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수 없는 사이
신석도장은 재빨리 신형을 날려 고개도 돌리지 않고 사라져 버
렸다.
헌원삼광은 사라져가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욕을 해댔다.
"저 자식은 정말 양심도 없는 걸. 너에게 감사하다는 말도 없이
가잖아?"
그러나 소어아가 재빨리 그의 말을 가로채며 한마디 했다.
"큰 은혜는 오히려 함부로 치하하기가 힘든 법이오."
그는 말을 하면서 속옷을 찢어 어깨의 상처를 싸맸다. 한 손이
여전히 강옥랑과 함께 수갑에 채워져 있어 불편했다.
헌원삼광은 술단지를 들어 몇 모금 들이키더니 입을 열었다.
"넌 재주가 좋은 놈인데 그 수갑만은 어쩔 수가 없었던 모양이
지?"
"이 수갑을 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주 천재에 가까운
사람일 것이오."
헌원삼광은 칼을 들고 수갑을 향해 내리쳤다. '챙' 하는 소리가
나며 불빛이 번쩍했다. 그러나 칼만 두 동강으로 부러지고 말았
다.
강옥랑은 탄식을 했고 소어아는 빙그레 웃었다.
"봐요. 나와 그는 이렇게 떨어질 수 없는 사이란 말이오."
"그렇지도 않지. 네가 그와 같이 있기 싫다면 내가 그의 손을
자를 수도 있는 것이니까."
강옥랑은 안색이 금방 창백해졌다. 그러나 소어아는 담담히 웃
음을 띠우며 말할 뿐이었다.
"비록 그의 손을 자른다 해도 수갑은 여전히 남아있게 되니 그
냥 그를 내 곁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더욱 좋겠소."
헌원삼광이 강옥랑의 눈을 바라보면서 서서히 입을 뗐다.
"네가 그의 손을 자르지 않으면 언젠가 그가 너의 손을 자를 날
이 있을 거야."
"그건 안심하십시오. 그는 그럴만한 재주가 없소."
"너 이 자식! 정말 재미있는데. 너와 같이 좀 있고 싶지만 네
몸 옆에 이 험악한 자식이 있어서 구역질이 나는군."
그는 소어아의 어깨를 툭치며 얘기를 시작했는데 이미 문밖에서
마지막 말을 맺었다.
"금후에 네가 혼자 있게 되면 우리 재미있게 한 잔 하자!"
소어아가 달려나갔지만 이미 그의 모습은 사라지고 보이질 않았
다.
산을 내려가는 길은 그다지 험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저물어가
는 석양빛을 받으며 총총히 산을 내려왔다.
강옥랑은 종래 말을 하지 않고 있다가 돌연 웃으면서 입을 열었
다.
"형님은 어디로 갈 거요?"
"넌 어디로 갈 것인가?"
"동생은 자연히 형님을 따라야지요."
"사실 난 뚜렷이 갈 곳이 없어. 그냥 여기저기를 구경하자는 거
지."
강옥랑의 얼굴에는 기쁜 빛이 나타났다.
"그럼 우선 무한으로 갑시다. 집에 가면 혹 이 수갑을 풀 수 있
는 방법을 찾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소어아는 별 생각없이 대답했다.
"그럼 그렇게 하지."
그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참, 너 혹시 은자를 가진 것이 있느냐? 옷을 좀 사야겠는
데......그리고 적당한 천을 찾아서 손을 덮어야겠다. 남들에게
오해받지 않도록."
"저도 지금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이 누굴 좀 속여야겠군."
이때 앞에서 한 사람이 손에 큰 보따리를 들고 다가오고 있었
다. 그는 소어아와 강옥랑을 보더니 돌연 보따리를 놓고 인사를
한 뒤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잽싸게 사라져버렸다. 소어아와 강옥랑
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뭘까?"
강옥랑은 재빨리 다가가 보따리를 풀어보았다. 그 보따리 속에
는 네 벌의 새옷이 들어 있었다.
강옥랑이 놀라 입을 열었다.
"이거......이거 누가 보내 온 것이지?"
소어아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거 도대체 알 수 없는 일이로군."
두 사람은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도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들은 우선 옷을 갈아 입었다. 성내에는 불빛이 하나 하나 늘어
갔다. 두 사람은 자주빛 옷을 손에 감아 수갑을 감추고 큰 걸음으
로 거리를 걸어갔다. 둘은 배가 고파 걸음을 옮겨 놓을 때마다 배
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났다.
소어아는 걸어가면서 중얼거렸다.
"옷을 갖고 왔다면 은도 좀 가져 와야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음식점 종업원 같은 사나이가 하나 앞에서
달려오더니 인사를 했다.
"강 선생이십니까? 한 손님이 오백 냥의 은을 소인에게 전하도
록 하시면서 아울러 술과 안주를 대접하도록 분부했습니다."
소어아와 강옥랑은 너무나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강옥랑이 무
거운 소리로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의 성이 뭐지?"
"소인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는 어떻게 생겼소?"
"우리 점포에는 왕래하는 손님이 워낙 많아서 기억이 잘 안 나
는군요."
그는 계속 인사를 하면서 연방 웃었다. 그리고 무엇을 물어 봐
도 그저 '잘 모른다'고만 대답했다.
술과 안주는 매우 성찬으로 준비되어 있었다.
소어아는 낄낄거리며 중얼거렸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이 사람은 우리 뱃속의 회충인데. 우리
가 무엇이 필요한지 그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말야."
그는 당장 기뻤지만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해지기 시작했
다. 더군다나 지금 상황은 황우, 백양과 같이 다닐 때의 상황과
별 차이가 없었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온 지 불과 한 시간도 안
되는데 도대체 누가 알았단 말인가? 그리고 이토록 친절을 베풀어
주는 사람의 속셈은 무엇일까? 또 그가 정말 좋은 마음을 가졌다
면 왜 얼굴을 드러내지 않을까?
밤이 깊어지자 두 사람은 한 방에서 잠자리에 들게 되었다.
소어아는 빙그레 웃었다. 또 무슨 장난을 할 것만 같았다.
"너는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아느냐?"
"형님은 책을 보고 싶은 게 아니오?"
"너는 정말 똑똑하구나."
강옥랑은 품속에서 소미미에게서 빼앗은 책을 꺼냈다. 소어아는
혼자 보고 싶었지만 꾹 참고 함께 책을 펼쳤다.
책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물론 무술의 깊은 도리였다. 두 사람
은 알지 못 하겠다는 듯 고개를 저으면서 탄식을 했다. 그러나 속
으로는 책을 혼자 삼키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다. 소어아는 한
시간 이상이나 본 후 다시 하품을 하더니 책을 덮었다.
"이 책은 보기 어려우니 먼저 자야 겠다. 너는?"
강옥랑도 길게 하품을 했다.
"저도 자고 싶습니다."
두 사람은 한 시간 이상을 잠잠히 누워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등을 맞댄 채 눈을 크게 뜨고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
다. 누가 그들에게 책에서 본 무공을 연구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모두 죽어도 아니라고 할 것이다.
이튿날 저녁, 밥을 먹은 후 소어아가 먼저 중얼거리기 시작했
다.
"보기 어려운 책은 보지 않는 게 났지?"
"눈만 피곤해질 뿐이죠."
"맞았어. 빨리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이 좋겠다."
사실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서로 내색이 없었다.
소어아는 이런 일이 재미가 있을 뿐 아니라 자극제가 되었다.
수시로, 심지어는 밥 먹고 대변 볼 시간에도 상대방을 암살자처럼
경계해야 하는 이런 나날이 그에게는 신나는 일로 느껴지는 것이
었다.
두 사람은 이렇게 서로 경계하며 사흘을 보냈다. 그러나 겉으로
는 매우 태평한 시간이었다.
이 삼일 동안 소어아는 누군가가 쑥 그들의 뒤를 따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 그 속셈이 무엇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그들에게 무엇인가 조금이라도 부족한 게
있으면 곧 누군가 나타나 가져다 주었다.
두 사람은 민강을 따라서 서주까지 왔다.
소어아는 흘러내리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기쁜듯이 소리쳤다.
"우리 배를 타고 가는 것이 어때?"
"잘 됐어요. 나도 배를 타고 싶었는데."
새로 단장된 배 한 척이 저쪽 강변으로부터 올라왔다. 두 사람
이 막 부르려 하는데 배에서 모자를 쓴 사공이 먼저 손을 들면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분이 강(江) 선생 인가요? 어떤 이가 손님에게 이 배를 전
세 주었어요."
소어아와 강옥랑은 서로 마주 바라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저 사람도 내 뱃 속의 회충이군!"
그는 이 배를 누가 전세냈는가를 아예 묻지도 않았다. 물으나
마나 대답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배에는 백발의 사공 외에 열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가씨가
아름다운 큰 눈을 들어 소어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소어아를 바라보는 모습은 교태 어려 보였다. 그렇지만
소어아는 쳐다보기도 싫었다. 그는 아름다운 여자만 보면 골치가
아파왔다.
밤이 되자 강옥랑은 빙긋빙긋 웃으면서 수작을 걸어왔다.
"그 분 사(史)아가씨는 형님에게 반한 것 같아요."
소어아는 하품을 길게 하고는 먼 곳을 응시하였다.
"네가 나보다 잘생겼으니 너한테 반한 거야. 넌 항상 나와 함께
있는 몸만 아니라면 가서 놀고 싶을 걸."
강옥랑은 얼굴이 붉어졌다.
"제가......제게 그런 뜻은 없어요."
"그만둬. 네가 관심이 없다면 왜 묻지도 않은 그녀 얘기를 꺼내
지? 그리고 넌 벌써 그녀의 성까지 알고 있구나."
"난 다만 우연히 들은 것 뿐이오."
"창피해 하긴!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냐!"
소어아는 옷가지를 들어 눈을 가리고는 잠을 자려는지 몸을 뱃
전에 기댔다. 강옥랑은 눈치를 슬슬 살펴가며 또 수작을 걸어왔
다.
"형님, 책 보시지 않겠어요?"
"글쎄, 굳이 흔들리는 배 위에서 피곤하게 그럴 필요가 있을까.
너는?"
"형님이 보시지 않으면 저도 보지 않겠어요."
두 사람은 같이 뱃전에 누워 잠을 청했다. 강옥랑은 실눈을 뜨
고 소어아를 살폈다. 얼마 지나자 소어아는 코를 골면서 잠이 들
었다.
강옥랑은 살며시 책을 품속에서 꺼내어 조용히 몇 장을 넘겼다.
그리고 막 한 곳을 보려고 하는데 소어아가 돌연 몸을 뒤척이며
팔다리를 강옥랑의 몸에 돌리더니 잠꼬대를 했다. 강옥랑은 이가
갈렸으나 그를 깨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만 그가 몸을 돌리고
손을 치우기만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소어아는 돼지처럼 잠에 빠져 있어 움직일 기미조차 보
이지 않았다.
강옥랑은 안색이 창백해져갔다. 눈에서는 불이 날 지경이었다.
그는 어떻게 할까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다가 옷가지 밑에서 하나
의 식도를 꺼내어 소어아의 목을 겨누었다.
바로 이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일면서 두 개의 연자알이 창밖
에서 날아와 하나는 '땅' 하며 식도에 적중했고 또 하나는 강옥랑
의 팔을 때렸다. 그 힘과 정확도로 보아 대단한 고수가 발사한 암
기임에 틀림없었다.
강옥랑은 이를 악물면서 아픔을 참았고 이마에서는 땀방울이 송
글송글 맺혀 흘렀다.
소어아는 그 바람에 잠이 깼는지 웅얼거렸다.
"무슨 일이야! 누가 종을 치고 있어?"
강옥랑은 급히 식도를 감추면서 말했다.
"아무 일도 없어요."
다행히 소어아는 더이상 묻지 많고 다시 코를 골기 시작했다.
그러나 강옥랑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 두 개의 연자알은 누가 던진 것일까? 분명 암기의 명수인
것 같은데...... 그 백발의 사공이? 아니면 그의 딸일까? 그렇다
면 그들은 왜 우리를 감시하고 있을까? 이 소어아와는 모르는 사
이인 것 같은데 왜 그를 보호하는 걸까?)
그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어느새 잠이 들어 버렸다. 아침
이 되자 강옥랑은 소어아가 어깨를 흔드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났
다. 그는 잠을 늦게 잔데다가 긴장을 해서인지 몸이 찌부둥하고
머리가 무거웠다.
"잘잤나?"
강옥랑은 억지 웃음을 보였다.
"네. 날이 밝아질 때까지 잤으니."
"이제 그만 일어나자. 너무 오래 자면 좋지 않아요."
"네네, 일어 나야지요."
그는 비록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마음 속으로는 소어아를 씹
어먹고 싶었다. 뱃머리로 나가자 소어아는 기지개를 펴며 하품을
했다. 강옥랑은 그것을 보자 정말 그를 당장이라도 물 속으로 밀
어넣고 싶었다.
이때 아가씨가 어느틈에 왔는지 세숫물을 들고 앞에 서 있었는
데 얼굴은 여전히 애교어린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강옥랑은 세수대야를 들고 있는 그녀의 손을 유심히 바라보았
다. 손은 하얗고 가냘폈다. 암기를 발사할 수 있는 손 같지는 않
았다.
그러나 고생하는 뱃사공의 딸이 어찌 저리 고운 손을 가질 수
있겠는가?
소어아는 매우 기분이 좋은 듯했다. 세수를 끝내고 한꺼번에 네
그릇의 죽과 네 개의 날달걀을 마셔 버렸다.
소어아는 백발의 사공에게 웃으면서 말을 건냈다.
"노인장, 당신의 존함이 어떻게 되오?"
"나의 성은 사씨요......허허 남들은 나를 그저 사노두라고 부
르죠......허허 그러나 나의 손녀는 이름이 있죠. 콜록...... 그
녀의 이름은 사운고요."
노인은 이 말을 하며 손녀를 쳐다보고는 웃으며 타일렀다.
"운고, 연자씨를 너무 많이 먹지 마라. 너무 많이 먹으면 배가
아파요."
강옥랑은 놀라면서 고개를 돌렸다. 운고의 희고 가냘픈 손에는
과연 많은 연자씨가 들려져 있었다. 그녀는 연자씨를 입에 넣으면
서 그를 향해 웃었다.
강옥랑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는 눈길을 피하며
고개를 돌리자 소어아가 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부채질을 하고 있
었는데 바로 무공비록이었다. 어느틈엔가 그는 강옥랑의 품에서
그것을 꺼낸 것이었다.
그는 천하무림 사람들이 온갖 힘을 다하여도 얻지 못 할 귀한
책을 소어아가 부채로 쓰는 것을 보자 순간 안색이 변하며 분기가
치솟아올랐다.
그때 하나의 커다란 배가 앞쪽에서 나타났다. 사노인은 배를 약
간 선회시키며 큰배의 옆을 피해 지나갔다.
이때 소어아가 놀라면서 소리쳤다.
"앗, 이걸 어쩌지? 빠져 버렸어!"
그는 수중에 들고있던 무림비급을 강물에 떨어뜨린 것이었다.
견직으로 만든 그 책은 곧 물을 먹고 가라앉아 버렸다.
소어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 거......이 거 어떡하지?"
강옥랑은 불같이 속이 끓어올랐으나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그건 몸밖의 물건이니 잃어도 무방하오."
그는 필시 소어아가 일부러 그 책을 빠뜨린 것임을 짐작했다.
소어아는 이미 그 책을 외우고 있었고 일이 이쯤되면 강옥랑도 그
사실을 눈치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늘은 맑고 강물은 금빛 찬란했다. 장강 양안의 풍물은 한 폭
의 아름다운 그림과도 같았다.
"배는 천천히 가도 무방하오. 우리는 급하지 않소."
소어아가 풍광에 도취된 듯 연신 감탄을 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첫댓글 즐감,//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
감사 드립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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