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쓸모>
표지-자유롭고 떳떳한 삶을 위한 22가지 통찰
-들어가는 글
8쪽. 역사의 '쓸모'보다 '실체'를 강조하는 접근은 역사로부터 대중으로 멀어지게 할 뿐이다.
*19쪽.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삼국사기는 고려시대 유학자 김부식이 인종의 명을 받아 편찬한 삼굯시대 역사서. 어느 연도에 무슨 일이 일어났고 어떤 인물이 있었는지를 정리한 책. 나라가 주도하여 편찬한 정사이기 때문에 신비하고 기이한 일을 전하는 야사는 취급하지 않음. 단군 이야기도 언급하지 않음. 김부식은 유학자였기에 그런 이야기가 용납되지 않았던 거임. 그렇게 버려진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실림 고려후기에 살았던 일연 스님이 쓰레기통에 쳐박힌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기록한 것. 스님은 이 책을 쓰기 위해 청년 시절부터 사료를 모았다고 함. 단군시화를 비롯해, 전설, 민담 등 저식 역사로 인정받지 못한 이야기들을 모은 것.
*역사이야기를 잘 활용하면 지역경제도 살리는 시대. 연오랑 세오녀 등
*25쪽. 덴마크의 미래학자 롤프 옌센은 전 세계가 정보화사회를 넘어 꿈과 이야기 등의 감성 요소가 중요하게 부각되는 드림 소사이어티로 나아갈 것이라고 주장. 기술의 발달로 오늘날 대부분의 상품은 일정 수준ㅇ을 갖추어 각기 다른 상품이지만 기능적인 측면에서는 거의 차이가 없으므로 '스토리'에 주목.
*26쪽. 김부식이 쓸데없는 요상한 이야기라고 빼버린 단군신화를 일연스님이 삼국유사에 실은 덕분에 일제강점기에 단군을 모시는 대종교가 창시되어 신자들이 독립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원나라 간섭기에 민족의 뿌리가 흔들리지 않기를 바랐던 일연 스님의 간절한 마음이 담긴 이야기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형성한 것은 물론, 괴로운 시대를 버틸 수 있는 힘과 에너지를 준 것.
*59쪽. 역사속에서 위인으로 평가받는 사람들은 정상에서 배회한 사람들이 아니다. 물러나야할 때 물러날 줄 알고, 잘 내려온 사람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잘 내려오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를 통해 나의 존재, 나의 격을 지킬 수 있다.
*60쪽. 역사적 사고: 역사속에서 나의 선택이 어떻게 해석될 지 가늠해보고, 다른 사람에게 미칠 영향력을 고려해 판단하는 것.
*신라 구진천 이야기: 그는 석궁처럼 방아쇠 장치를 달아서 큰 화살을 멀리 쏠 수 있는 '쇠뇌'를 만드는 기술자. 당시 신라의 쇠뇌는 성능이 엄청나서 화살이 1000보나 날아갔다. 구진천이 살았던 시대에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삼국을 통일. 당나라 황제 고종이 신라에 구진천을 내놓으라 요구. 신라마저 집어삼키려 비밀병기를 탐낸 것. 구진천이 당으로 끌려가 명령대로 쇠뇌를 만듬. 그러나 그가 만든 화살은 30보다 못감. "신라의 나무가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 이번엔 신라의 나무를 대령, "신라의 나무가 바다를 건너오면서 습기를 머금에 제대로 날지 못합니다." 그에 관한 기록은 여기서 끝.
그는 당황제앞에서 목숨이 위태로운데도 위험한 선택을 했다. 자신이 쇠뇌를 만드는 순간, 신라 사람들을 향할 것이라는 것을. 그의 결단이 많은 사람을 살림.
*정약용 68쪽.
정조는 왕실도서관인 규장각을 만들었는데, 이는 자기 사람을 키우기 위해 만든 기관. 신분보다 실력을 중시했기 때문에 박제가, 유득공같은 서얼출신들도 많았다. 소위 '정조라인'에는 정약용이 있었는데 정조는 그의 스승이자 멘토였다. 정약용은 만능인. 동양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정치와 법, 의학과 지리학, 언어학에도 조예가 깊음. 거중기와 녹로를 발명해 수원 화성 건설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 시인으로서 여러 작품을 남기기도 함. 500여권이 넘는 책을 씀. (경기도 남양주에 다산 유적지가 있음. 다산의 생가. 한강 수변을 따라 다양한 꽃과 나무등 식물을 관찰하고 한강을 사랑함.)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인데 정약용 집안은 천주교. 정조는 모르는척 했으나 계속되는 상소로 그를 유배보내게 됨. 이에 마음에 상처를 입었으나 가만히 기다리지만은 않음. 생가의 현판에는 '여유당'간판이 있는데, 이것은 도덕경에서 따온 말.
"여與함이여, 겨울 냇물을 건너듯이 /유猶함이여, 너의 이웃을 두려워하듯이."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것처럼 신중하고, 사방에서 나를 엿보는 것처럼 두려워하며 경계하라는 의미. )
정조가 다시 그를 불렀으나 올라가기 전 정조가 승하. 이후 신유박해로 죽음은 면하고 강진으로 유배를 떠남. 그는 이곳에서 18년동안 무려 500권의 책을 씀.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아방강역고(고조선부터 발해까지 역대황조의 영토를 연구), 이외에도 아이들을 위해 한자를 쉽게 가르쳐주는 책 등 다양하다.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수령과 백성의 사이는 멀고머니, 애달프도다 백성들이여! 아전이 몸을 부러뜨렸어도 수령이 불러 물으면, '나무하다가 절벽에서 떨어졌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아전에게 재물을 빼았겼어도 수령이 불러 물으면, '빚이 있어 마땅히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라고 답한다. 일에 밝은 수령이 김토하여 그 재물을 바로 앞에서 셈하여 되돌려 주고 직접 거느리고 간 비장을 하여금 호송하게 해도, 한번 문을 나서면 진흙으로 만든 소가 바다에 가라앉는 것 처럼 아무 소용이 없다." (P181) 다산의 편지글을 읽다보면 그의 가치관이 지금의 이 시대와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거나, 좌절에 빠지지 않고, 또한 분노나 복수심에 사로잡히기 보다 학문에 매진하며, 백성들의 삶을 궁휼히 여겨 볼 수 있는 것은 그가 얼마나 위대한 학자이며 지고한 인품을 갖추고 있던 인물이었는지를 확인하게 해 준다. 그를 추방하여 시골의 방구석에 묶어 두고, 한시대를 풍미했을 그 시대의 고관대작들을 우리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자신의 신념을 꾸준히 간직하고, 학문에 매진한 한 퇴출된 한 정치인을 우리 모두는 기억한다. |
*75쪽. 정약용은 자신이 계속해서 읽고 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 이뉴는, 후세 사람들은 사헌부의 재판 기록만 보고 자신을 죄인 정약용으로 기억할 것. 그래서 끊임없이 기록하겠다는 것.
*79쪽. 정약용이 자식들에게 당부했던 말.
"진실로 너희들에게 바라노니, 항상 심기를 화평하게 가져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다름없이 하라. 하늘의 이치는 돌고 도는 것이라서, 한번 쓰러졌다 하여 결코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바꾸는 생각의 조건>
*107쪽. 역사상 최초로 대량 인쇄기술을 개발한 사람은 쿠텐베르크. 그러나 현존 최고의 금속활자 인쇄물은 우리나라의 '직지심체요절'. 이것은 쿠텐베르크보다 78년이남 앞섬. 우리는 앞선 기술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발전시키지 못한 걸까? '용도'에 차이가 있었다. 고려에서 금속활자를 이용해 귀족을 위한 불교서적 ㅈ정도를 찍었으나, 서양에서는 성경을 인쇄해 가독자를 확대할 수 있었고, 이것에 힘입어 마르틴 루터의ㅣ 종겨개혁이 일어남. 루터가 교회를 비판한 95개조의 반박문이 대량 인쇄되어 널리 퍼짐. 그와 뜻을 함께 하는 종교인들이 라틴어로 된 성경을 여러나라의 말로 번역해서 누구나 성경을 읽게 되었다.
*116쪽. 최초의 기술이나 최고의 기술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영향력.... 창조나 창의력을 말하면 자꾸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려한다. 그러나 아무리 새로워도 사람들이 선택하지 않으면 널리 쓰이지 않는다. 무엇이 진정한 창조인지 생각해보자.
*181쪽. 대동법의 아버지 김육: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 몸을 바쳐 가치있는 일에 헌신.
대동법이란 쌀로 세금을 내는 제도. 지역특산물을 바쳐야 하는 공납때문에 백성들이 괴로워하여 만든 제도. 간단히 쌀로 세금을 내자!!! 땅을 많이 가지고 있던 양반들과 관리들의 반대로 제대로 실행되지 못함. 전쟁으로 길이 막혀 결국 50대에 어느 정도 높은 자리에서 대동법을 적극 주장. 경기도에서만 시행되던 대동법을 전국으로 확산시키자!!! 그는 대동법에 인생을 걸었다. 끊임없이 주장하면서. 인조 사망후 효종에게 발탁되었으나 사직의견을 피력하다 결국 대동법을 확대실시하는 것을 조건으로 벼슬을 받아들임. "나는 학문에 대해서는 모른다. 그저 백성들에게 부과되는 세금이 줄어서 너무 기분이 좋다."
70세에 사직 상소를 올렸던 김육은 79세에 유언 상소를 올려 이제 곧 병들어 죽을 몸이 되었으니 호남에도 빨리 시행해달라고 함. 호남은 곡창지대이고 중심지라 이곳에서 걷기 시작하면 전국으로 확대되기 쉬을 것이라 생가가.
*192쪽. 평민임에도 고대 중국과 한국,, 일본역사서에 모두 이름을 올린 장보고. 그는 골품제사회인 신라시대에 태어나 신분의 벽을 뛰어넘을 수 없자, 바다를 건너 당나라로 감. 용병모집공고를 보고 용병이 되어 승승장구함. 신분이 들통날까 두려워 바닷가에서 무역업을 함. 장보고는 어마어마한 재산을 모음. 중국 적산에 가면 적산명신이라는 거대한 동상이 있음. 앞은 스님모습, 뒤는 장보고의 모습을 본떠 만든 것. 이 적산 명신은 앉은 채로 오른손을 펴서 아래를 살짝 누르는 듯한 모습 이 손이 파도를 잔잔하게 해 준다고 믿어 바다와 재물의 신으로 섬김. 지금도 교토와 오사카 상인들이 찾아와 장보고를 참배함. 돈을 잘 번다는 속설이 있다.
*염장을 지른다: 장보고는 김우징을 밀어주는 대신 김우징이 왕이 되면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삼을 것을 약속. 그러나 김우징이 금방 세상을 떠났고 그 아들이 왕이 되면서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힘. 진골이 아니라 평민이라는 이유로. 장보고의 위협이 두려웠던 신라조정에서는 염장을 보내 장보고를 살해. 염장을 지른다라는 표현은 여기에서 나옴.
*206쪽. 독립운동가 박상진: 을사오적은 모두 대법원장급으로 집안과 학벌, 머리까지 좋았지만 나라를 팔아먹는데 앞장을 섬.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로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일본은 엘리트들을 회유. 박상진은 열심히 공부해 법관이라는 자리를 얻었으나 일제치하에서 우리 선량한 민족을 괴롭혀야 하기에 과감히 버림. 그의 꿈은 '명사'가 아니고 '동사'였다.
법을 몰라 늘 당하고만 사는 평범한 이에게 도움을 주고, ,정의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사람이 되려고 판사가 된 것. '판사'라는 명사가 아닌 '남을 돕는 자가 된다는 '동사'였기에 그는 진짜 그의 꿈을 향해 나아간 것 뿐.
박상진은 조선국권회복단을 조직. 비밀, 폭동, 암살, 명령 이 네갖지를 일제 타도의 행동 강령으로 삼는다. 1918년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고양에 왔다가 체포됨. 그의 모든 재산은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했기에 집도 없이 몰락했으며 후에 정부가 이 집을 사들여 생가로 단장함. 울산 북구에 있음.
그는 결심했던 대로 판사석이 아니라 피고인석에 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교수형에 처한다.
*245쪽. 어우동: 기생이 아닌 양반집 규슈엿다. 세종대왕의 형인 효령대균의 손자인 이동과 혼인했으나 남편이 기생에게 빠져 이혼을 원하고, 아래가 바람났다고 모함까지 했다. 이렇게 버림받자 그는 무려 17명의 남자가 간통을 한다. 당시의 곤장으로는 다스릴 수 없다고 판단해 당시 성종은 교수형을 내림.
*275쪽. 김구선생의 아내 최준레여사의 묘비:
ㄹㄴㄴㄴ해 ㄷ 달 ㅊㅈ 날 남/대한민국 ㅂ 해 ㄱ 달 ㄱ 날 죽음
(4222년(1889년), 대한민국 6해라 함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으로부터 6년째 되는 해, 즉 1924년을 뜻한다. 출생일은 단기로 표시했지만, 사망일은 대한민국을 기준으로해서 표시한 것. 이들에게 이미 대한민국은 가슴깊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 우리는 고조선에서 출발했지만 이제 대한민국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열고 그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려고 한 것.
*219쪽. 우당 이회영: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항복의 직계후손. 그의 일가는 대대로 문벌이 높고 부과 권력이 엄청났다. 하지만 경술국치로 나라의 명이 다하자 가족회의를 열어 한반도를 떠나기로 함. 현재의 돈으로 명동을 땅을 헐값에 팔았는데 약 600억원. 이회영을 포함한 여섯 형제와 그 식솔들은 만주 서간도로 가서 땅을 사고 독립투사들을 지원하며, 집과 학교를 짓고 인재를 양성. 나중에는 자금이 모두 떨어져 강냉이죽을 먹으며 버팀. 그의 동상이 명동 ymca앞에 허술하게 서 있다. 명동이 그의 집이었으므로.
*220쪽. 독립운동시기 단체도 많고 외울것도 많아요 -> 이때 외울 것이 없다면 그 역사는 어떤 역사입니까? 고작 몇개의 단체와 몇 몇 사람의 이름만 존대한다면 말이죠. 우리 후손에게 보여주기도 민망한 굴욕의 역사가 아닌가.
편히 살수 있는 신분을 버리고 오로지 독립 하나만을 보았던 이회영은 30대 청춘의 나이에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는다.
'한번의 젊음을 어찌 할 것인가?' 그는 죽음을 맞이한 순간에 답한다. '말이 아니라 예순여섯해의 '일생'으로 답한다.
*236쪽. 오리 이원익: 22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명종, 선조, 광해군, 인조 네 임금 밑에서 무려 여섯 차례나 영의정을 지낸 인물. 그는 오로지 나랏일만 고민함. 성품이 대쪽같아서 주변의 미움을 살 때도 있었고 귀양도 많이 같지만, 그만큼 이익에 휘둘리지 않고 바른 정치에 힘을 쏟았어요. 그의 생활은 가난했을 지언정 초라하지 않았다. 끼니 걱정을 해도, 중인들이 하는 일을 해도 스스로 부끄러움이 없던 분. 역사적으로 이름을 남긴 분 중에는 자기 중심을 잡고 살기 위해 노력하며 떳떳한 삶을 살아낸 분이 많다.
현재 정권은 참 하잘것 없지만, 내가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는 것이 새삼 벅차게 기쁘다.
첫댓글 회원1: 81쪽. 누구의 주장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는 일보다~
104쪽 2째 문단
32쪽 아래서 8줄. 갈망이 힘으로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145.4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