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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
아프가니스탄은 세계적으로 아주 큰 영향을 미칠만한 경제력이나 군사력을 갖 추고 있는 나라가 아니며 중국이나 일본과 같이 우리와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 지도 않다. 따라서 우리에게 잘 알려지고 있지도 않으며 또한 우리 역시 잘 알려 고도 하지 않은 나라이다. 미국의 아프간 공격 이후 테러의 온상으로 지목받으면 서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아프간은 그렇게 간단한 나라가 아니다. 우리는 흔히 한반도가 대륙과 섬을 연결하는 교두보적 위치에 있기에 예로부 터 열강의 각축장이 되어왔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한반도의 사 정은 근대 과학문명의 발달과 제국주의 시대 이후로 주변 열강의 관심이 집중 된 제한적 현상으로 볼 수 있으며 역사적으로 계속 그러한 현상이 있었다고 보 기는 어렵다.
이에 비해 아프가니스탄은 근대 이전부터 유라시아의 중앙에 위치한 그 지정학 적 위치로 인하여 문명사의 교차로(Roundabout)라고도 불린다. 일찍이 영국의 역 사학자 아놀드 토인비(Arnold Toinby)는 유라시아 대륙의 심장부를 지나는 길의 절반은 시리아의 알레포에서 만나고 나머지 절반은 다시 아프간의 베그람에서 만 났다고 말하였다.
*출처 : 이주형 著, 아프가니스탄, 잃어버린 문명, 사회평론 20073) 교차로라고 불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으며 아프가니스탄으로 모이고 여러 갈 레 길을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이 곳으로 모여들고 이 곳을 거쳐 갔던 것이다. 이 지역에서는 바사4)왕국의 후예가 세운 아르케메네스 제국을 비롯하여 알렉 3) 이하 <그림 2, 3, 4, 20, 22>의 출처는 동일함.
4) 바사(BC 550∼BC 330)는 Persia(페르시아)의 음역이다. 바사의 땅은 대략 현재의 이란에 해당하며, 동쪽은 인더스 강에서 서쪽은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기까지의 이란 고 원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방에는 카스피 사람(Caspians)이 원주민으로서 거주하고 있 었는데, BC 1500년경 아리아 사람(Aryans)이 이 땅에 들어오게 되었다. 바사(페르시아) 는 키루스 2세 때 그 번영이 절정에 달했으며 그의 사후 왕위에 오른 그 아들 캄비세스 2 세(Cambyses Ⅱ)는 애굽까지 정복하였다(BC 525년). . 군 역 사 및 역 사 일 반 군사연구 제128집 29 산더 제국, 사카5), 파르티아, 박트리아, 쿠샨왕조가 일어났으며 이 뒤에도 사산왕 조, 쿠샨의 한 갈레인 키다라 쿠샨 등 이란계, 중앙아시아계, 투르크계 등 여러 민족이 이 곳을 번갈아 지배하였다
그 후 7세기 중반에는 이슬람 제국이 형성되면서 그 이후 1천여 년 간 아프 가니스탄에는 이슬람 문화가 번성했다. 이 지역을 스쳐가고 이 곳에 정착한 수 많은 민족, 그리고 이 곳에서 번성한 다양한 문화가 투영되어 아프가니스탄에 는 풍부하고 다채로운 문화유산이 남겨졌다. 즉 이란계, 인도계, 서양 고전계, 중앙아시아계, 아랍계 그리고 조로아스터교6),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등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포함되어 있어 실로 유라시아 대륙의 중심이었으며, 고대로부터 지속적으로 동․서양 및 북방계통 여러 민족과 제국의 세력투쟁의 각축장이 되 었던 것이다. 5) 사카족은 이란 유목민족으로 동유럽에서 신강까지의 유라시아의 평원을 이동하며 살던 고대 페르시아 시대에서 투르크의 이동 시기의 중기 페르시아 시대까지의 종족의 명칭 이다. 6)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는 고대 페르시아에서 조로아스터가 제창한 종교이다. 기원 전 600년경에 현재의 폼페이 부근에서 창설되었는데, 독창적인 종교라기보다는 페르시아의 고대신앙의 변혁이라고 보는 견해가 옳고 지배적이다. 일명 배화교라고도 불린다. 유일최고 신 천지의 창조주인 아후라마스타를 신봉하는 일신교이지만, 악신인 알리만을 전제하는 점 에서 이원론 혹은 이신론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세계는 선신과 악신이 싸우는 싸움터이 고, 인간은 선신을 숭배하는 것을 의무로 삼는다. . 아프가니스탄의 역사와 분쟁 30 군사연구 제128집 2. 아프가니스탄의 지정학적 환경 아프가니스탄은 유라시아 대륙의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중앙아시아의 파미 르 고원에서 서쪽으로 뻗은 힌두쿠시 산맥이 국토를 남북으로 나누고 있으며 서 쪽으로는 이란과 남쪽으로는 인도·파키스탄과 접경을 이루고 있다. 또한 북쪽으 로는 아무다리야 강을 넘어 과거 소련의 영역이던 투르키스탄·우즈벡·타지키스탄 등 중앙아시아의 광대한 초원과 사막 그리고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다.
중앙아시아는 파미르 고원을 중심으로 칼라쿰7), 타클라마칸사막과 카스피해, 아랄해 그리고 쿤룬[崑崙]·톈산[天山]·알타이·힌두쿠시 등 높고 험준한 산맥들이 줄지어 있다. 따라서 서아시아와 중국 그리고 구(舊)소련지역인 우즈벡 등 중앙아 시아 국가와 파키스탄 및 인도를 연결할 수 있는 통로가 극히 제한되고 있다. 그 7) 투르크메니스탄의 약 70%를 차지하는 중앙아시아의 거대한 사막. 면적은 약 35만㎢에 이른다. 투르크멘카라쿰 사막은 북쪽으로는 사리카미슈 저지대와 맞 닿아 있고, 북동쪽은 아무다리야 강 유역과 맞닿아 있으며, 남동쪽은 카라빌 고지대 및 바 트히스 스텝 지대와 경계를 이룬다. 남쪽과 남서쪽에서는 코페트 산맥의 기슭이 나란히 뻗어 있고, 서쪽과 북서쪽은 옛날 우즈보이 강이 카스피해 근처를 흐르면서 만들어놓은 골짜기가 경계를 이룬다. 카자흐스탄의 아랄해 북동쪽에 있는 작은 건조지대는 아랄카라 쿰 사막이라고 부른다. . 군 역 사 및 역 사 일 반 군사연구 제128집 31 러므로 동서는 물론이고 남북 즉, 중앙아시아와 인도지역을 연결하고 있는 통로 상에 있는 나라가 바로 이 아프가니스탄인 것이다. 이와 같은 지리적 위치로 인 해 아프가니스탄이 동서의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만나고 교류하고 결합하는 장이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3. 아프카니스탄 분쟁
아프가니스탄 역사변천과 분쟁 아프가니스탄 고대국가는 메대8)·바사라고 하는 고대왕국으로부터 시작된 것으 로 보고 있으며 이들의 활동무대는 현재 이란지역에 해당된다. 일찍이 BC 1500 년경 코카서스 산맥 북쪽에 거주하던 아리아인9)이 이란고원을 넘어 하나는 인도 쪽으로 하나는 서쪽의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 이르렀는데 이들이 이룩한 나라가 바로 메대·바사 제국이며 인도로 내려간 아리안족은 인도 아리안 문명의 주인이 되었다. 이와 같이 고대의 아프가니스탄 지역은 페르시아 즉, 이란 민족과 동일한 기원 을 가진 국가로 출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8) 메대는 영어 Media(메디아)의 음역이며 아시아의 자그로스 산맥의 동쪽, 카스피해의 남 쪽, 바대의 서쪽, 엘람의 북쪽에 있는 산악국(현재의 이란 고원)이다. 길이 약 960㎞, 너 비 약400㎞로서 그 면적은 약 38만4천㎢이며 메대의 대부분은 900m의 높은 고원 지대 인데, 나머지 부분은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달리는 일곱 가닥의 병행한 산맥으로 형성 되어 있다. 9) 아리안족은 중앙아시아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유럽계통의 백인종족으로 철제무기를 사용 하고 기마전술이 뛰어난 민족이었다. 아리안은 1700∼1800년경에 민족대이동을 시작하여 카시트족, 게르만족이 되었다. 일부는 현재의 인더스 평원인 샤프타 신드후(Shapta Sindhu)지방에 정착하였다. 이 아리안민족이 인더스 문명을 세운 원주민인 드라비다족과 혼혈하여 인도아리안족을 이루었다. . 아프가니스탄의 역사와 분쟁 32 군사연구 제128집 아프가니스탄 역사는 크게 4개의 시대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메대·바사제국 으로부터 아르케메네스왕조10), 알렉산더 제국11), 파르티아, 박트리아, 쿠샨왕조 그리고 사산조 페르시아 및 에프탈에 이르는 고대시대를 첫 번째로 들 수 있다
* 출처 : Imerson Kent.com, Map of Oriental Empires12) 10) 아르케메네스왕조의 기원은 BC 815년경 오늘의 아제르바이잔에 거주하던 이란민족의 한 支派가 Parsumash에 정착한 뒤 BC 700년경 남으로 이주하여 엘람왕국의 영향아래 있다가 엘람왕국이 아시리아에 패한 뒤 공백기인 BC 691년 아르케메네스왕조의 시조인 테이스페스왕자가 안잔시를 점령하고 부친 아르케메네스의 이름을 딴 왕조를 세웠다. 그 후 테이스페스의 장남인 키루스에 이어 그의 아들 캄비세스가 페르시아와 메디아를 통 합하였으며 그의 장남 키루스 2세는 BC 550년 메디아의 수도 에크파타나를 점령하여 새 로운 페르시아제국을 일으켰다. 그 후 그는 BC 539년 바빌론을 멸망시키고 세계제국의 지위에 올려 놓았다. 그 후 그의 아들 캄비세스 2세는 BC 525년 애굽까지 정복하였다. 11) 헬라족이라 불린 인도 유럽족이 BC 2000년경에 다뉴브강 하류를 거쳐 남하했는데 첫 번 째로 남쪽 헬라에 자리 잡은 아케안(Achaeans)과 그 뒤를 따라서 BC 1500년경에 도리안 이 들어왔다. 이들은 BC 1400∼1000년 사이에 근방의 여러 섬을 정복하고 BC 12세기경 에는 소아시아의 드로이섬을 파멸시켰다. 이리하여 BC 1000년경에는 헬라반도와 에게해 안 전역을 소유하게 되었다. BC 500년 이후 아덴과 스파르타 사이에 동족상잔이 일어났 고 이때 헬라북쪽의 필립(BC 359∼336년)은 스파르타를 제외한 헬라 전 지역의 맹주가 되었다. 필립의 아들인 알렉산더는 20세에 왕위에 올라 테베스를 함락시키고 22세 때 바 사에 눌렸던 헬라의 도시들을 해방시켰다. BC 333년에는 바사의 다리오 3세를 잇수스에 서 격파한 후 애굽까지 진격하여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였다. 그 후 다시 북상하여 티그 리스강을 건너 BC 331년에는 바사왕을 알벨라에서 대파하고 바벨론을 수중에 넣었다. 12) 그림 <5>의 출처는 Imerson Kent.com, Map of Oriental Empires . 군 역 사 및 역 사 일 반 군사연구 제128집 33 둘째는 사산조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아라비아를 통일한 마호메트에 의해 시작된 이슬람제국은 정통칼리프시대와 옴미아드시대를 거쳐 후 후옴미아드조 와 압바스조의 동․서칼리프 시대로의 분열을 거쳐 셀주크투르크13)와 호라 즘14), 일한국 등으로 변천된 시대와 몽고의 지배를 받다가 몽고 황실의 후예가 건국한 티무르제국을 거쳐서 사파비 왕조와 무굴제국으로 분할 영유된 때까지 를 말한다. 셋째는 1722년 아프간족 아흐마드(Ahmad Shah)가 사파비왕조를 타도하고 나 디르샤(Nadir Shah)의 부하였던 두라니족의 지도자 ‘아흐마드 칸 아브달리’가 칸 다하르에서 왕위에 오르고 건국한 아프간 민족국가인 두라니(Durrani)왕조15)로부 터 바라크자이왕조16)에 이르다가 19세기부터 영국과 러시아의 항쟁의 대상이 되 어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에 병합되어 영국의 보호국이 되었다가 영국과 3차 아프 간 전쟁 결과 ‘라왈핀디 화평조약17)’을 체결함으로써 아프가니스탄이 독립된 이 후부터 마지막 자히르 국왕시대 때까지를 들 수 있다. 13) 셀주크 투르크는 11세기경부터 14세기까지 중앙아시아와 중동 일대를 다스린 수니파 무 슬림 왕조를 말한다. 셀주크 왕조라고 하기도 한다. 셀주크 투르크는 중앙아시아의 부족 연합체로 발흥하여 중동에서 투르크 세력의 시조를 이루었고 제1차 십자군의 공격 대상 이 되었다. 오늘날 아제르바이잔, 터키, 투르크메니스탄의 투르크인들의 문화적 조상으로 여겨지며 페르시아 문화의 보호자였다. 14) 호라즘 제국은 아무다리야 강(江) 하류 유역, 지금의 히바에 있었던 국가(1077년∼1231 년)이다. 아라비아인은 후와리즘이라 부르고, 원조(元朝)의 사서(史書)에는 화자자모(花刺 子模)라 기록되어 있다. 셀주크 왕조의 부장(部將) 아누시티긴이 이 땅에 책봉되었는데, 아들 쿠트브 웃딘 무함마드(재위 1097∼1127)는 술탄에서 독립, 우르겐치를 수도로 하였 다. 15) 두라니왕국은 카불을 수도로 하여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한 아프간계 이슬람왕조(1747∼ 1842). 1747년 아프샤르(Afsharid)왕조의 나디르 샤(재위 1736∼1747)가 죽은 뒤, 부장 (部將) 아브달리족(族)의 아흐마드샤 두라니(재위 1747∼1773)가 이란으로부터 독립하여 두라니왕조를 창설하였다. 동시에 아브달리라는 부족명을 두라니로 고침에 따라 두라니 라는 왕조명이 생겼다. 수도는 1773년까지 칸다하르였으나, 그 후 카불로 옮겼다. 16) 바라크자이 왕조(―王朝 Barakzay) 아프가니스탄의 왕조(1826∼1973). 두라니왕조의 1분파로서 D. 무하마드가 1819년에 카불 을 장악, 26년에 아미르(amir;지배자)가 되었다. 제2차 아프간전쟁에서 영국의 보호국이 되었다가 1919년에 독립을 회복하였으며 73년에 아프가니스탄공화국이 생겨났다. 17) 하비브알라는 내정 면에서는 하비비아 학교의 기초를 다지고 페르시아어 주간신문을 발 행하여 민족적 자각의 향상을 촉진함과 동시에, 대외적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해 중 립을 엄수하였다. 1919년 하비브알라가 반(反)영국주의자의 손에 암살된 후 같은 해 후계 자가 된 아만알라는 반영국적 의견에 동감하여 인도정부에 대해 적대행위를 취했으나(제 3차 아프간전쟁) 승패를 가리지 못하고 8월에 라왈핀디 화평조약이 맺어졌다. . 아프가니스탄의 역사와 분쟁 34 군사연구 제128집 넷째는 1973년 자히르(Zahir)18)국왕의 외유중에 다우드 前 총리가 쿠데타를 일 으켜 공화제를 선언한 때부터 소련과의 전쟁, 그리고 무자헤딘에 의한 내전과 탈 레반의 등장이후 9.11테러에 기인한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이후 현재에 이르 는 시기까지를 말한다. 본고의 서술목적상 아르케메네스 제국과 알렉산더 제국을 거쳐 파르티아, 박트 리아 그리고 쿠산왕조 사산조페르시아를 거쳐 이슬람제국으로 이어진 시기까지를 고대국가로 보고 그 이후인 7세기로부터 무함마드가 아랍을 통일한 이후 칼리프 시대 및 옴미아드시대를 거쳐서 후옴미아조와 압바스조의 동․서 칼리프시대로 변천된 이슬람 제국으로부터 몽골과 티무르의 침입을 거쳐 사파비왕조와 무굴왕 조로 분할 영유된 때까지를 중세국가로 분류하고자 한다. 또한 1722년에 아프간족의 아흐마드(Ahmad)가 사파비 왕조를 타도한 이후 나 디르 샤(Nadir Shah)의 부하인 두라니족의 지도자 ‘아흐마드 한 아브달리’가 칸다 하르에서 왕위에 오르고 건국한 것이 아프간민족 왕조국가의 시초인바 이때부터 는 근대적 국가로 간주하되 ‘아흐마드 한 아브달리’의 두라니제국으로부터 시작되 는 아프간 왕조시대와 자히르 국왕외유시 前 총리 다우드(Abdul Rashid Daud)가 쿠데타를 일으켜 공화제를 선언한 이후 현재까지를 구분하여 서술하고자 한다. 1. 고대 국가와 분쟁 아프가니스탄의 기원은 메대 혹은 메디아19)와 바사라고 하는 고대국가로부터 출발한다고 보고 있다. 메디아는 현재의 이란 북서부에 있었던 고대국가와 고대 이란인을 부르는 이름이다. 오늘날의 케르만사 일부, 아제르바이잔, 하메단, 테헤 란, 쿠르디스 지방에 해당되는 지역으로서 메디아라는 이름은 고대 그리스인들에 게 이 지역이 메디아 또는 메데아로 알려졌기 때문에 붙여졌다. 18) 아프가니스탄의 왕(1933∼73 재위) 자히르 샤는 내각의 각료직을 맡고 있다가 1933년 11월 아버지가 암살당하자 19세의 나 이로 왕위에 올랐다. 자히르샤는 친척들이 정부를 이끌어가는 여러 해 동안 뒷전에 앉아 있었으나, 1964년 입헌군주제를 확립하고 왕의 척족이 공직을 맡는 것을 금지하는 헌법 을 제정함으로써 친정체제를 확립했다. 19) 메디아족이 기원전 11세기 전반 무렵 세웠으며 수도는 엑바타나(지금의 하마단)였다. 이들은 엑바타나를 중심으로 강성해져 데이코에스 때에 왕국으로 건립되었으며 그의 아들 프라오르테스 때는 이란의 대부분을 영유하게 되었다. 기원전 6세기까지 메디아 는 흑해의 남부연안과 아란지방(오늘날의 아제르바이잔공화국)에서 페르시아를 포함한 중앙아시아와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 군 역 사 및 역 사 일 반 군사연구 제128집 35 바사20)는 메데와 매우 가까운 민족으로 같은 시대에 이란 고원을 넘어 서쪽으 로 진출하였으며 바사측은 남하하여 엘람과 동쪽지대를 점령하였으나 BC 650년 앗수르21)의 바니팔에 의해 파멸되었다. 서아시아 지역은 앗시리아가 바니팔왕 때 최대영역을 차지하였으며 BC 612년 앗시리아 수도가 함락된 이후는 시리아, 신 바빌로니아, 메디아, 이집트 등 4국이 건립되었다. 그러나 메데의 예속하에서 캄비세스 1세의 대를 이은 바사의 키루스 2세(BC 559∼530)가 왕위에 올라 반란 중에 있는 메데를 제압하고 메데와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되었고 BC 501년에는 이 메데를 점령했다.
* 출처 : 김철 외 3명 著, 역사부도, 신유, 199522) 한편 바사제국의 테이스페스 왕자는 엘람왕국23)이 멸망한 뒤 공백기인 BC 691년 20) 바사의 땅은 대략 현재의 이란에 해당하며 바사는, 동쪽은 인더스 강에서 서쪽은 티그리 스, 유브라데스 강에 이르기까지의 이란 고원 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각주 2) 참조. 21) 앗시리아와 같은 나라임. 22) 이하 그림 <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1>의 출처는 동일함. 23) 엘람왕국은 고대 바빌로니아어로 동방을 뜻한다. 이중에서 수사를 중심으로 하는 분지, 동 쪽의 안샨, 시마슈지방이 중심이었다. 그 뒤 동방보다는 서방의 메소포타미아와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BC 9세기에 이르러 페르시아인의 침입이 시작되었고 BC 630년에는 아시리아군에 의하여 수도 수사가 파괴되었다. . 아프가니스탄의 역사와 분쟁 36 군사연구 제128집 부친의 이름을 딴 아르케메네스 왕조를 세웠다. 그의 사후 왕국은 둘로 나뉘어졌 는데 남부를 통치했던 키루스가 페르시아인들을 통합했으며 그의 아들 캄비세스 는 메디아왕국의 공주 만다인과 혼인함으로써 페르시아와 메디아를 통합하였다. 캄비세스의 장남 키루스 2세는 주변국들을 점령하여 페르시아 제국의 초석을 마 련했으며 BC 550년 메디아의 수도 엑바타나를 점령하여 새로운 페르시아 제국을 일으키는데 성공하였다. BC 4세기에는 페르시아가 바빌론을 멸망시키고 메데를 복속, 오리엔트를 통일 하여 아르케메데스 제국을 세웠다. 아르케메데스 제국의 다리우스(Darius) 3세가 즉위할 무렵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Alexander the Great) 3세가 그리스군을 이 끌고 헬레스폰투스 해협을 건너 아르케메네스 왕국의 군대를 격파하고, 페니키아 에서부터 이집트를 빠른 속도로 점령했으며 다우가메라 전투(BC 331)에서 제국 군대에게 결정타를 가했다. 다음해 6월 다리우스 3세가 자신의 부하 베수스에게 암살당하며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 제국은 멸망하게 되었다.
그 후 바빌론, 수사, 페르세폴리스, 그리고 중앙아시아에서 북서인도에 이르는 아르케메네스 영토 전체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정복되었으며 이로 인해 헬레 니즘 문명에 의한 페르시아 통치가 지속되었다. . 군 역 사 및 역 사 일 반 군사연구 제128집 37 그의 사후에는 부하장군이었던 셀레우코스가 이 지방을 통치하였으나 BC 322 년에 북인도를 통일한 마우리아 왕조24)의 찬드라굽타와의 싸움에서 패하자 아프 가니스탄 동부는 인도에 편입되었다. BC 250년경에 박트리아 사트라프25)였던 디오도토스가 독립왕국 박트리아를 세 웠으며 비슷한 시기인 BC 247년에 파르티아 제국이 들어서면서 페르시아 제국 의 명맥을 이었다.
24) 마우리아왕조(Maurya dynasty) 인도 최초의 고대 통일제국을 세운 왕조이며 BC 317년에서 BC 180년까지 존재했다. 시 조는 찬드라굽타이다. 기원전 4세기경 인도의 마가다국은 난다왕조의 지배하에 있었는데 이때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원정을 끝내고 철수한 후 BC 322년 알렉산더 대왕이 죽고 난 뒤 BC 317년경 찬드라굽타는 북서인도의 인더스강 상류에서 군사를 일으켜 마가다의 난 다왕조를 무너뜨리고 마가다 국왕이 되었다. 그 후 그리스군 총독이 푼잡지방을 재탈환 하려는 작전을 폈으나 찬드라굽타는 그를 물리친다. 그 후 그는 자신의 마우리아왕국을 건설한 뒤에 기원전 298년 사망한다. 25) 사트라프 [Satrap] 고대 페르시아 속주(屬州)의 태수(太守) . 아프가니스탄의 역사와 분쟁 38 군사연구 제128집 페르시아 제국의 명맥을 이었다. 파르티아 제국26)은 현재의 이란과 아프가니스 탄의 서부지역을 포함하였으며 아르케메네스 제국의 일부인 사트라피로 있었는데 알렉산더 대왕시대에 히르카니아와 합병되었다가 이 둘은 모두 셀레우코스 왕국 의 한 주가 되었었다. 원래 중앙아시아의 파르니 유목민들이 파르티아로 들어왔으며 파르티아 제 국의 창시자인 아르사케스(Arsacid) 1세는 그리스왕 디오로투스 지배지역의 총독이었는데 반란을 일으키고 서쪽으로 가서 나라를 세웠다. 후에 미트리다 테스 1세와 아르타바누스(Artabanus) 2세의 정복에 의해 이란고원 자체와 티 그리스, 유프라테스 유역이 파르티아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 후인 AD 224년 남부 이란의 지방통치자 아르다시르가 반란을 일으켜 사산왕조를 건국했다. 박트리아 제국27)은 파르티아 건국과 비슷한 시기인 BC 250년 셀레우코스 왕조인 시리아왕국 예하의 박트리아 사트라프28)였던 디오도토스(Diodotus)가 독립왕국을 세웠으며 이를 뒤이은 에우티데모스의 후계자들은 힌두쿠시산맥과 인도북서부로 진출 그곳에 인도-그리스계통의 왕국을 세웠다. 박트리아 왕국 은 BC 175년에 인도 펀잡지방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이에 따라 헬레니즘은 중앙아시아와 인도 북서부지역 문화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BC 128년 그리 스인들은 월지국의 속방이 되었고 얼마 있지 않아 월지국은 박트리아를 정복 했다. 26) 파르티아제국은 고대 이란의 왕국(BC 247∼AD 226)으로서 왕조의 창시자 아르사케스의 이름을 따 아르사크왕조라고도 하며, 중국에서는 안식(安息)이라고 불렀다. 시리아 국왕 안티오코스(2세)가 이집트전쟁을 일으켰을 때, 이 기회를 타서 독립국가가 되었다. 왕국 은 카스피해(海)의 남동지방을 본거지로 하였으나, 차차 북동 이란으로 영토를 신장시켜, 수도 헤카톰필로스의 이름이 서방에 알려졌다. 27) 박트리아제국은 힌두쿠시산맥과 아무다리아강 사이에 고대 그리스인이 세운 나라(BC 246∼BC 138)로서 중국에서는 대하(大夏)라고 하였다. 아케메네스왕조 때는 페르시아제 국(帝國)의 박트리아나주(州)였다. 알렉산드로스제국이 붕괴한 뒤에는, 그 유장(遺將)인 셀레우코스 1세가 세운 시리아왕국의 한 주가 되었다. 그러나 시리아왕국이 쇠퇴한 틈을 타, 사트라프(Satrap : 州知事)로 임명된 디오도투스가 중앙으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 왕 이 되고, 박트라(지금의 발흐)에 수도를 정하였다. * 박트리아는 대월지에 정복되고 대월지가 서투르키스탄과 아프간 북반부를 점령했을 때 영 지안에 설치된 5제후의 하나린 귀상에서 발전된 쿠샨왕조는 힌두쿠시 이남의 간다라를 지 배하여 간다라미술이 형성되었으나 파르티아 대신에 발흥한 사산조페르시아에 병합되었다 가 에프탈에 멸망됨. 28) 사트라프 [Satrap] 고대 페르시아 속주(屬州)의 태수(太守
그 후 대월지29)의 5제후의 하나였던 쿠샨(귀상)이 쿠줄라 카드피세스(Kushan Kadphises) 1세때 다른 4제후를 제압하고 힌두쿠시 이남으로 진출하여 간다라를 지배하였으며 226년 파르티아 대신 등장한 사산조 페르시아에 의해 번속 되었다 가 5세기 후반에 에프탈30)에게 멸망되었다. 29) 대월지[月氏, Yueh-chih, 대월지] BC 128경∼AD 450년경 박트리아와 인도를 통치한 고 대민족. BC 2세기초의 중국 문헌에 중국 북서부 간쑤 성[甘肅省] 서부지역에 거주하는 유목민으로 처음 언급되어 있다. 흉노(匈奴)의 통치자인 라오샹(BC 174경∼161경 재위) 이 월지를 무찌르고 왕을 죽이자, 월지의 대다수는 서쪽의 소그디아나와 박트리아로 이 주하여 그 곳을 지배하고 있던 그리스인들을 몰아냈다. 월지 및 그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부족은 서양에 근원을 둔 아시족(또는 아시안족)과 토카리아족(또는 토카라족)이다. 30) 에프탈은 중앙아시아의 고대 유목민족으로서 원어명은 Ephtalitesdlau이며 에프탈은 5세 기 중엽부터 6세기 중반까지 투르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을 통일한 민족이다. Haytal, Hephtalites, 압달, 읍달 등으로도 표기하며 이란계 언어로 ‘강한 사람’을 의미한다. 에프탈 3세(재위 484∼545) 때에는 인근의 30여 개 부족을 지배할 만큼 위력이 강했다. 사산왕조 페르시아와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사산왕조에 협력하여 동방 로마령을 침공하였 고 이로 인해 광대한 영토를 획득하였다. 나중에는 사산왕조와 돌궐(突厥)의 목간가한(木 杆可汗) 연합군에게 침범당하여 567년 멸망하였다. . 아프가니스탄의 역사와 분쟁 40 군사연구 제128집 사산조 페르시아31)는 이란 남서부 파르스 지방에서 아르다시르(Ardasir Babakan) 1세가 세웠으며 조로아스터교 제사장인 사산의 손자이자 이파르스 지방의 실권자 였던 파파크의 아들로서 조부의 이름인 사산에서 유래한다.
에프탈은 중앙아시아의 고대 유목민족으로서 이란의 언어를 주로 사용하였 으며 5세기 중엽부터 7세기 중반까지 투르키스탄·아프가니스탄을 통일한 민 족이었다. 에프탈은 사산조 페르시아와 협력하여 동방 로마령을 침공하였으 며 광대한 영토를 획득하였다가 사산왕조와 돌궐의 연합군에게 567년에 멸망 하였다. 31) 사산왕조 페르시아는 중세 페르시아왕조(AD226∼651)년의 하나로, A.D. 226년에 아르다 시르 1세(Ardashir I, 226∼241 재위)가 파르티아(Parthia) 왕국을 점령한 뒤 건설하였다. 사산왕조는 A.D. 651년에 아랍의 침입을 받아 멸망하였다. 사산왕조 페르시아를 세운 아 르다시르 1세는 오늘날 이란 남서부 파르스(Fars) 지방에 있던 이스타크르(Istakh, 고대 의 페르세폴리스)의 조로아스터교 제사장인 사산의 손자이자, 이 파르스 지방의 실권자 였던 파파크(Papag 혹은 Papak)의 아들이다. 왕조의 명칭은 아르다시르 1세의 조부(祖父) 의 이름인 사산에서 유래한다. 이 왕조는 고대 페르시아 제국, 아르케메네스 왕조를 계승 하고, 그 중세적 재흥(再興)을 나타낸다는 의미에서 사산왕조 페르시아로 불렸다. . 군 역 사 및 역 사 일 반 군사연구 제128집 41 <그림 11> 굽타왕조 시대의 인도(4∼5세기 경) 한편 당시 인도의 북서지역과 구 박트리아지역을 지배하던 쿠샨왕조32)가 (AD 45∼250) 세력이 쇠퇴하자 북동인도가 그 지배에서 벗어나 굽타왕조(AD 320∼ 550)가 이 지역을 통일하여 동쪽 벵골로부터 서쪽 인더스강 지역에 이르는 광대 한 지역을 지배하였다. 쿠샨왕조는 대월지국의 5제후국의 하나인 귀상에서 발전하여 북서인도까지 진 출하며 간다라 미술 등 특색 있는 문화를 형성하였다.
굽타왕조33)는 AD 320∼550년까지 북인도를 통일한 인도의 왕조로서 통 일대업은 찬드라굽타 1세(Chandra Gupta)와 사무드라굽타(Samutra Gupta) 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이리하여 굽타 왕조는 동쪽 벵골로부터 서쪽 사우라 슈트라까지와 북쪽 네팔 국경으로부터 나르마다강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였다. 이 시대의 아프가니스탄 지역에 있었던 국가 및 종족은 실로 그리스계·중앙아시아계·이란계·인도계· 32) 쿠샨왕조 [Kushan Dynasty]는 기원 전후부터 5세기 중엽까지 존재한 북서 인도에서 중앙아시아에 미치는 왕조. 대월지(大月氏)가 서쪽으로 옮겨서 서(西)투르키스탄과 아 프가니스탄 북반부(박트리아지역)를 지배했을 때에 영지(領地) 안에 설치한 5제후(諸 侯)의 하나인 귀상(貴霜:쿠샨)에서 발전하였다. 기원 전후 쿠줄라 카드피세스 때에 다른 4제후를 쓰러뜨리고 힌두쿠시 이남으로 진출하여 간다라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226년 파르티아 대신에 사산왕조가 이란에서 발흥하여 아프가니스탄을 병합하자 쿠샨왕조는 그의 번속국(藩屬國)이 되었다. 사산왕조의 세력이 이완되자 그 세력을 회복하였으나 (기타라쿠샨왕조), 5세기 후반 에프탈에게 멸망되었다. 33) 굽타왕조 [Gupta dynasty]는 320년부터 550년경까지 북(北)인도를 통일 지배한 왕조로 서 이 시기는 고전(古典) 인도문화의 최성기에 해당한다. 굽타왕조는 일반적으로 찬드라굽 타 1세가 확립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으나, 그 성립과정은 분명하지 않다. 다만 3세기 중엽 에 쿠샨왕조의 세력이 쇠퇴하여 북동인도가 그 지배에서 벗어난 후 작은 지방지배자가 할 거하였을 때, 그들 중에 굽타왕조가 마가다 지방(지금의 비하르州)에서 흥륭했을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찬드라굽타 1세는 갠지스강 중류지역에 세력을 확장했으나, 북인도 통일의 대업은 스스로 ‘모든 왕의 정복자’라고 호언한 사무드라굽타에게 인계되었다. 그 뒤를 이 어 찬드라굽타 2세는 나가 및 바카타카 왕조와 결탁하여 2세기에 걸쳐서 그자라트와 사우 라슈트라를 지배하던 샤카족(族)의 서방 크샤트라파를 쫓아내어 그 지방을 확보하였고, 또 한 벵골과 신드를 병합하였다. 이리하여 굽타왕조는 동쪽 벵골로부터 서쪽 사우라슈트라 까지와 북쪽 네팔 국경으로부터 나르마다강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였다. . 아프가니스탄의 역사와 분쟁 42 군사연구 제128집 아랍계 등 다양한 민족과 국가가 번갈아 지배하고 세력의 흥망과 부침에 따라 생 멸되었다. 중앙아시아에서 이란고원을 넘어와 지금의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지역에서 메데 와 바사제국을 건설한 종족은 아리안 계통으로 볼 수 있으며, BC 4세기경 페르 시아를 격파하고 알렉산더 제국을 건설한 마케도니아는 헬라족이라고 하는 인도 유럽족에 해당한다. 또한 파르티아 제국은 파르니 유목민이 세운 이란족의 국가 이며 박트리아는 알렉산더 제국이 붕괴한 뒤 그 유장인 셀레우코스 1세가 세운 시리아 왕국의 주지사격인 디오도투스(Diodotus)가 독립하여 세운 그리스인의 국가이다. 또한 대월지국은 중국 감숙성지역에 거주하던 유목민들이 흉노족을 피해 박트리아지역으로 이동하여 그리스인을 몰아내고 세운 국가이며 사산조 페르시아는 이란 남서부 파르스지방의 실권자였던 파파크의 아들인 아르다시르 1세가 세운 나라이다. 그 후 등장한 에프탈은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이었다. 즉, 고대의 서아시아지역에서의 다양한 국가의 생멸에서 알 수 있듯이 아프 가니스탄지역에서는 하나의 종족이나 국가가 영구적으로 존속했던 것이 아니 라 새로운 생활공간과 영역을 확보하기 위한 이동이나 종교, 문화, 예술의 전 파와 교류과정에서 종족과 부족 간에 갈등과 분쟁이 일어나고 기존 세력이 지 배하던 영역과 그 영역을 기초로 한 국가 등은 빈번히 교체되고 바뀌어 갔던 것이다. 이러한 아프가니스탄 지역 고대사회의 분쟁은 대체로 새로운 지역을 향한 민족 이동이나 문명의 전파 그리고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쟁과 같은 전쟁 그리고 같 은 국가 내에서의 부족 간의 갈등으로 인한 분쟁 그리고 내부 반란 등 다양하다. 영토와 국경의 개념이 확실한 현대사회와는 달리 고대의 국가영역과 영토는 세력의 확장과 전쟁의 승패에 따라서 항상 변화되고 종족과 국가도 다른 종류 와 형태로 교체되는 경우가 빈번했다. 이 지역뿐만 아니라 고대사회에서는 한 지역의 씨족이나 종족을 중심으로 강한 지도자가 등장하면 인접한 종족이나 부 족을 제압 복속하고 그 세력을 계속 확장하는 과정에서 타 민족이나 국가와의 전쟁을 치르게 되고 승리한 쪽은 알렉산더제국이나 파르티아, 페르시아, 에프탈 과 같은 대제국을 건설하게 되며 이들을 강력하게 통치하던 지배자가 죽고 세 력이 약해지면 다시 군소 국가로 분열되고 쇠퇴하여 멸망하는 흥망을 거듭한 것이다. . 군 역 사 및 역 사 일 반 군사연구 제128집 43 2. 중세 이슬람제국(사라센)의 변천과 분쟁 AD 642년 사산조 페르시아가 멸망한 후 아프가니스탄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호 라산지방이 아랍의 지배하에 들어간 이후 약 1000여 년간 이슬람 문화가 번성하 였다. AD 570년 아라비아 반도에서 태어난 무함마드(마호메트)는 AD 630년 이 슬람 신도들과 함께 메카를 점령하고 아라비아를 이슬람 세력화에 통일한다. 무 함마드(Muhammed) 사후에 후계자(칼리프)들은 세력을 넓혀 이집트에서 이란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고 사산제국을 멸망시킨다. 무함마드 직계세력은 4대 칼 리프에서 멈추고 옴미아드34)시대와 압바스조35)에 이어지는 사라센제국을 건설한 다. 사라센제국은 옴미아드 시대 때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였으나 압바스왕조 때 세력이 약화되어 지방정권들이 독립하게 되며, 이중 셀주크 투르크(1037 ∼ 1157)가 이 지역을 차지하고 강대한 제국을 건설한다.
셀주크 투르크는 아나톨리아를 침공하는 등 비잔틴제국36)과 헤게모니를 다투 고 동쪽으로는 중국 서쪽으로는 비잔틴 제국과 국경을 이루며 최대의 전성기를 구가한다. 그 후 십자군 전쟁37)에서 패하여 내부반란을 겪으면서 세력이 약해지 면서 독립적 이슬람 국가들이 세워지기 시작한다. 36) 비잔티움제국 [Byzantine Empire]는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의 사망 이후 동과 서 로 분열된 중세 로마제국 중 동로마 제국(330∼1453)이다. 고대 로마제국은 게르만민족의 대이동 결과 서방의 판도를 잃었으나 콘스탄티누스 1세는 보스포루스 해협에 있는 그리스 식민지인 비잔티온에 제 2의 로마 수도를 건설하였다. 로마 역사에서 비잔티움 제국 시기 가 정확히 언제인가에 대한 학계의 합의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많은 이들이 콘스탄 티누스 1세 호아제가 최초의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라고 보고 있다. 37) 십자군 전쟁은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 사이에 서유럽의 그리스도교도들이 성지 팔레 스티나와 성도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들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전후 8회에 걸쳐 감행한 대원정
그리고 13세기에 몽골제국의 침공으로 속국이 되었다가 이후 1397년 티무르 (Timur)38)의 침입과 그들의 제국 건설로 끝나고 티무르의 자손인 바부르(Babur) 는 무갈왕조를 이룩하였으나 200여년간 이란의 사파비(1502∼1730) 왕조와 무굴 제국(1526∼1850)으로 분할 영유되었다. AD 1299년에 일어난 오스만투르크39)가 티무르제국 멸망 후에 이 지역의 서측 을 차지하고 다시 대제국을 건설한다. 38) 티무르왕조 [Timurids] 티무르와 그의 자손의 왕조(1369∼1508)로 중앙아시아를 중심으 로 메소포타미아와 코카서스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통치했다. 창시자 티무르는 몽골제 국 왕실의 후예로, 1369년부터 중앙아시아의 트랜스옥사니아와 코라산 전역을 점령하기 시작했으며, 1366년에는 사마르칸드를, 1369년에는 발흐(Balkh)를 점령하고 점령지를 통 합했다. 39) 오스만제국(1299∼1922)은 오스만 가문을 왕가로 하여, 현재 터키의 최대 도시인 이스 탄불을 수도로 정하여 서쪽의 모로코부터 동쪽의 아제르바이잔에 이르러 북쪽의 우크라 이나에서 남쪽의 예멘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지배했던 다민족 제국이다. . 아프가니스탄의 역사와 분쟁 46 군사연구 제128집 사파비왕조40)는 이슬람의 페르시아 정복이후 가장 큰 이란제국을 건설했으며 사산왕조 이후 이란전역을 재통합한 왕조이기도 하다. 사파비왕조의 이스마일 (Ismail) 1세는 아르다빌의 수피 종단 지도자로서 투르크계 부족의 지원을 받아 백양왕조41)를 격파하고 우즈벡, 투르크 등과 연합하여 아제르바이잔의 샤를 자칭 했으며 1502년 5월 이란 전역을 차지하는 샤의 자리에 올랐다.
또한 그는 티무르의 쇠퇴를 기회로 이란전역을 평정하고 유프라테스강에서 아 프가니스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으며 수니 이슬람지역인 바그다드와 모술 을 병합하고 시아 이슬람을 국교로 선포했다. 그리고 1514년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분쟁을 시작으로 수니 이슬람세력과 끊 임없이 대립했으며 북동쪽의 우즈베크 족과도 항쟁하며 시아 이슬람의 종주국으 로서 역할을 다했다. 그 후 1722년 호타키왕조로 불리는 아프간족의 마흐무드는 이란에 침입하여 사 파비왕조를 타도하였으나 1737년 투르크계의 나디르샤42)가 이란에서 아프간족을 몰아내고 칸다하르와 카불을 점령하고 델리까지 진출하였다. 1747년에 나디르샤가 암살당한 후 그의 부하인 두라니족의 지도자 아흐마드한 아브달리가 그해에 칸다하르에서 왕위에 오르고 아흐마드 샤 두라니라 칭하였으 며 두라니 왕국이 탄생했다. 이것이 아프간 민족국가의 시초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중세 이슬람제국은 아라비아를 통일한 마호메트에 의해 성립된 이슬람교를 중심으로 한 다민족 국가이다. 42) 나디르샤는 1698년에 태어나 1736년 이란의 사파이드 왕조의 왕으로 집권한 뒤에 1747 년의 사망까지 아프가니스탄과 이란에 걸치는 영토를 통치하였다. 그의 군사적인 성공에 의하여 몇몇 역사가들은 그를 ‘페르시아의 나폴레옹’으로 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라센제국도 칼리프시대와 옴미아드시대를 거쳐 압바스조에 이 르러 세력이 약해지면서 지방정권들이 독립하였으나 다시 투르크계의 유목민이 세운 셀주크 투르크제국을 건설하였으나 십자군 전쟁에서 패하면서 약화되고 분 열되어 13세기 몽골제국의 침공에 의해 속국이 되었다. 이후 같은 투르크계의 오스만 투르크가 다시 한 번 대제국을 건설하였으며 몽 골의 후예가 세운 티무르제국과 아르다빌의 수피종단 지도자였던 이스마일 (Ismail)에 의해 사파비왕조가 세워짐으로써 이슬람의 페르시아 정복후 가장 큰 이란제국을 건설하게 되었다. 이후 아프간족의 마흐무드가 이란에 침입하여 사파비왕조를 타도하고 투르크 계의 나디르샤가 이란에서 아프간족을 몰아내고 카불 및 델리까지 진출한 후 그 의 부하이던 두라니족의 ‘아흐마드 샤 두라니’가 두라니 왕국을 건설하면서 최초 의 아프간 민족국가를 탄생시키기까지를 그 이후와 구분하여 대체로 중세 이슬 람제국 즉 이슬람사회 중심의 사라센제국으로 분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슬람 교 중심의 사라센제국이나 사파비왕조도 하나의 종교 하나의 종파로 통합된 것 이 아니라 끊임없이 수니 이슬람세력 등 타종파 그리고 우즈벡 등 타 종족과의 갈등과 대립을 계속하는 가운데 시아 이슬람의 종주국으로서 역할을 수행해 나 갔다. . 군 역 사 및 역 사 일 반 군사연구 제128집 49 이와 같이 중세 아프가니스탄 지역을 포함한 서아시아지역은 아라비아반도와 페르시아 그리고 중앙아시아, 몽골, 중국, 인도지역 등에서 다양한 세력의 부침에 따라 융기한 국가들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교체되며 바뀌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지배세력이 교체되었다고 해서 기존의 종족이나 민족들이 완전히 소멸되 는 것은 아니며 또한 지배세력의 통치력의 한계상 그렇게 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사라센이나 셀주크 투르크, 티무르, 몽골, 오스만투르크와 같은 대제국은 그 지역 의 종족을 인정하고 그들의 지도자들을 통한 다민족, 다종족 국가를 건설하고 유 지하여 왔던 것이다. 3. 아프간 왕국의 성립과 제국주의 시대 아흐마드 샤 다음에는 그의 아들 ‘티무르 샤(Timur Shah)43)’가 즉위하고 카불 을 수도로 정하였다. 그가 죽은 뒤 왕위 다툼이 일어났으며 ‘자만샤(Zaman Sha h)44)’가 집권한 후 바라크자이의 지도자 ‘사르파르 파인더’칸(Sirdar Payinda Khan)과 그의 추종자 1800여 명을 처형하자 그의 아들들이 복수를 결심하고 ‘마 흐무드샤’(Mahmud Shah)를 도와 재집권하도록 도왔으나 도스트 무하마드의 형 인 ‘파타칸’을 암살하여 바라크자이족의 분노를 샀으며 이에 사도자이족 왕의 다 른 형제들과 결탁하여 마흐무드샤의 영향력을 쇠퇴시켜 알리샤 및 아유브샤 등이 왕위에 올랐으나 1819년 카불을 장악한 술탄 모하마드칸이 권력을 잡고 다른 형 제들과의 싸움 끝에 군주가 되었다. 1834년 아프가니스탄의 지도자인 도스트 무함마드는 스스로 ‘아미르 알 무미닌 (신자들의 사령관)’ 이라는 칭호를 붙이며 페샤와르의 시크 왕국을 상대로 지하드 43) 티무르 샤는 두라니 왕국의 두 번째 지도자였으며 1772년 10월 16일부터 1793년 사망까 지 집권을 하였다. 푸쉬툰족이었던 그는 그의 아버지인 아마드샤의 두 번째 이제 제일 나이가 많은 아들이었다. 무굴제국의 딸과 결혼을 하여 재빨리 권력에 오를 수 있었던 그는 처음에는 인도의 북부의 통치를 맡았었지만 곧 마라타스족에 의하여 쫓겨났다. 44) 자만샤(재임기간:1793∼1801) 티무르 샤가 사망한 뒤에 칸다하르, 헤랏 그리고 카불의 통 치자였던 그의 세 아들이 왕권 계승을 두고 다투었다. 카불의 지도자였던 자만 샤는 수 도를 통치하고 있다는 장점을 이용하여 23세에 샤가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많은 이복형제들이 새로운 샤를 투표하기 위하여 수도에 도착하였을 때 이들은 구속되었으며 왕위 계승을 둔 싸움이 아프간을 혼란에 빠뜨렸고 외부 세력이 개입할 수 있는 이유를 제공하였다. . 아프가니스탄의 역사와 분쟁 50 군사연구 제128집 를 벌였다. 그의 집권기 초반부터 그는 푼자브지역45)의 시크족지도자(란지트 싱) 가 슈자 샤(Shuhja Shah)46)를 이용하여 유령정권을 설립하고 영향력을 행사하 려는 것에 대해 분쟁이 일어났다. 1834년 슈자샤는 그의 왕국을 되찾으려는 마지 막 시도를 하였지만 칸다하르의 전투에서 도스트 무하마드(Dost Mohamme d)47)에 의하여 패배하였다.
1837년 영국총독 오클랜드경은 당시 카불의 지배자인 도스트 무함마드에게 대 표단을 파견하여 시크교도의 지도자 란지트싱과 평화협상을 맺도록 독려하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결국 바라크자이족의 도스트 무함마드가 45살의 나이에 아 프가니스탄의 왕위에 올라 1838년에 정식으로 카불의 아미르라고 칭했으며 이에 구 왕국시대의 바라크자왕조가 시작되었다. 도스트 무함마드는 러시아의 도움을 뿌리치고 영국과 동맹을 맺으려 하였지만 영국이 제공한 거래가 맘에 들지 않자 러시아로 급히 동맹을 바꾸었다.
이에 대하여 영국군이 1839년 4월 칸다하르를 정복하고 이어서 같은 달에 카불 을 점령하였다. 그 후 영국의 개입으로 사도자이족인 슈자샤가 다시 왕권을 차지 하였으며 도스트 무함마드는 1840년 추격 끝에 포로가 되었다. 1842년 카불이 다시 그의 군의 소유에 들어가기 전까지 포로로 잡혀 있었다. 그는 1855년 영국 군과 동맹을 맺었으며 1857년 양국은 페르시아에 전쟁을 선언하였다. 이후의 인 . 아프가니스탄의 역사와 분쟁 52 군사연구 제128집 <그림 20> 탕이가루 * 영국과 전쟁 막바지인 1841년 이 계곡에서 철수하던 영국군 4,500명과 가족 그리고 세포이 병사 등 1만2천 여명이 아프가니스탄인의 공격으로 몰살당함. 생은 반란을 진압하면서 보내다가 급작스럽게 1863년에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인 셰르 알리(Sher Ali)48)에게 왕좌를 물려주었다. 인도 방위의 입장에서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위협을 느낀 영국은 아프가니스탄 을 자국의 세력화에 두려고 하였으며, 도스트 무하마드와 그의 아들 ‘세르 알리’ 때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제1차 (1838∼42)49), 제2차(1878∼80) 아프간 전쟁을 일으켰다. 영국 이 이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공 략을 시작한 것은 1838년이었 다. 영국의 통상사절들이 카불 로 들어와 당시의 아프가니스탄 의 통치자였던 아미르 도스트 무함마드에게 통상을 요구하면 서 사실상 협박을 했다. 아미르 는 이를 거부했고, 영국은 이를 핑계로 군대를 파견하여 아미르 정부를 축출하고, 영국의 요구.
48) 셰르 알리 칸(1863∼68, 1868∼1879) 도스트 무함마드 칸의 3번째 아들인 셰르 알리 칸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프간의 바라 크자이 왕조의 통치를 이어나갔다. 그는 아버지의 사망이후 제빠르게 권력을 장악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의 형인 모하마드 아프잘 칸(Mohammad Afzal Khan)에게 권력을 빼앗겼다. 형제가의 전투 끝에 마침내 그가 그의 형을 무찌르고 왕의 자리에 등극하였다. 그는 러시아와 영국간의 분쟁에서 중립을 지키려고 하였지만 1878년 2차 아프간 전쟁의 발발로 인해 이러한 아프간의 중립은 지켜지지 못했다. 영국군이 카불로 진격해오자 셰 르 알리 칸은 카불을 떠나서 러시아로 망명을 하였으며 그가 죽은 뒤에 왕의 자리는 그 의 아들인 모하마드 야쿱 칸에게 주어졌다. 49) 제1차 아프간 전쟁(1838∼1842) 1818년 카불에 세력을 굳히고 아프가니스탄 지배의 실권을 쥔 도스트 무함마드는 당시 중앙아시아를 남하하여 페르시아에 진출한 러시아 세력과, 이에 위협을 느끼고 있던 인 도에 근거를 가진 영국 세력과의 사이에 끼어 영토를 점차 잃어가고 있었다. 1837년 페 르시아의 헤라트 공격을 계기로 아프가니스탄과 영국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는데 영국은 카불을 점령하고 무함마드 대신 샤 슈자를 왕위에 앉혔다. 그러나 국내의 저항이 심하여 영국과 인도군은 카불을 철수하게 되었으나 도중에 습격을 받아 전멸하고 왕도 암살되었 다. 그러자 영국군은 재차 카불에 진주하여 슈자의 아들을 왕으로 옹립하였으나 민중의 반항에 부딪쳐 부득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고 무함마드를 복위시켰다. . 군 역 사 및 역 사 일 반 군사연구 제128집 53 를 충실이 이행하는 괴뢰정부를 세웠다. 그러나 영국의 이 지역 지배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 주민들이 대대적인 항전을 개시하고, 이를 견디지 못한 영국이 결국 철수했기 때문이다. 영국군의 퇴로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700명의 영국군과 3,800명의 인도인 용병들의 생명이 눈 쌓인 산악지대에서 사라져 갔다. 눈 쌓인 고산지대를 90마일이나 행군한다는 것은 영국군에게는 죽음의 행진이었다. 그리 고 아미르 도스트 무함마드는 아프가니스탄 최고 통치자의 권좌에 복귀했으며 1863년에는 아미르 도스트 무함마드의 아들이 권자를 이어 받았다. 그는 러시아 와 외교관계를 맺었다.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이 러시아와 외교관계를 맺게 된 것 을 못마땅해 했다. 그래서 영국은 인도의 지원을 받아 1878년 다시 한 번 카불을 침공했다. 그리고 영국군의 주둔을 인정하는 조약에 강제 서명토록 했다. 무력에 못이겨 외교문서에 굴욕적인 서명을 해야 했던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다시 한 번 항전에 나섰다. 그들은 그들 방식의 독특한 항전을 통해 영국군과 그들을 돕 는 인도군들에게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다. 물론 아프가니스탄 저항군의 손실도 적지 않았다. 그리 길지 않은 항전기간 동안 무려 6만 명의 아프간 전사들이 사망했다. 이들 을 이끌던 지도자들은 이슬람 성직자들이었는데, 그들은 그들의 항전을 영국의 ‘이교도’를 상대로 한 ‘지하드’로 규정했다. 그들은 가지즈라고 불리는 암살단을 조직하고 암살 대상자들의 명단을 작성하여 상대방의 중요 인물들에 대한 암살을 감행했다. 영국은 아프간인들의 강력한 저항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아프간을 그들 손으로 장기간 직접 통치하는 것은 힘들다고 판단하고 1880년 아미르 도스트 무함마드의 손자를 왕위에 앉히고 병력을 철수시켰다. 그 결과 아프가니스탄 영토의 일부가 인도에 할양되었으며 1893년 아브도르 라 흐만(Abdurrahman) 칸 때 인도와의 국경선이 확정되고 1901년에는 연금을 받기 로 하고 외교권을 인도에 일임하게 되었다. 1905년 하비브알라(Habibullah)가 이 조약을 비준함으로써 아프가니스탄은 영국의 보호국이 되었다. 또한 1907년에는 러시아도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영국의 우위를 인정하였다. 하비브알라는 내정면에서 하비비아 학교의 기초를 다지고 페르시아어 주간신문 을 발행하여 민족적 자각의 향상을 촉진함과 동시에 대외적으로는 제1차 세계 . 아프가니스탄의 역사와 분쟁 54 군사연구 제128집 대전에 대해 중립을 엄수하였다. 1919년 하비브알라가 반영국주의자 손에 암살된 후 같은 해 후계자가 된 아만 알라는 반영국적 의견에 동감하여 인도정부에 대해 적대행위를 취했으나(제3차 아프간전쟁50)) 승패를 가리지 못하고 8월에 라왈핀디 화평조약51)이 맺어졌다. 이 조약으로 인도 정부로부터의 연금이 폐지되고 외교 지도권 폐지가 약정되었으며 아프가니스탄의 독립이 정식으로 승인되었다. 1919년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완전 독립을 보장하는 내용의 협약서에 서 명했다. 그 후 아프가니스탄의 새 지도자인 아마놀라(Ahmanullah)는 소련과 새로 운 우호관계를 증진시키기 시작했다. 아프가니스탄의 입장에서는 소련이 영국보 다는 훨씬 유익하고 실리적인 존재였다. 1873년에 러시아는 아프가니스탄과 국경을 확정했고, 다른 중앙아시아 지역은 합병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에 대해서는 영토를 존중해 줄 것을 약속했다. 소 련의 첫 통치자인 블라디미르 레닌은 당시 모든 종류의 제국주의를 배격한다는 내용의 발언을 입버릇처럼 하고 있었다. 양국간의 이와 같은 우호관계는 적어도 1970년대까지는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왕은 국내 통일과 서양문화 도입에 힘썼으나 보수 세력의 반대로 퇴위한 뒤 망 명하였다. 뒤를 이어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연 나디르한까지 1933년에 암살당 하자 그의 아들 자히르샤가 19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그 후 오랫동안 왕위를 유지하였으나 1973년 7월 국왕의 외유 중에 쿠데타가 일어나 무함마드 다우드 칸 전 총리가 실권을 쥐고 공화제를 선언하였다. 4. 공화국의 성립과 내전의 발생 아프가니스탄은 18세기 중엽부터 현재와 같은 아프가니스탄 왕국이 형성되었으 며, 그 후 1973년 7월의 쿠데타로 군주제가 폐지되고 공화국이 되었다가 1978년 4월 쿠데타로 민주공화국으로 개칭되었다. 50) 제3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은 1919년 국왕이 암살되자 아들 아마눌라는 소련에 접 근하여 인도에 적대행위를 취했으며 1개월후 라왈핀디 조약을 체결했으며 이로써 아프 가니스탄은 1차 세계대전으로 영국이 피폐한 틈을 이용, 외교권을 회복하고 국제적으로 독립을 승인 받았다. 51) 라왈핀디 화평조약은 제3차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후 아프가니스탄이 영국과 국제사회에 서부터 완전한 자치권과 독립을 인정받게 된 조약이다. 주14) 참조. . 군 역 사 및 역 사 일 반 군사연구 제128집 55 영국은 아프간을 자국의 세력하에 두려고 제1차(1838∼42) 및 제2차(1878∼80) 전쟁을 일으켰고. 이 전쟁의 결과 아프가니스탄 영토일부를 인도에 할양하였고, 1901년에는 영국의 보호국이 되었다. 그 후 1919년 인도정부에 대해 반기를 들어 제3차 전쟁을 벌인 아프가니스탄은 마침내 독립하게 되었으며 독립한 아프가니스 탄에서는 때때로 쿠데타가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1973년에는 국왕통치제가 공화 제로 바뀌었다. 그로부터 5년 후 친소련파가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 한다. 아프간을 위요한 혼란은 이때부터 본격화된다. 한편 1978년에 발생한 이란의 이슬람 혁명은 전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및 중 동전역에 요원의 불길처럼 확산되었다. 같은 해의 쿠데타로 발생된 사회주의정권 은 즉각 이슬람의 거친 반발에 직면했다. 북쪽의 초강대국 소련이 압박해서 밀어 닥친 사회주의였음으로 긍지 높은 이슬람 지상주의가 아프간 전국을 무대로 전면 에서 충돌해갔다. 소련이 이처럼 아프간의 이슬람화를 단절시키고자 하는데에는 아프간에 인접한 타지크공화국 국내에 다수의 이슬람교도가 존재하므로 아프간의 영향으로 타지크 공화국이 이슬람 국가로 변경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또한 소련은 지정학적 으로 이 땅을 중요시했는데 그 이유는 아프가니스탄이 인도·아시아 대륙과 중동 의 중간지대에 위치해 있고 나아가 인도양으로 나가는 길목에 가까이 있기 때문 이다. 한편 이웃나라 인도와 파키스탄은 같은 종교의 아프간 국민을 심리적으로 지지해 왔다. 1978년 4월에 일어난 4월 혁명은 군사쿠데타로서 대통령 친위대가 쿠데타군 과 맞서 싸웠으나 중화기로 장비한 혁명군인 육군에 패하였다. 공화제의 정점 에 있던 다우드 대통령과 그 일파를 축출한 인민민주당의 다라키를 중심으로 한 혁명평의회는 친소련정권을 수립하였으나 군내부에서도 막스주의와 대립이 시작되었다. 아프간 민족의 남성들은 예로부터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전통이 있으며 소년들은 16세만 되면 공장에서 소총을 구입하여 사격연습에 열중 한다. 혁명 후 6월부터52) 다라키(Darraki) 정권에 대항한 반란이 계속 발생하였으 52) 1978년 다라키를 중심으로 하는 소련에 동조하는 사회주의자들이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친소련 공산주의 정권이 탄생되었다. . 아프가니스탄의 역사와 분쟁 56 군사연구 제128집 며 정부군은 공군까지 동원하여 진압작전을 실시하였으나 이슬람교도들이 게릴라 전을 감행해왔으므로 내전은 진정되지 않고 게릴라는 스스로를 무자헤딘이라고 칭하면서 각지에서 정부군에 타격을 가해왔다. 1979년 정부군을 지원하기 위해 소련은 다수의 군사고문을 파견하였고 교육과 경제재건을 위해 민간 전문가까지 파견하였고 글자 해독률을 높이고 여성의 권리 를 증진하기 위한 활동을 지원했으나 오히려 이슬람 게릴라 활동은 한층 활발해 졌고 공격대상은 전체 소련인으로 확대되어 갔다. 이 와중에 제2인자인 아민 (Ahmin)수상이 쿠데타를 일으켜 다라키를 살해하고 정권을 잡았으나 내전은 전 국으로 확대되어 갔다. 다라키나 아민은 이슬람교도의 활동을 봉쇄할 수 없다고 판단한 소련정부는 아프간 침공을 계획하였으며 1979년 소련군은 전면 침공을 개 시 제105친위 공정사단과 KGB특수부대는 600여 명을 사살했다. 소련은 카르마루 를 새 대통령으로 내세운 새 정권이 탄생하였으나 이때부터 약 9년간에 걸친 큰 전쟁이 시작되었다. 5. 아프간 내전과 탈레반의 등장 1979년 소련의 침공으로 시작된 아프가니스탄의 전쟁은 1980년 무자헤딘이라 불리는 무슬림들이 성전을 선포하면서 본격화되었다. 1989년 소련은 무자헤딘의 지속적인 항쟁과 국내외 압박으로 인해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 철수했다. 1992년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은 나지불라 정권을 축출하고 랍바니 대통령을 선출하였 으나 총리로 내정된 헤크마티야르가 불복하면서 종족, 종파, 정파가 복잡하게 얽 힌 내전에 돌입하게 된다. 이 내전에는 수많은 종족과 정파가 있었지만 크게 4개의 세력으로 나눌 수 있 다. 타직족(Tajik)을 중심으로 한 랍바니 전 대통령과 대 소련항쟁의 영웅 마수드 (Ahmad Shah Masud) 장군이 이끄는 세력, 총리로 내정되었으나 불복하며 내전 을 시작한 헤그마티아르(Gulbuddin Hekmatyar)의 파쉬툰족53)(Pashtun) 중심의 정파, 시아파인 하자라 족을 중심으로 한 정파 및 소련군의 장국이었던 우즈벡족 53) 파쉬툰족은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접경에 위치하며 파키스탄에서는 파탄족이라 불 린다. 파쉬툰족 또는 아프간족은 현재 아프가니스탄인의 약 50%를 차지하고 있다. 파쉬 툰족의 기원은 불분명하다. 파쉬툰족은 자신의 혈통을 유대인의 예언자 중의 하나인 다 윗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 . 군 역 사 및 역 사 일 반 군사연구 제128집 57 (Uzbek)의 도스탐(Abdul Rashid Dostam)54)이 이끄는 세력이었다. 이 내전은 이 전에는 아프가니스탄인들이 상상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이슬람 종파와 종족 그룹 들을 분열시켰다. 1995년 카불에서 발생한 하자라족에 대한 마수드의 대량학살, 1997년 마자르(Mar)에서 발생한 탈레반에 대한 하자라족의 대량학살, 그리고 1998년 하자라족과 우즈벡족에 대한 탈레반의 대량학살 등이 자행되었다. 이러한 대량학살은 아프가니스탄 역사상 그 유례가 없는 참혹한 만행이었고 아 프가니스탄인들의 영혼과 종교에 커다란 분열을 가져왔다. 탈레반은 이러한 과정 에서 점차 영향력을 확대시켰다. 탈레반은 1994년 9월 아프가니스탄의 남부 도시 칸다하르를 중심으로 ‘이슬람 신학생’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였다. 탈레반은 주로 파쉬툰족으로 구성되었고 젊은 신학생들이었다. 하지만 탈레반은 시아파를 반대 하는 운동을 주창하면서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곧 아프가니스탄의 전역을 장 악하게 되었다. 탈레반은 1996년 9월 26일 수도 카불을 점령하고 이슬람 공화국을 선포하면서 나지불라(Najibullah) 전 대통령을 공개 처형시켰다. 탈레반은 카불을 점령하고 24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여성들의 사회활동을 금지시켰고 여학교를 폐쇄시켰다. 또한 탈레반은 사진촬영도 우상숭배라고 금지시켰다. 2001년 2월 26일 아프가니 스탄 탈레반의 최고지도자 물라 모함마드 오마르55)(Mullah Mohammad Omar)는 “우상을 인정할 수 없다. 이슬람법에 따라 불상을 모조리 박살내라”고 명령했다. 54) 압둘 라시드 도스탐(Abdul Rashid Dostum) 압둘 라시드 도스탐은 1954년 태어났으며 전 친-소련노선으로 전쟁에 참여하였으며 아프 가니스탄에 있는 많은 이들이 도스탐을 우즈베크족의 지도자로 인정하고 있다. 그는 아 프간 군에 1978년 참여하였으며 처음에는 소련군과 함께 무자히딘을 상대로 전투해왔으 나 1980년대가 지나면서 무자히딘의 쪽으로 동맹을 바꾸었다. 그는 나중에 다시 동맹을 바꾸면서 이러한 동맹을 바꾸는 것에 대한 비난을 받는다. 근래에 있어서 그는 아프간 군의 총사령관이었으며 그의 이러한 직위는 그저 겉치레에 지나지 않는다고 분석되고 있 다. 2008년 초에 그는 터키에서 1년간 망명을 하였으며 2009년 6월 아프간의 대통령인 카르자위가 그를 다시 총사령관직에 복귀시켰다. 55) 물라 모하마드 오마르(Mullah Mohammed Omar : 집권기간 : 1996.9.27∼2001.11.3) 1959년 칸다하르 북부에서 태어난 물라 모하마드 오마르는 아프간의 탈레반 총휘자이자 1996년부터 2001년까지는 실질적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하였다. 그는 현재 오사마 빈 라덴 (Osama bin-Laden)과 그의 알카에다 추종자들을 보호해준 것에 대하여 미국정부에게 수 배령이 내렸다. 그는 현재의 아프간 정부와 나토군에 대항하여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에 진행되고 있는 전쟁의 총사령관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외모에 대하여 알려진 것은 많이 없으며 그를 접한 인원들에 대한 증언도 매우 모순적이다. 그가 탈레반의 수뇌부를 지휘하는 동안 거의 칸다하르 지역을 떠나지 않았으며 외국인과 거의 만나지 않았다. . 아프가니스탄의 역사와 분쟁 58 군사연구 제128집 3월 1일 탈레반 정권은 국제적인 비난 여론을 무시한 채 불상 파괴 작업에 들어 갔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무자비하고 납득할 수 없는 폭력행위”라고 규탄했 다. 이러한 극단적인 행동에도 불구하고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사회의 뿌리 깊은 종족의 갈등과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점차 세력을 확대시켜 아프가니스탄 전 국토의 90% 이상을 장악하게 되었다. Ⅳ. 아프가니스탄 사회의 특성과 근대 분쟁의 성격 1. 아프간 종족사회의 특성 전통적인 아프가니스탄 사회는 험한 산맥과 사막의 지리적 특성에 따라 고 립적이고 분산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이에 따라 각 종족들은 독립성이 강하고 전통을 엄격히 준수하며 생존을 위한 상호 협력적 구조를 가지고 있 다. 아프가니스탄 사회는 집단주의보다는 개인주의를 강조하는데 이러한 아 프가니스탄의 개인주의는 단순히 자기중심주의가 아니라 가족과 부족을 강조 하는 개인주의이다. 개인주의는 외부의 침입에 대항하여 지속적으로 투쟁해 온 원동력이 되고 있다. 파쉬툰족은 아프가니스탄의 지배적인 종족으로서 약 200년 동안 이 지역 을 통치해 왔다. 또한 전통적으로 용기, 활력 및 호전성을 강조하는 문화적 특성과 유사성을 가진 단일한 혈족그룹으로서 개인주의를 강조하며 강력한 부계사회이고 대가족제이다. 종족의 지도력은 칸(Khan)과 말리크(Malik)에 귀속되고 이 지위는 오직 명목상의 세습제도이다. 파쉬툰족은 계급의 구분 이 혈통에 따라 결정되며 부족의 혈통이 종교나 사상적 요소보다 우선한다. 혈통을 중시하며 종족에 대한 충성심, 협동심 및 개인적 봉사를 높게 평가 한다. 파쉬툰족 사회에서 개인은 파쉬툰 왈리(Pashtunwali)56)라고 불리는 기사도 규 범을 엄격히 추종한다. 이 불문법은 많은 내용을 가지고 있지만 중요한 훈령은 56) 파쉬툰 왈리는 아프가니스탄의 독특한 도덕·관습법으로서 이는 용기·자유·독립을 숭상하 며 이슬람교 이상으로 그들을 규제하고 있다. . 군 역 사 및 역 사 일 반 군사연구 제128집 59 크게 세 가지 즉, 첫째 바달(Badal, 복수)57), 둘째, 멜마스티아(Melmastia, 환대), 셋째, 나나와티(Nanawati, 보호)이다. 파쉬툰족 사회의 유일한 통치기구는 지르가(Jirgah), 즉 부족장회의이다. 지르가 는 오랜 세월동안 존재해 왔고 관습법에 의해 제도화 되었다. 부족 내에 일상적 인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는 우선 칸이나 말리크가 논의한다.
그러나 전쟁이나 평화와 같은 중요한 문제의 결정은 바로 지르가에서 논의된 다. 지르가의 결정은 처벌이 아니라 분쟁의 해결이다. 57) 바달은 가장 중요한 의무사항으로 되어 있다. 이에 따라 직계가족의 복수는 그 마을뿐만 아니라 그 종족 전체의 문제로 확대된다. 파쉬툰왈리의 실행은 제도화된 것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효과적이다. 한 개인이 샤름(Sharm, 불명예)으로 지목되면 그 가문의 수치이다. 샤름의 당사자는 추방당하고 집단적인 보호에서 제외되어 죽음과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된다. . 아프가니스탄의 역사와 분쟁 60 군사연구 제128집 아프가니스탄의 역사가 리쉬트야(Rishtya)58)는 아프가니스탄 분쟁의 원인을 혼 란스럽게 불안정한 내부정치의 직접적인 결과라고 분석했다. 그는 이 불안정성의 중요한 원인을 종족 사이 또는 심지어 가문 사이의 불일치로 보았다. 그는 이 지 속적인 불화가 결국 19세기 영국에게 아프가니스탄이 많은 영토를 잃게 되는 결 과로 나타났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아프가니스탄분쟁을 크게 다섯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 분쟁유형은 바달의 의무사항인 파쉬툰 왈리와 관계된 개인과 개인 사 이의 분쟁이다. 피의 복수는 정치권력을 둘러싼 가족과 친척의 분쟁으로 확대된 다. 이 유형은 종종 정치발전의 퇴보적이고 분열적인 행동으로 나타난다. 이 유형 의 대표적인 분쟁은 무사히반(Musahiban)가문59)과 차르키(Charkhi)가문60)의 복 수다. 두 번째 분쟁유형은 종족내부, 즉 부족 사이의 갈등에서 나타난다. 이 유형은 동일한 종족 내부의 기본단위 사이에 존재하는 경쟁관계를 의미한다. 비록 아프 가니스탄 종족이 혈족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내부적인 결합도는 미약하다. 그 대 58) 사이드 콰셈 리쉬트야(Sayed Qassem Rishtya) 사이드 콰셈 리쉬트야는 40년간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외교관이자 장관직에 번갈아 가면 서 재직을 해왔었다. 그의 이러한 역할들은 근대 아프간 역사에서 그가 매우 중요한 역 할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왕에게 친밀한 조언자이자 많은 요직을 겸비한 그는 1964년 아프간 헌법을 제정하는 위원회에 첫 멤버였다. 여기에 그는 정보와 문화장관 그리고 금 융장관까지 겸하였으며 아프간 헌법이 통과될 때까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정치 적 반대파의 압력에 반발하여 헌법이 무산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그는 정치 망명을 결 정하였으며 그가 작성한 일기와 문서들은 근대 아프간 역사를 이해하는데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59) 무사히반 가문(Musahiban) 무사히반이라고 알려진 가분은 모하메드 켈(Muhammed Khel)로도 알려져 있으며 페쉬 와르(Peshewar) 이들은 술탄 무하마드 칸의 후손들이다. 도스트 무함마드 칸(Dost Muhammad Khan)의 동생이기도 한 모하메드 켈의 후손들은 바라크자이족과 연관이 되 어 있으며 나디르 샤(Nadir Shah)와 자히르 샤(Zahir Shah)의 가문이기도 하다. 나디르 샤와 무사히반 가문은 예전에 아마눌라 칸의 휘하에 있었지만 나디르 샤가 왕좌에 등극 한 이후로 엄청난 규모의 숙청을 감행하기 시작하였다. 60) 차르키 가문(Charkhi family) 차르키 가문은 20세기 초반 아프간 역사에서 매우 영향력 있는 가문이었으며 나디르 샤 의 반대파로 유명한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차르키 가문은 아마눌라 칸(Amanullah Khan) 을 지지하였다. 나디르 샤(Nadir Shah)의 반대파로 나디르 샤가 왕좌에 등극하였을 때 차르키 가문에서만 그는 굴람 나비 칸(Ghulam Nabi Khan)과 굴람 제라니 칸(Ghulan Jelani Khan)을 포함한 18명을 처형하였다. . 군 역 사 및 역 사 일 반 군사연구 제128집 61 표적인 유형이 길자이(Ghilzai)부족61)이다. 또 다른 사례는 두라니부족(Durrani)내 부의 사도자이족(Sadozai)62)과 바라크자이족(Barakzai)63)의 불화를 들 수 있다. 1747년 아흐마드 샤(Ahmad Shah)64)는 사도자이족(Sadozai) 출신으로 강력한 파 쉬툰족 연합체인 두라니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후 사도자이족과 바라 크자이족은 지속적으로 분쟁했고, 결국 바라크자이족의 도스트 무함마드가 권력 을 장악했다. 아프가니스탄의 근대사에서 두라니부족 내부의 사도자이족과 바라 크자이족의 분쟁은 많은 영향을 주었다. 세 번째 분쟁유형은 동일한 종족 내부의 정치발전을 둘러싼 이견이다. 파쉬툰족 은 지난 2세기 동안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해 왔다. 하지만 파쉬툰족 내부의 가장 강력한 경쟁세력인 두라니부족과 길자이부족은 지속적으로 대립해 왔다. 길자이부 족은 문명을 거부하고 정착생활을 반대한다. 그들은 개별적인 유목생활을 강력히 주장한다. 그들은 18세기 외부의 침입이 있을 때 미르 와이스(Mir Wais)65)의 지도 61) 길자이부족은 아프가니스탄에 존재하는 가장 강력한 종족으로 상당히 호전적이고 잠재 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내부는 여러 갈래로 분열되어 있다. 그들 인구의 대부분은 유목민이어서 길자이족의 정착민을 멸시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유목민 그룹 내에서조차도 다양한 이견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사촌도 신뢰하지 못하 고 한 가문이 보다 많은 권력을 장악하는 것에 대해 항상 반대한다. 62) 사도자이족은 1747년부터 1826년까지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한 두라니족 내의 한 부족이다. 1747년 아흐마드샤(Ahmad Shah)는 사도자이족(Sadozai) 출신으로 강력한 파쉬툰족 연합 체인 두라니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후 사도자이족과 바라크자이족은 지속적으 로 분쟁했고, 결국 바라크자이족의 도스트 무함마드가 권력을 장악했다. 아프가니스탄의 근대사에서 두라니부족 내부의 사도자이족과 바라크자이족의 분쟁은 많은 영향을 주었다. 63) 1826년부터 1973년 군사혁명으로 무너질 때까지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한 두라니족 내의 한 부족으로서 바라크자이 왕조(―王朝 Barakzay)를 세웠으며 D. 무하마드가 1819년에 카불을 장악, 26년에 아미르(amir;지배자)가 되었다. 제2차 아프간전쟁에서 영국의 보호국 이 되었다가 1919년에 독립을 회복하였으며 73년에 아프가니스탄공화국이 생겨났다. 64) 아프가니스탄 통치자 즉, 왕으로서 1747년 아흐마드 샤(1722∼1772. Ahmad Shah)는 사 도자이족(Sadozai) 출신으로 강력한 파쉬툰족 연합체인 두라니제국을 건설하였다. 아무다 리야에서 인도양까지, 호라산에서 카슈미르·펀자브·신드까지 이르는 제국의 왕이었다. 65) 미르 와이스 호타키(Mir Wais Hotaki) 미르 와이스 칸은 길자이의 파쉬툰족의 족장으로써 호타키 왕조의 창시자이다. 그는 1722 년부터 1729년까지 페르시아의 서부를 통치하였다. 그는 페르시아 정부를 방문한 뒤에 그들의 군사적 약점을 찾아내었다. 사파비드 왕조가 수니파인 파쉬툰족을 지속적으로 시 아파로 개종하려고 하며 종교적 문제가 있었던 가운데 미르 와이스 칸은 1709년에 반란을 일으키고 자신을 진압하려고 온 페르시아군을 무찔렀다. 그는 사망 이후에 그의 아들인 미르 마무드 호타키(Mir Mahmud Hotaki)가 왕좌를 계승하였다. . 아프가니스탄의 역사와 분쟁 62 군사연구 제128집 아래 유일하게 통합했다. 그들이 일시적으로 헤게모니를 장악했을 때, 두라니부족 에게 무자비한 압력을 가했다. 두라니부족은 ‘아흐마드 샤’의 지도 아래 보다 많은 정착생활에 들어갔고 강력한 종족 연합체의 통제아래 중앙정부를 수립하였다.66) 네 번째 분쟁유형은 종족과 종족 사이의 대립이다. 이 유형의 가장 중요한 갈등 구조는 파쉬툰족 대 비파쉬툰족의 분쟁이다. 아흐마드 샤가 파쉬툰족 중심의 아프 가니스탄 왕조를 건설하자 비파쉬툰족들은 자신의 권리가 박탈당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비파쉬툰족들은 파쉬툰족의 헤게모니의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무장반란과 폭동을 일으켜 대표적인 종족은 하자라족, 우즈벡족 및 타직족이 있다. 비파쉬툰족들은 파쉬툰의 동의어인 아프간이라는 단어와 국가적 시민권으 로 사용되는 것에 대해 반대하였다. 이러한 종족적 소외감은 아프가니스탄에 단 일한 국민국가의 건설에 커다란 장애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더 나아가 파쉬툰 족과 비파쉬툰족의 갈등은 근친결혼과 사회경제적 이동이 강하게 나타나 사회결 속력을 약화시키고 있다. 다섯 번째 분쟁유형은 종족 사이의 적개심이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가진다. 이 분쟁은 국민국가를 건설하려는 중앙권력과 종족사회를 보존하기 위해 이를 반대 하는 지방권력 사이의 갈등이다. 모든 아프가니스탄 종족들은 종족구조를 해체시 키고 중앙권력을 수립하려는 중앙정부에 대한 무조건적으로 반대한다. 이제까지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중앙권력을 장악한 종족이 기존의 종족적 권위구조를 대신하 려는 어떠한 노력도 실시하지 않았다. 카불의 두라니부족 통치자는 종족사회를 정착시키고 문명화작업을 실시했지만 다른 종족들로부터 충성과 지지를 결코 받지 못했다. 두라니부족은 다른 종족들 은 물론이고 같은 파쉬툰족인 길자이 부족으로부터도 지지를 받지 못했다. 역사적으로 이 투쟁은 카불의 중앙권력과 다양한 종족들의 지방권력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이 현상은 일정 시기동안 균형 상태로도 나타났다. 그러나 이 균형은 오랫동안 지속하지 못했다.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중앙정부는 종족권력 의 약한 균형 상태에서 존재했다. 강력한 통치자가 나타날 때면 종족분쟁은 상대 적으로 약화된다. 그러나 중앙권력이 약화되거나 동요되면 곧바로 종족들의 반란 66) 아흐마드 샤의 사망 이후 두리니부족의 내분은 가속화되었고 길자이부족은 강력한 세력 으로 성장하여 두라니 부족 왕조를 약화시켰다. 두라니부족과 길자이부족의 연합은 외부 의 개입, 특히 영국의 침입에 대항하여 형성되었다. 그러나 길자이부족은 지속적으로 중 앙정부를 반대하였고 다른 어떤 종족과도 융화되지 못했다. . 군 역 사 및 역 사 일 반 군사연구 제128집 63 이 시작된다. 예를 들면, 아흐마드 샤, 도스트 무함마드(Dost Muhammad) 및 압둘 라흐만(Abdul Rahman)67)이 권좌에 올랐을 때 종족분쟁은 약화되었다.68) 2. 아프간 왕조시대의 분쟁의 성격 아프간 왕조시대의 분쟁의 성격은 종족간의 분쟁에 따른 내전의 성격을 띠었으 며 외세의 침입이 있을 때는 강력한 지도자의 지도아래 일시적으로 통합되기도 하였지만 기본적으로는 가문과 종족을 중심으로 한 강한 결속은 중앙집권적 국가 또는 권력을 수립하려고 하는 종족과 여타의 지방종족과의 갈등과 투쟁으로 나타 났고 이는 지속적인 내분과 혼란의 원인을 제공하였다. 아프간의 가장 많은 인구 를 차지하고 있는 파쉬톤족내의 가장 강력한 경쟁세력은 길자이부족과 두라니부 족이다. 두라니족의 ‘아흐마드샤 압달리’가 두라니 왕국을 세운 것이 독립왕국의 시초라고 하지만 그 전인 1709년 이란에 침입하여 사파비 왕조를 무너뜨리고 아 프간족의 호타키 왕조를 수립한 미르와이스 칸은 길자이부족의 족장이었다. 이후 투르크계의 나디르샤에 의해 밀려 났으나 1747년 나디르샤의 부하였던 두라니족 의 ‘아흐마드샤 압달리’가 칸다하르에서 왕위에 올라 ‘아흐마드샤 두라니’라 칭하 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두라니왕국내의 사도자이족과 바라크자이 부족 간의 권 력 및 왕위다툼이 200년 이상 지속되었으며 19세기 초반부터는 제정러시아와 대 영제국의 제국주의 정책은 필경 아프간지역에서 충돌하게 되었는 바 이들은 아프 간 부족 간의 갈등을 조장하면서 자국의 세력 확장에 이용하였다. 남진 정책으로 이란을 손에 넣고 아랄의 남쪽으로 중앙아시아 영역을 확대하여 온 러시아와 인도를 손에 넣은 영국은 제정러시아의 남하에 위협을 느끼고 아프 가니스탄을 자국의 세력화에 두려고 하였다. 이때부터 두라니 제국의 사도자이 67) 아브도르 라흐만 칸 [Abdor Rahman Khan], 1844경 카불∼1901 카불, 아프가니스탄의 왕(1880∼1901 재위). 그의 아버지와 삼촌 아잠 칸이 도스트 무함마드 칸의 후계자인 그 의 사촌 시르 알리에게 대항하여 일으킨 잔인하고도 오랜 권력싸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브도르 라흐만은 아프잘 칸의 아들이었고 할아버지 도스트 무함마드 칸은 아프 가니스탄에서 바라크자이 왕조를 세웠다. 1869년 시르 알리가 승리하자 그는 러시아의 투르키스탄으로 쫓겨나, 영국과 아프가니스탄 사이의 전쟁이 발발한 1년 후 시르 알리가 죽을(1879) 때까지 사마르칸트에서 살았다. 68) 물론 이 세 아미르의 통치기간 중에도 종족분쟁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아흐마드 샤와 도스트 무함마드는 외국과의 전쟁을 수행하면서 종족연합을 구성하였고 이 과정에 서 경쟁 종족을 제거하였고 압둘 라흐만은 다양한 종족들의 역학관계를 이용해 종족 사 이의 분쟁으로 사용하였다. . 아프가니스탄의 역사와 분쟁 64 군사연구 제128집 왕조와 바라크자이 왕조의 대립이 격화되었으며 최초에는 두라니(사도자이)족을 지지하여 바라크자이족을 억제하고자 했다. 바라크자이족 도스트 무함마드가 정권을 장악하고 러시아와 동맹을 맺자 영국 은 1차 전쟁을 일으켜 슈자샤를 내세워 아프간을 일시 정복하였으나 아프가니스 탄의 강력한 저항에 의해 패배하였다. 시르 알리칸 때 일으킨 2차 전쟁에 의해 아프가니스탄은 영토일부를 아프간에 할양하고 보호국이 되었으며 영국의 지배를 받은 인도정부에 반기를 들고 1919년 3차 전쟁을 벌여 마침내 독립하였다. 이와 같이 영국은 아프간을 정복하기 위해 종족간의 대립을 이용하였으나 사도자이 왕 조는 정권을 유지하지 못하고 1973년 바라크자이 왕조가 쿠데타로 망할 때까지 존속하였다. 3. 아프간 공화국(1973) 출범 이후 분쟁의 성격 1973년 7월 『자히르샤』의 외유중 사촌인 『다우드』전 총리가 쿠데타를 일으 켜 정권을 장악했는데 이때부터 『아프가니스탄』을 위요(圍繞)한 혼란은 본격화 된다. 한편 인접 이란에서는 1978년에 이슬람 혁명이 발생하여 전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및 중동 전역에 요원의 불길처럼 확산되었다. 같은 해 쿠데타로 『아프 가니스탄』에서는 『다라키』를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정권이 성립되었으나 즉각 이슬람의 거친 반발에 직면했다. 이때부터 친소정권과 부자헤딘은 지속적인 항쟁 즉 내전을 계속하였으며 또한 친소정권의 내부반란으로 내전이 확대되어갔다. 1979년 소련은 이슬람교도의 활 동은 근본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침공을 계획하여 9년간의 전쟁, 즉 지역분쟁이 시작된 것이다. 1989년 소련이 무자헤딘의 지속적 항쟁과 국내외 압박으로 철수하고 나지불라 정권이 세워졌으나 1992년 무자헤딘은 이를 축출하고 랍바니 대통령을 선출하였 다. 이로써 소련과의 전쟁은 끝이 났으나 이때부터 19세기 왕조시대에 있었던 종 족간의 분쟁과 유사한 종족, 종파, 정파가 복잡하게 얽힌 내란에 다시 돌입하게 되었다. 즉 이란계인 타직족 중심의 랍바니 대통령, 대 소련항쟁의 영웅 마수드 장군, 파쉬툰족의 헤크마티아르, 하자르족, 우즈벡족의 도스탐장군이 이끄는 세력 들 그리고 1990년대 초부터 등장한 탈레반 등이 그 주역이었다. 이러한 세력들에 의해 지속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내전은 이슬람 종파와 종족 . 군 역 사 및 역 사 일 반 군사연구 제128집 65 그룹을 분열시켰으며 그 참담한 결과는 1995년부터 발생한 대량학살로 나타났으 며 이러한 만행을 아프가니스탄인의 영혼과 종교에 그 유례가 없는 분열을 가져 왔다. 소련을 등에 업고 출범했던 사회주의 정권은 이 종족간의 분열과 항쟁을 가속 화시켰으며 종족간의 분쟁과 친소정권에 대한 항쟁을 잠재우지 못하고 붕괴되었 다. 이러한 과정에서 미국이 소련의 세력확장을 견제위한 파키스탄을 통한 무자 헤딘에 대한 무기 등 장비 및 물자를 지원하는 등의 개입이 있었다. 또한 ‘이슬람 신학생’의 이름으로 등장한 탈레반이 시아파를 반대하는 운동을 추진하면서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점차 아프가니스탄 전역을 장악하고 1996.9.26 수도 카불을 점령하고 이슬람 공화국을 선포하였다. 기존의 수니파 하 나피학파의 이슬람 원리주의와 데오반디즘69)을 근거로 하는 새로운 이슬람 극단 주의 운동을 추구하는 새로운 무슬림 운동은 파쉬툰족 지대에서 그들의 종족규범 인 파쉬툰 왈리를 토대로 이슬람법을 해석하고 순수 이슬람 혁명을 추구하는 서 방 등 어떠한 세력과도 타협을 거부하는 이슬람 극단주의 운동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종파간의 갈등이 종족간의 갈등으로 변질 및 심화되면서 탈레반 세력은 소력철수 이후 분열되고 부패한 무자헤딘 세력을 축출하고 세력을 확장하게 된 것이다. 소련과의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전통적인 종족 및 부족 지도자들의 몰락과 무자헤딘 지도부들에 대한 불신과 경쟁관계는 많은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에게 이 러한 새로운 이슬람 부흥운동을 주장하는 탈레반은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게 되 었다. 그러나 이 탈레반 조직도 기본적으로 파쉬툰족을 근간으로 하는 세력으로서 오 마르를 정점으로 하는 정치 및 군사조직으로 되어 있어 한계점이 있어, 앞으로 타 종족과의 불신과 갈등을 해소하고 완전하게 아프가니스탄을 통합하는 세력이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69) 데오반디 이슬람(Deobandi Islam) 인도 북부에 위치한 데오반디 학파는 이슬람 사회가 서양에게 모든 방면에서 뒤쳐진 이유가 이 슬람인들이 비윤리적인 유혹에 빠지고 서양의 물질주의에 휩쓸리면서 마호메트의 원래 가르침에 서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많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자신들의 폭력적인 행동을 데오 반디 학파의 주장으로 뒷받침한다. . 아프가니스탄의 역사와 분쟁 66 군사연구 제128집 더구나 9.11 테러의 범인으로 지목된 알카에다를 비호했다는 이유로 미국과의 전쟁으로 탈레반 정권이 축출되면서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었고 현재는 아프간 남 부 및 동부산악지대를 중심으로 부활을 추진하고 상당하는 세력을 회복했으나 탈 레반세력을 궤멸시키고 완전한 민주정권을 세우고자 하는 미국과 영국 그리고 파 키스탄의 기속적인 탈레반 공격에 직면하고 있어 그 앞날을 예측하기가 어렵다. Ⅴ. 결 론 지금까지 아프가니스탄의 현황과 역사변천 그리고 아프간 사회의 특성과 시대 별 분쟁의 성격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아프간 분쟁의 배경과 근원이 된 지정학적 환경이나 종족사회의 특성은 고대에서 중세를 거쳐 근대에 이르면서 정치 및 군 사적 상황과 결합하면서 더 많은 인명피해를 수반하는 등 지속적으로 내부적 혼 란과 분쟁의 불씨가 되고 있다. 또한 19세기부터 영국과 러시아 등 외세의 개입은 아프간 종족 사이의 갈등과 내분을 가속화시키며 민족통합과 중앙집권적 정권 수립을 어렵게 하였다. 또한 공화제 성립(1973년) 이후인 1978년 친 소련파의 쿠데타로 설립된 친소정권과 사 회주의 물결은 같은 해에 발생한 이슬람 혁명과 전면에서 충돌하며 10년간에 걸 친 장기간의 분쟁으로 시작된 것이다. 또한 소련이 철수한 이후의 나지불라 정권을 축출한 무자헤딘 세력은 통합된 대통령과 총리를 선출하는 등 국가 통합을 기하였으나 4대 세력으로 3분되는 종 족, 종파, 정파가 복잡하게 얽혀 내전을 지속하게 하였으며 종족간의 대량살상 등 참혹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탈레반이 등장하면서 기존의 이슬람 시아파를 부정하며 세력을 확대하여 아프간 전역을 장악한 이슬람 공화국을 선포 하였으나 여성의 사회활동과 여성 교육을 금지하는 등 어떠한 타(他)이슬람 세력 과의 타협도 거부하는 극단주의로 치달아 바미안 석불을 파괴하고 테러 세력인 알카에다를 비호하는 등 국제사회의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미국과 탈레반과의 전쟁은 테러를 근절한다는 명분으로 시작되었지만 아프가니 스탄의 전통적 종족사회의 특성, 외세의 개입에 의한 새로운 국가건설의 전망은 불투명하다. . 군 역 사 및 역 사 일 반 군사연구 제128집 67 근본적으로 타 종족과 종교, 정파를 거부하는 이슬람의 종족규범이나 무슬림 운동이 바뀌지 않는 한 계속되는 분쟁과 내란 그리고 테러나 마약 등 반인륜적 조직적 범죄를 종식시키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또한 자국(自國)의 경제적, 정치적 이익을 위해 타국을 침략하고 내정에 간섭하는 비인도적, 비합법적인 외세의 개 입은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약소국이나 개발도상국의 정치, 경제 발전을 진정으로 지원할 수 없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이 유라시아의 중심에 위치하 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동서분쟁과 세력의 각축장이 될 수 있는 지정학적 운명 (運命)을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서양을 연결하는 통로 상에 위치한 이유로 동서양의 야심만만한 정복자나 대 상(大商) 그리고 종교 순례자, 예술가 등은 각기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이 지역을 찾아왔고 지나갔다. 그 결과 아프가니스탄은 한때는 헬라족 등 서양인 에게, 한때는 중앙아시아계 유목민들에게, 한때는 몽골이나 중국 그리고 아랍지역 과 인도에서 들어온 여러 계통의 종족들의 정복지나 이들이 수립한 국가들의 영 토가 되었으며 그들이 머무는 기간 그들이 가진 상호 다른 문명과 예술, 종교 등 이 번성하였던 것이다. 또한 잦은 동서 왕래로 인한 경제적 번영과 문화예술의 번창 등 긍정적인 결과 도 있었으나 강대국들의 영토 확장을 위한 통로와 희생의 대상지역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아프가니스탄 고유의 민족국가 형성이 대단히 오랜 기간 지연되었던 것이다. 고대 및 중세에는 동서양을 연결하는 통로 상에 있었다는 이유로 외세의 침략 등 많은 풍파와 고난의 역사가 성립되었지만, 근대 이후에는 영국과 러시아 등 제국주의 국가들의 세력충돌의 완충지 역할도 하게 되었다. 또한 이슬람교와 소련 공산주의 세력과 충돌의 최전선이 되기도 하였으며 이슬 람교내의 시아파, 수니파 그리고 탈레반 등 각 종파간의 세력투쟁의 현장이 되기 도 하였다. 힌두쿠시등 산맥을 중심으로 한 산악지대는 대 소련 항쟁시의 무자헤딘이나 빈 라덴과 같은 알카에다 세력 그리고 패주한 탈레반과 같은 반정부, 테러집단들이 숨어들어서 은거하기가 용이한 지형적 이점을 제공하는 등 테러세력의 온상역할 을 하고 있다. 따라서 아프가니스탄 지역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의 대테러 전쟁 중심지역이 되었으며 테러와 마약 등 국제적 범죄가 끊이지 않는 등 현 지 구상에서 가장 불안하며 불행한 국가 국민이 살고 있는 나라가 되었다.
이와 같은 아프가니스탄의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고대나 근․현대를 불문 하고 종족과 종파간의 갈등과 투쟁으로 국가가 단결되지 못하고 강력한 중앙정권 이 형성되지 못하거나 설사 일시적으로 강한 지도자에 의해 중앙집권적 국가가 형성되었다 하더라도 지방 세력과 권력을 효과적으로 관리 및 통제하지 못할 때 해당지역과 국가는 제국주의와 같은 강대국의 침략과 외세의 개입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갈등과 분쟁 그리고 전쟁, 테러 등 국가적, 민족적, 대재앙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역사적 교훈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원고투고일 : ’09. 11. 10, 심사수정일 : ’09. 12. 15, 게재확정일 : ’09.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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