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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이해(교양) 스크랩 한국사의 이해 ? 학보특강(1깅브터 9강)
김추경(10기) 추천 0 조회 146 17.02.28 01:5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출처: 방송대인 이야기

교양/일선] 한국사의 이해 워크북 연습문제 등|-학습자료방

박영희(대구생과) | 조회 1496 |추천 0 |2016.06.08. 06:05

http://cafe.daum.net/apple010/7KjY/4579


한국사의 이해는 교재 내용이 바뀌었으니 변경된곳과 

변경되지 않은 부분을 비교하며 공부 하시기 바랍니다




첨부원본 파일

4) 한국사의_이해_학보특강.hwp


한국사의 이해 ? 학보특강 (1, 2)

1장 원시사회와 고조선


[학습방향] 선사에서 역사시대로 발전하는 과정을 이해하고, 우리 역사상 최초 국가인 고조선의 성립?발전을 비롯하여 그 뒤를 이어 나타난 부여와 삼한의 역사적 전개를 살펴본다.   


1-1. 원시사회의 전개 한반도의 구석기시대는 약 7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구석기인들은 수렵 채집 생활을 하며 찍개와 주먹도끼를 이용하였다. 신석기시대는 농경과 목축, 정착생활을 하게 된 단계(‘신석기혁명’)로 한반도의 신석기시대는 기원전 8천년 경 시작되었다. 신석기인 들은 간석기와 토기를 사용하였는데, 빗살무늬토기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씨족 단위의 평등한 원시공동체사회를 이루어 살았다. 신석기시대에는 농경 정착생활을 하면서 애니미즘, 토테미즘, 영혼숭배와 같은 신앙이 생겨났다.


청동기는 중국 동북 지역과 한반도에서 기원전 2천년 경부터 제작, 사용되었다. 한반도와 요동에서 비파형동검이 출토되었으며, 기원전 4세기경 세형동검또는 한국식동검이라 불리는 한반도의 독특한 청동기가 발전하였다. 청동기시대에는 원시공동체사회가 무너지고 빈부 차이와 사유재산, 지배집단이 등장하였다. 고인돌은 이러한 사회 분화를 보여주는 유적이다. 농업 생산과 청동기 문화 발전으로 집단 간 격차가 커지고 전쟁이 잦아졌으며, 우월한 선진 집단이 세력을 확장하고 정치 집단을 이루어 고대국가가 나타나게 되었다.


1-2. 고조선의 형성과 발전

 우리 역사상 최초의 고대국가는 고조선이며, 대표적 유물은 비파형동검, 고인돌, 미송리식 토기이다. 삼국유사의 단군신화는 고조선 성립 과정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고조선은 요서와 한반도 서북부로 영역을 확장하여 기원전 4세기 후반 중국 연()과 맞설 정도였으나 요동에서 들어온 위만이 기원전 194년경 정권을 빼앗았다.

 

위만조선은 중국에서 들어온 이주민들의 철기문화를 받아들여 더욱 강성해졌고, 중계 무역의 이익을 차지하며 발전하였다. 이후 고조선은 한()의 침략에 맞서다가 기원전 108년 왕검성의 함락으로 멸망하였다. 한은 고조선 영역에 낙랑, 진번, 임둔, 현도의 4군을 설치하여 지배하였으나 토착 주민들의 반발로 군현을 폐지하거나 옮겨갔다. 토착 집단은 한군현 세력을 몰아내며 고구려와 삼한으로 발전하였으며, 가장 오래 존속했던 한군현인 낙랑군은 313년 고구려에 통합되었다.


고조선은 기원전 4세기말경 국가 기구와 관료 제도를 갖추었고, 위만조선 시기에 중앙 권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고조선은 지배체제 유지를 위하여 법을 제정?집행하였는데, 범금(犯禁) 8조 가운데 3조가 전해져 사유재산과 계급 발생, 노비의 존재 등 사회상을 알 수 있다. 고조선의 지배층은 귀족이며, 사회의 기본적 생산은 일반 평민인 하호(下戶)가 담당하였다.  


1-3. 부여와 삼한

고조선의 뒤를 이어 중국 송화강 유역에서 나타난 부여는 청동기 문화를 기반으로 철기 문화를 수용하였으며, 대가(大加) 연합 형태로 국정을 운영하였다. 부여는 285년 선비족의 침략으로 쇠퇴해져 4세기 중엽 전연(前燕)의 습격으로 멸망하고, 이후의 동부여410년 고구려에 통합되었다. 부여는 고구려와 백제 왕실의 기원으로 전해진다. 고조선의 남쪽에는 진국(辰國)의 존재가 전해지나 기록은 거의 없다.

 

그 뒤 삼한(三韓)이 나타났다. 고조선 유이민의 남하로 한반도 중남부에 철기문화가 유입되면서 새로운 정치 집단이 형성되었다. 3세기경 소국들이 연합하여 삼한(마한, 진한, 변한)을 이루었다. 소국의 지배자들은 신지, 읍차이다. 삼한 단계에서 한반도 전역이 본격적인 철기문화로 진입하여 새로운 사회가 나타났다. 마한은 백제에, 진한은 사로국에 각각 통합되었으며, 변한은 연맹체 형태로 발전하였다.


2장 삼국

[학습방향] 고구려, 신라, 백제가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을 이해하고 삼국의 사회상과 문화를 살펴본다.


2-1. 삼국과 가야의 성장

 고구려는 지역 정치 집단인 나() 집단들이 계루부를 중심으로 5부 연맹체가 지배하는 체제를 이루고, 1세기 후반 태조왕 때 고대국가 체제를 확립하였다. 고구려는 4세기 중반 이후 백제와 대결하다가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이후 소수림왕 때 체제를 정비하고 5세기 동북아시아의 강자로 세력을 떨쳤다.


백제는 마한 소국의 하나로 시작하여 3세기 중반 고이왕 때 고대국가 체제를 갖추었다. 4세기 들어 근초고왕 때 대대적 정복전쟁으로 한반도의 최강국이 되었다. 백제는 중국 남조 및 왜와 교류하며, 중국 요서 지방에 진출하기도 하였다.


신라는 진한 소국의 하나인 사로국에서 시작하였다. 3세기 중엽 탈해 세력이 들어와 박씨, 석씨 세력이 김씨 세력과 왕위를 경합하다가 4세기 말 내물마립간 때부터 김씨가 왕권을 독점하였다. 신라는 골품제를 통해 지배층의 권위를 보장하고 중대사는 화백에서 결정하였다.


가야는 소국 연맹체로 변한에서 시작되었다. 김해의 구야국이 주도한 전기가야연맹400년 고구려 광개토왕의 왜군 격퇴를 계기로 해체되고, 5세기 후반 고령의 대가야 중심의 후기가야연맹을 이루었으나 562년 신라의 침략으로 대가야가 멸망하였다. 가야는 철 생산이 풍부하여 중국, 일본 지역과 교역하였고, 신라와 일본 문화에 영향을 주었다.


 2-2. 삼국의 발전과 각축 

  고구려는 광개토왕 때 대대적 정복사업으로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뒤를 이은 장수왕은 427년 평양으로 천도하며 남진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6세기 중반 왕위 계승을 둘러싼 귀족들의 대규모 분쟁이 지속되면서 귀족연립체제가 형성되고, 왕권은 약화되었다.

백제는 고구려의 압박으로 웅진(공주)으로 천도한 후 통치체제를 재정비하였다. 성왕은 538년 수도를 사비(부여)로 다시 옮겨 중흥을 꾀하였다. 백제는 신라와 연합하여 한강 유역을 되찾았으나 차지했던 땅을 신라에게 빼앗긴 뒤 지속적으로 신라를 공격하였다.


신라는 6세기에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신라 지증왕은 국호 신라(新羅)’와 왕호 을 사용하였고, 법흥왕은 율령 반포, 불교 공인, 금관가야 병합을 시행하였다. 진흥왕은 활발한 정복을 통해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대가야를 복속시켜 낙동강 일대를 점령하였다.


신라는 553년 백제 점령지를 빼앗아 한강 일대를 모두 차지하고, 백제와 전쟁을 계속하였다. 고구려는 한강 유역 회복을 시도하여 신라와 전쟁을 재개하였으나 패하였다. 고구려는 6세기 후반과 7세기 초 중국의 통일제국으로 등장한 수()와 당()의 침공을 막아내기는 하였으나 국력을 크게 소모하였다.


2-3. 삼국의 지배 체제와 사회 경제

 철기 확산과 농경 생산 증가로 소국이나 읍락 간 격차가 확대되고, 삼국은 이들을 통합하면서 성장하였다. 삼국은 중앙과 지방의 통치조직을 갖추고 지배층의 권위 유지를 위해 신분제를 시행하였는데, 신라의 골품제가 대표적이다. 국가 운영의 기본 법제로는 율령(律令)을 마련하였다. 고대사회의 기본적 생산 담당자는 민()이었는데, 소국, 읍락 지배층 일부는 중앙귀족으로 편입되고 읍락민은 조세와 역역(力役)을 부담하는 공민(公民)으로 편제되었다. 고구려의 진대법은 가난한 농민을 구제하려는 제도였다. 4세기 이후 철제 농기구와 우경 보급, 수리시설 확대로 농업생산력이 늘어나고 남부 지방에서는 벼농사가 행해졌다


.2-4. 삼국의 문화

삼국은 원시 종교와 천신 신앙을 기반으로 건국 시조를 신성시하고 지배를 정당화 하였으나 고대국가 체제를 확립하면서 불교, 유교, 도교를 수용하였다. 불교는 고대국가 발전과 왕권 확립, 신분제를 뒷받침해 주었다.

 

고구려와 백제는 4세기 후반, 신라는 6세기 초반에 불교를 공인하였다. 유학 수용과 유학 교육도 고대국가 발전을 뒷받침하였고, 도교도 삼국에 상당히 퍼져 있었다. 신라의 풍류도(풍월도)는 유교, 불교, 도교를 포괄한다고 여겨진 고유 사상이었다.

 

3장 통일신라와 발해

[학습방향] 신라 삼국통일의 의의와 한계, 발해 건국의 의미를 이해하고, 신라와 발해의 사회 문화를 살펴본다.3-1. 신라의 삼국통일과 발해의 건국7세기 들어 고구려가 당과 대립하는 가운데 백제와 고구려에 시달리던 신라는 당과 군사동맹을 맺고, 백제?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신라가 대동강 이남을 차지하기로 하였다.

 

나당 연합군이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 뒤 당은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여 직접 지배하려 들자 백제 유민들이 부흥운동을 일으켰다가 실패로 돌아갔다. 나당 연합군은 고구려 공격에 나서 668년 고구려가 멸망했다. 당이 신라까지 통치하려 들자 신라는 고구려 멸망 후 당과 전쟁을 벌이고, 고구려 유민들의 대당 항전을 지원하였다. 신라는 675년 매소성(경기 양주)에서 당군을 대파하고, 676년 당 수군을 금강 하구 기벌포에서 격파하여 당군을 완전히 축출하여 대동강에서 원산만 이남의 땅을 확보하였다.

 

고구려 유민 대조영은 거란족의 반란을 틈타 요동으로 옮겨 갔는데, 말갈족을 포섭하여 세력을 늘려가며 698년 만주 동모산에서 진국(震國, 振國)을 세웠다. 진국은 713년부터 발해(渤海)로 불리게 되었다.3-2. 통일


라의 지배 체제와 사회

신라의 삼국 통합은 대동강 이남에 그쳤으나 영토와 인구가 늘어나고, 당군과 전쟁을 벌이며 같은 민족이라는 의식이 생겨났다. 신라는 지배체제를 정비하여 국왕 중심의 관료제를 강화하였다. 중앙 정치는 집사부를 중심으로 6부 체제를 갖추고, 지방 통치조직은 95소경으로 정비하였다. 군사력도 9서당 10정으로 재편하였다.  


신라는 왕토관념을 표방하였지만 실제로는 개인 토지 소유를 인정하였다. 진골 귀족들은 막대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보유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다. 일반민은 조세와 공물, 부역을 감당했으며, 과중한 부담과 수탈을 견디지 못한 농민이 노비가 되거나 초적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지방 지배와 조세 수취를 위해 3년마다 촌락문서(민정문서, 장적)가 작성되었다.


나당전쟁 이후 신라와 당의 관계는 점차 개선되어 활발히 교류하였으며, 신라와 발해도 당 중심의 국제관계가 안정되면서 서로 교류하였다. 9세기의 재당(在唐) 신라인들은 당, 신라, 일본을 연결하는 국제 교역을 주도하였고, 9세기 초 장보고는 청해진(완도)을 설치하여 해상 교역을 주도하고 동아시아 무역을 장악하였다.    


8세기 말부터 진골 귀족의 왕위 다툼과 지방의 반란으로 중앙 권력이 약화되고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세력을 확대하였다. 농민봉기는 8세기 말부터 시작되어 9세기 후반에는 전국적으로 일어나 중앙정부와 진골귀족에 항거하였다. 견훤과 궁예는 농민봉기의 와중에 각각 후백제와 태봉을 세워 후삼국이 형성되었다. 3-3. 발해의 발전과 문화 발해는 대조영을 이어 즉위한 무왕 때 독자 연호를 사용하고 영토를 확장하였으며,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였다.


초기에는 당과 대립적인 관계였으나 733년 국교를 맺고 당, 신라, 일본과 활발히 교류하였다. 발해의 중앙정치구조는 36부로 구성되었으며, 당의 책봉을 받았으나 내부적으로는 황제국을 표방하였다. 발해는 10대 선왕 때 최대 영역을 이루고, 51562주의 지방 행정제도를 완비하였으며 해동성국(海東盛國)’의 칭호를 얻었다. 다민족 국가인 발해는 복합적 성격의 국제적인 귀족 문화를 이루며, 유교와 불교를 왕권 강화에 활용하였다. 발해는 거란족의 침공으로 926년에 급속히 멸망하였으며, 이때 왕자 대광현이 유민 수천 명을 이끌고 고려로 넘어왔다.


3-4. 통일신라의 문화

통일전쟁을 마무리한 후 신라는 유교 이념을 내세워 왕권 강화와 지배체제 정비를 하고자 하였다. 682년에 국학이 설치되어 유교 경전과 한문학을 가르쳤고, 원성왕 때 독서삼품과를 통해 관리를 뽑기도 하였으나 고위 관직은 진골 귀족들이 독점하였다. 통일신라 사회에서는 불교문화가 융성했다. 신라 통일기의 원효는 일심의 논리로 불교사상 간 대립을 해소하고자 하였으며, 정토신앙을 전파하여 일반민들도 불교를 믿게 되었다.

 

7세기 중엽 혜초는 ?왕오천축국전?을 남겼다. 통일 후 1세기 동안은 화엄종과 법상종이 불교학 연구를 이끌었다. 불교 신앙이 정착되면서 절과 불상, 탑이 많이 조성되었는데, 불국사 다보탑·석가탑, 석불사(석굴암), 성덕대왕신종이 대표적이다. 9세기에는 개인의 수행과 깨달음을 중시하는 선종이 전해져 지방 호족들의 호응을 받으며 널리 퍼졌다.  


4장 고려의 성립과 발전

[학습방향] 고려 건국과 후삼국 통일의 의미를 이해하고, 고려 전기 사회의 성격과 대외관계의 변화, 불교문화에 대해 알아본다.


4-1.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 통일

후고구려의 궁예가 918년 정변으로 축출되고, 송악의 호족인 왕건이 왕으로 추대되었다. 왕건은 국호를 고려라 하고 송악(개경)으로 천도하였으며, 지방 호족들을 회유하고 민생 안정에 힘써 국가 기반을 다졌다. 고려는 935년 신라를 통합하고, 936년 후백제를 무력으로 격파하여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왕건은 고구려 계승의식을 내세우고 사심관, 기인 제도를 통해 호족 연합을 굳건히 하며, 북방 개척과 서경(평양)을 중시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발해 유민을 받아 들였다.


4-2. 고려의 지배 체제와 사회

고려 태조 왕건은 지배체제를 정비하고 통치의 기본 방향인 ?훈요십조?를 남겼다. 4대 광종은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를 시행하여 호족 세력을 누르고 왕권 강화를 꾀하였다. 성종 때 최승로는 정치 개혁 방안인 ?시무 28?를 올려 유교적 정치 질서 확립을 제시하였다.


고려의 중앙 정치는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중앙 정치 기구로 중추원, 삼사, 어사대, 도병마사, 식목도감 등이 기능하였다. 지방 행정 구역은 경기, 양계, 5도로 구분되었다. 지방 행정은 주군, 주현 사이에서 행해졌으나 실제로는 속군, 속현이 더 많았다. 특수 행정구역으로 향(), 부곡(部曲), ()가 있었다. 군사 제도로는 중앙의 26위와 양계의 주진군, 지방의 주현군을 두었다.


토지제도인 전시과(田柴科)는 관료의 품계에 따라 토지를 분급하여 수조권(收租權)을 일시적으로 준 것이다. 5품 이상 고위 관료는 세습 가능한 공음전을 주어 특권을 보장하였다. 농민들은 국가의 수취 대상으로서 전세, 요역, 공물을 부담하였다. 조세와 공물은 바닷길로 개경에 운반되었으며[조운(漕運)], () 주민들은 특정 물품을 생산해서 국가에 바쳤다.

고려 지배 질서가 정착되면서 11세기 이후 몇몇 유력 가문이 문벌을 형성하고 고위 관직과 권력을 차지하였다. 법적 신분은 양인과 천인만 있어 일반민과 귀족 모두 양인이었으나 귀족은 특권을 가진 지배층이었다.

 

?무반 관료 중에서는 문반이 더 중시되었다. 양인으로는 정호(丁戶), 백정(白丁)이 있고, ??부곡민은 일반 양인보다 천시되었다. 천인 계층인 노비는 공노비와 사노비가 있었으며, 신분이 세습되고 매매의 대상이 되었다.


4-3. 대외 관계와 교역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강경하게 대하며, 발해 유민들을 포섭하였다. 거란은 나라 이름을 요()라 하고, 982년 성종 즉위 후 체제를 정비하여 군사력을 강화하였다.

 

중국은 송()960510국을 통일하였다. 고려는 송과 우호관계를 유지하였으나 요, 금이 침략할 때에는 중립을 취하였다. 993년 요가 침공했을 때, 서희가 강화 회담에 나서 전쟁을 피하고 강동6주를 차지하였다. 요는 여러 차례 침공하였으며, 1018년에는 고려군이 귀주성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요는 침공을 포기하고 고려와 화친을 맺었다. 11세기 말, 고려는 세력을 확대한 여진과 대립하였다. 고려는 별무반을 편성하여 1107년 여진 정벌에 나서 9성을 쌓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계속적인 침공에 시달려 화친을 맺었다. 1115년 여진이 금()을 건국하고 사대를 요구하자 고려는 1126년 금과 군신관계를 맺었다.

 

고려는 활발한 해상무역을 전개하였다. 11세기 초, 송과 고려 상인들이 무역을 시작하였는데,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는 국제적 무역항으로 발달하였다. 거란, 여진과 민간 무역을 하였고, 금과 사대관계를 맺은 뒤는 공적 무역과 교역이 행해졌다. 아라비아(대식국) 상인들과도 교역이 이루어졌다. 고려는 대외교역을 통해 서방 세계에 코리아로 알려졌다.


4-4. 고려 전기의 사상과 문화

유학은 정치 이념과 지배 체제 정비의 기반이었다. 과거제는 유학적 식견과 능력을 지닌 관료를 선발하는 시험으로 명경과(明經科)와 제술과(製述科)로 나뉘어졌다. 공적 교육기관으로는 개경에 국자감, 지방에 향학을 설치하였다. 국가사업으로 실록이 편찬되고, 1145년 신라를 중심으로 삼국의 역사를 기록한 삼국사기(三國史記)가 편찬되었다.


불교는 국교로서 숭앙되며 연등회과 팔관회가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고려 초 지방 호족들이 대규모 불상과 석탑을 조성하였으며, 11세기에는 왕실이 대규모 사찰을 세웠다. 거란 침략을 물리치려는 기원에서 초조대장경 조판이 이루어졌으나 몽골 침략 때 소실되었다. 불교 교단은 광종 때부터 교종과 선종으로 정리되었으며, 불교사상면에서 의천은 천태종을 개창하고 불교학 연구를 집대성한 교장(敎藏)을 간행하였다. 풍수지리설은 개경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인문 지리적 인식으로 고려 건국을 뒷받침하였다.


5장 고려 후기의 사회 변화

[학습방향] 고려 귀족사회의 동요와 무신정변이 초래한 사회적 변화, 몽골의 침략과 고려의 항전 과정을 이해하고 원 간섭기 이후 고려 사회의 개혁 과제를 살펴본다.      5-


1. 귀족사회의 동요와 무인집권

거란 침공을 물리친 뒤 고려에는 평화가 지속되다가 12세기 들어 귀족들의 다툼으로 정변이 일어났다. 1126년 일어난 이자겸의 난은 수습되기는 했으나 정치는 어지러워졌다. 묘청 일파는 서경 천도를 주장하며 개경 문벌 귀족 세력을 무너뜨리고자 하였다. 인종은 이를 받아들여 풍수지리와 도참설에 따라 서경에 대화궁을 지었다. 그러나 문벌귀족들의 반발과 인종의 태도 변화로 1138년 서경파가 반란을 일으켜 1년 넘게 저항하다가 진압되었다


 1170년에는 문신 위주의 귀족 사회에서 차별대우를 받던 무신들의 불만이 정변으로 폭발하였다. 무신들은 권력을 다투다가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을 거쳐 최충헌이 집권한 후 최이, 최항, 최의까지 460여 년 동안 권력을 장악하였다. 무신들의 지역민 수탈이 심해져 농민들이 각지에서 봉기하고 노비 신분해방의 움직임도 나타났으며, 13세기에도 봉기는 계속되었다.


5-2. 몽골의 침략과 항전

13세기 국제 정세는 몽골의 대제국 건설로 큰 변화를 맞았다. 몽골은 고려를 크게 3차례 침공하였다. 첫 번째 침공에서 고려는 몽골과 강화를 맺었으나 최고 집권자 최이는 항전을 결의하고 12327월 강화도로 천도하였다. 최이와 귀족들은 강화도에서 개경과 같은 안락한 생활을 누렸다. 그 뒤 몽골군은 다시 쳐들어왔다가 처인성(용인)의 항전으로 철군했다.

 

몽골은 1235년부터 고려를 세 번째로 침공하여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였다. 1258년 강화도에서 정변이 일어나 최씨 정권이 붕괴한 뒤 고려 조정은 몽골과 강화를 맺어 1270년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이때 삼별초는 해산명령에 반발하여 강화도에서 진도, 제주도로 이동하여 여몽 연합군에 저항하다가 1273년에 제주도에서 진압되었다.


5-3. 원 간섭기의 고려

몽골의 쿠빌라이(세조)1271년 나라 이름을 원()이라 하고, 1279년 남송을 멸망시켜 중국을 통일하였다. 고려는 원의 부마국이자 제후국이 되어 제도와 격식을 낮추고, 간섭을 받았다. 원은 쌍성총관부, 동녕부, 탐라총관부를 설치하여 고려 영토 일부를 강점했다.

 

고려 후기에는 권문세가(權門勢家)라는 지배세력이 등장했다. 권문세가는 대규모 토지를 농장으로 경영하며 농민들을 지배하고 횡포를 부렸다. 1350년대에 원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공민왕은 부원세력을 제거하고 철령 이북을 탈환하였다. 그리고 신돈을 기용하여 강력한 전민변정(田民辨整) 정책을 실시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공민왕의 개혁 정치에서 새로운 이념과 지향을 지닌 신진사대부들이 배출되었으며, 고려 말 왜구 토벌에 공을 세운 이성계는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떠올랐다.


5-4.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무신정변 이후 선종에서는 지눌의 정혜결사, 요세의 백련사 등 결사를 맺어 수행하는 새로운 운동이 나타났다. 지눌은 선()의 입장에서 선?교 대립을 해소하고자 하였으며, 한국 선사상의 전통을 확립하였다. 몽골 침략으로 초조대장경이 소실되자 최이는 강화도에서 대장경 조판사업을 벌여 1236년부터 16년 동안 8만 여의 경판을 판각하였다[재조대장경, 팔만대장경]. 고려 후기 건축물로는 안동 봉정사 극락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이 현존한다.


몽골과 전쟁을 하며 많은 고려인 포로들이 끌려갔고, 원의 요구로 공물, 공녀, 환관도 바쳐야 했다. 원과 교류가 늘면서 몽골인, 위구르인, 이슬람 승려 등 다양한 이들이 고려로 왔고, 고려인들이 원에 정착하기도 했다. 고려와 원의 풍습과 언어가 섞이고, 원에서는 고려양(高麗樣)이 유행하였다.

원으로부터 새로운 문물도 전래되어 ?농상집요(農桑輯要)? 간행, 목화씨 전래와 면포 생산, 화약?화포 제조가 이루어졌다.

고려 후기에 단군신화를 기록한 ?삼국유사(三國遺事)?, ?제왕운기(帝王韻紀)?와 같은 개인이 저술한 역사책들이 나왔으며, 이규보는 ?동명왕편(東明王篇)?을 지어 고구려 계승의식을 나타냈다.

 13세기 후반 원을 통해 성리학을 수용한 신진사대부들은 불교의 폐해를 비판하고 성리학에 입각한 제도 개혁과 친명 외교정책 시행, 농장의 폐단 시정을 주장하였다.


6장 조선건국과 새로운 기틀

[학습방향] 조선건국의 배경을 이해하고 건국 이래 2세기 동안 국가와 사회 제도가 확립되는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6-1. 조선의 건국과 국가운영

고려 말 사회개혁의 요구가 점증하는 가운데 이성계 세력은 신진사대부와 신흥무장세력을 연합해서 새 왕조를 개창하였다. 이성계는 위화도회군(1388)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사전개혁(과전법)을 실시한 뒤 1392년 조선을 건국하고, 1394년 한양으로 천도하였다. 태조에서 성종까지 백 년여 간은 정치기구가 정비되고 양반의 정치 참여가 확대되는 과정이었으며, 성종 대에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이 발간됨으로써 조선의 정치제도가 완성되었다.

  

조선 초에는 유교 이념을 기반으로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관료제가 형성되었다. 최고 권력자는 국왕으로 왕명출납은 승정원이 담당했다. 국가 중요 정책은 의정부에서 논의되었으며, 육조는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했다.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는 언론 기능을 담당하였다. 민본정치 실현을 위해 신문고, 구언(求言), 사관제도가 운영되었다. 지방은 일원적으로 개편되어 전국 모든 고을에 지방관(수령)이 파견되고, 각 도에는 관찰사를 두어 군현 통치를 감독하였다. 국방과 군사제도 면에서 중앙에는 5위를 두어 오위도총부가 통솔하고, 지방군은 진관체제로 운용하였다.


6-2. 조선 초기의 사회경제구조

과전법(1391)은 조선 건국 주도세력이 고려 말 사전개혁을 단행하며 시행한 토지분급제도로서 토지의 수조권을 지급하였다. 토지제도는 이후 직전(職田) 제도, 관수관습제로 바뀌어갔다. 전세제도는 공법의 실시로 전분 6등법과 연분 9등법이 시행되었다.  


부세는 토지, 인신, 호에 따라 부과되었다. 국가 노동력 징발은 군역과 요역을 중심으로 하였다. 군역은 계속 변질되다가 16세기 들어 방군수포(放軍收布) 확산으로 관군의 전력이 크게 낮아졌다. 요역은 국가가 노동력을 강제 징발하는 것이다. 각지의 특산물을 바치는 공물은 농민의 큰 부담이 되었으며, 방납(防納)의 폐단도 나타났다.


조선의 신분제는 법제적으로 양천제를 표방하였다. 국가는 3년마다 호적을 작성하여 인구를 파악하고 직역을 부과하였다. 양반은 조선사회의 지배층으로 과거 합격을 통하여 문?무반이 되었다. 기술관, 아전, 향리들은 잡과에서 선발된 전문직이었다. 농민, 수공업자, 상인은 상민에 속했다. 천인 층은 매매, 증여, 상속의 대상이었으며, 대부분은 공?사노비였다.


 6-3. 조선 초기 대외관계

조선 초기 대외관계는 사대와 교린을 근간으로 하였다. 조선은 명 중심의 대외관계를 형성하였는데, 명에 사대를 표방한 것은 조공과 책봉을 통해 체제 안정을 꾀하고 경제적?문화적 실리를 취하려는 현실적 대응이었다. 세종은 명과 충돌을 피해가며 4군과 6진을 개척하여 오늘날의 국경선을 확정하고, 삼남 농민들은 옮겨 가게 해 이 지역을 확보하였다.

 

조선은 여진?일본에게는 교린정책을 펼쳐 경제적?문화적 회유와 무력 응징법을 적절하게 이용하였다. 이밖에 유구(오키나와), 타이, 인도네시아와 대외관계를 맺고 교역하였다. 태종 때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이 시기에 조선의 해외 인식이 일정하게 있었음을 보여준다


.6-4. 새 왕조를 빛낸 문화와 기술

조선 초기 가장 중요한 문화적 성과는 세종대의 한글 창제이다(1443). 세종은 한글을 보급하려는 노력을 지속하여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삼강행실도?의 언해본을 간행하였다. 한글은 널리 보급되어 평민과 여성들의 일상에 자리 잡았다. 세종 대에는 과학 분야에서도 발전을 이루어 혼천의, 앙부일구(해시계), 자격루(물시계), 측우기 등이 제작되었다. 우리나라의 독자적 역서(曆書)?칠정산내외편?이 편찬되고, ?향약집성방?의방유취? 등 의서가 만들어졌다. 농업 기술 면에서 시비법 개발과 수리시설 개선으로 상경전과 수전이 늘어나고, 수리시설이 잘 갖추어진 곳에서는 모내기가 행해졌다. 우리의 농업 전통과 농업 기술을 최초로 정리?편찬한 ?농사직설?은 주로 강희맹의 ?금양잡록?과 함께 보급되었다.


7장 조선 전기 사회변화와 외세침략

[학습목표] 15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까지 사림 등장에 따른 정치세력의 변화와 이 시기의 사회 경제적 변동을 이해하고 왜란과 호란의 전개 과정을 살펴본다.  


7-1. 사림?훈구의 대립과 사화

훈구세력은 성종 초기까지 중앙권력을 장악한 세력으로 방대한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였다. 사림은 재지사족들의 후예로 중소 지주적 지향을 보이며 사상적으로는 성리학을 구현하려 하였다. 사림들은 성종 때부터 중앙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면서 도덕정치 실현을 주장하며 훈구척신세력을 비판하였다.

 

사림 세력은 훈구와 사림의 대립 속에서 네 차례의 사화로 탄압을 받았으나 향약과 서원을 기반으로 지방 세력을 장악하고 선조 대 이후 중앙 정계를 주도하였다. 서원은 서재(書齋)를 발전시킨 교육기구로 중종 때 백운동서원 건립 이래 지속적으로 확산되었다. 사액서원은 국가로부터 토지, 노비, 서적을 지급받고 면세, 면역의 특권을 누렸다.

 

지배층의 다툼이 격화되고 토지겸병과 수취가 과중해져 농민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진 가운데 임꺽정 난(1559~1562)이 발생하여 3년 여 간 정부를 크게 위협하였다.


7-2. 도성과 향촌사회

한양은 계획도시로서 종묘와 사직, 궁궐, 도성을 건설하고, 교통?행정시설을 설비하여 수도의 면모를 갖추었다. 경복궁 앞에는 관청가(육조거리)가 형성되었다. 종로?남대문로에는 시전(市廛)을 두어 국가 소요 물자를 조달하였다. 15세기 후반 민간상업의 발전으로 도성의 상업도시적 성격이 강해졌다. 한성부 아래 부(), ()으로 이루어진 행정 편제를 갖추었으며, 신분과 직업에 따라 거주 지역이 고정되는 경향을 띠어갔다.


지방에서는 사족들이 농업경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향촌사회를 운영하였다. 16세기 이후 사족마을을 중심으로 주변의 자연촌을 편제하고 사족들이 신분적으로 하위에 있는 이들을 통치하였다. 사족들은 향안 작성, 향회 개최, 유향소 설치, 수령 보좌, 향리 감독, 지방 풍속 교화 등을 하면서 향촌 지배를 유지하였다. 사림들의 중앙 진출이 활성화되자 향약을 실시하자는 주장이 다시 제기되었는데, 향약의 기본 목적은 농민들을 공동체에 묶어 두어 지주?전호의 대립을 무마하려는 것이었다.


7-3. 동아시아 정세와 왜란과 호란


1592년 일본은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으로 쳐들어왔다. 왜란 초기에 관군이 쉽게 무너졌으나 해전 승리로 조선군이 해상 주도권을 잡고, 육지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나 대항하였다. 1593년 명의 참전으로 전란은 동아시아 국제전쟁으로 발전하였다.

 

일본은 1597년 다시 조선을 침입하였다가(정유재란) 도요토미가 철수하여 전란은 종식되었다. 그러나 조선의 국토는 황폐해지고 인구는 줄어들었다.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정권이 수립되어 에도시대가 열렸고, 명은 국력을 크게 소모하여 만주의 여진족이 성장하게 되었다


 명이 쇠퇴하자 여진족이 성장하여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하였다. 조선은 후금과 명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쳤으나 인조반정 뒤 친명배금정책으로 돌아서 후금은 1627년 조선을 침략하였다가 강화를 맺었다. 1636년 국호를 청으로 바꾼 후금은 조선을 다시 침략하였고,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던 인조는 1637년 삼전도에서 청에 항복하였다. 전란의 기간은 짧았으나 약탈이 심하고 왜란 피해가 복구되지 않은 상황에 침략을 당하여 고통이 컸다.


7-4. 조선의 중심사상, 성리학

 성리학은 우주 자연의 원리와 인간사회의 질서를 설명하는 이론으로 지배층의 정치, 윤리, 사상, 일상생활에 폭넓은 영향을 미쳤다. 조광조는 지치주의(至治主義)를 표방하며 개혁정치를 주도하였고, 서경덕은 주기론, 이언적은 주리론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조식은 경()과 의()를 근본으로 하는 실천적 학풍을 형성하였다. 이황과 이이는 성리학을 이론적으로 심화시켜 중국 송대 성리학 수준을 넘어서고, 이황 중심의 영남학파와 이이 중심의 기호학파를 형성하였다.

 

성리학의 영향력은 사회 전반으로 널리 확산되어 부계중심의 종법질서가 확립되고, 유교 윤리가 민중에게 퍼졌으며, 각종 성리학 서적이 편찬되어 교육에 활용되었다. 국초의 역사서술은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 등 관찬사서 중심이었으나 박상은 유교적 가치기준과 주자의 강목법(綱目法)을 활용하여 ?동국사략?을 서술하였다.

 

이황은 성리학적 도덕주의에 입각하여 도산십이곡을 지었으며, 정철은 우리말로 된 가사인 관동별곡, 사미인곡을 남겼다. 방외인 문학으로는 김시습, 전우치, 정희량, 양사언, 어무적, 임제, 어숙권이 대표적이다.

 

8장 조선 후기 경제발전과 사회동향8-1. 붕당의 확대와 당쟁


 사림들이 권력을 장악하자 그들 내부의 권력다툼이 일어났다. 선조 대에 동서분당이 일어나 선조 말년에는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었다. 광해군 대에는 북인이 집권하였다가 인조반정(1623)으로 서인이 집권하였다.

 

17세기는 서인과 남인의 당쟁이 치열하여 현종 대에 두 차례 예송논쟁을 겪었다. 숙종 대에는 세 차례의 환국(換局)을 통해 최종적으로 서인이 정권을 장악하였다(갑술환국). 환국기에 들어서는 상대 당을 철저히 부정하였다.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되어 주로 노론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당쟁 격화로 무신난(戊申亂, 이인좌의 난, 1728) 발발 등 왕권마저 위협 당하자 영조는 탕평책 실시로 왕권을 세우고자 하였다.

 

?정조대의 탕평책은 강화된 왕권을 중심으로 정치세력의 균형을 이루려 하였으나 탕평파로 권력이 집중되고 정치가 보수화되며 관료 및 외척가문이 팽창하는 한계를 낳았다. 사회 제도의 개선 면에서 영조는 균역법을 실시하고 군영을 정비하였다. 정조는 규장각과 장용영 설치, 서얼과 노비 차별 완화,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의 금난전권 폐지(신해통공) 등 왕권을 강화하며 사회 전반의 제도와 운영을 개선하고자 하였다. 숙종 후반~영조 대에 백성과의 소통이 확장되었다.

 

정조는 격쟁, 상언 등을 통해 민인의 의견을 통치에 활용하고 구언교(求言敎)를 내려 농촌대책을 받아들였다. ?정조대는 ?속대전?(영조), ?대전통편?(정조)의 법전류를 비롯하여 문물의 포괄적 정리와 지도류, 중요 기관을 정리한 서적, 군사?외교관계 관련 저작 등 중요한 편찬사업이 이루어진 문예 부흥기였다.   8


-2. 조선 후기 사회경제적 변동


조선 후기에는 농업생산력이 향상되고, 수공업과 광업, 상업분야가 발달하여 사회?경제적 변동이 큰 폭으로 일어났다. 논농사에서는 이앙법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이모작이 가능해졌으며, 밭농사에서는 그루갈이와 견종법이 확대되었다. 곡류 외에 상업적 농업 발달로 지역 특산품이 형성되었다.

 

농업생산 발달은 지주전호제에 영향을 주어 농민은 지주와 기존의 지배-예속관계가 아니라 경제적 관계만을 갖는 소작농으로 바뀌어 갔다. 지주제는 확대되어 소작을 얻지 못하게 된 농민들은 임노동자 층을 형성하였다. 임노동자들은 물자 하역, 토목공사에 고용되어 일하였으며, 고가(雇價)는 현물에서 차츰 화폐로 지급되었다.


수공업 분야에서는 관청수공업이 거의 없어졌고, 수공업 물품 수요 확산과 생산 촉진으로 점촌이 발생하였다. 광업은 수공업과 함께 발달하였으며, 잠채나 정부 허가를 받아 세금을 내는 광산 개발이 성행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장시 활성화로 18세기에 전국에 1천 곳 이상의 장시가 있었다.

 

원산, 강경, 마산 등 상업도시가 형성되고 전국적으로 활동하는 상인들이 나타났다. 대동법 시행 또한 상업발달에 일조하였다. 상업 발전으로 화폐 수요가 높아져 상평통보가 전국적으로 유통되었으나 쌀과 베도 여전히 화폐의 가치를 갖고 유통되었다. 청과의 대외무역은 의주의 중강과 중국 봉황 책문을 중심으로 관무역과 사무역이 행해졌으며, 일본과는 외교관계를 정상화한 뒤 세견선이나 부산 초량의 왜관을 통해 무역하였다. 8


-3. 대외관계의 변화

양 난 이후 조선은 청에 대해 친명배금정책과 북벌론을 내세웠으며, 서인정권은 권력 장악 방편으로 북벌론을 활용하였다. 숙종 때 대보단과 만동묘를 세웠는데, 이는 소중화(小中華) 의식을 넘어 조선중화의식으로 발전하였다. 실학자들은 소중화 의식을 비판하고 청을 긍정적으로 인식하였다.

 

청과 경제?문화교류가 활발해졌으며 고증학은 조선 후기 지식인들에 큰 영향을 미쳤다. 왜란으로 단절되었던 대일관계도 정상화되어 조선 정부는 1607년 일본에 회답 겸 쇄환사를 파견하고 1609년 기유약조를 맺었다. 조선 정부는 쇄환사 파견 이래 1811년까지 12회에 걸쳐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통신사는 일본과의 교류에서 문화사절단으로서도 기능하였으나 1811년을 끝으로 통신사 파견은 막을 내렸다.


17세기 초, 서양이 조선 사회에 소개된 이래 청을 통해 과학기술, 천주교 등 서구 문물과 지식이 수용되어 서양에 대한 관심이 늘어났다. 서양과학의 영향으로 시헌력이 채택되고, 지구구형론과 지구회전설 등이 제시되었으며, 마테오리치의 곤여만국전도등 근대적 지도 수용으로 세계관이 확대되었다.

 

서양 과학기술의 영향으로 중국 중심 세계관에서 세계적 차원으로 안목이 바뀌고, 인식 확대를 통해 조선과 조선 문화로 관심을 돌릴 수 있었다. 조선 지식인들은 문화적 호기심으로 서양 문물을 대하였는데, 이익이 서학을 학문적으로 접근한 뒤 서학을 수용한 그의 제자 가운데 신앙으로 나아간 이들이 나타났다. 조선 사회에서 천주교는 사학, 사교로서 배격되고 탄압당하면서 서양과학에 대한 관심도 줄어들었다.


8-4. 실학과 사회개혁론 조선 후기의 지배사상 성리학은 사회모순을 해결하거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지식인들은 주자학에서 이탈하며 새로운 경향을 보였으며, 실학 발생의 중심인물은 유형원(저서 ?반계수록?)이었다. 유형원을 이어받은 이익은  ?성호사설??곽우록?에서 사회개혁안을 제시하였다. 이익을 이어받은 성호학파는 경학, 지리학, 사학 등 다양한 영역을 심화시켰으며, 정약용은 이 계열을 집대성하여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 방대한 저서를 남겼다.

 

18세기 중엽 이후 노론 일각에서는 북학파가 형성되었다.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은 조선의 현실을 개혁하려면 청 문화를 배워야 한다고[北學] 하여 화이론적 명분론에서 탈피하였다. 북학파 실학자들은 노동하지 않는 양반 유학자를 비판하고 상공업을 높이 평가하였다. 19세기 실학자로는 서유구, 최한기, 이규경 등이 있었다.

 

실학자들이 가장 큰 관심을 보인 분야는 농업이다. 유형원은 ?반계수록?에서 균전제를, 이익은 ?곽우록?에서 한전론을 주장하였다. 정약용은 여전제를 구상하였으나 뒷날에는 점진적 개혁안인 정전제를 주장하였다. 이 밖에도 실학자들은 과거 제도 개혁, 상품화폐경제 발전과 대외무역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청 교체 이후 조선 역사와 정체성에 대한 독자적 인식이 강화되어 국학이 발달하면서 우리의 역사서가 편찬되었다. 17세기에는 한백겸의 ?동국지리지?, 허목의 ?동사?, 18세기에는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안정복의 ?동사강목?, 유득공의 ?발해고? 등이 편찬되었다.

 

?동사강목?은 단군조선부터 고려말기까지 정리한 조선 후기 최고의 역사서이며, ?발해고?는 발해사를 다루어 신라와 함께 남북국으로 체계화하였다. 지도로는 영조 대에 정상기의 ?동국지도?가 만들어지고, 이를 이어받아 19세기에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청구도?가 편찬되었다.

 

회화 부문에서 정선은 진경산수화 화법으로 우리나라의 자연을 그려내고, 김홍도와 신윤복은 농촌과 도시를 생동감 있게 그렸으며. 김정희는 추사체를 개발하였다.


9장 사회모순의 심화와 농민항쟁9-1. 세도정권과 지방사회의 실태

19세기는 외척가문이 정치권력을 사유화한 세도정권 시기였다. 세도정치는 17~18세기 당쟁의 결과물로서 정치기반이 극도로 축소되어 노론 가운데서도 역대 왕의 외척가문에 권력이 집중되었다.

 

순조 즉위 뒤 안동 김씨가 권력을 장악하고, 순조 말년~헌종까지 풍양 조씨 외척 세력을 거쳐 철종 즉위 뒤 다시 안동 김씨가 권력을 손에 넣었다. 외척들은 이 시기 최고 권력기구 비변사를 비롯한 요직을 장악하고 전횡을 일삼아 매관매직을 비롯한 부정?부패와 탐학이 만연하였다.

지방 사회에서는 신향(新鄕)이 성장하고 사족의 지배권은 상실되었으며, 고을 지배층 간 다툼으로 향회의 주도권이 수령에게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수령과 신흥세력은 향리층과 결탁하여 백성들을 수탈하였다. 국가는 세도정권 아래 만성적 재정위기를 농민 수탈 강화를 통해 모면하려 하여 삼정 문란이 야기되었다.

 

중앙과 지방관청 재정조달과 지배층의 개인적 착복으로 수탈이 강화되어 삼정 문란과 각종 잡세 부과, 고리대가 늘어났다. 농민들은 조세 문제에 대해 의견 개진을 적극적으로 하기 시작하였으나 삼정수탈에 대한 정소운동(呈訴運動) 같은 합법적 반대가 탄압을 받게 되자 새로운 투쟁을 모색하였다.   9-2. 사회모순의 심화와 농민생활

조선 후기 농업생산력과 상품화폐경제 발달로 19세기 들어 농민층은 급격하게 분해되어 부농과 빈농으로 나뉘어졌다. 토지는 소수 권세가와 부호에게 집중되었다. 소작인이 된 농민들은 높은 지대를 견디지 못하고 항조운동을 벌여 지대 납부를 거부하기도 하였다. 19세기 들어 국가의 중요 재정 수입원 삼정은 전정, 군정, 환곡이었다.

 

전정은 전세와 다양한 부가세를 합쳐 부과하였다. 환곡은 조선 후기에 들어 국가 재정으로 활용되면서 진휼 기능이 변질하고 관청이 농민을 고리대 형태로 수탈하게 되어 삼정문란 중에서도 폐단이 가장 심하였다. 전결세와 도결의 금납화 과정에서도 결가가 높아져 농민의 부담으로 전가되어 농민항쟁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삼정수탈이 가혹해지면서 조세 수취는 빈농층에게 편중되었다.

 

농민층 분화로 부농과 빈농 간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농민들은 계급적 이익을 자각하고 조직화하였다. 이는 자치조직인 촌계와 노동조직인 두레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들 조직은 농민의 사회세력화 방편으로 이용되는 한편 잘못된 부세운영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였다.

 

9-3. 농민항쟁의 시대19세기에는 다양한 농민항쟁이 집중적으로 발생하였다. 소극적 저항 방식으로 농촌을 이탈하기도 하였고, 와언과 괘서 등 말과 글을 통해 저항하였다. 소장(訴狀)을 작성하여 관에 호소하거나 격쟁의 방법도 이용하였다. 산에 올라 수령을 욕하거나 밤에 횃불 시위를 하는 방식도 있었다. 폭력적 투쟁으로는 명화적 조직, 19세기 서울의 쌀 폭동 등 집단적 저항운동을 일으켰다. 이 시기의 대표적 민중운동은 1811년 홍경래 난과 1862년 농민항쟁이다.


홍경래난은 상품화폐경제 발달에 따라 성장한 부민층이 중앙의 수탈과 서북민 지역차별 때문에 일으킨 계획된 무장봉기였다. 1811년 홍경래를 평서대원수로 하여 봉기한 반란군은 정부 토벌에 패배하고 정주성으로 후퇴하여 4개월 간 버티다가 1812년 함락되었다. 홍경래난의 목적은 향권을 장악하여 부민층 수탈을 막으려는 것이었으므로 소빈농층의 이익을 대변하지 못했으나 농민들은 봉기의 주요한 동력으로서 정주성 농성에 적극 참여하였다.

1862년 농민항쟁은 진주를 시작으로 전국 70여 개 고을에서 일어나 경상, 전라, 충청 일대를 휩쓸었다. 소빈농들이 주도적으로 항쟁에 참여했으나 일부 양반과 부민도 함께 항쟁하였다. 정부는 탄압을 강화하는 한편 삼정이정청을 설치를 통한 부세개혁을 약속했으나 대책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자 제주도를 비롯한 몇 개 고을에서 새로운 농민항쟁이 일어났다. 이는 기존 삼정제도에 대한 저항이자 새로운 조세체제를 요구하는 반봉건운동이었다.

 

9-4. 서민생활과 문화: 소설, 탈춤, 정감록, 미륵신앙 조선 후기에는 상품화폐경제 발달 및 도시의 성장, 서민들의 경제적 역량과 비판의식의 향상, 신분제 동요 등을 배경으로 중인층이 주도하는 서민문화가 나타났다. 서민들은 소설, 탈춤, 인형극, 판소리 등을 향유하였다.

통속소설로는 허균의 ?홍길동전? 등을 비롯하여 전부터 내려오던 것과 ?춘향전? 18세기 이후 유행한 국문소설이 널리 읽혔다. 장시는 매매 장소이자 서민 놀이문화의 공간이며 농민항쟁의 집회 장소였다.

 

민중에게 친근한 문화예술은 탈춤, 인형극, 판소리 등이 있었다. 평민들은 민간 신앙, 민간 치료를 행하였으며, 현실 비판적 의식이 민간신앙에 반영되어 후천개벽사상,정감록의 예언사상, 미륵신앙 등이 널리 퍼졌다.

 

이는 주자학적 세계관을 부정하고 민중의 저항의식을 높였으나 사회 모순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대처하는 데 장애물이 되기도 하였다. 무속신앙은 여성들에게 소극적 도피처를 제공하였고, 천주교는 양반 지식인에서 중인층과 서민, 여성들로 점차 확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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