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미소
차일피일 미루던 야생화 도록을 정리하였다. 산행하면서 보아온 들꽃을 찍어 사진으로 저장해 왔다. 그것들을 계절별과 색깔별로 분리하여 정리했다. 색깔별로 구분하여 보니 봄엔 붉은색과 흰색의 꽃이 많았다. 보라색 들꽃은 봄보다 가을에 많았다. 보라색 봄꽃은 얼레지 제비꽃 할미꽃 등이 있다. 이름을 모르는 낯선 들꽃도 많다. 산행하다 보면 우연히 아름다운 들꽃을 볼 수 있다. 그것을 볼 때마다 꽃 이름을 부른다. 강아지가 제 이름을 부르면 꼬리 쳐 반기듯 그 꽃잎을 활짝 펴 반응한다.
혼자서 산행하다 보면 외딴 오솔길에서 마주 오는 사람을 볼 수 있다. 반가움보다 경계 의식이 앞선다. 외진 산속에서는 더욱 그렇다. 상대방도 같은 생각일지도 모른다. 여성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세상이 하도 험해서 그렇겠지, 나는 멀찌감치 마주 오는 사람과 조우 하면 옆으로 돌아서 카메라를 들이대곤 한다. 아무런 목표의 피사체도 없다. 삼각대를 세우고 카메라의 포커스를 맞추는 척한다. 마주 오는 상대에게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으로 보여 경계심을 낮게 하기 위함이다. 그냥 내 갈 길로 가면 그뿐인데 배려를 가장한 소심한 나를 내가 본다.
성재산에 올랐다. 청명한 날씨에 유혹되어 건너편 개머리산으로 들어섰다. 오르막 내리막길의 한적한 오솔길이었다. 고요 속에 풀벌레가 시절을 노래한다. 오솔길 저편에서 한 남자가 오고 있다. 그쪽도 나를 본 것 같다. 나는 옆으로 돌아서 핸드폰을 꺼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길섶 풀숲에 폰 카메라를 들이댔다. 목표도 없이 주변을 두리번댔다. 스치듯 한 눈길이 한곳에 머물렀다. 풀숲에서 움츠리고 피어난 보라색 꽃을 발견했다. 예닐곱 송이가 앙증맞고 소담하게 피어 있었다.
자세히 보아야 보인다. 낯선 그것을 눈 크게 뜨고 본다. 보랏빛이 선명했다. 꽃잎의 정교한 선은 실핏줄같이 연한 모습으로 끊어질 듯 이어간다. 약한 듯 강한 자태로 입술 속에 꽃술을 물었다, 갖출 것 다 갖추고 야무지게 도드라져 피어났다. 그래 너도 꽃이지 아름다운 꽃이고말고, 사진을 찍으려 꽃에 덮인 마른 검부러기 한 닢을 걷어냈다. 짝지어 숨어있던 송장 메뚜기 한 쌍이 놀라서 슬금슬금 피해 나갔다. 사진을 찍어 꽃 이름을 검색하였다. 그리고 그 꽃에 대한 정보를 읽었다. 몇 번을 더 촬영하고 허리를 세웠다. 그사이 마주 오던 사람이 등 뒤까지 왔다. 그는 지나치지 않고 촬영하는 꽃을 보며 무슨 꽃이냐고 물었다. 돌아다보니 작은 배낭을 멘 중년의 남자가 서 있었다.
조금 전 검색으로 알게 된 내용을 이미 알고 있는 척 설명했다. ‘꽃 이름은 자주쓴풀입니다. 두해살이 풀로 맛이 몹시 쓰고 자주색이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자주쓴풀은 용담과 쓴풀 속으로 어담초 라고도 합니다. 한방에서 소화 불량이나 치통을 치료하는 데 쓰이고 간을 보호하는 효과도 있답니다. 잎은 바소꼴로 마주나고 양 끝이 날카로우며 좁습니다. 꽃은 이맘때 자주색으로 피며 원추꼴 꽃차례에 달리고 위에서부터 꽃이 핍니다. 꽃받침조각은 다섯 개이며, 꽃잎에는 짙은 자주색 줄이 있고 꽃말은 지각(知覺)'입니다’.
그리고 옮기면 바로 죽는 게 이 꽃의 특징이라고 부연 했다.
초가을의 야생화는 유난히 보라색이 많다. 금창초, 용담, 꿀풀, 꽃향유, 엉겅퀴, 개미취, 쑥부쟁이, 맥문동 등. 보라색은 빨강과 파란색의 중간색으로 우아하면서 신비로움을 자아내는 색깔이다. 그래서 좀 까다로운 색이지만 자칫하면 천박해 보이는 색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가을 야생화의 보라색은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 없다. 문헌에 보면 모든 야생화의 꽃 중에 보랏빛 꽃은 약 7%에 불과 하단다. 가을 야생화에 보라색이 많은 이유는 뭘까? 가을은 곤충의 활동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벌을 끌어들이려는 것이라고 했다.
산속에서 낯선 이와 우연히 마주치는 바람에 자주쓴풀을 만났다. 들꽃 도록을 정리하며 그것을 추가하였다. 요즘 보라색 꽃은 다른 계절의 꽃보다 아름답다. 화려하고 큼직한 꽃은 아니나 여름의 끝자락에서 보랏빛 입술을 보여주고 있다. 가을꽃들은 넉넉한 시간이 없다. 얼마 후 찬 서리 맞으며 흔적을 지울 것이다. 아슴푸레한 눈이 파란 하늘에 머문다.--
*바소꼴: 잎이나 꽃 따위의 모양을 나타내는 말
*꽃차례: 줄기나 가지에 꽃이 달리는 모양
첫댓글
동서양 황제들의 상징 -
로마 제국 황제의 보라색은 절대 권력의 색이고 중국 자금성의 주인공 역시 그랬지요.
반면 다소 음침하고 암울한 색이기도 합니다.
백석의「여승」이나 황순원의「소나기」에서 죽음을 암시하는 보라색 도라지 꽃,
한편bts팀의 상징인 보라색, 데뷔 기념 때 곳곳의 명소가 보라색 일색이었지요.
하여튼 심란한 색 입니다.
재미 있으면서도 유익한 글입니다.
눈 앞에서 보는 듯 현장이 잘 그려져 있네요.
아는 척 설명하는 부분이 능청스러워 재미있으면서도 알리고자 하는 정보를 전달하고 있어서 무릎을 탁 쳤습니다.
자주색을 카바하기 힘든색이라고들 하지요. 글이 재미있어 철수하지 않아도 되겠어요.해랑님 이셨군요. '쓴풀 속'>'쓴풀속'이 아닐까요?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