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장 같은 날 오후 북문. "젠장!" 진운은 다시 한번 몸을 숨겨야 했다. 재수없는 얼굴이 아직도 그 자리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생사복 구련자였다. 다행히 이번에는 흑시나 해서 얼굴도 대충 손질을 했고, 일행 도 많아 당황하지는 않았다. '차라리 으슥한 곳으로 유인해서 죽여 버릴까?' 그것은 좀 심한 것 같았다. 아직은 적인지 아닌지 분명하지 않았다. 사실은 통천방에 속해 있다는 것만 빼면 상당한 친분 관계를 쌓은 사이였다. 무림사사(武林四邪) 중 그나마 친한 편인 사람이 그와 구련자 였다. 환마 서문정은 어떤 놈이 진짜 그놈인지 알아볼 수조차 없 으니 모르고, 나머지 하나인 귀제갈(鬼諸葛) 허탁(虛託)과는 지 모(智謀) 면에서 은근히 경쟁자로 여기고 있는 사이인 것이다. '일단은 두고 보자.' 그렇! 지나차는 진운의 걸음이 다시 멈추었다. 옆에 같이 걷 고 있던 원도살이 그의 어깨를 잡아 세운 것이다. 의아해서 바라보는 그에게 원도살이 구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아는 사람이 있으니 가 보세!" 진운이 놀라서 물었다. "저놈을 아십니까?" "저놈? 자네가 그를 알고 있었나?" 두 사람은 서로 헷갈렸던 것이 분명했다. 원도살이 가리키는 사람은 구련자가 아니라 그에게 점을 보는 두 사람 중 하나였던 것이다. 진운과 원도살은 동시에 그것을 알아차리고 동시에 물었다. "저 사람은 누군가?" "저 사람은 누굽니까?" 진운이 고개롤 설레설레 젓고는 먼저 설명했다. "구련자라고 아주 나쁜 놈입니다. 같이 사사로 일컬어지는 것 이 부끄러운!" 원도살은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내력이 있는 인물인 줄 알았네. 그리고 저 사람은 내가 아는 사람인데!" 진운이 말을 끊었다. "한 사람은 저도 어디서 본 듯한 사람인데요?" 구련자에게 점을 치는 사람은 두 사람, 하나는 혹로로족의 부 락에 남겨 놓고 온 이통천이고, 다른 하나는 귀주성에서 사기를 쳐 속여넘긴 마원이었다. "그래서!" 이통천이 물었다. "찾을 수 있다는 거요, 아니면 못 찾겠다는 거요?" 구련자가 처량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글쎄, 그러니까 내가 말한 대로일세! 인간사에 그렇게 딱딱 떨어지는 일이 그리 많겠는가? 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날 수도 있고, 없으면 다시 못 만날 수도 있지. 내가 방금 만날 것이라 고 말했네만 자네가 그렇게 말하는 근거를 대라고 한다면 결국 날 못 믿는다는 것인데, 난들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설흑 내 말대로 만난다면 자네는 내 점이 맞았다기보다는 그것과 상관없 이 만날 사람을 만났다고 말할 것일세! 혹시 안 만나게 된다면 자넨 당연히 그렇게 됐다고 말하겠지! 결국 자네가 믿지 않는 이상 내 점이 맞고 안 맞고 간에 항상 난 엉터리인 셈일세!" 마지막의 "난 엉터리인 셈일세." 라고 하는 부분에서 구련자가 어찌나 처량한 표정을 지었든지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들도 콧등 이 시큰해질 지경이었다. 이통천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듣고 보니 그럴듯도 하군요. 그러나 점이라는 것은 맞아야 의미가 있는 것이지 가끔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대서야 무슨 의미가 있겠소? 도장(道長;도사를 높여 부르는 말)께서도 옆에 이렇게 써 놓지 않았소? 위로 하늘의 이치에 통해 있고, 아래로 는 땅의 이치에 달해 있다. 앉으면 천 리, 서면 구천 리를 본다 고 말이오." 구련자가 목구멍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보긴 하지만 흐릿하게 볼 수도 있고, 잘못 볼 수도 있는 것 이지." "뭐라구요?" "생각해 보게나, 청년! 청년 말대로라면 벌써 돈방석에 앉았지, 이 나이 되도록 아직도 길거리에 앉아 있겠나? 나도 이런 흰소리 나 치며 살고 싶지는 않지만 사부님께 물려받은 유품이라고는 이 깃발과 산통, 그렇게 둘뿐인데 버릴 수도 없고 어쩌겠는가? "사부도 계셨소?" "신산파(神算派)의 제칠신일대 장문인 귀산자(鬼算子)어른이 바로 선사(先師)셨네." "신산파? 나도 모르는 문파가 중원에 있었나?" "선사의 말씀에 의하면 전국 시대의 귀곡자(鬼谷子)로부터 내 려온 문파이며, 손빈(孫賓), 제갈공명(諸葛公明)이 역대 장문인 중 하나이셨다고도 하는데 나도 믿고 있지 않으니 그냥 우스갯 소리로 듣게나." "그럼 도장께선 신산파의 칠십이대 장문인이시겠군요?" 구련자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청년이 내 사부라면 나 같은 사람에게 장문인 자리를 주겠 나? 당연히 난 아니네." "그럼?" "귀제갈 허탁이라고 내 사제가 맡고 있네!" 이통천의 얼굴이 금세 딱딱하게 굳어졌다. "사사 중의 일인인 그 귀제갈 허탁입니까?" "그렇게 불리나 보네." 구련자의 앞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던 이통천이 벌떡 일 어났다. "몰라뵈어서 실례가 많았습니다. 알고 보니 그 허대협의 사형 이신 저 신산 구련자 도장이셨군요!" 구련자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번뜩였다. 귀제갈 허탁이 사사 중의 하나인 것은 웬만한 무림인이면 다 알았다. 그러나 귀제갈의 사형이라는 말에서 그의 정체를 알아 내다니! 그와 귀제갈이 사형제지간인 것은 무림에서도 극히 소수만이 아는 비밀인 것이다. 이통천이 황급히 절하고 돌아서려는데 구련자가 옷깃을 잡았다. 이통천은 질린 얼굴로 그를 보며 물었다. "무, 무슨 하교하실 말씀이라도?" "점은 치고 가야지! 오랜만에 온 손님이 그냥 가면 어쩌나?" "이미 점괘가 나온 것 아닙니까? 만난다면서요?" "방금 더 확실한 점괘가 나왔네. 마저 듣고 가게!" "뭡니까?" "자네가 찾는 사람 열네 명 중에 쌍둥이 두 사람과 손등에 상 처 자국이 있는 노인이 있다고 했지?" "예! 노인과 쌍둥이 형제 맞습니다." 구련자가 손짓했다. "자네 뒤에 있네!" 그때 이통천의 어깨에 손이 올라왔다. 고개를 돌리자 거기 원 도살이 있었다. 원도살과 함께 멀어져 가는 이통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구련 자는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렇게 확실하고 신속하게 점괘가 맞아들어간 것은 거의 드문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뭔가 빠진 것 같은데?" 고개를 외로 꼬며 중얼거리던 구련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달려나갔다. "복채! 복채를 안 받았구나!" 조금 달려나가던 그가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는 황급히 자리 를 챙겼다 "장사 밑천을 두고 가면 안되지." 여태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시골 사내, 마원이 그를 잡았다. "도장어른! 제 점도 봐 주셔야죠." 구련자가 귀찮은 듯 그를 밀쳐 내었다. "놓게! 지금 복채 받으러 가야 하는 거 안 보이나?" 그러나 마원은 밀쳐지지 않고 그의 깃발을 잡고 늘어졌다. "제 점도 봐 주고 가세요!" 구련자는 난감한 표정이었다. 마원을 세게 밀쳤다간 사문의 보물이자, 그보 독문병기이며, 단 두 개뿐인 장사밑천 중 하나 가 찢겨지게 생긴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구련자의 표정은 난감하면 난감해 할수록 울상 으로 변한다는 것이었다. "알았어, 알았어! 기다리게!" 구련자는 하는 수 없다는 듯 걷었던 돗자리를 다시 펴고 그 위에 가부좌를 틀었다. 그는 산통을 두 손으로 잡고 흔들면서 물었다. "뭘 점치고 싶은가?" "사람을 찾으려고요." "누군데?" 구련자는 산가지를 하나 뽑아 거기 나온 괘효사(掛爻辭)를 보 면서 묻다가 문득 표정이 재미있다는 듯 일그러졌다. 그는 마원의 말을 듣지도 않고 소리쳤다. "알겠군! 사기꾼을 찾는구나!" 마원이 반색을 했다. "사기꾼! 바로 그겁니다. 그 사기꾼을 찾아 주세요!" 구련자가 다시 자리를 걷었다. "그럼 진작에 말했어야지! 방금 저기 숨어 있었단 말이다." 마원이 영문을 몰라 물었다. "누가요?" "네가 찾던 사기꾼 말이다." "예?" 마원은 비명을 지를 듯 놀라더니, 구련자의 옷깃을 다시 잡았다. "그놈 어디 있습니까?" "따라오게! 만나게 해주지." 구련자는 원도살 일행이 사라져 간 방향으로 종종걸음을 쳤 다. 그 뒤에 마원이 따랐다. 원도살도, 진운도 이미 사라지고 없었지만 그는 어디로 가면 그들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지 거침없이 걸었다. 그러던 구련자가 갑자기 돌아서서 마원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참! 자네도 아직 복채 안 냈지! 내놔!" * * * 관도(官道). 해는 뉘엿뉘엿 지고, 하늘은 어스름이 깔리기 직전의 보라색 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보라색이 점점 짙어져 암청색을 향해 가면 해는 지고, 밤이 오는 것이다. 양주부에서 백강 나루까지는 마차 다섯 대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릴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관도가 펼쳐져 있었다. 먼 산과 들, 하늘과 땅이 온통 보라색으로 물들어 있는 그 사 이로 관도가 달렸고, 그 관도에는 무수한 사람들과 우마차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관도의 한쪽 끝, 양주 방향으로부터 백강 나루를 향해서 한 줄 기 뿌연 먼지가 그어졌다. 선두의 검은빛은 말의 색깔일 것이다. 분주히 비켜서는 행인들, 그 사이로 검은 말이 지나가고 그 뒤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홑날리는 낡은 장삼, 고!를 잡아야 할 손에는 비정상적으로 긴 장검이 쥐어져 있고, 얼굴을 때리는 숨막히는 바람 속에서도 꼿꼿이 고개를 들고 있는 드높은 기상의 사내. 백리극은 백강 나루로 야광충을 맞이하러 달리고 있었다. 관도는 들판과 하늘이 만나는 선까지 끝없이 뻗어 잇고, 바쁘 게 오가는 행인들은 멀리서부터 그의 앞길을 비켜 쭈었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속으로 음악처럼 울리는 말발굽 소리! 백리극의 심장은 그 말발굽 소리와 함께 뛰었다. '얼마 만에 느껴 보는 기분인가!' 그는 멀리 변경의 벌판을 달리던 기억을 떠올렸다. 수천의 군 마가 함께 달리던 그때, 그때는 그도 혼자가 아니었다. 수하가 있고, 동료가 있고, 명을 들어야 할 상관과, 충성할 조국이 있 었던 것이다. '이제는!' 전심전력 힘을 모아 생존과 이득을 추구하는 떼강도의 집단에 서 뒹굴고 있는 것이다. 백리극은 그런 생각을 하며 자기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일그러 뜨렸다. 그의 손에 들린 검집이 말의 엉덩이를 때렸다. 말은 더 욱 속력을 내어 한 줄기 검은 바람처럼 관도를 달렸다. 그때, 저만치 관도의 끝에서 뿌연 흙먼지가 일어나는 것이 보 였다. 백리극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았다. 오랜 경험으로 그는 그 흙먼지가 말발굽이 만들어 내는 것이 며, 그것도 두 마리의 말이 나란히 달려오며 만들어 내는 것이 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흙먼지가 가까워졌다. 과연 그 홅먼지 속에서 나타난 것은 두 필의 말과 두 명의 사 람이었다. 뿌연 흙먼지가 내려앉은, 그러나 청색의 관복임은 분 명하게 알아볼 수 있는 옷을 입은 두 사내였다. 그들의 허리춤 에 매달린 금빛 포승이 그들의 신분을 알려 주고 있었다. 포쾌, 그것도 포두급의 인물들이었다. 백리극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그는 먼지를 피하려는 것처 럼 황급히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검을 든 왼손이었다. 기형적으로 긴 장검, 유성검을 든 그 왼 손이었다. 백리극은 다급히 손을 내렷지만 이미 늦엇다. 횝범한 포두들이라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지만 상대 는, 그의 곁을 지나친 두 사람 중의 한 명은 한때 그의 사부였 던 신응 유소백인 것이다. 유소백이 외쳤다. "잠깐!" 끼히히히힝! 말이 길게 울부짖으며 앞발을 들었다. 유소백은 안장에서 엉 덩이를 떼고 높이 일어서서 균형을 잡았다. 말이 다리를 내렸을 때 그는 이미 백리극을 향해 말머리를 돌 린 다음이었다. 놀라운 기마술이었다. 등적은 그만큼 기마술이 뛰어나지 못했던 모양, 한참이나 더 가서야 속도를 줄이고 말머리를 돌릴 수 있었다. 그는 놀란 얼굴로 유소백의 곁에 와서 물었다. "왜 갑자기!" 유소백이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눈 으로 저만치에 서 있는 말 탄 사내, 백리극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리극은 그에게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그는 어쩌면 그냥 가 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유소백의 외 침 따윈 무시해 버리고 말에 채찍을 가해 달려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거기 서 버렸다. 유소백의 외침을 듣는 순간 마치 혈도라도 찔린 것처럼 그는 그 자리에 멈추어 버렸다. 죄지은 사 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검을 잡은 손에는 힘줄이 솟아나왔다. 둥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났다.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다. 그것 이 누군지는 보지 않고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더욱 고개 를 돌릴 수 없었다. 말은 그의 앞으로 돌아와서 섰다. 고개 숙인 백리극의 눈에 말발굽이, 가는 다리가, 튼튼한 근 육질의 가슴이 들어왔다. "호패(戶牌;신분 증명서)! 로인(路人;여행 증명서)!" 등뒤에서 청년의 명령이 들려 왔다. 앞에 한 사람이 서고, 뒤에 또 한 사람이 서서 호패와 로인을 검사한다. 포쾌들의 기본적인 행동 요령이었다. 등뒤에 선 포쾌--아까 언뜻 본 바로는 그도 포두급의 복장이 었다.--는 아마도 지금 무기를 꺼내 그를 겨누고 있을 것이다. 보이지는 않지만 행인들도 그들을 구경하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비참해져야 하는가!' 백리극의 손이 소매춤으로 들어갔다. 그의 손이 가늘게 떨리 고 있었다. 갑자기 그는 고개를 치켜 들었다. 손은 아직 소매에서 꺼내지 않은 채였다. 진운이 만든 가짜 호패와 로인을 잡은 그 손은! 매부리코에 살점 없는 강퍅한 일굴, 매의 눈이 백리극의 얼 굴에 와서 꽂혔다. 그의 입술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백!" 뒷말은 소리로 나오지 않았다. 유소백은 한때 자기 아래에서 경신술을 배웠던 제자 백리극 을, 대역(大逆)의 죄를 짓고 자결했다던 그 제자를 마주 대하고 있었다. * * * 백강(伯江) 나루. 태양이 막 지평선을 님어가려는 참이었다. 순간순간 점점 더 가라앉는 거대한 원형의 태양이 강변의 산과 나무들을 비추자 그 경계선이 더욱 뚜렷이 드러났다. 잠시 후 태양이 서산(西山) 뒤편으로 완전히 사라졌으나 하 늘엔 아직 노을이 남아 강물의 은은한 갈색 물결 위에 붉은빛을 더하고 있었다. 그 갈색 물결, 붉은라 위로 배가 도착했다. 길이에 비해 좌우 폭이 넓어 짧은 거리로 화물과 승객을 운송 하기 좋은 조운선(漕運船)이었다. 승선했던 승객들이 내리고, 그 뒤에야 말과 마차, 그리고 수 레들이 내려졌다. 그 중에 검은 마차 한 대가 있었다. 검은 마 차는 장례(葬禮)나 죄인호송(罪人護送)과 같은 흉사(凶事)에 쓰 이는 것, 게다가 마부라고 앉은 것이 온몸에 문신을 한 묘족이 었으니 눈에 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도 곧 그 마차 를 발견했다. 기다리던 것이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마차는 천천히 나루를 벗어나 관도로 통하는 길로 굴러가고 있었다. 쇠사슬 소리가 짤랑거렸다. 가슴둘레가 키만큼이나 될 것 같은 비대한 사내가 길가 주점 에 앉았다가 일어섰다. 그의 손에는 머리통만큼이나 굵고, 쇠못이 촘촘히 박혀 있는 유성추(流星鎚)가 들려 있었다. 쇠사슬 소리는 그 유성추에서 난 것이었다.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던 키가 멀쑥하게 큰 사내가 턱 밑을 긁더니 의자에 기대 놓았던 검은 몽둥이 하나를 들고 일어섰다. 몽둥이의 끝에는 가는 사슬로 연결된 작은 몽둥이가 또 하나 있었다. 이것을 강호에서는 대초자곤(大肖子棍;쇠도리깨)이라고 부른다. 세번째 사내가 일어섰다. 체격도 왜소하고, 키도 크지 않았다. 그도 무기를 들었다. 그의 평범한 체격과는 걸맞지 않게 거대 한 두 자루의 도끼, 개산대부(開山大斧)였다. 그들이 천천히 마차의 뒤를 따라 걷자 나루터에 오가던 사람 들이 건에 질린 표정으로 슬슬 물러났다. 마차가 멈주었다. 마차의 앞에는 두 명의 사내와 한 명의 여인이 서 있었다. 그 들이 마차의 앞길을 막은 것이다. 묘족, 흑웅이 너무 커서 오히려 순해 보이는 방울눈을 굴리며 그들을 보았다. 한 사내는 커다란 기러기의 깃털을 거꾸로 든 것처럼 생긴 안 령도(雁翎刀)를 들고 있었다. 날끝에 부서지는 저녁노을이 눈부 신 날카로운 칼이었다. 또 한 사내는 길고 검은 채찍을 들었다. 흔히 교룡편(蛟龍鞭) 이라 부르는 가죽채찍이었다. 그러나 채찍의 끝 부분 두 자 가량에는 가시가 돋아 있고, 끝 에는 날카로운 삼각형의 납추를 달아 놓아 거기 걸리면 살점이 뜯겨져 나가게 되어 있는 것이었다. 마지막 한 사람,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은 한 자루 은창(銀槍) 을 들었다. 창날과 자루가 만나는 부분에는 수놓은 붉은 천을 묶어 놓은 짧은 창이었다. 흑웅은 커다란 눈을 껌벅거리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그들이 왜 그렇게 마차를 가로막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마차를 둘러싼 그들에게서 좋지 않은 냄새가 풍긴다는 것이었 다. 쫓기던 맹수들에게서 나는 것과 비슷한 냄새, 모락모락 피 어오르는 적의(敵意)였다. 교룡편을 든 사내가 한걸음 앞으로 나와서 말했다. "칠화회의 일곱 송이 꽃이 네 주인을 찾아왔다!" 흑웅이 놀라서 눈을 둥글게 떴다. "어, 어떻게 사람 목소리가, 그렇게 나오지?" 내용은 잘 알아듣지 못하겠고, 그저 사내가 낸 얼음가루가 떨 어지는 듯한 목소리에 놀란 것이다. 채찍을 든 사내의 얼굴빛이 푸르뎅뎅하게 변했다. 칠화회를 언급했고, 마차 안의 사람을 찾아왔다고 말했다. 그 것도 일곱 송이의 꽃 전부가! 그러면 당연히 놀라야 하는 것이다. 목소리가 아니라 그 내용 에 말이다. 현 무림 촤고의 살수 집단, 일곱 명으로 하나의 방회(幇會)를 이룬 칠인살수방(七人殺手幇)인 칠화회의 자객 전원이 찾아왔다 는데 고작 목소리에나 놀라고 있단 말인가! 흑웅은 그가 어쨌든 주인, 광충을 찾아왔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러나 해가 남아 있는 동안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부르지 말 라는 명령을 들은 바 있지 않은가! 이렇게 손님들이 찾아온 경우도 그 '어떤 일이 있어도'에 해 당이 되는 것일까? 흑웅은 해당이 된다고 판단했다. "우리 주인께서는 어떤 손님도 만나지 않는다고 하셨다!" 안색도 전염이 되는 것일까? 마차를 가로막고 있던 무정칠화의 안색이 교룡편을 든 사내, 편화(鞭花)의 안색처럼 푸르뎅뎅하게 변해 갔다. 흑응도 아주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런 식의 적의나 살기에 대해서는 사냥꾼으로서의 감각을 가지고 있는 그였다. 그는 어자석(馭子席;마부석) 에 기대 두었던 검은 쇠꼬챙이를 잡아 갔다. 시위를 푼 묵궁이었다. 급할 때는 몽둥이나 창 대신 으로 쓸 수도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안령도를 든 사내, 도화(刀花)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옆 에 선 여인을 보았다. 여인, 창화(槍花)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얼굴에까지 빠끔히 문신을 한 묘족놈이 몽둥이 하나를 꼬나쥐 고 그들을 노려보는 꼴이 우습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창화가 창을 겨누려는데 도화가 먼저였다. 그는 한걸음 다가 가며 말했다. "그래도 먼저 물어 보는 것이 예의 아니냐? 어서 알려라!" 혹웅도 예의라는 말은 알았다. 그래서인지 도화의 말에 고개 를 덕이며 예의라는 말을 몇 번 중얼거리더니 몸을 돌려 어자 석쪽으로 난 마차의 창문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도화의 눈에 악독한 빛이 흘렀다. 그는 갑자기 어자석 위로 뛰어올라가며 흑웅의 뒤통수에 안령 도를 꽂았다. 날카롭기 이를 데 없는 일격. 뒤통수에 칼이 꽂히면 아프긴 하지만 어리석게도 적을 앞에 두고 고개를 돌린 잘못에 대한 응분의 보상이라고 생각하면 억 울하지는 않을 것이다. 멀리서 구경하던 사람들의 나직한 비명 소리가 들려 왔다. 다음 순간 벌어질 참상에 대해 짐작하고 지레 내지르는 비명이었다. 촤악! 실제로 그런 소리가 들렸는지는 몰랐다. 아마도 그런 소리가 났을 리는 없을 것이다. 사람의 살이 아무리 질기다고 해도 저렇 게 천이 찢어지는 소리처럼 적나라하게 소리가 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소리가 났다고 생각했다. 흑웅이 턱으로 마차의 창문턱을 당겨 부수며 고개를 숙이고, 안령도가 그 목덜미에 붉은 자국을 남기고 마차 안으로 들이밀 어졌다. 다치긴 했지만, 그리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우악스런 방법으로 피했지만 분명 혹웅은 칼을 피한 것이다. 소리는 그 다음에 났다. 이름 그대로 곰처럼 웅크린 혹웅의 겨드랑이 사이로 시커먼 물체가 뻗어 나왔지만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지는 못했다. 왜냐 하면 흑웅의 뒤에 바짝 붙어 있던 도화의 몸이 그것을 가려 주 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사람들은 붉은 쇠꼬챙이는 볼 수가 있었다 천이 찢어지 는 듯한 소리를 내며 도화의 뱃가죽을 찢고 등으로 튀어나온 붉 은 쇠꼬챙이였다. 다시 말하지만 흑웅은 미련해 보이긴 해도 실제로 미련한 사 람은 아니었다. 그는 마차를 막은 자들이 적이고, 그것도 극히 악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적임을 알고 있었다. 또한 그는 덩치가 커서 둔해 보이긴 해도 절대 둔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왜소하고, 민첩해 보이는 사람보다도 더 민첩 한 사람이었다. 그렇지 딴았다면 산악을 돌아다니며 맹수를 사 냥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힘만으로는 흑로로족 제일의 사냥꾼이 탄생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일부러 틈을 보여 유인하 고 공격해 오는 적을 반격해 죽여 버린다는 것은 가장 편하고 확실한 사냥 방법 중의 하나였다. "너, 이……!" 도화는 안구가 튀어나을 정도로 부릅뜬 눈으로 흑웅을 내려다 보았다. 배가 뚫린 것이지 목을 다친 것은 아닌데도 말을 잇지 못하는 것은 워낙 황당한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는 마차 안으로 밀고 들어간 안령도를 당겨 다시 흑웅 을 내리치려 들었다. 그러나 그때 뱃속으로 밀고 들어오는 통렬한 아픔! 도화는 흑웅의 무지막지한 힘에 들려 마차의 지붕을 타넘고 뒤로 날아가 떨어졌다. 흑웅이 그의 배에 꽂힌 묵궁을 들어 작 살에 꽂힌 물고기를 던져 버리듯 그를 던져 버렸던 것이다. 촨--! 편화의 검은 채찍, 교룡편이 한 마리 구렁이처럼 꿈틀거리며 흑웅의 목을 감았다. 파앙! 은빛 광채가 번뜩였다. 붉은 옷에 은빛 창의 여인, 창화가 은섬탈혼(銀閃奪魂)이라는 초식으로 그의 가슴팍을 찔러 왔다. 혹웅이 본능적으로 묵궁을 들어 창을 막으려 들었다. 무공은 모르지만 힘은 무지막지한 그였다. 묵궁에서 엄청난 파공음이 터져 나왔다. 편화는 그 힘과 맞부딪쳤다가는 창화가 당해 내기 어려울 것 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흑웅의 목을 감은 채찍을 힘주어 당 겼다. 채찍에 목이 매어 당겨 오다가 손을 들면 팽이처럼 맴돌 것이고, 그때 은창이 꼬치처럼 그를 꿰어 버릴 것이라고 기대하 며 한 행동이었지만 현실은 그의 기대와는 별상관이 없었다. 채찍은 팽팽하게 당겨져 끊어질 정도였지만 흑웅은 바위처럼 버틸 뿐 움직이지 않았다. 은창을 막아 가는 그의 팔도 그래서 아무 방해 없이 움직였다. 까앙! 은창이 수레바퀴에 밀어 넣은 나뭇가지처럼 튕겨져 나갔다. 창화는 그 든창을 따라 정신없이 물러섰다. 놓치지 않으려고 애 를 썼지만 창은 학질 걸린 사람처럼, 바람에 날리는 버드나무 가지처럼 정신없이 흔들렸다. 그녀는 결국 창을 놓쳐 버렸다. 그러고도 손바닥이 찢겨질 것 같은 통증이 어깨까지 얼얼하게 만들었다. 편화는 안색이 새파래졌다. 그는 지금 목에 감긴 채찍을 잡고 당기는 흑웅의 힘에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머리 위로 치켜 든 묵궁, 검붉은 쇠꼬챙이가 사정거리에 들어오기만 하면 내려쳐질 자세로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면서 그는 당겨 갈 수밖에 없었다. 흑웅이 멈칫했다. 그 틈에 편화는 채찍을 풀어 회수할 수 있 었다. 흑웅의 뒤에는 대초자곤을 든 사내, 곤화(棍花)가 득의양 양하게 서 있었다. 뒤에서부터 흑웅의 머리를 내려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낯빛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흑웅은 죽지도, 쓰러지지도 않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분노로 부릅뜨여 있고, 이빨 가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혹 났잖아!" 육십 근짜리 쇠몽둥이에 뒤통수를 정통으로 맞고도 혹이 났다 고 화를 내는 것이다. 깨져서 피를 본 것도 아니고 단지 흑이 났다는 것이다. "금, 금강불괴(金剛不壞)?" 곤화가 주줌 뒤로 물러서는데 흑웅의 손에 들린 묵궁이 소나 기처럼 그에게 퍼부어졌다. 곤화는 대초자곤을 가로로 들고 정신없이 휘둘러서 흑웅의 공 격을 막았다. 따다당!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흑웅이었지만 그 위력은 어느 일류고수 의 것에 못지않았다. 곤화는 그의 소나기 같은 공격을 하나하나 다 받아 내었지만 그럴 때마다 한걸음씩 물러서야 했다, '뭐, 이런 곰같이 힘만 센 놈이!' 곤화는 땀을 삐질삐질 홀리며 물러서다가 문득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 힘이라면 나도 남 못지않은 몸이다. 어디 한번 해보자!" 그는 수세에서 벗어나려 쇠도리깨를 있는 힘껏 휘둘러 흑웅의 묵궁에 마주쳐 갔다. 까앙! 두 개의 철봉이 맞부딪쳤다. 철봉은 소리 내어 비명을 지르 고, 두 사람, 네 개의 팔뚝에는 근육이 꿈틀거렸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쇠도리깨와 묵궁을 한껏 밀어붙이고 있었 다. 본격적인 힘겨루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 이, 잎!" 곤화는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힘이 차이가 날 수 있 을까? 그는 마치 근육이 터져 버릴 것처럼 고통을 느껴야 했다. 천 만 근의 무게로 혹웅이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도 할 것이 황룡의 무지막지한 내공에도 버틴 흑웅이었 던 것이다. "크윽!" 곤화는 숨을 토하며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손에 들렸던 대초 자곤은 저만치 날려가 버렸다. 그보다 중요한 일은 따로 있었다. 곤화는 건에 질려 자신의 머리통으로 떨어져 내리는 흑웅의 일격을 바라보았다. 힘을 어 떻게나 썼는지 온몸이 굳어 피할 방법이 없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흑응이 그의 몸을 밟고 위로 넘어가 버린 것이다. 자연 묵궁 도 곤화의 머리 위 땅바닥을 치고 말았다. 흑웅은 손을 돌려 옆구리를 만졌다. 중원으로 들어오면서 시 입은 칭색 옷에 구멍이 뚫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분노가 치밀어 올라 방금 뒤에서 무거운 물체를 던진 자 를 노려보았다. 상대도 그를 보고 있었다. 대신 분노에 찬 눈빛 이 아니라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이었다. 추화(鎚花)는 흑응을 보고, 또 자신의 손에 들린 유성추를 보 았다. 한 대만 제대로 맞으면 피떡으로 변해 버릴 줄 알았는데 상대는 모기에라도 쏘인 것처럼 옆구리나 긁고 있지 않은가! '저놈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두꺼운 껍질을 쓰고 태어난 놈인 가?' 흑웅이 그를 향해 걸어왔다. 잔뜩 화가 났는지 씩씩거리는 숨 소리가 이 장여 떨어진 곳에 서 있는 그에게까지 들릴 정도였다. 그는 그 기세에 질려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유성추에 달 린 날카로운 못으로도 뚫지 못하는 놈을 무슨 수로 이긴단 말인가! 그때 호통 소리가 들려 왔다. "껍질만 단단하지 아무것도 아닌 놈을 못 이겨? 모두 덤벼서 해치워!" 한 노인이 소리친 것이다. 비단 옷을 걸친 부잣집 노인의 행색이었다. 주름살 가득한 얼 굴에 가는 눈이 유달리 반짝인다는 것만 빼면 특이할 것이 없는 노인. 그는 한 손에 황색 천으로 싼 길쭉한 보퉁이를 들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의 한마디 말에 힘을 얻은 듯, 죽은 듯이 엎드려 있는 도화를 뺀 나머지 무정오화가 한꺼번에 흑웅에게 덤벼들었 다. 노인이 바로 그들의 대형(大兄)이자 칠화회의 회주인 검화 (劍花)였던 것이다. 그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흑웅을 둘러싸고 벌어진 싸움을 보았다. 창피한 노릇이었다. 소위 중원 최고의 살수 집단이라는 그들 칠화회가 묘족의 촌놈 하나를 못 이겨서 절절 맨다는 소문이라 도 나면 앞으로 누가 살인 씽부를 할 것인가! '어쩌면 너무 방심한 것일지도' 차라리 횡소 자주 쓰던 방법대로 암습을 했다면 손솰게 해치 울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를 상대로 계략을 짜기도 귀찮고 해 서 그냥 정면으로 쳤다가 이게 무슨 꼴인가? 그는 문득 중얼거렸다. "껍질만 단단한 게 아니고 힘도 세네?" 흑웅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다섯이 대들어 싸우는데도 무기 는 안 먹히고, 힘은 무지막지하게 세서 여전히 끌려다니는 형국 인 것이다. 그는 다시 소리쳤다. "변화와 빠르기로 공략하란 말이다. 너희들은 곰도 안 잡아 봤냐?" 곰을 안 잡아 봤기는 그도 마찬가지였지만 아마도 그럴 것이다. 무정오화는 그 말에 뭔가 깨달은 듯 공격 방법을 달리해서 흑 웅을 치기 시작했다. 하나가 공격해서 흑웅이 맞받아치면 상대하지 않고 물러서고 다른 하나가 공격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정신을 혼란하게 해서 틈을 보아 공략하는 것이 이런 작전의 기본인데, 흑응은 그것도 제법 막아내고 있었다. 초식이나 무공을 알아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가해 지는 위협을 느끼고 막아내고 있는 것이다. 검화는 다시 혀를 찼다. "저놈, 동작도 빠르네?" 껍질도 단단하고, 힘도 센 데다가 빠르기까지 하다니! "절정고수라는 말인가?" 그런 것 같진 딴았다. 고수라고 보기에는 동작에 너무 틈이 많았다. 무공을 모르는 자워 손짓이라고 밖에는! 그는 문득 눈을 번뜩였다. '무공을 모르는 자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상대는 분명 무공을 모르는 자 였다. 그렇다면 방법이 없지는 않았다. 흥--! 짧은 코웃음을 내며, 검화가 천천히 흑웅에게 접근했다. 그가 왼손을 휘젓자 황색 천이 땅으로 떨어졌다. 그의 손에는 손가락 굵기의 남색광망(藍色光芒)이 번뜩이는 가늘고 긴 검이 들려졌다. 그의 독문병기인 용창연검(龍暢軟劍)이었다. 색으로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극독이 묻어 있는 연검. 그가 검을 뽑아 들었을 때 분명히 그는 혹웅과 이 장 이상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검신이 파르르 떨리는 순간, 한 줄기 남색광망은 이미 혹웅의 턱밑에 이르러 있었다. 목덜미에 섬뜩함을 느끼는 순간, 흑웅은 본능적으로 목을 움 츠렸다. 치익--! 흑웅의 머리가죽을 스치며 용창연검이 지나갔다. 검화가 소리쳤다. "너희들은 마차를 쳐!" 쉬--익--! 남색광망이 돌을 만나 방향을 트는 뱀의 동체처럼 휘청 휘어 혹웅의 턱밑에 바짝 붙어 따라갔다. 놀랍게도 용창연검이 실제 로 휘어 목표를 따라간 것이었다. 쉬잇--! 용창연검이 흑웅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흑웅의 목에 붉은 선이 한 줄기 그어졌다. 그는 뒤로 털썩 눕더니 맹렬히 몸을 굴렸다. 달리 피할 방법 이 없었다. 바닥에서 뿌연 먼지가 솟아올랐다. 검화가 내뻗은 오른손을 뒤집으며 용창연검을 예리무비하게 떨쳤다. 쉭, 쉭, 쉬--익! 남색광망이 백여 개의 회초리를 일시에 휘두른 것처럼 무수한 갈래로 뻗어 바닥을 구르는 흑웅을 베어 갔다. 허초가 따로 없고, 실초가 따로 없었다. 흑웅의 몸이 잘근잘근 다져져 고기젓이 될 찰나였다. 흑웅은 돌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촤아악! 그의 몸에 무수한 검상이 그어졌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검 날을 그는 몸으로 받기로 한 것이다. 검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저런 미련한 놈이! 껍질이 아무리 질겨도……!" 그는 말을 멈추었다. 고기젓이 될 줄 알았던 혹웅은 읏만 찢 긴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용창연검을 맨몸으로 받아 낸 것 이다. 잠시 말을 잊었던 검화는 흑웅의 맨살에 그어진 붉은 자국을 보고 다시 웃었다. "이제 곧 독이 몸에 퍼지면 너는 지상에서 가장 괴로운 고통 을 맛보게 될 것이다. 껍질이야 질길 수 있어도 독에는 못 당할 것이다." 흑웅은 충혈된 눈으로 그를 노려볼 뿐 아무 말도 않았다. 검 에 독이 있는 것은 그도 알았지만 실로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그는 독사에 물려도 끄떡없는 체질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를 분하게 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무공을 몰라 이 렇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이 그랬고, 모시는 주인을 제대로 지 키지 못하는 것이 그랬다. 지금 적들은 마차를 부수고 있지 않은가! "으드득!" 그는 이가 부러질 정도로 갈아붙이고는 검화를 향해 다가갔다. 검화가 조금 찝찝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쓰러질 때가 되었는 데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껍질이 두터워서 독이 퍼지는 것이 조금 늦는 모양이군! 제 대로 한번 더!" 검화는 용창연검을 수평으로 들어올려 왼손으로 검끝을 잡아 활처럼 휘어지게 잡아당겼다. 육십 평생 패배를 모르던 그의 검법. 용사팔형(龍蛇八形)의 세사식, 섬전비망(閃電飛莽)의 준비 자세였다. 펑! 단단하게 잠겨져 있던 마차의 문이 떨어져 나갔다. 대초자곤 으로 몇 번이나 후려치고, 그것도 모자라 도끼로 문틈을 찍어서 야 떨어져 나온 문이었다. "나와라!" 거대한 개산대부를 양손에 움켜쥔 사내, 부화(斧花)가 열려진 문을 향해 소리쳤다. "나와라, 흑수당주!" 마차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당연히 아무도 나 오지 않았다. "겹이 나는가? 일파의 당주가 죽음이 두려워 문턱을 못 넘는 것이냐?" 여전히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편화와 부화가 눈짓을 교환했다. 편화가 손을 들어 마차지붕 을 가리켰다. 창화와 곤화가 지붕 위로 소리없이 뛰어올라갔다. 그들의 무 기가 아래를 겨누었다. 문으로 누군가가 나온다면 바로 암습할 수 있는 위치였다. 편화가 다시 손짓했다. 추화가 옆으로 몇 걸음을 걸어 마차의 문을 비스듬히 바라보는 위치에 섰다. 이제 마차 안에서 어떤 것이 튀어나와도 대응할 만반의 준비 가 갖추어진 것이다. 쌍도끼를 든 부화가 마차의 열려진 문 옆에 바짝 붙었다. 안에 서 암기라도 나올까 봐 대비하는 것이었다. 편화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셋 셀 때까지 안 나오면 불을 질러 버리겠다. 끝까지 얼굴을 안 보이고 불고기가 될 테냐, 아니면 나와서 당당하게 싸울 것 이냐? 선택해라!" 그는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고 곧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조용랬다. 흑웅은 검화의 용창연검에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었다. 큰 상처를 인지는 않았지만 흑응도 마차를 향해서는 오지 못 하고 있었다. 검화에게는 그것도 모욕적인 것이기는 했지만 흑응으로서도 미칠 지경이었다. 부화가 마차의 벽에 붙은 채 조금씩 마차의 문을 향해 다가가 고 있었다. 창화와 곤화의 이마로 땀이 흘렀다. 그들의 손에 힘이 들어가 고 있었다. "둘!" 파앗! 셋은 아직 세지 않았는데 부화의 손에서 도끼가 떨어져 문안 으로 날아들어갔다. 그 뒤로 부화가 도끼를 앞에 가린 채 뛰어 들었다. 그들은 애초에 셋을 셀 마음도 없었던 것이다. 편화의 동작도 신속했다. 손에 든 채찍을 떨치며 부화의 뒤로 바짝 붙어 마차의 문으로 다가갔다. 부화의 몸을 방패로 삼아 이차 공격을 감행할 자세였다. 그러나 부화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머리를 갸우 뚱거리며 마차 안을 돌아보고 있었다. 태양은 이미 지고, 붉은 황혼도 사라져 버렸다. 아까 전부터 하나씩 둘씩 늘어나던 등불이 이제는 강을 따라서 휘황하게 밝 혀져 있었다. 아직은 완전히 어둡지는 않지만 대지는 이미 밤의 세력권 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나루터의 하늘은 검푸른 빛으로 물들어 가고, 마차 안은 사물의 형상을 겨우 분간할 정도의 침침한 어두움으로 메워져 있었다. 부화는 마차의 어두운 구석에 네모진 관 하나가 놓여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다였다. 마차 안에 있는 물건은 관 하나뿐, 다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흑수당주라는 자가 시체란 말인가? 아니면 그들이 마차를 잘못 잡은 것인가? 그는 편화를 돌아보며 말했다. "관 하나밖에 없는……!" 부화는 말을 다 맺지 못했다. 그 순간 눈에 들어온 광경이 너 무나 충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파앙! 편화도 그것이 다가온다는 것은 느꼈다. 단지 피할 수가 없었 을 뿐이었다. 말이 달려오고, 그 위에 앉아 있던 사람이 허공으로 뛰어올랐 다. 말은 빨랐지만 거기 앉아 있던 사람은 더욱 빨랐다. 그는 말안장에서 떨어졌나 싶더니 어느새 편화의 머리 위에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검푸른 저녁 하늘에 휘날리는 장삼자락이 멋지다고 생각했던 것은 잠시뿐이었다. 그 장삼자락의 위로부터 시커먼 바람 같은 것이 수직으로 내려꽂히는 것을 그는 두 눈을 똑똑히 뜨고 바라 보아야 했다. 바라보기만 할 뿐 어쩌지도 못했다. 그렇게 편화는 죽었다. 허공으로부터 내리꽂히는 백리극의 유성검에 말 그대로 일도 양단(一刀兩斷)이 되어 죽어 버렸다. 곤화는 자신들이 서 있는 마차의 지붕 아래로부터 튀어올라오 는 핏줄기를 보면서도 멍하니 서 있었다. 그것은 창화도 마찬가 지였다. 그들도 편화와 마찬가지로 넋을 잃고 서 있었던 것이 다. 단지 편화는 죽고, 그들은 죽지 않았을 뿐이었다. 층격은 약간 떨어져 있었던 추화가 비교적 덜했다. 그래서 반 응도 가장 빨랐고, 죽음도 가장 먼저 맞이해야 했다. 그는 유성추를 휘둘러 막 편화를 두 조각내고 다음 먹이를 고 르고 있던 백리극의 등 한가운데를 찍어 갔다. 사전 동작을 극도로 줄여 버렸기 때문에, 사슬을 사용하는 연 형무기(軟形武器)였음에도 불구하고 깨끗한 직선을 그리는 공격 이었다.. 백리극은 귓가에 울리는 파공음으로 그 공격을 알아차리고 몸 을 돌렸다. 그의 손이, 그 전에 유성검이 정면으로 뻗어 유성주 에 닿았다. 빠앙! 폭음이 울렸다. 유성추의 둥근 쇳덩이가 쪼개져 나가며 추화 의 정수리에 장검이 박혔다. 퍽--! 수박 터지는 소리와 함께 선혈과 뇌수가 폭죽처럼 튀었다. 곤화와 창화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백리극을 공격하려 했 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추화의 머리를 부순 백리극의 기형적 으로 긴 장검(長劍)이 한바퀴 원을 그리며 그들을 향해 베어 오 고 있었던 것이다. 곤화가 본능적으로 검이 자신을 향해 다가드는 것을 느끼고 손에 든 대초자곤을 앞에 세워 검을 막으려 들었다. 파파팍--! 오리알 굵기의 대초자곤이 잘려져 나갔다. 쐐액! 백리극의 검이 토막난 대초자곤을 놓고 정신없이 한발을 물러 서던 곤화의 목을 날렸다. 피분수가 솟구치고 목이 공중에 떴다. 백리극은 그대로 몸을 돌리며 유성검을 중단으로부터 정면으 로 찔렀다. 러져 나오는 곤화의 피에 자신도 모르게 물러서던 창화의 가슴팍에 백리극이 바짝 붙는 순간, 그녀의 등판으로 긴 검신이 튀어나왔다. 창화는 두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불거지며 형언하기 어려운 표정을 지었다. "네…… 네가!" 무어라 말하려 하더니 입에서 선혈을 주루룩 흘리며 고개를 떨군다. 백리극은 발로 창화의 가슴을 걷어차며 검을 뽑았다. 바람이 불었다. 산발한 백리극의 머리카락 몇 올이 그 바람에 날렸다. 마차 위에 선 그의 옆에는 곤화와 창화의 시신이 뒹굴고, 마 차 아래에는 추화, 편화, 그리고 그가 죽이지는 않았지만 도화 의 시신들이 혹은 조각난 채, 혹은 그런대로 온전한 모습으로 뒹굴고 있었다. 악명이 자자했던 살수칠인방, 칠화회의 살아 남은 한 사람은 손을 멈추고 망연히 서 있었다. 검화, 그 주름살 가득한 얼굴이 경련을 일으켰다. 돈은 잃어도 다시 벌 수 있지만 사람은 죽으면 그것으로 그만 이다. 수하야 다시 모으면 되기야 하겠지만 어디서 방금 죽은 육화처럼 손발이 맞는 사람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육화? 방금 죽은 사람의 수는 다섯이었다. '한 사람은?' 두 자루의 개산대부를 무기로 삼는 사내, 부화였다. 그는 마 차 안에 들어가지 않았던가? 부화는 마차 안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들어갈 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의 눈알은 튀어나 와 뺨에서 대롱거리고, 혀는 길게 물려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목이 졸려 죽은 것이 확실했다. 결정적인 증거는 지금 부화의 목을 틀어잡은 검은 장갑이었 다. 부화는, 아니 부화의 시체는 그 검은 장갑에 목이 잡힌 채 천천히 마차 밖으로 들려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부화의 발이 땅에 닿고, 아직은 굳어지지 않은 무릎이 굽어져 바닥에 꿇려지는가 하더니 곧 길게 엎드려 버렸다. 그의 목을 움켜쥐고 있던 손이 그를 놓아 버린 것이다. 시체가 땅바닥에 던져진 그 자리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가지 런히 묶은 은발에 창백한 안색, 검은 유삼(儒衫)이 뭐라고 말할 수 없이 신비한 분위기를 뿌리고 있는 사내, 야광충이었다. 백강 나루에 밤이 온 것이다. "당주!" 걸레쪽 같은 옷을 걸치고, 온몸에는 회초리로 맞은 것처럼 붉 은 상처 자국이 나 있는 흑웅이 반색을 하며 반겼다. 야광충은 그를 힐끗 보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저만치에 선 검 화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검화의 얼굴에 다시 경련이 일었다. 아까처럼 분노에 몸을 떠 는 것이 아니었다. 육십 평생에 처음 만나 보는 낯선 감정에 절 로 그렇게 되는 것이었다. 신비스러움? 위압감? 흑은 공포? 어느것이든 낯선 것이었다. 대부분의 삶을 죽음의 위협을 느 끼기보다는 주면서 살아왔던 그가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는 헛기침을 하고 마른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흑수당주?" 굳이 확인을 하고 싶어서 물어 본 것은 아니었다. 그저 야광 충이 나타난 다음부터 온몸을 휘감아 오는 원인 모를 감정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아무 말이나 해본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사내, 야광충은 묻는 말에는 대답을 않고 그를 향해 손을 까닥거렸다. "귀찮군, 그냥 오라!" 전혀 정제되지 않은 동작이었는데 검화를 휘감은 긴장감은 더 욱 강해질 뿐 조금도 덜해지지 않았다. 그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용창연검을 마주 겨누었다. 짧은 순간 에 그의 몸에서는 정기가 흐르고, 그 기세가 대기를 팽팽하게 했 다. 나름대로 검에 일가를 이룬 성취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야광충이 같잖다는 듯 그를 향해 아무렇게나 한 발을 내디뎠 다. 약점을 찾고 어쩌고 하는 과정을 생략하기 위해 일부러 약 점을 보여 주는 것이다. 팽팽하게 당긴 시위가 놓여지듯이 검화의 몸이 본능적으로 그 동작에 반응을 했다. 파아앙! 저 가냘픈 회초리 같은 용창연검이 이런 소리를 내리라고는 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을 것이다. 대기를 발기발기 찢는 듯한 파공음과 함께 용창연검은 수백 수천 마리 용이 되어, 야광충을 향해 달렸다. 용사팔형의 마지 막 초식, 천룡사황(千龍蛇荒)이 펄쳐진 것이다. 그를 향해 내민 야광충의 손이 쥐어져서 가볍게 흔들렸다. 그 손으로부터 서릿발 같은 기운이 한 줄기 뻗더니, 용창연검이 만 들어 낸 수백 수천의 용을 아무렇지도 않게 통과해 검화의 머리 를 벼락치둣 관통해 버렸다. 파악! 검화의 머리가 박살이 나며, 붉은 피와 하얀 뇌수가 비처럼 뿌려졌다. 중원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양인장이었다. "지팔!" 그때까지 마차의 지붕에 서 있던 백리극이 야광충의 옆으로 뛰어내렸다. 야광충이 물었다. "어떻게 왔나?" 백리극이 대답했다. "그저 주변을 지나다가!" 마중을 왔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던 그였다. 야광충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은?" "예정대로, 지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좋군!" 야광충은 부서진 마차를 힐끔 보고는 다시 말했다. "뒤를 맡기겠다!" 말과 합께 그는 사라져 버렸다. 허깨비가 사라지듯 표연한 행 동이었다. 백리극은 부서잔 마차를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살피 고 있는 흑웅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남의 이목을 끌지 않기에는 이미 늦어 버린 것이다, "관을 꺼내라! 들고 가자!" '이목을 끌면 어떤가? 이미 알려저 버린 것을!' 그는 아까 만났던 유소백을 기억했다. 말없이 그를 보고는, 한참을 그렇게 보고만 있다가 그냥 가 버린 한때의 사부, 유소백을 그는 기억했다. 그는 어떤 말이 하고 싶었던 것일까? 죽은 줄 알았던 제자가 살아 돌아온 것을 보고는! 대역죄인의 굴레를 쓰고 돌아온 그를 보고……! 법 앞에서는 처자도 돌보지 않는다는 철포두(鐵捕頭)가 왜 그 냥 그를 보내 준 것일까? 흑웅이 검은 관을 메고 그의 옆으로 왔다. 백리극은 낮게 탄 식하고는 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떻게 보셨어요?" 작은 배였다. 강 한가운데에서 낚싯줄을 드리우고 있던 고깃 배, 그러나 어부가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유람선에 가까운 작고 깨끗한 배였다. 거기 앉아서 낚시보다는 강변에서 벌어진 싸움구경에 더 넋을 빼앗기고 있던 남장(男裝)의 여인이 물었던 것이다. 단정하지만 선이 가는 얼굴, 화장기는 없지만 분명 여인인데 남장을 한 모습이 특이한 매력을 풍겼다. 턱을 고인 손에는 검 은 장갑을 끼고 있어 더욱 특이한! 반대편에 앉은 노인이 혀를 찼다. "양주부에 심상찮은 바람이 불더니! 저렇게 괴이한 인물들이 나타났으니 풍파가 없을 수 없겠지!" "괴이하다!" 여인은 꿈꾸듯 몽롱한 목소리로 말했다. 속삭이는 것처럼 작 은 목소리. "멋있기만 한데요." "누가 말이냐?" 노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설마 저 묘족 청년은 아니겠지?" "할아버지!" 여인이 뾰족하게 소리쳤다. 두 사람은 조손간이었던 것이다. "은발유생도 멋있고, 장검의 장한도 멋있잖아요. 묘족 청년도 대단하기는 하지만!" 노인은 끝까지 장난이 치고 싶었던 모양, 손녀딸의 말에 끼여 들었다. "문신이 멋지지?" "훗!" 여인이 참지 못하고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저런 하인을 하나 구해 드릴까요?" "하인이라!" 이번에는 노인의 눈이 진지해졌다. "저런 하인을 부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특별하다 아니하지 못 하리라!" 그러더니 그는 낚싯대를 거두었다. "밤이슬이 차갑구나, 돌아가자! 아이구 이런! 미끼를 빼앗긴 줄도 모르고 있었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