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 2023년 6월 14일
장소 : 제주신화전설탐방로
문화탐방지도사 11기 심화 _ B조 시연 자료
_B조 발표 순서 및 주제
땅에서 솟아난 삼신의 이야기 _ 탐라건국신화 / 장경민
바람잘날 없는 제주 _ 영등할망 / 부대영
문제적 인간 _ 풍수사 고종달 / 정명환
옥황상제의 의도된 계획 – 할락궁이, 이공본풀이 / 김정희
바위돌여신 산방덕이의 눈물 _ 산방덕과 고성목 / 최미숙
제주해녀 / 이문철
【땅에서 솟아난 삼 신의 이야기_탐라건국신화】 - 장경민
안녕하세요. 문화탐방지도사11기 장경민입니다.
오늘 저는 이곳 제주신화전설탐방로에서 해설사 시연을 끝으로 문화탐방지도사 기본과 심화과정을 마치게 됩니다. 지금까지 지도해주신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에게는 11살 아들이 있습니다. 오늘 저는 제 아들이 친구들과 함께 현장체험학습을 나온 이곳에서 해설사 선생님이 되겠습니다. 선생님들께서는 지금부터 체험학습을 온 초등학생이 되어 주시면 되겠습니다. 시연 시작하겠습니다.
● 안녕하세요. 제주신화전설탐방로 ‘신나락만나락’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신나락만나락’이란 신과 인간이 만나 함께 즐거워 한다는 의미입니다.
제주는 옛날 ‘탐라’ 라는 나라의 역사를 품고 있는 신화와 전설의 고장입니다. 선생님이 오늘 이 곳에서 탐라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세 신과 바다 건너 온 세 공주에 대해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탐라는 옛날 제주도에 존재했던 나라로 때때로 ‘탐모라국’, ‘섭라’, ‘탁라’, ‘담모라’, ‘담라’등으로 불려졌는데 이 이름에는 어떤 뜻이 있을까요? 아는 친구 있을까요? ………
네. 맞아요. 이 이름들은 모두 섬나라를 의미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제주섬에 옛날 탐라라는 나라가 있었어요. 사람마다 자신의 뿌리가 있는데 제주인의 뿌리는 이 탐라국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어요. 제주도에 전해오는 신화에 따르면, 제주의 역사는 세 명의 신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해요. 이들이 제주인의 시조가 되는 삼신인데 독특하게도 땅에서 솟아났다고 해요. 모흥혈이라는세 구멍인데 삼신인이 용출하였다 하여 삼성혈이라 하며 3개의 지혈이 있다고 해요. 가야나 신라ㆍ고조선ㆍ부여등의 우리나라 고대 다른 나라 시조들이 하늘에서 내려오거나 알에서 태어난 것과는 차이가 있죠.
또한 시조가 한 사람도 아니고 셋인 점도 다르네요.
우와~ 점점 탐라국에대한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여러분도 그렇죠?
그럼 지금부터 탐라국의 건국신화에 대해 이야기 해 줄께요.
이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4,300년 전의 일이예요.
◆ 아득한 옛날 한라산 북쪽 기슭 모흥혈에서솟아난 세 신의 모습은 체형이 매우 크고 넓어서 인간사회에는 없는 신선의 모습이었어요. 이 삼신인은가죽옷을 입고 사냥을 하는 원시 수렵생활을 하며 사이좋게살고 있었어요. 삼인의이름은 양을나, 고을나, 부을나라고 했으며 ‘을나’란 왕 또는 우두머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하루는 이들이 한라산에 올라가 멀리 바라보니 동쪽 바다 위에서 오색찬란한 나무상자가 떠내려와 해안에 머물러 있는 거예요.
3신인이 내려가서 이 나무상자를 열어 보았더니그 안에 또 돌로된함이 있고,붉은 띠에 자줏빛 옷을 입은 사자(使者) 한 사람이 따라와 있었어요. 사자란 임금이나 신의 명령을 받고 심부름을 하는 사람을 말해요. 이 사자가 나와 함을 여니 푸른 옷을 입은 세 명의 처녀가 있었어요. 그리고 망아지와 송아지 등의 가축과 곡식(쌀,보리,조,콩,기장)종자 다섯가지가있었다고 해요.
사자가 3신인에게 말하기를- 나는 동해 벽랑국(碧浪國)의 사자요. 우리 임금께서 이 세 분 공주를 두셨는데, 혼기가 차도록 배필을 구하지 못해 안타깝게 여기고 계셨소. 그러던 중 서해 높은 산에 3신인이 있어 장차 나라를 세우고자 하나 마땅한 배필이 없다는 걸 아시고, 신(臣)에게 명하여 3공주를 모시고 오게 하였니, 마땅히 배필로 삼아 대업을 이루소서- 하고는 홀연히 구름을 타고 사라져버렸어요.
그래서 3신인은 나이 순서에 따라 3공주를 각각 배필로 정고, 이들을 맞아 지금의 성산읍 온평리마을 서쪽에 있는 혼인지라는 연못에서 혼례를 올려요. 지금의 결혼식이예요. 그리고 그 함 속에서 나온 송아지·망아지를 기르고 오곡의 씨앗을 뿌려 태평한 생활을 누렸어요. 이로부터 제주도에 농경과 목축 생활이 시작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어요.
당시 3공주가 들어 있던 목함이 발견된 곳(현재의 온평리 바닷가)은 속칭 '쾌성개'라고 불리는 곳인데 이 쾌성개라는 지명은 세 을나가 해변에서 발견한 목함을보고 ‘무언가 귀중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쾌성을 올렸다하여 ‘쾌성개’라고 한다고 해요.
또한 이것이 도착한 해안은 '황루알‘이라 불리는데 벽랑국공주를 맞았을 때 황금 노을이 내렸다 해서 황루알이라고 불렸어요.
지금도 여기에는 3신인이 바닷가에서 처음 디딘 발자국이 암반에 남아 있다고 하고요, 바닷가 물결이 출렁대는 평평한 바위에 흡사 발자국같이 패어 있는 것이 그 3신인의 발자국이라고 해요. 그리고 발자국이 있는 그 곳은 ‘물성개’라고 불리고 있어요.
사냥을 하며 동굴 같은 곳에 살던 세 을나는결혼을 하고 가족이 생기고, 농업과 목축업을 시작한 뒤 점차 제 몫의 땅이 필요해졌어요. 그래서 세 을나는 각자 자기가 살아갈 터전을 결정하는 데 화살을 이용했하기로 했어요. 활을 쏘아 화살이 떨어진 곳에 살 터전을 잡는 것이었죠. 가장 먼저 양을나가 쏜 화살이 가장 동쪽에 떨어졌고, 둘째로 고을나가 쏜 화살이 지금의 삼성혈 인근에 떨어졌어요. 셋째로 부을나가 쏜 화살은 그 서쪽에 떨어져서 각각 제일도ㆍ제이도ㆍ제삼도라고 하였죠. 그것이 현재 제주시의 일도동ㆍ이도동ㆍ삼도동의 유례인 거예요..
또한 세 을나가 활을 쏘았던 장소는 제주시 봉개동과 아라동에 걸쳐 있는데, 제주도 말로 쌀손장오리(또는 사시장올악)라고 해요. 쌀(살)은 화살을 뜻하는 말이며 쌀손장은(살손장)은 화살을 쏜 장소라는 의미가 되며 이것이 오름의 변형어인 오리와 합쳐지면서 지금의 이름이 유래하게 된 것이예요.
또 세 을나가쏜 화살이 돌에 박혔다 하는데 이 돌들을 모아둔 곳은 제주시 화북동에있는 삼사석이라는 곳이예요.
어때요? 신화란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들여주시는 옛날 이야기 같지만 지금 현존하는 곳의 지명이나 유물, 흔적 등을 통해서 상상 속의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수 있어요.
신화란 문헌신화와 구전신화가 있는데 문헌신화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세종실록지리지 처럼 글로 기록된 것이고 구전신화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예요.
오늘 선생님이 들려준 탐라건국신화는 ‘고려사’ 라는 조선시대에 편찬된 역사서에 그 기록이 남아있어요. 그래서 탐라건국신화는 문헌신화라고 할 수 있죠.
● 지금까지 선생님이 이야기 해준 탐라건국신화 재미있었나요? 잘 기억했다가 집에 가서 부모님이나 동생에게 들려주면 아주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될거예요. 우리 친구들 오늘은 삼신인과 세 공주가 되어 제주신화전설 탐방로 ‘신나락만나락’을 신나게 즐기고 가세요.
【영등할망】 - 부대영 선생님
제주인들의 기후 문화 중 대표적인 것이 "영등 신앙"인데요,
영등신앙은 제주 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전역에서 행해지고 있는데, 제주도가 가장 뚜렷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영등신앙은 흔히 ‘영등제’, ‘풍신제’라는 형태로 전승되지만 의례 방식, 제물 규모, 의례 참여자의 성격 등 지역마다 전승 양상이 차이를 보이기도 합니다.
제주도의 영등신앙의 형태를 보면, 공동체가 중심이 되어 영등굿을 하기 때문에 개별 가구를 중심으로 전승되는 지역보다 매우 성대하게 치러진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또한 영등을 맞이하는 굿만이 아니라 영등을 보내는 배송굿이 따로 존재하며, 맞이하는 굿보다 배송굿에 더 큰 의의를 두고 있다고 합니다.
※ ‘제주 칠머리당영등굿’은 중요무형문화재 제71호(1980년)로 영등할망이 들어오는 음력 2월 1일에는 영등 환영제를, 14일에는 영등 송별제를 지냄
그리고 영등신의 신격이 구체화되어 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영등신을 흔히 외방신으로 해석해 구체적으로 어느 곳에서 왔는지 밝히지 않고 있는데, 제주도에서는 영등신을 강남 천자국 또는 외눈박이 섬에서 온 존재로 구체화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현재 제주도의 영등굿은 칠머리당굿 등 12개 마을 등에서 전승되고 있습니다.
제주에는 영등신과 관련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음력 2월이 되면 영등신이 강남 천자국에서 산 구경, 물 구경을 하러 제주에 와서 한라산에 올라가 설문대 할망의 아들 오백장군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고 난 뒤 제주 곳곳을 돌아다니며 생명의 씨앗을 뿌리고 돌아간다는 이야기와
제주 한림에 사는 어부들이 고기잡이하러 먼바다로 나갔다가 폭풍우를 만나 외눈박이 거인들에게 발각돼 어부들은 큰 위험에 처하게 되었지만, 영등할망 도움으로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일 때문에 영등할망은 외눈박이 거인들에게 죽음을 당하고 온몸이 찢겨 이곳 저곳에서 밀려오게 되었고, 그때 부터 영등을 신으로 모시며 영등제를 지내기 시작했고, 영등신을 해상사고를 방지해 주는 수호신으로 모셨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들 이외에도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영등할망은 영등 달인 음력 2월 초하루에 한림읍 귀덕리 복덕개 포구로 들어와 2월 15일 우도를 통해 제주를 떠나는데, 제주에 머무는 동안 섬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곡식과 소라· 전복·미역 등 해산물의 씨를 뿌려주며, 해상활동을 보호해 준다고 하여 해녀와 어부들이 중심이 되어 영등굿을 치른다고 합니다.
하지만 바람의 신인 영등할망이 머무는 제주의 음력 2월은 강풍이 불고 풍랑이 거센 궂은 날이 많아, 이 기간에는 해녀의 물질을 비롯해 바다에서의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농사일, 집안일 등도 무척 조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영등할망이 딸을 데리고 올 때는 날씨가 좋고, 며느리를 데리고 올 때는 날씨가 궂다는 속설도 있습니다.
조선조 중종 25년(1530)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제주목 풍속 조에 “2월 초하루에 제주의 귀덕·김녕·애월 등지에서 영등굿을 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나무장대 12개를 세워 놓고 신을 맞아 제사했다 하고, 애월 사람들은 약마희(떼몰이)를 하여 신을 즐겁게 하다가 보름날이 되면 파했는데 이를 영등이라 했다고 한다. 이 달에는 배 타는 것을 금했다"라는 내용도 나온다.
이러한 제주도의 영등굿에 관한 내용들은 이원지의 《탐라지》를 비롯해 헌종 15년(1849)에 편찬된 홍석모의 《동국세시기》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보아 제주도의 영등굿 역사는 최소한 500년 이상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 떼몰이 놀이 : 짚으로 만든 조그만 배(퇴 승선)에 제상에 올렸던 갖가지 제물과 돈, 백지를 실어서 동쪽 바다로 띄워 보내는 의식
영등할망이 귀덕으로 들어와 우도로 나간다는 것은 북서계절풍이 제주도 서쪽으로 들어와서 동쪽으로 빠져나가는 진로와 일치합니다.
그리고 영등할망과 포목 장사의 이야기에서도 온몸이 조각나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는 표현들이 있는데, 이는 날씨가 나쁠 때 바다에 나가지 말라는 경고가 아닌지 생각합니다.
영등할망은 제주지역의 2월 날씨와 다름이 없는 존재로, 자연현상이 신격으로 자리 잡은 것이라 볼 수 있으며, 마을 단위로 영등굿을 하며 영등할망을 위했던 것은 날씨가 일 년 내내 농사와 어업활동에 지장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을 것입니다.
영등신앙에는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친화하려는 선인들의 지혜가 담겨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요. 우리도 자연에 대하여 좀 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정말 제주에는 다른 지방보다 바람이 많이 부는 것일까?(연합뉴스)
제주 기상청이 1992년부터 2021년 30년간 자료를 분석한 결과, 평년값 기준으로 제주도의 연평균 풍속은 2.5∼6.8m/s로, 다른 지역보다 바람이 강하게 불며, 기후 평년값이 제공되는 전국 219개 지점 중 연평균 풍속이 가장 강한 곳은 고산이다.
※ 제주 지역별로는 제주 3.3m/s, 고산 6.8m/s, 성산 3.1m/s, 서귀포 2.5m/s로 제주도 서쪽 끝 고산에서 가장 강하게 불고, 남부 서귀포에서 가장 약하게 부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30년간 제주도의 폭풍일수(일 최대풍속 13.9m/s 이상인 일수)는 총 129일이다.
제주도와 기상관측 역사가 비슷한 전국 6개 지점의 평균 폭풍일수(21.5일)보다 월등히 많아 제주에 강풍이 얼마나 자주 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등달에는 다른 달에 비해 바람이 강하게 불까?(연합뉴스)
영등달을 전후로 제주도의 음력 1∼3월 평균풍속을 비교해 보면 영등 달인 음력 2월 평균풍속은 4.4m/s로 음력 1월(4.6m/s)보다는 다소 약했고 음력 3월(3.8m/s)보다는 강하게 나타났다.
30년간 영등날 평균풍속은 4.6m/s로, 이는 영등달 평균(4.4m/s)보다 조금 높아 영등달 중에서도 영등날에 평균 이상으로 바람이 불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문제적 인간, 풍수사 고종달(호종단)】 - 정명환 선생님
제주도 산천의 기운을 없애 영웅의 탄생을 막으려고 하였던
풍수사 고종달(호종단)의 최후를 담은 이야기가 용맹한 장수매의 모습에 담겨있다.
장수매의 위용은 우뚝 솟은 한라산을 떠올리게 하며, 외세에 대항하는 제주 사람들의 저항정신을 상징한다. 날카로운 매의 발톱에 짓눌린 칼만 남긴 채 차귀도 앞바다에 수장된 고종달의 비참한 최후를 보여준다.
(신화역사공원, 풍수사 고종달)
●중국 진시황제, 탐라의 물 혈을 끊으라 명하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아놓고 미래의 적들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하루는 지리서를 펴놓고 이곳저곳을 훑어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제주도에 이르렀을 때,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제주도의 혈 자리마다 훌륭한 인재들이 날 형세였던 것이다. 그 속에서 자신을 위협할 인물이 나올 수도 있겠다 생각한 그는 풍수사 고종달을 불렀다. “지금 당장 제주도로 가서 그곳의 물 혈들을 모두 끊어놓아라.” 좋은 샘물이 없으면 인재 역시 나올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이와 관련하여 또 다른 이야기도 있다. 진시황이 후궁을 얻었는데, 제주도 출신의 절세미녀였다. 얼마 후 후궁은 알 다섯 개를 낳았는데, 알은 계속 커지더니 그 안에서 장군 오백 명이 나왔다. 오백 장군이 날마다 뛰어다니며 전쟁놀이를 하는 통에 진시황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용한 점쟁이에게 물어보았더니 오백 장군은 제주도 장군 혈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기 때문에, 제주도의 장군 혈을 끊어야 그 기운을 잡을 수 있다고 했다. 진시황은 고종달에게 제주도의 장군 혈을 끊어놓고 오라고 명령했다.
●고종달, 탐라에 도착하다
명을 받은 고종달이 탐라에 도착한 첫 마을이 지금의 종달리였고, 마을 아이들에게 “여기가 어디냐?” 라고 물으니 아이들은 “종다리”라고 했다. 본래 마을 이름이 종다리여서 그렇게 말한 것인데, 자신의 이름으로 착각한 고종달은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 것을 우려하여 마을의 혈을 끊어 버렸다. 그러자 마을의 샘들이 거짓말처럼 말라버렸다. 고종달은 종다리를 시작으로 탐라의 마을들을 돌며 혈을 끊었고, 그렇게 탐라의 샘물들은 모두 말라버렸다.
※종다리/ 성산 근처 종달리 마을 별칭. 그리고 제주 지역에서 서식하는 새의 이름도 종다리. 종달새라고 하기도 하고(둘 다 표준어), 유명한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에서 나온 '노고지리'도 종다리의 옛말이다. 종다리는 번식기인 봄철에, 특히 보리밭이 파릇파릇할 때 지상에서 30m 이상 올라가 구름 속에서 날개를 펄럭인다. 마치 구름 속을 왔다 갔다 한다는 의미에서 운작(雲雀)이라 하였으며, 다른 말로 고천자(告千子)라고도 한다. 이는 종다리가 땅위에서 벌어지는 일을 들었다가 하늘로 올라가 일러바친다는 의미. 제주에는 종다리의 머리 모습을 보고 ‘총대기’라 부르는데, 종다리 뒷머리에 약간 위로 나 있는 짧은 깃털은 바람이 불 때 특히 번식기에 뚜렷하게 구분된다.
그러던 어느 날, 고종달이 혈을 끊기 위해 마을을 찾고 있을 때였다. 한 마을에서 농부가 밭을 갈고 있는데 백발노인이 나타났다. 백발노인은 놋그릇에 물을 가득 담고, 그릇을 소의 길마에 감추면서 “누가 와서 이 물을 찾더라도 모른다고 하시오.”하고는 사라졌다. 얼마 후 고종달이 물 냄새를 잘 맡는 개를 데리고 농부가 일하는 곳을 지나게 되었다. 고종달은 지리서를 보고 샘을 찾아다녔지만, 찾을 수 없자 농부에게 물었다. “꼬부랑 나무 아래 행기(놋그릇)물이 어디 있느냐?” 농부는 처음 듣는 이름인지라 모른다고 했다. 그때 물 냄새를 맡은 개가 소의 길마가 쪽으로 다가섰는데, 농부는 자신의 점심을 훔쳐 먹는 줄 알고 개를 쫓아 버렸다. 이렇게 해서 어리석게도 샘을 찾지 못한 고종달은 지리서를 찢고 어디론가 떠났고, 이 마을의 샘만은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고종달은 산방산에 이르렀는데, 이곳은 지리서에 왕후지지(王侯之地)로 되어 있다. 즉 왕이 날 지맥이라는 것이다. 고종달은 지리서를 살피면서 왕후지혈을 찾았는데, 그곳이 바로 용머리였다. 용의 머리처럼 생긴 지형이었다. 만약 이 땅이 살아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왕이 될 것이 틀림이 없다고 믿었다. 고종달은 용의 잔등을 끊었다. 시뻘건 피가 솟아나 그 주변을 붉게 물들였다. 지금도 용머리에는 꼬리와 잔등이 짤려진 것 같은 모양의 지형이 있다.
●고종달, 차귀도의 귀신이 되다
탐라의 혈을 거의 끊은 고종달이 중국으로 가기 위해 탄 배가 고산 앞바다의 죽도를 지나고 있을 무렵, 이때 한라산신이 매(장수매)로 변신해 고종달이 탄 배 위로 날았고, 갑자기 광풍이 일어나 고종달은 매바위 섬 앞바다에 빠져 죽게 되었다. 그로 인하여 매바위 섬은 고종달이 되돌아가지 못했다는 뜻을 지닌 ‘차귀도’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일부에서는 고종달이가 광양당신에 의해 바다에 빠져 죽었다고도 한다.
●고종달과 호종단
설화에서는 중국 지관이라고 했지만, 실제 고종달은 고려인이다. 정확히 말해 고려 예종(1106-1122) 때 인물로 송나라에서 고려로 귀화한 사람이다. 본래 이름은 호종단(胡宗旦)이며, 제주에서는 고종달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사』에 보면 “호종단은 중국 송나라 복주 태생으로 중국 태학(太學)에서 공부했으며, 고려 예종 때 상선을 타고 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고려에 귀화한 호종단은 “예종의 총애를 받아 고려의 ‘국가 풍수가’로 활동했다.”라고도 한다.
중국 진시황 설화에서는 고종달이 중국황제의 명으로 혈을 끊었다고 하지만, 실제 역사는 고려 왕조의 명으로 보인다. 고려의 예종은 당시 탐라를 완벽하게 지배하기 위해 자신이 총애하던 호종단을 파견했고, 호종단으로 하여금 고려의 지배 체계를 확립하려고 했다. 왕의 명령이었지만, 어쨌든 호종단은 당시 탐라의 백성들에게는 공포와 원망의 대상이었고, 이러한 인식이 설화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맺음말
자연적인 조건이 열악해서 생활 형편이 어려운 제주의 실정을 외세에 의해 단 맥 되었으므로 물도 귀하고 인물도 귀하게 되었다는 식으로 설명한다. 이것은 제주의 역사와 제주 사람들이 자신들의 지난한 삶을 합리화하는 소극적인 면과 그동안 수없이 당해온 중심부 세력에 대한 저항의 심사를 형상화한 것이다. 고종달이 중국인라는 설정은 바로 이러한 데에 기인한다.
설화에서 보듯이 제주 사람들은 풍수를 신앙처럼 믿었다. 물이 나오지 않는 것도 풍수와 관련이 있고, 한 집안이나 지역의 흥망성쇠도 모두 풍수와 관련이 있다. 제주에서 왕도 맹수도 안 나오는 연유를 풍수사상을 통하여 설명하고 있다. 호종단이 제주의 수맥과 지맥을 끊으려 하자 한라산신이 탐라의 백성(행기물 농부)과 협력하여 이를 물리치는 대목에서 탐라가 주변국에 복속된 뒤부터 밀려드는 외세에 힘을 모아 저항하겠다는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옥황상제의 의도된 계획 –할락궁이, 이공본풀이】 - 김정희 선생님
제주사람들은 인사할 때 `어더레 감수과?(어디 가세요?)` 물으면 `굿밧디 감져(굿하는 데 간다)`하고 대답할 정도로 밭에 가는 것만큼 제주 사람들에게 굿은 생활의 일부였습니다.
제주 굿은 마을 공동체 굿과 사가에서 치르는 굿으로 나누어 지는데
마을공동체 굿은 날짜와 공간이 정해져 있고 마을의 무사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굿입니다.
사가에서 치르는 굿은 비정기적으로 행해지고. 치병, 개인적 건강, 행복과 자식 번창, 개인적 산육 등의 이유로 굿을 하게 됩니다.
굿은 당클의 숫자에 따라 굿의 규모를 알 수 있는데요. 당클이란 집안에서 굿을 할 때 마루의 벽면 상단에 신을 모시기 위해 선반처럼 설치한 신의 좌정처입니다. 그 선반이 네개 벽에 매어있으면 사당클이라하고 3개는 중당클이라 합니다. 제주 큰굿은 사당클이 준비되어 있고 낮과 밤 두이레, 14일 동안 굿을 하게 됩니다. 또 심방 집에서 하는 굿을 신굿이라 하는데 신굿은 굿 법 즉 저승 법에 따라 완벽한 굿의 체계와 질서를 지닌 종합 굿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주 큰굿이 다른 지역의 굿과 다른 점은 신을 초대하여 그 신의 내력을 풀고, 신맞이를 하고 신과 함께 놀이를 한다는 과정이 유기적이고 체계적으로 잘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또 하나는 본풀이와 제주어를 심방의 구송을 통해 들려준다고 해서 구비문학사전이라 합니다. 제주 큰굿은 모두 열두 본풀이로 되어 있고 2021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공본풀이>는 제주 큰굿 열두 본풀이 중에 네 번째로 진행되며 서천꽃밭에서 삶과 죽음의 꽃을 관장하는 꽃감관 할락궁이의 내력을 풀이하는 서사무가입니다.
이공 신 할락궁이는 서천꽃밭을 지키는 꽃감관 사라도령의 아들로 천년장자에 의해 죽은 어머니 원강아미를 환생꽃으로 살리고 권력과 폭력의 신, 욕망의 신, 천년장자를 멸망꽃으로 멸하게 됩니다. 그리고 서천꽃밭으로 돌아가 어머니는 어린 영혼을 돌보는 꽃생인이 되고 할락공이는 아버지 대를 이어 꽃감관으로 좌정하게 된다.
이렇듯 서천꽃밭은 생명의 근원지이면서도, 선을 누르고 이승을 차지하려는 악을 징계하여 다스리는 역할을 하는 특수공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명을 관장하는 아주 중요한 서천꽃밭을 아무에게나 맡길수 있을까요?
조금이라도 게을리하거나 한눈을 파는 순간 서천꽃밭에 꽃들은 검을꽃으로 변해 이승이든 저승이든 질서가 무너져 혼돈에 빠지게 되는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자격이 갖추어져야 할까요?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고 선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자이지 않을까요?
이공본풀이에는 사라도령의 가족들이 고난을 이겨내는 과정이 드러납니다. 1대 진진국은 가난, 2대 사라도령과 원강아미의 이별 그리고 원강아미는 천년장자로부터 지켜야 할 정절, 원강아미의 혹독한 노동과 고문을 이겨내야 했고 3대 할락궁이는 천년장자의 부당한 대우와 노동에 맞서야 했습니다. 이렇게 3대에 걸쳐 남자들의 고난을 이겨낼 수 있도록 한 것은 원강아미의 희생에 바탕을 둔으로 옥황상제의 의도된 설계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사를 관장하는 꽃을 관리하는 일이였기에 옥황상제는 서천꽃밭의 꽃감관을 정하는데 신중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사라도령을 꽃감관으로 임명하기까지 옥황상제는 할락궁이 할아버지 진진국부터 시험에 들게 합니다. 진진국은 40세가 되도록 아이가 없었지만 아이를 점지해 달라고 올릴 재물이 없을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어느 날 부자 원진국의 권유로 불공을 드리게 되었는데 많은 재물을 올린 원진국보다 쌀 한사발이라도 정성을 들여 올린 진진국이 옥황상제의 마음에 쏙 듭니다. 이때부터 사라도령과 할락궁이가 대를 이어 꽃감관으로 좌정할 수 있는 길을 터준 듯 합니다.
또 사라도령과 할락궁이가 꽃감관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누구의 덕이였을까요?
그것은 원강아미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원강아미가 자신을 천년장자의 종으로 들어간 덕에 사라도령이 무사히 서천꽃밭으로 갈 수 있었고 할락궁이 역시 원강아미의 모진 고초를 이겨낸 덕분에 꽃감관으로 좌정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주사람들은 할락궁이를 신격화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꽃을 생명의 기원으로 여기는 의식은 인류공통으로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할락궁이에게 생명꽃과 멸망꽃을 다스리는 능력을 부여함으로써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현상계를 유지하고 회복시켜나가려는 제주사람들의 의도였을 것입니다.
제주 사람들은 서천꽃밭의 환생꽃은 이승에서는 동백꽃이라고 합니다. 제주인들은 동백꽃을 새 생명을 잉태하는 생불꽃과 부활을 상징하는 환생꽃으로 생각한다. 그러한 이유로 제주의 전통 굿인 불도맞이 굿에서도 산육신인 삼승할망에게 흰쌀을 담은 놋사발에 동백꽃 가지를 꽂은 꽃사발을 올린다고 합니다.
서천꽃밭이 나오는 신화로는 이공본풀이이외에도 〈바리공주〉, 〈세경본풀이〉, 〈문전본풀이〉, 〈생불할망본풀이〉 등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공본풀이가 신화사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여신 위주에서 남신 우위로의 변화와 설화나 소설 등 다른 분야에 영향을 주면서 변화해 왔다는 점에서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습니다.
제주에 신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제주사람들이 신을 위해 정성을 들이면서 자신의 삶에도 정성을 다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저는 이공본풀이를 알아보며 제주 속담 중에 이런 말이 떠올랐습니다.
❝살당보민 다 살아진다.❞
출처 : 한국민속 설화 : 이공본풀이. 열부본풀이:이용옥 심방 이공본풀이, 서순실 심방 이공본풀이. 한국민속신앙사전 ; 무속신앙 편.
【산방덕이와 고성목】 - 최미숙 선생님
1..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해안에 있는, 높이 395m의 산방산은,2011년 명승 제77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산 중턱에 길이 10m의 천연동굴이 방처럼 생겼다하여 ‘산 속에 방이 있는’ 산방산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남서쪽 해발 절벽에는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풍화혈이 발달되어 있는데요 해발200m쯤에 있는, 고려말 혜일선사가 불상을 모셔놓고 창건한,산방굴사는, 바다를 향한 특색있는 경관으로, 예부터 영주십경중 하나로,사랑받아 왔습니다.
굴의 천정에서는, 수정같은 맑은 물방울이, 사시사철 눈물처럼 떨어져 내리는데, 이는 산방산의 암벽을 지키는, 여신 산방덕이 흘리는, 사랑의 눈물이라는, 전설이 있습니다.
2..옛날 산방산에 여신이 살고 있었어요. 산에서 내려왔다하여 산방덕이라 불렸는데,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이 소원이라, 인간세상으로 내려와, 병든 어머니에게 지극정성이던 화순리의, 고성목이라는 사람과 부부가 되었습니다.
고성목은 비록 미천한 신분이었으나 비범하고 부지런하여 열심히 일했습니다. 여기에 산방덕의 재물운이 더해져 얼마 뒤 큰 부자가 되어, 머슴들을 자신의집 주변에 살게 하고 호위할 무사들의 집도 지었습니다.
동네에서 물맛이 좋기로 소문난, ‘곤물’이 있는 곳에 과수원과 별장을 지어, 산방덕을 살게 하고 비가 오는날에는, 오가는 길이 불편하다하여, 산돼지 수백마리를 잡아다, 그 가죽으로 장막을 만들기고 했습니다.
3..고성목이 이리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사실이, 대정 고을 사또에게 알려지자, 관에서 나와 살펴보니,고성목의 집터가 금계포란형으로, 이 집터에 사는 사람은 큰부자로 살며, 큰일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에, 사또는 화가나서, 그의 재산을 빼앗고 아리따운 산방덕이도 자신이 차지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일을 시켜 해내지 못하면 벌을 주려 했습니다.
우선 사또가 순력을 하게 되었다하여 담배씨를 사용해 석자 두께로 길을 메우라고 했습니다. 고성목은 하루만에 이 일을 해 냈어요.
다시 사또는 순력할 때, 뒤따르는 관속들이 쓸, 갓과 망건 백개를 만들라고 했습니다. 이 일도 하루만에 해 냈습니다.
4..사또는 이런 고성목의 능력에, 겁을 먹게 되었어요. 그래서 그가 역모를 꾸민다는 소문을 내고는, 그를 잡아들여 재산을 모두 빼앗고, 집을 불태웠으며 집터를 파헤쳐 버렸습니다. 고성목 또한 관에서의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죽게 되었습니다. 산방덕이는 고성목이 잡혀가자,자신도 곧 잡혀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추악한 인간세계에 내려와, 사람이 되었던 것을 후회하며, 산방산 산방굴 안으로 들어갔는데요,이때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돌로 변해 버렸답니다. 이후 산방굴 천정에서는, 맑은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는데요.이는 사랑의 인연을 다하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던,바위굴 여신 산방덕이, 흘리는 눈물이라 합니다.
5..고성목은 뒤에, 화순리 곤물동네의 당신이 되었습니다.
그 당신본풀이에 따르면, 고성목도 대단히 영웅적인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요,,고성목을 달리, 고승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거대한 조면암으로 구성된 산방산은, 약80만년전, 해져 용암층이 바다에서 분출돼, ,천천히 올라오면서 흘러나와, 멀리 뻗지 못하고 굳어져, 분화구가 없는 종모양의 형태가 되었답니다. 인근에 있는 용머리 응회환과 함께, 제주도에서 가장 오래된 화산지형중 하나로, 한라산을 2만년전으로 볼 때, 제주에 있는 360여개 오름들 중, ‘할아버지격 오름’이라 할 수 있습니다.
6.. 이러한 독특한 형태때문인지 여러 가지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데요.설문대할망의 오백장군 아들 중 큰아들이, 사냥을 망친 탓에,홧김에 하늘에 대고 쏜 화살이, 옥황상제의 옆구리를 찔렀고, 화가 난 옥황상제가, 한라산 정상의 암봉을 뽑아 던졌는데, 이때 던져서 생긴게 산방산이고, 뽑혀진 부분은 백록담이 되었답니다.
여기서 정말 신기한 것은 실제 백록담 분화구의 둘레와 산방산의 둘레가 비슷하고, 구성 암석도 비슷하고 식생도 비슷해서, 이야기가 더욱 실감나네요.
산방산은 산정의 울창한 상록수림과, 산기슭에 지네발난등 각종 회귀한 암벽식물이 자생하고 있어,1993년 천연기념물 제376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습니다.
【제주해녀】 - 이문철 선생님
1. 지리적 환경
비가 내리자마자 땅으로 스며드는 특성이 있어 농사지을만한 토지가 부족하였죠. 또한 농사짓기에는 척박한 땅이었으며. 그러기에 땅보다는 바다에 더 의존하게 되었던 것 입니다. 당시의 여자들은 물질하는것이 환걍상 여러모로 쉬었기 때문입니다.
2. 해녀에게 바다의 의미는
집이요, 학교이고, 놀이터이고, 밭이고, 은행이고, 보물 이었습니다.
물질하는것은 삶의 일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제주 해녀들은 좋은 해산물이 있으면
"숨비소리"를 평소보다 다르게 내어 친한 언니들을 불러서 나눕니다.
숨비소리는 10초정도의 시간이 되는데
호이, 호이 ~~
3. 해녀는 숙련도에 따라 상군. 중군. 하군으로 나눕니다.
상군은 15m 이내에서 물질 하는 해녀를 말하며,
중군은 5~7m,
하군은 3m 이내에서 물질하는 해녀를 말합니다.
그날 어느 바다에 갈 것인지는 상군해녀들이 모여서 의논하여 정한다고 합니다.
물질은 아무때나 하는게 아니라 만조때 합니다. 4시간정도 물질하고 뭍으로 나와 3시간 정도는 성게까는 작업을 한답니다.
허나, 무엇보다도 중요한것은 욕심을 내면 안된다는 겁니다.
보통 물질할때 내려가서 캐고 올라와야 하지만 옆에 해산물이 보이면 욕심이생겨 옆에것까지 캘려고 하다보면 숨이 차서 기절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생과 사의 경계 조절을 잘 조절 해야 합니다
올라와서 숨비소리 내고 다시 내려가면 해산물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돌고래를 "곰수기" "수왜기" 라 하는데 가끔
"곰수기" 가 나타나면 "배알로". "물알로" 로를 외친다 합니다. 물위에 떠있는 해녀 배 아래로 지나가라고 소리친다 합니다. 그러면 돌고래는 다른곳으로 갑니다.
4. 계절로 보는 해산물 채취는
봄에는 해삼, 여름에는 성게, 가을에는 소라를 채채취하며,
2월 ~ 4월 미역, 5월 ~ 7월 우뭇가사리
8~9월은 금채기 입니다.
성게인 경우 바닷물 수온이 높으면 알을 싸기 때문이고 여름에 더운 온도로 부패가 심하기 때문입니다.
제주 해녀들은 보통 한달에 15일정도 물질을 한다 합니다.
파도가 2.5m 이상 높으면 법적으로 물질을 못하며
2~2.5m 는 허용한다 합니다.
잠수병 예방을 위해 한달에 2번씩 산소를마시며
보통 두통약과 귀와 코를 이어주는 약으로 달래며 복용한다 합니다.
거의 모든 해녀들이 "뇌선'이라는 진통제를 복용합니다. 이유는 돌납으로인한 허리통증과 물속압력으로 인한 "귀통증" 무거운 해산물을 나르기에 어깨에 통증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5. 70년대 고무로 된 해녀복이 나오기 이전에는
" 물소중이' 라는 해녀복을 입었지만 너무 추워서 조업시간이 1시간을 못넘겼다 합니다.
이때 불턱에서 잠깐쉬고 다시 물질을 하였습다.
현재 고무작업복은 38만원정도 이지만 매년 1벌씩 지원해준다 합니다.
또한 70세 이상 월 10만원. 80세 이상은 월 20만원의 생활 지원금이 나옵니다.
6. 제주 해녀의 역사
구좌읍에있는 해녀박물관에 답사하여 조사한바 해녀의 물질은 삼국사기에 최초로 등장합니다.
이를 근거로 해녀의 물질이 삼국시대 이전부터 시작했을거라 나와있으며 조선중기 1629년 "제주풍토기"에의하면 전복을 채취했다는 기록이 있기에 해녀는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할수 있습니다.
7 . 제주해녀의 항일운동
제주해녀하면 빠질수가 없는게 항일운동 입니다
제주 3대항일운동은
법정사 항일운동, 조천만세운동. 제주해녀항일운동 이었습니다.
이중 제주 해녀 할일운동의 배경은
일제 강점기때 제주 해녀들은 생계유지를 위해 체취한 해산물을 식민통치기관인 제주관청에 납품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애 제주도 관청은 일본해조회사와 결탁하여
강압적으로 헐값에 사들이며 수탈하자 제주 동부 지역인 세화. 종달. 성산. 우도. 하도 해녀들이 구좌읍 세화리 5일장에서 에서 들고 일어나 투쟁하였습니다.
제주 해녀의 항일운동은 1932년 6개월간
연 283회에 걸쳐 1만 여명이 투쟁한 여성 항일 운동이었습니다. 작년이 제주 항일운동 90주년을 맞이 하였습니다.
8. 역사적인 일
2016년 11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등재된 내옹으로는
- 산소공급장치없이 바다에서 해산물을 채취하는 물질하는 문화,
- 공동채의 연대를 강화하고 해녀들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주술의식인 잠수굿,
- 물질을 나가는 배위에서 부르는 해녀노래
- 모녀 및 세대간에 전승되는 여성의 역할 등이다
많은 해녀들은 유네스코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것에 대하여 엄청난 자부심을 느낀다 하였습니다.
또한 제주 해녀의 문화적 가치는
해녀가 현재는 되기위해는 해녀학교를 나오고 수협조합원에 가입해야 합니다. 가입 않하면 물질을 못합니다. 이 제도가 해녀가 되고싶은 사람을 막기도 한다 합니다.
9. 해녀학교
법환해녀학교는 2개월간 86시간교육하고 있습니다.
모집대상은 60세미만 여성이며
교육과정은
해녀물질이론, 마을어장관리, 현장잠수실습, 어촌가입활동, 선배해녀들의 삶 등이다.
40세 미만은 신규 가입시 지원을 해주고 있습니다.
10. 해녀의 미래
하지만 해마다 해녀의 수는 줄어들고 있습니다.
자료에 의하면
1940년대 24,000명 이
1970년대 14,000명 으로 줄고
2017년대 4,000명이
2022년에 3.437명 입니다
다행이도 최근에 들어 젊은 해녀들이 많이 해녀학교를 졸업하고 있습니다.
나아가서는 제주해녀의 문화적가치를 보존하고 우리나라의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미래까지 소중히 지키고 가꿔나가야할 것입니다.
"해녀의 날은 9월 3째주 토요일' 입니다
첫댓글 완벽한 시나리오~
1초도 어김이 없는 철저한 6분~
베테랑 연출자의 감독에 따라
호흡하는 대배우의 연기처럼
훌륭했어요~!
모아놓은 시나리오는 좋은 자료가 되겠네요.
수고하셨어요~^^
B조 훌륭했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
멋진 유종의 미를 행하셨네요.
수고하셨고,
감사합니다.
정말 굿입니다요. 멋져요 총무님
회장님과 총무님의 감성의 리더쉽으로 알차고 소중한 연수를 성공적으로 마치게 되었네요.
총무님의 마지막 연수 소감을 읽으며 지난날의 소중한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갑니다.
다시 한 번 두분께 연수동기들의 참마음을 담아 공로의 감사패를 드립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1년동안의 결실을 스치듯 읽는것이 아까와 한분 한분의 자료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습니다. 장총무님이 잘 입력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마지막 이문철선생님의 해녀이야기를 읽으며 겉으로만 알아왔던 제주의 속살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김정희선생님의 살당보민 살아진다는 한마디가 울림으로 남는 하루네요.
아직도 알아두어야 할 게 많은데 시간이 이렇게나 빨리 지났갔네요.
시연 후기를 꾹꾹 정성들여 올려주신 총무님~최고여요^^ 감사합니다 ~
그리고 감히 동기선생님이라 부르기엔 너무 대단한 분들이라 발자국만 따라다녀도 주워먹을게(?)..
세상에 빛이 나는 사람들 ...그나마 문화탐방하면서 알게 되어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교수님, 제주를 알리는데 이렇게 열심히 여서 ... 꼭 '제주를 빛낸 10인' 안에 들기를 비옵니다.^^(이미 들어갔을까요? 지휘봉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ㅎㅎ)아. 그리고 잠이 안올때는 상추를 두 잎만 먹으면 효과가 좋답니다. (세 잎은 안됨. 중독됨)
시간이 지나 다시 읽어보니 훌륭한 자료들입니다.전부 다 기록해 주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총무님과 함께여서 우리 문탐 분위기가 늘 좋았던것 같아요.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