愚叟金公行狀 a_346_528b
公諱元龍字乃亮。晩年自號愚氓。故人稱愚叟。金氏其先靈光人。工曹典書諱台用顯麗季。諡文敬。生典翰諱時。仕我朝。至孫㻶。早歷華顯。出宣風化。入佐經邦。莊陵末。見幾南遯。遵海而居長興。再傳而塊文捷三場。名重三司。三傳而光遠生進習讀。早從靜菴先生學。己卯坐謫。學者稱月峯先生。享汭陽院。後贈天官卿。生諱龜年。文章兼行義。調金吾郞。金吾二孫。奉事汝健。贊成汝重。壬辰共擧義旅。奉事生諱哲。光陽縣監。有去思。寔公六世。高祖諱沁贈參判。曾祖諱爾昌同中樞。祖諱重鳳著孝行。考諱尙鐸有隱德。妣仁川李氏父宗雄。以純祖丁卯三月干支。擧公於長興之金谷第。天資質而無華。確而不撓。貧無以爲養。躬幹家務。便身畢給。而不失其志養。及足以自濟。則推以至於族戚竆交。周恤有常度。昏葬不令失時。而薄於自奉。衣取蔽軆。食不兼味。文學行義之士。極力延致。爲之設饌。自族黨知舊。雖分疏家後進。才德有可敎者。必爲之庤粮而成就之。家少輩凡侈麗之物。禁不得近。魚肉不許更益。有族稺佩繡囊。公厲聲曰必長侈習。卽令解去。自是稺輩不敢以綺麗前。不置博奕之具曰。少輩玩弄。易於喪志。尤疎絶巫媼異色曰。婦人柔愞。易於蠱惑。其飭於躬而肅於家。類如此。初以家聲不振。屢赴公車。而未嘗爲必得計。故輒見屈。遂絶意進取。而爲世道憂歎。不以身在草茅而或相忘。嘗致書於吾先子。論還穀之弊。先子欣然答之曰。兄於茅屋。不忘蒼生之憂。嘗朝廷新改貨幣。刻日用行。京城以外。誅竄相屬。而派遣京官。糾察外方有異議。公方在蕭寺。京官秘蹤適至。公心知之。極言改幣之殃民。且曰亂萌當兆於此。身爲王官者。不思所以匡救。而反順旨容悅。以戮無辜乎。在傍者皆爲公危之。而卒無事。每與人談往籍。說到殉義之士直言之臣。則便慷慨喟然曰。納諫不諱。見危授命。分當如此。彼貪生忘義。亦獨何哉。於重峯先生。偏有慕焉。恒愛讀抗義新編曰。士當以此爲性命。丙寅洋夷陷沁都。公慨然具弓砲蓄財穀。將出而敵愾。賊退而止。蓋其蓄積有素。而得力於新編者爲多。師事吾先子三十年。晩寓玆鄕之水山。爲取近於吾先子也。公每至。必禮貌之。先子亦造款。嘗先子消夏於石屛山齋。公從之。宇萬亦侍焉。見其晨夕間席。自經傳奧義程朱微旨。以及往古史牒我東典故。人品高下事機得失。滂沛說去。公未嘗以學問博古自居。而當時自負淹博者。有未易及焉。始知公深沈善晦。不欲以賢知先人。而遠近質疑之士。至或徑質於公而歸。時公方六旬有四。而淡餐起居如平常。及至七耋。而雖妙少鄕生。必下堂迎送。蓋天性然爾。非有勉強而爲之者也。嘗舊居金谷。置一齋。爲家少及族黨肄業之所。而公命名。西曰觀善。東曰修睦。總而名之曰觀修。自註其傍曰。義孰爲大。賢賢爲大。仁孰爲先。親親爲先。觀善修睦。仁義行矣。仁義行而人道立矣。先子爲之記曰。自世敎衰。民不興行。父兄之所勸於門後生者。不過巧文麗辭。沽寵取姸。今乃亮於齋成之初。留意本實如此。異日天冠山北。有修身正家。卓然不與俗尙俱者。必出於金氏。其見許於平昔者有如此。而漢翼兄弟。文行俱茂。公敎養於家者。不可誣也。平居矜莊持身。端方接人。有善。稱揚之如不及。有不善。雖素分厚。不假色辭。其人能改。亦不念舊。是以鄕里有過。相謂曰。撻楚是甘。乞不使愚叟公知之。至使穿窬之魁。願覿其德。來拜庭下。而禁其徒勿入公室。嗚呼。何修而致然耶。享年七十四。卒於今上庚辰正月二十九日。葬再遷於淳昌月山右嶝坐壬之原。夫人竹山安氏權女。文康公邦俊後。德配君子。三男正鉉,命鉉,泰鉉。一女適奇鼎衍。側室一男晩鉉。二房四孫。漢翼繼長房。次漢穆。欠漢禧繼三房。次漢栗。一女適金榮洙。三房四女適金瑱默,梁圭成。餘幼。晩鉉二男一女亦幼。嗚呼。世級日降。人情大抵喜夸詐而樂弛散。公則淳愨而矜持。慷慨氣義爲乖俗。而同流合汙爲放達。公則軒此而輊彼。忘生徇欲爲性命。而側媚苟悅爲家計。公則視之若浼而言議峻整。以致潛訕而竊譏。不顧也。凡此與世俗智巧之士。不啻相反。則愚氓自號。蓋自嘲而實自寬也。豈所謂其愚不可及者耶。漢翼草事行。以宇萬篤世好。其家德宜詳悉。俾狀焉。
(번역문)
공의 휘 원룡(元龍)이고, 자는 내량(乃亮)이며, 만년에 우맹(愚氓)이라 자호했고, 사람들은 우수(愚叟)라고 했다. 김씨는 선대가 영광인(靈光人)으로 공조전서(工曹典書) 김태용(金台用)이 고려 때 이름이 나 문경공(文敬公)의 시호를 받았다. 그의 아들 전한(典翰)을 지낸 김시(金時)가 조선에서 처음 관직을 갖게 되었고, 김시의 손자 김필(金㻶, 1426∼1470)은 단종(재위 1452∼1455) 때 홍문관 부제학, 이조참판을 지냈으나 계유정란(1453) 후 벼슬을 버리고 장흥에 내려와 숨어살게 되었다. 그의 아들 김괴(金塊)는 1469년 생원시에서 장원, 진사시에서 2등을 한 후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에서 두루 관직을 지냈고, 그의 아들은 홍문관습독관(弘文館習讀官)을 지낸 월봉(月峯) 김광원(金光遠), 그의 아들은 형조좌랑을 지낸 김구년(金龜年), 그의 손자 봉사 김여건(金汝健)。찬성 김여중(金汝重)은 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고, 봉사의 아들로 광양현감을 지낸 김철(金哲)이 5대조가 되며, 고조는 참판을 지낸 김심증(金沁贈), 증조는 동중추를 지낸 김이창(金爾昌), 할아버지는 김중봉(金重鳳), 아버지는 김상탁(金尙鐸), 어머니는 인천이씨(仁川李氏)로 이종웅(李宗雄)의 따님이다.
(생략)
부인 죽산안씨(竹山安氏)는 문강공 안방준(安邦俊)의 후예로, 안권(安權)의 따님이다.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고, 아들은 김정현(金正鉉),김명현(金命鉉),김태현(金泰鉉), 사위는 기정연(奇鼎衍)이고, 측실에서 1남 김만현(金晩鉉)을 두었다. 둘째아들에게서 4형제를 두었는데, 큰손자 김한익(金漢翼)은 큰아들의 후사가 되었고, 둘째손자는 김한목(金漢穆)이고, 셋째손자 김한희(金漢禧)는 셋째아들의 후사를 이었고, 넷째손자는 김한률(金漢栗)이다. 셋째아들은 딸 넷을 두었는데, 김진묵(金瑱默),양규성(梁圭成)에 출가했고, 나머지는 어리다. 측실의 김만현(金晩鉉)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역시 어리다.
첫댓글 원룡족조는 금곡파로 확인됩니다. 여기에서는 태용선조가 벼슬이 공조전서이고 고려조라고 나오고 그의 아들이 조선에서 전한을 하였다고 하였으니 충렬왕이 아닌 것으로 여겨집니다. 중요한 자료입니다.
엄청나게 중요한 자료를 찾으셨습니다.
1) 본 자료
2) 증손 김필 대과방목
3) 옥천부원군 조원길 공 대과방목
4) 공조의 수장이 전서인 시기 - 공민왕조
5) 증좌승지 김항 묘지명
결국 이 모든 것을 종합했을 때,
충렬왕조 때가 아닌,
공민왕조 때 공조전서를 하신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좋은 자료 제공해 주심에 감사합니다.
묘지명에도, 麗季工曹典書文敬公諱台用라고 되어 있어, 충렬왕조가 아님이 분명합니다.
결국 보당 선조님으로부터 태용할아버님까지 계신분들을 실전기로 보아야 하고,
그 기간은 약 5~7대에 200년 정도 될 것입니다.
김영부(1096년 출생)-김보당(1120년 추정)-김OO(1150년)-김OO(1180년)-김OO(1210년)-김OO(1240년)-김OO(1270년)-김OO(1295년 전후)-김태용(1320~1330년 추정)
이렇게 하나씩 찾다보면 결국 실전기에 대한 파악도 다 되고,
김심언 시조님으로부터 현재 살고 있는 우리들까지 모든 계대가 밝혀질 수 있습니다.
희망이 조금씩 보입니다.
아직은 충렬왕조 공조전서 김태용입니다.
하지만 보당조 이후 충렬왕조에 조상님이 벼슬을 시작하시고 태용조께서 공조전서를 하셨을 수도 있겠기에 충렬왕조 제 3의 인물이 궁금하여집니다.
옥천부원군 조원길 공의 장인이 누구이냐에 대해서 논란이 많습니다.
1) 김원
2) 김태용
3) 김시
시기적으로 봐서 김시 할아버님은 제외 됩니다.
그렇다면, 김태용 할아버님과 지금까지 알지 못하는 김원 공에 대해서 검토를 해야 합니다.
현재로서는 김원 공의 자료가 없습니다.
무신 정권 종식과 그 때부터 정계에 진출하신 것으로 보면,
결국 미관말직이나마 충렬왕조에 관직을 하셨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로부터 발판이 되어, 공민왕조 때에 태용할아버님께서 공조전서를 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충렬왕조가 아닌 공민왕조에 대해서 파종회 차원에서 논의가 필요해 보입니다.
그냥 속 시원이 영태리 선영에 대해서 개장을 했으면 합니다.
지금으로서는 유일한 답이 개장인 것 같습니다.
모든 정황이나, 역사적인 사료들로 봤을 때, 공민왕조 공조전서 김태용 할아버님이시고,
다만, 충렬왕조 공조전서로 기록된 것은 60갑자 계산시 한 갑자를 잘못 계산하셔서 오류가 난 것으로 보입니다.
김필 할아버님의 대과급제년도도 변경된 것으로 보면, 초창기에 오류가 존재하였습니다.
그 중 하나가 충렬왕조 공조전서라는 것입니다.
麗季 工曹全書라는 내용이 자주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충렬왕조를 麗季로 변경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