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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 2013년 윤홍식의 요한복음 강의 1강 - 허공에 울려 퍼진 예수님의 음성
2013년 윤홍식의 요한복음 강의 1강.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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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랫동안 “신약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 예수님의 실제 모습과 과연 어느 정도 일치하는가?” 하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윤홍식 대표님의 2013년 요한복음 강의”를 통해 얻을 수 있었습니다. 최근에 강의 내용을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해 보고 싶어서 그 강의(전체 8강)를 녹취했습니다. 그 녹취록을 차례대로 올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도반님들 중에는 저와 동일한 의문을 가진 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이 녹취록이 그런 분들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녹취) 2013년 윤홍식의 요한복음 강의 1강 - 허공에 울려 퍼진 예수님의 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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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이제 크리스마스를 맞아서 요한복음 한번 같이 살펴볼까 합니다. 요한복음 중에 여러분께 같이 공유하면서 말씀드리고 싶은 꼭지가 스물두 꼭지가 있어요. 그래서 하나하나 여러분과 함께 말씀을 나누고. 요한복음하면 요한이 편집한 복음이거든요. 그래서 저는 요한의 입장을 최대한 배제하고 저는 요한의 입장이 예수님이 입장과 다르다라고 확신합니다. 왜냐? 요한복음을 전체적으로 읽었을 때 느껴지는 예수님의 행적과 예수님이 살다 가신 그 의미와 예수님의 원 육성으로 듣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부분, 그 부분만을 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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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로 뽑아서 읽어봤을 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본인의 삶의 의미라는 것은 조금 달라요. 그래서 이 요한복음은 요한의 입장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최대한 배제하고 예수님의 원 육성을 우리가 같이 읽어보는 것, 그리고 그 육성을 통해서 예수님이 “나는 왜 이 지상에 왔고 나는 무슨 일을 했고 나는 어떤 성취를 했다. 이게 뭐다” 이 말씀하시는 것을 같이 들어보고자 합니다. 먼저 첫 번째 것 볼까요. 여러분이 기대하시는 태초에 로고스가 있어서 예수님이 우주를 창조했고 이런 얘기는 저는 요한의 설명이라고 보기 때문에 뺐습니다. 뭐 별로 어려운 얘기는 아닙니다. 이게 하느님(○)이죠. 하느님이 신이죠. 여호와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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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하느님 안에 질서가 있습니다. 동서남북을 지금 십자가가 회통하고(⊕) 있지 않습니까. 십자가(✝)만 따로 뽑아서 쓰기도 하고 그렇죠. 불교 같으면 뭐죠? 이렇게 그쵸. 이렇게(卍)로 하죠. 예. 그래서 만(卍)자로 쓰기도 하고 요거(卍) 말면 다시 이게(⊕) 돼요. 왜 다 똑같은 얘길 할까요? 동양은 인의예지, 오행을 쓰고요. 우리나라에 밤에 십자가 난리죠. 십자가 좋게 생각하면 이 십자가가 아주 중요한 의미입니다. 왜 옛날에 이걸 이렇게 많이 썼냐 하면요 인류가 보편적으로 이 십자가를 중시했어요. 어느 특정문명만이 아니라 다 중시했어요. 왜냐하면 고대에 하느님은 태양이에요. 유형의 신. 이게 태양을 하느님으로 본 게 아닙니다. 신이 모습을 드러낸 존재, 유형의 모습을 우리 인류를 위해 드러낸 존재로 태양을 봤어요. 태양 너머가 진짜 신이지만 하느님의 질서를 인간이 알 수 있게 보여주고 있는 존재가 태양이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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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 중심으로 열두 달이 있죠. 그래서 예수님이 태양이시기 때문에 제자는 12명이어야 돼요. 이게 다 정해져 있는 겁니다. 이렇게 이렇게 맞춰서 이해를 해야 돼요. 황도 12궁이 있죠. 태양이 12자리를 돌아다니죠. 그래서 제자는 12명이어야 되고, 동지 하지, 밤이 제일 길 때(동지) 낮이 제일 길 때(하지), 낮밤이 같을 때 춘분 추분, 십자가는요 이 사계절을 상징하는 겁니다. 춘하추동, 이 4가지가 춘하추동이 동양에서 인의예지의 핵심이거든요. 우주의 춘하추동이 있듯이 인간한테는 인의예지가 있다. 이게 우리 동양정신인데요 인(仁) 봄처럼 사랑하고, 여름처럼 화려하게 예절을 표현하고, 가을처럼 추상같은 정의를 집행하고, 겨울처럼 씨앗이 정보를 품고 있듯이 어떠한 움직임은 없지만 옳고 그름에 대한 정확한 판단은, 지혜는 갖고 있어야 된다. 요게 다 우주에 있는 십자가를 보고 인류가 배운 지혜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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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십자가로 표현합니다. 만 년 전에 아메리카 인디언들 이야기 읽어도 십자가로 우주를 이해해요. 그리고 그 중심에 우리가 있어야 된다. 그래서 이런 십자가로 모든 걸 설명하는 겁니다. 그래서 앞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이건 또 뭐겠습니까? 결국은 예 하느님의 질서 안에서 완전히 하나가 됐다는 거죠. 이 불완전한 육신은 버려두고, 육신은 사망하지만 십자가를 통해서 온전한 하느님으로 부활했다는 것을 상징하구요. 이 십자가는, 각자 너희 십자가를 지고 날 따라와라 이런 얘기하실 때도 있죠. 자기 안에 있는 하느님의 질서예요. 하느님의 법. 자 그러니까 하느님은 단순한 이런 질서만이 아니죠. 우주를 경영하는 주재자잖아요. 주재자와 주재자가 따르는 이 법, 법칙, 질서 이게 지금 로고스거든요. 그래서 지금 요한은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했냐면요 하느님과 예수님은,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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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만의 이해 방식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얘기하신 게 아니에요. 그래서 제가 요한복음에서 이 부분을 얘기는 안 했습니다만 알아는 두시라고 제가 얘기합니다.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 이 질서, 이 질서가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하느님, 주재자인 하느님은 여호와고 그 질서가 로고스. 이건 원래 나눌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이해되시죠. 하느님과 하느님이 따르는 질서가 어떻게 나눠집니까. 하지만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고 하느님과 함께 있었고 그래서 하느님이 우주를 창조할 때 질서대로 창조했을 거 아닙니까. 춘하추동 동서남북 다 질서대로 창조했죠. 인간을 하나 만들어도 다 이 질서에서 나왔죠. 그래서 이 온 우주를 창조하신 그 질서, 로고스를 예수님이라고 본 겁니다. 하느님과 동체로 본 거예요. 그래서 이 요한 그런 철학적 입장이에요. 예수님에 대해서 그렇게 이해했어요. 이것은 전 요한의 입장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얘기하신 적이 없다는 거죠. 이해되시죠. 예수님은 이렇게 얘기 안 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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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따르던 제자들이 바라본 거죠. 예수님은 아버지랑 한 몸이니까 태초부터 한 몸이었을 거고 그러면 태초에 우주를 경영하는 주재자와 그 경영자가 따르는 질서를 둘로 나누어봤을 때 요 쪽이 예수님인가 보다라고 이해를 한 겁니다. 이렇게 알아두세요. 요한복음은 이런 입장에서, 즉 태초에 로고스가 인류가 하도 험하게 사니까 인류한테 인류를 영생에 이르는 길을 열어주려고 이 로고스가 잠시 인간으로 모습을 보였다는 거예요. 원래 인격이 아니죠. 신이 잠시 인간으로 모습을 보여서 십자가에서 또 돌아가시면서 다시 하느님한테로, 하느님으로 복귀해야 되죠. 그런데 이런 얘기들이 예수님 얘기랑 안 맞는 건 뭐냐면요 예수님은요 “나 가있는 곳에 너희를 또 데려갈게” 이런 식으로 얘기한단 말입니다. 만약에 이 요한복음의 논리대로 맞으면 예수님은 그냥 로고스로 복귀해야 돼요. 신과 원래 둘이 아니기 때문에, 원래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데 예수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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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에서는 그런 식으로 얘기가 전개되지 않는다는 거죠. “내가 우주를 창조했어.” 이런 얘기도 안 하셨고. 예. “나 있는 곳에 너희도 데려 갈게.” 그래서 이런 식이 아니라 예수님은 벌써 자기를 인격으로 생각해요. 그래서 “나랑 아버지는 틀려. 같으면서도 서로 틀려. 내가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살기 때문에 성자이지만 성자와 성부는 달라.” 어떤 제자가요 “선하신 이여” 하니까. “난 선하지 않다. 오직 선한 한 분은 아버지만 선하다.”(마가복음 10:17,18 참조). 아들과 아버지는 다르다는 얘기를 하고 계신 거예요. 진짜 이거는요 그냥 나눌 수 없는 하느님 그 자체예요. 거기에서 예수님과 하느님의 관계를 설정해보려는 시도도 많이 있지만 예수님의 원 뜻을 존중해서 이 자체가 사실은 하느님이고 이 하느님을 인격을 통해 구현하신 성자가 예수님이다라고 접근하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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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이 옳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가 볼 때. 그래서 예수님은 그럼 어떤 존재인가요? 본인 안에 있는 신성, 이게 우주적으로 존재하는 하느님은 성부고 내 안에 들어와 있는 하느님은 성령이라고 제가 말씀드렸죠. 성령이 하자는 대로 사랑할 때 사랑하고 정의로울 때 정의롭고 조화로울 때 조화롭고 지혜로울 때 지혜로운 그런 존재가 성자거든요. 이거는요 이런 하느님이, 우주를 경영하는 이 하느님이 할 수 없는 또 다른 영역입니다. 그래서 성자가 위대한 거예요. 왜냐하면 우주는 질서정연하게 돌아갈 지라도 인간은요 모델이 없으면요 영생에 이르는 길을 알 수가 없어요. 우주가 지금 칼같이 돌아가죠. 근데 우리는 왜 모르죠? 우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몰라요. 춘하추동으로 돌아간다는 얘기를 오늘 처음 듣고 놀래신 분도 있을 수도 있잖아요. 밤낮으로 보고 살지만 “그게 우주의 질서였다고!” 이걸 누가 얘기해줘야 되나요? 입 달린 사람이, 뇌 달고 입 달고 감정 있고 생각 있는 인격이 와서 얘기를 해야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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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모르십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분을 너무 극적으로 쓰신 거예요. 그런데 큰 뜻은 같아요. 그런 질서를 말로 해주는 사람이 왔다는 거예요. 그래서 말씀이 육신으로 오셨다. 그런데 너무 예수님을 하느님하고 동급으로 설명하려다 보니까 너무 좀 추상적으로 된 면이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이해하지 말고 예수님의 말씀을 가지고 하나씩 이해해보면 예수님은요 아버지 뜻 그대로 사는 인격이에요. 본인은 그렇게 생각해요. “아버지랑 나를 같이 말하지 마라. 하지만 난 아버지 뜻 그대로 살고 있다.” 이런 면에서는 아버지랑 하나로 얘기할 때도 있어요. “내가 진리다” 할 때는요 “내가 지금 아버지 뜻 그대로 얘기하고 있기 때문에 내 말이 진리”라는 거예요. 내 에고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 지금 나를 통해 나오는 이 신성이 진리라는 거예요. 결국 아버지와 함께하는 그 순간에는 나와 아버지가 하나가 되면서 “내가 진리다”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거구요. 또 이 에고의 입장에서 볼 때는 겸상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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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다. 아버지랑 나랑은 다르다. 또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는 겁니다. 요 두 가지를 다 이해하셔야 돼요. 이게 이제 예수님 원 뜻을 하나씩 우리가 이해해 가보는 거예요. 역사스페셜 보듯이 보셔도 되고, 과연 요한복음의 참 뜻은 뭘까? 뭐 요즘 제목 붙이는 대로 “충격, 예수님의 참뜻은?” 뭐 이제 “예수님이 살다 가신 뜻은?” 이런 느낌으로 좀 흥미진진하게 한번 봐보세요. 이게 같은 자료도요 약간 다른 시각으로 보면 달리 보입니다. 신기해요. 늘 다니던 길도요 내 마음이 바뀌면 다르게 보이거든요. 특히 이 경전 같은 거는요 그게 심한 부분이에요. 내가 뭔가 삶에 대한 이해가 조금만 나아져도요 경전에서 다른 게 보입니다. 그래서 이 경전은요 죽을 때까지 읽어야 돼요. 우리가 그 성인의 수준에 도달할 때까지, 도달해도 또 재밌겠죠. 또 다른 재미가 있겠죠. 도달해가는 과정에서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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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바뀌어요. 어제의 식견으로 보고 얻은 재미랑 오늘의 식견으로 또 보면 또 다른 걸 봅니다. 이게 왜 이런 게 있었지? 경전에 이렇게 쓰여 있는데 왜 난 몰랐지? 이런 걸 매일매일 체험하시는 분이 매일매일 영적으로 성장하시는 분이고 1년 전에 봐도 똑같고 2년 전에 본 걸 봐도 똑같다면요 지금 상당히 정체돼계신 거예요. 삶에 전혀 영적 진보가 없으신 삶이에요. “혹시 내가 예수님 수준인가?” 이러지 마시고 심각한 수준이란 거예요. 매일매일 우린 진보해야 돼요. 우리가 그렇게 완벽한 존재가 아니거든요. 지금 저는 그런 관점에서 1차적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시는 게 옳은가? 제 입장에서 저는 제 말씀이 맞는지 또 입증을 한번 해드려야 되니까 요한복음을 통해서 한 구절 한 구절 읽어가면서 또 말씀을 나눌게요. 먼저 그 앞부분에 1장 2장에서는 저런 얘기가 나옵니다. 그거를 제가 빼고 바로 3장 1절로 들어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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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1절로 21절에서 무슨 얘기를 하냐면요 1. 바리새인 가운데 니고데모란 사람이 있었는데. 아 제가 이 얘기 지금 빠뜨리고 왔는데 이 요한복음을 하려고 할 때 제가 늘 마음에 신경 쓰이는 것은 저는 웬만하면 제가 번역해서 하거든요. 성경은 영어를 번역해야 되잖아요. 전 주로 한문 번역은 자신이 있는데 영어 번역은 시간이 좀 걸려요. 그래서 산상수훈 할 때도 힘들었거든요. “아 이거 그거 때문에도 하기 싫은데” 이런 게 좀 있었어요. 그래서 다행히 지금 홍익학당에 홍익어학당이 생겨가지고요. 제 영어 자막을 넣는 작업을 많이 해주십니다. 그래서 그분들께 의뢰해서 요한복음을 좀 번역해 주십사 해서 제가 작년에 산상수훈 할 때 번역한 부분들하고 새로운 부분을 번역해서 합친 겁니다. 그래서 그분들 덕에 쉽게 지금 제가 요한복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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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게 됐습니다. 자 먼저 1절에요. 1. 바리새인 가운데 니고데모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유대인 종교 지도자회의 일원이었다. 유대인 종교지도자죠. 아주 좀 거물입니다. 이런 분이 이제 예수님 찾아와서 질문할 정도면요 이분도 되게 흔들린 거죠. 기존 지식층한테서는 절대 들을 수 없는 얘기를 예수님이 하시니까. 로고스의 증인이잖아요. “아버지는 이래”라고 바로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이게 대단한 건데요. 인류에서 이런 성자가 귀해요. 예수님만 성자라고 생각하지 마시고요. 깊이와 역량의 차이는 있지만 많은 성자들이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그런 성자들을 선지자라고 하죠. 예언자나 선지자. 그분들 다 성자들이세요. 어떤 게 성자라고 하느냐? 하느님, 아까 그 신의 질서를 상징하는 하느님이 무형입니다. 보이질 않고요. 무형의 세계이기 때문에요. 이걸 우리가 인간이 볼 수가 없고 들을 수가 없으니까 믿을 수가 없는 겁니다. 춘하추동은 우린 늘 보지만 춘하추동을 질서정연하게 만들어가는 이 무형의 신은 우리는 모르거든요. 오감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생각 감정의 세계도 아니에요. 그러면 이걸 영감을 통해서 직감으로 아시고 우리한테 생각과 말과 이런 모양으로 보여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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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는 분이 나와야 되거든요. 그래서 여기는 제가 이제 성령, 우리 안에 있으면 “성령”이고 우주적인 입장에서 “성부”라고 합니다. 같은 자리예요. 성부랑 성령이 다를 수가 없죠. 아버지의 영입니다. 진리의 영이에요. 그래서 성령은 진리의 영이라고 요한복음에서 얘기합니다. 이 진리의 영이 우리 안에 있는데, 성령이 우리 안에 있는데, 어디다가 중간을 하나 설정할까요. 우리의 영도 하나 넣을게요. 원래 이게 지금 같아요. 우리의 영도요 우리의 영이 사실은 성령입니다. 굳이 제가 한 번 나눠 봤어요. 성령과 여러분의 영, 여러분의 영은 사실은요 성령과 다른 의견을 낼 수가 없어요. 따라서 같습니다. 여러분의 영을 찾으시면. 그래서 예수님이 기도드릴 때 영과 진리로 하라는 게 여러분의 혼부터 못 믿어요. 자 보세요. 여러분의 혼은 뭐죠? 혼은 여러분의 지성. 여러분의 지성이 불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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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죠. 의지. 여러분은 꼭 진리를 의지하나요? 안 그렇죠. 그다음 뭐죠? 감정. 여러분은요 진리에 맞게 울고 웃나요? 안 그래요. 내 욕심 때문에 울고 웃을 수가 있죠. 이 혼의 세계, 그 다음에 육의 세계가 있습니다. 자 이 혼과 육이 분리되는 게 죽음이죠. 그런데 예수님이요 “나를 따르면 영생한다” 이 말은요 “죽을 때 혼과 육이 분리되지 않을 거다”라는 확신이에요. 요거 아주 신비한 얘긴데요. 이 육신은 분명히 죽거든요. 왜냐? 이 육신은요 여러분 가지고 하실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뭐라고 했냐면요 썩어 부패할 몸이라고 했거든요. 이것은 지구 거예요. 지구 걸 가지고 하늘나라 갈 수가 없습니다. 혼은 영혼은 원래 하늘 거지만 육은 지구 거예요. 그러면요 육이 아닌 또 다른 육, 섞지 않는 영적인 육을 만들어야 돼요. 여러분 안에서 찾아내셔야 돼요. 이게 영적인 파워예요. 엄청난 영적인 파워를 얻으신 분들만이 갖고 있는 이 영적인 몸, 썩지 않는 몸에 대해서 바울도 얘기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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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부활의 날에 나중에 이걸 하늘이 한번 쏠 날이 온다라고 얘기하는 게 뭔가 한번 우리가 들림을 당할 거다. 휴거(携擧)니. 단체 부활이죠. 그런데 예수님의 이 요한복음과 생전 어록에 제일 가까운 도마복음을 보면요 예수님은 그렇게 얘기 안 하세요. “지금 얻으라”고 해요. “지금 너가 영생을 얻어야 죽음을 맛보지 않으리라.” 나중에 단체 부활은요 그거는 뭐죠? 뭐 패자부활전 같은 거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재밌죠. 지금 얻으셔야 돼요.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이에요. 지금 영생을 얻어야 됩니다. 죽고 난 뒤에는 답이 안 나옵니다. 그러면 뭔가 얘기하셨다는 얘기예요. 지금 자료가 온전하지 않아서 그렇지 예수님은 이런 부분에 대해서 얘기를 많이 하셨을 거예요. 그런데 제가 그 자료를 찾다가 놀란 게 도마복음에는 이런 부분에 대한 내용이 엄청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지금 도마복음은 정경이 아니라고 안 보시는데 오늘 제 강의 요한복음을 듣고 이해하시고 도마복음을 보시면요 도마복음도 별 얘기가 아니고 요한복음하고 이어진다는 걸 아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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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가주시면 아주 고맙겠어요. 제가 뭐 얻는 건 아닌데 제가 좀 뭔가 이렇게 가슴이 뚫리지 않을까. 기존에 워낙 왜곡된 상들이 많아서 이런 얘기하기가 조심스럽지만 저는 제가 확신을 얻은 게 있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여긴 영의 세계죠. 여긴 혼의 세계. 여러분 지금 기도드릴 때 영으로 하셔야지 혼으로 하면 안 돼요. 영으로 하시려면요 영은요 순수한 양심의 세계고 여러분 직관의 세계입니다. 양심과 여러분의 직관은요 성령과 위배되지가 않고 성령과 하나예요. 성령의 뜻을 대변하기 때문에 여러분 안에 이미 성령이 다 있으세요. 교회를 다니건 안 다니건 다 있으세요. 요한복음을 잘못 해석하면요 꼭 교회에 다녀야 성령이 생길 것처럼 얘기를 하시는데 바리새파들한테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냐면? 바리새파는 예수님 믿지도 않죠. “그대들 안에 이미 천국이 있다”(눅 17:20-21 참조)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왜 일반인들한테 없겠어요? 예수님이 “독사의 자식들”(마 3:7 참조)이라고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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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안에도 이미 천국은 있다라고 성경에서 얘기하고 있거든요. 여러분 안에 있습니다. 왜냐? 여러분 안에 하느님의 질서가 없다면요 여러분은 지금 존재하실 수가 없어요. 이게 하느님을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나는 하느님 없어도 잘 살고 있었는데 하느님한테 한번 의지해 볼까 해.” 이게 지금 말이 되는 얘기입니까? 하느님이 없다면 우주가 존재할 수도 없고 굴러갈 수도 없어요. 여러분이 보고 듣고 말하고 할 수가 없어요. 하느님이 여러분 존재의 본질이기 때문에. 그래서 여러분 안에 “나는 천국이 없을 거 같아요.” 이게 말이 안 돼요. 그래서 불가에서 선문답에서 그 하느님 자리, 불성 자리를 뭐라고 합니까? “저는 불성이 없는 것 같아요.” 그럼 뭐라고 하죠? 술을 아주 엄청 마신 놈이 술 마신 적이 없다고 하는 거나, 잔뜩 취해 있는데. 아니면 어려운 말인데 병정동자, 갑을병정의 병정이 불이거든요. 불 담당한 신을 병정동자라 그래요 “병정동자가 나한테 와서 불을 찾는구나”(丙丁童子來求火) 이미 그 말을 하고 있는데. “저는 불성(佛性)이 없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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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요 “그 말 하고 있는 너가 부처다.” 지금 그 말을 누가 하고 있는데요? 자 그 말은 혼의 세계에서 육의 세계에서 나온 거지만 그 말을 하려면요 어떤 존재가 있어야 돼요. 그리고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는 그 뿌리가 있어야 돼요. 그 바탕이 어딜까요? 다 하나입니다.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그 자리예요. 여기에 차등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것 자체가 아버지를 잘 이해 못 하시는 겁니다. 우주의 아버지 아닌 존재가, 또 만든 존재가 있나보다 이렇게 세우는 것만큼 우주의 유일한 이 신을 못 믿는 말이 없어요. 유일한 신을 안 믿고 계시는 거예요. “우주가 유일신이다. 오직 아버지 자리밖에 우주를 굴릴 수 없다.” 이걸 아신다면요 다른 종교도 같은 눈으로 보셔야 돼요. “아버지가 저쪽 문화에서는 저렇게 얘기했구나”라고 아셔야지 “저기는 다른 아버지가 얘기했을 거야. 우리 아버지 아닐 거야”라고 하는 건요 그 발상이 참 편협한 발상입니다. 그게 영으로 보는 발생이 아니고 혼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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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발상이에요. 자기 문화권, 내 우주, 무지, 아집. “내게 최고야. 우리 교회의 아버지가 최고지 저쪽 교회 아버지는 약간 힘이 약한 것 같애.” 이런. 인간은 나누면 끝도 없어요. 인간은요 뭐든지 쪼갤 수 있고 나눌 수 있어요. 그 능력이 있다는 거 아시잖아요. 그런 사람들 말을 듣고 싶지 않죠. 영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듣고 싶죠. 그러니까 얼마나 기다렸습니까. 기득권, 그 바리새파 기득권층은요 아무도 이런 얘기를 안 해줬어요. “십계명 지켜. 천국 갈 수 있어.” 십계명을 자기들도 지켜요. 그러면서 아랫사람들을 무시해요. “난 천국 가고 너네는 못 간다.” 예수님이 와서 아주 기분 나빠했던 게 이겁니다. 성령은 어디 가버리고 없고 이 혼의 세계에서 욕심을 가지고 천국 가고 싶다는 의지와 나만이라도 어떻게 구원 받고 싶은 이런 욕망으로 십계명, 계명만 지키면. 계명은 외적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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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으로 지금 성령에서 나오는 행위가 아니라 혼이 욕심으로 하는 이런 계율들은요 외적인 것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지금 거짓된 마음으로도 우리가 자선을 베풀 수 있고 거짓된 마음으로 기도할 수도 있고 다 할 수 있거든요. 근데 나는 기도했으니까 자선했으니까 하고 위안하고 있더라는 거죠. 이걸 예수님이 와서 찌르셨는데. 자 예수님 같은 성자가 귀한 게 성령의 이 무형의 소리를요 누군가가 육신을 가지고 오셔서 혼을 가지고 생각을 가지고 의지를 가지고 감정을 가지고 얘기를 해줘야 돼요. 누가 얘기해주지 않으면 우리는 몰라요. 그래서 이 성자가 그렇게 귀한 겁니다. 그 성자 중에 지금 이 요한복음의 입장에서는, 요한복음에서 다루는 자료들을 보면 예수님은 성자 중에 제일 탑, 성자 중의 성자라는 입장인 겁니다. 그런데 이게 불교처럼요 “수행을 해서 그 자리에 갔느냐” 또 기독교 입장에선 “아니다. 우리 아버지는, 우리 하느님은 로고스에서 그냥 왔기 때문에 공부를 한 게 아니고 아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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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상할 수 없다. 다른 성자들하고 겸상할 수 없다.” “같은 성자시잖아요.” 이 말 제일 싫어하시죠. 교회의 다니시는 분들. “어허 겸상 안 돼. 예수님은 신, 다른 사람들은 사람.” 그렇게 보지 마시고요. 그런 걸 제가 뭐라고 말씀을 안 드릴게요. 다만 그런 기준을 가지고 보지 마세요 일단.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읽으시려면 예수님은요 사람이라는 게 포인트입니다. “나는 사람의 아들(인자人子)”이라고 얘기하셨죠.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안 하시고 본인이 얘기할 때 늘 “난 사람이 아들이야.” 나는 지금 인격을 가지고 있고. 인격을 가진 이상에서는 인격을 갈고 닦아서 더 아름다운 인격을 만들게 노력해야 되는 존재예요. 그런 존재, 많은 욕망의 휘둘림, 악의 유혹이 있다는 얘기에요. 인격을 가졌다는 얘기는요 인격이라는 것은 영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이원성의 세계입니다. 선악이 갈려요. 그리고 악의 유혹이 필연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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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을 가지고 있는데 악의 의혹을 안 받는다. 이건 말이 안 되는 얘기입니다. 그게 이 인격을 가지고 지상에 오는 그 일의 위험성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사랑해서 오셨는데 예수님이 뭘 무릅쓰고 오신 걸 이해 못 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오셨어도 되게 편했을 거야. 여자를 봐도 담담하고 선(善)만 보이고 악은 안 보이고.” 그러면요 예수님이 위대하지가 않아요. 그건 여러분하고 아무 관계도 없는 얘기에요. 예수님이나 하는 걸 여러분이 공부하면 뭐 하겠습니까? 예수님이 중생을 위해 왔다는 건요 모든 조건을, 게임의 조건을 중생이랑 똑같이 하고 왔다는 겁니다. 거기서 이겨내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왔다는 겁니다. 모든 불경도 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부처님이 지상에 왔을 때는요 최악의 조건에 태어나서 공부를 해서 “욕망을 이렇게 극복해라” 하고 보여주고 가는 겁니다. 제가 늘 인생을 게임에 비유하는데요 예수님 같은 분들은 이분들이 만렙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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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 아세요? 게임에서 최고 레벨, 레벨 끝까지 채운 사람. 가득 찰 만(滿)자에 레벨 렙자 해서 만렙인데요. 만렙입니다. 해서 게임의 만렙이요 다시 캐릭터 하나를 새로 키우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게 예수님이 지상에 다녀가신 본뜻이에요. 모든 불경이 그리고 있는 부처님의 중생 구제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 뭐냐면요? 다시 태어나요. 그래서요 중생들한테 보여줘요. “자 봐. 괴물 이렇게 잡고, 포인트 이렇게 모으고, 아이템을 이렇게 이렇게 키워서 자 다시 극락 가지. 하늘나라 가지. 이렇게 해.” 이게 성자가 지상에 다녀가신 본뜻이란 거예요. 이걸 이해 못 하시고요. “예수님이 지금 본인 이름 달고 다 외상할 수 있게 해 줬으니까 우리는 술집 가서 예수님 이름만 대면 그냥 무상으로 구원이 나와. 예수님이 다 값 치러놓고 가셨어.” 이렇게 믿는 건 얼마나 욕심이고 무지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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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닦겠다는 얘기가 없죠? 이 욕심 많은 혼이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그런 분들 구원하러 오신 게 아닙니다. 그런 분들은요 예수님이 이러실 거예요. “나의 무리가, 나의 양이 아니다. 내 양이라면 내가 하는 말 알아듣고 내가 뭐 땜에 왔는지 알 텐데 그런 얘기를 하는 거 보면 전혀 내 양무리가 아니다”라고 할 겁니다. 왜냐?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통해서 계속 얘기하시는 건 여러분의 인격의 전면 개조예요. 나 믿으면 구원한단 말 안 하세요. 마태복음에서 뭐라고 하나요? “주여 주여 하는 자가 천국 가지 못 할 거다. 난 니들 모른다. 아버지의 뜻을,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자만이 간다.” 여러분의 육과 혼을 통해서 하느님의, 성령의 질서, 사랑과 정의를, 사랑과 정의가 하나로 딱 만나면 뭡니까? 황금률이에요. “내가 상대방이라면 원할 그거를 상대방한테 해줘라.” 반대로 말하면 뭡니까? “내가 상대방이라면 원치 않을 그것은 상대방한테 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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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사랑과 정의의 극치입니다. 황금률만 지키면 된다는 겁니다. 황금률을 실천하는 사람이 예수님 제자지 이거 안 지킨 자는 내 제자 아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아니다.” 이렇게 얘기하셨잖아요. 여러분 이런 거 볼 때 눈을 풀고 보세요. 그러다가 “나를 믿으면 되느니라.” 오! 오케이. 이렇게 좀 뭔가 노력하라는 구절에서는 눈이 흐려지고 공짜로 뭐 준다 하면 눈이 번쩍 떠지는 이런 식의 수행은요 남이 뭐라고 하기 전에 본인 안이 공허해요. 내가 이렇게 해서 천국 가면 죄 많이 지은 사람도 와서 11조 내고 천국 가고, 그럼 나도 착하게 살려고 한 게 지금 무의미하지 않나요. “좀 더 탕아로 살다가 회개할 걸.” 뭔가 지금 예수님의 의도가 전혀 먹히지 않고 있다는 건데 예수님은 아니에요. “마음으로라도 간음하지 마라. 마음으로라도 딴 생각하지 마라. 속으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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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짓지 마라.” 이 말씀은 어디 가고 없고 예수님 믿으면 예수님이 그냥 술집에다가 아주 돈을 두둑이 줘가지고 “예수님” 하면 이렇게 바로 술 나오고 뭐 나오고. “우리 대신 다 쏴 주셨어. 우린 그냥 가서 구원 하나 주세요 해서 받으면 돼. 그 티켓 받고 바로 하늘나라 그냥 그대로 가는 거야.” 요게 참 와 닿죠. 저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저도 속에서는 “뭐 이렇게 해야 되나? 그렇게 저도 해주셨으면 좋겠다.” 이 마음이 있지만 내 양심이 그렇지 않다고 얘기를 하잖아요. 우리 양심이 “그건 좀 아닌 것 같다”라고 얘기하잖아요. 그래서 그런 부분에서 지금 예수님이, 성자가 인류에게 위대한 존재인 이유가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얘기해 줄 수 있는 존재는 성자 밖에 없어요. 제 선생님이 예전에 하신 얘기가 “자연은 말 없는 성인이고 성인은 말하는 자연이다.” 춘하추동은 성인이죠. 자연은 자연 질서 그대로 사는 존재죠. 그런데요 말을 못 해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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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은요? 말하는 자연이다. 말을 해줘요. “사랑해야 돼. 황금률 지켜야 돼. 뭘 해야 돼.” 요 얘기를요 우리 인간의 곁에서 얘기해줄 수 있는 이게요 대승 불교의 극치입니다. 예수님은요 그래서 전 항상 주장합니다. 예수님과 이런 복음과 대승경전을 전 따로 보지 않아요. 편협한 시각으로 안 보면요 예수님의 이 복음이야말로 대승불교의 극치고 선구(先驅)예요. 대승불교 경전들이 이 신약성서보다 뒤에 나온 게 많거든요. 전에 나온 거 제가 잘 몰라요. 신약성서가 더 빨라요. 신약성서에서 그리고 있는 이 보살상이라는 건요 중생구제를 위해 자기를 희생한 목자 얘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진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기를 희생한다(요한복음 10:11 참조).” 이런 발상이요 어느 대승경전보다 먼저 나오고 있다는 거 아셔야 돼요. 대승불교가 기독교 영향을 받았다는 걸 저는 그걸 확신하거든요. 저는요 아미타불(阿彌陀佛)은요 예수님의 다른 모습이라고 봐요. 왜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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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타불 신앙 자체가 인도 북서부에서 시작했는데 거기가 기독교 최초 도래지예요. 기독교가 처음 들어간 데예요. 캐시미르 지방. 거기서부터 아미타불 신앙이 퍼지는데 “서방에 극락이 있다. 거기 극락의 교주가 아미타불인데 아미타불 이름만 외도 극락 가게 해 준다더라.” 불교에는 원래 이런 얘기가 없었습니다. 초기불교에 어디 극락을 가요? 극락도 현상계이기 때문에 열반에 들어야 된다는 게 초기불교인데 극락을 얘기하고요. 이름만 외면 극락 갈 수 있다는 발상들이요 힌두교에도 일부 있긴 했지만 불교가 한 번도 그걸 취하지 않다가 갑자기 기독교가 들어온 그 시기 전후로 해서 기원후가 되면서 아미타신앙이, 정토신앙이 융성합니다. 하필 또 서방정토예요. 서쪽에 극락이 있다더라. 이상하지 않아요? 그래서 지금 학자 분들도 기독교나 조로아스터교의, 이런 다른 종교의 영향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불교에서 너무 이질적인 사상이 나왔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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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그런 사상이 아니고 끝없는 통찰과 위빠사나를 통해서 열반에 들어가는 게 목적이지 중간에다 극락이란 집을 짓고 거기 들어가는 게 목적이 아니었어요. 초기불교는, 소승불교는 우주에서 사라지는 걸 목표로 했지 극락이라는 좋은 세계 가는 걸 목표로 하지 않았다구요. 그런데 대승불교가 등장하면서 실제로는 기독교랑 거의 벽이 없어집니다.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저는 몰라요. 다만 제가 경전을 연구한 느낌은요 같아요. 용어만 바뀌어요. 여기서는 관세음(觀世音)이라고 부르고 아미타라고 하고, 저쪽은 지금 예수님이라고 하는데 제가 화엄경을 요즘 강의하지만 화엄경을 연구한 입장에서 보면 10지 보살들을 말하는 겁니다. 극락의 주인이 불교에서 10지 보살이에요. 화엄경에서 최고의 만렙. 10레벨까지 있는데 10레벨이라는 거예요. 왜 10레벨 유지할까요? 더 넘어가 버리면 신의 영역이에요. 하느님은 인간을 못 도와주죠? 그래서 성자 중의 최고의 성자를 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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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10지 보살이라고 그래요. 인간의 육신과 말과 이런 걸 다 할 수 있는 진리 그 자체, 진리이면서 인간의 중생성을 버리지 않는 존재, 그래서 부처라고도 하고. 진리 그 자체란 측면에서는 부처, 진리를 설명해주는 중생성을 같이 갖고 있다는 점에서는, 보리(菩提)는 깨달음이고 살타(薩埵)는 중생이거든요. 그래서 보살이라고 해서, 10지 보살이라고 하는 건요 중생성을 갖고 있다는 거예요. 생각 감정 오감을 다 갖고 있으면서 중생을 위해서 우주를 경영하고 진리를 가르쳐 줄 수 있는 위대한 존재, 해서 10지 보살이고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이런 분들은 다 10지 보살에 대한 불교의 각 문파마다 다른 이름을 붙인 것뿐이지 얘기하는 게 다 똑같아요. 다 정토의 교주예요. 거기에 제일 어른이 있는데 그분이 중생을 위해서 그 공간을 만들었고. 극락이라는 것은 아미타불이 만든 공간입니다. 무량수경(無量壽經) 이런 거 보시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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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타신앙에서 말한 정토는요 원래 있던 세계가 아니에요. 아미타불이 중생을 구제할려고 만든 거예요. 이상한 얘기죠. 초기불교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발상입니다. 이런 신앙이 생겨났다는 것은 저는 그걸 기독교랑 둘로 보지 않아요. 그리고 예수님이야말로 대승보살의 제일 화신이라고 확신합니다. 중생구제를 이렇게까지 설명을 잘한 분이 없어요. 지금 만약에 예수님의 얘기를요 아미타불이나 관세음 얘기로 바꿔서 해놓으면 여러분 구분 못 하실 걸요. 그렇다고 제가 하진 않겠지만. 구분 못 하실 거라는, 그렇게 같은 얘기예요. 화엄경(華嚴經)에 어떤 얘기까지 나오는지 아십니까? 10지 보살이 하는 작용 중에 하나가요 지상에 태어나 가지고 다시 수행을 해가지고 성불하는 모습을 보여준답니다. 딱 예수님 얘기죠. 예수님은 그렇게 이해하셔야 됩니다. 뭐 들어가지도 못 했네요. 니고데모라는 유대인 종교 지도자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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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원이, 유대인의 당시 아주 거물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물을 수밖에 없는 건요 예수님이 성 자라서 그래요. 다른 바리새파 율법학자들 얘기 들으면요 뜬구름 잡는 얘기, 추상적인 얘기, 추측하는 얘기, “하늘나라가 이럴 거야 아마.” 이런 얘기만 하고 있는데 예수님은요? “하늘나라에서 내가 왔는데” 하고 얘길 시작한다는 거예요. “거긴 이래. 아버지의 뜻이 구현되는 나라는 이래야 돼. 너희도 할 수 있어.” 이런 얘기를 한단 말입니다. 권위가 엄청나죠. 내적 확신에서 나오는 그 권위는. 그래서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따랐어요. 그래서 이분이 밤에 찾아왔다는 것은 대놓고는 못 찾아오는 거죠. 바리새파의 거물이니까 몰래 찾아와서 랍비시여. 자 요런 부분들 스승이죠. 랍비. 그래서 예수님이 랍비라고 불리셨다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요런 게 재미있는 게 불교에서 초기에 부처님은요 브라만이라 그래요. 이 승가(僧家)를 브라만들이라 그래요. 즉 기존종교랑 연결되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도 유대교와의 연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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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에서 랍비라는 스승, 마스터죠. 그런 칭호를 불렸다는 것. 부처님도 “우리가 진짜 브라만이야. 혈통으로 받는 브라만은 가짜고 우리같이 수행해서 얻은 브라만이 진짜야.” 해서 이 힌두교랑 연결선상에 있다는 거, 그 부분도 하나 말씀 드리고요. 2. 어느 밤에 그가 예수님을 찾아와 말하였다. “랍비시여 저희는 당신께서 하느님으로부터 오신 스승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시지 않으면 그 누구도 당신께서 행하신 그런 기이한 일들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안에 하느님이 계셔서 작동하고 있으니까, 역사를 하고 있으니까 당신이 우리랑 똑같은 살과 혼을 갖고 있지만 그런 엄청난 일들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 그거 알아볼 눈은 있습니다 이겁니다. 3.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들에게 진실을 말하노니 누구든지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니고데모한테 대뜸 센 얘기를 하시는데요. 다시 태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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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나라. 요걸 또 다른 표현으로는 위해서 나라. 성령으로 나라.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마는 지금 다시 태어나라라고 말한 이유가요 도마복음에도 또 비슷한 대화가 있어요. 거기서도 다시 태어나라는 얘기로 그 부분을 풀어야만 맞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했는데 다시 태어나라는 건요 지금 이게 성령으로 거듭나라는 거 플러스 여러 가지 의미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단순히 “위로 태어나라.” “성령으로 다시 나라.” 하면 이것도 같은 말인데요 느낌이 지금 “다시 태어나라”고 했을 때 사는 게 있어요. 그래서 넣었는데 자 보세요. 영은 원래 여러분 영은 지금 성령 그 자체예요. 여러분이 여러분 영을 지금 모르셔서 그렇지. 여러분의 양심, 여러분의 영감의 영역, 직관의 영역을 그대로 들여다보시면, 자 들어다 보시려면 뭘 해야 되죠? 지성 의지 감정을요. 어디 가서 명상법 돈 주고 안 배우셔도요 다 알 수 있어요. 여러분 생각이 지성과 의지가 두 가지가 있죠. 생각과 감정이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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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거 내려놓으시면 돼요. 그래서 지금 이 지성 뭐죠? 지성을 입 틀어막는 게 뭔지 아십니까? 믿음입니다. 이 말 저 말 하지 말고 딱 확신에 찬 상태로 만들고 의지를 갖다가 이것저것 아무 거나 원하시거든요. 하느님만을 소망하셔야 되고. 감정은요 하느님과 합일하겠다는 그 마음만 두셔야 돼요. 오직 하느님에 대해서 확신하고, 내 안에 성령 자리에 대해서 확신하고, 성령과 다시 합일할 것만 원하고, 하나가 돼서 둘이 아닌 상태를 도달하시면요 믿음 소망 사랑 안에 모든 수련법이, 명상법이 다 있어요. 제 얘기가 아니고 이런 거는 수많은 중세가톨릭 수도자들이 수없이 써놓은 얘기에요. 믿음 소망 사랑이면 우리 마음이 정화된다. 그래서 하느님과 하나가 돼요. 성령과 하나가 돼서 이 혼이 정화가 되겠죠. 믿음 소망 사랑이 꽉 차면 여러분의 혼이 정화가 되고 육이 정화가 돼야 되는데, 육은요 불완전한 육은 버리고요 온전한 육을 취하실 수 있어야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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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여러분 영은 다시 살아나게 되고. 여러분 영이 지금 원래 살아있지만요 여러분이 지금 여러분 안에서 성령을 못 느끼시죠? 그런 영을 죽은 영이라고 합니다. 영이 죽은 건 아닌데 여러분한테 있어선 죽은 영이에요. 여러분한테 있어서 산 영이 된다는 게 성령으로 거듭나는 거고 성령의 체험을 하시는 거예요. 근데 성령만 체험해서는 안 되고 여러분 혼이 정화돼야 되고, 성화라고도 하죠. 성스러워져야 되고, 불완전한 육신은 벗고 온전한 육신을 입어야 돼요. 왜 그러냐면요 이거는요 중세 아퀴나스나 이런 신학대전을 보면요 체계적으로 얘기가 나옵니다. 왜 이 육을 기독교에서는 포기하지 않느냐? 영 혼 육이 온전해야 하느님이 창조한 인간, 온전한 인간이 돼요. 하느님은 육까지 창조해놓고 인간이라고 했죠? 그렇기 때문에 육을 버리지를 않아요. 그래서 우리가 부할한다고 할 때도 다 온전한 육신을 얻는 것을 얘기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한 이야기가 왜 성경에서 중요하냐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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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육신을 가지고 나타나시죠. 그게 왜 중요하냐면요 온전한 인간이 되려면 육까지도 온전해야 돼요. 이게 기독교의 기본 정신이에요. 그래서 중세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보시면 우리가 천국에 가더라도 온전한 육을 갖고 있어야 된다는 얘기를 해요. 왜 그러냐? 안 그러면 영혼만 가지고 있으면 인간이 아니니까. 요거는건 좀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온전한 영 혼 육을 가진 온전한 피조물, 하느님이 창조하신 보람이 있는 온전한 피조물이 되시려면요 그분이 성자고, 그런 성자가 되려면요 모범 있어야죠. 모델이 있어야 되죠. 예수님이 모델이 돼 주려고 오신 거예요. 예수님이 지상에 왔다 가신 것은요 “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니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나만 믿으면 나를 제사지낸 거니까, 제사 지냈으니까, 너희 죄 이제 내가 싹 탕감해 주고 가니까 제사지낸 나를 믿으면 너희 죄도 자동으로 없어지는 거야.” 이 얘기하려고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의 편집은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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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편집은요 십자가에서 죽고 딱 끝나버리는 스토리로 간다는 겁니다. 핵심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게 핵심이 아니라 살아생전 예수님이 어떻게 하면 하늘나라 갈 수 있다고 보여주셨는지 그건데 그건 어디 가고 없고 예수님만 믿으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희생하셨으니까 우리가 예수님만 믿으면 끝난다”라는 얘기를 자꾸 한다는 겁니다. 산상수훈의 메시지가 제가 귀하다고 하는 게 거기에 어떻게 살아라는 게 다 들어있거든요. 그거 하면 천국 간단 얘길 하신 거고 요한복음에서는 실제 그거 해서 돌아가신 뒤에 하늘나라의 올라가신, 그 위대한 부활을 하신 그 내용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두 개를 같이 봐야만 전체 맥락이 온전하게 이해가 되실 거라는 거예요. 제가 그걸 말씀드리는 거고. 그래서 예수님이 지금 대뜸 니고데모한테 “다시 태어나야 돼.” 성령도 거듭나야 되지만 혼과 육도 사실은 다시 나야 돼요. 이 얘기까지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다시 나야 된단 말이 더 설명에 좋은 것 같아요. “다시 나야 돼.” 그러니까 니고데모가 뭐라고 하죠. “안 그러면 하느님 나라 못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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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혼 육이 온전하지 않은 사람은 천국에 못 들어가.” 지금 이렇게 얘기하면 저를 원망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지금 표 다 사놨는데 제가 못 들어간다고 하면 좀 그렇잖아요. 근데 이건 제 얘기가 아닙니다. 여러 신학자들과 경전에 나온 얘기를 제가 종합해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불교는 그럼 어떨까요? 아미타불이 이름만 10번만 외도요, 10번도 아니에요. 한 번만 외도 극락을 갈 수 있다라고 얘길 해요. 파격적이죠. 그런데 대승불교 이론에서도요 영 혼 육이 온전하지 않으면 못 들어가요. 그런데 왜 그렇게 얘기했냐? 불교에서는 방편이라는 거죠. 그렇게 해야 영이라도 거듭날 것 같아서. 아무래도 더 좋은 데는 가겠죠. 더 좋은 극락 같은 곳에 가기는 하겠지만 영 혼 육이 온전하신 분이 가는 극락하곤 또 차원이 다르다는 거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진짜 성자들이, 사람의 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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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사람의 아들 그러면요 사람의 모습을 한 성자를 말합니다. “사람의 아들만이 하늘나라 갈 수 있다” 이 얘기할 땐요 아무나 갈 수 있단 얘기가 아니거든요. 그래서 요건 좀 구분하세요. 우리가 진짜 진리를 믿고 온전히 진리에 투자했을 때 더 좋은 세계에 간단 얘기랑 예수님 같은 위대한 존재들이 사시는 성자들의 세계랑은 조금 구분해서 이해하시는 게 제가 여러 경전을 연구해본바 그래요. 불교도 그렇고 다 똑같습니다. 불교도 7지 보살 이상이 7레벨 이상이 가는, 8레벨 이상이 가는 세계가 색구경천이라는 극락이에요. 그런데 아미타신앙에서는 이름만 외면 갈 수 있을 것처럼 얘길 하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지독하게 이름만 외고 하다보면요 자기 성령을 찾게 돼요. 자기 안에 있는 불성을 찾게 돼요. 이걸 유도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라고 보시면 돼요. 왜냐? 성령을 찾았으면 이미 극락이잖아요. 또 다른 의미에서 이미 극락이에요. 이런 어떤 여러 가지 장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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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기 때문에 제가 지금 최대한 여러분이 좀 이해하실 만하게 설명을 드린 겁니다. 4.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묻기를 “이미 나이든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다시 태어나기 위해 엄마 뱃속에 다시 들어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5.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노니,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을 것이다(① 진리의 영인 성령의 각성과 ② 몸 안에 영원히 샘솟는 생명수를 갖추어, 영육의 온전한 갱생을 이루어 다시 태어나야 함.) 자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만으로 안 돼요. 물이라는 건요 생명의 물입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에서 물 그러면요 우리 안에 있는 생명수예요.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생명수 뭘까요? 이게요 여러분의 육신입니다. 영적인 육신을 이루는 에너지를 말해요. 어마어마한 신성한 에너지를 생명수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 생명수가 있어야 영생에 이를 수 있다는 얘기를 하세요. 그러면 생명수가 구체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냐 이런 얘기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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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복음에 훨씬 자세해요. 요한복음에서는 더 구체적인 얘기는 안 합니다. 자 보세요. 진리의 영인 성령을 당연히 각성해야 되고 우리 몸 안에 영원히 샘솟는 생명수를 갖추어야만 영육이 온전히 갱생되어 우리는 하늘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서 예수님이 6. 육체는 육체를 낳고, 성령은 성령을 낳는다.(썩어 없어질 육체를 통해 다시 태어나라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다시 태어나라는 것이다.) 육체는 육체를 낳고 성령은 성령을 낳는다. 성령을 통해서 얻은 몸이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육체적인, 부모님한테 물려받은 몸 말고 이건 지구에서 원래 유전되는 몸 아닙니까. 그 몸은 우리가 빌려서 태어나는 거잖아요. 이거 말고 하늘에서 받은 몸이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썩어 없어질 육체가 아니고. 바울이 그런 얘기를 하죠. 영원히 썩지 않는 그런 신성한 몸을 얻어야 됩니다. 이게 다시 태어나란 뜻입니다. 영육을 다 얘기하는 거예요. 성령과 물로 거듭나라는 얘기는요 성령은 영, 물은 육을 상징합니다. 7. ‘그대들은 다시 태어나야 한다.’라고 내가 말했다고 해서 놀라지 마라. 내 말 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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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지 마라. 이게 놀랄 만한 얘기죠. 다시 태어나야 된다고 하니까. 자 이게 비밀이요 여러분이 다시 태어나서 온전한 육을 얻지 않으면요 여러분은 보십시오. 죽음을 맞게 돼있어요. 혼과 육의 분리를 피할 수 없거든요. 하지만 온전한 육체를 얻으신 분은요 혼과 육이 분리되더라도 육체가 있기 때문에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라는 말이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1차적으로 죽음을 맛보지 않아야 된다고 했지 죽은 뒤에 다시 태어난다고 얘기를 안 하세요. 지금 죽은 사람들이 나중에 부활할 거야 하는 건 나중에 단체 부활, 유대인들이 믿고 있는 언젠가 우리가 다 부활할 날이 온다는 그 믿음 차원에서 얘기한 거고요. 본인이 제자들에게 얘기하실 때는요 반드시 죽기 전에 답을 내라고 합니다. 그래서 죽기 전에 거듭나야만 하늘나라로 갈 수 있다는 얘길 하시죠. “죽고 좀 기다려봐. 나중에 어떻게 해줄게.” 이런 얘기가 아니고 “죽기 전에 답을 내야 여러분은 영생에 이를 수 있다.” 예수님 얘기지 제 얘기가 아니에요. 저는 풀어 드리는 것뿐입니다. 거 요상하게 푸네. 이러실 수도 있는데요. 아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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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여러 구절을 맞춰보면 이렇게 푸는 게 맞는 거 같아서 이렇게 풉니다. 8. 바람은 불고 싶은 곳으로 분다. 너희는 단지 그것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뿐, 결코 바람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이도 이와 같다.”(불멸의 영적 육체를 갖춤.)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도요 여러분이 파악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런 존재, 영 혼 육이 온전한 존재를요 여러분이 파악할 수 없다. 이런 존재들만이 하느님의 나라에 갈 수 있다. 9.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라고 니고데모가 여쭙자,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니고데모가 묻자. 그러니까 단순한 성령의 각성이면요 니고데모가 지금 이렇게까지 묻질 않죠. 어 그래야 되나보다 하겠지만 너무 파격적인 얘긴 거예요. 이 율법학자가 듣기에도 종교지도자가 듣기에도 너무 파격적인 얘긴 거예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10.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그대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 이것도 모르느냐? 11. 내가 그대에게 진실을 말하노니,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우리가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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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증언한다. 나는 내가 본 것 얘기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대들은 우리가 전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그대들은 우리가 전하는 거. ‘우리’라고 하면요 나랑 하느님이죠. 내 안에 있는 성령과 그걸 내가 말로 통하는 나의 인격, 성자라는 예수의 인격으로 내가 얘기하건대 본 것만 얘기한다. 하느님 나라의 진실만 내가 얘기한다. 12. 내가 땅의 일에 대해 말을 해도 그대들은 믿지 않는데, 하늘의 일을 말한다면 어찌 믿겠느냐? 땅의 일은 증거가 다 있어요. 찾아가 보면 알 수 있는데도 내가 땅의 일도 얘기하는데 믿지 않는데 증거도 없는 하늘의 일을 얘기하면 어떻게 믿겠는가? 13. 하늘에서 내려오신 ‘사람의 아들(人子) 외에는 아무도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여기서 ‘사람의 아들’은 영육이 온전한 존재 즉 성자가 된 존재를 의미함. ‘아버지의 왕국’에 거할 수 있는 이는 오직 사람의 아들인 성자뿐! ‘온전한 영육’을 갖추어야 아버지의 왕국에 살 수 있음. 아버지의 왕국에 들어가려면 다시 태어나서 성령의 각성과 성화된 혼, 썩지 않는 영적인 육체를 갖추어야 함. ‘아버지의 왕국’은 2가지 의미를 지님. ① 하나님 ② 하나님의 질서가 구현된 성자들의 세계인 천국.) 저 하늘나라 사정은 알 수가 없다. 사람의 아들 성자만이 알 수 있다. 성부를 온전히 구현한 성자만이 하늘의 일을 알 수 있다. 너희들이 이해 못 하는 게 당연하다. 이 얘길 합니다. 자 이렇게 이해하시고요. 여기서 사람의 아들은요 영육이 온전한 성자를 말하고요. 아버지 왕국에 거할 수 있는 이는 오직 사람이 아들 성자뿐이라는 겁니다. 온전한 영육을 갖춰야 됩니다. 그 왕국에 들어가려면 성령을 각성해야 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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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세요. 성령을 각성해야 되고, 혼이 성스러워져야 되고, 온전한 육체를, 영적인 육체를 갖춰야 됩니다. 그래서 아버지 왕국, 이렇게 하면요 요한복음에서는 중요치 않지만 산상수훈이나 다른 복음들을 보실 때 아버지 왕국 그러면요 아버지 왕국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말하기도 하고 하느님의 질서가 구현된, 이 지상 말고요. 하늘나라를 말하기도 하고요. 둘 다 아버지 왕국이라 그래요. 왜냐? 보십시오. 하느님 자체가 아버지의 법이 구현되고 있는 곳이죠. 그래서 하느님 자체를 아버지의 왕국이라고도 합니다. 또 이 법대로 통치되고 있는 지상보다 더 고차원의 세계를 아버지 왕국이라고도 해요. 그러니까 “난 아버지한테 가야 돼.” 이 말이 지금 여러 가지 의미가 있죠. “다시 아버지랑 하나가 돼서 내 온전한 능력을 다시 되찾아야 돼”라는 뜻도 있고요. 아버지의 질서가 구현되어 있는, 아버지의 질서가 무시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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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지상 말고 “아버지의 질서 그대로 돌아가고 있는 하늘에 있는 왕국에, 천국에 가야 돼”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 지금 오해하시면 “그럼 예수님 밖에 그 세계는 못 가나 보다” 하시는데 그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와가지고 “지금 다시 그 하늘나라에 가는 방법을 다 내가 보여줘서 앞으로는 누구나 갈 수 있게 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본 제자들한테 “너희도 내가 데리고 가마. 그 천국에는 아버지 왕국에는 거처할 데가 많다. 내가 거처 미리 알아보러 가니까 나중에 너희도 다 올라올 수 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 가는 법을 얘기해 주려고 오신 거예요. 그런데 지상을 버리고 하늘나라를 가라는 게 아니라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오신 거예요. 땅에서 잘 살지 않은 사람은 절대 하늘나라를 못 가니까요. 이게 같은 말인데 다릅니다. “예수님이요 하늘나라 가는 법을 가르쳐 주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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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셨어요.” 그러면 우리식 이해로는 당연히 맞는 말인데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이 지상은 의미가 없었어. 빨리 하늘나라 갈 방법을 알아야겠어.” 이게 말이 안 되는 논리예요. 뭐냐 면요 이게 신기한 게 불경도 그렇고 지금 이 예수님 얘기도 그런데요. 지상에서 잘 살지 못 한 사람은 절대 위로 못 갑니다. 불경이 신기한 게 이게 7레벨 8레벨부터 극락을 갈 수가 있거든요. 그게 뭔 얘기냐 면요 7레벨 8레벨이면 이미 지상에서 법 없이도 끝내주게 살 수 있는 존재가 돼요. 그런 분이 하늘나라에 가요. 신기하죠. 지상에서 못 사는 사람은 못 가요. 영 혼 육이 온전하다는 것은 지상에서 아버지의 뜻대로, 하늘의 질서가 통하는 이 아버지의 뜻 그대로 자신의 마음을 경영하고 자신의 육신을 경영할 수 있는 사람이란 뜻이거든요. 그런 사람만 천국에 갈 수가 있어요. 지금 천국 갈 궁리하시는 분들은 못 가죠. 바리새파들이 그랬죠. 최소한의 십계명 정도만 지키고 나는 천국 간다고 설레어있는데 그분들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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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한 얘기를 한 겁니다. 니고데모한테 센 얘기한 얘기가 뭐냐 면요 “너 완전히 다시 안 태어나면 못 가.” 당연히 천국행 티켓 끊어놨다고 생각한 사람한테 “못 갈걸.” 이게 센 얘기죠. 그럼 이 사람이 놀라죠. “넌 이스라엘의 스승인데 왜 그것도 모르지?” 하면서 “지금 너 하늘나라 모르지?” 이겁니다. “난 아는데. 난 거기서 왔거든.” 지금 이 얘길 하시는 거예요. “난 아는데 그런데 너 내가 얘기하면 믿을 수 있냐? 내가 지상의 얘길 해도 못 믿는데 하늘나라 얘길 하면 못 믿을 걸. 지금 너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라는 얘기를 해 버린 거예요. 그럼 지금 바리새파 이상으로 지금 우리가 신앙을 잘하고 있을까요? 10계명도 잘 지키기 힘들거든요. 바리새파들은요 당시 이스라엘의 양반들이에요. 십계명은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그걸로 이렇게 목에 힘이 들어간 사람이에요. “쌍것들 난 양반인데.” 그거 예수님이 못 참으신 거예요. “너네도 못 가거든. 못 가는 건 똑 같거든.” 예수님의 말씀은 이거예요. 이해되시죠. 그러니까 십계명을 잘 지킨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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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테 예수님은 독사의 자식이라고 겁니다. 못 지킨 사람한테는 아예 얘기도 안 했어요. 예수님은 잘 지키는 사람들한테 “니네들 못 간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거예요. “오히려 순수하게 아버지 뜻대로 살려고 한 그 사람들이 간다.” 이런 메시지를 예수님이 지상에 다녀가신 의미를 곱씹지 않으면요 성탄절이라고 “우리가 오늘은 뭐 하고 놀지?” 이게 아니잖아요. 예수님이 지상에 다녀간 날을 그래도 기념하는 날이니까 한번쯤 생각해 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 그래서 온전한 영 혼 육을 가진 인간이 되라. 그런 인간들, 먼저 인간이 되라. 이런 말이 아주 중요합니다. 인간이 된 사람이 하늘나라도 간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자 그 다음 얘기 좋아요. 14. 모세가 광야에서 지팡이 위에 매단 청동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하나님의 온전한 분신인 성자는 들어 올려져 모든 사람의 빛과 모범이 되어 모든 사람들이 영생을 얻게 해야 함. 진리의 영인 성령의 각성과, 영적 육체의 획득으로 영육을 온전히 하고, 인류를 사랑하여 스스로를 어린 양으로 희생하는 사랑을 실천하여, 온전한 영생을 얻어 하나님의 왕국으로 올라가는 것을 사람들에게 몸소 보여주겠다는 뜻. 인류가 영생을 얻어 천국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 주기 위해 아버지의 온전한 분신인 예수님께서 몸소 지상에 내려오신 것임. ① 성령 ② 진리 ③ 영적 육체 ④ 계명의 실천 ⑤ 사랑을 두루 갖출 때 진정한 영생을 얻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으니, 나를 믿고 모범으로 삼아서, 내가 걸은 길을 걷고, 내가 가르친 진리를 따르면, 영생을 얻을 것이다.) 요 구절을 지금 많이들 보실 때, “아 십자가에 매달려야 된다는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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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기만 하면 우리는 구원 받는구나.” 지금 이렇게 이해하시는 구절 중에 하난데 이제 뜻을 잘 아셔야 됩니다. 모세 때요 사람들이 하느님하고 모세를 거부하다가 뱀한테 물려서 엄청 죽었어요. 모세가 하느님한테 간청합니다. 하느님한테 살려달라고 방법이 없냐고 하니까 청동 뱀을 만들어서 장대 높이 들고 있으면 사람들이 그 청동 뱀을 보면 소생한다는 거예요. 다시 살아난다는 거예요. 보고 살아났어요. 즉 성자를 그렇게 사람들이 우러러 보고 믿고 따르면 소생한다는 얘기지 “나도 그러면 그 장대에 매달려 죽으면 죽은 나를 보면 다 소생할 거야” 이런 메시지가 아닙니다. 들어 올려져야 된다. 내가 들어 올려져야 된다는 얘기는요 들어 올려져야 모두가 볼 수 있거든요. 내가 높이 솟아서 사람들이 다 나를 보고 예수님이 어떻게 사시다가 하늘나라 어떻게 가셨지. 예수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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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삶의 모습을 보고 믿고 회개하고 따를 때 천국 가는 비법을 알게 될 거라는 얘기입니다. 여기까지 읽어내시지 않으면 안 돼요. 답이 안 나와요. 예수님 십자가 집에 다 걸어놓고 나는 봤는데 뭐 내가 더 어떻게 해야 되나? 그런 게 아니에요. 청동 뱀을 들어 올리듯이 들어 올려야 된다는 건요 사람의 아들은, 보세요. 인간의 모습을 한 하느님이에요. 다르게 보세요. 성령이 인간으로 오신 거라 인간의 모습을 한 성령 그 자체예요. 아버지 그 자체입니다. 영 혼 육을 갖고 있는 아버지예요. 그러니까 인간이면 다 우러러봐야 돼요. 그게 성자가 지상에서 사람들한테 도와줄 방법입니다. “다 나를 봐라. 내가 어떻게 말하대. 어떻게 행동하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기도하대. 이걸 보고 따라 해라. 그러면 다 영생에 이를 수 있다. 내가 영생에 이르는 법을 온 몸으로 보여 주마.” 이겁니다. 이게 예수님의 메시지라고 보셔야 돼요. 그래서 인자는 들려야 됩니다. 왜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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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우러러 볼 수 있어야 돼요. 그래서 그분을 보고 따라할 수만 있으면 됩니다. 동양에서는 이걸로 황극(皇極)이라고 해요. 임금 황(皇)자 극치 극(極)자 해서 황극이 상징이 뭔지 아십니까? 우리 기와집 있죠. 정자 생각하시면 돼요. 동서남북 사방에서 우러러 볼 수 있는 사람을 황극이라 그래요. 모든 권력의 극점입니다. 그래서 황극 이래요. 황(皇), 경영자. 동서남북을 경영한다. 이걸 지금 모양으로 그려 놓으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여기 계시면요 동서남북의 모든 사람들은요 예수님을 보고 따라서 예수님의 통치권이 쫙 펼쳐지게 돼요. 모든 사람 안에서 성령이 살아나게 해야 예수님이 우주의 진정한 주재자가 되고 황극이 돼요. 그게 인자의 의무입니다. 인자는 그렇게 살아야 돼요. 사람의 모델이기 때문에, 진짜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 중의 사람이라고 보시면 돼요. 사람의 아들은 사람 중에 사람이니까 모든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를 때 예수님을 보면 알 수 있다는 거예요. “아 그렇게 살아야지. 황금률 지켜야지.” 예수님이 제일 강조하신 거는거 두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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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까. 경천애인(敬天愛人), 우리말로 하느님 사랑해라.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해라. 내 안의 뿌리. 보십시오. “성령을 사랑해라. 아버지를 사랑해라. 그다음 너의 모든 혼과 육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남이 원하는 걸 해주고 남이 싫어하는 걸 안 해주는 데 다 써라. 그러면 영 혼 육이 온전해진다.” 이 얘기가 들어 있는 겁니다. 이걸 안 하시고 등한이 하시고 예수님이 내 죄까지 다 해주셨대. 뭐 이렇게 믿으시면 마음은 편하실지 모르는데 저 근원이 편하시지 않을 겁니다. 제가 장담하건대. 왜냐 죄를 자꾸 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뭔가 좀 문제가 있다”라는 걸 아실 겁니다. “이상하게 죄가 다 갚아졌다는데 왜 나는 계속 죄를 짓고 있을까? 이 죄는 괜찮을까?” 교리적으로 뭔가 이상한 문제가 생겨요. 여러분 죄가 진짜 다 탕감됐다면 여러분은 죄를 짓지 않으셔야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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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률이, 건들면 황금률이 막 터져 나와야 돼요. 인생, 평생을 나와 남 모두에게 이롭게 하는 중생구제의 선한 목자의 삶만을 살 수 있어야 돼요. 왜 못 사실까요? 죄 때문에요. 여러분은 죄 덩어리입니다. 부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진짜 죄가 나는 지워진 줄 알고 있는 분조차도 사실은 죄가 살아있어요. 진짜 죄는 어떻게 지우나요? 여러분 안에 성령의 힘으로요. 여러분이 지울 수 있는 게 아니고 성령의 빛을 쬐어야만 여러분이 혼이 정화되고 육신이 정화돼요. 육신이 정화된다는 건 여러분 안에 강대한 에너지가 생긴다는 겁니다. 그 에너지가 있어야 여러분은 그 에너지가 여러분의 몸이 돼 주는 겁니다. 이런 육신이 아니구요 에너지의 몸이 생긴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 누가복음에 보면요 예수님이 기도하다가 그런 에너지 몸으로 변하신 장면이 나와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따라갔는데 기도하시다가 갑자기 광채가 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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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산 사건이라고 하죠. 변화를 해버리세요. 그러면서 동시에 또 다른 에너지체들이, 모세랑 엘리야가 나타나요. 셋이 얘기를 나눕니다. 제자가 그걸 구경해요. 그러면서 싹 구름에 모든 게 빠져버리며 다 사라지고 다시 예수님만 돌아오는데. 이런 이상한 얘기들이 나와요. 이거 티벳에서 이거 일어나면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무지개 몸이라 그래요. 인터넷 보시면 무지개 몸 사진도 있어요.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는데. 린포체들이 수행할 때 무지개 몸을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거든요. 이게 무지개색의 빛나는 에너지 몸을 만드는 거를 목표로 해요. 신기하죠? 종교 간에 좀 대화도 나누고 하세요. “너네는 어떻게 하냐?” 이렇게 좀 진지한 대화. 딱 속으로 “그래봤자 넌 천국 못 간다.” 이렇게 하고 대화하지 마시고 서로 저쪽에선 아버지가 어떻게 지도했는지 모르잖아요. 티벳에서 아버지가 어떻게 역사했을까요? 몰라요. 이스라엘에서 역사한 거 그거 하나 가지고 전 세계를 재단하시면 안 돼요. 동양에서는 어떻게 역사 했을까요? 우리 민족이 신성한 민족입니다. 하느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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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아들을, 환웅을 내려 보냈잖아요. 그래서 뭘 가르쳤나요? 홍익인간. 이거 엄청난 얘기입니다. 저기 다른 나라에만 있는 줄 알고 “아 이스라엘에 태어났어야 되는데” 이렇게 지금 생각하실 게 아니고요. 옛날 조선 선비들이랑 뭐가 달라요? “중국에 태어났어야 되는데.” 사대주의랑 뭐가 다릅니까? 왜 하느님이 특정 민족을 이뻐해서 그 민족한테만 답을 줄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그 민족에서 나온 잡지만, 책만 계속 보신 거 아니에요. 우리 민족 거도 좀 보세요. 하도 전란 때 많이 타버려서 그렇지 옛날 자료가 많이 있었는데요 우리 민족의 역사는요 환웅이 내려와서 그대로 애를 낳고 씨를 퍼트리고 간 민족이에요. 엄청난 민족입니다. 엄청난 신화를 갖고 있는데 자랑할 줄도 몰라요. 우리 민족은 워낙 겸양의 마음이 커서 이런 거 얘기하면 팔불출 될까봐 말 못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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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는 말 못하고 어디는 없는 것까지 막 얘기하고. 나중에 어떻게 되냐면 여러분이 이제 주눅 들어요. “왜 난 저 뭐 태어났을까?” 제가 이런 게 안타까워서 그래요. 우리 환인 환웅의 신화가 말이 한문으로 적으니까 환인 환웅이지 옛날에는 한문이 없을 때 아닙니까? 그냥 하느님이란 뜻이에요. 하느님이 자신의 자녀 아니면 하느님의 분신이 지상에 내려와서 가르친 내용도 얼마나 고급스럽습니까. 홍익인간 해라. 이게 그때 모델 보여주시고 간 거예요. 우리 민족한테 있었던 위대한 사건입니다. 하느님이 직접 내려오셔서 “인간은 이렇게 사는 거야” 하고 모델을 보여주고 가셨어요. 삼국유사에 뭐라고 써 있냐면요 내려오셔서 인간의 360여 가지 모든 일에 대해서 모범을 보여주고 하늘나라로 다시 가셨대요. 삼국유사 좀 보세요. 거기 다 쓰여 있어요. 선악 문제, 뭐가 옳고 그른지 명령 행정체계, 건강, 농사 어떻게 지을지 또 뭐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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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형벌을 어떻게 할지, 사람 어떻게 처벌할지 이 다섯 가지 일도 오행이에요. 5가지 일을 중심으로 한 360여 가지, 즉 1년을 상징합니다. 인간의 모든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해서 처방을 얘기해주고 가요. 그때 혼자 오시지도 않아요. 예수님처럼 혼자 오신 게 아니고 3천 무리랑 내려왔다고 되어 있어요. 우리나라는 3천 명의 하늘 사람들하고 내려와 가지고 인류를 개조해 놓고 가신 거예요. 그래서 신시(神市)라고 불렸다고 나와요. 신시, 신의 도시, 하느님의 도시라고 불렸다. 그 당시에 신의 질서가 구현돼버렸던 거예요. 엄청난 얘기 아닙니까? 요한복음 하다가 이런 얘기를 왜 할까요? 3천 명의 무리랑, 그래서 그분을 환웅천왕이라고 했다. 환웅도 하느님이란 뜻인데 천왕이라는 것도 하늘에서 온 임금이란 뜻이죠. 이게 우리 개념의 메시아입니다. 하늘에서 온 왕. 하늘에서 와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와서 인간을 통치해주시는 황극, 위대한 존재. 이게 메시아란 뜻이거든요. 메시아가, 그리스도가 지금 우리말로 동양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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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가 황극이라고 하는 겁니다. 황극이 되려면 내성외왕(內聖外王) 그러죠. 안으로 성인이고 밖으로 왕이어야 돼요. 이스라엘에서 메시아가 어떤 뜻이죠? 그리스도. 뭔 뜻이죠? 기름 부은 자.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건요 원래 왕한테만 기름부음을 해줍니다. 왕 같은 존재예요. 안으로는 예언자 밖으로는 왕, 다윗 같은 왕, 위대한 왕. 지금 유대교에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 안 하는 이유도요 근원적으로 왕이 못 됐기 때문에 그래요. “왕을 못 하시지 않았냐?” 즉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구원 못 시켜줬지 않느냐. 영적으로만 가르쳤지. 선지자지 메시아는 아니지 않느냐”라는 말이 나오는 건요 이스라엘에서도 정확한 이 황극의, 위대한 황극은 동서남북을 다 통치해야 되잖아요. 통치가 핵심이거든요. 가르쳐주고 통치하고 이 모든 걸 다 할 수 있어야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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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뜻을 인간한테 가르쳐 주고 예언자 선지자, 인간의 죄를 하느님한테 고해서 탕감하는 걸 도와주고 제사장, 그리고 인간을 통치해주고 왕. 3가지를 다 할 수 있어야 메시아라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요한복음은 어떡해서든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그리려고 뭘 합니까? 자기를 십자가에 바쳐서 어린양, 자기를 제물로 삼아서 제사를 지냈으니까 제사장, 아버지의 뜻을 가르쳐 줬으니까 예언자, 그 어떤 여자가 와서 아래다 기름을 부어줬으니까 메시아고 그리고 마지막 죽을 때 되니까 빌라도가 굳이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쓴 푯말을 붙입니다. 이래서 어떻게든 메시아란 얘기를 하려는 거였어요. 요한이 이 요한복음을 쓴 의도는 어떻게든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걸 입증하려고 했지만 유대인들이 “그건 너무 억지다”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안 받아들입니다. 이제 그런 부분도 좀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삼위일체가 돼야 원래 메시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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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예수님 재림 얘기가 나오는 겁니다. 그때 제대로 메시아 모습을 못 보여줬거든요. 다시 오셔서 분명히 새 하늘 새 땅을 열어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들 것이다. 예루살렘을 만들 것이다. 그 염원이 생긴 이유도, 요한계시록이 나오게 된 것도 그 염원 때문이에요. 제대로 된 메시아의 모습을 보여줄 날이 올 거다. “유대인 니들 기다려. 예수님이 직접 보여줄 거야.” 이게 요한계시록 핵심입니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결국 한 장도 못 했나요. 제가 문제죠. 14절부터 다시 할게요. 한 5분 쉬고 다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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