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쟝켈레1959앙리베16L05A
앙리 벩송(Henri Bergson, 1959)
쟝겔레비치(Vladimir Jankélévitch, 1903-1985), PUF, 증보판 1959(초 1931), P. 300.
[차례] 300
서문 Avant-Propre 1
제1장 유기적 총체성 Totalités organiques 5
제2장 자유 Liberté 28
제3장 영혼과 신체 L'âme et le corps 80
제4장 생명 La vie 132
제5장 영웅주의와 성성 L'héroïsme et la sainteté 182
제6장 개념들의 무와 정신의 충만 Le néant des concepts et le plein de l'esprit 200
제7장 단순성 La simplicité. Et de la joie 229
부록: 벩송과 유대주의 Appenice: Bergson et le judaïsme 255
영혼 전체와 더불어 Avec l'âme tout entière 286
참고문헌 Bibliographie 297
차례 Table des matières 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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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생명 La vie 132
물질과 기억(1898 그 위에서 창조적 진화(1907)은 시론의 결론들을 출발점으로써 선택할 것 같다. 의식은 자기 밖에서 생명의 통일성을 발견하면서, 이원론을 전반적으로 극복하는 데는 더 이상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긴장과 운동의 경험이 이원론의 결과들을 거의 모면했었다. 게다가 이제 정신이 우리에게 광경으로 제공하는 것과 같은 있는, 그 정신은 정복하는 정신이며, 미래로 향해 펼친 진화이다. 따라서 물질과 기억의 분극화하는 분석에 의해 분리되어 있는 과거와 현재-미래는 이것들의 기원적 내재성 안에 있으며, 우주적 생명의 등급[계단]을 더 크게 한다. 꿈의 한가함에서 정신의 탁월성 자체를 발견하게 하는 것이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반대로 꿈이 공간 속에서 우리의 추락을 드러내도다! 따라서 이 생명이 어디에서 작업되지 않은 추억들로 흩어지게 되는 여가를 발견할 것인가? 이 생명은 자기 재능의 명령적인 창조들 안에서 전적으로 흡수된다. 창조라는 요청 자체는 이번에는 생명을 피하기에 불가능한 물질의 앞에다가 놓아 둘 것이다. 물질과 생명의 연관을 연구하기에 앞서서 우리는 다음 두 가지를 제시해만 한다. 1) 생물학적 목적성은 살아있는 유기체들 속에서 지속의 모든 역설(파라독스)들 새롭게 한다는 것이며; 자유와 지적노력의 분석이 우리에게 이 역설들이 나타나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2) 어떻게 본능과 지성의 반명제가 이것을 밝힘에서 기억과 지각의 반명제를, 그리고 지속과 공간의 반명제를 이어가는가 하는 것이다.
제1절 목적성 Finalité 132
작동들의 증빙(la légalisation)은 의지에게 목적을 향하게 하면서, 우리 의지를 결정론에서 빼버리는 것 같다. 이 목적은 우리가 보았듯이 자유로운 행동 그 자체 안에서 실제상으로 선형성되어 있다. 생명에 상대적인 이론들은 이러한 착각의 표시를 지닌다. 이런 이유로 생물학적 생명, 즉 유기체화된 존재들의 생명은 침투하는 작동들 또는 침투하는 직관들의 생명과 같은 동일한 주장들과 동일한 요청들을 드높인다. 마침내 벩송의 변증법이 우리에게 그의 비밀을 전수하기에 앞서서, 내재적으로 살았던 지속에게 가치 있는 그 무엇이 섬유조직들과 기관들 속에서 전개된 지속에게서도 동일하게 가치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제시할 것이 남아있다. 마치 시론의 비판이 결정론과 비결정론이라는 반대되는 두 개의 일관성을 서로 등을 맞대게 한 것처럼, 마찬가지로 창조적 진화도 기계론과 목적론의 전통적 충돌의 그 위에서 세워졌다. 벩송주의는 자유 그 자체인 것처럼 마니교의 둘로 가지치기 작업들과 해결하는 선택지들을 거부하며, 극단적인 독단론들 사이에서 벩송주의를 선택할 것을 촉구할 최후통첩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여기에 목적론의 고발에서 생명에 대한 성실하지 못한 방어자가 있으며, 마치 좀 전에 무차별주의의 반박에서처럼, 벩송의 독창성을 완전히 집중화시킨 승리자가, 즉 자유에 타협하는 승리자가 있다.
급진적 목적론과 기계론의 공통적인 악은, 우리가 생명의 “현재 분사”가 아니라 생명의 “과거 분사들”이라고 불렀던 것을 오직 생각하는데 있다. 여기서 완성된 작동(l'acte accompli)의 착각은 진화된 것(l'évolué)의 착각을 필적할 만한 것으로 삼는다. 특히 목적론은 생명을 초월적 프로그램의 집행에(게다가 목적론이 프로그램으로 생각한 어떤 형식 하에) 예속시키고서, 비결정론은 “인력-원인성”(la causalité-attraction)이란 신화를 희생자로서 삼는다. 목적론은 생명 운동의 예견 불가능성을 허구적 미래 속에 소진시킨다. 이 허구적 미래는 종이 위에 “오리라”(à venir)는 것일 뿐이고, 그리고 심정적으로는 이미 과거화 되어 있다. 만일 진실로 생명이 미리 예정된 도식[계획]을 실현했다면, 생명의 창조적 독창성은 환영[귀신]일 뿐이다. 정신적 사물들의 숙명을 고려하여 보면, 기계적으로 반대되는 인력과 충력은 완전히 동등한 것이 된다. 그러나 바로 이렇게 이해된 목적성은 - 마치 우리의 행동들의 논리처럼 - 사실상 “전미래에서”("au futur antérieur") 진실이며 다시 말하면 사실 그 다음으로(après le fait) 진실이다. 생명적 진화는 이렇게 이루어진다. 즉 각 순간 마다 그 진화는 조화롭게 방향이 정해진 곡선으로 그려졌으며, 그 진화가 그리고 있는 그 순간에(au moment où) 사람들은 아무것도 선판단할 수 없다. 목적성은 이렇게 영속적인 소급 효과처럼 나타난다. 그 소급효과 덕분에, 존재 앞(le devant-être)에 자리잡고 있는 상상작업은 이미 이루어진 것(le tout-fait)으로 이렇게 생성되는 이루어지고 있는 것(le se-faisant)으로 방향을 돌린다. 그리고 그 상상작업은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신학적 본성을 정식화 한다. 따라서 목적론자들의 허구적 진화는, 마치 비결정론자들의 허구적 의욕처럼, 완성된 사실의 거짓 전망에 해당한다. 이 진화는 한 방향을 지적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진화는 그 바탕에서 궤적을 확정한다. 진화는 전적으로 그 사실 후에 있다. 스피노자(Spinoza, 1632-1677)는 이미 목적론자들에 의해 범해진 연대기적인 전도를 고발했다. 윤리학(Éthique, 1677)의 제1부의 유명한 부록에서, 그는 우리에게 완성된 사물들(les choses accomplies, rerum peractatum)의 목적성을 추구하는 인간들을 제시한다. 그는 덧붙였다. Nam id quod revera causa est, ut effectum considerat et contra. Deinde id quod natura prius est, facit posterius. (Car ce qui, en réalité, est cause, elle le considère comme effet, et inversement. Ensuite, ce qui par nature est antérieur, elle le fait postérieur. 왜냐하면, 실제상으로 원인인 것을 이 목적론은 결과로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자연적으로 앞선 것을 목적론은 나중인 것으로 만든다) 이 목적론은 -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 인간적 상상력(figmentum) - 그것의 수단들(moyens)이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원인들을 평가절하다. 그러나 “수단들”을 제기하면서 목적론은 남몰래 종말(la fin)을 제시했는데, 마찬가지로 논증들을 분류하면서 변호사는 남몰래 자신의 고유한 결론을 미리 판단했다. 또는 무로부터 생명의 목적성을 추출해야만 하고, 영구적인 기적을 환기해야만 한다. 이런 이유로, 마치 정당화된 결정의 동기들과 재구성된 예지작업이 출발한 표시들처럼, 수단들은 논리적인 네거리들이며, 총체성들이며, 사람들이 이미 목적을 분간하는 의도들이다. 이 지향성(志向性, cette intentionnalité)은 그 수단들의 존재 근거이다.
따라서 우리는 통찰력있는 사유에 대해 말했던 것이 생물학적 목적성에 적용된다. 목적성은 충력의 과거와 인력의 미래 사이에 중간이다. 이것이 벩송이 원인성과 목적성의 용어들로 차례차례로 표현되는 것으로 나타나게 한 것이 그 이유이다. 때로는 그가 아이머(Theodor Eimer, 1843–1898)의 결정론자의 언어로 말하며, 때로는 그가 신경체계는 유기체화의 종말(la fin)이라는 목적론적 가설을 정식화 한다. 이렇게 창조적 진화의 모호한 몇몇 표현이 설명된다. “... 조화는 앞에서라기보다 오히려 뒤에서 발견될 것이다. 조화는 공통 열망에가 아니라, 충력의 동일성에 기인한다.” “통일성은 배후의 힘(une vis a tergo)으로부터 온다. 통일성은 시초에서 충력(une impulsion)으로써 주어진다. 통일성은 끝에서 인력으로써 제기되지 않는다.” [이 설명은] 충력-인과성의 관점에서 아주 명백한 양보이다. 목적론자들의 은밀한 원인성은, 마치 기계론자들의 선언된 원인성처럼, 발전의 의미화를 앞서서 가치 하락시키다. 원인의 충력과 도약의 충력을 차이 나게 하는 것, 그것은 첫째 경우에서 동인 원리는 그 원리가 새겨 놓은 운동으로부터 구별된 채 있다는 것이고, 이에 비해 둘째 경우에서 생산적 힘은 생산 작업의 작동 자체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기계적인 원인들은 이것들의 효과[결과]를 초월한다 할지라도, 잠재적으로 이 효과들을 함축하고 있다. 이리하여 충격(le choc)은, 그 충격이 일으킨 운동의 모든 특성들을, 속도 안에 그리고 방향 안에 미리 감싸고 있다. 이리하여 변호의 주제에서, 권리상으로도 분석적으로도 그 주제를 정당화할 모든 허구적 행위가 앞서 현존한다. 그러나 유기체적 원인과, 원인이 그것의 근원 또는 씨앗이 되는 된 증가 사이에는, 작동하는 의도작업과 행위 하는 의지 사이에서 만큼이나 지역적[위치적] 분리가 있을 뿐이다. 의지 자체는, 진지하고 충실하며 정념적인 조건에서 보면, 이미 막 태어나는 전투적인 행동이다. 이 무매개성은 용기라고 정의하지 않는가? 더욱이 어떠한 거리도 천재의 열망과 창조적 작업 사이에 끼어들지 못한다. 도식의 초기 구현화 작업은 즉흥 작업이라는 면에서 모든 중간 항을 배제한다. 폭발의 이미지만이 생명적인 것의 내재적인 생산 작업을 그저 그렇게 표현하고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 충격 받은 사물과 연관하여 충격의 외재성은 더 이상 지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중심적 힘은 솟아나는 다발(la gerbe) 그 자체인 것처럼, 수천 개로 발산되게 쏘아올린 것[포탄]처럼 나타난다. 이렇게 생각된 “생명적 도약”은 “역동적 도식”이외 다른 것이 아니며, 형이상학적 등장인물일 것이다. 생명적 도약은 아무 것도 아니다. 쇼펜하우어의 의지(der Wille)가 보편적 설명의 진실한 원리인 반면에, 온도약(l'Elan)은 - 그 단어가 뜻을 이미 지적하지만 - 항상 조화롭고 또 먼저 숙명적으로 결코 결정되지 않은 진화의 어떤 걸음걸이를 단지 묘사한다. 따라서 생명적 도약 과정은 충분히 결정화되어 있어서 원인도 방향도 없이 우연히(au hasard) 진행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미래는 매 발걸음마다 자신의 현재를 혁신하지만, 기계적으로 그것으로부터 결과를 만들지는 않는다. 지속의 매개 작용이 우리에게 이미 익숙해져 있는 그런 특이한 파라독스[역설]에 의해서, 생명의 목적성은 모순적인 두 성질을 자신 속에 통합한다(unir): 사실의 이후에(après le fait) 진화는 매순간에 마치 목적을 향해 방향이 정해진 것처럼 나타난다. 사실에 앞서서(avant le fait) 우리 지성은 다가올 미래 사건에 결코 예상 참여할 수 없다. 벩송이 회고적 목적성에 대해 말할 때, 그가 표현한 것이 이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창조적 진화로서 자유작동은 회고적으로만 결정론을 인정한다고 사람들은 말할 수 있을 터이다. 게다가 진화에게 통일성의 프로그램을 심어놓은 것 같은 이 원초적 “통일”(cette unité, 단위)은 무엇인가? “충력” “배후의 힘”(une vis a tergo), “조화”, 도식, 다시 말하면 역동적인(dynamique) 어떤 것 또는 동인(moteur)인 어떤 것, 이것들은 진화의 모든 변덕스러움에도 자유로운 영역으로 남아있으며, 이 용어들에게 분석적 정식의 전개를 부여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것은 [라이프니츠의] 예정 조화가 아니다. 벩송의 내재적 종합은 여기서 주어 속에 있는 술어들의 함축을 닮지 않는다. 수학자들이 비합리적인 수들에 관하여 역동주의를 이용하는 것처럼, 르 르와가 “한계”의 개념에 의해 사유의 역동주의를 밝힐 것이다. 진화론의 “목표”(le but)는 이러한 의미에서 한계(une limite)가 될 것이다. 그는 전진의 일반적인 걸음걸이를, 즉 더듬거리는 어림셈법들의 내적 수렴을 단순하게 정의한다.
따라서 생명의 연속화 작업은 어디서(Unde)와 어디로(Quo) 사이에서 항상 중간이이며, 또는 쇼펜하우어 말하기 위하여, 항상 그 왜(le Warum, 어째서)로부터 그 무엇 때문에로(le Wozu, 어느 쪽으로) 이르는 길 위에 항상 있다. 만일 우리는 여기서 쇼펜하우어 정식들을 사용한다면, 이것이 무엇일지라도, 벩송이 역사적으로 그에게 힘입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유기체론자와 생명론자의 동일한 주제가 한 사람[전자]에게서 그리고 다른 사람[후자]에게서도 현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거의 물리[자연]-신학적(physico-théologique) 논증을 비판하기 위하여, 오래된 인류학적 목적론의 반박에서 벩송과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였다. 라이프니츠가 말했듯이 목적성은 타동사적 행동이 아니며, 존재들에 관한 초월적 지성의 행동도 아니다. 지성은 생명 앞에 있지 않으며 생명 이후에 있다. 어떠한 추론의 기술도 벌통에 보다, 흰 개미집보다, 수달의 사회보다 외래적으로 먼저 있지 않다. 벩송은 자기편에서 보면 이렇게 말해만 했다. 즉 숙고[회고적 사유]는 일이 벌어진 후에 이루어진 이데올로기의 재구성이다. 진실한 목적성은 내재적(immanente)이며, 온의지(le "Vouloir")를 원천으로 삼고 있다. 오직 온의지 만이 처음이다. 그 온의지에 앞서서, 또한 온의지가 있고 항상 온의지가 있다. 섬유조직으로, 두뇌로, 예지작업으로 발산하는 온의지이지, 예지작업의 계획들을 집행하기 위하여 또 섬유조직들의 필요들에 만족시키기 위하여, 갑자기 태어나는 것과 거리가 멀다. 온의지는 마술 램프에 비교할 수 있다. 이 마술 램프에서 단순한 불꽃이 매우 다양한 이미지들 볼 수 있게 해준다. 이 이미지는 신플라톤주의자의 유출설(l'Emanatisme)을 상기하게 하지 않는가? 그 행실, 유기체 기관들은 - 모든 풍습론(éthologie)과 모든 형태론(la morphologie)은 - 이처럼 의지의 분산 발광(發光)이며, 오직 원초적이고 오직 생산적 발광이다. 그러나 상식은 그것을 이렇게 이해하지 않는다. 그리고 상식은 섭리적인 지혜의 신화를 포기할 때, 상식은 전심전력으로 생명적 행위들을 그 행위들의 다음 원인들에 관련하기를 원한다. 새가 날 것이라는 것은 새가 날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황소가 치받을 거라는 것은 황소가 두 뿔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재적으로 이것은 정반대이다. 황소가 치받기를 원하기 때문에, 황소는 뿔들을 갖는다. 새는 우선 날기를 원했기 때문에, 새는 날개를 가졌고 날았다. 생명적인 바램은 그 구조들과 더불어 구조에 적응된 기능들을 생장한다. 마찬가지로 인간 영혼에서 의지는 행동들의 이데올로기적 정당화와 동시에 행동들에 영감을 준다. 따라서 쇼펜하우어는 “왜냐하면”의 전복에 새로이 우리를 참석하게 한다. 또한 “심정”(le coeur)의 이론가인 파스칼이 주의했던 원인학(l'étiologie)의 전도에도 참석하게 한다. 거기서 상식은 어렵게 포기한다. 왜냐하면 상식은 시각적 원인성의 전형만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상식은 유기체적 원인성에서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 유기체적 원인성은 천재의 영감들에 닮았고, 그 원인성의 원리는 천재와 동등하여, 심층적이고 비가시적이기 될 것이다. 비록 봄벡스가 파르노페를 잡아먹지 않고 또 파르노페는 봄벡스 공격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봄벡스는 자기의 침으로 파르노페를 죽였다. 그러나 파르노페는 봄벡스의 둥지 속에 그 자신의 알들을 낳았고, 그 후손 시대에 봄벡스를 위협할 것이다. 봄벡스는 그것에 대해 전혀 알지(sait) 못하지만, 오히려 봄벡스는 그것을 내밀하고 중점적인 지식으로 안다. 그(봄벡스)가 살아야하고 또 스스로 영속해야 한다는 경향성이 그에게 그러한 지식에 영감을 준다. 이 경향성은 마치 모든 원인 저 넘어 있듯이 모든 목적 저넘어 있다. 이 경향성은 창조적 생명의 오직 진실한 먼저(prius, 미리)이다. 쇼페하우어가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서 직관을 발견할 수 있었던 이 “목적 없는 목적성”이 바로 그게 아닌가? 또 레온 브랑슈비끄에 따르면, 낭만적 의지주의의 용어가 아닌가?
2) 이미 진화되어 있는 진화 이다음에, 생명은 프로그램을 채우는 것과 같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목적성의 판단은 후천적(a posteriori) 판단이다. 그리고 우리는, 심리학에서처럼 생물학에서도 회고적 시각이 유기체화의 역사적 질서 대신에 제작하는 기계적 질서로 대체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 전도가 벩송과 동시에 쇼펜하우어에게도 전념하게 했다. 창조적 진화 제1장의 명쾌하고 깊이 있는 마지막 몇 쪽들과 쇼펜하우어의 놀라운 직관들 사이에서, 아마도 이 접근이 다른 어디에서 보다 더 증명적인 것은 없다. 알베르 띠보데(Albert Thibaudet, 1874-1936)는 아마도 이 만남의 진실한 범위를 느끼지 못했을 지라도, 이런 만남을 알렸던 유일한 작가일 것 같다. 쇼펜하우어의 이 어휘는, 비록 칸트 비판의 관점에 의해 요구되었다고 할지라도, 이 일치의 깊은 의미를 마땅히 우리에게 감추지 않는다.
목적론적 놀람(l'étonnement téléologique)을, 즉 우리 속에 생명의 작품들의 완성을 자극하는 찬탄을, 또 초월적 목적성을 작품들에게 할당하는데 우리를 초대하는 찬탄을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만일 유기체들의 복잡화가 우리에게 경이적인 것으로 보인다면, 그리고 유기체의 기능작업화의 아주 자연적 단순성이 이점에서 당황하게 한다면, 이것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깨닫지 못하고서, 우리가 우리 기계들을 제작하는 것(das Machwerke, 졸렬한 작품)처럼. 유기체들이 조각에 의해 조각으로 제작되었다고 우리가 상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조건이라면, 신적 기술자의 정밀함은 뒤섞은 무엇일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단자론(Monadologie, 1714)의 이 항목을 상기해보자. 그 단자론에서 라이프니츠는 단순하게 기계들인 메카니즘들과 무한한 기계들인 유기체들을 대립시킨다. 만일 자연이 기술자들과 달리 작업하지 않는다면, 그의 작품들이 그자체로 무한히 더 복잡한 것처럼, 그의 기술도 무한히 더 복잡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자연의 조작 작업을 기계 형식의 절차에 환원시켰던, 우리의 예지 작업은 어느 정도 그자체로 인정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지성의 가장 불합리한 정신착란 광기들 중의 한 광기는, 그 광기 자체가 구경거리로 주어지기 위하여 이렇게 사물들 속에서 어떤 복잡한 질서를 창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영속적으로 환각된 환자인데, 그 환자는 우스꽝스런 관조 속에서 자기 고유한 이미지를 잃어버리게 된다. 우리들의 예지작용은 생명을 시작부터 기계화 한다. 그러고 나서 예지작용은, 그 세부의 단순함이 역학에게 결코 나타나지 않음에도, 이 역학이 무한히 세부로 나누어지는 것에 놀라게 된다. 그 예지 작업은 그 자신이 유일한 작자라는 기적에 대해 놀라게 된다. 무한(l'infini)은 사람들이 그 무한을 개념화하는 경우에만 현기증(le vertige)이 주어진다. 이때에 무한은 “무한정”(indéfini)이다. 그런데 개념들로부터 분해하고 환원하는 운동에서 벗어난, 이 무한정은 반대로 단순하게, 현실적으로, 전반적으로 무한이다. 그런데 통속적 착각은, 마치 사물들이 우리 눈 아래서 그러나 반대의 질서에서 현실적으로 분석되는 것처럼, 사물들이 추론적으로 조각들에 의해 제작된다는 편견에 근거한다. 사물들이 구축되었던 종합은 그 질서를 전복하면서, 사물들의 형식을 요소들로 해체하기 위하여 분석이 통과했던 연속적인 단계들을 생산할 것이다. 그러나 살아있는 것들이 스스로에게 제공한 분석은 끝없는 분석이며, 그리고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 그것은 동일한 부분들을 결합했던 기술자의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정밀함인데, 우리들은 그 부분들의 항목을 헛되이 찾으려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 찬탄할 사물을 우리 스스로 창조했다고 보기를 우리는 원하지 않는다.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여기서 판단력 비판에서 빌려온 혼동스런 비교에 의해서 묘사한 착각에 주석을 달았다. 즉 목적론적 놀람은 야생인의 놀람에 닮았다. 그 야생인 앞에 사람들은 맥주병을 땄을 때 그는 거품이 넘쳐나는 것을 보면서, 그가 가장 찬탄할 만한 것은 작은 맥주병에서 이렇게 흘러나오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었고, 사람들이 거품을 거기에 가두어둘 수 있다는 것에 관한 것이다. 이 고백은 모든 회고적인 시각을 왜곡하는 가역성의 편견을 분명하게 배반하고 있었다. 제작작업의 질서는 문학적으로 우리가 완성된 존재들에 관해 실천하는 분석과 동연적(coextensif)일 것이며, 그 질서는 점에 의해 점으로, 부품에 대해 부품으로 자기 질서에 굴복되었으리라. 분석이 다 소비할 수 없는 것으로 폭로되는 바로 거기에서, 제작 작업은 기적적임에 틀림없다. 다른 곳에서 쇼펜하우어가 주석을 달았듯이, 마치 사람들이 곱셈들 중에서 곱셈을 형성하는 두 개의 숫자를 더하기 했을 때, 우리가 모든 9의 곱셈에는 9가들어 있다고 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이 경이로운 일치이다. 만일 경이로운 일치가 명백하게 정신에 의해 조합되었던 것이라고 사람들이 원한다면 말이다. - 이것은 아주 단순하고 자연적인 성질이다. 만일 이 단순하고 자연적인 성질이 십진법 체계의 내부에 어느 정도로 이미 준비되었던 것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원한다면 말이다. 이 성질은 무매개적으로 특이성을 표현한다.
이 착각의 재난 같은 효과들은, 우리가 믿듯이, [생명체의] 유기체성(l'organicité)의 영역 저넘어로 확장되고 있다. 쇼펜하우어 그 자신은 예를 들어 정신의 모든 진행방식들 속에 그의 영속적인 간섭을 우리에게 들여다보게 한다. 목적론적 놀람(l'étonnement téléologique, teleologische Erstaunen)은 경탄(l'émerveillement)에 비교할 수 있다. 이 경탄이란 구텐베르크의 동시대인들이, 놀랄 만큼 규칙적인 특성들은 아마도 복사자의 붓에 기인한다고 생각하면서, 초기에 인쇄된 책을 보고서 파악될 수 있는 경탄일 수 있다. 그리고 사실상 신중한 의식적 검토는, 아주 새로운 모든 발명이 영감을 일으킨 놀람에서, 우리에게 지적인 허구의 출현을 폭로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전선 없는 전보, 전화, 텔레비전, 원격조정(le téléguidage)을 찬탄할 때, 우리가 통속적 기예(l'art)와 규범의 기술의 지구 중심적 범주들 안에서 이것들을 상상하는 데 어느 정도 우리자신 스스로 놀라게 된다. 그런데 기예와 기술은 접촉을 통해서 행동들만을 인식한다. 만일 일반적으로 전기, 자기, 핵분열 등의 기적들이 이점에서 상상을 공포에 빠지게 만든다면, 그것은 연속성과 동질성을 열망하는 우리의 근면한 인습들은 제작 작업의 인위적 매개물들로부터 현상들을 끈질기게 재구축하는 데 정신을 초대한다. 빛의 속도, 전자들의 미립자, 시리우스 성단의 먼거리 등은, 걸작들(chefs-d'oeuvre)(단어의 교과서적 의미에서)이 될 수 있을 만큼이나, 우리의 경험적 규모들에 관해 측정할 수 있는 굉장한 기록들도, 추론적 조작들에 비교할 수 있는 선형성들도 될 수 있을 것이다. 눈을 속인 정신은, 여러[수억] 광년(光年)들과 성단들을 상상하면서 이처럼 놀라게 하기를 좋아한다. 이는 마치 정신이 무와 죽음을 사유하면서 어둠으로 빠져들기를 좋아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리학적이고 천문학적 자료들의 거대함 자체는 정신에게 있어서 추상작업 요청을 재현해야 할 것이고, 그리고 자연의 무한을 무매개적이고 순간적인 아주 단순한 것처럼 생각하기에 익숙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물질이 “4차원”의 광경을 우리에게 제공하면서, 결국에는 거의 생명처럼, (요소들로부터 출발하는, part des éléments, ἀπό στοιχεῖων) 사유의 타성과 단절을 요구 할 것이다. 사유 속에는 비합리적 인 것이 전혀 없다. 이기주의적 찬탄에서 바보같이 인쇄물을 수고본들에, 생명있는 것들을 “걸작들”에, 하늘의 깊이를 우리 산업의 소립자에 비교하는 대신에, 파스칼이 말했듯이, 비합리가 없는 사유는 심성에 의해 무한을 이해할 것이고, 그리고 직접적으로 사물들의 중심에 안착될 것이다. 다른 모든 규모를 단숨에 채택하는 자에게서, 경험을 초월하고 초자연적인 모든 다른 질서를 단숨에 생각하는 자에게서, 어리석은 경악(l'ébahissement)은 의심할 바 없이 경탄(l'émerveillement)에게 또 숭배(la vénération)에게 자리를 내줄 것이다.
만일 세계가 현존해야 한다면, 하물며(a fortiori) 그 세계는 생존할(viable) 수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가장 많은 것일 수 있는 것은 가장 적을 수도 있다고 ...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생명이 어떤 불가사의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하물며 생명은 그자체이며, 지성을 위한 불가사의를 그 자신의 근본적 효과성 속에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과거에]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하물며 [현재로] 마땅히 자연적이기도 하도다! 예를 들어, 그것은 모든 개념적인 이중성의 덕분인데, 이 종(種)들의 무분별한 낭비는 우리를 분노하게 하고, 가끔은 우리를 아주 깊이 놀라게 한다. 걱정 없는 풍부함 덕분에 자연은 동물들에게 파괴작업을 맡기는 데, 이 풍부함은 우리에게는 침투할 수 없게 남아있다. 왜냐하면, 우리도 모르게 우리 스스로 생명체를 값진 걸작처럼 간주하는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고, 또 만일 그것이 우리 손으로 만든 작업이라면, 그러한 보물들이 사라지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 잔인한 짓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상상으로 자연과 생명을 징역형으로 단죄했던, 우리는 자연적 악(le mal physique)의 어둠[암흑]을 마음대로 두껍게 한다. 목적론과 인간중심주의론의 과도함 그 자체는, 우연(le Hasard) 앞에서 우리의 목적론적 단념을, 자연의 말없는 무차별을 위한 우리의 공포를 훨씬 더 절망적이 되게 했다. 그러나 한탄들 그 자체는 근본적으로 또한 목적론적이다. 우주는 적대적이 아니며, 그리고 생명체들은 값비싼 것도 아니다. 자연은 토막토막으로 만들어진 유기체들을 힘들여서 제작하지 않았다. 그리고 유기체를 파괴하는 것은 또한 유기체를 구축하는 것만큼이나 자연의 관대함에 거의 댓가를 치르지 않는다. 따라서 생물학적 종들의 소멸은, 그것들의 생산에서와 마찬가지로, 걸작들과 가치들의 질서와는 다른 질서이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듯이 그 소멸은 지성의 수술용 칼을 회피한다. 그 소멸은 무한과 무매개의 영역에 속한다. 이처럼 자연 속에서 회고적 도식들의 관할권을 거부하는 것은 생명적인 것이다. 물체들이 제공하는, 게다가 거의 근사치 같은, 분석을 전복하면서, 우리가 생명성의 역사를 얻을 것이라고 믿기를 우리는 그만 두어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영속적으로 그 역사의 동시대인으로 남기를 체념해야 한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것이 수고스럽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인식이 가능한 것은 내가 사실 이후에(postérieur au fait)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의 비극은 이 점에 있다. 즉 말하자면 대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우리에게 내밀하고 중심적인 이해를 방해하고 있다. 해부학은 우리에게 눈에 관해 너무나 많은 것을 가르쳐주어서, 시각에 대한 우리의 관념이 제작적 도식에 시달리는 것처럼 있을 수 없다. 사방에서부터, 완수된 사물들과 “편견에 사로잡힌” 사물들이 정신을 감싸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온설명(l'Explication)의 덕목 자체를 거부한다면, 어떻게 이 환영[귀신]을 쫓아 낼 것인가?
따라서 생명의 목적성은, 운동처럼 또 자유처럼, 유기체화의 작동 자체인 구심력의 작동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이 유일한 작동은, 무한 속에서 단순함을 단 한 번으로 드러내는 결단(décisif)이다. 기요(Guyau, 1854-1888)가 자신의 에피쿠로스의 도덕론의 예언적 몇 쪽에서 말하듯이, “생명을 창조하기 위하여”, “자연은 신체의 모든 부분들을 모으고 그것들을 서로 용접하면서 인위적으로 진행하지 않는다.” 이처럼 벩송이 매우 유창한 정식들로 특징화하였던 유기체성(l'organicité, 기관 활동성)의 어리둥절한 역설(파라독스)이 밝혀질 것이다. 알다시피 형식의 복잡성과 기능 작업의 단순성 사이의 대조가 있는데, 그것의 깊은 의미는 유기체론자들의 위대한 철학들을, 즉 라이프니츠의 철학, 벩송의 철학,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벗어나지 못한다. 눈의 구조는 무한히 복잡하며, 진실로 들어보지 못한 바의 것, 그것은 눈이란 시각이 작동하기 위하여 열린다고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아킬레스가 제논의 궤변들의 분봉들을 뛰어넘기 위하여 달려 나가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과 같다. 재능이라는 어떠한 기적도 없다. 삶의 해결은 보다 순진하고 보다 단순하다. 단순하다란, 시론의 비판이 고발한 추상적 단순성이 아니라, 생명성의 특권이라는 밀도 있고 구체적인 단순성이라는 것이다. 지성은 관점(la vision)을 보는데(voyer, 타동사) 비해, 눈은 자동사적으로 본다(voyer 자동사로 쓰인다). 말하자면 한편으로 지성과 다른 한편으로 눈의 해부학과 생리학 사이에는, 대상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매개로 하는 자연적 거리가 있다. 반면에 눈과 보는 작동 사이에서는 아무 것도 없으며, 여기서 관점(la vision)은 단지 이어감(연장)일 뿐이고, 마치 시각적 장치의 활짝 열림과 같은 것이 있을 뿐이다. 오스발트 스펭글러(Oswald Spengler, 1880-1936)는 자신의 서양의 몰락(Le Déclin de l'Occident (Der Untergang des Abendlandes)(I, 1918, II 1922)의 모험적인 글에서, 눈동자 없는 눈을 가진 그리스 흉상과 삶에 의한 시선(le regard)으로 빛나는 근대 초상화를 비교하였다. 우리는 과학은 고독한 눈을, 시선 없고 정신적 공간 없는 눈을 인식한다고, 그러나 생명만이 의미와 정신적 전망을 부여한다고, 기꺼이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생명은 생명과 공감하며, 행동은 행동과 공감하기 때문이다.
자연은 해부학을 알지 못하지만 유기체들을 실현한다. 그것은 마치 인쇄공은 식자공이 본 걸작의 필적을 보지 않고서도 단숨에 실행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만일 더 좋은 예가 된다면, 그것은 마치 눈[雪]의 결정체가, 티형자와 콤파스를 정교하게 사용하지 않고도, 단번에 자기 모습의 완전한 대칭을 획득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단순성은 생명적인 사물들 속에서 진실로 본질적이고 원초적이다. 여기서 우리의 생각에 맞게 앙리 벩송의 가장 아름다운 정식들 중의 하나를 다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단순성만이 사물 속에 있으며, 복잡성이 오히려 우리가 사물에 관해 파악하는 더듬기[모색]의 관점들 속에 있다고 말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적노력은 그 운동 속에서 단순하며, 이 운동이 간청하는 이미지들 속에서 무한히 복잡하다고 말할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지오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의 힘차고 감동적인 언어로 말할 때, 쇼펜하우어가 표현한 것도 또한 그와 같다. 브루노의 언어: Ars tractat materiam alienam, natura materiam propriam. Ars circa materiam est; natura interior materiae (기예는 외부 물질적인 것을 다루고, 자연은 자기 자신을 다룬다. 기예는 물질 바깥에 있고, 자연은 물질 속에 있다.) 이 정식의 간결한 과감함은 소요학파의 학술어로 잘못 감추어진다. 기예는 물질의 주위에 있다. - 플로티노스의 정식들을 다시 받아들이면서 벩송이 유창하게 말할 것인데, 지성은 생명 주위를 돈다. 왜냐하면 지성은 완곡한 표현법과 에두른 표현법의 달인이기 때문이다. 오직 생명 도약만이 물체의 자체성(l'ipséité) 속에서 침투하고 또 정착하게 된다. 그러한 것은, 우리의 비천한 산업이, 그 산업의 “걸작”을 완수하기 위하여, 이 폭력에 대해 내재적으로 저항하는 물질에게 강요해야 한다고 이렇게 말하고자 원한 것이다. 반대로 유기체화 작업에서, 어느 불투명한 환경도 작품과 노동자 사이에 더 이상 개입하지 못한다. 또는 오히려 생명의 작업(l'opératrion)[l'acte, 작동]은 작품자체와 하나를 이룬다. 여기서 질료와 형상의 구별은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한다. 왜냐하면 질료는 형상으로 완전히 포화되어 있기 때문이고, 마찬가지로 형상은 그것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또한 완전히 육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가 말하기를 유기체의 질료는 어느 정도로는 그것의 형상의 단순한 가시성(le simple visibilité de sa forme, die blosse Sichtbarkeit sener Form)일 뿐, 즉 구현되어 볼 수 있게 된 형상일 뿐이다. 그리고 서로 상호적으로 유기체의 형상은 그것의 질료의 꿈일 뿐, 즉 생명의 중심으로부터 유출된 꿈일 뿐이다. 그것은 벩송이 잘 보았던 것인데, 그는 존재들[존재자들]의 모든 위계, 즉 식물에서부터 고등동물에게까지 관통하여, “형상”과 “기능”의 점점 더 내밀한 상호 침투에 우리를 참석하게 한다. 기계에서 기능과 질료는 말하자면 공감 없이 동거한다. 유기체에서 기능은 구조의 내밀하고 필연적인 연속이다. 따라서 기계론은 기능하고(fonctionner) 유기체는 작업한다(opérer)고 말해야 한다. 여기서부터 정신적 경쾌함이, 생명의 모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그리고 생명을 모방하는 작품들이 나온다. 괴테(Goethe, 1749-1832)의 말에 따르면, 유기체들만이 마치“필연적”이고 “자연적”인 것처럼, 진실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기능의 표현할 수 없는 단순성과 물질의 무한한 복잡성 사이에서 타협의 완전한 성공을 재현하기 때문이다. 자동인형들의 만화 같은 무거움은 물질과 기능 사이에 암묵적인 불화의 감정으로부터, 이 양자의 만남이 “고의적 사실”인 것이라는 감정으로부터, 곧바로 온다. 장식 장치는 장식된 사물들로 분리되어 있고, 그 장치는 인위적 작품들의 기계적 뻣뻣함을 심하게 또 잔인하게 강조한 것이다. 반대로 생명의 작품들 속에는 “고의”란 전혀 없다. 즉 장식장치도 장식된 사물도 없다. 생명이 실현한 역설적 조합들은 항상 유일한 가능성이다. 왜냐하면 이 가능성들의 질료는 직접적으로 살아있는 개별자의 본질 자체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목적성의 연구는 우리에게 세 번이나 진실로 유기체적인, 또 진실로 생명의 동시대적인, 방법의 필연성을 느끼게 해준다. 이 방법은 전체에 의해서 요소들을 설명하는 것이지, 요소들에 의해서 전체를 설명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생명의 원초적 긴장(la tention) 안에는 생명을 합체하는 섬유조직들의 집합 안에서보다 무한히 더 많은 것이 있다. 마치 자유의 정신적 “의도(l'intention)” 안에는 의도가 소진하는 작동들 안에 보다 더 많은 것이 있는 것과 같다. 게다가 운동 안에는 구성되어있는 것 같은 연속적인 정지들 안에 보다 더 많은 것이 있고, 그리고 “의미”(le sens) 안에는 그 의미가 퍼져있는 해석된 “기호들”(les signes) 안에 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이 종으로 펼쳐지는 순간에(au moment où), 나의 자유의 재능이 나에게 그러한 진행방식에 영감을 주는 순간에, 지적 노력이 무언의 수수께끼 가운데로 침투하는 순간에, 어느 누구도 이것들의 내적인 숙명에 대해 선판단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이유는 이 재구성화 작업들은 회고적 가치일 뿐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중심에서 주변으로 가는 생명적 운동보다 더 단순하고 자연적인 것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제작적 논리에 불가침투성이란 것도 없다. 쇼펜하우어가 말하기를, 자연은 마치 천재(재능)처럼 순진하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의 혀[말씀]를 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나 지식적이어서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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