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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당리 성지
주소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 191-1 교구 수원교구
이곳 요당리 성지는 복음이 언제 전파 되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신유박해(1801년)를 기점으로 서울과 충청도 내포 등지의 신자들이 피난하면서 형성된 교우촌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교우촌은 양간공소라 불리며 갓등이(현재의 왕림)와 은이공소(현재의 양지)와 깊이 연계되어 활발하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울러 바닷물이 유입되어 뱃길이 열렸던 이곳의 지리적 특성상 충청도와 경기도 내륙, 서울을 잇는 선교루트의 교두보 역할을 하였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을뿐 아니라, 기해년 (1839년)과 병인년 (1866년)에 일어난 두 번의 박해를 통해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로 하느님을 증거한 신앙의 요람지 였습니다.
이런 유서깊은 곳이었기에 이곳에는 다음과 같은 성인들과 순교자들의 얼이 서려 있습니다.
첫째, 장주기(요셉, 1803-1866) 성인과 125위 시복추진자인 장 토마스(1815-1866)의 출생지이자 신앙의 터전이었고, 이곳 출신 순교자로서 지타대오, 림베드로, 조명오(베드로), 홍원여(가를로)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울러 장주기(요셉) 성인의 친인척이자 이곳 출신 순교자로 추정되는 장경언, 장치선, 장한여, 장요한, 방씨 등이 있습니다.
둘째, 교회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전답이 운영되었던 곳으로 그 책임을 맡았고 끝내는 순교하신 민극가(스테파노, 1787-1840)성인과 이곳에서 공소회장을 맡으며 신앙전파에 힘쓰다 순교하신 정화경(안드레아, 1808-1840) 성인께서 활동하셨던 곳입니다.
셋째,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피신하셨다가 순교하신 앵베르 범(라우렌시오, 1796-1839) 성인과 이분의 피신을 돕다가 순교하신 손경서(안드레아, 1799-1839) 순교자의 얼이 서려 있는 곳입니다.
하지만 그동안 요당리 성지는 이러한 역사적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장주기(요셉) 성인의 출생지이고, 예전부터 교우촌이 형성되어 있었던 곳이다" 라는 정도로 치부되어 많은 이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점을 안타깝게 여겼던 최덕기(바오로) 주교는 2006년 9월 26일 성지 전담 사제를 파견함으로써 성지개발에 대한 의지를 대내외적으로 천명하게 되었습니다.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Laurent-Joseph-Marius Imbert)
출생 : 1796년 프랑스 마리냔(Marignane)
순교 : 1839년(43세) 새남터 / 군문효수(軍門梟首) : 죄인의 목을 베어 군문(軍門) 앞에 매다는 형벌
신분 : 주교(제2대 조선대목구장)
한국이름 : 범세형(范世亨)
조선의 수호자로 성모님 모시려 청원
1월 1일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수호자로 모시고 있는 한국 교회는 성모님과 맺은 관계도 특별했다.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는 박해가 한창인 1838년 성모님을 수호자로 모시려는 청원을 교황청에 올렸다. 그의 청원은 순교 후 2년이 지난 1841년에야 화답되었다.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에 의해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이 조선의 수호자로 선포된 것이다. 청원자 앵베르는 답을 얻지 못한 채 순교했지만 끊을 수 없는 매듭으로 한국 교회와 성모님을 연결시켜줬다.
태양볕이 따가운 8월 중순 앵베르 라우렌시오 성인을 만나기 위해 서울 관악구의 삼성산성지를 찾았던 기억이 있다. 이곳은 성인의 유해가 58년간이나 묻혀계셨던 곳이다. 성인을 만날 기대감으로 초행길부터 가슴이 설렌다. 주차를 하고 주변을 둘러보는데 어떤 형제분이 산 위에서 야외 미사가 곧 거행된다고 알려줬다. 성지의 거룩한 미사에 참여할 수 있다니, 예상치 못한 횡재에 복권에 당첨된 것처럼 기뻤다. 장마철이라 이끼 낀 돌길이 다소 미끄러웠으나 짙은 초록의 숲으로 간간이 들어오는 햇살이 정신과 마음을 맑게 해주는 듯했다. 숨 가쁘게 오른 언덕 위에는 하얀 제대보가 눈에 들어왔다. 연두색 초, 성작, 십자고상이 놓여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제대가 마련된 것이다. 성인이 이 자리에 나를 초대해주신 것 같은 기분이다. 성인이 묻혔던 묘역에 서있자니 성인의 사랑이 더욱 위대하게 느껴진다. 교우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스스로 잡혀서 순교하신 착한 목자다.
스스로 잡혀서 순교하신 착한 목자
“사람들의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만 리 길도 마다치 않고 달렸습니다. 그들의 이름을 일러바쳐 해를 입히느니 차라리 죽을지언정 십계의 가르침을 어길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칼과 톱이 우리 앞에 있고 우리의 몸이 가루가 될지라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인의 유해는 삼성산에 안치되었다가 명동대성당을 거쳐, 지금은 절두산순교성지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 지하에 모셔져 있다. 절두산성지도 수많은 천주교인이 처형된 장소다. ‘목이 잘린 곳’이라 절두산이라 한다는데, 미사에 올 때마다 때아닌 비가 세차게 내려 성지는 우수에 젖은 성스러움으로 다가왔다. 비바람에 실려 환청처럼 흘러드는 형장 군졸들의 음성이 속삭이듯 귓전을 스친다. “타국 사람을 죽일 때에 청명하던 하늘이 홀연히 어둡고 비가 급히 쏟아져 지척을 분간치 못하여 무섭더라.” 하나같이 우수에 젖은 새남터와 삼성산과 절두산은 착한 목자의 마음을 닮았다.
우리나라 땅을 밟은 최초의 주교
앵베르 성인은 우리나라 땅을 밟은 최초의 주교다. 많은 교우가 박해로 죽어가는 상황에서 자식을 살리고 싶은 어머니의 마음으로 자신을 희생했다. 성모님을 우리의 수호자로 삼으려던 목자는 이미 마리아의 모성으로 백성을 끌어안은 게 아닐까. 끔찍이도 인자하셨던 성인은 절두산에 우뚝 서서 오늘날에도 우리를 보호하고 계신다.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1월 1일, 윤영선 비비안나(강동대 건축과 교수)]
한국 프랑스 신자들이 함께 되살리는 순교 영성
프랑스 남부 액상 프로방스(Aix en Provence)와 항구 도시 마르세유(Marseille) 사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 하나 있다. 마르세유 프로방스 공항이 자리한 ‘마리냔’(Marignane)이다. 바로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Imbert Laurent Marie Joseph, 1796∼1839) 주교의 고향이다.
마리냔에서 태어난 아이
마리냔은 봄기운이 완연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가로수에는 꽃망울이 달려 있었다. 심심치 않게 야자수도 보였다. 공항 주변 도시인만큼 도로와 건물은 깨끗했다. 높은 빌딩 대신 낮은 지붕에 빨간 기와를 얹은 주택들이 대부분이었다.
마리냔 외곽 브리카르(Bricart)로 접어들자 건물보다 푸른 들판이 자주 보였다. 들꽃이 가득 핀 곳을 지나 오래된 회색 건물 한 채를 찾았다. 앵베르 주교의 생가였다. 색이 바래고 허름해졌지만, 일부를 수리했을 뿐 당시 건물 그대로였다.
주교의 부모는 여행 중에 이곳에 들러 어린 앵베르를 낳았다. 당시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직후인 1796년. 사회는 혼란에 빠져 있었고, 프랑스 교회는 자유주의 정부와 마찰을 빚으면서 박해를 받았다. 그래서 어린 앵베르는 집 근처 물레방앗간에서 다른 사람들 눈을 피해 세례를 받아야 했다.
아쉽게도 물레방앗간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박해 속에서 태어난 앵베르 주교가 먼 나라 박해에 뛰어들어 순교 성인이 됐음을 알리는 현판은 생가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주교의 피가 스민 새남터 순교성지 흙이 담겨 있었다.
가난한 소년이 신학생이 되기까지
마리냔에서 동쪽으로 약 15㎞ 떨어진 곳에 자리한 카브리에(Cabries) 마을. 좁은 골목길이 미로처럼 얽혀 있는 이 작은 마을엔 옛 성문과 벽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마을 입구 언덕을 따라 오래된 집들이 빈틈없이 이어졌다. 그리고 성벽을 따라 난 골목길 끝자락에 성당이 있었다. 어린 앵베르가 다닌 ‘성모 탄생 성당’이다. 12세기에 지어진 성당은 100여 명이 들어갈 정도로 아담했다. 천장은 아치형으로 쌓아올려 꽤 높은 편이었다. 세월이 흘러 색이 바랜 하얀 벽돌에서는 고고한 멋이 흘렀다.
앵베르는 이 성당에서 인생을 바꿔 준 중요한 인물을 만났다. 당시 본당 주임 아르노 신부다. 빈곤한 집안에서 태어난 탓에 앵베르는 초등교육을 받지 못했다. 돈이 없어 마을 사람에게 글을 배우기도 했는데, 아르노 신부는 앵베르의 이런 열의를 보고 기초적인 것을 가르쳐 학교에 보냈다. 이 인연으로 앵베르는 액스 교구 신학교에 진학했고, 후에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해 1819년 사제품을 받았다.
마을 사람들은 “성 앵베르 주교가 사제품을 받고 첫 미사를 봉헌한 성당”이라고 자랑했다.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 순례단은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바치며 한국 교회를 위해 성인에게 전구했다.
고향에서 이어지는 현양 사업
마리냔에는 앵베르 주교에게 봉헌된 성당이 있다. 바로 ‘성 앵베르 성당’이다.
한국 순례자들을 위해 전례 봉사자가 제대 위에 성 앵베르 주교의 성해함을 올려놓았다. 2004년 서울대교구가 103위 한국 순교 성인 시성 20주년을 기념해 액스 교구에 전달한 성인의 유해 일부이다. 제대 뒷벽은 조선과 프랑스 전경이 펼쳐진 그림으로 장식돼 있었다.
장 프랑수아 모렐 회장은 “시성식을 계기로 앵베르 주교님에 대한 공경심이 커지면서 주교님 고향인 이곳에 본당을 짓고 기념회를 설립해 활동하게 됐다”면서 “앵베르 주교님을 잊지 않고 현양할 수 있도록 도와준 한국 신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이날 앵베르 주교의 삶과 영성을 강의한 최홍준(파비아노) 전 한국평협 회장은 “선교사들과 선조들이 흘린 피 위에 우리 한국 교회가 세워졌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앵베르 주교는 누구인가
성 앵베르 주교는 1837년 5월 제2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돼, 그해 12월 주교로서 최초로 조선 땅을 밟았다. 그는 모방ㆍ샤스탕 신부와 서울ㆍ경기 등지에서 활동하며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또 한국어 기도서를 제작하고, 「기해일기」의 토대가 된 「1839년 조선 서울의 박해 이야기」를 남기기도 했다.
그는 배교자의 밀고로 입국 사실이 발각되자 1839년 8월 박해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수해 모방ㆍ샤스탕 신부와 함께 그해 9월 21일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조선 입국 후 2년이 채 되지 않는 사목 기간 동안 앵베르 주교는 조선 교회의 교계적 틀을 바로 세우는 데 크게 공헌했다. 앵베르 주교는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성됐다.
[평화신문, 2016년 3월 27일, 글ㆍ사진=백슬기 기자]
‘하느님의 종’ 장 토마스(1815-1866년)
경기도 수원 느지지(현,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에서 태어난 장(張) 토마스는 1866년에 순교한 장주기 요셉 성인의 육촌 형제로, 그와 함께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입교하였다. 이후 그들은 참된 신앙생활을 위해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다니면서 교회 일을 도왔다. 그러다가 장주기 요셉 성인은 충청도 배론(현, 충북 제천시 봉양면 구학리)에 정착하였고, 장 토마스는 진천 배티(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에 정착하였다. 당시 배티에는 장 토마스의 인척으로 생각되는 장 시몬 회장이 거주하고 있었다.
장 토마스는 이때부터 열심히 계명을 지키는 생활을 하면서 하나뿐인 아들에게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다. 이 무렵 가까운 인척과 친구들은, 그의 본심이 순량한 탓에 그에 대해 말할 때면 언제나 ‘착한 사람’이라고 일컬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시작된 뒤, 장 토마스는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곳으로 피신하지 않고 오로지 주님의 명령만을 따르기로 작정하였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청주 포졸들이 들이닥쳐 그와 가족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이내 진천 관아로 압송된 장 토마스는 관장 앞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 관장이 “천주교를 배반하면 죽이지 않을 것이며, 너의 세간을 돌려주어 살 수 있도록 할 것이다.”라고 말하자, 그는 “세간과 목숨은 버릴지언정 천주교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 토마스는, 군대가 주둔하는 청주로 이송되었다. 그곳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을 때 다시 영장이 “천주교를 배반하지 못하겠느냐?”라고 묻자, 여전히 “만 번 죽어도 천주교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한결같이 대답하였다.
이윽고 장 토마스에게 사형이 선고되고, 포졸들은 그를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將臺, 현,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 2가)로 끌고 나갔다. 바로 그때 장 토마스는 자기의 대자가 배교하려는 것을 목격하고는 “주님을 위하여 천주교를 봉행해 왔는데, 이런 기회를 버리고 목숨을 건진다면 장차 천주님의 벌을 어찌 면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권면하였다. 그런 다음, 칼날 아래 목을 드리우고 순교의 영광을 얻었으니, 당시 장 토마스의 나이는 51세였다.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성, 장주기(張周基) 요셉(1803-1866)
성인(聖人).
축일은 9월 20일. 회장.
세례명 요셉. 일명 낙소(樂詔).
현재 한국 천주교회의 103위 순교성인 가운데 수원의 양간(현재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 느지지) 출신으로서 성인이 되신 유일한 분이다.
1827년경 고향인 양간에서 세례를 받고 1836년 양지의 회장을 역임했으나, 주된 활동은 1843년부터 1866년 순교할 때까지 23년간 정착하여 활동한 제천의 배론(舟論, 현재의 충북 제천시 봉양면 구학리) 신학교에서 푸르티에(朴) 신부와 프티니콜라(申) 신부를 도와서 신학교 한문교사 겸 선교사들의 집주인 역할을 한 것이다.
1866년 3월 30일 충청도 보령의 고마 수영(水營 : 대전교구 갈매못성지)에서 다블뤼 주교 등 4명과 함께 참수 치명하였다.
아래의 다섯 순교자는 장주기 요셉의 친척으로 장주기 성인과 그의 육촌으로 순교자인 장 토마스 등이 수원 고을의 양간 느지지 출신인 점으로 보아 이들도 양간 출신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기록에 명시된 바가 없으므로 향후 좀더 세밀한 고찰을 요한다.
① 장경언(?~1866)
성 장주기 요셉의 재당질(7촌)로, 병인박해기 서울의 포청옥(?)에서 교수형을 당해 순교하였다.
② 장치선(?~1866)
성 장주기 요셉의 조카로 병인박해기에 포청옥(?)에서 5명의 가족이 함께 교수형을 당하여 순교하였다.
③ 장한여(?~병인박해기)
성 장주기 요셉의 재종(6촌). 병인박해기에 부인 홍씨와 함께 교수형을 당해 순교하였다.
④ 장 요한(?~병인박해기)
성 장주기 요셉의 재당질(7촌)로 아산에서 체포되어 서울에서 교수형을 당해서 순교하였다.
⑤ 장 요셉의 숙모(방씨)(?~1869)
성 장주기 요셉의 숙모로 성은 방씨이며 장순성의 모친이다. 1869년 서울 우포청에서 교수형을 당하여 순교하였다.
양간 출신의 순교자들
① 지 타대오 순교자(1819~1869.5.23)
양간 용소말(현재의 화성시 양감면 용소리) 출신으로 안중 공소의 인광리(현재의 평택시 현덕면 인광리)로 이주하여 신앙생활을 하였다. 1866년 체포되어 1차 배교 후 석방되었으나, 이를 후회하고 순교를 다짐하던 중 1869년에는 피신하라는 주위 권고를 만류하고 포졸들에게 잡혀가서 진위 감옥에 수감, 그곳에서 아들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배교를 거부하고 수원으로 이송되어 화성 북문 밖에서 1869년 5월 23일 공개 처형을 당했다.
② 림 베드로 순교자(?~병인박해기)
양간 용소말 출신으로 양지 고을 응다라니에 거주하던 중에, 정 안드레아, 림 요한, 림 안토니오, 이중화 등 총 12명의 교우가 함께 피체되어 수원으로 이송되었고 교수형을 당하여 순교하였다.
③ 조명오 베드로 순교자(1823~1872.4)
양간 출신으로 1872년 3월 26일에 체포되어 서울 우포청에서 순교했다. (*또는 1871년 4월 홍원여와 함께 우포청에서 순교했다고도 전한다.)
④ 홍원여 가롤로 순교자(1849~1871.4)
양간 출신으로 1871년 23세로 경포에게 피체 그해 4월 서울 우포청에서 조명오와 함께 순교했다.
손경서 안드레아 순교자(1799~1839.12.21)
충청도 홍주 출신으로 유방제 신부를 도와 교회 일에 적극 참여하였으나 1838년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을 때 거짓으로 배교하고 돈을 주어 풀려났다. 1839년 처남인 정화경 안드레아와 함께 앵베르 주교를 양간(상게)로 은신시켰다. 앵베르 주교가 체포된 후 가족들이 체포되자 자수하여 서울로 압송되었고 1839년 12월 21일 교수형을 당하여 순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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