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추억하면
난 아버지에게 참 많은 빚을 졌다. 불효의 빚과 고통과 좌절, 슬픔과 분노의 빚을 안겨드렸다. 어느 자식인들 아버지께 그런 빚을 지지 않을 사람이 없겠지만 유독 나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죄인이 된다.
난 아버지 사후에야 아버지를 모델로 하여 ‘식민지 소년’이라는 소설을 쓰고, 아버지께서 쓰신 자서전 ‘허물은 많아도’를 완성시켜 출간했다.
아버지는 나중에 폐암말기가 되어 글 쓸 힘이 없어서 침대에 누워 구두로 말씀하시는 걸 나는 컴퓨터로 받아 적었다. 오늘 아버지의 자서전에 담겨져 있는 선명한 장면 몇 가지를 회상해본다.
#1
나는 9살에 울주군 두서국민학교에 입학하였다. 집에서 오리가 약간 넘는 거리다. 그 때는 양복 입은 학생이 거의 없고 남학생은 한복 바지저고리, 여학생은 치마저고리를 입고 다녔다. 내 기억으로는 남학생은 약 40명, 여학생은 약 9명 정도라고 생각한다. 한복바지는 내뿐만 아니라 헐끈(허리띠)을 매면 항상 주말(바지)이 내려온다. 외관상 보기 싫다. 1학년 때인데 수업 중 담임선생님이 김덕경 앞으로 나오라고 하셨다. 무슨 일인가 싶어 나갔더니 선생님이 너는 항상 주말을 까고 다닌다. 바지를 벗으라고 하신다. 선생님이 벗으라고 하니 안 벗을 수 없다. 요즈음 같으면 빤쓰(팬티)를 입고 다니지만 그 때는 빤쓰를 입고 다니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바지를 벗으니 고추가 나온다. 여학생은 고개를 숙이고, 나는 부끄러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1시간 내내 벌을 세웠는데, 그 부끄러움은 아직까지 잊을 수 없다.
#2
내가 처음으로 술 먹었을 때 14살이었을 것이다. 농고에 다닐 때 일꾼들이 나락 벨 때 농주를 마실 때 조금씩 얻어먹었다. 술을 먹으면 속이 시원했다. 농고 때 담배도 피웠다. 봉초를 구해다 담뱃대에다 눌러 넣어 피우고 파이프 담배를 피우기도 했다. 봉초를 신문지, 노트종이로 말아가 담배를 한 대씩 피우기도 했다. 농업 중학생 거지반이 다 술 담배 했다. 어떤 놈은 왜놈들에게 지독하게 아부를 하는데, 저 아부지 왔는데도 저거 내 아부지 아이다고 통역을 세워서 대화한 놈도 있었다. 자기 아버지가 한국인이 아닌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을 하기도 했다. 나의 창씨개명 가네가와 도쿠케이이지. 내 별명이 독케이(시계)인데 정말 평생을 시계처럼 정확하게 살려고 노력했지.
#3
나는 고등학교 때 울산지역 학생연맹 조직부장이었다. 당시 좌익 빨갱이는 득시글득시글하고 우익은 할 사람이 없었다. 나는 크리스찬이니까 할 사람이 없어 자연히 그렇게 학련 조직부장이 된 것이다. 교실에서는 서로 좌우익이 대결했는데 좌익의 힘이 훨씬 세었다. 당시 농고 회장은 조○○였고 연세대에 들어갔는데 지금 일중의 체육선생 아버지이다. 좌익단체인 학생동맹 책임자인 김XX은 월북해서 높은 벼슬을 하다 6.25때 서울특별시장이 되었는데 우리 동기 중에 한 명이 찾아가서 ‘누구를 좀 살려 달라.’고 하니까 ‘부자 새끼 놈, 부르조아!’하며 문전박대를 했다고 한다.
#4
내가 악양중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였다. 나는 앞에서 니야카(리어카)를 끌고 뒤에서 네 엄마가 밀고, 학교의 하수구 물구덩이를 고쳤다. 비만 오면 운동장에 물이 솟아 올라오고, 화장실에도 똥물이 넘쳤다. 냄새는 천지를 진동하지럴, 용원에게 똥을 치워라고 하면 안 치우고, 서무과장은 지금 치우면 안 됨더, 농번기이기 때문에 일군들이 없다라고 말한다. 대책이라도 강구해야 될 것 아이가. 그럼 우짜노? 내가 할 수 밖에 없다. 나는 똥바가치를 들고 똥을 펐다. 이럴 수가 있는가. 비만 오면 나는 갑바(우의)를 입고 똥통을 메고 나가 똥을 푸곤 했다.
그렇게 평생을 검소하고 겸손하게 살았던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 없는 살림에 불우학생을 도와주라며 3억원의 장학금을 기부하고 돌아가셨다. 자서전의 서문에 쓴 말씀이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나의 지난날을 회상하여 잘 살지 못한 것은 반성하고 조금이라도 잘 한 것이 있다면 남은 여생 더욱 신장시켜 나가고자 한다. 이 보잘것없는 나의 글이 여러분들의 삶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런 다행이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