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전복>
전복 일색으로 메뉴가 구성되어 전문성에 신뢰감을 준다. 절경에 자리잡고 있고 근처 상가가 조성되어 급하게 다녀가는 사람은 특산물 쇼핑을 겸할 수 있어서도 좋다. 경치와 맛집과 특산품이 다 있는 특구같은 동네에, 이처럼 유서깊은 맛집이 있다.
1. 식당얼개
상호 : 은혜전복
주소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애월로1길 24-3
전화 :
주요음식 : 전복 요리
2. 먹은날 : 2022.5.7.저녁
먹은음식 : 전복돌솥밥 15,000원, 전복뚝배기 15,000원
3. 맛보기
전복 일색인 메뉴에 대한 신뢰감을 감당할 만한 음식들이 나온다. 찬으로는 낙지젓갈과 고등어구이가 반갑다. 나머지 찬들도 다 먹을 만하고 특히 무절이가 좋다.
전복뚝배기. 처음 만나는 요리다. 갖가지 해물을 넣고 하는데, 전복은 3개나 들어 있다. 새우, 게, 홍합, 미더덕 등등에 무와 호박을 넣었다. 고춧가루를 풀고 된장 기운도 좀 있다. 전복에 고춧가루, 흔히 만나는 조합은 아니다.
해물 양은 메뉴판 사진만큼 많지는 않은데, 어쨌든 국물이 먹을 만하다. 제주에나 와야 먹을 수 있는 요리임이 분명하다. 시원하면서도 깊은 맛이 느껴져 특별한 요리가 부담스럽지 않다. 전복으로 호사하는 기분이다.
전복돌솥밥이다. 전복 내장 외에 다른 재료도 좀 들어간 거 같다. 고소한 맛이 좋다. 간이 거의 안 되어 있으므로 부추간장으로 비벼야 한다.
전복돌솥밥은 이 부추간장이 명물이다. 약간 단 듯한 느낌인데 짜지 않으면서 전복밥과 잘어울리에 맛을 완전 상승시킨다. 둘이 만나니 1,5가 된다. 이 양념간장을 보니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화룡점정의 역할을 제대로 하는 맛간장이다.
고등어구이가 입에 설설 녹게 맛있다. 간도 적절하고 기름기 배인 고기 살이 참 고소하다. 싱싱한 느낌도 좋다.
살짝 익은 듯한 김치 맛도 괜찮다.
무절이. 찬은 부족하면 셀프리필 코너에서 더 가져다 먹는데, 이 무를 더 가져다 먹었다. 고등어구이와 먹으니 더 맛지다. 사각거리고 짜지 않고 초맛이 적절하여 아주 개운하게 주 메뉴 맛을 살려준다.
낙지젓. 푸진 인심이 느껴지는 찬인데, 리필도 가능하다. 단맛이 나지 않아 좋다.
4. 먹은 후
:전복을 잡아 진상하던 제주의 해남(海男) 포작인
전복은 완도에서 전국 생산량의 80%가 나온다. 생산량이 넘치는 완도에서는 다양한 전복식품을 개발한다. 전복요리를 새로 개발하려 애쓰고, 전복을 이용한 다른 음식도 개발하고자 한다. 장보고빵은 전복을 통째로 넣어 구운 빵이다.
제주는 완도 못지않게 전복요리가 유명하고 다양하다.
여기서는 전복을 통으로 굽고 고전적인 전복죽을 끓이는 것은 물론 전복돌솥밥도 하고 뭣보다도 전복뚝배기라는 이름으로 찌개를 끓인다. 참 좋은 세상이다. 이런 상은 옛날 나랏님도 받기 어려운 상이었을 거다. 물론 생전복을 운반하기 어려워서 그렇겠지만, 전복을 누구도 이렇게 흔하게 먹을 수가 없는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 정조조에는 2년(1778) 5월 29일
“제주(濟州)에서 회복(灰鰒)을 진상하는 문제는 전복을 잡는 자의 폐해가 아주 심하다. 이와 같은 진상은 그다지 긴요하지 않으니, 영구히 제감(除減)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홍국영이 아뢰기를,
“만약 이 폐해를 제거한다면 제주의 전복을 잡는 백성이 지탱하여 보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정조 4년 11월 29일
“그대가 해읍(海邑)을 맡았을 때 전복(全鰒)을 따는 일을 보았는가? 그 일이 매우 고생스럽다는데 그런가?”
하니, 유의양이 아뢰기를,
“선왕조께서 일찍이 ‘누가 접시에 담긴 전복이 한점 한점 어민의 신고(辛苦)임을 알겠는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전복을 따는 때에 보니, 하는 일이 매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민폐도 많았습니다.”
실록에는 제주도의 전복 진상 문제가 자주 거론되고 그 노고를 염려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전복이 한점 한점 어민의 신고(辛苦)라 이해하였고, 정조는 드디어 영구히 제감(除減)하도록 하였지만, 진상을 폐한 것은 아니다. 제감은 진상 분량을 줄였다는 말이다.
조선시대에 전복은 제주에서 많이 잡았다. 전복을 잡는 것은 대대로 남성의 일이었다. 이런 남성을 포작인(鮑作人)이라고 했는데, 포인(鮑人), 포작(鮑作), 포작한(鮑作漢), 포작간(鮑作干), 포작한(鮑作汗)이라고도 일컬었다. 제주말로는 ‘보재기’라고 했다. 포작인은 해산물 채취를 하는 남자인데, 어포(魚鮑)를 떠서 말리는 일도 했다. ‘포작인(鮑作人)’이라는 말은 어포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들은 해산물 중에서도 주로 전복을 잡아 진상하는 일을 했다. 뿐만 아니라 진상품을 싣고 뱃길을 운반하는 역할도 했다.
포작인은 말하자면 해녀의 대응어 해남인 셈이다. 전복은 수심 20미터 이상 들어가 따야 해서 해녀 아닌 해남, 포작인의 일이 되었다. 조선조 당시 잠녀라 불렸던 해녀는 미역 채취 등 비교적 용이한 일을 했다. 전복은 따는 일도 힘들었지만 그나마 모두 수탈당해야 해서 몸도 마음도 견디기 어려웠다. 전복 채취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도망뿐이어서 야반도주를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제주목사 이형상은 상소문에 “지아비는 포작에 선원 노릇을 겸해 힘든 일이 허다하며, 지어미는 잠녀(해녀) 생활을 하여 1년 내내 진상할 미역과 전복을 마련해 바쳐야 하니 그 고역이란 목자(牧者)보다 10배나 됩니다. (중략) 죽기를 무릅쓰고 도망하려 함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제주 당을 다 부숴버려 제주 민속을 와해하려 해서 공감능력에 의심이 가는 그가 이런 말을 할 정도면 얼마나 고통이 심한 일이었는지를 말해준다. 포작인에게는 시집도 오려 하지 않아, 홀아비로 비참하게 사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것을 막기 위해 인조 7년인 1629년에는 제주에 출륙금지령을 내려 200년 동안 풀지 않았다. 가장 기본적 인간의 권리인 이동권을 제한하는 통제정책을 편 것이다.
제주에서는 사내아이를 낳으면 반기지 않았다. 포작인은 과도한 노역으로 도망가거나 익사하거나 하여 열에 두셋밖에 남지 않았다 한다. 보통 이것이 제주에 여자가 많은 중요한 원인이라 한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14년 조에는
“포작인(鮑作人)들이 제주에서 와서 전라도ㆍ경상도 두 도의 바닷가에 흩어져 있는데, 몰래 도둑질을 하니 그 조짐이 염려스러우나, 다만 현재 드러난 죄상(罪狀)이 없으므로 죄를 다스리기가 어렵습니다. 또 비록 본토(本土)로 쇄환(刷還)시키고자 하나 반드시 생업(生業)에 안주하지 못할 것”이라며 그 대책을 논의하는 장면이 있다.
이어 성종 16년 조에는 ‘영사(領事) 홍응(洪應)이 아뢰기를,
“신이 전일(前日)에 연해(沿海)의 여러 고을을 두루 살펴보니, 포작간(鮑作干)이 해변(海邊)에 장막[幕]을 치고 일정한 거처(居處)가 없이 선상(船上)에 기생(寄生)하고 있는데, 사람됨이 날래고 사나우며 그 배가 가볍고 빠르기가 비할 데 없어서, 비록 폭풍(暴風)과 사나운 파도(波濤)라 하여도 조금도 두려워하고 꺼려함이 없으며, 왜적(倭賊)이 이를 만나도 도리어 두려워하고 피해서 달아납니다. 신이 그 배 가운데를 보니, 큰 돌[石]이 수십 개 있으므로, 신이 쓸 데를 물어보았는데, 대답하기를, ‘왜선(倭船)을 만났을 때 이 돌을 사용하여 던져서 치면 부서지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연해의 여러 고을에서 봉진(封進)하는 해산(海産)의 진품(珍品)은 모두 포작인(鮑作人)이 채취(採取)하는 것입니다. 신이 또 듣건대, 포작인이 이따금 상선(商船)을 겁탈(劫奪)하고 사람과 재물을 약탈하며 살해하는데, 간혹 사람이 쫓아가는 바가 있으면 왜인의 신발[倭鞋]을 버리고 가서 마치 왜인이 그런 것처럼 한다 합니다. 이것은 포작간에게도 해로움이 있으니, 청컨대 연해 여러 고을로 하여금 소재(所在)해 있는 곳에 따라서 곡진(曲盡)하게 무휼(撫恤)을 더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포작인은 거처(居處)가 일정함이 없고 성품이 흉한(凶悍)하니, 이심(離心)하게 하여서는 안된다. 마땅히 존휼(存恤)을 더하라.”
하였다.
포작인은 도망쳐 경남 전남 연안을 떠도는 경우가 많았는데, 배를 의지해서 보트피플로 살며 흉포하여 왜적도 두려워했다고 했다. 이런 그들을 육지에서는 한라산의 다른 이름인 두무악(頭無岳)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먼저 그렇게밖에 살 수 없게 만든 사회문제를 따져 보는 것이 순서이다. 다행히 슬기로운 임금은 말했다. 이심(離心)하지 않도록 존휼(存恤)을 더하라. 마음이 떠나 배반하지 않도록 위로하고 구휼하라. 실제로 이들이 왜적의 앞잡이까지 하였다고도 한다.
지독하게 험한 일을 한 덕분에 더 험한 곤경에 처해 생사의 위기에 놓인 채 연안을 떠돌았던 포작인,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했던 보재기의 애환을 오늘날 포시랍게 양식 전복이지만 식사 주메뉴로 삼을 수 있는 우리는 감히 상상하지 못한다.
포작인이 채취하지 않아도 불과 이삼십 년 전만 하여도 전복죽을 끓이려면 귀한 식재료 다루는 손이 떨릴 지경의 귀한 식품이었다. 남방의 굴, 북방의 곰 발바닥, 동방의 전복, 서역의 말젖을 중국에서는 4대 산해진미로 치기도 했다 한다. 4대 진미까지는 아니어도 우리에게도 전복은 조개의 왕으로 알려진 귀하디 귀한 음식이고, 지금은 그보다 덜 귀하긴 해도 여전히 가장 맛잇는 음식의 하나이다.
전복 하나가 참으로 많은 인간사를 담고 있다. 전복, 알고 먹으면 더 맛있을 수 있고, 더 의미있는 밥상일 수 있다. 내가 먹는 밥 한그릇, 내가 먹는 반찬 한 접시를 소중히 생각하는 그 마음은 그대로 사람을,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된다. 밥상에 세상이, 인심이 담겨 있어 세상을 배우고 세상을 사는 겸손함을 배울 수 있다.
이제는 그럼 포작인 없이도 전복을 먹을 수 있다. 제주가 이렇게 우아하고 풍요로운 지역이 되기까지 그 아래 숨은 수많은 고통과 인고의 시간을 떠 올리면 표면적 아름다움을 넘어 내면적 아름다움에 접근할 수 있을 거 같다.
아울러 상층의 특별음식을 보통사람의 일상 음식으로 만들어준 수많은 손들에 감사한다. 또한 좋은 식재료답게 이렇게 맛있는 음식으로 만들어준 이 식당 종사자분들께도 감사한다. 근대에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우리가 이룩했던 상향평등화가 밥상에서도 이루어지는 실상을 확인한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김창일의 갯마을 탐구, 동아일보 칼럼,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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