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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회]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팽가는 제자리를 찾았다. 그날의 일을 철저히 함구한 채 팽가는 문을 걸어 잠갔다. 어떤 외부인의 방문도 받아들이지 않고 문을 잠근 팽가.
강호에서는 그것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지만 팽가에서는 일절 반응이 없었다. 여하튼, 조용하던 강호에 여러 가지 이야깃거리를 제공한 팽가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소문이 강호를 강타했다.
무림맹의 문상인 제갈문의 외동딸인 제갈우희가 한 야산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것이다.
제갈우희 옆에는 철장우의 시신이 같이 발견되었는데, 제갈우희의 시신은 비교적 깨끗한 데 비해 철장우의 시신은 참혹하기 그지없어 보는 이들의 가슴을 울렁이게 했다.
이 사건에 무림맹에서는 즉각 조사단을 파견해 철저히 조사토록 지시했다.
또한 인근의 문파들에게 혐의가 돌아가, 제갈우희의 시신이 발견된 야산 근쳐의 문파주인들은 한동안 곤욕을 치러야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특별한 혐의점이 나오지 않자 사건은 유야무야 넘어가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은 곧 닥쳐올 거대한 풍운의 시작이었다.
무림팽의 자소청
자소청은 무림맹의 문사인 제갈문의 처소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익히 아는 사실이다. 평소 많은 사람들이 업무 때문에 드나드는 곳이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는 개미새끼 하나 지나가는 소리 들리지 않을 만큼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이곳의 주인인 제갈문이 외인의 출입을 엄금시켰기 때문이다.
제갈문의 거처에서는 지금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소리는 너무 미약하면서도 자소청 밖으로 세어나가지는 않았다.
그곳에는 그가 있었다.
"신...황! 이 죽일....놈. 감히.....감히 그 아이를....감히! 끄으으~!"
제갈문이었다.
제갈문은 예전 제갈우희의 침상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그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최대한 이를 악물고 오열을 참았다. 그래도 눈물이 끊이지 않고 흘렀다.
외동딸이다. 가문을 이끌어갈 자손들은 많지만 자신의 자식은 오직 제갈우희 하나였다. 재기발랄하고 머리가 똑똑해 은연중 무림맹의 문사자리를 물려주려고까지 생각했다.
그렇게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은 딸이었다. 그런데 그런 딸이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왔다.
누가 이랬는지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신황, 오직 그 하나밖에 없었다. 그리고 팽가였다. 팽가에 간 자신의 딸이 이렇게 된 것은 팽가의 책임이었다.
"죽일 테다. 천 갈래 만 갈래 찍어 죽일 테다.
그래서 머리는 태산에 버리고 몸통은 개의 먹이로 주고 팔 다리는 바닥에 버릴테다. 그래서 영원히 윤회의 굴레를 벗어니지 못하도록 할 테다. 신황!"
그의 눈에서는 붉은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제까지 냉철한 이성과 철저한 계산에 의해서만 세상을 살아가던 그의 껍질이 송두리째 벗겨지고, 대신 그의 내면에 숨어있던 광기가 드러나고 있었다.
"뿌드득! 신........황"
무림맹에서는 이 일을 공식적으로 처리하지 못한다. 만약 그랫다가는 그들이 팽가에 한 일이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때문에 당분간은 그들을 건드릴 수 없다. 그것은 제갈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이대로 가만히 그냥 두고 볼 생각 따위는 없었다.
"기필코......기필코 널 죽이고 말테다."
제갈문의 나직한 독백이 스산하게 자소청에 울려 퍼졌다.
팽가가 대외적인 활동을 완전히 멈춘 지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팽가는 내부의 정비를 거의 끝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세대교체를 이룰 수 있었다.
팽가의 금지, 지금은 금지란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지만 아직도 이곳이 팽가의 가주인 팽만우의 치료를 하기 위해 이용되고 있었다.
이곳만큼 한적하고 조용한 곳이 팽가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초관염과 서문령 등은 금지에서 떠나지 않고 팽만우를 간호하고 치료했다.
오늘 따라 금지에는 유독 긴장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특히 초관염의 거처에서 말이다.
팽만우의 거처에는 지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눈은 모두 침상에 누워있는 팽만우에게 집중 돼 있었다.
초관염은 긴장된 눈으로 팽만우를 보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눈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 미세한 은침이 들려 있었고, 그것은 팽만우의 백회혈에 꽂혀있었다.
"휴~~!"
초관염은 미세하게 떨리는 손을 거두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팽만우의 몸에는 눈에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은침이 빽빽하게 꽂혀있었다. 그것은 모두 초관염이 비전의 침술을 팽만우의 몸에 펼친 흔적이었다.
그는 지금 마지막 침을 꽃은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어찌 되었습니까?"
초관염의 등 뒤에서 팽가 식구의 초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조금만 기다려 보게나. 이제 팽가주의 심장에 서식하던 흉측한 녀석이 나올 때가 됐네. 그동안 빙한선태로 꾸준히 자극을 했기에 녀석도 이제 견딜 수 없을 것이네."
그동안 초관염은 신황이 준 빙한선태로 혈영충을 끊임없이 자극했다.
원래 양(陽)의 기운을 좋아하는 녀석이 계속해서 음(陰)의 기운만 주입되다 보니 최근엔 활력을 거의 잃었다.
때문에 초관염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비전의 침술을 펼쳤다. 그는 지금 팽만우의 심장으로 통하는 혈류를 차단하고 혈영충이 지쳐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올게야! 이제까지 제대로 된 영양분을 섭취하지 못했어. 거기에다 녀석이 숨어있는 곳으로 가는 혈류를 다른 곳으로 돌려놨으니 분명히 나올게야."
초관염은 확신에 찬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너무나 확고한 그의 태도에 팽가의 식구들은 더 이상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단지 초조한 모습으로 팽만우의 모습을 지켜봤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가?
꿀꺽~
갑자기 누군가의 목에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꿈틀~~
갑자기 팽만우의 심장부분이 꿈틀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심장의 표면에서 시작된 움직임은 조금씩 팽만우의 어깨 부위로 옮겨갓다.
초관염은 그 모습을 신중히 지켜보다 또 다른 은침을 꺼내 팽만우의 어때 한쪽에 꽂았다. 그곳은 바로 꿈틀거림이 옮겨가는 궤도였고 그로 인해 요상한 움직임은 방향을 바꿔야 했다.
그렇게 초관염은 은침을 이용해 혈영충의 움직음을 유도해갔다.
"아~~~!"
그 모습을 팽가의 식구들은 초조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점점 혈영충이 팽만우의 목 부위로 움직였다. 그에 따라 그것을 바라보며 유도하는 초관염의 집중력도 더욱 예리해졌다.
"끄으으~~!"
갑자기 팽만우의 입에서 떡이 막힌 듯한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의 목에서는 혈영충이 크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 노~~옴!"
순간 초관염이 대갈을 하며 은침을 팽만우의 목에 꽂았다.
푸~~욱!
거의 어른 검지만큼이나 깊숙이 파고 들어가는 은침.
투~~웅!
갑자기 팽만우의 몸이 크게 요동쳤다가 격렬한 기침을 토해져나왔다.
"크헤엑! 커허헉!"
한 사발은 될 듯한 선지와 함께 꿈틀거리는 어린아이 주먹만한 벌레가 뛰어나왔다. 그것은 바닥에 떨어져 팽만우가 토해낸 핏물 속에서 꿈틀거렸다.
마치 애벌레 같은 몸통이 기이하게 생긴 촉수가 온몸에 나있는 징그러운 모습. 이것이 바로 이제까지 팽만우의 심장에서 기거하며 양분을 끌어 모아 덩치를 불려온 혈영충이었다.
"저것이.....?"
"이것이 그 혈영충이란 말인가?"
여기저기서 탄식 섞인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초관염은 그에 아랑곳 하지 않고 품에서 기다란 장침을 꺼내 혈영충에 꽂았다.
키에엑!
그러자 도저히 저 조그만 몸집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귀를 찌르는 소리가 혈영충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 기괴한 소리에 장내에 있던 사람들의 눈썹이 한껏 찌푸려졌다. 그러나 초관염은 담담하게 혈영충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요사한 놈. 끝까지 사람을 홀리려 하다니."
치직!
키에에엑~~!
그는 가차 없이 장침에 꽂힌 혈영충을 근처에 있는 초불에 갔다 대었다.
그러자 살이 타는 소리와 함께 혈영충이 불에 타기 시작했다.
초관염은 그 광경을 보며 말문을 열었다.
"이 녀석의 울음소리에는 사람의 심령을 흔들리게 하는 힘이 있다고 전해지네.
물론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무공을 익혔기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지만, 일반 백성들이라면 이지를 잃을 수도 있을 정도네.
때문에 이런 요사한 녀석은 그냥 불에 태워 죽이는게 제일 좋네."
그는 혈영충이 완전히 연소 돼 재가 될 때까지 그렇게 촛불에 태웠다.
"이제 가주께서 일어나실 수 있는 겁니까?"
그 모습을 이제까지 조용히 지켜보던 서문령이 초관염에게 조용히 물었다.
"이제 조만간 일어나실 수 있을 겁니다. 워낙 내공이 심후하신 분이라 심장에 혈영충이 제거된 이상 곧 의식을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초관염은 빙긋이 웃으며 팽만우의 전신에 꽂아 놓았던 은침을 하나씩 뽑기 시작했다.
"으...음!"
그가 마침내 은침을 모두 거둬들였을 때 팽만우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모습에 사람들의 눈이 크게 떠졌다. 하지만 그 누구의 입에서도 숨소리 하나 새어나오지 않았다.
"물....물 좀 주겠소?"
마침내 팽만우의 입에서 처음으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게 도대체 얼마 만에 들어보는 가주의 목소리인지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오랜만에 들어보는 목소리였다.
"정신이 드십니까?"
"휴~! 내 저놈의 혈...영충인가 하는 괴물 때문에 여력이 없어서 그렇지 정신은 비교적 멀쩡 했었소이다. 지금 갈증이 심하니 일단 물 좀 주시겠소."
비록 기력이 없는 목소리였지만 팽만우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또렷했다.
"여...보!"
그 모습을 보는 서문령의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떨려 나왔다. 그녀의 눈가에는 눈물방울이 살짝 맺혀 있었다.
팽만우는 그런 그녀를 보며 흐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이어 초관염이 먹여주는 물을 무척이나 달게 마셨다.
그렇게 물을 마시고 난 후에야 그는 어느 정도 기력을 찾는 듯했다.
"고생하셨습니다. 가주님!"
"기력을 되찾으신 것을 경하 드립니다. 가주님!"
이제까지 조용히 서문령의 뒤에 서있던 팽가의 식구들이 무릎을 꿇으며 가주의 완쾌를 축하했다.
"나 좀 일으켜 주시오. 부인!"
"아직 더 누워 계십시오. 이제 일어나셨습니다."
"아니오 부인! 내가 불민해 당신과 주형이 가문을 위험에 빠트리게 했구려. 어서 나 좀 일으켜 주구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었다. 서문령은 팽만우의 몸을 부축해 침상에 기대게 했다.
초관염은 그런 팽만우를 보며 말했다.
"그럼 혈영충에 몸을 잠식당하면서도 정신이 온전하게 유지되신 것입니까?"
"아니외다 온전하지는 않지만 가끔가다 의식을 되찾을 때가 있소이다. 그때만 정신이 또렷하게 돌아와 주위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소.
하지만 일단 입을 열게 되면 내공으로 억누르던 혈영충의 움직임을 놓치게 될까 봐 어찌 해볼 도리가 없었을 뿐이오."
"그랬군요. 이제 정신을 차렸으니 한고비 넘겼습니다. 전 밖에 나가 가주께서 원기를 회복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약을 달이겠습니다.
가모님을 제외한 다른 분들도 모두 밖으로 나가시지요. 일단은 두 분만 계시는 게 회복하는데 더욱 도움이 될 겁니다."
초관염의 말에 팽가의 식구들이 아쉬운 얼굴을 햇지만 가주가 회복한다는 데야 도리가 없었다. 그들은 모두 순순히 초관염을 따라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모두가 밖으로 나가 후 방안에는 오직 팽만우와 서문령만이 남겨졌다.
팽만우는 한동안 숨을 고르다 서문령에게 말을 건넸다.
"그동안 고생하시었소. 그동안 있었던 일을 내게 말 좀 해주겠소?
내 간간히 정신이 들 때마다 가문이 돌아가는 것을 들어 어느 정도 윤곽은 짐작하고 있으나 그래도 부인의 입으로 자세히 듣고 싶소."
그의 말에 서문령은 못 말리겠다는 얼굴을 했다.
이 탐스런 은발(銀髮), 은미(銀眉), 은염(銀髥)의 노인은 이제까지 정신을 잃고 있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정열적이면서 강직한 성격을 지녔다.
새삼 그런 노인하고 대부분의 생을 같이 해온 자신이 대견할 정도로 그녀의 남편은 남들이 보기에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대쪽 같으면서도 강퍅한 성격을 지녔다.
아마 서문령이 무어라 말해도 팽만우는 기어이 이제까지 있었던 일을 듣고 말 것이다. 때문에 서문령은 한숨을 내쉬며 이제까지 가문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야기가 계속 될수록 팽만우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자신이 간간히 듣던 이야기하고 실제 이야기는 많은 부분이 달랐기 때문이다.
"휴~! 그럼 만유하고 만력이 모두 죽었다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 당신과 저는 이렇게 살아서 만나지 못했을 겁니다."
"그래! 그렇겠지. 하지만 팽가의 일에 외인이 개입을 하다니."
"여보!"
그의 말에서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은 서문령이 다급히 팽만우를 불렀다.
그러나 팽만우의 눈빛은 이미 차갑게 가라앉은 상태였다. 그런 팽만우의 모습을 보며 서문령이 탄식을 터트렸다.
'아...아! 이이가'
그녀는 깜빡 잊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인 팽만우가 얼마나 팽가라는 가문 자체에 집착이 심한지, 또한 팽가의 일에 외인이 간섭을 하는 것을 지독하게 싫어하는지.
그리고 그의 자존심이 얼마나 지독할 만큼 강한지 말이다.
지금 팽만우는 팽만력이나 팽만유가 자신을 죽이려 한 것과 팽가를 차지하기 위해 음모를 꾸민 것보다 그들이 외인에 의해서 죽은 것에 더욱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극단적이리만큼 팽가 위주로 돌아가는 사고방식 때문이었다. 하긴 그런 성격 때문에 가문의 명성에 누가 된다고 하나뿐인 딸을 내칠 수 있었을 것이다.
"여보! 이러실 때가 이니예요. 일단 쉬시면서 가문을 어떻게 해야 더욱 튼튼하게 할 수 있는지 구상하세요."
서문령은 그의 주위를 돌리기 위해 말을 건넸다. 하지만 그럼에도 팽만우의 표정엔 별 변화가 없었다.
팽만우는 한참을 그렇게 무심한 표정으로 있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참! 하...연이의 아...이가 이곳으로 돌아왔다고 했소?"
최대한 자제를 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울림이 담겨 있었다.
그의 인생에 있어 가장 심각한 오점이면서 마음에 지독한 상처를 남긴 일이 바로 그의 딸 팽하연에 관한 일이었다.
격에 맞지 않는 남자를 끌고 와 가문의 명예에 먹칠을 한 딸. 누구보다 깊은 사랑을 준만큼 그에 대한 배신감도 컸다.
그리고 딸이 무공이 전폐된 채 가문에서 쫓겨 나간 후 그는 지독한 자기 혐오감과 딸에 대한 원망으로 며칠 밤을 지새웠다
때문에 그가 팽하연에게 느끼는 감정은 무척이나 복합적이었다.
"하...연이는 죽고 그 아이의 딸만이 돌.....아왔다 했소?"
"휴~! 그래요. 하연이와 백서방은 불의의 사고로 죽었고 그 딸아이는 백서방의 의형에 의해서 이곳으로 돌아왔어요."
"그 의형이란 사람이 바로 만유와 만력이를 죽인 사람이기도 하고?"
"그래요!"
서문령의 말에 팽만우의 얼굴 표정이 더욱 복잡해졌다.
우는 것 같기도 하고 웃는 것 같기도 한 묘한 표정이 그의 복잡한 심사를 그대로 대변해주는 듯했다.
"여...보?"
"잠시.....잠시만 이대로 있게 해주시오. 내.....가 머릿속이 무척 복잡하다오."
"................."
갈등하는 그의 모습에 서문령은 서글픈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벌컥!
그때 문이 열렸다
팽만우와 서문령의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얘....야!"
서문령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그런 말이 나왔다.
문을 열고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는 아이, 바로 무이였다. 그리고 무이의 뒤에는 신황이 서있었다.
"........네가?"
팽만우의 시선이 무이에게 향했다. 그리고 이어 신황의 얼굴로 향했다.
그의 눈에 무심한 신황의 눈이 들어왔다.
팽만우의 얼굴에는 여러 가지 복잡 미묘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얼굴을 붉히면서 신황의 다리를 붙잡고 있는 무이의 얼굴이 그의 망막을 가득 채웠다.
‘하......연아!’
하마터면 그 말이 입 밖으로 새어 나올 뻔 했다. 그만큼 무이의 얼굴에는 팽만우 자신이 밖으로 쫓아낸 팽하연의 얼굴이 그대로 들어있었다.
두~~근!
얼마 전까지 심장에 기생하고 있던 혈영충이 다시 심장에서 꿈틀거리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그의 심장을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
자신의 손으로 내쫓고 얼마나 허탈해했던가?하지만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그는 빈손으로 쫓겨난 딸에게 어떤 도움도 줄 수 없었다.
그때는 그것이 최선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솔찍히 그 자신도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복잡한 눈으로 무이를 바라보던 팽만우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신황의 얼굴에 시선이 가면서 부터이다.
“자네가 나 대신 내 가문의 일을 정리해주었다고 했는가?”
결코 곱지 않은 말투였다.
가문에 대한 애착이 누구보다 강한 팽만우였다.
그는 비록 패륜을 저지른 이복동생들이지만, 그에 대한 처리는 오직 가문의 주인인 자신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순간 서문령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갔고, 신왕의 눈빛은 착 가라앉았다.
신황은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게 중요한 것입니까? 처음으로 만난 손녀를 다독여 주는 것보다.....”
꾸욱!
신황의 검지를 잡은 무이의 손가락에 더욱 강한 힘이 느껴졌다.
밑을 보니 무이가 불안한 얼굴로 신황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신황의 표정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것은 그가 그만큼 단단히 화가 났다는 의미였다.
팽만우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나에게는 가문의 일이 세상의 그 어떤 일보다 더 중요하다네. 천년을 이어온 가업을 무사히 후대에 물려줄 책임이 있으니까.”
“그것이 친 혈육 보다 더 중요합니까?”
“하연이는 가문의 명예에 먹칠을 한 아이였어. 그 당시 난 눈물을 머금고 그런 결정을 내렸지.
그리고 앞으로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난 또다시 그렇게 할 꺼야. 그것이 이 커다란 가문을 이끌어가는 나의 입장이다.
그것은 십 년이 지나고 백 년이 지나도 절대 변할 수 없는 일이야.”
팽만우의 눈이 고집스럽게 빛났다.
아마 그를 표현하는 단어를 딱 하나 고르라고 한다면 ‘완고’라는 말일 것이다.
신황은 그런 팽만우를 차갑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팽가는 이번 일은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시끄러워 질 것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신황의 입술은 고집스럽게 다물어졌다. 하지만 그의 의지만큼은 확실하게 팽만우에게 전달되었다.
신황을 보며 팽만우가 힘들게 입을 열었다.
“지금 나...를, 이 팽...가의 주인인 나를 협박하는 것인가? 지금....이 나를!”
“여보, 진정하세요”
“네가 감히 팽가에서 살인을 저지르고....나를 협박해?”
서문령이 말렸지만, 팽만우의 눈에 피어나기 시작한 노화는 결코 사그라질 줄 몰랐다.
비록 자신을 암습하고 가문을 차지하기 위해 패륜을 저질렀지만 그래도 자신의 동생이며 가문의 일원이다. 때문에 그들을 처리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다.
그런데 낮선 이방인이 자신의 동생을 처리하고 가문을 원상 복귀시켰다는 것이 그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남이 했다는 것이, 그것도 자신이 버린 딸의 아이를 데려온 보호자가 그 주인공이라는 것이 그의 가슴을 울리게 만들고 있었다.
노기를 터뜨리는 팽만우를 보면서도 신황의 표정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그것이 팽만우의 분통을 더욱 터트리게 만들고 있었다.
그 순간 신황이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에게 인사드리거라.”
무이를 보고 하는 말이다.
불같이 화를 내는 할아버지가 무서워 신황의 다리 뒤에 숨어있던 무이는 신황의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신황을 올려다봤다.
그러자 신황이 무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을 이었다.
“괜찮다. 인사를 하거라. 네 할아버지다.”
“하지만......”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해야지”
“.............”
끝가지 무이가 망설이자 신황이 팽만우를 보며 입을 열었다.
“우선 손녀와의 해후를 즐기십시오. 두 번 다시 제수씨의 경우와 같은 후회를 하고 싶지 않다면 말입니다.
만약 여기에서 무이를 받아주지 않는다면 무이는 내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이것이 가주님의 과오를 바로잡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네.....가?”
팽만우의 목소리와 은염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나 신황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만약 내가 마음에 안 든다면 그래서 무이를 못 받아주겠다면 그 아집, 가만히 두지 않을 겁니다. 천년을 이어온 팽가의 자존심 따위, 지나가던 개에게나 던져 주십시오.
남들의 시선이 두려워 자신의 식솔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인물이 어떻게 천년을 이어온 가문을 이어간다는 말을 합니까?
이따위 쓸모도 없이 덩치만 커다랗게 키운 가문 따위에 연연하는 노인장 때문에 노인장의 혈육들이 고통을 받습니다.”
신황의 눈에 한줄기 염화가 피어올랐다.
아마 신황의 일생에 있어 오늘같이 말을 많이 한 경우는 없을 것이다. 그는 정말로 필요한 말만 하며 살아왔으니까. 그런 그가 이렇게 열변을 토해내고 있다.
그것은 그만큼 그가 팽만우라는 고집스러운 노인에게 단단히 화가 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무공을 내세울 수 없는 상황이란 것이 그의 화를 더욱 증폭시켰다.
자신의 친 혈육보다 가문 자체에 연연하는 고집불통 노인의 모습은 융통성이라고는 전혀 없이 앞뒤가 꽉 막혀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숨통을 콱콱 조여 왔다.
이 질식할 것 같은 답답한 기운의 중심이 바로 팽만우다 한편 신황의 이야기를 듣던 팽만우의 눈에는 노화가 치솟아 올랐다.
“네가 나에 대해 무얼 안다고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냐? 천년을 이어온 가문.........”
“그따위 천년을 이어온 가문, 가주는 제대로 건사하지 못해 이복동생들한테 배신을 당하고 그 아버지는 여색을 탐해서 스스로 분란의 불씨를 만들고
이런 가문이 앞으로 천년을 더 이어가봤자 뭐에 쓸 것입니까? 가문의 외형을 키우는 것에 신경 쓰지 말고 노인장의 혈육과 가문의 사람들이나 따뜻한 마음으로 돌보십시오.”
“이.........이익!”
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신랄한 독설에 팽만우는 그만 할말을 잃고 말았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고 가슴을 후벼 파는 말이었다. 가슴이 아프지만 신황의 말은 사실이다.
뭐라 반박하고 싶어도 그렇은 절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때문에 뭐라 말을 하고 싶은데 떠오르는 말이 없다. 그래서 더욱 화가 났다.
“만약 그래도 인정을 못하겠다면 몸이 다 회복한 후 내가 상대해드리겠습니다. 그때 모든 것을 정리하지요. 남자 대 남자로 말입니다.”
“으음!”
신황의 말에 결국 팽만우는 입술을 질근 깨물고 말았다.
서문령은 살며시 팽만우의 손을 잡앗다.
이제까지 강한 모습만 보여 왔던 팽만우가 이렇게 당혹해하는 모습을 그녀가 언제 보았을가?
평생을 완고한 고집과 가문이란 존재의 절대군주로써 군림하던 그에게 누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을까?
생전 처음 당하는 상황에 당황하는 남편의 모습에 문득 안쓰러운 생각이 드는 것이다.
“오.....냐! 내 몸이 다 나으면 그때 보자. 그때도 내가 광오한 말을 할 수 있는지 두고 보겠다.”
“기다리겠습니다.”
신황의 눈은 다시 무심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이어 무이를 보며 말했다.
“보다시피 나 때문에 너의 할아버지가 무척이나 화가 나셨다. 네가 위로를 해드리거라.”
“백부님?”
신황은 무릎을 꿇으며 무이의 눈에 시선을 맞췄다. 그는 무이의 머리를 만져주며 말을 이었다.
“너의 완고한 할아버지는 무척이나 자존심이 강한데 지금 백부 때문에 무척 화가 나 있다. 아마 울화를 잘 삭히지 않는다면 더 큰 병을 얻을지도 모른단다. 그러니 네가 위로 해 드리거라.”
“백....부님!”
무이는 무어라 말을 하려 했지만 신황의 눈 속에 숨겨진 한 가닥 따뜻한 기운을 느끼고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신황의 손에 떠밀린 무이는 한발씩 조심스럽게 팽만우와 서문령에게 다가갔다.
신황은 그런 무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악역은 나의 역할이다. 저 완고한 노인네의 분노는 모두 내가 떠안으마. 넌 이곳에서 밝은 모습으로 살거라’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조용히 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갔다.
분노로 가득 차 있던 팽만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에게 다가오는 무이의 모습 때문이다.
조금 전까지 그의 얼굴은 그야말로 흉악할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으나 다가오는 무이의 모습에 조금씩 풀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전혀 그런 사실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서문령이 무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가야! 이리 오너라.”
그녀의 말에 무이가 용기를 얻었는지 서문령에게 다가왔다. 서문령은 그런 무이를 뒤에서 안아주며 팽만우에게 보였다. 이어 그녀는 팽만우에게 말했다.
“이 아이가 바로 하연이의 딸입니다. 하연이는 비록 저세상으로 갔지만 이렇게 자신과 백서방을 꼭 닮은 아이를 세상에 남겼습니다. 무이야!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들이거라.”
서문령의 따뜻한 말에 용기를 얻었는지 무이가 조심스럽게 팽만우를 향해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할......아버지!”
꾸벅 허리를 숙여 보이는 무이, 그런 무이를 바라보는 팽만우의 얼굴에 자신도 모르게 뿌연 습막이 차올랐다.
‘하...하연아!’
“백.....무이라고 합니다.”
“무...이?”
팽만우의 목소리가 절러 떨려 나왔다.
무이는 그런 팽만우의 기색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 아프신데 시끄럽게 해드려서........”
“할아비가 안아 봐도 되....겠느냐? 무....이야.”
“네?”
순간적으로 무이가 말귀를 못 알아듣고 반문을 했다. 그리고 그 순간 무이는 볼수 있었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따스한 품을.
꼬~~옥!
팽만우는 두 팔을 벌려 무이를 안았다.
‘하연아~~!’
가슴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감촉. 예전 그의 딸을 안아주었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 아장거리면서 아빠라고 부르던 딸.
그런 딸에게 모든 애정을 쏟아 부었던 자신, 그렇게 모든 애정을 주고 키운 딸이 어느 날 근본을 알 수 없는 떠돌이를 데리고 와 혼인할 것이라 말했다.
단호히 안 된다고 했던 자신과 그런 자신에게 난생 처음 반항했던 딸. 그런 딸을 자신의 손으로 무공을 전폐하고 험한 세상으로 내쳤다.
팽만우의 뇌리에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 과거들.
뚝 뚝!
무이는 어깨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감촉에 고개를 들어 팽만우의 얼굴을 봤다.
“할...아버지?”
무이는 어깨위로 떨어지는 뜨거운 액체는 바로 팽만우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이었다. 철혈도제(鐵血刀帝)라고 불리는 팽만우가 가주의 위를 승계한 후 최초로 흘리는 눈물이었다.
“흐...흑! 미안하다. 하...연아. 애비가 널 모질게 세상에 내보내 그렇게 죽게 만들었구나.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어허헝!”
팽만우의 눈에서는 눈물이 끊임없이 쏟아져 내렸다. 마치 둑 터진 물결처럼 그의 눈물은 그렇게 멈추지 않고 솓아졌다.
이제야 회한이 들었다. 품속에 느껴지는 무이가 마치 예전에 그가 안아주었던 팽하연처럼 느껴졌다.
그 어리고 곱던 딸아이가 세상의 풍파에 시달리다 쓸쓸히 세상을 떠나고 자신을 꼭 닮은 아이를 세상에 남겨두었다.
그것이 그의 가슴을 메어지게 만들었다.그때 팽만우의 눈을 만지는 손이 있었다.
“할...할아버지! 울지 마세요”
무이었다. 무이가 울먹이며 자신의 소매로 팽만우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고 있는 것이다.
근엄하기만 할 것 같은 할아버지가 눈물을 흘리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따라 흘러 내렸다.
“나.......알 용서해 주.......는 것이냐?”
“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른 채 무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이는 생전처음 말을 나누는 할아버지가 왠지 불쌍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그래야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고맙구나! 정말 고마워! 이제야 내가 이 무거운 돌댕이를 내려 놓겠구나.”
팽만우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지금 그의 눈에는 팽하연과 무이의 모습이 같이 겹쳐 보이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팽만우는 그렇게 마음을 열고 있었다.
서문량은 그런 팽만우와 무이의 모습을 보며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찍었다.
이제야 모든게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팽하연이 쫓겨나기 전의 시간으로 말이다.
한참을 그렇게 흐느끼던 팽만우가 곧 자신을 수습하고 일어났다.
“미안하오! 내 안 좋은 모습을 보였구려.”
그의 얼굴에는 겸연쩍은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한방탕 울음을 터트리고 났더니 속은 후련해졌지만 반대로 아내를 보기가 쑥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서문령은 고개를 저으며 다정한 웃음을 지었다.
“아닙니다. 보기 좋았습니다.”
“휴~! 내 이런 날이 있을 줄은 예전에는 미처 상상을 하지 못했는데, 할아비가 무이 앞에서 못난 꼴을 보였구나.”
팽만우의 말에 무이 역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예요.”
“이제부터 할미랑 할아비랑 오래오래 같이 살자꾸나. 내 너만은 정말 자유롭게 키울 것이다.”
팽만우는 무이의 조그만 두 손을 흔들어주고 일어났다.
그는 잠시 무언가 생각을 하는 듯하다 서문령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와는 별도로 무이 백부와의 비무에는 최선을 다할 것이오.
그가 우리 가문에 해준 일은 고마운 일이나 나도 체면이 있으니까. 하지만 결과가 어찌 나오든 그와의 모든 은원은 비무로 끝을 내겠소.”
“그러세요 하지만, 아직 당신의 몸 상태로는 무리예요. 그는 무척 강한 사람입니다.”
서문령의 말이 팽만우의 자존심을 자극했을까? 팽만우는 오연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이번만은 나도 양보할 수 없소. 나도 오기가 있는 사람이오.”
순간 무이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어렸다.
분명 자신의 백부와 싸우겠다고 하는 말이지만 왠지 걱정이 되지 않았다.
조금 전과는 말투에서 느껴지는 느낌이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조심하셔야 해요. 백부님은 세상에서 제일 강하시거든요.”
“허허허~! 그렇느냐? 하지만 이 할아비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강호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만큼 강하단 소리를 듣는단다.”
팽만우가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그리 말했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그의 눈은 어떤 전의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내 손녀와 아내 앞에서 망신을 당할 수는 없다. 내 기필코 몸을 완전히 회복해 신왕이란 자를 따끔하게 혼내리라.’
비록 나이가 들었지만 수십 년 동안 대쪽같이 지켜온 자존심을 꺾일 수는 없었다. 또한 무이의 일과는 별도로 그는 아직 신황에 대한 화가 아직 풀리지 않았다.
일단 싸우면 이겨야 한다. 그래서 용서를 취하는 형식이 모양세가 좋다. 그것이 팽만우의 자존심이었다.
신황은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수림 속에서 지냈다. 가끔가다 초풍과 무이만이 놀러 와서 말벗을 해주었을 뿐 그를 찾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때문에 그는 한가하게 자신의 무공을 다듬을 수 있었다.
그렇게 신황이 수림 속에서 두문불출할 때 팽만우 역시 자신의 몸을 회복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그는 우선 자신의 몸 상태부터 최상으로 돌려놓기 위해 수련실로 들어갔다.
이제까지 움직임이 전혀 없어 볼품없이 말라 비틀어진 근육과 탁기에 막힌 혈도를 원상태로 돌리는 것이 중요했다.
대룩십강 중의 일인이라는 팽만우는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자신의 몸을 원상태로 만들어갔다. 하루가 다르게 몸을 만들어가는 그의 집념에 팽가의 식구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팽만우는 자신의 몸을 만드는 데는 무척이나 혹독하게 굴었다.
하지만 오직 단 하나, 무이에게만큼은 마치 봄날의 햇살마냥 훈훈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워낙 팽하연에게 모질게 굴었던 것이 일생의 한으로 남아있기에 그는 그동안 팽하연에게 모질게 굴었던 것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듯이 무이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베풀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여전히 대쪽같으면도 카랑카랑한 모습을 보여주는 팽만우가 오직 무이에게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니
이제는 팽가의 다른 식구들이 무슨 일을 보고하러 그에게 갈라치면 항상 무이를 찾는 게 일이 되고 말았다. 무이와 함께 가면 어떤 일이든 두루뭉술하게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를 보고 유별나다고 타박하는 서문령에게 팽만우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무이를 타박하는 놈이 있으면 가문에서 쫓아낼 테니 그리 알라고 하게. 무이의 눈에서 눈물 흘리게 만드는 놈은 내 세상에 태어난 것을 후회하게 만들 거야.”
그것은 지상명령이었다. 최소한 팽가에서 만큼은 말이다
그렇게 무이는 새로운 식구를 얻었다. 비록 생부, 생모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자신을 아껴주고 사랑해주는 식구를 얻은 것이다.
시간이 흘렀다
마치 팽가에 있었던 혈사(血事)가 이득한 예전의 일이라는 생각이 들만큼 많으 시간이 들렀다. 그동안 팽가는 이전의 팽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팽가로 거듭났다.
우선 가문의 장로들 대부분이 일선에서 물러서고 그 후계자들이 전면에 나섰으며 조직 또한 새롭게 정비된 것이다.
또한 가주인 팽만우 역시 가문의 일에서는 거의 손을 떼고 모든 전권을 팽주형에게 물려줬다. 그리고 그 자신은 오직 무공을 회복하는 데만 신경을 썼다.
팽주형은 이제는 금지에서 화선거(樺仙居)로 이름이 바뀐 팽만우의 처소에 들어왔다.
이제 가문의 정비도 어느 정도 끝났기에 약간의 시간이 났다. 때문에 무척이나 오랜만에 이곳을 찾은 것이다
화선거로 들어서는 그의 눈에 꼬마 여자아이와 그보다 몇 살이 더 많아 보이는 소년이 비무를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하핫! 그 정도로는 힘들지 조금더 힘내봐”
“이익!”
소년이 놀리는 듯한 모습에 여자아이의 얼굴이 벌게졌다
여자아이의 도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빠르면서도 묵직했으나 아직 나이가 어려서 여러 군데에 허점이 드러났다. 그리고 소년은 그런 여자아이의 허점을 놓치지 않앗다.
하지만 그래도 여자아이가 귀여운지 소년은 연신 웃음을 터트리며 그리 심하게 몰아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여자아이는 무엇이 그리도 분한지 씩씩 거리며 소년에게 덤볐다.
그들을 보는 팽주형의 얼굴에 웃임이 떠올랐다.
“아범 왔는가?”
“예! 어머님”
서문령이 의자에 앉아 그를 맞았다.팽주형은 서문령의 옆에 다가서며 말했다
“이젠 관수와 제법 친해진 모양입니다.”
“그래! 관수가 워낙 무이를 아끼니까. 그리고 무이도 무공을 겨룰 때는 저렇게 씩씩거려도 평소에는 워낙 잘 따르니까 관수도 제 친동생처럼 아끼는구나.”
“잘됐군요. 전 혹 두 아이가 사이가 안 좋으면 어쩌나 걱정을 많이 했는데요.”
“두 아이 다 또래 애들보다 훨씬 어른스럽기 때문에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게야.”
지금 무이와 비무를 하고 있는 팽관수는 바로 팽주형과 금아현의 외동아들로 예전에 폐관에 들어갔다 불과 얼마 전에 나왔다.
그는 자신이 없던 사이에 가문에서 일어난 변고에 무척이나 놀랐으며 또한 새로 생긴 여동생의 존재에 무척이나 기뻐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무이의 무공수련을 돕는다는 핑계로 이렇게 틈만 나면 비무를 하곤 했다.
요즘 들어 서문령은 자신의 손자, 손녀가 어울려 노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이 낙이었다. 이제 가문의 일도 안정이 되어서 그녀가 따로 신경을 쓸 일은 없었다.
더구나 그녀 역시 거의 모든 실권을 금아현에게 넘겨주었기에 바쁜 것은 금아현이지 그녀 자신은 아니었다.
덕분에 이렇게 햇살 좋은 날 빛을 온몸으로 받으면서 아이들을 지켜보는 게 가끔은 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버님은 아직도 수련실에 계십니까?”
“그래! 그 양반이 호승심이 발동한 모양이더구나. 덕분에 활기를 되찾은 것은 좋은데 그로인해 신대협이 고생을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구나.”
“저도 그게 걱정입니다.”
전에 신황과 처음 만난 후 팽만우는 전의를 불태우며 무공을 수련했다. 신황을 만났을 때 무척이나 자존심이 상했었나 보다.
하지만, 덕분에 여러 가지 잡념을 날릴 수 있었으니 서문령의 입장에선 무척이나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정말 싸우게 된다면 결과가 어찌 나올지 걱정이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두 사람이 싸운다면 누가 이길까?”
“글세요!”
서문령의 말에 팽주형이 말끝을 흐렸다.
분명 신황은 강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대륙에서 제일 강한 열명에 들어가는 사람이다. 분명 무공이나 연륜으로 보자면 자신의 아버지가 훨씬 유리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이제까지 보아온 신황은 무공 이외에도 무언가 위험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남자였다.
그는 모든 일에 단호했고 또한 거침이 없엇다. 또한 무공의 응용력이나 전투력만큼은 그가 이제껏 보아온 모든 무인들을 상회하고 있었다.
그것은 무공의 수위와는 별개의 능력이었다. 때문에 그는 자신 있게 자신의 아버지가 이긴다고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팽주형이 생각에 잠겨있을 때 팽관수와 무이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들을 향해 달려왔다
“할머니~!”
무이가 큰소리를 내며 서문령게게 와락 안겼다. 그러자 서문령이 무이를 꼭 안아주며 입을 열었다.
“왜 그러누? 내 강아지”
“오빠라 또 놀려요. 무공을 못 한다고”
“그랬느냐? 내가 오라버니를 혼내줘야겠구나.”
“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화난 기색은 없다. 무이는 그저 어리광을 부리는 것이고 서무령은 그저 화난 체하는 것뿐이다.
“하하하~! 또 할머니한테 이르네. 그러다 엉덩이에 뿔난다.”
“녀석하고는! 좀 져주지 그랬느냐?”
“아버지도..., 그랬다가는 나중에 오빠의 위신이 안선다구요.”
팽주형의 말을 웃음으로 넘기는 팽관수, 그는 선이 굵은 호남형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평소 과묵하다고 소문난 그였지만 무이를 동생으로 맞아들인 후 무척이나 웃음이 많아졌다.
팽주형은 그런 팽관수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자신의 뒤를 이어 이 큰 가문을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강(剛)뿐만 아니라 유(柔)도 겸비해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무이는 서문령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따뜻함을 즐겼다.
‘아~! 냄새 좋다’
무이는 서문령의 몸에서 나는 냄새가 무척이나 좋다고 생각했다.
비록 한창때의 연인처럼 성숙한 향기가나는 것은 아니지만 서문령의 몸에서 나는 향기는 무이가 안정을 찾을 있게 도와주었다.
팽주형은 웃음을 짓다 문득 생각이 난 것이 있어 무이에게 물었다.
“참. 신대협은 요즘어찌 지내고 계시냐? 한 번도 밖에 나오지 않으니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고 있구나.”
“백부님은 요즘 무공을 익히시고 계세요. 저번에 무슨 영감인가를 얻으셨대요. 그래서 그거 익히신다고 초 숙부님하고 매일 무공을 겨루고 있어요.
초 숙부님은 자신을 상대로 무공을 실험한다고 방방 뛰시는데,
그래도 백부님이 싸우자고 하시면 조용히 따라요 제가 보기에는 초 숙부님도 백부님하고 싸우는 것을 은근히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신황과 같은 절대 고수와의 비무는 홀로 정진하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닐 정도로 많은 깨달음을 준다.
지금 초풍영은 신황의 비무상대가 되면서 자신도 모르게 많은 심득을 쌓고 있었다. 만약 그가 무당산에만 있었다면, 이런 기연을 얻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때문에 투덜거리면서도 그는 지금의 상황에 매우 만족해하고 있었다. 단지 하루에도 몇 번씩 목숨이 오락가락한다는 것이 마음에 안 들긴 했지만.
팽주형이 탄식을 터트렸다.
“초소협도 지금쯤 많은 발전을 이뤘겠구나. 나도 어서 폐관을 하며 무공을 쌓아야 할 텐데.”
“네가 그리 생각하고 있다니 잘되었구나.”
그때 들여오는 팽만우의 목소리. 모여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팽만우의 목소리가 들여온 곳으로 향했다.
“아버님, 나오셨습니까?”
“당신 나오셧네요”
“할아버님을 뵙니다”
서문령을 제외한 팽주형과 팽관수의 목소리는 약간 굳어있었다.
평소에 엄한 팽만우의 성정을 아는 까닭에 그의 앞에만 서면 절로 위추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그렇게 팽만우는 어려운 사람이었다. 때문에 모두들 그를 어려워했다. 하지만 여기 유일한 예외가 있었다.
“할아버지!”
“어이쿠~!오냐, 잘 놀았느냐?”
무이였다
무이가 안기자 팽만우의 얼굴에 조금 전의 얼음같이 차가웠던 표정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헤픈 웃음을 짓는 노인네의 얼굴만 남아 있었다.
팽만우는 무이를 번쩍 안아들고 말을 이었다.
“누가 괴롭히지는 않았고?”
“우음~!”
팽만우의 말에 무이가 무언가 생각하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덩달아 팽만우의 미간도 일그러졌다.
그에 따라 팽관수의 얼굴에도 긴장의 빛이 떠올랐다.
‘꿀꺽~!’
그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무이의 대답 여하에 따라 그에게 엄한 불똥이 튀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팽관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이는 잠시 생각하는 척 하다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아무도 괴롭히지 않아요. 다들 얼마나 잘해주는데요.”
“허허허~! 그렇더냐? 누가 괴롭히기만 하면 말하거라. 이 할아비가 그놈의 다리몽둥이를 부러트리고 엉덩이짝을 걷어차 줄테니까.”
“그런 사람 없어요. 할아버지! 그보다 몸이 나으신지 얼마 안되셨는데 무리하지 마세요. 그러다 또 병 걸려요.”
“어이쿠~~!할아비 걱정도 다해주고 내가 요즘 무이 때문에 산다. 허허허~!”
팽주형과 팽관수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격세지감이 떠올라 있었다.
과연 눈앞에서 헤벌쭉 웃음을 짓고 있는 노인네가 과연 그들에게 어려서부터 그토록 혹독하게 몰아붙이며 꼬장꼬장하게 굴었던 그들의 아버지, 조부와 동일인물인가 싶은 것이다.
서문령은 그런 두 사람의 마을을 아는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요즘 팽만우가 보이는 변화란 정말 놀라울 정도였다. 아마 팔불출이란 말을 이럴 때 쓰면 적격일 것이다. 정말 예전의 팽만우라면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서문령은 지금의 팽만우가 훨씬 더 좋게 느껴졌다.팽만우는 한참을 그렇게 무이의 뺨에 얼굴을 부리다 서문령에게 무이를 건네주었다.
무이가 품에서 떠나는 순간 이미 그의 얼굴은 예의 천혈도제의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정말 조금 전의 팔불출 노인내하고 동일인물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극적인 변화였다.
팽만우는 서문령과 팽주형 부자에게 말을 꺼냈다.
"부인은 여기서 무이와 같이 있고, 너희들은 나를 따라오너라."
그의 말에 서문령이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미 수 십년을 한 이불을 덮고 산 사이다. 그녀는 팽만우의 표정만으로도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팽주형과 팽관수는 팽만우의 의도를 깨달았는지 군말하지 않고 공손히 대답했다.
이제까지 무섭게 몸을 다듬고 무공을 수련하더니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난 모양이다.
"무이야~! 할아비가 잠시 다녀올 테니 할미하고 같이 있거라."
팽만우는 마지막으로 무이에게 인자한 웃음을 지어주고는 몸을 돌렸다.
그때 무이가 팽만우에게 크게 소리쳤다.
"할아버지, 지지마세요."
이미 팽만우가 무얼 하려는지 알고 있는 눈치였다.팽만우의 얼굴에 미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녀석~!'
지지 말란다. 하지만 이기라는 말도 아니다.
어린 아이가 제법 깊이 생각한 것 같지 않은가? 이제까지 자신을 지켜준 백부와 할아버지 사이에서 얼마나 고민을 했으면 저런 말이 나올 것인가.
이기라는 말 대신 지지 말라니, 그것이 무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응원일 것이다.
'오냐! 이 할아비가 절대 지지 않을 것이다.'
팽만우는 그렇게 무이의 말을 곱씹었다. 또한 그는 대륙십강의 일인인 자신이 질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무리 신황이 강하다 할지라도 연륜과 공력에서 절대적인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팽만우가 앞장을 서고 그 뒤를 팽주형과 팽관수가 따랐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바로 신황이 은거하고 있는 수림 속이었다.
한편 수림 속에서는 신황이 나무 밑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는 이미 오전에 초풍영과 한바탕 무공을 겨룬 후 나타난 파탄과 문제점에 대해 보완점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마치 돌부처가 된 것 같았다. 미동도 없이 오로지 무공만 생각하는 그의 모습은 보는 이를 질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중에서도 초풍영의 얼굴에는 정말 괴물을 본 것 같은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는 이미 보름째 신황과 줄기차게 비무를 해왔다.
처음에는 전혀 새로운 무공을 들고 나온 신황에게 놀랐으며, 두 번째는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하루가 다르게 진일보하는 것에 놀랐다.
그 당시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 황당해 하는 초풍영에게 신황은 이렇게 말했다.
"그리 놀랄 필요 없다. 그저 월영인의 응용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신황은 대수롭지 않다고 말했지만 듣는 초풍영의 생각은 달랐다.
"젠장~! 무공을 그렇게 응용하고 익히는 게 쉽다면 세상에 고수 아닌 자는 아무도 없겠다."
정말 하늘은 너무 불공평한 것 같았다. 자신도 선택받은 기재중의 한 명이라 생각했지만 정말 신황을 보고 있으면 자신은 범재축에도 못 끼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알까? 신황이 이제까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수많은 실전과 사선을 넘어오면서 익힌 무공이다.
남들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길을 걸어왔기에 가능한 일을 초풍영은 단지 재능의 차이에서 나타나는 격차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넘어야할 벽, 평생을 공부하고 수련을 하더라도 내 기필코 형님을 넘어설 것이다.'
그는 신황을 보며 그렇게 다짐했다.
초풍영은 무당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호승심을 신황에게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경쟁심이 그의 발전을 더욱 빠르게 하고 있었다.
초관염은 그런 초풍영의 마음을 느꼈는지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자신보다 앞서 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다. 목표로 삼을만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니까.'
아마 초풍영은 신황이란 존재가 있어 더욱 높은 곳으로 날아오를 것이다. 초관염은 그렇게 확신했다.
그렇게 초관염과 초풍영이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신황이 눈을 떳다.
"오는 것인가?"
그가 일어섰다.
신황의 시선은 수림의 초입을 향해 있었다.
대기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파장은 신황의 신경을 긁고 있었다.
팽만우가 지금 신황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대륙십강 중 일인인 팽만우가 신황과 싸울 준비가 됐다고 포효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따라 신황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그 역시 내부에서 전의가 들끓고 있었다.
진정한 강자와의 싸움, 그것은 신황이 원하는 바였다.
팽만우가 나타났다. 그의 뒤에는 그의 아들과 손자가 따르고 있었다.
팽만우가 신황을 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아이들에게 안계를 넓혀주려고 대동했네. 괜찮겠지?"
"제 쪽에서도 초 어르신과 풍영이가 관람할 것입니다."
절대고수끼리의 싸움은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진보를 가져올 수 있다.
때문에 팽주형이나 초풍영, 그리고 팽관수에게 있어 이번 관람은 그들의 일생에 있어 중요한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팽만우가 전의를 불태웠다.
"좋아! 한번 몸을 풀어 보자구, 난 절대로 자네를 봐주지 않을 것이네."
그의 눈에는 이 건방진 후배에게 따끔한 가르침을 내려주겠다는 각오가 서려 있었다.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망신을 당하실겁니다."
신황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아직 자네가 대륙십강을 넘볼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일깨워주지."
그들이 마주섰다. 그리고 그들 주위로 날카로운 바람이 몰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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