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전 : 조선 정국공신 정주목사 증 병조판서 청평군 김공 신도비명
額篆 : 朝鮮 靖國功臣 定州牧使 贈 兵曹判書 淸平君 金公 神道碑銘
조선 병충분의 정국공신 통정대부 행 정주목사 안주진관 병마동첨절제사 증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 훈련원사 청평군 김공 신도비명 병서
옛적에 연산주가 음난하고 포악함이 심하여 나라마저 위태하기 거의 10여년, 이에 우리 손자 청평군이 동지와 더불어 우리 공희왕(즉 후에 중종)을 돕고 받들어 다시 종사에 기틀을 확정하였다. 그때 논공행상에 있어서 공만은 그 훈공에 비하여 낮은 포상을 받은 채로 한세상을 마쳤다. 그러나 공은 불평불만의 기색을 조금 더 보이지 않았으니 이것으로서 공이 비범하게 현명한 분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공의 휘는 우증(友曾)이오. 자는 희여(希輿)이다. 우리 김씨는 고려 문화시중 휘 대유(大猷)공의 자손으로 문화시중공이 휘 인우(仁祐)를 낳았으며 벼슬이 시랑이요. 시랑공이 휘 현(鉉)을 낳았고, 벼슬은 감문위 상호군이요. 상호군공이 창조(昌祚)를 낳았으니 문하시중이오. 시중공이 휘 중방(仲房)을 낳았으니 판봉상시사요. 판봉상시사공이 휘 관(灌)을 낳으니 이가 조선조에 들어와 호조참의로 증 의정부 좌찬성인대 공의 고조가 되신다. 증조의 휘 의지(儀之)는 한성부윤이고, 할아버님의 휘는 리(理)이니 부사이고, 아버님의 휘는 극함(克諴)이니 사제감 첨정이오, 어머님은 의령남씨(宜寧南氏)인대 소윤 상명(尙明)의 따님으로 정당문학 좌시(佐時)의 증손녀이다.
공이 타고난 바탕과 성질이 재주있고 늠름하여 의지와 기계가 웅장하고 원대하였으며 경사와 사기의 통달하였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 하였으며 성품이 강직하여 남의 잘못을 보면 즉석에서 면대하여 책망하되 용서함이 없었다.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는데 하루는 연산군이 궁안에서 말을 달리고자 하는지라 공이 말굴레를 잡고 못 하는 것이라고 간하였다.
명천현감으로 나갔을 때 갑자사화로 귀양 온 윤여해(尹汝諧)를 대접한 죄를 물어 곤장형을 받고 귀양갔다가 풀려 돌아와 병인년(丙寅年 1506 중종1년)에 훈공 3등에 책정되었으니 곧 나라를 평안하게 한 공로이다. 그뒤 동래현령에 이어 정주목사를 거쳐 첨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는데 금상 임술년(壬戌年 1742년 영조 18년) 공이 세운 공훈으로 친공신 병조판서에 청평군의 봉군이 추증되었다.
아아! 공이 반정에 끼친 공훈은 국사에 기록하여 남겨둘 밝은 시기에 불행하게도 간악한 무리들의 헐뜯음과 모함의 액운이 있어 벼슬은 당상관(정3품)에 머물렀고 끝내 작위는 어찌 못하여 이름과 공적이 크게 세상에 나타나지 못 하고 말았다.
공이 일찍이 시를 지어 남겼으니 “교묘한 말과 아첨하는 얼굴로 이미 많은 복얻음을 보았노라. 고지식한 충성과 신의만 있었으니 이 한 몸 그릇칠 줄 알았으리오.” 하였으니 이것으로 공의 사람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공이 돌아가신지 200년이 넘어서야 신주를 사당에 모시고 영구히 받들게 되었는데(즉 불천위를 말함) 공의 기일은 8월 13일. 부인의 기일은 7월 28일로 전하여 왔을 뿐이며 그 낳고 돌아간 연대며 벼슬자리의 행적은 오랜 세월에 이르도록 전하여 오지 않아 그 기록과 들은 바가 겨우 이와같이 한 두가지에 그치고 말았다. 슬픈지고 그러나 공덕은 감추고 복은 하늘에 맡겼으니 오래된 뒤에야 크게 피어나서 자손이 번성하고 문화가 문호가 놀랄만 치 빛나니 세상에서 우러러보는 씨족이 되었다.
하늘의 도리는 가히 믿을 것이며 중험이 틀림없음을 알 것이다.
산소는 광주 왕륜고현(旺倫古縣) 백운산 아래 손좌의 베갯머리에 모셨으니 여기는 공이 생전에 점처두신 자리로서 인하여 자손들이 대대로 장사지내는 곳이 되었다.
부인 남양홍씨(南陽洪氏)는 참판을 지낸 이로(利老)의 따님으로 판중추를 지낸 약(約)의 손녀이다. 묘는 공의 산소의 왼편에 쌍분이고 공의 증직에 따라 증 정부인이시다.
아들은 여광(汝光)인데 대호군을 지냈고, 후사가 없어 일가집 조카인 계(繼)를 후사로 하였는데 학문과 덕행이 세상에 이름을 날려 집의에 증직이 있었다. 이 분이 4남을 두었으니 맏이는 충백(忠伯)인데 증 참의이고, 다음이 효백(孝伯)인데 증 집의이니 모두 효행이 돈독하였다. 3남이 인백(仁伯)이니 학행으로 이름이 났으며 증 이조판서요, 4남이 예백(禮伯)이다. 현손 이하가 모두 200여 명인데 벼슬에 나간 자만을 적어 본다.
수(洙 )는 참봉, 간(幹)은 유일로 우참찬, 재(栽)는 문과하여 집의, 치후(致垕)는 문과에 장원으로 관찰사, 종정(鍾正)은 문과하여 승지를 지냈으니 이는 증 참의공파이다.
익겸(益謙)은 무과하여 선전관, 익성(益聲)은 진사, 부(溥)는 감역, 상(相)은 무과로 영장, 추(樞)는 무과하여 군수, 형로(亨魯), 몽로(夢魯)는 각각 무과로 같은 병사, 응로(應魯)는 역시 무과하여 부사, 범로(範魯)도 무과로 병사, 치명(致鳴)과 무과하여 부정, 치구(致龜) 또한 무과하여 부사요, 치요(致堯)도 무과하여 선전관, 종만(鍾萬)도 무과하여 병사, 종영(鍾英)도 무과하여 부사를 지냈으니 이는 모두가 증 집의공파이다.
극형(克亨)은 생원인데 학문이 독실하여 추천으로 정랑을 지냈고, 징(澄)은 문과 급제하여 관찰사, 담(澹)은 생원, 혼(混)은 동지중추부사, 순(洵)은 진사에 돈동령, 구(構)는 문과에 장원하고 우의정, 유(楺)는 문과하여 참판에 대제학, 무(楙)는 진사에 목사, 고(槹)는 문과하여 승지, 방(枋)은 군수, 후(木厚)는 무과하여 병사, 희로(希魯)는 진사에 참판, 재로(在魯)는 문과 영의정, 정로(正魯)는 생원에 좌랑, 취로(取魯)는 문과에 판서, 성로(省魯)는 진사에 판결사, 약로(若魯)는 문과하여 좌의정, 상로(尙魯)는 문과하여 영의정, 득로(得魯)는 무과하여 도사, 익로(益魯)는 현감, 술로(述魯)는 부사, 항로(恒魯)는 군수, 갑로(甲魯)는 진사, 명로(鳴魯)는 군수, 찬로(纘魯)는 무과하여 오위장, 장로(章魯)는 무과하여 판관, 치만(致萬)은 진사시에 장원하고 시직, 치일(致一)은 진사로 원정, 치인(致仁)은 문과에 장원 하고 판서, 치량(致良)은 생원으로 정랑, 치영(致永)은 진사, 치온(致溫)은 생원으로 목사, 치공(致恭)은 진사로 부사, 치각(致恪)은 생원, 치양(致讓)은 문과하여 부수찬, 치성(致誠)은 봉사, 종후(鍾厚)은 생원으로 부솔, 종수(鍾秀)는 진사로 군수, 종설(鍾卨)은 진사로 정랑, 종협(鍾協)은 현감이니 이는 증 판서공파이다.
공의 산소에 비록 묘표가 있으나 오랜 세월이 흘렀을 뿐더러 신도비를 세우지 않는 것이 송구스러워서 외람되고 망령됨을 헤아리지 않고 삼가 표지에 실린 것을 추려서 엮고 명을 적는다.
명왈(銘曰)
운산지양(雲山之陽) 양지바른 백운산 기슭
사수양양(沙水洋洋) 너울너울 흘러가는 사그내가 바라보이는
중유당봉(中有堂封) 이곳에 무덤이 있나니
대부지장(大夫之藏) 대부(大夫)의 산소로다
원급본지(爰及本支) 여기 본종(本宗) 지손(支孫)의 무덤
유좌유우(維左維右) 왼편 오른편 즐비하도다
전수백년(傳數百年) 수백년 걸처서
세이팔구(世以八九) 팔, 구대 이어 오나니
비덕지후(匪德之厚) 공의 덕이 두터웁지 않았다면
어호갈능(於戱曷能) 아! 어찌 그것이 가능하랴!
열렬아공(烈烈我公) 웅위(熊衛:빛나는 모양)한 공의 아름다움이여
석사정릉(昔事靖陵) 예전에 정릉(靖陵:중종의 능호)을 섬기실 때
익성발란(翊聖撥亂) 임금도 혼란한 시국을 바로 잡으니
비유대동(俾有大東) 이나라가 엄연히 있게 했도다
위불칭공(位不稱功) 지위는 그 공만큼 오르지 않고
보불식궁(報不食躬) 그 공에 알맞은 녹봉은 받지 못하였으나
유기불유(惟基不有) 그러나 눈에 보이는 그것들만 없었을 뿐
계경면면(啓慶綿綿) 가문에는 경사가 면면이 열리었도다
족대이현(族大而顯) 족속이 크게 세상에 드러나
혁혁후선(赫赫後先) 선조에 이어 대대로 혁혁하였으니
왈충왈효(曰忠曰孝) 충신의 집안이요 효자의 집안이로다
궐유가성(厥有家聲) 집안의 명예가 자자하거늘
내추내경(乃墜乃傾) 명망은 사라지고 집안은 기우나니
범아후승(凡我後承) 우리 후손된 자
주감불욱(疇敢不勗) 뉘 감히 힘쓰지 아니하랴
모왈세달(莫曰世達) 오래된 옛일이라 하지마라
공재사녹(公在斯麓) 공은 이상 기슭에 영원히 계시도다
숭전기원후삼갑신(1764 영조40년) 12월 립
7세손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치임 봉조하 상로 근찬
七世孫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致任奉朝賀 尙魯 謹撰
8세손 자헌대부 원임 이조판서 치인 근서
八世孫 資憲大夫 原任 吏曹判書 致仁 謹書
9세손 통정대부 승정원 좌부승지 종정 근전
九世孫 通政大夫 承政院 左副承旨 鍾正 謹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