 지름길을 택했다. 골목 서너 개를 지나 그 길이 끊긴 곳에 철제 계단이 놓여 있고 거기를 내려가면 바다였다.
언니, 천천히 가.
눈앞에 거대한 파도가 넘실대고 있었다.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언니는 바람의 방향으로 몸을 기울이며 잡힌 팔을 빼내려고 했다.
그러지 말라니까.
언니는 목소리를 조금만 높여도 금세 수굿해졌다. 잡은 팔을 놓고 너는 천천히 언니의 뒤를 따라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좌판에 먹을거리를 놓고 손님을 기다리던 장사꾼들은 이미 철수를 했고, 바다구경을 나온 사람들이 드문드문 서서 산더미로 밀려드는 파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이 거칠어 머리가 엉망으로 풀어져 날리는데, 정신 나간 언니는 자꾸만 바람 부는 쪽으로 종종걸음을 쳤다.
언니를 따라 갔던 너는 독한 바람을 피해 돌무더기가 싸여 있는 낯선 가옥 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이 어딘지 몰랐다. 언니는 마치 아는 집인 것처럼 성큼 안으로 들어갔는데, 마룻바닥에 나무의자와 오래된 풍금이 있고, 벽엔 십자가가 걸려 있었다. 언니는 모처럼 호기심이 나는지 화분이나 커튼, 풍금 커버 따위를 만지고 다녔으므로 그것을 본 너는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거기서 덩치가 작은 사내를 보았다. 예배실의 먼지를 닦으며 혼자 낮게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던 그는, 너와 언니의 출현에 놀라 소리를 뚝, 멈추었다. 그것이 그를 처음 본 그림이었다.
네가 두 번째 그를 본 것은, 가을 햇빛이 너무 강렬해서 검은색 잠자리 안경을 쓰고 언니와 산책하던 날이었다. 정확히 말해서 횟집 수족관이 보이는 노천에서 언니에게 솜사탕을 사주고 있을 때였다. 그는 너를 보고 곧장 걸어오더니, 신자들의 간증이 수록된 팜플렛을 주며, 하느님을 믿으면 이렇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작은 키에 좀 야윈 듯한 얼굴이 선하지도 비루해 보이지도 않은 평범한 인상이었다. 그는 스스로 손짓을 동원하여 소개하길, 교회의 집사라고 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지 않아요. 아니 교회를 안 믿는 편이지요.
너는 이유 없이 그 사내에게 쌀쌀맞게 굴었다. 주는 것을 읽기는커녕 보는 데서 땅에 버렸다. 그가 허리를 굽혀 그걸 집어 들었다.
교회를 아주 불신하는군요?
네.
왜죠?
그걸 일일이 댁에게 말해줘야 하나요?
내 인생을 바칠 만큼 소중한 일이 남에게 무시되는데 그냥 넘어갈 수는 없잖아요. 아가씨나 나, 둘 중 하나는 실패한 삶을 살고 있는 셈이겠군요?
너는 그 말에 대꾸하진 않았지만 쓰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속으로는, 미친 놈 지랄하네, 그렇게 말했지만 입에 담을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어릴 때 너는 동네 교회에 다닌 적이 있었다. 그래야만 대추와 감나무, 벚나무 등이 우거지고 나무쥐똥나무와 회양목으로 예쁘게 다듬어 놓은 교회 마당과 놀이터를 출입할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급우 중 하나인 목사의 딸은 왠지 모르게 친구들이 자기 교회에 오는 걸 싫어했다. 그 아버지가 끊임없이 성전을 제대로 지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의 본뜻을 알았기 때문이었을까. 물론 주머니에 감춰 둔 돈을 죄다 예물로 바치고도 너는 목사의 딸인 그 애에게 비웃음을 당해야 했다. 학년이 바뀌고 너는 그 친구를 잊었다. 얼마 후 그 교회는 사이비 종파이며, 그 애 아버지가 나쁜 일로 고소당했다는 소문이 동네에 맴돌았다.
우리는 모두 회개를 해야만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거랍니다.
그래요? 가능하다면 회개해 보도록 하죠.
너는 비아냥거리며 언니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그를 세 번째 만난 것은 두 번째 만난 뒤 한 열흘쯤 지나, 교회에서 얼마 떨어진 곳에서 사람들이 낚시하는 광경을 지켜보던 날이었다.
그들은 잡은 고기를 회 떠서 즐겁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 너는 갑자기 술이 마시고 싶었는데, 갑작스러운 그 느낌이 어떻게 전해졌는지 한 남자가 고개를 돌려 너를 바라보았고, 신기하게도 너에게 손짓까지 했다. 너는 언덕 위에 언니를 남겨둔 채 그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 술 한 잔을 얻어 마시고 다시 올라왔다. 와서 보니, 사내가 언니와 함께 서 있었다. 언제 그가 왔는지 너는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신앙생활을 해 본 적이 있냐고 언니에게 물었다. 바닷바람 때문에 그의 음성이 높이 떠 있었다. 누가 물어도 언니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때도 물론 언니는 말없이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당기며 공격적으로 그에게 되물었다.
이봐요, 댁이 원하는 게 뭐예요?
난 아무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다만 가난한 마음을 갖고 싶어 해요.
가난하고 싶다구요?
네, 부자가 천국을 가려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일처럼 어려우니까요. 조금 귀찮기는 해도 가난은 좋은 거예요.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 가난은 맑은 생각을 갖게 하죠. 제가 원하는 건 무엇을 탐내는 게 아니라 함께 가난한 마음을 나누는 거죠. 아가씨를 신앙의 길로 안내하고 싶어서요.
너는 괜히 쏟아지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낚시꾼들이 술잔을 들다 말고 웃음소리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게 아니라 교세를 늘리고 싶은 거겠죠. 지금까지 교회가 어떠한 일을 했는가에 대한 기분 나쁜 물증을 한번 대볼까요? 좋은 일 하나도 안 했다는 말은 안 하겠어요. 뒤에서는 끊임없이 돈과 권력에 야합하고, 앞에서는 헐벗고 굶주린 자에게 사랑을 팔아 온 거. 그리하여 자신의 영혼을 누군가에게 맡기지 않고는 홀로 설 수 없도록 했던 거. 철들고 나서 생각해 보니까 교회가 웃기더라구요.
그렇진 않아요. 뭔가 오해를 하고 있군요. 그런 거 없이 사랑만을 실천하는 교회가 훨씬 많아요.
한 잔의 술 덕분에 너는 그의 쓰잘데기 없는 신념을 무너뜨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대학시절에 억지로 학점 따느라고 익혀두었던 지식이 이렇게 즐겁게 쓰일 수 있다니. ‘당신은 지금 실수한 거야.’ 너는 어떤 미끼를 던질까, 잠깐 생각했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반하는 신앙?’ 너의 속에서는 기독신학을 가르치던 교수에게 대들지 못한 분풀이가 고개를 들고 있는 중이었다. 그거라면 얼마든지 상대를 제압할 수 있으리라. 너는 날카로운 낚시 바늘에 미끼를 꿰어 그에게 던졌다.
물론 말은 그럴 듯하죠. 영성생활에, 기적에……하지만 종교 집단의 뒤엔 왜 그리 구린내가 나는 거죠? 입에 발린 거짓말 난 안 속아요. 우리가 자기 몸과 마음을 남에게 맡기고 주체성을 잃어버린 노예로 전락해야 할까요? 성욕에 몸을 맡긴 자들은 성의 노예요, 권력이나 돈에 자기 영혼을 팔아 치운 자들은 역시 그것의 노예라 하지요. 제가 눈감고 종교집단의 노예라도 될까요?
그날 너는 코뿔소처럼 한 사내를 들이받았다. 지식을 총동원해서 주절거린 까닭에 그를 단숨에 제압할 수 있었다.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너의 말을 그가 끝까지 들어주었으므로 가능한 일이었다.
난 내 멋대로 사는 걸 원해요. 우린 진정한 주체자, 확실한 자유인으로 살도록 허락되어 있지요. 그게 우리를 내몰아 버린 창조자의 진의예요. 이 땅을 지배하는 법칙은 신의 권위가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지 아니던가요?
신이 허락한 생은 그렇게 멋대로가 아니잖소?
단 한번 그가 시퉁맞은 소리로 그렇게 묻기는 했었다.
멋대로가 어때서요? 그건, 금기라는 사슬에 엮여 노예처럼 자유의지를 잃고 조종당하는 삶이 아니라, 언제나 자신이 설정한 최대 가치를 축으로 해서 움직여 나가는 멋스럽고 자유스런 삶이에요. 그런 까닭에, 신은 자유의지 없는 인간들의 넘치는 경배보다 자유의지를 가진 단 한사람의 미약한 찬미를 더 기쁘게 받아드릴 가능성이 있다구요. 우리가 녹슨 사슬에 묶여 억눌린 감정과 왜곡된 죄의식으로 그저 신을 찬양하고 경배할 때, 신은 우리의 노예근성을 더 경멸하지 않을까요? 결론적으로 말해서 교회란 의지가 굳지 않아 사는데 막막함을 느끼는 자들을 단체로 신에게 인도하는 비상통로일지는 모르지만, 전 그런 걸 못마땅하게 생각해요. 신을 생각하지만 교회를 믿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거라구요. 스스로 신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종교나 규범의 형태로도 행동을 제한 받을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죠.
네가 긴 이야기를 하는 동안 무심히 손장난을 하고 있던 언니는 계속 무엇인가를 만들기 위해 모래를 쌓고 있었다.
돌아갈 때까지 그는 무슨 꿍꿍인지 한 마디도 항변하지 않았다. 조금 후, 낚시꾼이 낚시를 걷었는데, 그들 중 하나가 자리를 뜨며 너에게 손짓을 했다. 너는 답례로 손을 흔들어주었고 언니를 앞세워 그곳을 떠났다.
그 뒤, 네가 새까맣게 잊고 있던 사내를 다시 기억하게 된 것은 계절이 완전히 바뀐 겨울, 아파트 주차장에서였다. 분명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가 집요하게 그러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리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들고 있는 종이컵의 갯수가 그걸 말해 주었다. 너는 그를 스쳐지나갔다. 그러자 그가 알아보고 재빨리 따라왔다. 백미러를 통해 거리를 좁혀 오는 사람의 윤곽이 눈에 보였다. 후줄근한 점퍼차림의 그는 뤽베송의 영화 ‘레옹’에 나오는 주인공 남자처럼 빵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는 본넷 쪽으로 다가와 손을 들고 차를 세웠다.
기어이 다시 만났군요. 반가워요. 이게 주님의 뜻이지요. 그분이 당신을 만나라고 한 겁니다. 제 기도에 응답했나 봐요.
주차를 하고 나와 피할 수도 없이 사내와 맞닥뜨렸다. 그의 얼굴은 여름보다 무척 말라 있었다. 하느님이 만나라고 했다고? 멀쩡하게 생긴 남자에게 그런 말을 듣자니 웃음이 터져 나왔다. 기분이 아주 불쾌할 때 상대를 멸시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드러나는 행동이었다. 너는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가슴으로 그를 밀고 지나가면서 입술을 약간 비틀었다.
농담하지 말라구요.
그가 따라오며 말을 받았다.
오늘은 그 혀로 주님을 찬미하게 하고 말겠어요. 꼭 요. 집으로 나를 초대해 줄 수 있어요?
아뇨. 내가 왜? 댁과 난 아무 상관이 없는 사이란 말이에요. 아시겠어요?
너는 그를 무시하고, 승강기를 타려다가 뭔가 잊은 것이 생각난 듯 아파트 정문을 나와 길 맞은 편 쪽으로 걸어갔다. 슈퍼마켓에서 늑장을 부리며 네가 화장지를 한 박스 사들고 돌아오는 동안 다행히 그는 돌아가고 없었다. 그러나 그 뒤가 더 문제였다.
그는 매일 네가 학원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 올 때쯤, 주차장 앞에서 서성대고 있었다. 나이 서른넷에 그런 일쯤이야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는 배포가 너에게 있었다.
집사님이라고 하셨죠? 저는 불교를 믿는 사람이에요. 하느님을 믿는 사람 좋아하지도 않구요. 그런데, 왜 저와 댁의 관계를 자꾸 엮으려 하시는 거여요? 저는 얌전하지도 않고, 평범한 여자가 아녀요. 제 별명이 게릴라랍니다. 수틀리면 안하무인이고 욕도 엄청 잘해요.
상관없습니다. 이건 제 뜻이 아니까요. 저는 주님의 말씀에 따르는 것 뿐입니다.
계속 주님을 빙자하는군요? 도대체 당신은 그런 식으로 남에게 접근하나요? 정말 주님께서 절 괴롭히라고 하던가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 너는 그의 눈빛을 살피고 있었다.
그분을 모욕했던 마음이 움직일 겁니다. 아마 그 땐 주님이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될 테니까요.
자꾸 이러면 교회 가서 사람들에게 다 불어버릴 거예요. 집사님이 여자를 따라다니며 희롱한다구요.
너는 전에 그가 집사라고 했던 말이 사실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츰 그의 몰두가 겁나기도 했다.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은 누가 말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게 뭔가? 끈질기게 남을 귀찮게 하는 짓은 범죄나 다름없지. 그래서 너는 참을성을 잃고 강경하게 그의 말에 항의했다.
당장 찾아가 보셔도 좋아요. 아실지 모르지만 사정상 저는 그 교회를 그만 두었습니다. 아무튼 미안합니다. 그리고 제가 전에 집사였든 아니든 남을 희롱할 뜻은 없어요.
그렇게 계속되는 사내의 집착. 시간이 흐를수록 어째 심상치가 않았다. 그는 매일 어디 숨어 있다가, 네가 아파트 현관에 들어설 때쯤 모습을 나타내는 일만 반복했다. 오늘 그의 출현을 알 수 있게 된 건 엉뚱하게도 측백나무가지가 움직인 덕분이었다. 그가 거기에 숨어 꽃을 안고 있는 것이 너무 가련해 보였다.
그는 너를 열 걸음쯤 앞세우고 뒤따라 왔다. 너는 종종걸음으로 경비실에 사람이 있는 걸 확인하고 승강기 앞에 섰다. 때마침 보턴을 누르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너는 승강기 안으로 재빨리 들어갔고 몸을 돌려 문이 닫히는 짧은 시간의 틈에 사태를 관망했다.
승강기가 막 닫히면서 카키색 털모자와 검은 색의 점퍼를 입은 남자의 모습을 잠깐 비쳤다. 그가 따라올까, 걱정도 했다. 그래서 너는 7층에서 내리지 않고 15층으로 계속 올라갔다. 결국 거기까지 따라온 사람과 마주치고……그래서 일생에 단 한번뿐인 너의 오늘이 어이없게도 속 모르는 한 남자에게 무참히 밟혀 버린 것이다.
2. 코뿔소는 게걸음을 흉내 내지 못한다
언니는 결혼생활을 십 년쯤하고 나서 서른일곱의 나이로 불미스럽게 남편과 헤어졌다. 그렇다. 사랑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너는 언니의 삶이 정말 불미스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불미한 일이라니? 그건 당연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속 아린 삶의 일부일 뿐이다.
불행하게도 언니는 자신의 어떤 과거를 기억으로 재생해내지 못한다. 그러나 너는 잃어버린 언니의 기억을 알고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흐트러진 언니의 모습이 외려 편안해 보인다. 편안함 속에 언니는 허물어져 있다. 지금 자고 있는 언니는 꿈속 어디를 헤매고 있을까? 담배를 문다. 지난 시간들이 매운 연기처럼 허공에서 흩어져버린다.
너는 언니의 어떤 것이 치명적인 약점인지 알고 있다. 혼을 빼주고 남을 사랑하는 짓, 그 짓을 볼 때마다 언니는 아주 바보 같다. 절대로 사랑을 믿지 말라, 그게 너의 신조다. 너는 신조를 지키기 위해 결혼할 뜻이 없다. 그건 언니의 실패와는 전혀 무관한 일이다. 언니는 너와 정 반대의 성향을 가진, 어리석게도 끊임없이 사랑의 가능성을 믿었던 여자다. 지금은 그게 남아 있는지 어떤지조차 알 수 없지만.
언니는 일찍이 군인과 결혼을 했다. 그리고 5년이 넘도록 둘 사이에 아이를 갖지 못했다. 둘 사이를 파탄에 빠뜨릴 문제는 적지 않았는데, 가장 심각했던 일은 도심과 아주 멀리 떨어진 병영 근처의 아파트를 맴도는 일이었던 것 같았다. 그 때 언니는 막막했고, 그러다가 한 사람을 만났다. 언니는 그를 본 순간 강렬한 불기가 가슴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혈육인 너에게 고백했었다. 그것은 이따금씩 자기 안부를 실어 보내는 언니의 편지로 알게 된 사실이었다. 편지엔 그 한 남자를 만나기 위해 언니는 온 생애를 힘들게 걸어온 것 같다고 적혀 있었다.
내가 부대 관사에 들어앉아 뭘 보고 있는 것 같니? 종일 창문으로 군인들이 움직이는 모습만 보고 있지. 여긴 쟝글이야. 얼룩덜룩한 무늬가 칠해진 위장 벽을 보면 그런 느낌을 피할 수가 없게 돼. 밀림의 법칙이 있는 곳. 권력이라는 괴물이 숨어 있는 곳이야. 난 그 공포스러운 놈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움직이는 지도 알아. 그 놈은 나와 형부의 목을 항상 지그시 물고 있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것은 나도 계급이라는 송곳니를 갖고 살아야 한다는 점이야. 스쳐 가는 사람들이 뒤에서 무슨 일을 꾸미는지 알아야 물리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지 않겠어?
하지만 그런 일에 진력이 나서 요즘은 모대학에 서예를 배우러 다녀. 느지막이 배우는 게 참 좋은 거드라. 얼마 전 학교에서 특별한 사람을 만났어. 그는 외지에서 특강하러 온 소설가였으니 특별한 사람이지? 특별한 선생님이라고 매번 부르기 그러니까 편의상 그를 ‘게’라고 불러 볼게. 재밌다. 그가 게라니. 후후, 아무려면 어때? 게를 본 순간부터 난 반듯하게 걷는 법을 잊어버렸어. 매일 너네 동네 바닷가 모래밭을 떠도는 게. 게가 되는 꿈을 꿨지. 꿈속에서 나는 옆으로 기면서 그가 있는 모래더미 속에 숨어버리곤 했어.
그 사람은 깊은 눈매로 사람의 영혼을 들여다보는 재주가 있어. 부드럽고 섬세한 눈길이 스쳐갈 때 난 알았어. 그가 사람을 찾고 있다는 걸. 그의 무심한 듯 열려있는 눈 속에 내가 있었던 거야. 사람들은 알아채지 못했어. 그 눈초리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도 물론 없었고 말야.
나는 게처럼 옆으로 주춤거리며 그에게 다가갔어, 그의 영혼을 만나기 위해서. 처음 그에게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도 안나. 커피 잔을 놓고 아주 가까운 곳에 앉은 그가 웃었어, 기분 좋게. 그는 나를 한참 들여다보더니, 사람이 각각 마음 가는 대로 어떤 파장을 내는데 자기가 가진 고유주파수가 나와 같다고 하더라. 마음에 든다는 표현이 엉뚱했어.
그가 주는 책을 단숨에 읽었단다. 그의 소설에 뭐가 들어있는 지나 알아? 사막의 모래 산 같은 외로움이 있지. 높고 깊은 외로움 속으로 걸어가다 보면 거대한 생명의 힘 같은 걸 만나. 그는 말했어. 외로움이 얼마나 필요한 것이며, 그것이 영혼을 정화할 때 얼마나 불가사의한 힘을 발휘하는 것인지를. 그의 소설은 정말 쓸쓸해.
우린 가끔 잡목의 뿌리와 돌맹이를 밟으며 산길을 걸었어. 그는, 육신의 무게를 털고 지푸라기처럼 가벼운 걸음걸이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했지. 너 달궁이라는 데 알지? 지리산에 있는 옛날 궁터 말야. 난 그와 세 번째 만나던 날 차를 몰고 그곳엘 갔어. 겨울이었는데, 눈이 시리게 달이 차 오른 날이었지. 우린 달빛을 받으며 폐허의 곳곳을 돌아다녔어. 왜냐고? 그는, 자기의 발바닥으로 허정한 기운을 빨아들여야 한다고 했거든. 그러다가 우리는 말없이 마주보고 한동안 서 있었어. 세상이 정지되어 굳어져버리는 것 같았지. 감정의 덩어리가 눈에 보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더라. 거기서 긴 포옹을 했지. 그런 다음 마치 피를 찍어 살아있는 화석을 만들려는 것처럼 서둘러 옷을 벗었어. 그리고 금세 우린 원이 되었단다. 알몸으로 태극을 만든 거야. 눈과 비, 서리와 바람으로, 지워지지 않을 새와 물고기와 사람의 형상을 서로의 심장에 새겨버린 거지.
아마 나중에 누군가가 우연히 바람 타고 흘러오는 기氣를 통해 우리의 느낌을 만날 수 있다면, 영롱한 외로움이 스며있는 그 열정의 흔적을 보고 놀랄지 모르지. 아무튼 거기에서 그렇게 우리는 불륜의 의식을 치뤘어. 서로 각각 남편과 아내를 가진 두 사람이 하나 되는 의식을 말이야.
생각해 봐.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믿어지기나 하니? 내 욕심이 얼마나 많은지 너도 알잖아. 사실 그에게 난 모든 것을 던져주고도 흡족하지 않아 아예 백기를 들고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어. 그는 두 손을 내밀었지. 난 그의 손을 잡는 대신 그의 전부를 끌어안고 싶어 했어.
때로 우리가 기다리는 사랑이 정말 있기나 한 건지 좀 생각해 봐. 난 남편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행동한 것이 옳은지 의심은 했지만 부끄럽다는 생각은 안 했어. 내 행동이 잘못되어 있다면 언제든 그 대가를 치르기로 작정했거든. 애를 낳지 못한 게 죄라고 해도 그렇지. 그래, 매일 업무에 몰두해 있거나 아니면 동료들과 놀음에 빠져 집을 비우는 그 인간을 내가 어찌 사랑할 수 있었겠니? 헛된 일에 취하지 말고 나에게 집중해 달라고 아무리 설득해도 안 되더라. 난 다시는 그런 사람에게 사랑을 구걸하지 않겠다고 결심했고, 내가 몸 바쳐 사랑할 사람을 만나고 싶었던 거야.
난 죄를 저질렀어. 누가 나에게 돌을 던져도 좋아. 내가 비록 이혼하기 전에 그와 몸을 나눴다 하더라도 난 당당하고 싶어. 우린 늘 진정한 사랑이 뭘까, 생각하지. 또 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서로 피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이야기해. 그러니까 비로소 확연해지드라, 사랑은 함께 있고 싶어 하는 거라고.
그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나를 불렀어. 그의 몸과 마음이 내게로 온통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지. 그를 바라보면 난 한없이 빠져들게 돼. 그도 내 감정을 느낌으로 안다고 말했어. 난 말야, 내 말을 이해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거든. 말의 속뜻을 자세히 알아채고 거기에 뭔가를 덧붙여 의미를 만들어 가는 사람을 만났으니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 그러니 당연히 함께 있고 싶어지는 거 아니겠니?
그래서 자주 만났나 봐. 우리가 만나지 못할 땐, 늘 전화를 붙잡고 있었고. 우리가 서로 피하고 싶은 것은 외롭거나 마음 아픈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거였어.
그런데, 언니의 행복은 지속되지 못하고 어느 날 문득 사라져 버렸다. 세상일이 그렇듯이 소중한 건 그렇게 지키기 어려운 것이었는지 모른다. 언니의 편지는 점점 글자를 쉽게 읽어낼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러워 보였다. 어쩌면 영영 다시없을지도 모를, 사랑하는 영혼과 마주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를 언니의 조바심이 현실로 나타난 때문이었을 것이다. 형부가 외도를 눈치 채고 언니에게 물었다고 했다. 나 외에 누군가를 사랑하느냐고.
언니의 말은, 그때부터 마음을 완전히 닫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날 언니의 의지 한 쪽이 버티지 않았다면, 언니가 사랑한다던 남자는 죽게 되었을지도 몰랐다. 고급장교인 형부는 남들 눈을 피해 산책 나간 것처럼 관사 뒷산으로 언니를 데리고 갔다. 나무가 빽빽이 우거진 숲 속의 공터 무덤가에서 언니의 뺨을 때리다가 분이 삭혀지지 않자, 권총을 빼며 위협했다.
어떤 놈인지 말해. 말 안 하면 쏘고 말겠어.
그때 언니가 할 수 있는 말은 한가지뿐이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다시는 사람을 안 볼 거예요. 약속해요. 그래도 못 믿겠으면 쏴요. 어서.
언니는 총구 앞에 이마를 대고 방아쇠를 당겨주길 기다렸다. 그러나 형부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사랑을 잃는 여자만큼 독해질 수 있는 사람은 정말 없다. 언니는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려고 사랑하는 이에게 결별하자고 말했다. 그에게 마지막 전화를 할 때, 언니는 너무 슬퍼서 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마치 마음이 변한 것처럼 선택해야하는 외길이 너무 막막해서 긴 통화를 할 수 없었다.
이제 우리 만나지 말아요. 이유는 묻지 말구요.
그 때 킥 킥킥, 마치 공을 못으로 찔러 바람을 빼듯 그가 불규칙하게 웃는 소리를 언니는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다시는 그와 연락되지 않았다고.
그의 영혼이 다른 세상으로 날아가 버리는 장면을 본 거 같았지. 보지 않아야 할 것을 봤던 거야. 다음 생에 반드시 그를 만나 그의 영혼과 함께 있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완전히 날아가 버렸으니……
어느 날 저녁 언니는 단정하게 묶은, 검고 긴 머리를 풀어버리고 농약을 마셨다. 형부가 재빨리 손을 써서 죽진 못했지만, 네가 연락을 받고 여섯 시간 질주해서 찾아간 곳은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된 군병원이었다.
형부는 비상근무에 들어가야 한다고 병실을 비웠다. 둘이 남아 있게 되자 언니는 영영 열릴 것 같지 않던, 까맣게 타서 숯이 되어 버린 듯한 입을 힘겹게 열었다.
그 사람, 전생에서 헤어졌던 사람이었는데, 꼭 같이 있어야할 사람이었는데, 험하고 험한 길을 돌아 마지막 걸음을 내딛어 겨우 찾았는데, 아무에게도 빼앗기지 않고 지키려고 했는데, 내가 원하는 단 한 사람이었는데……이제 나 어쩌면 좋으냐?
언니, 우선 몸부터 추스려. 그렇게 죽고 못 살겠으면 이혼하고 다시 찾으면 될 거 아냐?
너는 언니의 충격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남자를 그렇게 사랑할 수가 있다니. 그건 너에게 있어서 가장 어리석고 부끄러운 짓이었다.
퇴원하고 나서 언니가 나중에 보낸 몇 개의 편지에는 ‘게’라고 불리던 언니의 남자가 아내와 딸을 버리고 집을 나갔다는 소식이 간단히 적혀 있었다. 언니는 음독의 후유증에서 겨우 벗어난 뒤, 행방불명된 그를 찾기 위해 사방으로 수소문했다. 그가 출입했던 출판사에서 주소를 얻어내어 언니랑 그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주소로 ‘게’를 만날 턱이 없었다.
그 때 언니는 중대한 결심을 했고 곧 그것을 행동으로 바꾸었다. 서둘러 억지 이혼을 하느라 빈손이 되었다. 혼자 몸이 되자 언니는 만사 젖혀두고 사방팔방 쑤시고 다녔다. 더 이상 어떤 위험도 언니는 겁내지 않았다.
언니의 마지막 편지는 이상한 소문을 들었다는 말로 시작하고 있었다. 어느 산동네 술청에서 지분거리는 남자에게서 주워들은 말의 내용을 가지고 행방불명인 사람을 찾아 나선 것 자체가 한심하게 보였지만, 글을 읽다 보니 언니의 지성에 무심하던 하늘도 감응하긴 한 듯 했다.
지난 동삼에 말여, 그 노무 사내가 우리 집 부엌 앞에 서 있는 걸 보구 마누라가 기함할 뻔했다니께. 그냥 혼구녕을 낼라구 하다가 불쌍타 싶어 찬밥 한덩이 내주구 말았지만 말여. 글쎄, 그 몰골에도 설피 신구 저 산을 넘어 다닌댜.
낯선 곳에서 흘러 들어온 여자의 뜬금없는 질문을 재미있어 하며, 그들은 취흥을 돋구느라 사실과 무관한 말을 지껄였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정말 목숨을 바꾸는 한이 있어도 언니는 그를 만나야했고, 귀가 얇아 숱하게 헛걸음을 하면서도 혹여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언니는 술청의 주인에게 라면 세 그릇 값에 막걸리 두 병을 얹어 주고 어떤 사람이 가끔 탁발하러 내려 왔었다는 길을 기어이 거슬러 올라갔다.
산막을 찾아내는 데 꼭 반나절이 걸렸다고 했다. 소문처럼 정말 거기에 볏집으로 지붕을 올린 적이 있는 집이 있었다. 집이라 하기도 찜찜한 곳, 사람이 오는 길을 자연이 가로막고 있는 것으로 충분히 짐작한 터였지만, 그래도 언니는 기대를 버릴 수는 없었다. 누가 사는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언니는 무르팍으로 마른 쑥대를 헤치며 조심스레 울안으로 들어갔다.
언니가 발밑에 깔려 있는 햇살로 확인한 것은 완전한 허물어짐이었다. 서까래는 듬성듬성 빠지고, 보꾹이 내려앉고, 벽은 수수대로 만든 얼개만 엉성하게 붙어 있었다. 내려앉은 보꾹 사이로 묵은 볏짚이 흘러내린 꼴을 보니, 찾아든 짐승조차 눈비를 제대로 피하기 어려울 성싶었다. 한동안 언니는 떨어져 나간 문짝을 밟고 망연히 서 있었다. 아무도 출입을 허락하지 않은 공간에 낯선 침입자였던 언니, 누군지는 몰라도 여기서 얼어붙은 밥알을 혀로 녹이며 혼자 살아야 할 이유를 생각해 보니 눈시울이 시큰해졌다고 했다. 그 때는 봄 시작할 즈음이었다.
그날 언니는 산막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들었다. 볏짚을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가 깨어보니 깊은 밤이었다. 언니는 거기에서 틀림없이 누군가를 만났다. 그가 누구인지 언니는 밝히지 않았지만 모든 세상 사람들이 소중히 말하는 사랑을 지워버리고 홀로 짐승처럼 사는 한 남자의 이야기로 언니의 마지막 편지는 끝을 맺고 있었다.
헛것을 본 것 같아. 내가 본 게 문득 잡목 사이를 스쳐간 산짐승이었는지 몰라.
마지막 편지를 받은 후 일 년 쯤 지난 어느 날, 언니는 참담한 몰골로 이 땅에 남은 단 하나의 핏줄을 찾아왔다. 너무 힘들어. 언니는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검고 축축한 눈매에서 너는 그 말을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3. 위험한 환상
너는 가끔 뚱뚱하고 피부가 두꺼운 초식동물 한마리가 몸 안에 우뚝 버티고 서 있는 것을 느낀다. 그 동물은 커다란 뿔을 갖고 있고 시력이 몹시 나쁘다.
사람들은 너를 모른다. 레옹같이 생긴, 키와 몸피가 작은 사내도 네가 순한 짐승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그는 자기가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 다시 한 번 치근덕거리면 국물도 없다. 암, 그렇고말고. 그러나 지금 너는 며칠 전 사내에게 독하게 굴었던 것을 조금 후회한다. 그의 집요함이 눈앞에서 멀어진 후, 왠지 씁쓸하고 서운해서다.
그가 강도질이라도 했던가? 그에게 쌀쌀맞게 군 것은 하느님을 너무 쉽게 팔아먹은 댓가다. 빌어먹을 하느님. 하느님이 레옹에게 사랑의 계시를 줄 때, 여자의 심리를 꿰뚫어 보는 지혜로움 하나쯤 끼워 넣었더라면 그가 성공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스토커 취급은 받지 않았을 텐데……
너는 흔들의자에 앉아 물끄러미 창밖으로 시선을 던진다. 바다가 넘실대고 있다. 때가 되어 너의 몸에 핏빛 달이 차오른다. 아랫배가 쑤시고 아프다. 이런 날은 애들 가르치러 학원에 가기 싫다. 일을 맡기려고 전화기를 든다. 나, 아파서 하루 쉴 거야. 김 선생이 내 수업 좀 해 줘.
너는 세월의 강을 거슬러 올라가 열아홉 나이로 머리가 엉클어진다. 아버지가 오클라마에 사는 오빠네로 가고 난 직후니까 2층 원룸에 세 들어 살고 있을 때다. 너는 혼자 방에서 책을 보고 있다. 헤드폰을 끼고 있어서 유리 창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갑작스럽게 짧은머리가 나타나 머리채를 잡는다. 헉, 기겁했다. 얼굴을 본 것은 그 순간뿐이다. 그는 반창고로 너의 눈과 입이 막고 전화선으로 손을 묶는다. 살이 패일 듯 죄여온다. 죽기 싫으면 움직이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
급히 서랍을 뒤지는 소리가 들린다. 시간이 길게 늘어져서 영영 흐름을 잃어버린 것만 같다. 너는 구석에서 떨고 있다. 차가운 손이 몸에 닿는다. 옷이 부욱 찢겨 나간다. 그가 네 몸 안에 성기를 밀어 넣는다. 개새끼, 썅놈, 씨발 자식, 벼락 맞아 뒈질…. 열아홉인 너는 더 이상 욕이 생각나지 않는다.
뇌리에서 기억의 거품이 가라앉는다. 더러운 기분이 라면그릇에 달라붙은 기름 찌꺼기처럼 엉겨있다. 너는 아직 바다를 본다. 오늘 바다는 새파랗다. 텅 빈 아침 해변에 햇살이 퍼지자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너는 흔들의자에 기댄 몸을 흔든다. 네 안에 있던 열아홉이 물러가고, 서른넷의 여자가 주차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갑자기 너는 눈을 빛낸다. 창 밖에서 레옹을 본 것이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찾아 입에 문다. 너의 뿔이 그가 걸어오는 방향으로 슬며시 일어선다.
발소리가 문 앞에서 멎는다. 레옹이 밖에 와 있다. 네가 문구멍에 눈을 들이대고 살펴 본 결과다. 그는 세 번 차임벨을 누른다. 그 소리를 듣고 언니가 방에서 나온다. 푸시시한 모습이다. 너는 손가락으로, 쉿, 입을 막으며 언니의 행동을 제지한다.
문을 열지마, 레옹이야.
언니가 주춤주춤 뒷걸음질한다.
옆집 사람들은 그의 출현을 별로 의식하지 않는 것 같다. 그가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에서, 계단에서, 문 앞에서 너를 막고 실랑이를 벌이기도 하는데 그리 위협 줄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는 모양이다. 사실 레옹이 너의 기분에 맞지 않았을 뿐이지, 뭘 잘못한 건 없다. 영화 속의 레옹은 전문킬러답게 소음기를 부착한 총으로 사람을 죽였으니 죄인이지만 이 멍청한 레옹은 사랑할 때조차 주님에 대한 응답만 하냥 기다리고 있는 바보다.
너는 레옹을 한 시간쯤 기다리게 하고 문을 연다. 무표정하던 그의 얼굴이 밝게 펴진다.
좋아요. 좋단 말이에요. 지금 당장 나갈 게요. 그렇게 원한다면 당신과 잠인들 못자겠어요? 하지만 약속해야 해요. 다시는 치사하게 날 따라다니지 않는다는 거. 보장할 수 있겠어요?
이건 말을 한 게 아니고 오물을 쏟은 거 같다. 지치다 못해 너의 입에서 그런 말까지 나온 것이다. 그 말에 레옹이 씨익 웃는다. 그의 입술 언저리가 잠깐 벌어졌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모습을 정확히 본 것 같다.
제가 원하는 건 마음인데……어쨌거나 우린 지금처럼 대화도 할 수 있군요? 고마워요.
너는 닫힌 문 사이로 밀어 넣는 그의 말을 듣고 방으로 들어간다. 언니가 방바닥에 앉아 걸레질을 하고 있다. 갔니? 언니는 눈짓으로 너에게 묻는다. 아니. 너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옷장을 연다. 양피로 된 반코트를 꺼내 입어본다. 너무 무거울 것 같다. 다시 가벼운 오리털 자켓을 집어든다.
나 잠깐 나갔다 올께. 아무래도 끝을 봐야 할 것 같아.
플라스틱 옷걸이가 옷장을 튕겨 나와 방바닥에 툭, 떨어진다. 귀퉁이가 깨져 두 조각이 나버린다. 불길한 조짐처럼 느껴진다. 사내와의 감정싸움은 끌어봤자 얻을 게 없다. 당당하게 맞서서 도대체 무엇을 얻고 싶은 건가 묻고 싶다. 수틀리면 사내를 바닷물에 처박아 버릴까, 생각해본다. 알 수 없는 살기가 시퍼렇게 날刃을 세운다. 그를 묶어버릴 자신이 있다. 열아홉의 너는 짧은머리에게 어처구니없이 당했지만 오늘은 레옹이 당할 차례다.
너는 화장기도 없이 외출준비를 끝내고 집을 나온다. 언니가 엘리베이터 입구까지 따라 나온다. 어서 들어가. 별 일 없을 거야. 언니에게 수신호를 보낸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의 문이 언니와 너의 시선을 가로막는다. 언니를 복도에 남겨둔 채 1층으로 내려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너는 화난 사람처럼 현관을 빠져 나와 해변 쪽으로 급히 걸어간다. 레옹이 종종걸음으로 너를 따라오고 있다.
너는 그의 교회 쪽으로 걸어간다. 교회 마당에서라면 그가 허튼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사방을 둘러본다. 그러나 교회는 보이지 않는다.
교회가 왜 없어졌지요?
아마 그 자리에 모텔을 지을 겁니다. 위치가 좋아 탐내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네?
너는 짧게 되물었지만 들을 말이 없다. 모텔 주인에게 교회를 팔아치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골재를 실은 트럭이 들어오고 있다. 너는 포크레인 한 대가 거대한 팔을 늘어뜨린 곳을 지나 바닷가로 걸음을 옮긴다. 그가 교회를 그만 두었다는 말을 이해 할 것 같다. 걸음을 멈추고 바위 위에 앉아 절벽을 내려다본다. 레옹은 곁에 서 있다.
바람이 사방에서 웅웅거린다. 너는 큰소리로 묻는다.
그래서 교회를 그만 두게 된 거로군요?
다른 곳에 큰 성전을 짓는다고 교회 측은 신이 났지만 난 따라가지 않았지요. 진즉부터 그 자리에 모텔 들어선다는 소문이 있었거든요. 난 허름한 개척교회가 좋아요. 그 교회는 없어지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땅 위에 있는 게 아니라 내 마음 안에 있는 거니까.
너의 입술에 가벼운 웃음기가 맴돈다. 마음 안에 있는 교회? 그 말이 맘에 쏙 든다.
댁은 첨에 가짜를 들고 다니는 외판원처럼 보였죠. 지금 보니 바늘구멍의 넓이를 아는군요. 담배 있어요?
없는데, 나중에 한번 배워 볼까 봐요.
바람이 너의 머리카락을 풀풀 날린다. 문득 그에게 고개를 돌린다. 나이든 사람 같기도, 어린 사람 같기도 한 그는 카키색 빵모자 속에 나이를 감추고 있다. 네 안에 있던 초식동물이 뿔을 세우며 일어선다. 그에게 치명상을 입혀버리고 싶다.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도록 말이다.
말해 봐요. 뭐가 자신 있는지.
난 요술쟁이처럼 뭐든 할 수 있죠. 집도 지을 줄 알고 새나 물고기, 나무도 잘 키울 수도 있어요. 컴퓨터나 시한폭탄을 만들 수는 없지만 필요하다면 만들어 드리죠.
……
너는 레옹이 만만하지 않음을 느낀다. 마구 돌진하는 것으로는 그의 작은 체구를 받아 넘겨버리기가 쉬울 것 같지 않다. 너는 침착하기로 작정하고 네 안의 위험한 동물을 진정시킨다.
난 댁을 몰라요. 모르지만 말을 들어보니 그냥 친구처럼 지낼 수 있을 거 같긴 하네요. 무례하게 굴지만 않는다면 앞으론 받아주죠. 그리고 얼마 전 일, 사과할 게요. 얼굴 때려서 정말 미안해요. 악수할래요? 내 이름은 수진이예요, 박수진.
박수진……그가 너의 이름을 입안에서 궁굴리고 있는 사이, 공사장 쪽에서 노란 헬멧을 쓴 사람이 다가온다. 노란 헬멧은 그를 보고 손을 흔든다. 그는 두 손을 움직여 헬멧에게 어떤 신호를 보낸다. 헬멧이 손가락으로 응답하더니 바로 돌아선다.
수화했어요? 뭐라고 한 거예요?
방해하지 말라고 했어요. 제가 아는 포크레인 기사죠. 어찌나 남 일에 관심 많은지.
너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며 오던 길을 돌아온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까닭에 장사하는 사람들이 서둘러 비치파라솔을 걷고 있다. 파도 높이가 키를 넘을 것 같다.
횟집 앞 노천에서 바다를 본다. 조금 먼 거리지만 낯익은 그림이 눈에 뜨인다. 노란 파커를 입은 여자의 단발머리가 한 쪽 방향으로 쓸려 있다. 그녀는 파도 앞에서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체스의 말처럼 모래언덕에 붙박혀 있는 중이다.
너는 레옹에게 언니가 이혼한 까닭을 말하려 하다가 그만둔다. 언니는 다른 사람과 말을 안 해요. 사고로 기억을 거의 잃었구요. 잘못하면, 외국으로 달아나 버린 아버지와 오빠 가족을 모두 꺼내 놓아야 하기 때문에 긴 말은 아낀다.
코뿔소 본 적 있어요?
네.
그놈을 무지 좋아해요. 나중에 아프리카로 가서 그놈 한 마리 잡아줄래요? 여비와 마취 총은 제가 준비해 드리겠어요.
노천의 플라스틱의자에 앉아 그가 소리 내어 웃는다. 무엇이 레옹을 즐겁게 하는지 모르겠다. 처음 보는 모습이다. 이처럼 즐거워하는 그가 누구인지 궁금하다. 그러나 그의 나이와 직업을 너는 묻지 않는다. 그가 말하지 않는 것은 알고 싶지도 않다. 그가 뭘 하든 몇 살이든 중요하지 않으니까. 중요한 것은 너를 대하는 그의 태도와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그의 생각이다.
잠깐 한눈을 팔고 있는 사이에 바닷가의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 너는 잔뜩 긴장하며 고개를 돌린다. 빠른 속도로 해변을 훑는다. 그도 너의 시선을 따라 뭔가를 찾는다. 누군가가 넘실거리는 파도를 향해 걷고 있다. 저건 언니야. 그 말과 함께 벌떡 일어서는 순간, 그가 바람같이 달려간다. 파도가 일어서는 곳 바로 앞에서 레옹이 언니의 허리를 휘어 감는다. 무르팍이 잠길 만한 곳이지만 그가 아녔으면 금세 큰 물살에 휩싸였으리라.
너는 언니와 레옹을 양쪽에 두고 모래톱을 걷고 있다. 모두 입에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물었다. 바람이 상쾌하다. 여기 어딘가에서 게를 만날 수 있으면 좋겠어. 너는 중얼거린다. 지금 너는 위험한 환상에 젖어 옆으로 걷는 연습을 하고 있는 중이다. (끝)
*계간지 <문학마당>에 수록
첫댓글 선생님...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