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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라포션 이름 (파라샤) | 모세오경 (토라) | 예언서 (하프타라) | 신약 (브리트하다샤) |
베 미드바르 / 광야에서 | 민 1:1-4:20 | 호 1:10-2:20 | 눅 16:1-17:10 |
<단락 1> 민수기의 히브리어가 ‘베 미드바르’ (광야에서) 입니다. 광야란? 하나님의 음성이 있는 곳 (말씀의 장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화려한 애굽에 있었을 때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광야는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하는 장소이며,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누구도 우회하거나 생략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지식, 재산, 판단, 힘, 능력을 통하여 하나님보다 더 좋은 결정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본성을 잘 아시는 하나님은 광야가 아닌 곳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광야로 인도해 주십니다. 참고로 광야에서는 통장에 100억이 있든, 1원이 있든 그 돈을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순종 훈련과 나그네 삶의 훈련을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말씀합니다. 예슈아는 우리가 세상에 있을 때에는 환란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광야 훈련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것입니다. 광야훈련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을 때부터 시작되어졌고, 에덴동산 밖에서의 모든 삶은 광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이 임할 때까지, 우리는 광야 훈련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광야의 여정에는 수 많은 영적전쟁과 갈등, 위기, 싸움, 시련등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문제들은 사람의 생각과 경험에 의해 결정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우리 또한 광야와 같은 이 땅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돌보심과 공급하심, 하나님의 인도하심만을 따라가는 법을 광야에서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날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하여 하나님의 기적과 공급하심을 경험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그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광야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알아가는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방해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자아입니다. 그래서 광야는 우리 안에 있는 육체적인 속성이 드러나는 장소입니다. 불평, 원망, 불순종, 교만, 탐욕의 습성 (불순물)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던 곳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육체의 속성을 드러내시는 이유는 우리 안에 불순물을 제거하여,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광야는 자아가 죽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있는 불순물을 드러내실 때 회개하고 돌이킬 것인가 아니면 계속 원망하고 불평하다가 죽을 것인가는 우리의 반응에 달려 있습니다.
1. 민 1:1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 회막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각 남자의 수를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그 명수대로 계수 (히 : 낫쏘 : 계수하다, 들어올리다) 할지니 3. 이스라엘 중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모든 자를 너와 아론은 그 진영별로 계수하되
민수기의 시작은 이스라엘 백성의 인구 조사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계수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군대의 숫자를 계수하신 것입니다 (3절). 우리는 예슈아를 믿는 순간부터 영적인 싸움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시작은 우리의 육신의 것과 싸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통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이는 내 마음에 계신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지키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군사 훈련을 받아야 하는데, 그 훈련 장소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단순히 친목모임이 아니라, 여호와의 군대로 부르심을 받은 곳입니다.
창세기 2장 1절에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히 : 바예쿨루 핫샤마임 베하아레츠 베 콜 쩨바암) ’말씀합니다. 히브리어 ‘쩨바암’은 ‘짜바’의 남성 복수이며, 그 뜻은 ‘군대’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2장 1절을 히브리어로 직역을 하면, ‘하늘과 땅의 모든 군대가 완성되어졌다’ 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군대는 천사들이며, 땅의 군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 (이스라엘과 이방 교회)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군대들은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해야 하며, 부드러운 마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부드러운 마음을 소유한 자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 합니다. 그러나 굳은 마음을 소유한 자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할 것입니다. 우리의 이론을 무너뜨리지 않으면, 우린 여호와의 군대로 준비될 수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0절에 (현대인 성경)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각 사람은 육체에 머물러 있는 동안 자기가 행한 일에 따라 선한 일을 한 사람은 상을 받고 악한 일을 한 사람은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오멜 계수의 시간들을 보내고 있으며, 이 기간에는 사단과 싸워 승리의 전리품 (열매)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굳이 저렇게 힘들게 신앙생활 할 필요가 뭐가 있을까! 그냥 예수님 믿고 천국만 가면 되는 거지!’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단의 노예의 손에는 아무런 전리품이 없습니다. 끝까지 영적전쟁하며, 우리의 내면과 싸우며, 견디는 자가 영원한 생명을 취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20세 이상 남자들이 계수될 때에 레위인이 함께 계수되지 않는 것을 기분 나빠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각자 자기의 부르심을 바르게 알고, 그 일에 충성하면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열방 교회를 구분하셨습니다. 구별은 차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별하신 이유는 그들을 통하여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흘려주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부르심을 비교하지 말고 여호와의 한 군대로 연합하여 광야의 여정을 기쁨으로 나아가 우리의 목적지인 약속의 땅으로 도달해야 합니다.
1) 민 1:53 레위인은 증거의 성막 사방에 진을 쳐서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 진노가 임하지 않게 할 것이라 레위인은 증거의 성막에 대한 책임을 지킬지니라 하셨음이라
레위 지파는 성막의 중앙인 성소를 지키는 지파입니다. 그리고 성소는 하나님의 군대를 지휘하는 왕의 작전 지휘소와 같은 곳입니다. 그래서 레위지파 (예배자)는 하나님 나라의 전략을 이 땅에 풀어내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통하여 하늘의 영광을 이 땅에 풀어내시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왕이신 하나님께 머리를 낮추고 그 분을 경배하기 시작할 때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예배자는 자신의 생각, 감정, 계획, 뜻, 어느 것 하나 마음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막의 모습은 히브리어 타브 (ת : 언약, 끝이 난다)의 모양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새 예루살렘의 모형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2절에 ‘12.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13. 동쪽에 세 문, 북쪽에 세 문, 남쪽에 세 문, 서쪽에 세 문이니’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성막을 중심으로 3개의 지파를 하나로 묶어 동쪽은 유다, 스불론, 잇사갈 지파를 배치하셨고, 서쪽은 베냐민, 므낫세, 에브라임 지파를 배치하셨고, 남쪽은 르우벤, 시므온, 갓 지파를 배치하셨고, 북쪽은 납달리, 아셀, 단 지파를 배치하셨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12지파가 각자의 위치에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연결되어 있으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샬롬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단은 정렬되지 못한 연역한 부분들을 공격하여 하나님의 진을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이 때, 하나님은 연약한 지체를 정죄하기 보다는 그 연약함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나아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여 다시 충성된 자로 세워지길 원하십니다.마태복음 11장 6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는데도, 불구하고 고난과 핍박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순종은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에 근거한 순종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어떠한 고난과 어려움이 오더라도, 일관된 순종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순종이 의무에 근거한 순종이거나, 두려움에 근거한 순종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의 순종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세운 권위자의 말에 순종하고자 하는 열정이 없어지게 되며,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되어 실족하게 됩니다. 이 때, 우리는 실족한 마음과 맞서기를 결정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4장 10절에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말씀합니다. 우리는 많은 이들이 시험에 들고 서로를 배반하는 일들이 일어날 때에 어떻게 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할 것인지에 대한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시간을 통하여 인내는 연단을 (성화) 연단은 소망 (영화)을 이루는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롬 5:4).
(1) 민 2:2 이스라엘 자손은 각각 자기의 진영의 군기와 자기의 조상의 가문의 기호 곁에 진을 치되 회막을 향하여 사방으로 치라
하나님의 군대 진영을 히브리어로 ‘마하나임’을 사용합니다. 히브리어 ‘마하나임’은 히브리어 ‘마하네’의 복수형을 말하며, 이는 두 군대의 두 진영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군대는 두 진영 (하늘과 땅)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편 116편 15절에 ‘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라도 땅은 사람에게 주셨도다’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창조하신 목적 중 하나는 하나님 나라를 반사해서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완전히 이루어지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이 목적을 이루도록 우리에게 땅에 대한 통치권을 위임하셨습니다. 에베소서 1장 9절에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말씀합니다. 어떤 이는 하늘의 것은 신령한 것이며, 땅의 것은 신령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있어서 영과 혼과 육이 분리가 될 수 없는 것처럼, 하늘의 것과 땅의 것도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예슈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하늘과 땅은 통일되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도 하늘과 땅이 통일되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 방법은 내가 죽고, 예슈아와 연합되어질 때입니다.
민수기 4장 3절에 ‘곧 삼십 세 이상으로 오십 세까지 회막의 일을 하기 위하여 그 역사에 참가할 만한 모든 자를 계수하라’ 말씀합니다. 회막의 일의 뜻은 ‘군대가 행진하다’ 입니다. 그래서 레위인들이 회막에서 봉사하는 모든 일과 예배하는 일은 하나님 나라의 군대가 행진하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또한 교회에서 봉사하고 헌신하는 모든 행위는 하나님 나라의 군대로 행진하고 정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본성과 인격과 생각과 감정은 예배를 통하여 진리로 바뀌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예배가 우리의 영과 혼과 육체 가운데 아무런 영향을 주고 있지 못한다면, 그것은 큰 문제입니다.
(2) 사 1:11 ...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여호와의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에 친밀한 관계를 맺길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의도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종교적인 의무감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종교의 옷이란? 종교적인 행위를 통해서 잘못된 구원의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타협의 옷이란? 좋으신 하나님, 자비로우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이용해서 세상과 계속적인 타협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신앙과 삶,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분리시켜 놓은 것을 ‘이원론 (영지주의)’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신앙과 삶이 분리되어진 곳에 역사하실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