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엄리 돌염전>
소금이 부족해서 음식 조리방법이 육지와 사뭇 달랐던 제주, 된장을 주로 먹고, 그 된장도 채 발효되기 전에 먹었던 것들이 다 소금부족과 연관이 있다. 갯벌이 없어 소금 생산이 자유롭지 못한 탓이었다. 그래도 소금을 전혀 생산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처럼 돌염전, 이름하여 '소금빌레'에서 소량이나마 생산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육지 싼 소금에 이제는 관광지일 뿐이지만, 제주 식생활의 근원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곳이다.
1. 볼곳 대강
위치 : 제주도 제주시 애월읍 구엄리
입장료 : 없음
2022.5.21. 방문
2. 둘러보기
1) 소개
제주 서쪽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다 보면 우리나라 유일의 돌염전인 ‘소금 빌레’를 만날 수 있다. 구엄리에 자리한 이 돌염전은 용암이 굳어져 깨진 널찍한 현무암 지대에 흙을 돋우어 칸 칸마다 바닷물을 채우고 햇볕에 말려 천일염을 제조했다. 한때 소금밭의 규모가 1,500평에 이를 만큼 구엄리 사람들에겐 중요한 생계수단이었다. ‘염장이’로 불리던 이들은 귀한 소금밭을 큰딸에게만 상속했다. 여성의 생활력이 훨씬 강했던 제주의 특성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1950년대까지도 활발하게 운영됐던 구엄리 돌염전은 육지에서 들어온 값싼 소금에 밀려 결국 사라졌다. 하지만 관광자원으로 새롭게 복원된 돌염전은 제주 어디서도 만날 수 없는 특별한 풍경을 선물한다. 특히 염전에 물이 찼을 때 거울처럼 맑은 반영사진을 찍을 수 있어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다음백과)
구엄염전. 바다 건너 등대와 함께 보이는 것이 구엄포구이다.
구엄포구 쪽에서 찍은 염전.
*소금빌레(안내문)
구엄마을 포구 서쪽에는 선조들이 돌염전으로 사용했던 평평한 천연암반이 있는데 말을 사람들은 이 암반지대를 이용하여 소금을 생산했고, 그곳을 소금빌레라고 불렀다. 구엄마을 사람들은 소금을 만드는 일이 생업의 일부였으며 1950년대까지는 명맥이 이어졌다. 소금빌레의 규모는 1,500평 정도이며 생산되는 소금의 양은 1년에 28,900금(17톤)이었다.
마을 포구(철무지개) 서쪽 쉐머리코지에서 구엄마을과 중엄마을의 경계지점인 옷여까지는 평평한 암반지대를 이루는데, 이 암반지대가 소금밭이다. 길이는 300m이고 폭이 제일 넓은 곳은 50m이다.
소금의 생산은 겨울을 제외한 봄 여름 가을에 가능했다. 겨울에는 일조량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계절풍(북퐁)의 영향으로 파도가 드세어 소금밭을 쓸어버린다.
소금밭은 공유수면상에 위치하나 일정량 개인 소유가 인정되어 매매가 이뤄지기도 했다. 공유수면상이라 지적도는 없으며 전종적인 밭나눔과 같이 사표로 구획됐으며 육지의 밭에 비하여 가격도 훨씬 높았다. 한 가구당 20~30평 내외로 소유하였고, 상속도 가능하여 큰딸에게만 상속해주는 풍속도 생겨났다.
* 소금 생산방법
1.몰아찌는돌(호겡이) 만들기
2. 간물 만들기
3. 돌소금 만들기(안내문)
돌소금 생산은 보통 4월에 생산, 6월이면 가능했다. 돌소금은 넓적하고 굵으며 품질도 뒤어나 돌소금 1되와 보리 2되를 교환했다. 전체 생산량은 제주도 23개 염전 중 4위에 해당될 정도로 많았다.
간물을 이용하여 만들면 7일정도가 소요되었다. 몰아찌는돌(호겡이)에서 생산된 소금은 집까지 운반해서 외양간에 나무기둥을 걸쳐놓고 얹어 물기를 뺐다. 짠 소금기가 소똥과 결합하여 양질의 거름을 생산할 수 있었다.
*돌소금의 판매
생산활동을 쉬는 겨울에 중산간으로 가져가서 그곳의 농산물과 물물교환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엄장해안길. 돌염전을 끼고 해안길이 조성되어 있다. 크게는 제주 올레길 16코스의 일부이다.
4. 구경 후
'구엄리 돌염전의 가동으로 제주 음식의 정체성을 찾기를'
서해안 지역에 가면 흔히 얕으막하게 담을 쌓아 바닷물을 가둬놓고 배추 간을 절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원산도에 갔다가 만난 적이 있는데, 하도 신기해 어떻게 하는지 가만히 지켜보자, 아주머니 말씀이 그냥 배추를 바닷물에 씻으면 자연스럽게 간이 절여진다고 하였다. 오래 두면 너무 풀이 죽어 안 좋으므로 몇 차례 씻어 건져 들고 집으로 가 좀 있으면 김치를 담글 만하게 절여진단다. 돈과 시간을 절약하는 신기한 비법이었다.
제주에서도 소금 만들기 힘든 겨울에는 바닷물로 간을 절였다. 제주시 남원읍 '짐치통'이라는 이름의 바닷가가 바로 그런 곳이다. 담을 쌓아 물을 가둔 것은 아니고 간조로 물이 빠진 후 웅덩이에 고여 있는 물로 간을 절였다. 햇볕 좋은 여름에는 이 물을 떠다 다려서 소금을 만들고, 겨울에는 바로 간을 절였다. 다려서 만드는 소금은 자염이다. 자염은 많은 양의 나무와 인력을 필요로 해서 경제성이 떨어진다.
제주에도 23개의 염전이 있었다. 그중 주생산지는 제주시 구좌읍의 종달염전이다. 이곳은 제주 최초의 염전으로 모래판에서 만들어 돌염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생산하였다. 종달리 사람들은 대부분 염전업에 종사하여 소금바치, 소금쟁이 등으로 불렸다 한다. 이곳도 1950년대 이후 소금 생산을 멈춰 염전에서 논으로 바뀌고 지금은 갈대밭이 되어 흔적이 남지 않게 되었다.
소금을 만들던 곳들은 지명에 흔적이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소금막', '소금코지', '쫀물코지' 등이 그것이다. 서귀포의 쇠소깍 검은머리해변 건너에 있는 하효항을 일컫는 말들이다. 서귀포 표선면에도 '소금막해변'이 있다. 소금막은 식당이나 리조트 이름으로도 남아 제주가 소금을 생산했던 역사를 말해준다.
곳곳에서 소금을 만들었지만, 갯벌에서 쉽게 대량으로 만드는 육지에 비해 너무 힘이 들고 생산량은 많지 않았다. 제주 소금의 경쟁력이 약한 것은 해방되어 육지와의 교역이 활발해지자 바로 돌염전이 가동되지 않은 것으로도 입증된다. 돌염전은 1950년대 이후로 가동을 멈추었다.
바다에 갇혀 살면서도 소금 만들기가 힘들었으니 참 야속할 일이었다. 소금 자급률이 24%정도였다니, 소금이 얼마나 귀했는지 알 수 있다. 이렇게 소금이 귀하니 육지의 소금을 들여오면 큰 돈을 벌 수 있었다. 육지의 소금과 쌀을 들여오고, 제주도의 미역과 말과 양태 등을 갖다 팔면 엄청난 시세 차익을 남길 수 있었다. 이런 장사로 태어난 거상이 김만덕이다. 김만덕은 오늘날 육지로 가는 큰배가 들고나는 건입포에 틀어앉아 객주를 차려 선단을 굴리고 큰돈을 벌어 나랏님도 못하는 흉년 구휼을 했다.
값이 싼 육지 소금이 들어오자 제주는 그나마 하던 생산을 그만두고 소비만 하는 곳으로 바뀌었다. 육지의 소금이 들어오면서 육지의 음식도 함께 들어왔다. 제주는 소금과 고춧가루가 육지에서 들어오면서 음식의 면모가 상당부분 바뀌었다. 거기다 전라도 사람이 대거 유입되면서 음식에 전라도 색깔이 강해졌다. 전라도는 갯벌이 많아 소금의 주산지이자 젓갈의 주산지로서 음식의 최강자이다. 전라도의 소금과 젓갈은 전라도 음식의 주역이다.
소금이 있는 곳에 젓갈이 있다. 소금은 음식 맛을 바꾸어 놓는다. 음식이 유명한 프랑스가 게랑드소금을 생산하고 있다는 것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소금을 생산하지 못하는 북유럽에 가면 맛잇는 음식을 찾기 힘들다. 소금 생산 중지는 이렇게 다른 음식문화를 만들어내지만 이제 막을 수 없는 큰 흐름이 되었다. 이 가운데 제주의 음식문화가 어떤 곳에서 정체성을 만들어갈지 큰 과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해결방법의 하나로 구엄리 염전이 소금 생산을 재개하면 어떨까. 이곳 염전 소금은 굵고 납작하고 색깔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폐쇄된 염전을 관광용으로라도 재구해낸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이곳에서 아예 생산을 하고 판매를 하면 육지와 차별성 있는 특산품으로 높은 값을 받을 수 있으니 그리 손해를 보지는 않을 거 같다. 손해가 나면 제주도가 좀 보조해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소금으로 하는 음식을 특화하면 제주도 본연의 전통음식이 이어지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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