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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모와 같은 교사(1623.2014.7.27.교사헌신예배)
살전2:7-8
7월 28일-30일까지 우리 상주감리교회 전교인 여름수련회를 인천 신현교회 120여 성도들과 함께 하며 교회학교 여름성경학교를 앞두고 교사헌신예배로 드리게 되었습니다. 왜 큰 행사를 앞두고 교사헌신예배를 드려야 하느냐? 그것은 여름행사를 앞두고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준비가 바로 예배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없다면 아무 준비도 안 된 것입니다. 만일 이번에 우리가 하고자 하는 여름행사가 세상에서 하는 일반 수련회나 캠프 같은 것이라면 굳이 기도가 필요 없습니다. 그저 치밀하게 준비하고 재정만 마련하면 됩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하고자 하는 여름수련회와 성경학교는 재정과 치밀한 준비도 필요하지만 여기에 플러스알파, 즉 기도가 필요합니다.
이번 여름성경학교를 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어린이와 학생들의 영혼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영혼을 변화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이번 기회에 하나님의 은혜를 듬뿍 체험하고 그 은혜를 사모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기도가 아니면 도저히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성경학교를 하기에 앞서서 반드시 기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교사 헌신예배로 드리는데 우리 모두가 교사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영혼을 사랑하는 교사가 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유모와 같은 심정’을 가진 교사가 되면 됩니다. 우리 교사들은 유모와 같은 심정으로 학생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스위스 취리히의 ‘슈타인거리’에 한 노인이 나타났습니다. 노인은 길바닥에서 무언가를 주워 주머니에 넣고 있었습니다. 경찰이 노인의 태도를 유심히 살핀 후 물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줍고 있습니까, 습득물은 경찰서에 신고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계시겠지요’, 노인은 경찰관에게 잔잔한 미소를 보내며 대답했습니다. ‘별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그냥 가시지요’ 경찰은 노인의 주머니를 강제로 뒤졌습니다. 그런데 주머니에 들어있는 것은 온통 유리조각이었습니다. 노인은 경찰에게 말했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이 유리조각을 밟아 다칠까봐 주었습니다’ 경찰은 노인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노인은 누구신가요’그러자 노인이 대답했습니다. ‘저는 조그마한 고아원을 운영하는 사람입니다’이 노인이 바로 그 유명한 교육학의 아버지 ‘페스탈로치’였습니다.
오늘 교사헌신 예배를 통해서 우리 교사들이 어떠한 마음 자세로 사역에 임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고 헌신하기로 결단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또한 우리 성도님들도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을 어떠한 자세로 감당해야 할지를 생각하며 주님께 충성하기로 결단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길러야 합니다.
자녀를 기르는 마음으로 교사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심정으로 천하보다 귀한 어린 영혼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살전2:7절‘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엄마가 자식들의 건강을 위해서 얼마나 신경을 많이 씁니까? 맛난 음식을 장만해서 잘 먹이고 싶고 자식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해 주고 싶은 것이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이렇듯이, 교사는 하나님의 말씀, 즉 신령한 젖으로 어린이들을 잘 양육하는 유모와 같습니다. 유모가 보살피지 않으면, 어린아이는 건강하게 자랄 수 없습니다.
유모의 책임이 큽니다. 유모가 아기에게 젖 주기를 거절하는 것 보셨습니까? 젖을 먹이는 어머니는 젖을 빨지 못하는 아기를 걱정합니다. 행여나 자신에게 젖이 나오지 않을까 염려합니다. 아기가 잠시만 보채고 울기 시작해도 얼른 젖을 물리는 것이 모성 본능입니다. 그래서 6살이 될 때까지 나오지 않는 젖을 물고 잠들지 않습니까? 오래전에는 많이들 그랬잖습니까? 아기들이 어머니 몸에서 떨어지지 않고 살던 것이 우리의 원래 모습입니다. 어머니 등에 엎혀 놀다 잠들었습니다. 등에 붙어 있다가 앞으로 돌려 젖을 먹고 또 뒤로 돌아갑니다. 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모체접촉은 지능을 발달시킨다고 합니다. 어머니 몸에서 떨어지지 않을 때 머리가 좋아진다는 말입니다. 그땐 가난해도 사랑하며 살았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모유 수유율이 해마다 떨어집니다. 어머니의 교육수준이 높을수록 모유 수유율은 상대적으로 낮아집니다. 최근에는 아기에게 젖을 안 먹이는 게 ‘지고지순’(至高至純)인 줄 알아요. 최근 통계에 의하면 모유만 수유한다는 어머니는 10% 미만입니다. 모유와 분유를 혼합 수유하는 어머니가 60%쯤 됩니다.
모유만 수유한다는 어머니의 학력은 대졸 이상은 7%밖에 되지 않습니다. 교육 수준이 높을수록 모유 수유율이 현저히 떨어지고 있습니다. 모유 수유율이 떨어지면서 아기에 대한 관심도 떨어지고 있습니다. 모유를 수유하지 않으면 어머니의 유방암 발병율이 높고, 골다공증도 많이 생긴다고 합니다. 모유 수유가 참 좋은데 잘못된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어느 개그 프로그램에서는 개그우먼이 ‘모유수유, 자연분만’을 나올 때마다 외쳤는데도 모유수유도 자연분만도 안 하니까 그 코너가 없어진 것 같습니다.
가정에서 자녀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듯이 교회에서도 다음세대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다음 세대는 우리의 희망입니다. 대를 이어갈 세대입니다. 가문에 대가 끊어진다고 상상해 보세요? 교회에 대가 끊어진다고 생각해 보세요. 상상이 됩니까? 가정에도 교회에도 대가 끊어지지 않도록 다음 세대를 품어주고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다음 세대를 젖을 먹이는 어머니의 심정으로 길러야 합니다. 가정이 잘 되려면 자손들이 번성하고 잘 돼야 합니다. 교회가 잘 되려면 다음세대가 번성하고 잘 돼야 합니다. 지금 우리 세대가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한 우리 세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교회가 모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고전4:15절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성도를 자신이 직접 낳은 자녀라고 합니다. 우리 교회가 다음 세대에 대하여 이런 모성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낳은 것처럼 애정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내 아기에게 젖을 먹이듯 품고 젖을 먹이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음 세대에 희망이 있습니다.
요즘 10대들의 은어에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이런 것들이 있네요. ‘단무지’는 ‘단순, 무식, 지랄’이라는 뜻으로 상대방을 비방하거나 욕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무지 개매너’는 ‘무지’와 ‘개 매너’의 합성어입니다. 매우 매너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는 ‘십장생’이란 게 있습니다. ‘십대도 장래를 생각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십대들도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 우리가 있어 든든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2장에는 예수님의 유년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왔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서로 미루다가 사흘 길을 가서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오지 않은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의 자녀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와 함께 가고 있습니까?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우리와 함께 가고 있는 줄로 알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가 어디에 있는지 다시 한번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66:11절‘너희가 젖을 빠는 것 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젖을 넉넉히 빤 것 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을 인하여 즐거워하리라’고 합니다. 다음세대를 만족하게 하고, 풍성하게 하고, 즐겁게 만들어주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을 교사들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아이들을 영혼의 양식으로 잘 먹이고 신앙 안에서 건강하게 자라도록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명을 감당할 때에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명심해야겠습니다. 작다고 사명감 없이 적당히 하는 것은 천하보다 소중한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것이 됩니다.
우리 교회에 한 번이라도 나왔던 어린이, 청소년들을 기억하며 기도하시는 교사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교회에 안 나와도 전혀 감각이 없는 교사는 회개해야 합니다. 교회에 나오지 않는 아이들은 하나님의 잃어버린 양들입니다. 주님은 그 영혼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죽지는 못할망정 자식을 잃고 찾아 헤매는 어머니의 심정으로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말씀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2. 목자의 심정이 있어야 합니다.
살전2:8절‘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만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고 합니다. 생명을 잉태하려면 내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자가 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목숨을 겁니다. 아기를 가지고, 아기를 낳는 일은 누구나 다 하는 일 같지만 모두가 생명을 거는 일입니다. 내 목숨이 없이 남의 목숨을 살릴 수가 없습니다. 내 목숨을 걸면 남의 목숨을 살리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요재지이’(聊齋志異)라는 중국 청대(淸)의 단편 문언소설집이 있습니다. 이 속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염라대왕이 여자를 심판할 때에 여자가 흘린 눈물단지를 들고 오게 한답니다. 가지고 온 눈물단지에 손가락을 넣어 따끈따끈하면 선녀로, 차가우면 악녀로 심판했다고 합니다. 여자의 눈물은 선악을 분간하는 중요한 도구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땀과 눈물은 곧 생명입니다. 자녀를 위해서나 다음 세대를 위해서나 생명을 바쳐 양육해야 생명을 잉태할 수 있습니다. ‘단장(斷腸)의 애환’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유래는 양자강에서 어부가 새끼 원숭이 한 마리를 잡아서 배로 데리고 갔습니다.
이 광경을 본 어미 원숭이가 새끼를 돌려달라고 소리를 지르며 양자강 하류로 배를 따라 내려갑니다. 얼마나 어미 원숭이가 간절하게 애원하듯 소리를 질렀던지 소리소리 지르다가 결국 어미 원숭이가 죽었는데 죽고 나서 배를 열어보니 장이 토막토막이 나 있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어린 생명과 다음 세대를 위하여 피 끓는 애환이 있어야 합니다. 장이 끊어지는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눅23:28절‘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의 길을 울며 안타까워하며 따라가는 여인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자녀를 위한 눈물, 간절한 기도, 헌신, 피를 토하는 절박함,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자녀를 위하여 우는 만큼 자녀 때문에 웃을 수 있습니다. 땀을 흘린 만큼 수확할 수가 있습니다. 고통만큼 기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녀를 위한 고통, 다음 세대를 위한 수고와 땀은 절대로 헛되지 않습니다. 수고와 땀이 없는 부모는 언젠가는 울 날이 올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음세대를 위하여 수고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한탄한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다음 세대를 어머니처럼 품어 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삼상1:28절‘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라고 합니다. 한나가 사무엘을 드리면서 한 기도입니다. 우리도 한나가 사무엘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드리고 만든 것처럼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요10:15절‘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교사는 어린양들을 먹이고 보호하는 선한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선한 목자라는 것은 양의 생명을 책임지는 참 목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사들에게 어린이들의 생명을 맡기셨습니다. 교사는 세상의 유혹과 마귀의 공격으로부터 어린 영혼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가 방심하는 사이에 어린 생명들이 늑대와 같은 마귀에게 붙잡혀 지옥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벧전5:8절‘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목자는 양을 위해 생명까지 바칠 각오를 합니다. 목자는 자기 양을 알고 그 양을 아주 소중히 여깁니다.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산과 들을 헤매던 목자의 심정이 바로 우리 주님의 마음입니다. 주님은 어린 생명 한 영혼 한 영혼을 그 만큼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교사는 어린 영혼들을 늑대와 같은 마귀로부터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어린 영혼들을 병들게 하고 타락시키는 세상의 잘못된 유혹과 함정으로부터 지켜주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목자처럼, 밤이나 낮이나 양들을 위해 관심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귀의 시험과 유혹은 예고가 없기 때문입니다. 양 도둑은 예고 없이 오기 때문입니다. 교회라고 하는 우리 안에 있는 어린 양들을 사탄에게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지금 우리 교회학교에서 사탄에게 빼앗긴 영혼들이 없는지 생각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미래가 교회학교에 달려 있습니다.
3. 농부의 심정이 있어야 합니다.
제가 잠깐 농사를 지어보니 제일 어려운 것이 잡초인 것 같습니다. 조금만 신경 안 쓰면 곡식은 보이지 않고 잡초만이 무성하게 되었습니다. 옥토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농부의 땀과 정성이 들어가야 좋은 밭이 되고 풍성한 결실을 거둘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교회학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사의 사랑과 정성 그리고 기도가 뒷받침 되어야 어린 생명들이 믿음 안에서 잘 자라나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적당히 하거나 무관심하면 알곡들이 잡초에 묻히게 됩니다. 어린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는 것보다, 세상의 온갖 잡다한 잡초 같은 지식들이 다 차지해 버립니다. 우리 어린이들의 심령에 말씀의 씨앗이 잘 떨어져서 결실하도록 정성으로 가꾸어야 할 책임이 교사에게 있습니다. 우리의 무관심과 방심이 어린들의 마음에 잡초가 가득하게 합니다.
이 세상을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아이들의 눈과 귀, 그리고 마음을 사로잡는 화려한 유혹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재미있는 게임, 깔깔거리게 하는 텔레비전, 흥겨운 음악들이 깨끗한 심령에 잡초들로 들어차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세상 문화로는 영혼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참된 인격과 안식을 줄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4-14세가 되면 영적, 도덕적 기반이 형성되는 시기라고 합니다. 이때가 복음을 가장 잘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라는 것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11-14세밖에 되지 않았을 때 성경적인 세계관으로 훈련을 받았습니다. 사무엘도 어린나이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소명을 받았습니다. 다윗도 어린 소년일 때 광야에서 훈련을 받고 영성의 감각을 갖게 되었고 10대 청소년일 때 골리앗을 물리쳤습니다.
오늘 이 시대의 교육은 IQ(지능지수), EQ(감성지수) 중심에서 SQ(영성지수) 중심으로 전환되고 있다고 합니다. SQ 중심이 되면 나머지는 따라 온다고 합니다. 아이큐가 높다고 이큐가 좋아지지 않고, 이큐가 높다고 아이큐가 좋아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SQ, 영성지수를 높이면 IQ, EQ도 따라서 높아진다고 합니다. 영성지수를 높이면 머리도 좋아지고 인간관계도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통합적 사고가 생기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교육도 이제는 영성교육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사람은 영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영이 바르게 되어야 혼과 육도 잘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잘 되는 것이 바로 이런 영성교육이 잘 되기 때문입니다. 영어나 수학을 위해서 돈을 많이 투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교회교육, 영성교육을 위해서 돈을 많이 투자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헌금하는 것은 아깝게 생각하면서, 자식들 학원 보내는 것은 아깝지 않게 생각한다면 축복을 받기 어렵습니다.
우리 교사들의 헌신과 기도로 우리 교회학교가 살아나는 축복이 임하시기 바랍니다.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귀중히 여기고 살리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선교하는 교회, 선교하는 성도가 복을 받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복음전도의 귀한 사명을 기억하고 맡겨진 교사의 사명, 맡겨진 교회의 직분을 기도하면서 성실하게 잘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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