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逆) 남파랑길(첫 번째 - 2)
(땅끝탑∼완도 구계등, 2023년 2월 25일∼26일)
瓦也 정유순
아침에 이어 점심까지 땅끝의 남도 맛에 취해 과식할 정도다. 오후에는 남파랑길 정식 코스에서 일탈하여 땅끝길 1코스인 땅끝마을∼사구미 구간인 <땅끝 바닷길> 송지면 통호리 해변으로 들어선다. 통호리(桶湖里)는 마을 앞쪽만 제외하고는 산이 마을을 깊이 안고 있어, 마치 속을 파놓은 나무속에 마을이 있는 것과 같다 하여 통(桶)에 바다의 포(浦)를 붙여 통포 또는 통개라 불린 데서 명칭이 유래하였는데, 일제강점기에 통호로 바뀌었다.
<완도>
송지면 통호리와 북평면 영전리의 경계를 이루는 해안 언덕에는 이름이 재미있는 먼나무가 붉은 열매를 가득 안고 있다. 꽃이 없는 겨울에 꽃처럼 예쁜 열매를 가진 먼나무는 언제 봐도 매력적이다. ‘이게 뭔 나무지’라고 질문하면 ‘먼나무’라고 알려주는데, 처음 듣는 사람들은 무슨 뜻인지 몰라 당황하게 하는 나무다. 나무열매가 너무나 멋져서 ‘멋스런 나무’라는 뜻에서 ‘멋나무’였는데 ‘먼나무’가 되었다는 그럴 듯한 이야기가 있다.
<통호리 먼나무>
먼나무는 바닷가 숲에 자라는 상록 큰키나무로 높이 5∼10m이며 잎은 어긋난다. 잎 몸은 가죽질이며 타원형이고 가장자리는 밋밋하다. 꽃은 5∼6월에 암수딴그루로 피며, 햇가지의 잎겨드랑이에 2∼7개씩 달리고, 붉은빛이 도는 녹색이다. 그러나 꽃 색도 연하고 크기도 작아 자세히 보지 않으면 꽃이 피었는지 알지 못할 정도다. 열매는 핵과이며, 난상 구형으로 붉게 익는다. 우리나라 남해안과 제주도에 자생한다.
<먼나무>
발길은 해안을 따라 해남군 북평면 영전리로 들어선다. 영전리(永田里)는 본래 영암군 북평종면 지역에 속하였는데, 1906년(광무 10) 해남군으로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서호리(西湖里), 활구미리(活口未里), 안평리(安平里) 일부를 병합하여, 해남군 북평면 영전리로 개설되었다. 현재 영전마을, 서호마을, 남전마을, 남성마을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영전리에 있는 남성항을 뒤로하고 국도 제77호를 따라 북으로 바라보면 달마산이 남북으로 병풍을 친다.
<영전리에서 본 달마산>
<영전리 보리밭>
오후 햇살에 윤슬을 반짝이는 섬에는 흑일도와 백일도가 다정하게 서있다. 두 섬은 전라남도 완도군 군외면에 딸린 섬으로 흑일도의 지명 유래는 백일도의 서쪽에 위치하여 해지는 섬이란 뜻으로 ‘흑일(검은 나루)’이라 불렀으며 해안의 모래가 검은색을 띤다고 하여 ‘흑일도’로 불렀다고도 하나 지금은 검은 모래밭을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백일도는 해맑고 하얀 바닷가의 차돌과 모래가 빛을 발하여 육지에서 보면 깨끗한 섬이라고 하여 ‘백일도(하얀 섬)’라 불렀다고 한다.
<흑일도-백일도-동화도>
1700년대 신안주씨(新安朱氏)가 백일도에 들어온 이후 집성촌을 이루어 왔으며, 그 후 여러 성씨가 들어와 거주하였으나 주씨 집안에서 섬 전체를 매입하여 주씨 단독 소유 섬을 이루었다고 한다.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백일도 주변의 흑일도와 동화도도 매입하여 백일도(白日島)는 장남에게, 흑일도(黑日島)는 차남에게, 동화도(東花島)는 딸에게 내주어 거주하게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동화도는 꽃섬이라 불렸으며 백일도를 중심으로 동쪽에 있어서 ‘동화도’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동화도(뒤)와 백일도>
길이 아닌 해안을 따라 갔더니 북평면 평암리다. 평암리(平巖里)는 1914년 안평(安平)과 암정(巖井)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영전리와 마찬가지로 본래 영암군 북평종면에 속하였는데, 1906년(광무 10) 해남군으로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금부리, 암정리, 암평리, 묵동리, 전옹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해남군 북평면 평암리로 개설되었다. 평암리는 전형적인 농촌 지역이다. 마을 배경으로 달마산 지류와 중마산, 도솔봉이 솟아 있다. 초목이 울창한 연초도(蓮草島)가 안평마을 앞에 있다.
<길 없는 해변길>
마침 해안에는 물이 빠져 갯벌이 넓게 펼쳐진 연초도 앞 바닷가에는 겨울의 진객 큰 고니가 다른 철새들과 함께 <백조의 호수>를 공연한다. 오리과에 속하는 큰고니는 대형 종으로 암수 모두 온 몸이 흰색이며, 부리는 노란색으로 끝은 검다. 어미 새는 몸이 흰색이지만 어린 새는 몸이 회갈색이다. 주로 수생식물을 먹이로 한다. 대부분 가족단위로 무리를 이루는 특징을 가지며, 우리나라에서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큰고니와 겨울철새>
<큰고니>
평암리를 지나면 서홍리다. 북평면 서홍리(西洪里)는 지형이 쥐 모양을 하고 있다 하여 서포(鼠浦)라고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서쪽에 넓은 들이 있다 하여 서홍(西洪)으로 바뀌었다. 이곳도 영암군 북평종면에 속하였는데, 1906년(광무 10)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평등리, 신홍리와 함께 서진리, 묵동리 각 일부를 병합하여, 북평면 서홍리로 되었다. 현재 서홍마을, 신평마을, 신홍마을, 묵동마을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평암리 달마산>
서홍리 북쪽에는 이진리가 있다. 이진리(梨津里)는 지형이 배 같이 생긴 나루라 하여 ‘배나루’로 부르다가 이진(梨津)으로 명칭이 유래하였다. 이진마을은 완도군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제주도와 내륙을 연결하는 포구로 이용되었다. 조선 후기 김정호가 만든 『대동지지』에는 “이진진(梨津鎭)은 한양에서 950리(약 370여 킬로미터) 떨어져 있고 성에는 해월루(海月樓)가 있다. 제주로 들어갈 사람은 모두 여기서 배를 타고 떠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진마을과 성>
<이진리사무소>
제주도와 육지를 연결하던 교통의 요지였던 이진마을은 한때 300호가 넘었다고 한다. 시골 마을 300호면 대단한 규모의 동네다. “북평면 면장할래? 이진마을 이장할래?”하면 이진마을 이장한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있었다고 하니, 교역과 해산물을 통한 이진마을의 경제력이 대단했음을 보여준다. 당시 배의 평형을 유지하기 위해 제주도에서 말과 함께 싣고 온 현무암이 지금도 이진마을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진항>
이진마을은 군사의 요충지로 1598년(선조 21) 이곳 이진에 진(鎭)이 설치되고, 1627년(인조 5)에는 종4품인 만호(萬戶)가 주둔하는 만호진으로 승격되었으며, 1648년(인조 26) 이진진성을 쌓는다. 성은 남쪽과 북쪽의 높은 구릉지를 이용해 쌓았고 중앙이 낮은 분지 형으로 마을을 에워싸고 있으며, 마을 입구 북문에 남아 있는 옹성은 원형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당시 수군만호가 머물던 해월루도 복원되는데, 당시 제주로 오가는 사신들의 객사로도 이용되었다. 마을 안 서문 입구에는 수군만호비가 서있다.
<수군만호비>
칠천량해전에서 원균이 이끈 조선 수군이 대패하자 선조는 백의종군 중인 이순신을 다시 3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고, 이순신은 임명받자마자 조선 수군을 재건하기 위해 구례·곡성·순천·보성을 지나면서 식량과 군대를 모았다. 장흥 회령포(현 회진)에서 12척의 판옥선을 인계받고 군사들과 강진 마량(馬良)을 거쳐 명량으로 가는 도중에 들른 곳이 이진이었다. 1597년 8월 20일(음력)로 명량대첩(鳴梁大捷)이 있기 불과 보름 전이었다.
<이진성 장군샘>
<난중일기>에는 “곽란이 나서 심하게 아팠다. 곽란이 심해 일어나 움직일 수도 없었다. 배에 머물 수가 없어 육지에 내렸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병세가 심해지자, 배에서 내려 이진마을로 들어선다. 주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몸에 좋다는 것들을 가져와 이순신을 봉양한 덕분에 몸이 완쾌된다. 주민들의 도움으로 몸을 회복한 이순신이 나흘만인 8월 24일 이진마을을 떠나 해남 어란포구에 이르렀고, 보름도 채 되지 않아 명량대첩(9.16)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이진성 내부>
그런 연유가 있어서인지 이진마을은 1909년 항일의병운동과 1930년대 전국 최대 조직인 전남운동협의회 사건 중심 마을이다. 항일의병운동은 이진마을 출신인 황두일이 서남해안에서 활동한 의병대장 중 한명이었다. 1930년대 항일조직인 <전남운동협의회>에도 이진마을 출신인 동경 유학파 김홍배와 동광학원에서의 항일 교육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협의회는 당시 전국 최대 규모의 항일조직이었다. 이진마을 서쪽 달마산에 해가 놓일 때 우리는 땅끝길 3코스 까지 걸었다.(계속)
<이진성 우물>
<항일마을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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