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종군로 순례기: 온양역-현충사-충무공묘소 순례 및 충무공 추모제(2012년 12월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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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평에서 참석하려면
양평의 겨울은 춥다. 이 날도 아침 최저 영하15도를 기록했다. 나 여사는 양평에서 출발하여 온양온천역에 10시10분까지 가야 한다. 그녀는 전원마을에서 6시20분에 택시를 타고 양평역까지 갔다. 양평에서 청량리까지 가는 기차를 타면 전철보다 30분쯤 빨리 간다. 청량리역에서 신창행 전철 출발시간이 07시32분임을 금오랑이 문자로 알려주었다. 그녀가 탄 기차는 2분 연착하여 07시27분에 도착했다. 5분 동안에 지상역에서 지하역으로 내려가야 전철을 환승할 수 있다. 전철이 도착하는 소리를 듣고 막 뛰어가 맨 끝 칸에 겨우 탈 수 있었었다. 잠시 후 그녀는 문자를 받았다.
“금오랑은 2-1 경로석에 앉았답니다. 혼잡하니 좌석에 앉았다면 그냥 쭉 온양까지 가셔요.”
“전 9-4에 앉았습니다.”
간석에서 출발한 이 사범 부부가 신도림에서 환승하여 2-1 문으로 들어가니 러시아워라 사람이 많았는데 금오랑은 앉아 있었다.
“아니, 왜 구로에서 안 타고?”
“너무 일찍 도착해 춥기도 하고 그래서 한 정거장 더 간 거예요.”
신도림에서는 8시9분에 출발하므로 구로보다 1분 빠르다.
인천서 출발한 강 회장은 구로역에 7시40분에 도착했다. 8시10분까지 30분을 추운 홈에서 기다렸다. 금정역에서는 4호선을 타고 온 검암과 소지가 8시34분발 신창행 전철을 환승했다. 문 회장은 수원에서 탔다. 그들은 모두 2-1칸에 모였다. 수원, 오산을 지나면서 승객이 많이 내렸다. 김 여사는 아침에 서두르는 통에 빈혈약 복용을 잊었다. 계속 서서 가는 동안 어지럽고 힘들었다. 그런 내색을 안 하니 자리에 앉으라는 사람이 없었다.
“앉으라 해도 소용없어. 지난번에 앉으라했더니 금방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더라고...”
2. 안개 피어오르는 곡교천
온양온천 역사에서 나 여사와 노 작가가 일행에 합류했다. 송 후배가 5분 늦게 도착했다. 순례자들은 온천역 광장에서 현수막을 펼치고 출발사진을 찍었다. 11일 서울 아침 최저기온은 영하 11도로서 올 겨울 들어 가장 추웠다. 12일 아침은 약간 풀렸다고 하나 오전 10시반경 온양의 기온은 영하 3도는 되었다. 다행히 바람이 없어 체감온도는 그리 춥지 않았다. 현충사 가는 길은 나무 데크를 깔고 곡교천 쪽으로 난간이 있어 안전하고 걷기에 편하다. 가로수에서 떨어진 은행열매가 데크의 눈 녹은 부위에 지천으로 보였다. 문 회장이 아름다운 곡교천을 사진으로 간직하려고 일행과 앞서거니뒷서거니 했다. 곡교천의 수온이 기온보다 높아서 안개현상이 보였다. 순례자들은 미끄럽지 않은 곳을 골라 밟으면서 나아갔다. 11시가 지나서 현충사로 들어가는 갈림길을 만났다.
<만전당 홍가신선생 유허>라는 안내표지가 보였다.
“누구시지?”
“글쎄, 꽤 유명한 분인가 봐.”
“고기 전 만개를 널리 나누어 준 분인가?”
소지가 개그로 받았다.
“만전당이라 함은 저 양반이 사는 집의 당호인데 흔히 당호를 집 주인의 아호로 사용하기도 해.”
검암의 설명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유명해지면 마을이름이 되기도 하지.”
“이곳은 만전리가 아니라 백암리이니 그토록 유명한 분은 아닌가 보다.”
만전당 홍가신 선생은 1589년 정여립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가 임란 다음 해에 파주목사, 1596년 홍주목사가 되었다. 그해 7월 이몽학은 굶주린 농민을 선동해 홍산에서 반란을 일으켜 임천, 정산, 청양, 대흥을 휩쓸고 서울로 향하던 중 홍가신(洪可臣)이 이를 반격했다. 이몽학의 부하 김경창과 임억명이 이몽학의 목을 베어 항복함으로써 반란은 평정되었다.
3. 가마를 대령하렸다
현충사 경내에 들어가니 안내판이 있었다(11:45). 금오랑이 준비해 온 <순례자 수첩>을 나누어 주었다. 그는 10월에 장만한 컬러 프린터로 <순례자 수첩>의 표지와 지도를 컬러로 출력해 16쪽의 책자를 만들었던 것이다.
“본전에 가서 참배한 후에 동쪽에 보이는 충무공 옛집과 충무공의 막내 이면 공의 묘소를 보고 나옵니다. 이면은 정유년 9월말에 여기서 전사했습니다. 일본 특공대가 이 마을을 불 지르고 백성들을 살육한 것입니다.”
순례자들은 본전의 표준 영정 앞에 일렬로 도열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 대한 묵념.”
문 회장이 자원해서 구령했다.
“지금 점심 식사 시간을 고려하니 곧장 나가는 것이 좋겠네요.”
검암은 문화탐방 안내를 많이 해보았기에 시간에 맞추는 진행을 잘한다. 그들은 계단에 앉아서 사진을 찍었다.
김 여사는 어지러워 본전까지의 계단을 오르지 못했다.
“여봐라! 가마를 대령하렸다. 내 정신이 혼미하니라.”
김 여사는 지난번 게바위 순례 시에 남편이 전주 이 씨로서 세종의 8번째 아들 영응대군파이니 자기는 마마라는 것이다.
“마마, 어인 일이시온지요?”
이번에는 소지가 마당쇠 역을 맡았나보다.
순례자들은 충무공 옛집과 이면 공의 묘소를 생략하고 충무문 밖으로 나가 자리를 폈다. 바람이 없고 햇볕이 따뜻하게 내려왔다. 강 회장과 나 여사는 좀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뭔가 특별히 맛있는 것 싸왔나 봐. 저렇게 둘이서만 따로 앉잖아.”
송 후배가 50리터 배낭을 풀었다. 그는 야근을 하고 귀가하여 순례자들의 중식을 준비했던 것이다. 그가 내 놓은 음식은 열 명이 먹기에 충분했다. 반찬은 김과 두부 졸임이었다.
“아침에 콩을 두고 밥을 했는데 콩이 얼어 물을 흡수하지 않아 이렇게 질게 됐습니다.”
송 후배는 계란도 한판 삶아왔다.
“아니, 웬 계란을 그렇게 많이 삶았나? 그리고 김도 많아. 많아도 너~무 많아.”
김 여사가 보온통에서 따끈한 오뎅을 덜어 나누어 주었다. 순례자들은 각자 지참한 것과 송 후배가 내 놓은 음식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4. 눈밭을 헤매다
순례자들은 충무공 묘소를 향해 방향을 서북으로 잡았다(13:00). 그들은 10킬로미터쯤 가야한다. 금오랑은 내심 걱정이 앞섰다. 그는 이 길이 초행이다. 사전답사를 안한 것이다. 그냥 대로로 나가 차도를 따라가면 되지만 차도는 길도 멀고 걷기도 나쁘다. 그는 열흘 전부터 스카이뷰 지도로 대체로를 구상했었다. 구상한 경로가 과연 좋은지 사전답사를 해야 하는데 날씨가 너무 추웠고 사전 답사하려던 날에는 바쁜 일이 생겨서 결국 못한 것이다.
“검암, 저쪽으로 길이 있겠지?”
“지형을 보면 저 골짜기 방향으로 길이 있을 거야.”
검암도 대로로 우회해 가기는 싫은 표정이었다. 검암이 앞장서서 지름길을 찾기로 했다.
“아주머니, 충무공 묘소로 가려고 하는데 저쪽으로 가면 길이 있나요?”
“네, 그 길로 죽 가서 뫼 있는 곳까지 가면 길이 나옵니다.”
순례자들은 충무교육원 앞에서 길을 묻고는 눈 덮인 밭둑길을 걷기 시작했다.
금오랑은 김 여사 부부가 보이지 않아 전화를 걸었다.
“마마, 지금 어디 계시온지요? 신은 길을 찾았나이다.”
“나는 가마타고 가겠노라.”
“예에. 음봉면 관아 쪽으로 가마를 향하시면 되옵니다.”
금오랑은 어지러움을 호소하던 김 여사가 무리하지 않겠다는 것이 고마웠다.
‘이 사범이 동행하여 참 다행이야.’ 금오랑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앞선 검암을 따라 빠르게 나아갔다. 그는 선두보다 100미터쯤 앞에서 길을 찾아보려고 앞장섰다. 북북서 방향으로 눈밭을 20분 쯤 지나니 주황색 빌라가 왼편에 보였다.
‘스카이뷰 지도의 지붕 색과 같네. 그렇다면 여기쯤 온 것이구나.’ 금오랑은 인쇄한 지도를 꺼내 보고 확인했다. 길 찾는 데는 컬러로 인쇄한 스카이뷰 지도가 아주 유용함을 알고 있었다. 지난해에는 흑백 지도로 길을 찾았었다.
금오랑은 숲이 우거진 언덕을 앞서 올라갔다. 그런 선배가 걱정이 되었는지 송 후배가 따랐다. 사람 발자국은 이미 끊겼고 동물 발자국만 보였다. 갑자기 10미터 전방에서 고라니가 놀라 달아났다.
‘아무래도 길을 못 찾겠네. 나 혼자라면 무리해서라도 이 언덕을 올라가 볼 텐데...’
금오랑은 멀리서 지켜보던 순례자들에게 두 팔을 십자로 교차해서 길이 없음을 알리고 소리쳤다(13:30).
“여기는 길이 없습니다. 거기 있는 길로 내려가세요.”
금오랑은 빠른 걸음으로 내려가 다시 앞장을 섰다. 그는 사전답사 안한 벌을 톡톡히 받고 있는 것이다. 그는 오른쪽으로 난 길로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결국 지그재그로 진행하는 것이다.
‘이 길이 끊어지지 않고 저 언덕을 넘어 마을까지 이어지면 좋겠는데...’
금오랑은 언덕에 올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 쉬고 큰 소리로 알렸다.
“길 있습니다. 올라오세요.”
순례자들은 미끄러운 눈길을 조심해서 내려갔다. 검암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괜찮아?”
“진작 스틱을 사용했어야 하는 것인데...”
검암은 배낭에 달아맨 스틱 두 개를 풀었다.
5. 시골 서당
문 회장이 고드름 열린 헛간을 놓치지 않고 사진에 담았다(13:55).
“고드름 보니 어린 시절 생각이 난다. 우리가 막대기로 피아노 치듯 드드득 떨구면 어른들이 ‘곡식 삭는다.’고 못하게 말렸어.”
소지는 충남 서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고장에서 고드름은 일종의 결실을 상징한다. 그것을 떨어버리면 곡식이 열매를 못 맺고 쭉정이가 될 것이라고 어른들은 염려한 것이다. 그의 조부는 15명 정도의 학동을 가르쳤다. 당연히 손자도 배웠다. 덕분에 소지는 국한문 혼용으로 조선일보에 연재하던 정비석의 <임진왜란>을 즐겨 읽었다. 소지의 할아버지는 신문의 잔글씨가 잘 안 보여 가끔 손자에게 낭독하라고도 했다.
“할아버지께서는 다른 아이가 더 잘 읽는다고도 하셨어.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배우지 못한 것이 아쉬워.”
“뭘 못 배웠다고? 국한문 혼용을 초등학생 시절에 벌써 읽었잖아?”
“할아버지께서는 오후에 붓글씨를 가르치셨어. 나는 붓글씨를 게을리 하지 말았어야 했어.”
“자네의 글씨는 멋져. 그만하면 훌륭해.”
금오랑은 소지가 펜으로 쓴 한자가 참 아름답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기에 이렇게 대답한 것이다.
“미하, ‘붓판’이란 것 아나?”
“붓판? 그게 뭔데?”
“매끄러운 나무판자에 기름을 먹여서 붓글씨 연습을 할 수 있게 만든 만년 습자지야.”
순례자들은 눈밭을 가로질러 북서 방향으로 나아갔다. 눈이 발목까지 쌓여 있어 길을 분간할 수 없었다. 그들은 신발 속으로 눈이 들어가지 않게 조심해 걸었다.
“저 공장까지 가면 길이 나올 거야.”
금오랑의 말을 들었는지 강 회장이 벌판에서 앞장을 섰다.
“개들 세상이다. 그야말로 개판이다.”
마을의 개들이 눈밭을 뛰어 놀고 있었다.
“개 발자국도 쓸모가 있겠지?”
“그럼 그것도 다 정보야. 개들도 결국은 사람 사는 곳으로 갈 것 아닌가?”
강 회장은 방현리 눈밭에서 구불구불 길을 찾았다. 순례자들은 1시간15분가량을 전진해 드디어 공장 진입로를 만났다(14:15).
6. 45번 국도를 걷다
금오랑은 멀리 자동차가 다니는 것을 보고 김 여사에게 전화를 했다.
“버스 탔다면 들판에 있는 우리를 한번 찾아보세요.”
“저희는 벌써 묘소에 도착했어요. 언제쯤 오시나요?”
“아니, 벌써 도착했다고요? 3시쯤 갈 겁니다. 그런데 추워서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여기 양지바른 곳에 앉아 있어요.”
순례자들은 45번 국도를 만났다.
“차를 마주보고 걷자.”
“그래, 차가 뒤에서 쫒아오면 두려워.”
나누어 준 <순례자 수첩> 중 ‘순례자 건강수칙’ 4항에 ‘교통규칙을 지킨다. 인도 구분이 없으면 자동차를 마주보고 걷는다.’가 있다. 그들은 건널목 신호를 기다린 후 길을 건넜다.
“저기 보이는 호수가 염치저수지야.”
순례자들은 충무유원지를 지나 동천리 마을에 당도했다.
“금오랑님, 여기 해군처럼 보이는 사람들 다섯 분이 도착했어요.”
휴대폰으로 김여사가 알려 주었다.
“그래요? 저희는 3시 10분쯤 도착할 겁니다.”
마주 오는 차량이 적지 않았지만 음봉사거리까지 가는 국도는 서울 근교에 비하면 한산한 편이었다.
7. 묘소관리소 앞의 양지 바른 곳
순례자들은 음봉 삼거리를 지나서 충무공묘소 표지판을 보았다.
“휴 이제 다 왔구나.”
금오랑은 묘소 입구의 신도비를 사진에 담았다. 신도비(神道碑)는 임금이나 2품 이상 관직자 묘소 앞이나 길목에 세워 죽은 이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이다. 신도는 죽은 자의 길, 신령의 길이다. 비문은 효종 때 영의정 김육이 짓고 글씨는 오준이 썼다.
신도비에서 200미터 쯤 더 가면 묘소관리소(041-543-2918)가 있다. 사무소 앞에 이 사범 부부가 양지바른 곳에 앉아 순례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금오랑은 주차된 승용차로 가서 참가자들에게 인사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제2함대사에서 왔습니다.”
“참, 뜻밖입니다. 해군이 이렇게 참석하리라고는 생각 못했습니다. 고맙습니다.”
금오랑이 명함을 드리면서 환영의 악수를 했다.
“홍살문에 노란 색을 쓴 것은 처음 본다.”
문 회장이 사진을 찍으면서 한 코멘트 했다(15:15).
묘소 어귀에는 검정색 묘비가 있는데 강영훈 전 국무총리가 비문을 지었다. 내용은 묘 앞의 묘비와 거의 같고 다만 증직이 영의정으로 되어 있는 것만 다르다. 묘 앞의 묘비는 영조 때 세워졌는데 그때 까지는 증직이 좌의정이었다.
1598년 11월19일(양력12월16일) 노량 관음포 앞바다에서 순절한 장군의 유해를 강진만 완도 동쪽의 고금도에 일단 모셨다. 다음해 2월에 운구하여 현 묘소 인근인 금성산에 장사 지냈다. 순절 16년 후인 1614년에 어라산으로 이장했다.
8. 추모제
순례자들은 각자 제수를 준비해 왔다. 금오랑이 양초, 사과, 감, 대추를 가져왔다. 소지는 향을 준비하고 고향에서 재배한 무공해 은행과 밤의 껍질을 벗겨왔다. 노 작가는 떡, 밤, 대추를 마련했다. 이 사범 부부는 접시를 준비하고 배와 황태포를 구입해 왔다. 과일은 홀수 개 준비해야 한다고 김 여사가 알려 준대로 3개씩 접시에 담아 올렸다. 금오랑이 태극기와 현수막을 꺼내어 적당한 곳에 걸게 했다. 종이컵에 눈을 담고 양초를 묻어 넘어지지 않게 하여 촛불을 켰다. 바람이 없어 불꽃이 꺼지지 않았다. 좌포우혜(左脯右醯), 조율이시(棗栗梨枾), 진설하고 금오랑이 강신을 위해 분향재배 했다. 검암이 정서해 온 축문을 품에서 꺼내어 독축(讀祝)했다.(15:30)
“충무공께 올리는 축문. 해의 바뀜을 헤아려 보니 오늘은 임진년 12월12일이니, 1592년 임진년 도요토미 히데요시 한 사람의 망령된 아집으로 난리가 일어난 지 벌써 7주갑(七周甲)이 된 해입니다. 난리가 일어난 지 420年이 되었으면 역사의 한 장으로 넘길 수 있으련만 우리나라 백성들에게 전에 미처 겪어보지 못한 참혹한 전쟁이었기에 우리는 지금도 한 세대 전의 일처럼 기억하고 있고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후략)”
검암의 독축이 진행되면서 추모제의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선조실록>에서 사관(史官)은 공(公)의 하세(下世)를 안타까이 여겨 ‘공의 단충(丹忠)은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쳤고, 의를 위하여 목숨을 끊었네. 비록 옛날의 양장(良將)이라한들 이에 더할 수 있겠는가? 애석하도다! 조정에서 사람을 쓰는 것이 그 마땅함을 모르고, 公으로 하여금 그 재주를 다 펼치지 못하게 하였구나.(후략) 한번 죽어 우리 민족의 영원한 사표(師表)가 되신 공의 사즉필생(死卽必生)의 정신일 것이기에, 우리는 오늘 공의 기일에 제사 드리오니 강림(降臨)하시어 흠향(歆饗)하옵소서.”
독축 후에 순례자들이 차례로 술을 올리고 분향재배했다. 검암이 축문을 소지하고 순례자들은 음복하는 것으로 추모제가 끝났다. 제대를 치우고 정리하는 동안에 금오랑이 해군 참가자들에게 백의종군로 순례의 의미를 설명했다.
“백의종군로는 스페인의 산티아고 가는 길보다 더 의미 있는 순례길입니다. 산티아고 가는 길은 800킬로미터로서 30일 이상을 계속 걸어야 합니다. 체력이 강해야 할 수 있고 비용도 많이 들고 시간 내기도 어렵습니다. 백의종군로는 하루 이틀의 여정으로 나누어서 직장인은 주말에 가도 됩니다. 누구나 갈 수 있고 스페인의 길보다 의미도 더 깊습니다. 이 길은 특정 종교의 순례길이 아닙니다. 이 길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옥에서 나와 백의종군하기 위해 간 600킬로미터, 서울에서 순천, 순천에서 합천 초계까지 가는 길입니다. 충무공이 삼군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되어 거의 소멸된 수군을 재건하면서 간 길을 합하면 800킬로미터 이상입니다. 아름답고 의미 있는 길이니 우리 해군이 많이 참가했으면 좋겠습니다.”
순례자들은 현수막을 앞으로 하여 기념사진을 촬영했다(15:55). 검암이 묘비명을 읽으면서 소지에게 설명을 했다.
“여기 행전라좌도수군절도사(行全羅左道水軍節度使)라는 글에서 행(行)이란 아래 직급이지만 높은 직위를 맡았음을 의미해. 반대로 직급이 높지만 아래 직위를 맡을 경우에는 수(守)라 하지.”
절도사는 정3품으로서 병마절도사, 수군절도사가 있다. 각 도의 군권을 맡은 총책임자이며 대개 관찰사가 겸하고 2년 임기다. 관찰사는 감사라고도 하며 종2품으로 각도에 1명 임명하는 지방장관이다. 경찰, 사법, 징세 등 지방행정의 절대 권력을 가졌다. 비문에 행이라 한 것은 이순신이 1591년 2월12일, 종6품의 정읍현감에서 정3품의 절도사로 7계급 높은 직으로 발령 받았기에 낮은 직급이나 높은 직책을 맡았음을 표현한 것이다.
묘 아래에 1794년 정조대왕이 비문을 지은 어제(御製)신도비가 있다. 어제신도비 옆에는 1979년12월 박정희 대통령의 분부로 임창순 씨가 어제신도비의 비문을 한글로 요약한 글을 짓고 이상복 씨가 써서 양각으로 주물(鑄物)한 안내비가 있다.
9. 뒤풀이
임성채 해군역사기록관리단 군사편찬과장 일행도 차를 타지 않고 순례자들과 함께 큰 도로까지 걸어 내려갔다.
“현충사를 들렀다 오느라 추모제에 좀 늦었습니다. 미안합니다.”
“추모제를 시작하는데 임 과장님의 전화가 왔어요. 제가 추모제를 진행하던 중이라 통화를 못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저는 과장님이 급한 일로 못 오신다는 전화인줄 알고 그냥 제를 진행했습니다. 오시는 줄 알았으면 몇 분 기다리는 건데. 왜냐하면 해군2함대에서 이미 도착해 있었기에 해군에서 더 오시리라고는 생각지 않았거든요.”
임과장은 해군창설에 공이 많은 손원일 제독의 전기를 썼다는 이야기를 금오랑에게 했다.
“손원일 제독이라고요? 제 친구 손효정 박사의 할아버지라던데요. 친 할아버지는 아니지만 그 집안에 해군 관련된 분이 많다고 해요. 손 박사와 구례-순천 구간의 순례를 함께 했어요.”
손 박사의 부친은 해군 편수관으로 한국전쟁 중에 함정의 교범을 번역했다.
순례자들은 버스 정거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송 후배가 사전 답사해 버스의 배차간격을 알아 두었기에 안내를 했다.
“30분 쯤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희 차로 가시죠.”
임 과장이 10인승 승합차를 순례자들에게 선뜩 내 주었다. 순례자들은 온양온천역 앞 아구복집에 편히 도착했다. 승합차는 음봉면에 다시 가서 임 과장의 남은 일행을 태워왔다. 나 여사는 양평까지 가야하므로 뒤풀이에 참석하지 못함을 아쉬워하면서 먼저 떠났다.
금오랑이 지난 번 게바위 순례 뒤풀이 때와 마찬가지 메뉴인 ‘복지리탕’을 14인분 시켰다. 그는 임 과장에게 건배사를 부탁했다.
“민간인이 이런 의미 있는 순례를 하신다고 해서 저는 매우 감동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뒤풀이는 제가 흔쾌히 쏘겠습니다.”
순례자들은 박수로 응대했다.
“금오랑께서 해군의 대선배이십니다. 제가 백의종군로 순례의 취지를 알고 총장께 해군의 참여 방안을 입안 건의해 계획에 반영했습니다.”
“짝짝짝”
순례자들이 박수로 환영했다. 임 과장은 해사33기로서 박인경 박사와 동기이다. 박 박사는 제고 19회로서 송환구 동문과 동기이다. 한 다리 건너면 다 연결되는 것이 우리 사회이다. 임 과장이 박 박사에게 전화를 걸어 금오랑과 송 후배가 통화를 했다. 건배사가 끝나고 잠시 동안 금오랑이 백의종군로 순례에 대한 취지를 설명했다. 순례자들은 시원한 복지리 국물을 안주로 하여 막걸리와 소주를 나누고 헤어졌다.
10. 에필로그
“전 17시10분 전철 탔어요. 오늘 참 의미 있는 날이었습니다. 집이 멀어서 뒤풀이 참석 못하고 먼저 떠나 죄송합니다.”
나 여사가 금오랑에게 문자를 또 보냈다.
“하하, 서정리에서 용산행 급행열차로 갈아타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어요. 참 빠르네요. 벌써 양정입니다. 쌤들 봐서 좋았구요. 이 사범 부부도요. 오면서 순례자 수첩 책자 봤는데 감탄스러웠습니다. 친구들에게 홍보해야겠어요. 참 뜻 깊은 하루여서 집에 가는 길이 힘들지 않네요.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오늘 함께 걸으면서 이순신 장군의 삶을 음미하는 시간을 가져서 참 고맙습니다.”
금오랑이 귀가하여 이런 문자를 몇몇 순례자에게 보냈다. 답장이 금방 답지했다.
“나도 고맙네. 함께 한 시간 즐거웠네.”
문 회장이 답했다.
“저도 같은 맘입니다. 이것이 뿌리가 되어 전국민적으로 뻗어 나가면 좋겠습니다.”
임 성채 박사가 21시 22분에 답장을 주었다.
“정심과 노고에 찬사를 보내며, 내겐 단순 걷기이며 동참자가 제격인 듯. 시종여일하소서.”
소지는 문자에도 해학을 가미한다.
“선배님 모시고 보람 있는 하루가 되었습니다. 헤어질 때 쯤 목이 잠기셨는데 혹시 편치 않으신 것은 아닌지 걱정됩니다. 감사합니다.”
이 사범이 다음날 아침에 문자를 보냈다.
“잘 올라가셨는지요. 선배님들과 백의종군로 순례자가 되어 충무공의 삶을 되짚어보고 그 의미를 새로 깨닫게 된 하루였습니다. 그리고 눈길을 걸으며 지나간 겨울 풍경 중 숲속의 노란색 집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또 뵙겠습니다.”
다음날 온양에서 송 후배가 금오랑에게 문자를 보냈다. 금오랑은 이런 성원의 에너지로 충전하여 다음의 순례를 즐겁게 계획할 것이 분명하다.
첫댓글 공의 기일은 양력으로12월16일이나 그보다 먼저 추모제를 지냈습니다. 현충사에서는 음력11월19일(2012년은 양력12월30일)에 제를 지냅니다.
음11월19일이 요즘말로 충무공할아버지 제삿날입니다
2015년에도 하실건가요? 저는 참석해 보고 싶어서요
잘봤습니다~!노고가 많으셨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노고가 크시었사옵니다!
읍!
뱀밭님, 3인 이상 모이면 합니다. 2015.12.12(토)전후로 온양역에서 현충사까지 걷고, 지참한 간식으로 점심하고 묘소가서 제지냅니다. 이배사 주최로 추진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현충사에서 공식적으로 제를 지내니, 우리는 양력으로 묘소에서 지냅시다. 4월28일 충무공 탄신일은 서울 서린옥터(충무공 동상 앞)에서 출발, 생가터 경유하고, 5월28일 충무공 모친 기일 전후해서 해암까지 걷고 추모제를 지냅시다. 다른 구간은 해당 지역 회원들의 편의를 봐서 추진해도 좋구요. 양력5월16일(충무공이 옥에서 나온 날) 서린옥터에서 백의종군로 순례를 시작함도 좋습니다. 일심님의 백의종군로고증연구 성과를 이배사가 가장 먼저 활용합시다.
매년 5월28일에 온양 지역주민 참여 유도하여 중방포에서 현충사까지 충무공 모친 상여 따르기 행사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운구용 경상여를 준비해야 하는데...정유년까지 앞으로 만 2년 남았습니다. 그동안 상여 따르기 행사의 추진을 성공시켜서 매스컴에도 내보내어 충무공의 고통을 국민들이 함께하는 계기를 이배사가 만들기를 제안합니다. 경상여 제작은 비용이 크지 않을 것입니다. 행사용 상여는 현충사에 보관하고 매년 반복사용하면 될 것입니다. 아산시, 충남도 등 지자체, 매스컴과 기업의 협찬으로 추진이 가능하지 않을까요?중방리청년회가 상여를 제작하고 보관해도 좋을 것입니다. 상여만 있으면 당장 행사 가능합니다.
일본은 축제(마쓰리)를 다양하게 발전시켰습니다. 제물 음식을 먹고 마시며, 가무, 극공연, 점, 스모[相撲], 궁술대회, 보트 경주 등을 합니다.가마(神輿)를 이동하면 도중에 강신하여 통과하는 마을에 복이 내린다고 전합니다. 지역의 역사적 사건을 기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의례 복장의 사제, 전통 복장의 백성, 음악연주자, 춤추는 사람들, 그리고 수레(山車)가 뒤따릅니다. 수레는 산, 절, 배 모양으로 꾸며 사람, 황소가 끌거나 사람들이 멥니다. 충무공 모친 상여 따르기 행사가 전통적으로 이어져 내려가면 이런 모습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예상되지 않습니까?
만시지탄이란 생각이면서도 쌍수를 들고 환영합니다. 작고 하기쉬운것부터 하면서 수정하고 하여 발전 안착되겠지요
어느자리에서 비슷한 제안도했는데 기회있음 해볼려고 약간 준비를 (깃발) 해두고 있읍니다.오시는날자 마중할게요..
뱀밭님, 경상우수사님, 참여하신다는 말씀만 들어도 큰 격려입니다. 백의종군로순례를 이미 제안하시고 깃발도 준비하셨다니 힘을 모아 이 운동을 추진합시다. 꾸벅. 순천향대 일심님이 고증한 길을 걸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