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회 가자, 도청으로 / '죽음은 두렵지않다' 시민들 항거
19일 오후2시께 尹興禎전교사령관 주재아래 光州지역기관장회의가 열렸 다. 이 회의석상에는 도지사,교육감,검사장,光州시장,중앙정보부 분실장,지방 노동청장,우체국장,31사단장,11공수여단장등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지역 기관장들은 군의 진압행동이 너무 과격하다 어느 나라 군대인지 의심이 간다 고교생들까지 동요하고 있다면서 연행자 전원 석방과 명단 공개를 요구했다.
尹전교사령관은 지역 기관장들의 의견에 신중한 태도를 보인뒤 참석한 鄭雄 31사단장과 崔雄 11공수여단장에게 가혹한 진압방법을 사용하지 말고 주동자가 아닌 사람은 석방하도록 지시했다.
같은 시각 光州시내 금남로는 오전의 일방적 진압상황과는 달리 술렁거 렸다. 공수부대 병력이 조선대로 철수해 점심식사를 하고 있는 동안 시위 대들이 다시 모여든 것이다.
오후 1시 30분께 시민,학생등 시위대 4~5천명 이 가톨릭센터 앞에서 금남로를 차단하고 있던 경찰을 향해 돌과 화염병 을 던졌다. 이때의 상황을 신동아 1985년 10월호에서 인용한다.
금남로에 진주해 있던 공수부대 병력이 조선대로 점심식사를 하기위해 빠져나간 오후 1시 반께부터 시민,학생들이 시위에 나서기 사작했다. 가톨릭센터앞에 모인 시위군중은 4천~5천명에 달했다.
이들은 금남로를 차단하고 있는 경찰을 향해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몰아붙였다.청년들은 금남로2가 제일교회 신축공사장에서 사용하는 두 개의 기름통에 불을 붙여 군 경저지선에 힘껏 굴러보냈다. 군과 경찰은 갑자기 시위대로 접근,곤봉과 총,대검을 휘둘렀다.
흩어졌던 시위대는 다시 모여 도로변의 대형 화분과 공중전화 부스등으 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계속 돌을 던졌다.오후3시께 군경저지대는 진압화기 가 바닥난 듯 방패를 앞세우고 곤봉을 손에 쥔 긴장된 모습으로 제자리를 고수했다.
이때 갑자기 가톨릭센터 앞에서 함성이 터지면서 2백여명의 청년들이 가 톨릭센터안으로 들어갔다. 7층 옥상에서 6명의 무장공수대원이 시민들의 시 위상황을 무전기로 연락하는 것이 목격된 직후였다.빌딩안으로 올라간 청 년들중 몇몇은 공수부대원의 대검에 찔려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수많은 청년들이 집중적으로 돌세례를 퍼붓자 공수부대원들이 비 틀거렸다. 그러자 청년들이 달려들어 몽둥이로 때려눕혔다. 한 청년이 그 들로부터 빼앗은 M16 소총 한 자루를 치켜올리자 도로의 시위대들이 함성 을 질렀다.
그러나 공수부대원들을 인질로 삼는 것도 잠시였다. 오후 3시20분께 점심 을 끝낸 공수병력이 도청앞과 광남로 사거리에서 점차 포위망을 좁혀왔기 때문이다. 시위대는 돌을 던지며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캐리버 60 기관총으로 무장한 장갑차가 무서운 속력으로 시위대를 향해 돌진해 왔다. 바로 이 순간 가톨릭센터 안으로 올라갔다가 빠져나오지 못하고 인 질로 잡은 공수부대원을 지키고 있던 청년들은 일시에 들이닥친 공수부대 에 의해 최후를 맞이해야만 했다.이곳에서 수많은 살상자가 생겼다.
내용중 오후 3시께 일어난 가톨릭센터 사건에 대해 1995년 7월 18일 검 찰의 5.18관련 사건 수사결과문은 이렇게 적시해놓고 있다.
오후3시 15분 께 가톨릭센터 7층에 있는 기독교방송국 경계 병력인 31사단 96연대 1대대 소속 병력 9명을 공수부대원으로 오인한 시위대가 이들을 넘겨줄 것을 요 구했으나 가톨릭센터측이 공수부대원이 아니라고하자,
시위대는 차고에 있 던 승용차 4대를 불태우고,분말소화기를 뿜고 각목과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7층까지 밀고 올라가 경계병력의 M16 소총 1정을 빼앗아 건물 아래로 던 지는등 방송국을 점거했으며,공수부대 병력이 다시 시내에 투입됐다는 말 을 듣고 해산했으나 일부 시위대는 현장에서 체포됐음. 이러한 상황에서 군용 헬리콥터가 저공으로 비행하며 학생 시민 여러분, 이성을 잃지 말고 해산하여 집으로 돌아가십시오.여러분은 불순분자들의 책동에 휘말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선량한 시민들은 절대 보호하겠으니,즉각 해산하십시오.이미 연행한 학생들은 모두 방면하겠습니다하며 해산을 종용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민들은 공중의 헬리콥터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며 욕설을 퍼부어 댔다.그 말을 맏을 사람은 아무도 없어기 때문이다. 이같이 금남로를 중심으 로 온 시가에서 시민들이 공수부대와 공방전을 펴고 있는 동안 계엄군에게 흥분제 약을 먹였다 독한 술을 먹였다 물통에는 술이 들어있다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씨를 말리러왔다는 풍문이 파다하게 퍼져 시민들을 더욱 흥분하게 했다.
오후3시 27분께 문화방송국앞에 집결한 시위대 3천여명은 광주 상황을 보도하지 않는 방송의 태도에 격분,방송국 건물에 돌을 던졌다. 이들은 다 시 취재차량 1대를 불태우고,문화방송 사장이 직영하는 것으로 알려진 전자 제품점 문화상사에도 불을 질렀다.
光州시 東구 壯동 전신전화국앞 사거리에도 오후 4시 15분께 시위대가 1 천5백여명까지 늘어 도청쪽으로 진출하려다 공수부대원들의 진압에 분산됐 다. 곧이어 光州공용터미널앞에서 시민,학생 1천여명이 합세,가드레일과 공중전화 부스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공수부대원들과 치열한 투석전을 벌 였다.
같은 시각 光州소방서쪽에서 시민들의 시위참가를 호소하는 가두방 송이 시작되면서 시위대들을 더욱 격앙시켰다. 북동사무소앞에서는 공수 부대원 3백여명이 가택 수색을 하면서 학생들을 진압봉으로 가격했다.
특전사 전투사보의 이날 작전 경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1여단장은 금남로 양쪽에서 폭도를 분쇄하기로하고 35대대는 도청쪽에서 중소기업은행쪽으로, 11여단은 중소기업은행에서 도청쪽으로 압축할 결심.
15시 15분께 도청광장에서 하차,부대전개후 5분간에 걸쳐 경고문 방 송과 군가를 제창 폭도 기세 제압. 앞으로 전진하다 CBS방송국 전방에서 폭도들 투석이 시작되자 즉시 돌격 개시 폭도 분산 와해.
16시께 유동4거리까지 진출,11여단과 연결 폭도 완전분산. 16시20분 분산된 폭도 충장로 일대 재집결해 다시 출동 해산시킨 후 17시께 도청이 재집결,양림교 경유 소방서를 지나 20시 30분께 종합터미널에 가서 야영. 이때 화학탄은 사용안 함.전과및 피해 무(無).
19일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진압과정은 단순히 거리의 시민들에게만 느껴 진 것은 아니었다. 학교에서 초초한 심정으로 거리의 상황에 궁금해 하던 고교생들에게까지 분노의 심정을 안겨줬다. 숨죽였던 학생들은 그 심정을 드디어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첫댓글 벌서 39년이 지났네요.
아직도 그 숭고한 민주화운동을
인정하지 않는 세력이 판치고있는 현실의 정치판 입니다.
죽일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