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슈케나지 유대인(카자르 후손)과 세파라딤 유대인(아브라함 후손) 바른믿음 김주옥 기자 2020.07.29 세계정부가 우리를 지배하게 될 세상이 가까이 오고 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유대인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는 그들이 만들어준 역사들을 경험하며, 그들이 만들어준 방송과 신문에서 세상을 읽으며, 그들이 만들어준 교과서로 역사를 배우며, 그들이 만들어준 경제상황에서 돈을 잃기도 하고 벌기도 한다. 세상에서 가장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고 세계 정치와 경제와 사상을 지배하는 유대인들을 우리는 매체를 통해서 매일 가깝게 보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중동의 이스라엘인과는 사뭇 다른 얼굴이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한국처럼 단일민족이라고 배워왔지만 사실은 언젠가 대거 이입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에 대한 비밀이 여러 자료들을 통해서 밝혀졌다. 7세기경 코카서스에서 카스피해 북쪽 중앙아시아에 인구 약 100만 명 규모의 카자르라는 나라가 존재했다. 투르크계에 속하는 카자르족은 중국 북부로부터 흑해까지 펼쳐진 광대한 초원을 방랑하던 유목민족으로, 7-10세기에는 러시아 남부와 우크라이나, 카프카즈 산맥, 중앙아시아를 망라하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카자르 왕국은 동로마 제국과 사라센 제국으로부터 계속 종교적 압박을 받으며 생존의 위협을 당하고 있었다. 두 종교의 공통분모가 유대교라고 생각한 카자르의 불란 왕은 740년 유대교를 국교로 선포한다. 샤머니즘을 숭배하던 카자르 왕국이 여호와를 숭배하는 유대교로 개종한 것은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라 생존전략이었다. 유대인이 아니면서도 유대교를 국교로 삼은 역사상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카자르 제국의 지배계층은 8-9세기에 모두 유대교로 개종하며 강대한 유대제국을 세워나갔다. 그후 카자르는 몽골제국의 공격으로 12세기경 멸망하고 이후의 역사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여러 연구가들에 의해서 그들의 역사가 다시 추적될 수 있었다. 카자르 왕국은 멸망한 후 우크라이나, 러시아, 헝가리, 폴란드,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체코),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 동유럽으로 흩어졌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회당을 세워 신앙공동체 안에서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켜갔다. 세계 2차대전 때에는 미국과 서유럽으로 넘어오면서 백인 유대인의 뿌리가 되었다. 유대인을 크게 둘로 분류한다면 아슈케나지와 세파라딤이 있다. 전자는 카자르의 후예들이고 후자는 아브라함의 후예들이다. 몇 년 전 이스라엘에서 두 부류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었을 때 세파라딤이 붙인 포스터에는 “아슈케나지는 카자르로 돌아가라”는 글이 써 있었다. 자신들이 정통 유대인으로 이 땅의 주인이니까 저들은 자신의 고향인 카자르로 돌아가라는 말이다. 그러나 현실로는 아슈케나지 유대인이 정통이 되어 버렸다. 숫적으로도 압도적 다수고 지위로도 절대적으로 우위다.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어버린 격이다. 두 부류 간의 갈등을 다룬 <타임>지 2010년6월17일 기사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사태는 유럽계 유대교 부모 40쌍이 자신의 딸이 중동·아프리카계 유대교 딸들과 한 학교에 다니는 것을 거부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이들의 갈등은 유대교의 교리 해석과 유대인의 역사적 이주 과정에서 생긴 차이 때문이었다. 유대인은 이주 지역에 따라 크게 아슈케나지 (유럽·미국)와 세파라딤 (북아프리카·중동계)으로 구분된다. 아슈케나지는 부유한 국가에서 유대교 교리를 철저히 지키며 극우 성향을 유지해 ‘초정통파’ 성향을 갖게 된 데 비해, 세파라딤은 생존을 위해 교리가 비교적 개방적으로 유화됐고 가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 아슈케나지는 철저한 유대주의로 자신들이 진짜 유대인이라고 주장하지만, 혈통상 아브라함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카자르의 후손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런 주장에 대해 대화하기를 피한다. 만약 자신이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라면 고토 이스라엘로 돌아가야 한다는 시오니즘을 주장할 근거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쾨슬러가 그의 저서 <제13지파>에서 아슈케나지를 ‘제 13지파’라고 부른 이유도, 원래 이스라엘에 있었던 12지파에 하나가 새롭게 추가되었다는 의미였다. 그의 저서는 엄청난 충격과 논란을 불러 일으키며 어느 나라에서는 출간이 금지되기도 했고, 그는 큰 위협을 받으며 1983년 결국 자살한다. 아서 쾨슬러 항상 그랬듯이 유대인에 대한 불리한 증언은 거짓이라는 반박을 받았다. 그러나 쾨슬러 자신은 반유대주의자가 아니라 오히려 유대인의 국가 건설을 지지하는 아슈케나지 유대인이었다. 그는 아슈케나지와 시오니즘을 반대할 목적으로 거짓 증거할 필요가 없었다. 그의 신분으로 볼 때 그의 주장은 더 신빙성을 갖는다. 카자르의 후손 아슈케나지 유대인은 혈통상 ‘아브라함의 후손’도 아니면서 고토 이스라엘의 주인이라고 주장했다. 유대인은 과거에 빼앗겼던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이 시오니즘이다. 시오니즘이 생겨난 배경에는 유대인이 받은 핍박이 있다. 유대인은 세계에서 가장 핍박받은 민족이라고 알려진다. AD 70년 로마에게 패하고 세계로 흩어져 살면서 크게 미움을 받고 방랑유리하는 삶을 살았다. 흔히들 알고 있기로, 인류의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동족인 유대인들이 죽였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예수의 피값으로 유대인이 핍박받는다는 이야기는 13세기 이후에 고착화된 것이다. 실제로 그들이 미움받았던 이유는 그들이 믿는 정통 유대교의 탈무드와 이단 유대교의 카발라로 인한 것이었다. 유대인 언론인 버나드 라자레는 자기 민족이 미움받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유대인에 대한 시공을 초월하는 이 반감은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왜 유대인은 알렉산드리아와 로마에서부터, 페르시아와 아랍, 그리고 투르크와 기독교국가들에서까지 번번히 증오와 천대의 대상이 되어왔을까? 그것은 유대인은 융화가 불가능한 존재이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오늘날까지도 변함이 없다... 왜 유대인은 융화되지 않는 것인가? 그것은 이방인은 결코 용납할 수 없으며 양립할 수도 없는, 그들만의 교조적 진리를 가르치는 종교와 율법을 유대인이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만이 택함을 받았으며 그들이 결국에는 세상을 지배하게 될거라는 믿음은 유대인에게 엄청난 자부심을 심어주었고 그로인해 유대인은 비유대인을 경멸의 눈초리로 바라보게 되었으며 종교적인 신앙에 민족주의적인 요소까지 가미되었을 때 비유대인에 대한 시각에는 증오심까지 보태지게 되었다... “ 성경을 완전히 왜곡해서 만들어낸 탈무드에 의하면, 오직 유대인들만 인간이고 이방인은 유대인을 섬기는 노예와 같은 자들이다. 이런 잘못된 선민사상에 의해서 그들은 반인륜적인 사상과 율법들을 만들어냈다. 또 ‘가짜 메시야’인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기독교를 증오하면서 온갖 반기독교적 사상과 율법들을 만들어냈다. 탈무드를 연구한 엘리자베스 딜링은 유대주의를 한마디로 사탄주의라고 결론내린다. 또한 유대인은 마법적인 카발라를 믿으며 은밀하게 인신제사와 같은 사악한 의식을 행했기 때문에 더욱 미움받았다. 유럽인들은 유대인들이 기독교 소년소녀들을 납치해서 소위 ‘피의 의식’을 한다고 믿었는데, 실제로 영국, 나폴리, 사라고사, 다마스커스, 키시니에프 등 전 유럽과 중동에서 유대인의 피의 의식에 대한 재판이 행해졌다는 기록이 발견된다. 유대인은 이런 이유들로 미움받으면서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쫒겨다니곤 했는데 그래서 포주나 고리대금업 등을 하면서 돈을 벌기에 힘썼다. 뛰어난 머리와 상술로 유럽의 금융과 산업을 장악하며 세상과 기독교에 대한 복수의 칼날을 세워갔다.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사는 유대민족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나라를 세우자는 시온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7-18세기부터다.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제1차 시오니스트 회의에서 이 계획은 <시온의정서>로 구체화되었고 이 책자는 현재 대영 박물관에도 한 부 보관되어 있다. 여기에는 이스라엘의 회복뿐만 아니라 세계를 정복해 모든 사람을 유대인의 노예로 만들고 기독교인을 다 없앤다는 내용이 있다. 이로 인해 세상에 반유대주의가 팽배해지자 조작된 거짓 문서라는 역정보가 나왔다. 1864년 프랑스 정치 풍자가 모리스 졸리가 저술한 마키아벨리와 몽테스키외의 <지옥에서의 대화>를 기반으로 반유대주의자가 조작해낸 거짓 문서라는 것이다. 미국상원 법사위원회는 이것이 위조라고 결론내렸다. 물론 유대인이 지배하는 미국에서 유대인에 불리한 결정을 내릴 리는 없다. 하지만 심도깊은 유대인 교육을 받은 헤롤드 로젠탈은 이 문서가 사실이라고 증언한다. 그는 1976년 미 상원의원 보좌관으로 일하면서 월터 화이트와 인터뷰를 가졌는데 그가 폭로한 유대인의 계획은 시온의정서의 내용과 완전히 일치한다. 그는 증언이 공개된 직후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시온의정서는 세상에서 ‘음모론’이라며 배척당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세계역사는 100여년 전에 기록된 시온의정서의 기록대로 이루어져 왔다. 이스라엘의 재건도 시온의정서의 계획에 따라 완성되었다. 시오니즘의 아버지라 불리는 데오도르 헤르쩰의 지도 아래, 미국과 유럽에 흩어진 시오니스트 유대인들은 유대 민족기금을 조성하고 아랍인들로부터 팔레스타인의 불모지를 구입했다. 시오니즘의 최고 원조자는 유대인 대부호 로스차일드다. 스탠포드 대학 후버 연구소의 안토니 서튼에 의하면, 로스차일드는 히틀러에게 막대한 자금을 원조했다. 로스차일드 뿐만 아니라 J. P. 모건, 록펠러 등의 은행가와 산업가들이 세계대전 중에 나치 독일과 소련 공산주의에게 자금을 대주었다고 한다. 그들의 계획대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600만 살해라는 홀로코스트를 주장하며 계획대로 1948년 이스라엘이 재건되었다. 거의 이천년 전에 멸망했던 이스라엘이 재건되자 교회들은 이것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베푸신 기적이며 예언의 성취라고 감격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시오니스트의 치밀하고 오랜 계획 하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랍비 헤스 모세는 “신은 자신의 민족이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 그래서 이스라엘 땅에 정착하면서 메시아를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온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의 이스라엘 귀환을 촉구했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으니까 ‘다른 메시야’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스라엘 땅에 오게 될 ‘메시야’를 기다리며 알리야(이스라엘로 역이주)의 행렬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모든 유대인이 시오니즘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1979년 당대 최고의 랍비였던 요엘 테이텔바움이 뉴욕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정치적 시오니즘으로 세워진 이스라엘 국가는 사탄의 작품이라고 주장하며 아슈케나지에 정면으로 맞서다가 결국 그들의 표적이 되어 살해된 것이다. 추모 인파가 몰리지 않게 하기 위해 장례식은 당일에 치뤄졌다. 그러나 소문에 소문을 듣고 무려 10만이 넘는 유대인들이 장례식에 참석해 고인을 추모했다. <뉴욕타임스>에는 그를 위한 조사가 실렸는데, 그 내용은 아슈케나지 유대인에 대해 반감을 품고있던 많은 유대인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것이었다. "그는 세계 도처에 있는 유대인들 가운데 결단코 시오니즘에 물들지 않은 모든 유대인의 진정한 지도자였다. 그는 이 시대에 참으로 발휘하기 힘든 용기를 갖고 ‘ 시오니스트 국가는 사탄의 작품이자 신성모독이며 불경한 처사다’라고 외쳤다." 미국의 유대인 사업가 벤자민 프리드먼은 자신도 아슈케나지 유대인이지만 시오니즘에 반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미국사람들은 유대인이 ‘신이 선택한 민족’ 이라고 믿게끔 세뇌되었다. 이러한 신화는 소수 유대인 그룹이 만든 것이다. 몇몇 유대인 지도자들이 성경에서 몇 가지 문구를 발췌해서 이것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된 민족’으로 정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신이 선택한 민족’이라는 개념을 만든 사람들은 사실 유대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신이 선택한 민족이다’고 외치는 사람들은 시오니스트/ 막시스트/ 아슈게나지/ 카발리스트 유대인들인데, 이들은 정치적인 목적으로 유대교를 선택한 자들이지 성경에 나오는 실제 유대인과는 아무런 혈연적 관계가 없다.” 유대인이 지배하고 있는 미국이나 유럽에서 유대인 문제를 공개적으로 떠들고 다니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관련 서적도 구하기 어렵다. 미국 내 주요 출판사나 대형 서점망은 대부분 유대인 소유이기 때문에 비유대인이 반유대적으로 쓴 책은 출판되거나 유통될 수 없다. 반유대적인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그들은 바로 반박하는 저서를 출간한다. 유대인 관련 서적이나 자료들은 유대인이나 친유대주의자들에 의해 쓰여진 것만 볼 수 있다. 세계를 지배하는 유대인의 세상에서 유대주의의 비평은 금기시될 뿐 아니라 범죄가 된다. 예수회 연구소의 로버트 마릭스에 의하면 예수회는 (크립토) 유대인에 의해서 세워졌다. 이 예수회가 ‘음모론’의 중심에 있는 프리메이슨이나 일루미나티의 머리가 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예수회의 정체를 알지못하는 교회들은 그들이 반기독교적 목적을 갖고 만들어내는 종교다원주의 같은 이단사상을 잘 받아들이고 있다. --------------- 다음의 중앙일보 기사를 참조하면 위 글에 대한 이해가 더 분명해 질 수 있습니다. "유대인은 두 갈래, 80%는 종교만 같은 터키계 백인 후예”(중아일보, 2011년 10월 23일) 아슈케나지 유대인(카자르 후손)과 세파라딤 유대인(아브라함 후손) < 김주옥 < 칼럼방 < 신앙칼럼 < 기사본문 - 바른믿음 (good-faith.net) 아슈케나지 유대인(카자르 후손)과 세파라딤 유대인(아브라함 후손) 세계정부가 우리를 지배하게 될 세상이 가까이 오고 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유대인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는 그들이 만들어준 역사들을 경험하며, 그들이 만들어준 방송과 신문에 www.good-faith.net “유대인은 두 갈래, 80%는 종교만 같은 터키계 백인 후예” 중앙선데이 2011.10.23 아서 쾨슬러 유대인은 크게 둘로 나뉜다. 동유럽계 백인종 혼혈인 아시케나지와 원래 유대 민족인 지중해·중동계 셈족 세파라디다. 아시케나지는 전 세계 유대인의 80%를 차지한다. 미국·러시아·남아공·호주 등지에 많다. 세파라디는 이스라엘과 프랑스에서 볼 수 있다. 이스라엘 유대인 인구 570만 명을 선조별로 나누면 아시케나지계 55%, 세파라디계 45%의 분포다. 이스라엘 세파라디는 북아프리카·터키·예멘·이란 등지에서 왔다. 오랫동안 아시케나지의 인종적 뿌리는 많은 학자의 연구 대상이었다. 미국 역사학자 더글러스 던롭, 그리고 러시아 인류학자 레프 구밀리오프 등은 아시케나지가 인종적으론 셈족이 아닌 동유럽 여러 백인 부족의 혼혈이라고 주장했다. 헝가리 태생 영국 문인 아서 쾨슬러(사진)는 아시케나지의 역사적 기원을 보다 구체적으로 파헤쳤다. 쾨슬러는 1905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아시케나지 유대인이다. 그는 유년 시절 오스트리아에서 살았으며 빈공과대를 나왔다. 대학 시절 시온주의 운동에도 참여했다. 27년 베를린에서 발간되던 한 독일 일간지 통신원으로 팔레스타인에 갔다가 29년엔 파리 특파원으로 옮긴다. 31년 독일 공산당에 입당했지만 몇 년 후 스탈린의 폭정에 격분해 탈당하고 반공 작가로 전향했다. 40년 그가 독일어로 쓴 반공 소설 ‘한낮의 어둠’(Darkness at Noon, 2010년 영문본 번역판 국내 출간)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다. 쾨슬러는 철학가·역사학자·기자·수필가·소설가·전기 작가로 활동했다. 소설·드라마·자서전·수필 등 모두 90여 편의 저술을 남겼다. 스탈린에 격분, 극렬 공산당원서 반공 전향 40년대 초 쾨슬러는 영국에 정착하고 49년 영국시민이 된다. 이 시기부터 영어로 글을 썼다. 영국 왕실은 쾨슬러의 문학적 업적을 평가해 그에게 대영제국 공로훈장을 수여했다. 80년대 초부터 파킨슨병과 백혈병에 시달렸던 그는 병세가 절망적임을 깨닫고 83년 다량의 수면제로 부인과 함께 동반 자살했다. 헝가리에서 태어나 오스트리아·팔레스타인·독일·프랑스·스페인·영국을 돌아다녔고 또 극렬 공산당원에서 반공투사로 전향한 그의 파란만장했던 일생이 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76년 쾨슬러는 일생의 대작인 제13지파(The Thirteenth Tribe)를 출간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아시케나지 유대인의 민족적 뿌리를 파헤친 자신의 심층 연구결과를 담은 저술이다. 쾨슬러에 의하면 아시케나지는 인종적으론 유대인이 아니고 종교만 유대교를 선택한 터키계 백인 카자르족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남러시아 평원서 유목 생활을 하던 카자르족은 650년께 이 지역에 왕국을 세웠다. 카자르 왕국은 페르시아와 동유럽 간 중개무역을 하던 상업국이었다. 국세가 팽창했던 8세기 초반엔 영토를 크게 넓혔다. 전성기 카자르 왕국 영토는 오늘날 우크라이나 동부·러시아 남부·아제르바이잔·터키 북서부와 그루지야 일부를 포함했다. 유대교에 심취한 카자르 국왕 불란은 740년 자신이 유대교 신자가 되었다고 밝혔다. 이어 신하와 국민 모두가 왕을 따라 유대교를 국교로 받아들였다. 가나안이 아닌 러시아 평원에 유대 국가가 탄생한 것이다. 불란은 페르시아 유대인인 왕비 세라크의 권유로 유대교를 택했다고 한다. 불란을 승계한 오바디아왕은 스페인·페르시아 등지의 명망 있는 랍비를 초빙해 유대교 교리에 대한 자문을 받았다. 왕국 말기 25년간 재위한 요셉 왕은 자신이 유대 12지파 중 하나인 시므온의 직계임을 자처했다. 쾨슬러는 이들 카자르인이 바로 제13지파라고 불리는 아시케나지 유대인의 선조라고 설명했다. 카자르 왕국은 965년 키예프 공국 스비아토슬라프 대공의 침략을 받고 멸망했다. 또한 1240년 시작된 몽골의 이 지역 침략으로 카자르 왕국에 대한 후속 역사가 전혀 전해지지 않았다. 쾨슬러에 의하면 카자르 왕국이 망한 후 흩어진 유민들은 인근 우크라이나·러시아·폴란드·헝가리·보헤미아-모라비아(체코)·루마니아로 이동했다고 한다. 이들은 새 정착지에서 더 이상 카자르인이 아닌 유대인으로 정체성을 표방하면서 셈족계 세파라디 유대인보다 더욱 철저한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카자르 후손 인정은 시온주의와 배치 1939년 유럽 대륙 유대인 인구는 950만 명을 헤아렸다. 15세기 말 유럽 종교재판 이후 스페인과 포르투갈, 그리고 지중해 연안에서 추방된 세파라디 유대인은 불과 50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1200년에 걸쳐 프랑스·독일·영국·이탈리아 등 서유럽에 살던 유대인도 200만 명을 넘지 않았다. 또 유대인의 전통적 저출산 경향을 감안하면 홀로코스트 직전 1000만 명에 육박하는 유럽 유대인 인구는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쾨슬러는, 가나안 셈족 유대인과는 인종적 동질성이 없고 종교만 유대교를 선택한 카자르 왕국 이산 유대인 아시케나지가 중·동부 유럽 여러 나라에 정착해 유대인 인구가 크게 늘어난 것으로 분석했다. 아시케나지 유대인들은 이런 주장에 대해 답하기를 꺼린다. 말 못할 고민거리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카자르인의 후손임을 자인한다면 가나안에 근거를 둔 유대인의 정통 정체성과 시온주의를 스스로 부정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한가지 영리한 방안을 찾았다. 오늘날 국제 정치 무대에서 많이 쓰이는 외교적 표현인 ‘시인도 부인도 않는’(NCND:Neither Confirm Nor Deny) 입장으로 대응한다. 아시케나지들이 유대인의 정체성을 민족적 혈통에 두지 않고 종교에 두는 이유가 납득되는 부분이다. “유대인은 두 갈래, 80%는 종교만 같은 터키계 백인 후예” | 중앙일보 (joongang.co.kr) “유대인은 두 갈래, 80%는 종교만 같은 터키계 백인 후예” | 중앙일보 유대인은 크게 둘로 나뉜다. 동유럽계 백인종 혼혈인 아시케나지와 원래 유대 민족인 지중해·중동계 셈족 세파라디다. 아시케나지는 전 세계 유대인의 80%를 차지한다. 미국·러시아·남아공·호 www.joongang.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