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매일 시니어문학상 시부문 당선작] 조정명 외
흰빛소리, 운흥 / 조정명
지금 흰빛 아우성이다 봄비 며칠, 최정산에 쏟아지는 흰빛소리 계곡에 가득하다 피어오르는 희뿌연 안개구름에 절집 한 채 숨어있고 버섯구름 닮은 질문만 이백 가지, 항아리에 물 붓듯 대답이 쏟아진다*
모퉁이 돌자 디디던 길 홀연히 사라진다 채근한 일도 없는데 저리 각중에 가버리다니 이 편 저 편 경계는 사라지고 타다만 숯이 된 마음
돌계단 올라서니 불쑥 솟는 산벚나무 두 그루 대답처럼 검은 둥치에 흰 꽃구름 한 덩이 얹혀 있고 수천수만 가지 질문 던져보지만 깨침은 근처에도 못 가고 왕왕거리는 참벌 소리에 하늘만 쳐다본다
처마 끝 풍경소리 딴청부리고 곤줄박이 자진모리로 울어대는 다저녁의 절집 흰빛은 운흥雲興의 소리다 난분분 떨어지는 꽃잎에 눈코입 다 뭉개진 부처의 얼굴, 가던 길 멈추고 선문답 질문을 어루만진다
*운흥이백문 병사이천답雲興二百問 甁瀉二千答, 『화엄경』의 한 구절.
길고양이 / 김경애
날 저문 담장 아래 길고양이 한 마리
핏기 잃은 울음에 눈마저 외눈이다
바람에 두 귀를 맡겨 발소리에 떨고 있는
세상 구석 다 뒤져도 절반만이 답이었나
빼앗긴 먹이 너머 달빛 살금 돌아오면
분노도 사치였던가 저린 발만 핥는다
어둠이 옷을 벗어 새벽길 감싸안고
피다 만 풀꽃마저 흔들리다 잠이 들면
회나무 은빛 그림자 몰래 끌어 덮는다
비렁길은 울지 않는다 / 육현숙
제비꽃 잠 깨는 노송 사이로
금오도 비렁길, 바다 품은 산자락
아름다운 둘레길 자박자박 걷는다
산은 수평선 끌고 와 들숨을 쉬고
고기 잡는 배 편해지는 내 마음
눈부시게 푸른 갯벌 하늘에 닿는다
빨간 동백꽃 통째로 누워
흥건히 바닥에 젖던 그 핏빛 물때
떠난 임 그리던 눈물의 고향바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만 하다 고꾸라진
가슴에 피멍 든 그 동백꽃 엄마
갈대 습지 / 이오동
갈대가 습지의 등에 침을 놓는다
노랑 간호복을 입은 창포와 수련이 옆에서 거든다
저 뿌리 깊은 침, 바람이 흔들어도 끄떡없다
어릴 적 옆집 한약방 아저씨
큰 못을 숫돌에 갈아 대침을 만들었다
업혀 온 사람들은 비명 한 번에
제 발로 걸어 나가니
마을에서는 맥을 잘 짚는 명의라고 했다
먹빛 얼굴로 고통스럽던 시화호
갈대 침을 맞고 푸르게 살아났다
원앙새 황조롱이 해오라기 장다리물떼새가
둥지를 틀고
너구리 수달이 달빛에 기웃거린다
흔들려도 맥점을 놓치지 않는 갈대
용한 의원이 있다는 소문 듣고
물고기며 새 떼가
제 상처를 씻으려고 찾아들고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방법을 터득한 갈대가
오염된 자연을 회복시키고 있다
오늘도 안산갈대습지는
침을 맞으려 찾아온 손님들로 만원이다
미틈달 / 박찬정
잎샘바람에 봄꽃 파르르 떨고
마른 나무 물 긷는 소리
새잎 돋는 아우성
아궁이 앞 부지깽이도 뛰는 봄날
뒤란 밭 아욱 뜯는 새 며느리
종종걸음 발자국 조차 부산하다.
밭고랑에 엎드린 아낙의 어깨 위로
오뉴월 긴 볕이 쏟아진다
작달비 아니라도
먼지잼 한 줄기 지나가면 좋으련만
엊저녁 노을은 야속하게 붉고
배롱꽃 지면 더위 한풀 꺾인다는데
진분홍 꽃잎은 쉬 지지도 않더라
길어지는 산 그림자 따라
산 아랫도리 마지막 드는 단풍
발 아래 마른 잎 바스라지는 소리
마당가 잔 국화가 가리늦게 피었는데
상강은 벌써 지나고
오늘밤 첫 서리 오려는지.
봉인 뜯긴 세 계절은 가고
볕드는 창가에 기대서서
양손에 감싸 쥔 대추차 한잔이 그립다
돋움발 고개를 빼고 기다리지 않아도
손돌이 바람에
볼 시릴 날 머지 않으리
제10회 매일시니어문학상 <시 심사평>
'코로나19'라는 지구상 유례 없는 재앙을 벗어났음에도 줄어들지 않는 계층 간 양극화와 사회적 갈등으로 인한 가치관의 혼란은 숙지지 않는 요즈음이다. 이 같은 시대상을 반영이라도 하듯 문학이라는 형이상적 이상의 추구를 통해 정신의 건강성을 찾아 삶의 가치를 재고하려는 시니어들의 대안 노력이 확장되는 양상이다. 이를 반영하듯 10회를 맞은 매일 시니어문학상 시·시조 부문에는 전국적인 규모를 벗어나 미국, 독일 등 국제적으로도 응모자가 몰려 수준 높은 작품들로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여느 신춘문예의 수준에 버금가는 농밀한 구성력과 현란한 언어 조탁, 현학적으로 전개된 작품들을 읽어나가던 심사를 잠시 멈추고 '시니어문학상'의 제정 취지에 걸맞은 경륜과 바람직한 체험적 가치 덕목을 선고의 중심에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데 두 심사위원은 합의를 했다. 당선권에 접어든 작품들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의 완성도를 지녔고 기성 문단에도 자극이 될 만한 수준을 보여줬다.
심사숙고 끝에 조정명의 '흰빛소리, 운흥', 김경애의 '길 고양이', 윤현숙의 '비렁길은 울지 않는다', 이오동의 '갈대 습지', 박찬정의 '미틈달' 등 다섯 편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화엄경 구절의 '운흥'에서 빌린 끝없는 물음을 자기 보법으로 쫓아간 '흰빛소리, 운흥', 길 고양이의 고독한 존재를 통해서 삶을 읽어낸 '길 고양이', 어머니의 지난한 삶의 실천 뒤에 남은 교훈을 체득한 '비렁길은 울지 않는다', 습지의 관찰을 통해 체험적 삶의 진정성을 교감해나간 '갈대 습지', 계절의 경계에서 시간의 소중함을 추적한 '미틈달'의 각기 다른 개성은 시니어문학이 갖춰야 할 충분한 가치 덕목을 지니고 있었다.
강문숙 시인 민병도 시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