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파 실기(陽坡實紀) (1)
1, 실기서(實紀序)
德行文猷平世之美用也忠貞樹立衰世之特節也之二道若相矛盾而
始終自是一理夷險本非二途苟能循一理之所當爲而不以目前禍福
易其守則豈非疑然君子之大致乎愚於陽坡先生洪公行蹟不覺擊節
而斂임也
덕행과 훌륭한 문학은 평온한 세상에 아름다운 쓰임이 되고 충정
(忠貞)을 바로 세움은 쇠퇴한 세상의 특별한 절의(節義)라 이, 두
길이 서로 모순된것 같아서 시종(始終) 스스로 한 이치의 고르지
못함은 있을 수 있으나 본시는 두 길이 아니다.
진실로 한 이치의 당연한,바를 따르고,목적의 화복이해(禍福利害)로
자기의 소신을 바꾸지 아니한다면 어찌 의연(疑然)한 군자(君子)의
큰 성치가 아니리오,나는 양파선생 홍공의,아름다운 행적에,대하여
나도 몰래 무릎을 치고 옷깃을 여미었다오.
公以卓偉剛明之資當勝國之季與稼雪諸賢日焚香讀書及其釋褐而
登朝也華聞日彰進途大闢蜚英藝苑秉公륜選公之德行文猷可謂見
用於世而方
공은 탁연(卓然)이 위대하여 굳세고 밝은 자질로 고려말기를,당하여
이가정(李稼亭),정설곡(鄭雪谷) 같은 어진이들과,더불어 날마다,향을
피우고 독서했으며,처음으로 벼슬하여,조정에 들어섬에 명성이,날로
더해 진도가 크게 열림에 예원(藝苑; 예술의 사회)에 그이름 더,
높이 빛내고 공정한 자세로 과거(科擧)인선을 바로 하였으니 공의
덕행과 문학은 가히 세상에 쓰임을 보았도다.
且日加淬礪每夕沐浴具冠帶仰拜天星嘗曰近日兇中若有主宰盖其
尋常所自期必有人不及知者矣豈但止於趙淸獻治心之法乎是
또 날로 갈고 닦음을 더하여 저녁마다 목욕하고 의관(衣冠)을,바로
하여 북두천성(北斗天星)을 우러러 절하였으며 일찍 말하되 근일
(近日) 흉중에 주재(主宰)하는 것이 있다 한즉 이는 대개 그 평시에
스스로 반드시 남이 미처 알지 못하는 바를 기약함이 있도다.
어찌 다만 조청헌(趙淸獻)의 치심법(致心法)에 그쳤으리요.
以入侍經幄則繩愆弼違勿欺也而犯之出護란輿則知有軍而不知有 身以之
再奠宗社重策元勳何其偉哉
이럼으로 안으로 들어섬에 왕을 모시고 강론할 때 허물은 고치고
틀린 생각은 바루어 속임이 없고 밖으로 나가서 왕을 호위할 때
임금만 알고 내몸 있음은 알지 못하였더라. 이같이 하여 두 번,종사
(宗社)를 안정시키고 거듭 원훈에 책봉되니 그 얼마나 위대한가,
及其禍起蕭墻兇賊臨門則尹和靖之徒步渡淮遽伯玉之內亂不與
容或爲一時避免之道而身爲首相舍君何之忠義激於血腔熊魚判於
立地不挫不辱得正而終豈非得力於主宰者乎然則
화가 가까운데서 일어나 흉적이,문앞에 다가왔음에 윤화정(尹和靖)이
맨발로,회수(淮水)를,건너간,것이나,거백옥(遽伯玉)의 내란에,관여하지
않은 것은 혹 일시적 피하는 방법은 되겠으나 몸이 수상이 되어서
임금을 버리고 어디로 갈것인가 충의의 피가 마음속에 끊고 웅어의
판단이 완연한데 꺾이지도 않고 굴욕되지도 아니하여 정당함을,
다하여 마치셨으니,어찌,흉중주재(兇中主宰)한데서,득력함이,아니겠냐
公之立朝始終可知也一理卓然何嘗有間於平世衰世耶稼亭陽村諸
先生爲撰常若序錄首末甚詳皆信筆也想其遺文不少如簪珥館閣之
用諸賢往復之作奚시千百其篇而滄桑劫火之餘只有七首詩清高澹
雅不似勳戚宰相口氣有曰
그러면 공의 입조(立朝)한 그 시종을 가히 알리라 한 이치가 탁연
(卓然)하거든 어찌 일찍 평온하고 쇠퇴한 세상을 말할 것 있으랴
가정 이곡(李穀)과 양촌 권근(權近) 제선생이 행장과 서문을 지어
첫머리와 끝에 기록한 것 심히 상세하니 다 믿을수 있는 신필이라
그 유문(遺文)을 생각하면 적지 않았을 것이요 예를 갖추고 관각
(館閣)에서 빈객을 접할 때 쓰인 문장이나 제현들과 서로 왕복한
서한과 시작(詩作)이 어찌 천,백편 뿐이리오만 창상(滄桑)이,바뀌고
병화를 겪은 나머지 겨우 7수시가 있으니 청아하고 고상하여 훈구
외척집 재상의 말투같지 않도다.
畢竟功名將底用回頭五十二年非是時也公之殉節只隔二歲矣南城
北山信馬아詩了無一毫盤전祿位之念而卒不得免於禍者豈天所以
彰公忠義之節以扶植宇宙人記耶
시 몇귀를 보면 < 마침내 공명이란 장차 쓰임에 그칠뿐이다 ; 畢竟
功名將底用 > < 돌이켜 생각하니 52년간이 그것도 아니라네 ; 回頭
五十二年非 > 이때 공의 순절함이 2년 전이다.
또 < 남쪽성 북쪽산 기슭에서 말타고 시를 읊었다오 ; 南城北山信 馬아詩 >
이 모두 한가지 털끝만큼도 관록과 벼슬에 얽힌 생각이,
없는데 화를 면치 못한 것은 아마도 하늘이 공의 충절을 높이,
들어내어 우주간 인간윤리를 바로 세우기 위함이로다.
嗚呼희矣日公之遠孫文國抱公遺蹟以其門老持憲君奭之書抵不녕
曰先祖崇勳卓節旣有諸先輩撰述文字
아 ! 슬프도다 공의 후손 문국이 공의 유적을 받들고 문로(門老)
사헌부 지평 석(奭)의 편지를 가지고 나를 찾아와 말하되 선조의
높은 공훈과 탁절(卓節)은 이미 제선배들의 찬술한 글이 있고,
西厓老先生又於洪氏族譜序文盛有所稱道若得先生後孫筆端弁之 卷首則於先蹟有光矣不
녕固渺然後生學소識劣何敢生意於佛頭之 著穢只綠洪君責義之重有不敢以不文辭謹書
平日所感於中者以竊 附我先人弁譜之筆云爾上之四年甲子春分節
通政大夫前行敦寧府都正 豐山 柳규 謹書
서애(西厓)선생이 또,홍씨 족보서문에,크게 칭송한바도,있으니,선생의
후손 필적을 다시 얻어 책머리에 쓰면 옛 사적에 빛이 되리라 하니
나의 부족한 학식으로 어찌 감히 부처님 머리에 더럽힘을,생의(生意)
하리오마는 홍군이 양가의중(兩家義重)함을 강조하니 끝내 사양할,수
없어 평일 마음에 느낀바를 적어서 우리 선조께서 하신 족보서문
글에 덧붙이노라.
상지 4년 갑자 춘분절에
통정대부 전 행돈녕부도정 풍산 류규 근서
2, 일고(逸稿)
공은 목은 이공의 스승이시다.동방의 문장을,목은으로서 으뜸,삼는데
그 근원이 사실상 공으로부터 나왔으니 공의 문장의 깊고 높음을,
족히 상상하여 알 수 있다. 당시에 간행 하였던 문집은 오늘날 찾아
볼 수 없고 또 세대가 오래되어 문헌이 모두 없어져 한건도 없으니
이제 가승에 실려 있는바와 동문선 여지승람속에 있는것을 가려서
수집하니 공이 지은 글은 7수(七首)의 시(詩)뿐이니 참으로 수후의
구슬같고 곤륜산의 구슬같이 귀하고 갚진 것이다.
더욱 적을수록 더욱 귀하니 꼭 많아서만은 아니다.
* 천수사추화최사립운(天壽寺追和崔斯立韻 ; 여지승람에서 나온 글)
천수사에서 최사립의 시운을 추후에 화답한다(천수사는,개성,동쪽에,있음)
계심유밀유아비(溪深柳密乳鴉飛) ; 시냇물은 깊고 버들숲 빽빽한데
새끼 갈가마귀 날고
만로청음신마귀(滿路淸陰信馬歸) ; 길 가득한 맑은 그늘에 말,걸음
따라 돌아오네.
필경공명장저용(畢竟功名將底用) ; 공명은 마침내 세워서 무엇하리.
회두오십이년비(回頭五十二年非) ; 돌이켜 보니 쉰 두해를 헛되이
보냈도다.
* 2수(二首 ; 앞글의 2수)
투호위좌전경비(投壺圍坐箭輕飛) ; 둘러앉아 투호놀이 하니 나는
화살이 가벼운데
청흥시시취욕귀(淸興時時醉欲歸) ; 맑은 흥취 때때로 취하여 돌아
가고자 하는구나
래왕공군성이노(來往共君成二老) ; 오가며 그대와 함께 두 늙은이
되었으니
인생차악미위비(人生此樂未僞非) ;인생의,이 낙이,그릇된것.아니라네
* 자효사차련루시운(慈孝寺次連樓詩韻 ; 여지승람에서 나온 글이다)
백우화개취행장(白藕花開翠荇長) ; 흰 연꽂 핀 곳에 푸른마름,자라고
유음추수만피당(柳陰秋水滿陂塘) ; 버드나무 그늘아래 가을물은,
못안에 가득하네
막언금일공귀거(莫言今日空歸去) ; 오늘 보람없이 돌아간다,말하지
말라
수희오귀일변향(隨喜吾歸一辨香) ; 우리 대사님과 나눈 말씀,
향기로워 기쁘구나
* 북산도중(北山途中)
천장고목양산간(千章古木兩山間) ; 숱한 고목들이 두 산사사이에
서 있는데
만학풍연신마환(滿壑風烟信馬還) ; 구렁에 가득 찬 풍경속을 말걸음
따라 돌아왔네
불시향래명리로(不是向來名利路) ; 여기는 종래에 생각하던 명리의
길이 아니거늘
세인나득차청한(世人那得此淸閒) ;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이 청한의
뜻을 알랴
* 성남(城南 ; 동문선에 나온 글이다)
수제벽무혼욕합(水際碧蕪渾欲合) ; 물가에 성한 풀은 서로 엉키고자
하는데
장두홍행미전개(牆頭紅杏未全開) ; 담머리의 붉은 살구꽃 다 피지
않았네
춘풍일일성남로(春風日日城南路) ; 봄바람 맞아 날마다 성남길에,
나가서
신마아시자왕래(信馬아詩自往來) ; 신마를 타고 시를 읆으며 스스로
왕래하네
* 제어화윤율정택진(題於畵尹栗亭澤眞 ; 동문선에서 나온 글)
충량일개노서생(忠良一箇老書生) ;충성스러운,일개,서생이.늙었으니
안고장여세이호(眼高長與世異好) ; 안목이 높아,길이 세상과 더불어
좋아함 다르다네
이래견아하무언(邇來見我何無言) ; 근래에는 나를 보고 아무 말이
없는가
풍신삽상수미호(風神颯爽鬚眉皓) ; 품채는 늘씬하고,수염은 희였도다
* 또(又)
세간물아본비진(世間物我本非眞) ; 세상 사이에 너와 내가,있는 것이
본래 참이 아니거니
역지차신비소보(亦知此身非所保) ; 또한 이몸 보전되지 앉을 것을
알았도다
분향대어공전등(焚香對御共傳燈) ; 향을 피우고 어화를 대하여 전등
(불서)을 함께 하니
미필상문능달도(未必桑門能達道) ; 반드시 불문 아니라도 능히 도를
통한 것 같다네
능연장상공만다(凌烟將相功曼多) ; 능연각에 모신 장상들 공이야
많건마는
미득군왕친일소(未得君王親一掃) ; 임금님의 손에 한폭 그려지지
못했으니
* 공북루응제(拱北樓應製; 여지승람에 있는 글이다)
백문보(白文寶)가 지은 응제시(應製詩) 서문에 이르기를 신축년에
임금의 행차가 안동으로부터 상주를 거쳐 청주에 머물러 있었다.
임인(壬寅)년 9월 19일에 임금이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신년을
하례하는 예를 들판에서 이루고 곧바로 고을 공북루(拱北樓)에,올라
권한공(權漢功)이 지은 옛날 시제를 보고 명하여 원송수(元松壽),
이색(李穡), 성사달(成士達)로 하여금 글을 차운해 올리라 하였다.
이때에 홍양파(洪陽坡), 이행촌(李杏村), 황회산(黃檜山) 및 여러
대부들이 다 글을 화답해 올렸다. 5공의 시(詩)는 아래와 같다.
봉련동환일(鳳輦東還日) ; 임금의 가마가 동으로 돌아 오는 날에
금풍목락초(金風木落初) ; 서풍이 불며 낙옆은,떨어지기 시작하는구나
강산류아주(江山留我住) ; 강산은 나를 만류하여 머무르게 하고
시구차인서(詩句借人書) ; 싯귀는 남의 손을 빌어 쓰는구나
로직조남원(路直朝南遠) : 길이 곧으니 남쪽 먼곳에서 조회드리고
루고공북허(樓高拱北虛) ; 누각이,높으니 북쪽,빈곳을,향해 읍하도다
노래상시종(老來常侍從) ; 늙어서도 항상 모시고 따르니
벽상막망여(壁上莫忘予) ; 높은 자리 오른 나의 충성 잊지 못한다오
절경등루처(絶景登樓處) ; 빼어난 경치 누대에 올라
청신응제초(淸晨應製初) ; 맑은 새벽에 화답하는 글 짓네
희승금일롱(喜承今日籠) ; 오늘날까지 총애를 받은 것 기쁘고
참계고인서(斬繼古人書) ; 옛사람의 글 이어받은 것 부끄럽네
로활남래직(路豁南來直) ; 길은 넓게 남쪽으로 곧게 뻗었고
산요북조허(山遙北眺虛) ; 산은 멀리 북으로 빈곳을 굽어보네
예천행락호(醴泉行樂好) ; 예천에 행락이 즐거우니
영행막여여(榮幸莫如予) ; 영화가 나만 같은 사람 없구려
원송수(元松壽)
란여청효동(鸞輿淸曉動) ; 임금의 수레가 맑은 새벽에 움직이니
문물태평초(文物太平初) ; 문물은 태평을 이루는구나
루형첨천근(樓逈瞻天近) ; 누대가 높으니 하늘을 보기가 가깝고
시성봉칙서(詩成奉勅書) ; 시를 이루니 명을 받들어 쓰는구나
산광생열예(山光生悅豫) ; 산빛은 기쁨을 나타내고
추기집충허(秋氣集沖虛) ; 가을기운은 공중에 모이는 구나
타일남순기(他日南巡紀) ; 후일에 남쪽 순수기를 적으면
함향역유여(含香亦有予) ; 향기를 머금은 것 또한 나도 있네
이 색(李穡)
세주장진제(歲籌將盡際) ; 한해의 기운은 다하고자 하는데
천기초한초(天氣稍寒初) ; 천기는 점점 추워지기 시작하네
호련등화구(扈輦登華構) ; 임금 수레 따라서 빛난집에 오르고
유호화구서(濡毫和舊書) ; 젖은 붓 휘둘러 옛글 쓰는구나
추심련악사(秋深蓮악謝) ; 가을이 깊으니 연꽃은 사라지고
풍경수음허(風勁樹陰虛) ; 바람에 떨어지니 나무그늘 비었네
헌개영광과(軒盖榮光과) ; 영화가 한몸에 가득하나
주저상괴여(躊躇尙傀予) ; 주저하여 내 스스로 부끄럽구나
성사달(成士達)
고군고루형(古郡高樓逈) ; 옛 고을에 높은 누대 고요히 서있으니
수지결구초(誰知結構初) ; 누가 처음으로 창건 했더냐
추심만산수(秋深萬山樹) ; 가을은 일만산 나무에 깊었고
경인수행서(景人數行徐) ; 경치는 둬줄 글속으로 들어왔구나
원수공서망(遠峀供西望) ; 먼산머리는 모두 서쪽을 바라보고
청운보북허(靑雲補北虛) ; 푸른 구름은 북녘 빈곳을 채웠네
등임참시종(登臨參侍從) ; 오르고 내릴 때 항상 임금 모시고 따르니
광롱자참여(光籠自斬予) ; 영화스러운 내가 스스로 부끄럽구나
이 암(李암)
군루수왈호(郡樓誰曰好) ; 고을의 누대를 누가 좋다고 말했더냐
주가야응초(駐駕也應初) ; 임금의 수레가 처음 머물렀네
무한지중경(無限池中景) ; 못속에 경치는 한이 없고
하능벽상서(何能壁上書) ; 어찌 벽위에 글을 따라 갈수 있으랴
등임희광탕(登臨喜曠蕩) ; 높은데 오르니 사방이 시원하게 틔였고
부앙실청허(俯仰實廳虛) ; 굽어보니 위아래가 맑고 깨끗하구나
다사예천상(多謝醴泉相) ; 많이 예천의 인물이 났으니
유시사기여(留詩使起予) ; 유시가 나로 하여금 일으키는구나
황석기(黃石奇)
3, 고실(考實 ; 사실을 참고한다)
가, 고려사(高麗史 ; 하동부원군 정인지 찬)
* 충숙왕 17년 경오 10월 신유에 송천봉(宋天鳳)등이 급제하였는데
장원급제한 송천봉과 제2인자인 홍언박(洪彦博)에게는 말(馬)을 제 3인자인 이달존(李達尊)에게는 신과 띠를 하사하였다.
* 공민왕 원년임진 윤3월 신묘 18일 삼사우사 홍언박과 밀직부사,
이성서(李成瑞)를 보내어 원나라에 가서 천자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10월,임인,3일,홍언박으로,판삼사사를,삼았다.병오,6일,홍언박 으로 찬성사를 삼았다.
* 2년 계사 정월 무자에 홍언박으로 다시 찬성사로 삼았다(이전에
공이 찬성사직에서 교체되어 유탁(柳濯)이 대신하였다가 공을 다시
찬성사를 삼은 것이다) 11월 임진에 남양군 홍언박을 원나라에,
보내어 신년 하례를 드렸다.
* 3년 갑오 7월 신사에 홍언박으로 찬성사를 삼았다. 12월 갑인에
이제현(李齊賢)을 우정승을 홍언박을 좌정승을 삼았다.
* 5년 병신 5월 정유 18일 대사도 기철(奇轍)과 태감 권겸(權謙)과
경양부원군 로책(盧책)이 역모를 감행했다가 실패로 잡혀 죽으니
그 일당들이 다 도망가고 궁성은 계엄을 선포하였다.
홍언박으로 정승을 삼고 윤환(尹桓)으로 좌정승을 삼았다.
7월 정해 9일에 관제를 개편하여 홍언박을 문하시중을 삼고 윤환
으로 수 문하시중을 삼았다. 11월 기묘에 홍언박이 면직되고,윤환
허백(許伯), 유탁등은 유배되다.
* 8년 기해 6월 정해에 임금이,기철(奇轍)공신을 죽이라,하고 명령을
내리기를 기철과 권겸이 왕실과 혼인하여 권세를 의지하여 위세를
떨치고 기강을 두려워 하지않고 백성들의 논밭을 뺏고 불의를,
자행하니 근년이래로,천하가,처음,어지러웠다.스스로,자기의,장래를
생각하여 악을,쌓고,원망을 쌓았다가,그 한,시대가,지나가면,권세가
없어져 보존하기 어렵다는 것을 미리 헤아리고 깊이 계략을 세워
붕당을 만들고 그 친척의 심복들 또는 건달들의 무리를 규합하여
권좌에 앉히고 은밀히 붕당을 조성하여 불의를 자행하고 사병을
양성하여 외방의 군인들도 검열을 받도록 하고 거짓으로 조서를
꾸며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인심을 현혹하며 몰래 통문을 보내어
일시에 모여
거사하도록 종용하니 종묘와 사직의 안위가 경각에
달려있었다. 이때에 남양후 홍언박이 자기의 일신의 안위는 돌보지
않고 적도들을 물리쳐 두 번째로 종묘와 사직을 편안케 하였으니, 그
큰 공을 잊기가 어렵구나 남양후 홍언박과 참정상의(參政商議)
경천흥(慶千興)과 참정 안우(安祐)와 지문하성사 정세운(鄭世雲)과
판추밀원사 황상(黃裳)과 지추밀원사 유숙(柳淑)과 상장군 목인길
(睦仁吉)과 장군 이몽고대(李蒙古大)는 1등공신에 남고 첨서추밀
원사 김득배(金得培)와 추밀원부사 김원봉(金元鳳)과 공부상서
김림(金琳)과 판사천감사 진영서(陳永緖)와,판태복시사 김서(金壻)와
상장군 김원명(金元命)과 이운목(李云牧)과 전 태부경 문경(文璟)과
장군 주영세(朱永世)와 내시감 방절타 적 첩목아와 중랑장 장필례
(張必禮)는 2등으로 삼아 그 부모와 처에게 벼슬을 주고 음덕이
자손에게,미치게,하고,전답과,백성을,차등으로,주고,강중경(姜仲卿)은
몸은 비록 죽었지마는 공이 커서 잊을 수 없으니 아울러 녹권을
주고,그 부모에게 벼슬을,주고,음덕이,자손에게,미치도록,하사하였다
* 10년 신축 10월 정유에 홍건적의 무리들이 거짓 평화를 주장하여
반성(潘誠), 사류(沙劉), 관선생(關先生), 주원수(朱元帥)등이 10여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와 삭주를 침략하였다. (원나라가
점점 쇠하여지자 갑오년에 하남의 요사한 도둑 한산동, 한교아들이
처음으로 영천에서 난을 일으키고, 유후동이 다시 군사를 일으켜
홍건이라 이름하여 부르고 더불어 그 무리 관선생, 사류와 왕사성들이
중원을 침입하여 약탈하고 산동을 나누어 점거하니, 그 세력이
크게 떨쳤고, 기해년 겨울에 이르러서는 우리의 국경을 침약하였다)
11월 경술에,염제신(廉悌臣)이,파직당하고,홍언박으로,시중을,삼았다
을축에 적의 군사가 홍의역에 이르니 병인에 왕과 공주 및 태후를
모시고 남쪽으로 피난길에 올라 임진강 나루를 건너 도솔원에 도착 하니
임금을 따르는 자는 오직 홍언박, 이암, 평장사 김용, 경천흥, 유탁,
복야 김원봉, 참정 정세운, 판추밀원사 이춘부, 첨서 김희조,
지추밀원사 유숙손 등지주사 원송수, 승선 김속명, 홍언유, 이색,
김달상, 병부상서 목인길, 상장군 김원명, 전 이부상서 홍사범, 전
형부상서 유연, 간의 김한용, 장군 이림, 장백안, 원외 김군정,
형부시랑 곽충수, 정언 박사심, 어사 박대양,시어사 전록생,뿐이러라
임금이 수레를 강 언덕에 머물도록 하고 산하를 돌아보고 원송수
(元松壽),이색(李穡)에게,이르기를,이와같이 좋은,풍경을 연귀(聯句)로
시를 지어 올리라고 하였다. 정묘에 임금의 수레가 출발하니 공주는
가마를 버리고 말을 이용하여 영서역에 도착하였다.기사에 경안역에
도착하였고 신미에 이천고을에 도착하여 얼고 젖은 임금의 옷을,
모닥불을 피워놓고 말리고 몸도 녹였다. 임신에 음죽고을에 임금의
행차가 도착하니 관리나 백성들이 모두 도망가,숨었다.을해에,충주에
이르렀고 12월 임진에 복주(안동)에 도착하였다.
* 11년 임인 정월에 임금이 복주에 머물러 있었다. 갑오 (17일)에
총병관 정세운이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진격하여 경성을 에워싸고
을축에 여러 장수들이 4면에서 진격해 들어가 적의 괴수 사류,
관선생 등,10여만명을 죽이니 잔당들은,압록강을,건너 도망가,도둑의
난이 평정되었다. 2월 신축에 왕의 행차가 안동을 떠났다. 계묘에는
상주에 머물렀다가 8월 을유에 상주를 출발하니 정해에 속리산,
속리사에 도착했고 무자에 원암역에 도착하고 경인에는 보령현에
도착하고 신묘에는 회인에 도착하고 임진에는 청주에 도착하였다.
* 12년 계묘 정월에 임금이 청주에 머물러 있었다. 2월,을해에 임금의
행차가 청주를 출발하여 진주(현 진천)에 도착하고 병자에는 죽주에
도착하고 신사에는 봉성현에 도착하니 유도하던 재추(宰樞)가,나와서
임진강에서 환영해 맞아드렸다. 계미에 흥왕사에 도착하고 계사에는
찬성사 김용(金鏞)으로 하여금 제조순군을 삼았다.
윤 3월 신미삭 밤중에,오경이,지나서,김용이,몰래,자기,당파,50여명을
보내어 임금이 머물고 있는 행궁을 범하니 숙직을 하던 수위들이 다
도망가 버렸다. 이에 내관 안도적(安都赤)과 첨의평리 왕자(王자),
판전교시사 김한용(金漢龍)을 죽이고 또 우정승 홍언박을 자기의
집에서 죽이고 반역을 꾀하니 이때에 밀직사 최영(崔瑩)과 부사,우제
(禹제) 지도첨의 안우경(安遇慶) 상호군 김장수(金長壽)등이,경성으로
부터 군사를 이끌고 행궁으로 들어와 적당들을 물리치니 이때에,
김장수가 전사하였다.난이,평정된 뒤에 왕이,강득용(康得龍)의.집으로
거동하시어 백관에게 호령하여 숙직과 순찰을 강화하라 하였다.
이인복과 정찬(丁贊)과 우제(禹제)와 홍선복(洪善福)에게 명하여,
순군에서 적도들을 국문하라 하였다. 을유에 흥왕사에서 적도들을 토벌한,
공에대한 녹을,주었으니 삼사우사,이성서와,지도첨의,안우경과
밀직사 최영과 밀직부사 우제와 한휘(韓暉), 개성윤 양백익(梁佰益),
전리판서 오인택(吳仁澤), 판도판서 김한진(金漢眞), 문예부사,윤금서
(尹金서), 우부대언 유계조, 상호군 양백연(楊佰淵), 김유(金庾),판소
부시사 김지서(金之瑞),판전의시사 이춘영(李春英),사재령 이분(李芬)
호군 이용길 등으로 1등공신을 삼고 판도판서 최용우,전공판서 이양
대호군 권희, 이득림, 전객령, 전보, 판도총랑 문천기(文天起),박용길
친종호군 이송 삼사부사 공첩목아,통예문부사,조신좌,호군,최담(崔潭)
중랑장 김안수(金安壽)등으로 2등공신을 삼고 또 신축년 호종공신을
정하니 죽은 우정승 홍언박과 증 정승 정세운과 철성부원군 이암과
판삼사사 김일봉과 당성부원군 홍원철과 찬성사 상의 경천흥,황상과
서령군 유숙과 봉화부원군 정종수, 한양부원군 박유문,사성군,목인길
밀직부사 허유, 판도판서 김한진, 숙옹부좌사윤 송인적, 전 안동도호
부사 홍언유 판전교시사 성사달, 문예부 우사윤 장득안 판사복시사
차안도, 지신사 원송수,우대언 이색, 좌대언 김달상 전응양군,상호군
홍사우, 전판사복시사 박원택, 검교평리 김계, 전 상호군 허서, 판사
복시사 이양, 판전의시사 이춘영, 전판소부시사 황대, 도검교평리
이난수, 이천휘, , 서준, 현지묘, 김생여, 정지신, 김용여, 이현, 감찰
집의 이성림, 전 대호군 마천린, 이화, 종부령 김광 전 위위윤 유백,
전 전객령 양빈, 사복정 윤송, 전 의부령 김군정, 통례문부사,조신좌
전전객부령 남대강, 전군기감 김원세, 호군 이방영, 현신우, 전 호군
김천좌, 김양수, 박영우, 이을경, 우연, 김인우, 이광우, 전농부정
손염, 사복부정 손원, 유신, 검교상호군 박자, 신지선, 장성길,최백안
고 친종호군 김승덕, 중랑장 김용, 최공, 박석연, 환자 연성부원군
김현, 영원부원군 신소봉, 진원부원군 김수만, 상호군 이강달,판내부
시사 윤충좌, 대호군 윤상 등으로 1등공신을 삼고 밀직부사 유연 전
개성윤 홍사범, 박원경, 감찰대부 김속명,전 판도판서 김원명,숙옹부
우사윤 김충신, 전 판위위시사 장천지,판 전객시사 장백안,전 상호군
경보, 검교평리 홍심,송경, 고 전교시사 김한용, 고 군기감 김돈민,
전 사의 박대양, 전 대호군 김아적, 박보안, 대호군 나광만, 김립견
삼사우윤 김광을, 군기감 김광을, 전 사재령 김휘, 전리총랑 전록생,
전법총랑 권주, 예의총랑 유실,친종호군 김세덕,삼사부사 박린,전호군
조군옥, 전 수원부사 김흥조, 전 전농부정 정세문, 전 호군 김사혁,
강복용, 봉인보, 호군 배길, 이봉우, 설송, 전의부정 우현, 군부정랑
박사신, 고공정랑 홍사원, 검교상호군 송충, 김귀만, 박수영, 김고,
도불화, 중랑장 김천로, 오수, 이존경, 조성, 박백안, 이석축, 사림우,
라원, 낭장 이천, 장용, 류덕 등으로 2등공신을 삼고 1등공신들은
벽상에 영정을 그려서 걸고 부모와 처에게는 3계급을 올려 벼슬을 주고,
그 아들중,한사람은 7품벼슬을,주고,만일 아들이,없으면,생질이나
사위 중에서 한사람을 8품급의,벼슬을 주고,관리직원 5명을,주고,파령
7명을 주고 자손들이 처음 입사하여,벼슬길에 나오면,음직을,허용하여
등용하고 밭 1백결과 종 10명을 주고 2등공신의 부모와 처에게는
3급을 올려 벼슬을 주고 그 아들 한명을 7품의 벼슬을 주고 만약,
아들이 없으면 생질이나 사위중에서 1명을 8품급의 벼슬을 주고,
관리인 3명을 주고 파령 5명을 주고 처음 벼슬에 오른 자손은 음직 을 주어
채용하고 밭 50결과 종 5명을 주라 하였다.
계사에 김용을 밀성으로 귀양보냈다 < 위는 세가집(世家集)에서 나왔다>
* 공민왕 2년 5월에 김해군 이제현을 지공거로 삼고 찬성사 홍언박을
동지공거로 삼아 진사시를 보아 을과에 이색(李穡)등 3명과 병과에
7명과 진사 23명을 합격시키고 명경과에 2명을 급제 시켰다.
(목은집 4월작이다)* 11년에 홍언박과 유숙이 시험을 관장하여 다시 시부의 제도를 채용
하였다. 10월에 우시중 홍언박으로 지공거를 삼고 지도첨의,
유숙으로 동지공거를 삼아 진사 시험을 보아 박실 등 33인을
급제시켰다, (우출지 :右出志)
윤택이 충숙왕 10년에 정당문학을 가자하니 사직을 하고 말하기를,
근래의 흉년이 심하여 백성들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거기에다 자주
군사를 동원하니 민폐가 막심한데 전에 이미 남경의 대궐을 지었고
이제 또 백악의 대궐을 짓고자하면 백성들이 어떻게 감내 하리오
하였다. 시중 홍언박이 탄식하고 이르기를 윤공의 곧은 성품이 이와
같은 것은 내가 미치지 못할 바라 하였다,(윤택전<尹澤傳>에서,나왔다)
홍빈(洪彬)은 공민왕이,즉위하자,당성부원군에 봉하니,홍언박과,이공수
(李公遂)로 더불어 제조정방이 되었다. (홍빈전<洪彬傳>에서 나왔다)
홍건적난때 임금이 남쪽으로 피난하였다. 이제현이 임금을 배알하고
상주에서 적이 물러갔다는 소식을 전해 올리고 또 홍언박이 말하기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장하다 산하는 위나라의 보배라 하였듯이 우리도
처음에 산하의 험준함을 이용하여 좁은길을 지키고 승리를 제압했더
라면 잘 되었을 것을 일찌기 제압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하였다.
(이제현전<李齊賢傳>에서 나왔다)
홍건적이 쳐들어와 노략질을 시작하니,경복흥으로,부원수를 삼아,군사
일천명을 거느리고 안주(安州)에 진을 치게,하였으나,적이,두려워,감히
싸우지도 못하니 임금이 노여워 하여 군법으로 다스리고자 하니,
홍언박이 말하기를 복흥공은 겸손한 선비인지라 군사의 도략을 알지
못하거늘 이런,사람을 등용한,자체가,과실입니다,하니,임금의,노여움이
풀렸다. (경복흥전<慶復興傳>에서 나왔다)
김용은 본래 정세운과 더불어 총애를 다투다가 또,안우,김득배,이방실
등이 큰 공을 세워 임금의 총애를 받는 것을 두려워하여 안우등으로
하여금 정세운을 죽이도록 하고 이로서 좌를,씌워 일당을,다,죽이려고
하였다. (위 사적을 볼 것)
이에 임금의 명령이라고 거짓으로 꾸며서 몰래 안우등을 효유하여
정세운을 제거하려고 계략을 세우니 안우와 이방실(李芳實)은 가하다
승낙하고 김득배는,옳지 않다,하였으나 안우등이,강행하기로 결정하고
술자리를 베풀고 정세운을 맞아들였다. 이때에 장사를 미리 대기시켜
놓았다가 정세운을 쳐서 죽였다, 임금이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안우등이 있는 곳으로 가서 임금이 있는 행궁위에 와서 알현 하라
하고 김용이 중문에 이르거든 쳐서 죽이라 하였다.
김용은 이미 홍언박, 유탁, 염제신, 이암, 윤환, 황상, 이춘부,김희조,
등과 더불어,임금께,고할 글을,썼다하였다.안우,등이 불충하여,정세운
을 죽였으니 안우는 이미 죄를 입었고 능히 김득배와 이방실을 잡는
자는 3품급을 올려 포상하리라 하고 대장군 오인탁과 어사중승,
정지상, 박춘, 김유등을 파견하여 잡아서 죽였다.(안우전<安祐傳>出)
정세운이 안우등의 해를,입었다는 말을,듣고,홍언박이,말하기를,지난번
군사를 이끌고 출전할적에 그의 말의 태도가 지나치게 거만하더니,
그런 화를 당했다고 하였다. (정세운전<鄭世韻傳>에서 나왔다)
김용은 안성 사람이라 본래 성품이 음흉하고 변덕이 많고 사기성도
많았다. 일찌기 공민왕이 원자로서 원나라에 갈적에 원자를 잘 따라
모신 공로가 있어 대호군에 진급하였다가 그후 공민왕이 즉위하자
응양군 상호군에 진급되고 행성원외랑이 되었다.
원나라 정승 탈탈(脫脫)이 사신을 보내어 임금을 경계하여 음흉한
김용을 등용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김용은 이미 총애가 깊어서
파직하지도 못하고 시종 1등공신에 올라 분의공신에 기록되었다.
조일신(趙日新)이 작난하여 임금의 행궁을 범하고 많은,숙직 군사들을
죽였으나 김용이 함께 숙직 하였으나,반군들을 막지,않아 물의가,분분
하니 왕도 또한 의심하여 볼기를 쳐서 섬으로 멀리 귀양 보냈다.
원나라 장수가 장사성(張士城)을,토벌하고자,사신을,우리나라에,보내어
이름난 장수를 모집해 달라고 하니 임금이 김용을 안성군으로 삼아
파견하였다. 이듬해에 돌아오니 지도첨의사사를 삼았다.
김용이 정세운, 홍의(洪義)와 더불어 찬성사 김보(金普)와 권력을
다투고 있던차에 김보가 마침 어머니 초상을 당했다.김용이 행성도사
최개(崔介)를 시켜 상소토록 하여 여러 관리들로 하여금 부모상에
3년간 집상을 하도록 임금께 청하고 또 김용은 임금의 명령이라,거짓
으로 꾸며 그 명령서를 도평의사에게 내려 독촉하여 시행하라 하니
임금이 그 내용 실상을 다 알고 있었다. 이에 김용을 제주도로 귀양
보내고 드디어 3년상을 없애고 김보를 불러 첨의평리에 임명하고
얼마안가서 중서문하시랑 평장사를 삼았다. 김용이 본래 정세운으로
더불어 총애를 다투다가 드디어 정세운,안우,김득배,이방실과,더불어
홍건적의 난을 평정하니 김용이 임금의 명령이라 위장하여 몰래 안우
등을 시켜 정세운을 죽이도록 하고 이로 하여금 죄를 씌워 안우등을
죽이고 찬성사를 파직하려 하였다. 반역자 김수(金守)와 조연(曺連)등
50여인이 밤에 행궁중인 흥왕사에 이르러 문을 지키는,자들을 죽이고
쳐들어와 서로 재상이 되었다고 부르고 임금의 명령이라 하고 임금을
지키는 시위군사 김한용(金漢龍)과 첨의평리 왕자 문관, 예부좌사윤
김태권(金台權), 환자 강원길(姜元吉),호위군사 78명을,죽이고 곧바로
임금의 침전으로 쳐들어가니 이때에 내관 이강달(李剛達)이 임금을
업고 황급히 태후의 밀실로 도망갔다. 적도들이 임금의 침전으로,
들어왔을적에 내관 안도적(安都赤)의 얼굴모양이 임금과 같은지라
임금대신 임금 잠자리에 누워 있었으니 적도들이 임금인줄 알고 쳐
죽이고 날뛰면서 만세를 부르고 난리를 치더니 잠시후에 임금이
죽지않고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고 거짓으로 여러 사람에게 말
하기를 조용히 하고 경거망동하여 수레를 타지마라 하고 그의 무리들
40여명으로 하여금 궁내부를 감시토록 하고 모든 업무를 전과 다름 없이
태연하게 집행하도록 하고 임금의 음식제공을 맡은 선부를 독촉 하여
진지상을 올리도록 하여 왕이 의심내고 나가지 않도록 하였다.
적도들이 그 당의 일부를 파견하여 성으로 들어가 유도(留都)재상을
죽이는데 그때 여러 재상들이 축리(祝釐; 복비는 제사)로 묘연사에
있다가 변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장차 순군을 보내어 군사를 불러
적도들을 토벌하려 했는데 적도들의 선발대가 이미 묘연사 입구에
몰려와 진을 치고 있었다. 정승 유탁이 말을 재촉하여 지름길을
거쳐서 순군에 이르니 김용은 홀로 남아있고 달려가지 않았다.
묘연사에 먼저 당도한 순군이 여러사람을 불러놓고 적도들을 토벌
해야한다 하고 여러 재상들에게 말하기를 여러분들은 이 군사들을
이끌고 먼저 임금 계신곳에 가서 계시오 나도 또한 이곳에 흩어진
군사를 불러,모아서,가리라,하였다.유탁이,김용을 성토하여,말하기를
다른 뜻이 있어 가지않고 머물러 있다가 변을 관망하고 있다고
하였다. 김용이 그의 문객 수군 제공등과 더불어 원상(元相)에,좋게
꾸며 말하고 여러놈의 잡혀온 적도들을 무섭게 째려보고 신문은
하지않고 문득 쳐죽여 말문을 못열게 하였다.난리가 끝난후에,적도를
토벌했다는 이유로 김용이 1등공신훈에 기록되었다.이때에,염제신이
새로 정승에 임명되어 여러 재상들이 가서 하례를 들이는데 김용이
술에 취해 염제신(廉悌臣)더러 이르기를 세가지 근심거리가 사라졌
으니 기쁘지 않고 무엇을 하리오 하니 사람들이 그의 지칭하는바를
알 수 없었다.혹은,홍언박이,죽은,것이 한,근심이요.적당을,물리친것이
두 근심이요. 이로부터 백성들이 편히 살수 있으니 세 번째 근심이
사라졌다고 하고 혹은 홍언박과 정세운과 3원수(안우, 김득배, 이방실)
라기도 하였으니 홍언박은 훈척의 대신으로 수상이 되었으니 김용이
비록 권세를 잡았으나 자기 마음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하는고로 이른
말이다 흥왕사의 적당들이 체포된 숫자가 90여명이나 되었으나,김용이
한사람도 문초하지 않으니 사람이 다 김용을 의심하였다.
임금이 김용을 불러 말하기를 너를,순군에 보내어정황을,조사해,보도록
했으면 좋겠으나,전날의 공을,생각하여,용서하고,밀성땅으로,귀양보낸다
하였다. 순군에 명하여 제공 표덕린(表德麟)을 압송하고 그의 무리의 두목급과
대호군 고환등 두서너,사람을 귀양보내니,이달초 부터는,해와
달이 빛을 잃고 구름이 없는데도 침침하더니 마침내 김용이 귀양을
떠난후에는 하늘의 기운이 명랑하게 개었다.얼마안가서 대호군,임견미
(林堅味)와 호군 김두(金斗)를,보내어 계림부에 옮겨놓고 안렴사,이보림
(李寶林)으로 더불어 김용을 심문하니,김용이 말하기를,내가 8년동안에
3재상을 다 지나면서,하고자 하는 뜻을 이루지,못한바 없거늘,어찌하여
임금을 죽이려 하겠는가.다만 홍시중만 죽이려,했다고 하니,임견미등이
꾸짖고 그렇다면 안도적은 왜 죽였으냐 하니 김용이 대답을 못하였다.
드디어 김용을 죽이어 여러 고을에 돌리고 목은 서울로 보내어 저자
거리에 매달고 그의 집을 몰수하고 그의 붕당을 10여명 죽이고,볼기를
쳐서 귀양 보낸자가 수십명에 달했다. (김용전<金鏞傳>에서 나왔다)
기철은 몽고 이름이 백안불화(伯顔不花)이며 행주인이라 아버지는
자오보산랑이며 막내딸이 원나라 임금의 후궁으로 뽑혀 들어가 제2의
황후로 선발되었고,황태자를,낳으니,<자오>라는,증직을,주었고,영안왕이
자오의 처,이씨문중을 표하여,정절의,문이라 하니,기철이 황후의,세력을
믿고 방자하니 임금이 공주와 더불어 자주 이씨집에 오시었다.
임금이 원나라에 청하여 발아찰(勃兒札; 표창장)을 요구하니 원나라
임금이 [만만태자] 정안과 평장등을 우리나라에 보내어 발아찰을 주고
잔치를 베프니 임금이,공주와 더불어,연경궁에 행차하여,잔치를 베풀고
이씨부(李氏府)를,두고,경창(慶昌)이라,하였다.한편 원나라에서는,사신을
보내어 기철에게 요양성평장을 주었다가 바꾸어서 대사도를 주었다.
이때에 권겸(權謙)과 로책(盧책)이 다 딸을 원나라에 바쳐 총애를 얻고 있는데
기철과 권겸의,무리들과,형세가,서로 커서,의지하고,천하에 장차
난이 일어날 줄 알고 있으며 스스로 악을 쌓아서 하루 아침에 권세를
잃는다면 생명을 보전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미리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친척중의 심복들을 가리어 권좌에 심어놓고 몰래 붕당을 조성 하여
장차 큰,역모를 꾸미려고,각도의 병기를,검열하고,거짓으로,조서를
꾸며서 유언비어를 선동하고 몰래 통문을 발송하여 일시에 모여 거사 를
기약하는등 광분하였다. 이때에 임금은 이 사실을 미리 눈치채고
기밀을 전부 파악하였다. 거짓으로 잔치를 베푼다고 명령을 내리니
조정의 대신들이 모두,궁궐로,모였다. 임금은 판밀직 홍의(洪義)와,재신
배천경(裵天慶)등을 보내어 기철, 노책, 권겸과 기철의 아들 찬성사,
유걸(有傑)과 조카,완자불화(完者不花)와,권겸의,아들 만호,권항(權恒)과
사인 화상(和尙)과 노책의 아들 행성랑중 노제(盧濟)등을 불러들이니
기철과 권겸이 먼저 도착하였다. 이때에 밀직 경천흥(慶千興)과,황석기
(黃石奇)와 판사 신청(申靑)등이 은밀히 임금에게 고하기를 두 사람은
이미 도착하였고 그 나머지 아들 조카들 그리고 노책의 부자는 아직
오지 않았는데 만일 비밀이 새면 생각지 못할 변괴가 생기면 차라리
일찌감치 도모하여 처리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합니다 하니 임금도
그렇다 하고 바로 밀직 강중경(姜仲卿)과 대호군 목인길, 궁달적, 이몽
고대등에게 영을 내려 장사를 매복하였다가 불시에 나와 철퇴를 치니
기철은 응수하다가 꺼꾸라졌고 권겸은 도망치니 자문까지 격추하여
쳐죽이니 혈흔이 대궐문에까지 뿌려졌다. 드디어 기철의 추종자 2명을
죽이어 주교다리위에 매어달고 홍의는 군사들의 죽임을 당했다.
기철 권겸의 휘하 군사들이 낭패되어 사방으로 흩어지니 금위의 4번
군사들이 일시에 칼을,빼어들고 노상에서,전투가 벌어졌다.한편,강중경
(姜仲卿)등은 군사를 이끌고 노책의,집을 쳐들어가,잡아 죽이고 유걸은
천경과 더불어 대궐로 나가다가 도중에서 변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달아나 숨어 버렸으며 완자불화와 노제, 권항, 화상등 잔여 졸개들은
모두 도망가버리니,중외에 명령하여 모두,잡아 들이고,세집의 노비들과
모든 재산은,몰수하여 국고로 들이고,왕이 말씀하시기를,우리 태조왕이
왕업을 창건하여 통치를 거느리고 관직을 마련하고 법을 세우니 위와
아래가 서로 협조하여 법을 세워 오늘날에 이르렀고 우리 충선왕이
원나라에 가서 살게 되었을적에도 원나라 세조가 옛날 풍속을 고치지
않는 것이,좋다고,허락하고 돌봐,주셨고 우리나라도,또한 정성을,다하여
일찌기 신하된 나라의 도리를 어긴바 없거늘 오늘날 기철과 노책,권겸
등이 원나라의 넉넉히 돌봐주는 뜻과 선왕의 창업한 법을 생각지 않고
세를 몰아 임금을 능멸히 여기고 위엄을 조성하여 백성을 괴롭혀 그
죄의,큼이,더함이 없거늘,내가,그,원나라,임금의,집과 혼인이,맺어졌다는
이유로 그의 말하는 바를 다 들어 주었는데도 무엇이 부족하여 몰래 망령스러운
일을 꾸며 사직을 무너뜨리고자 하느냐 천지신명의 영험과 조종의 성령의 힘을
입어 기철등은 모두 이미 죄에 잡혔고 흉당중에서 도망간 자는,기유걸과 완자불화와
노제와,권항과 화상등은,죄가 근본에
있지 않고 한가귀(韓加貴)와 구정(具貞)등은 국령을 따르지 않고 방종
하여 반역자들을 도운고로 다 형전에 의하여 처리하고 반역자들을,
체포하는 자는 본인의 형편에 의하여 처리하고 반역자들을 체포하는
자는 본인의 형편에 의하여 공에따라 상을 주고 나머지 범인들은 모두
일체 소제하라하고 기철등이,남의,종을 뺐고,전답을 뺏은,것은,도첨의사
로 하여금 도감을 세워 사람들에게 신고토록 하여 각각 본 주인에게 돌려주고
기유걸과 완자불화와 노제와 화상은 잡아서 죽이고 권항은 홀로 반역죄에 가담하지
않았으니,죽이지 말고,제주로 유배시키고,그의
무리 김보등도 유배시켜라 하고 엄명을 내렸다.(기철전<奇轍傳>에서 ,
나왔으며 기노권<奇盧權> 3인사적이 공의 책훈 시말과 관련이 있는고로
병기 하였음)
노책은 교하(交河)가 본관이며 평양공 현(眩)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귀하게 되어 좌정승에 봉해지고 경양부원군에 봉해졌으며 공민왕,
조정때 딸을 원나라 임금에게 바치고 집현전 학사가 되었으며 뒷날
기,권(奇,權)으로 더불어 역모에 가담하였다가 죽었고 아들은 노제와
노진(盧禛)인데 노진은 도망가서 숨었다가 뒤에 대궐에 나와 자기는
죄가 없다고 주장하다가 순군에 내려져 죽음을 당하고 노진은 먼곳
으로 유배당헀다. (노책전<盧책傳>에서 나왔다.)
권겸은 정승 권부(權溥)의 아들이다. 충숙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다온
공로로 2등공신에 기록되었으며,동지밀직에 올랐다. 공민왕이,처음에는
복안부원군에 명했다가 원나라에 가서 딸을 황태자에게 바친후에,태부
감의 태감에 임명되었다.뒤에,기철과 더불어,역모에 가담했다가,죽었다
( 권겸전<權謙傳>에서 나왔다.)
윤소종(尹紹宗)이 상소하기를 병신, 기해, 신축, 계묘의 난은 조정
홍언박같은 여러분의 방패가 있었고 절충에는 이승경, 안우, 이방실,
김득배, 최영 등 여러 장상들이 있어서 공명이 높았으니 백성들의
귀와 눈에 익숙히 알려져 있다, (이인임전<李仁任傳>에서 나왔다.)
자료제공 ; 문정공파 문헌록(국역 양파실기<문정공 사적>편)
근 찬 ; 홍석(洪奭) 홍우정(洪宇正) 홍병철(洪秉喆)
작 성 ; 태사공 34세손 홍현표(洪賢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