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 한강변 ⑱절두산 –
儒佛仙 기득체계 모순을 거부하며
東學이 못한 救濟 西學으로 이루려
죽어서 새로 태어나 믿음 이룬 새남터
배달9208/개천5909/단기4344/서기2011/09/10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절두산
성산대교를 건너기 전
천주를 믿다가 목을 잘리운
천주교 성지가 서 있었다.
배달9208/개천5909/단기4344/서기2011/09/10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새남터, 절두산 성지
서울에는 유명한 天主敎 유적지 두 곳이 한강변에 있다.
새남터와 切頭山이다.
두 곳 모두 천주교인들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신앙을 지키다가 처형당한 순교 성지다.
행정 구역상 새남터는 용산구, 절두산은 마포구다.
옛날에 '노들' 혹은 '沙南基' 라고 불린 새남터는
조선조 초기부터 군사들의 鍊武場으로 사용된 곳으로,
국사범을 비롯한 重罪人 처형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임금이 살고 있는 성안에서는 罪人을 처형하지 않는(피를 보지 않는) 법이었기 때문에
성 밖으로 죄인을 끌고 나가 사형을 집행 하였으니
새남터를 비롯하여 서소문 밖과 양화나루의 切頭山 등이
궁궐에서 멀리 떨어진 郊外 처형 장소인 셈이었다.
切頭山의 본래 옛 이름은 잠두봉(蠶頭峰), 加乙頭 또는 龍頭峰인데,
절두산이란 이름이 생긴 것은 1866년 丙寅年 大迫害 시기에 대원군의 天主敎 말살 정책으로
이곳에서 天主敎人들이 목이 잘린데서 유래했다.
그 직접적인 동기는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프랑스 군함이 강화 해협을 거처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양화진(楊花鎭) 앞에까지 당도한 적이 있는데,
강화도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친 대원군은 양이(洋夷)로 더럽혀진 땅을
천주교인의 피로 씻어야 한다며 迫害를 더욱 강화하기 시작했고,
프랑스 군함이 정박했던 양화진 근처의 잠두봉을 處刑地로 사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절두산에서는 산봉우리에서 죄인의 목을 쳐서 강물로 던져 버리니 시체 처리가 손쉬웠고,
새남터 역시 옛날엔 民家가 적고 나무가 울창한 곳인데다 넓은 모래밭이 있고
또 漢江이 가까워 罪人을 處刑하고 뒤처리를 하는데 최적지였다.
새남터에서는 1801년 辛酉迫害때 주문모 신부가 순교한 것을 필두로
丙寅迫害 때까지 주로 성직자(주교*신부)들이 순교했다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도 1846년 丙午迫害때 이곳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했다).
한국 103위 聖人 중에 聖職者가 11명인데, 그중 여덟 분이 새남터에서 殉敎한 것이다.
그러나 절두산에서는 신부들, 다시 말해서 교회의 지도자들은 처형하지 않았다.
따라서 절두산보다 새남터가 더 중요한 순교 성지라고 할 수 있지만,
오늘날 聖地로 더 각광을 받고 있는 곳은 새남터보다 절두산이다.
중죄인 처형지로서의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천주교인들이 殉敎하기 400년 전,
그러니까 1456년(세조 2년)에 단종을 옹호하던 死六臣이
새남터에서 망나니의 칼에 피를 뿜었고,
조선조 7대 세조 때의 名將 南怡(남이)도 그를 시기하던 유자광의 모함을 받아
1468년 28세의 젊은 나이로 이곳에서 죽임을 당했다.
북소리 둥둥 장삿배 들어 오더니
새벽에 돛을 달고 동쪽으로 나간다.
바람에 날리는 깃발 어느새 안 보이더니
새남터 푸른 수림을 다 지나갔구나.
다산 정약용의 이 시에서 연상되는 게 있다.
수십 년 전, 천주교의 순교를 그린 영화 '새남터의 북소리'에서
사형 집행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망나니의 칼에 태연하게,
아니 목을 어느 각도로 해야 칼로 치기 쉽겠느냐고 되레 망나니에게 물으며
하늘을 우러러 성호를 긋던 순교자들의 순교 장면이 눈에 선하다.
그러나 우리 신앙의 후손들은 부끄럽다.
오랜 세월 새남터에 무관심해 온 탓에 그 정확한 殉敎 장소를 알지 못하게 되었고,
그곳을 聖地로 확보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뒤늦게 殉敎 地點으로 추정되는 현재의 용산구 서부이촌동 199번지의 땅을 매입하여
1950년 순교 기념지로 지정한 후 1956년에 '카톨릭 순교 성지' 란 이름의 기념탑을 세웠다.
그리고 근 30년 뒤인 1984년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 때
한국순교복자수녀회에서 이곳에 지하 1층, 지상 3층, 종탑3층의
한국 전통 건축 양식의 대성당을 건립하고 순교 사료와 유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절두산도 새남터처럼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조차 오랫동안 잊혀진 땅이었다가
1956년 12월에 비로서 서울교구(한국순교자현양회)에 의해 매입되었고,
병인 순교 100주년을 기해 1967년 10월에 건축가 이희태의 설계로
기념관(성당, 유해실, 박물관)을 건립함과 동시에 양화진 본당을 병설했다.
(양화진 본당은 그 뒤 1983년에 서교동 본당으로 이전되고,
절두산은 순교 기념관으로만 운영하게 되었다),
절두산 순교 성지가 지금의 모습으로 본격 개발되기 시작한 거은
제2대 관장 박희봉(이시도로) 신부가 재임한 1970 ~ 1975년부터로,
부지 추가 매입과 조경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1972년 5월에는 성 김대건 신부 동상이 건립되었다.
박희봉 신부는 1983년 3월부터 1988년 7월까지 제6대 관장으로 재차 재임하였으며
이 시기에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 신안 대회 및 103위 시성식을 주재하기 위해
우리나라에 온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 성지 기념관을 방문하여
성해(聖骸) 27위를 축성했다(1984년 5월).
절두산은 그 '끔찍한' 이름과 달리 주변 경치가 아름다운 경승지였다.
그래서 서울 장안의 선비들이 즐겨 찾아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풍류를 즐기던 곳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에
'龍頭 第一峰에 걸어서 오르니,
풍광이 한이 없는데 흥인들 다할 수 있으랴,
사방의 산과 물은 詩情밖인데,
만리 건곤은 한눈에 들어오네.
마을 집들은 북쪽으로 연하여 성곽에 가깝고
고깃배는 서쪽으로 가매 바다 어귀 통했네.
주인이 술자리 마련하고 손을 자주 만류하니
저녁 해가 어느덧 붉은빛 사라지네' 라는 詩가 수록되어 있는가 하면,
<세종실록>에 조선에 사신으로 왔던 명나라 문인이 용두에 올라가 구경하고
'天下絶勝之地' 라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평상시에는 자연의 勝景으로 시민들의 위안의 장소가 되던
양화나루(버들꽃나루, 또는 楊花渡)도 내외의 복잡한 정세가 계속되는 중에는
군사, 교통 내지는 행형의 장소로 이용되었으니(<서울 600年史>),
그 한 예로 갑신정변의 중심인물로
1894년 상해에서, 국내에서 밀파된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된
김옥균의 시신이 淸國 군함에 실려 제물포에 도착하자,
정부의 命으로 양화진에서 머리를 베어 달아매어 만인에 戒告하였다.
1997년 11월에 절두산 순교 성지 일원이 국가 사적지 제399호로 지정되었다.
그런데 지정된 명칭이 교회가 희망하던 '절두산 성지' 가 아닌
'양화나루 잠두봉 유적' 이어서 아쉬웠다.
양화나루는 양화진의 순 우리말 표현을 택한 것이지만,
절두산이 '잠두봉' 으로 지정된 이유는 '문화재의 보존 관리 및 활용은
원상 유지를 기본원칙으로 한다' 는 문화재 보호법에 근거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곳의 원 이름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절두산이 아니라
잠두봉 또는 용두봉이며 <조선왕조실록>과 <서울고지도> 등에도
잠두봉이라는 기록이 더 많이 나오기 때문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