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섬기는 기쁨
테레사 수녀가 미국을 여행하는 중에 어느 한 자매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자매는 자살하고 싶은 괴로운 심정을 테레사 수녀에게 고백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 지 묻는 그 자매에게 이렇게 제안했습니다.
“자살하기 전에 내 부탁을 하나 들어주세요. 딱 한 달만 내가 일하고 있는 인도의 캘커타에 와서 나의 일을 좀 도와주신다면 그 다음에 당신이 어떻게 해야 될지 말씀해 드리죠.”
그 자매는 테레사 수녀의 말대로 캘커타 슬럼가에 가서 가난하고 병들어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돕고 섬겼습니다. 그들을 위해 몸 바쳐 일하다 보니까 그녀의 마음에 삶에 대한 의욕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그 자매는 그들을 돕고 섬기는 데서 순수한 환희를 느꼈고 한 달 후에는 테레사의 다른 조언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그 자매는 그 곳에 머물러 일하면서 테레사의 좋은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사도행전 20:35
22.함께하는 삶
인도의 성자 선다싱의 일화로 잘 알려진 내용입니다.
어느 날 그가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네팔 전도에 나섰을 때, 친구 한 사람과 같이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는 도중 길가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행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혹독한 추위 때문에 그들도 생명의 위협을 느껴 그 행인을 도울 여유가 없었습니다. 같이 가던 친구는 그냥 가자고 했지만 선다싱은 그 사람을 그대로 두고 갈 수 없었습니다. 친구와 한참을 다투다가 결국 친구를 먼저 가도록 하고 그는 추위에 떨면서 쓰러져 있던 행인을 들쳐업었습니다.
얼마동안을 걸었을까요. 한참동안 행인을 업은 채 산길을 걸어가다 보니 먼저 떠났던 그 친구가 길에 쓰러져 죽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친구는 혹독한 추위 때문에 자신의 체온을 유지하지 못하고 죽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선다싱은 자기가 들쳐업은 사람의 온기 때문에 오히려 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체온이 얼어붙은 추위를 녹여 무사히 산을 넘어갈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전도서 4:12
23.결과를 예측하지 못한 선행
바그다드라는 중동의 어떤 왕국에 어린 왕자가 강에서 놀다가 그만 거센 급류에 휩쓸려 실종되었습니다. 왕은 자기의 군대를 총동원해서 사랑하는 아들을 찾기 위해 며칠간 혼신의 노력을 다했지만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 강 하류를 샅샅이 수색해도 왕자를 찾지 못한 왕은 자기 아들이 죽은 줄 알고 크게 낙망하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여러 주간이 지난 후에야 왕자가 어느 깊은 강의 바위 위에서 살아있는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왕은 놀랍게 살아난 왕자에게 어떻게 살아 있게 되었는지 물어 보았습니다. 왕자는 그때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강 위를 떠내려가다가 다행히 강 한복판에 우뚝 솟은 바위에 걸려서 바위 위로 올라올 수가 있었고 아침저녁으로 빵이 들어있는 가죽 주머니가 떠내려와 그것을 먹고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빵이 들어있던 가죽주머니에는 “모하메트벳 핫산”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 사람을 수색해 보았더니 강가에 정말 그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아침저녁으로 가죽에 빵을 담아서 강 하류로 떠내려보냈던 것입니다. 왕이 그에게 그렇게 한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 나라 속담에 ‘선행을 하라, 빵을 물위에 던지라. 그러면 그대에게 어느 날 반드시 보상되리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그 속담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알아보고 싶었습니다.”
자기가 물위로 떠내려보내는 이 빵 조각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한 선행이었지만 이것이 기대하지 않은 놀라운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전도서 11:1
24.섬김의 자부심
테레사 수녀와 가까이 하는 사람들은 그녀의 순결한 인격에 큰 감동을 받습니다. 특별히 그녀의 질투 없는 삶은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테레사가 한 어린아이의 고름을 만지며 치료하고 있을 때 함께 살고 있던 한 분이 이런 질문은 던졌습니다. “수녀님, 당신은 잘 사는 사람이나 편안하게 살아가는 사람 혹은 높은 자리에 사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에 시기심이 생기지 않나요? 당신은 이런 삶에 만족하십니까?”
이러한 질문에 테레사는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허리를 굽히고 섬기는 사람에게는 위를 쳐다볼 수 있는 시간이 없으니까요.”
예수께서 앉으사 열 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마가복음 9:35
24.값진 선물
어느 전도자가 길을 지나가고 있는데 거리에서 구걸하는 걸인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걸인에게 돈을 주려고 주머니를 뒤지며 걸인 앞으로 다가갔지만 마침 그의 주머니에는 동전이 한푼도 없었습니다. 차마 그냥 지나치기에는 그의 마음에 있던 연민이 깊었습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손을 내밀어 걸인의 손을 따뜻하게 쥐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님, 죄송합니다. 마침 제게 준비된 것이 없군요. 그러나 추위에 차가워진 당신의 손을 잡아드리고 싶습니다. 부디 용기를 내어 일어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새 생활을 시작해 보십시오.”
걸인은 전도자의 말에 눈물 흘리며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나에게 적선한 모든 이들보다 더욱 값진 선물을 주셨습니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마태복음 6: 3, 4
26.되돌아오는 소리
어떤 바보스러운 사람이 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의 고민은 어느 누구도 자기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바보는 계속 고민하다가 자기의 인생을 비관하게 되었고 답답한 마음에 산에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산도 자기를 아는 체 하지 않습니다. 그는 얼마나 비관했는지 산에 올라가서 큰소리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는 너를 싫어한다.” 그랬더니 산울림이 들려왔습니다.
“나는 너를 싫어한다.” 바보는 산울림에 놀라서 산에 오른 한 사람에게 왜 산이 자신을 싫어하는 지 물었습니다. 그 분은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큰소리로 이렇게 외쳐 보십시오.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 바보는 그의 말을 듣고 다시 이렇게 소리를 지릅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 소리가 다시 메아리로 들려옵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태복음 7:12
27.천국에서의 만찬
어떤 사람이 천국과 지옥에서 식사하는 풍경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음식이나 환경이 전혀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천국과 지옥에서 먹는 음식은 모두 같았습니다. 그리고 굉장히 긴 젓가락을 쓰는 것도 같았습니다.
밥 먹는 시간이 되자 드디어 천국과 지옥의 차이점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지옥에서는 밥을 먹으려고 긴 젓가락으로 음식을 각자 자기 입에 넣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긴 젓가락 때문에 먹을 수가 없어 서로 짜증을 내며 아우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천국에서는 그 긴 젓가락으로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사람을 다정하게 먹여 주면서 식사하는 것이었습니다. 보기에도 너무도 평화롭고 즐거운 식사시간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나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행동할 때 행복의 기초가 세워짐을 말해 줍니다.
함께 먹는 사람 중에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누가복음 14:15
28.우스꽝스러운 비극
미국에서 역사상 제일 지독한 구두쇠로 알려진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1916년에 죽은 그 할머니의 이름은 히티 그린(Hity Green)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할머니는 얼마나 돈을 쓰지 않고 인색하게 굴었기에 구두쇠라는 소리를 들었을까요?
그 할머니는 기본적으로 사람이 필요해서 써야 하는 것, 예를 들면 음식이 차면 데워서 먹는 것조차 전기가 든다고 일평생을 그냥 차갑게 먹으며 살았다고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기 아들이 다리를 다쳤는데도 조금 있으면 나을 거라고 생각하고 병원 비용 때문에 계속 미루다가 결국 절단까지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더 우리로 하여금 혀를 내두르게 하는 것은 할머니가 남긴 유산이 1억불이나 되었다는 것입니다. 삶이 너무나 가난했기 때문에 구두쇠처럼 억척스럽게 돈을 모은 것이 아니라 할머니는 많은 돈이 있으면서도 그렇게 비참한 삶을 산 것입니다.
가끔 우리 주변을 보더라도 이런 할머니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도리어 가난한 사람들이 먼저 더 불우한 이웃을 위해 구제의 손길을 펼치는 것을 보게 되지요. 어쩜 우리들도 이와 같지는 않을까요? 하나님이 주신 말할 수 없는 축복과 사랑을 가졌음에도 다른 사람들에게 구두쇠라는 소리를 듣고 있지 않습니까?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에베소서 4:32
29. 3등석에 탄 사람
미국 서부 개척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주요 이동 수단으로 역마차를 이용했습니다. 역마차 크기는 작아도 좌석이 세 칸으로 나뉘어 있어서 1, 2, 3등석 세 종류의 승차권을 판매하여 운행했다고 합니다. 그 때만해도 지금처럼 반듯한 도로가 아니라 포장되지 않은 길이었기 때문에 한참 달리다보면 고장이 나서 몇 번씩 정차하여 수리를 해야 했습니다. 그 순간 어느 좌석에 앉았느냐는 역마차를 탄 사람들에게 무척 중요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야말로 1 ,2 , 3등석의 차이가 나타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1등석에 앉은 사람은 고장이 나도 아무 관여하지 않고 자기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입니다. 2등석에 앉은 사람은 고장이 나면 마차에서 내려 마차가 수리될 때까지 서서 구경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3등석에 앉은 사람은 고장이 나면 즉시 내려서 마부와 함께 마차를 수리하는데 참여하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부들은 출발하기 전에 누가 3등석에 앉았는지 눈여겨보곤 했답니다. 왜냐하면 3등석 승차권을 가진 사람들이 일꾼의 역할을 제대로 해줄 때 역마차가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가복음 10:44
30.그리스도인의 참된 교제
아시시의 성자 프란시스(Francis)가 세운 공동체는 중세기에 가장 유명한 공동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공동체는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이 응집되어 있기로 소문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모임을 매우 흠모하며 들어가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도 인간 관계의 위기는 언제나 있듯이 이 공동체 안에서도 인간 관계의 위기가 있었습니다. 그 안에 모인 사람들의 사랑이 점점 식어가고 서로 냉담해져 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수도원 사람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여러 가지의 제안들이 나왔습니다. 한 사람은 말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게을리 했기 때문이다. 좀더 예배를 드리자.”
어떤 사람은 큰 소리로 이렇게 주장합니다.
“우리 수도원의 신앙훈련이 약화되었다. 좀더 강력한 훈련을 시작하자.”
또 다른 한편에서는 “수도원의 규칙을 강화해야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런 얘기가 오가는 동안 프란시스는 조용히 침묵만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던 한 사람이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묻자, 프란시스는 단순히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다 쓸데없는 일이네. 문제는 내 안의 교만이야. 내 안에 아직도 교만이 있단 말이야.”
그 다음날 전도 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한 필의 말밖에 없어서 프란시스가 말을 타고 다른 제자들은 걸어서 그 뒤를 따라갔습니다. 프란시스는 자기 뒤를 따라오는 제자들 중에 레오나르도라는 형제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형제는 귀족 출신으로 버릇없이 자라서인지 수도원안에서도 늘 대접받기를 원했습니다. 사실 수도원의 불화 원인도 그 형제 때문이었습니다.
프란시스는 이 레오나르도 형제가 앞서가는 자신의 뒤통수를 불쾌하게 째려보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순간 그는 말 위에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형제를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그러자 성령께서 그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그는 말에서 내려 레오나르도 형제 앞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여, 맞소. 나는 말 탈 자격이 없어요. 당신이 말을 타야 하오.” 프란시스의 말을 들은 레오나르도는 그 자리에 엎드러지고 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하며 통곡했습니다. “맞습니다. 선생님. 제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 형제가 말을 탄 프란시스의 뒤통수를 째려보면서 하던 생각을 성령께서 프란시스에게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 순간 이 일을 통하여 놀랍게도 사랑이 회복되었을 뿐 아니라 이 공동체가 복음을 위해 영광을 나타내는 놀라운 공동체로 더욱 쓰임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그 수도원에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들의 복음 증거는 강력했으며 그 가운데 영적인 진보가 이루어졌습니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요한복음 17: 23
31.사랑의 사귐
1772년 영국 런던에는 영향력 있는 설교자인 존 길(John Gill) 목사님이 사역하는 매우 잘 알려진 교회가 있었습니다. 존 길 목사님은 평생동안의 사역을 마치고 그 교회 후임자로 시골 작은 교회에서 목회를 하던 존 휘세트(John Fawcett) 목사님을 초빙하였습니다. 작은 마을의 목회자였던 존 휘세트 목사님에게는 다시 올 수 없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초빙을 복음을 통해 영국 전역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로 여기고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함께 사랑을 나누었던 교인들과 교회를 떠나는 일이 마음 아프긴 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새로운 부르심에 순종하여 짐을 싸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짐을 마차에 싣고 뜰을 나서는데 교인들이 찾아왔습니다. 떠나는 목사님을 감히 붙잡을 수 없었던 교인들이 눈물을 애써 참으며 목사님을 배웅하러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사모님이 갑자기 “여보, 작은 교회지만 복음 안에서 참 아름다운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던 교인들을 두고 어떻게 떠날 수 있겠어요?”라며 울먹였습니다.
사모님의 말을 들은 목사님은 걷잡을 수 없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목사관으로 뛰어들어가 눈물을 흘리며 엎드려서 기도했습니다. 잠시 후 그는 자기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어 찬송시 한편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찬송가 525장이 되었습니다.
“주 믿는 형제들 사랑의 사귐은 천국의 교제 같으니 참 좋은 친교라
하나님 보좌 앞 한 기도 드리니 우리의 믿음 소망이 주안에 하나라
피차에 슬픔과 수고를 나누고 늘 동고동락하는 중 위로를 나누네
또 이별할 때에 맘 비록 슬퍼도 주안에 교통하면서 또 다시 만나리”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편 133: 1
32.화합의 요건은 온유
공동체가 하나되는 데에 가장 중요한 요건은 바로 온유한 태도입니다. 온유하지 못한 사람들의 말과 행동과 인격으로 인하여 우리 개인과 가정, 직장, 교회가 큰 상처를 받고 관계의 화합이 깨어지게 되는 겁니다. 남의 마음에 큰 상처를 주고는 내 스타일은 “뒤끝이 없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느 날 한 부인이 빌리선디 목사님께 찾아와서는 “나는 화를 잘 내는 것이 큰 흠입니다. 그렇지만 오래가지는 않아요”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목사님은 “자매님, 당신의 화는 오래가지 않지만 당신이 성냄으로 인해서 누군가의 마음에 남겨진 그 상처는 아주 오랫동안 지속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주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에베소서 4; 1-3
33.중보자이신 예수님
빌리 그래함이 한 이야기 중에 하나입니다.
어느 전쟁 중에 통신병이 중요한 연락 사항을 명령받았습니다. 그런데 모든 통신 수단이 두절되어 명령을 전달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끊어진 전선을 연결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는데 시간도 급박하고 연결할 방법도 없었습니다.
이 급박한 절대 절명의 상황 속에서 통신병은 양쪽의 전선을 자신의 양손으로 붙잡아 자기의 생명을 걸고 마지막 메시지를 아군 지원부대로 무사히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생명을 마쳤습니다.
이것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일어난 사건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한 손으로는 하나님을 잡고 또 다른 한 손으로는 우리를 붙잡아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신 중보자의 모습입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로마서 5: 10
34.사랑의 희생
유명한 화가가 된 알버트 뒤러의 어린 시절은 무척 가난해서 학비조차 낼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는 같은 처지에 있는 친구를 만나서 학교에 갈 수 있는 방법을 의논하던 중에 친구가 이런 제의를 했습니다. “뒤러야, 우리 두 사람 모두 공부를 계속할 수가 없으니 네가 먼저 학교에 가서 열심히 공부해라. 그러면 나는 식당 일을 하면서 돈을 벌어 널 도울게. 그리고 네가 공부를 마치고 나서 나를 지원해주면 우리 둘 다 공부를 할 수 있지 않겠니?”
두 친구는 아주 좋은 생각이라고 결정하고 행동에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뒤러의 친구는 식당에 가서 그를 위해 열심히 일하여 매월 꼬박꼬박 학비를 보냈고, 뒤러는 친구의 도움으로 미술학교에 다닐 수 있었습니다. 학교를 졸업한 후 뒤러는 자기의 학비를 벌기 위해 많은 희생을 한 친구의 도움을 생각하며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마침 그 친구는 식당 한 구석에서 절친한 친구 알버트 뒤러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의 친구 뒤러가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화가가 되게 해 주세요.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많은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러나 하나님, 저의 손은 이미 식당 일로 인하여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으니 제가 할 몫까지 뒤러가 모두 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기도하는 친구의 모습을 보고있던 알버트 뒤러는 자기를 위해 희생한 친구의 손을 바라보는 순간 커다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즉시 붓을 들어 사랑하는 친구의 기도하는 손을 스케치하였습니다. 그 그림이 바로 그 유명한 뒤러의 “기도하는 손”입니다.
성숙함이 없는 사람은 결코 남에게 줄 수 없습니다. 인간이 줄 수 있다는 것은 가장 거룩한 것이므로 주께서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사도행전 20: 35
35.이기심을 극복한 희생
빅톨 위고가 쓴 유명한 소설 ‘나인티 쓰리’라는 책에는 아주 인상깊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불란서 혁명 직후에 숲을 지나가던 병사들이 우연히 배고픔에 지친 어머니와 세 아이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병사들 중 한 상사가 빵 한 덩이를 그들에게 던져주자, 어머니는 지체하지 않고 빵을 세 조각으로 똑같이 잘라 아이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이 광경을 옆에서 바라보던 한 젊은 병사가 빵을 주었던 상사에게 물었습니다.
“저 여자는 배가 고프지 않은 모양이죠?” 그러자 상사는 “그게 아냐, 배가 고프지 않은 것이 아니라 어머니이기 때문이지.”
어머니의 사랑이 이기심을 극복하게 하여 희생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가복음 10:45
36.마땅한 권리를 포기한 성도
중국의 유명한 성도인 윗치만 니(Wachman Nee)가 간증한 내용입니다.
어떤 마을에 예수를 믿는 한 성도가 살았는데 그의 논에는 항상 물이 풍성하게 고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해에 마침 심한 가뭄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루 밤새에 자기의 논에 고여있던 물이 다 빠져나가고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아보았더니 바로 옆에 있던 이웃집에서 자기 논의 물을 밤새도록 빼내어 간 것입니다. 그 성도는 그 물이 자기 논에 고여 있던 물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자기 물이라고 주장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는 행동이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튿날 아침, 이웃을 찾아가 따졌습니다.
“왜 당신은 나의 논에 고여 있던 내 물을 다 빼내어 갔습니까?”
그의 주장에 변명할 여지가 없었던 이웃은 못내 사과를 하며 빼내어 갔던 물을 다시 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논에 나가보니 물은 또 다 빠져나가 버리고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이웃을 찾아가 다시 되돌려 놓았습니다. 이러한 일이 몇 번씩이나 되풀이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성도는 자신의 마땅한 권리를 주장하여 물을 찾아왔는데도 마음이 도대체 편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제가 정당한 일을 하는데 왜 저의 마음에는 평안이 없습니까?”
그의 기도에 주님께서는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너는 왜 정당한 일만 하려고 하느냐? 나는 네가 정당한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하길 바란다.”
“하나님! 그렇다면 도대체 정당한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이란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에게 베풀어 준 것처럼 너도 그 사람을 대하여라.”
그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도 그 의미를 몰라 여러 번 계속 물으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의 마음에 큰 깨달음이 생겼습니다.
그날 밤 그는 위대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튿날 새벽이 되기도 전에 일찍 나가서 이웃사람이 자기 논에서 물을 빼내어가기 전에 미리 자기 논의 물을 이웃의 논에 넣어주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마음에는 놀라운 기쁨과 평안이 다시 샘솟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주어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데살로니가후서 3:9
37.유대교와 기독교의 근본적인 차이
제가 이스라엘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그곳에서 저는 한 유대인을 만나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왜 당신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유대인은 “어떻게 하나님께서 예수라는 인간이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라며 강한 어투로 대답했습니다.
그 순간 저는 그의 대답을 통해 기독교는 절대적으로 하나님께서 낮고 낮은 이 세상에 어리석고 보잘것없는 우리들을 구원하시려고 친히 인간의 몸으로 오셨음을 믿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유대교와는 틀리다는 사실을 더욱 실감했습니다. 그 유대인은 결코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실 수 없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에게 또 다른 질문을 하나 던졌습니다.
“그런데 전 세계에는 당신들이 믿지 않는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며 그분의 뜻대로 살고자 헌신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점점 그 수가 늘어나고 있는 반면에 유대교는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연하잖아요? 기독교는 열심히 전도하니까 그렇게 믿는 수가 증가할 수 밖예요. 그러나 우리는 전도를 하지 않습니다. 우리 민족만 믿으면 되지 다른 민족까지 믿을 필요가 뭐 있습니까?”
그 때 전 다시 한번 유대교는 기독교와 전혀 다른 그들만의 하나님을 믿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왜 그들이 복음으로 인해 전 세계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한 지체이며 가족인 사실을 외면하면서 배타적이 되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後嗣)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에베소서 3:6
38.예수 안의 참 기쁨
어느 추울 겨울날 밤에 술이 잔뜩 취한 한 남자가 교회의 문을 소란스럽게 두드렸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날 따라 교회를 지키는 사찰 집사님도 술에 취해 있었습니다.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사찰 집사님은 취중에 소리를 질렀습니다.
“누구시오?”
“난 신도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왜 신도가 되기를 원하시오?”
“저에게 슬픔이 많아서 기쁨을 찾고 싶습니다.”
“기쁨을 얻고 싶은 사람이 하필이면 왜 예배당에 오셨소?”
“예수님이 기쁨을 주신다고 해서 왔습니다.”
이때 사찰 집사님의 대답은 정말 놀라웠습니다.
“그런 양반 여기에 안 계시오.”
예수님이 없는 교회에는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마음에는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립보서 4: 4
39.선택한 기쁨
A. W. 타겟(A. W. Target)이라는 사람이 쓴 ‘창'이라는 단편 소설 가운데의 내용입니다.
어느 작은 병실에 두 남자가 입원해 있었는데, 한 사람은 폐암 말기 선고를 받은 환자이고 또 한 사람은 디스크 환자였습니다. 디스크 환자는 수술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침대에 꼼짝없이 누워있어야 했지만 폐암 환자는 하루에 한시간 정도는 자리에 일어나서 창 밖을 내다보곤 했습니다. 병세로 보자면 폐암말기 환자의 상황은 매우 절망적이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왜 그런지 늘 기쁨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디스크 환자가 창 밖을 보고 있는 폐암 환자에게 도대체 밖에 무엇이 보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지긋이 눈을 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름다운 호수에 보트와 백조가 한가로이 떠있고 호숫가를 산책하는 여인들과 잔디밭에서 놀고 있는 어린아이의 얼굴이 보이네요.” 이 말을 듣고 있던 디스크 환자의 얼굴은 갑자기 분노로 일그러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폐암 환자의 얼굴에 늘 기쁨이 있는 까닭이 그의 침대가 창문 곁에 있기 때문이고, 자기는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빨리 폐암 환자가 죽어서 나가면 저 창가의 침대를 차지해야겠다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폐암 환자가 심하게 기침을 하면서 신음하기 시작했습니다. 디스크 환자는 비상벨을 눌러서 의사를 부를까 하다가 침대를 차지하겠다는 생각에 그대로 두었습니다. 아침이 밝아올 무렵 갑자기 옆 침대가 조용해졌고 고통받던 폐암 환자는 그의 기대대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비어 있는 자리에 병원의 허락을 받아 드디어 창문 곁 침대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는 옮기자마자 그의 있는 힘을 다해서 침대를 붙들고 일어나 창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창 밖에는 회색의 콘크리트 담벼락뿐이었습니다.
그는 그제야 폐암 환자의 기쁨이 환경 때문에 생긴 기쁨이 아니라 그가 선택한 기쁨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기쁨을 창조적인 상상으로 선택한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향하여 하는 말이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 도다 -고린도후서 7: 4
40.기쁜 삶의 창조
헬렌 켈러는 듣지도 말하지도 보지도 못하는 3중의 고통을 겪고 있었지만 설리번 선생의 도움으로 마음의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한번은 설리번 선생이 헬렌 켈러와 이런 대화를 나눕니다.
“선생님, 갈색이 어떤 색깔이에요?”
“헬렌의 머리 색깔과 같단다.”
“제 머리 색깔이 아름다운가요?”
“헬렌의 마음처럼 아름답고 곱단다.”
설리번 선생님은 상상력과 마음의 눈으로 주변의 세계를 따뜻하게 감지하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그를 통해서 헬렌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아름답게 느끼는 기쁨의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그녀가 고백한 기쁨은 그녀의 유명한 자서전인 ‘마이 스토리’라는 책에 “나는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행복했습니다”라는 구절이 계속 반복되는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그녀의 자서전의 절정을 이루는 부분을 보면 아주 감동적인 글이 있습니다.
“내가 사흘만 눈을 떠 볼 수 있다면, 첫째 날 나는 내 인생에 참된 사랑을 일깨워 준 고마운 사람들을 먼저 만나서 그들의 얼굴을 정말 오래오래 지켜보고 싶다. 그 다음은 천진 난만한 아기들을 보고 싶고 그리고 나에게 더없이 신실한 친구였던 개 라이오네스의 모습을 보고 싶다. 저녁 무렵에는 숲 속을 거닐고 싶다. 둘째 날에는 아침에 일어나는 대로 동트는 광경을 바라본 다음 박물관과 미술관을 방문하고 싶다. 그 곳에서 인류 역사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싶고 위대한 미술 작품이나 조각품을 감상하고 싶다. 저녁에는 아름다운 발레리나의 춤을 보고 싶다. 그리고 셋째 날에는 일찍 일어나 동트는 새벽의 여명을 한 번 더 지켜보련다. 그 다음에 거리로 나가 사람들이 걷는 모습, 일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행복한 사람들의 표정도 보고 싶고 또 고통스러운 아픔의 표정도 보고 싶다. 그 후에 나는 내가 좋아하는 뉴욕 시내를 구경할 것이다. 가난한 슬럼가도 가보고 싶고 또한 아름다운 공원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 셋째 날 저녁에 내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일은 극장에 가서 희극을 관람하면서 한없이 웃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웃음과 기쁨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 -사도행전 2: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