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자전거 타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청년시절에는 자전거를 타고 군산에서 100리길 되는 전주는 여러 번 다녀왔고, 전주에서 30리 정도 더 가는 고향에도 몇 번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가장 멀리 간 것은 군산에서 200리가 넘는 대전에 갔었습니다. 너무 멀다 싶어서 돌아올 때는 기차를 타고 왔습니다.
중 3때는 자전거로 신문 배달을 한 6개월 정도 하기도 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신학대학원을 준비하면서 자전거로 우유배달을 한 3개월 정도 하기도 했습니다. 하루에 5시간 이상 자전거를 탔습니다. 그랬더니 몸무게가 7kg 이상이 빠지기도 했습니다.
자전거로 사고도 많이 치고, 자전거로 가슴 아픈 일도 많았습니다. 가슴 아픈 일이란 처음 배울 때 타다가 넘어지면 자전거 핸들이 꼭 가슴을 쳐서 참 가슴이 많이 아팠습니다. 사람을 치어서 70년도 초반에 5000원을 물어 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자전거를 잊고 살았습니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그리고 목회를 하면서도 자전거를 탈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이곳 율리로 오면서 들판을 보니 자전거를 타고 싶어서 큰 만 먹고 자전거를 샀습니다.
당시 다른 자전거에 두 세배 이상 주고 샀습니다. 그래서 10년이 이상이 지났지만 지금도 타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전거가 무겁고 잘 나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자전거를 하나 사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삼천리 자전거 같은 그런 자전거를 사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이제 전문가용 자전거를 사고 싶습니다. 최소한 100만원이 넘습니다. 헬멧도 쓰고 쫄쫄이 사이클 복도 입고 싶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돈을 모았습니다. 하지만 자꾸 쓸데가 있어서 쓰다 보니 언제 살지 요원합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사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비추었습니다. 하지만 전혀 움직임이 없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이들이 무엇을 사달라고 하면 금방사줍니다. 너무 쉽게 사줍니다. 살림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사줍니다.
왜 그럴까요? 어째서 남편이 원하는 것 앞에서는 냉정하게 사주지 않으면서 아이들이 사달라는 것은 잘 사줄까요? 제가 미움 받아서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제 아내가 저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럴까요? 그런 것도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사랑이 다릅니다. 부부의 사랑하고 자녀의 사랑하고 다릅니다. 부모라는 사람들은 자녀들이 무엇이 필요하다고 하면, 무엇을 원한다고 하면 들어 주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필요하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해주려고 합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녀의 사랑에 눈이 멀기도 합니다. 그래서 심한 경우에는 잘못된 것 까지도 줍니다. 그래서 자녀를 망치는 부모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하십니까? 여러분들의 자녀들에게 어떻게 행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한 가정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아니 두 가정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엘리 제사장의 가정과 산골의 레위 지파의 한 가정의 이야기 비교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Ⅰ.엘리의 가정
먼저 엘리 제사장의 집을 살펴봅시다. 그에게는 아들이 둘이 있었습니다. 그 아들들은 아버지를 이어 당대 대제사장으로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 대한 평가가 나오고 있습니다. 12-17절까지입니다.
그들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들은 망나니라고 말합니다. 제사장이 아니라 망나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겨야 하고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하는데 그들을 망나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읽는 성경에서는 불량자라고 합니다.
그렇기에 여호와를 몰라보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제사장으로서 사람들을 대하는 규정도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를 드릴 때 고기를 삼고 있으면 닥치는 대로 휘저어서 삼지창에 꽂혀 나오는 것을 모두 가져갔습니다.
고기를 삶아서 일부는 제사장에게 가져다 드리고 나머지는 그곳에 참여한 백성들이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도둑처럼 닥치는 대로 제사장이 사환들을 시켜서 가져다 먹었습니다. 그리고 기름을 태워 바치기 전에는 누구도 고기를 손댈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엘리의 아들들은 전혀 하나님의 규례에 신경을 쓰지 않고 오직 자신의 뜻대로 마구 고기를 가져다 먹었습니다. 그것은 사사시대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가 중요하지 않고 자신들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했습니다.
더 심하였던 것은 성막에서 봉사하는 여인들에게 못된 짓까지 하였습니다. 마치 이방 신전에서 행하던 것과 같은 음란한 성행위가 성막에서 그것도 제사장이라는 자들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전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해야 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들을 구분하지 않고 마구 행동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들을 마구 했습니다. 제자장인 그들이나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들이나 차이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했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배를 채우기만 급급했으며 하나님의 율례보다 자신이 뜻이 더 중요했고 전혀 하나님의 뜻을 상관하지 않고 자신들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했습니다.
그런 자식을 보는 엘리는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그러면 못쓴다. 사람에게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지만 하나님께 죄를 지으면 누가 그것을 해결해 주겠느냐!”고 권고했지만 그 아들을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이미 엘리는 늙었고, 그들은 엘리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이미 그런 충고를 들을 그들이 아니었습니다. 악이 고착되었고, 너무 오랜 세월동안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이미 그들을 죽이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Ⅱ.한나의 가정
한나의 가정은 어떠하였습니까? 한나는 어린 사무엘을 엘리 밑에서 여호와를 모시도록 아이를 성막에 남겨 두었습니다. 어린 사무엘은 몸에 모시 에봇을 입고 지냈습니다. 그는 멋대로 행하던 당신 어린아이와 다르게 어린 제사장으로 하나님 앞에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겼습니다. 인간의 정으로 행동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매년 주년제를 드리러 남편과 함께 올라 올 때마다 작은 두루마기 한 벌을 지어다가 아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것 뿐이었습니다.
참 그 모습이 엘리 제사장의 마음을 감동케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약속한 것을 그대로 실천하는 한나의 모습, 그 어린 것을 성막에 맡겨 놓고는 일 년에 한 번씩 옷을 지어다 입히는 그 갸륵한 정성이 엘리 제사장의 마음을 감동케 하였습니다.
아이를 위해서 정성껏 기도하고 그리고 정성을 쏟기는 했지만 하나님 중심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약속한 것을 그대로 행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정으로 움직이지 않고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옷 한 벌을 지어서 가져다가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에 감동한 엘리 제사장은 그녀에게 축복합니다. “여호와께서 맡기로 하신 이 아이 대신으로 이 부인 몸에서 후손이 나게 해 주십시오.”하고 복을 빌어 주었습니다. 이 축복을 받고 자기네 산골로 돌아가곤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응답으로 얻은 아들 하나를 하나님께 드리고 그 아들을 위해 옷을 지어서 매년마다 가져다주는 정성에 사랑에 감동하여 엘리 제사장은 축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몇 번이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엘리의 한나의 가정에 대한 복을 비는 기도와 한나의 중심에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마음을 보시고 은혜를 베푸셔서 삼남 이녀를 더 두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잘 자랐습니다.
그래서 어린 사무엘은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귀여움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마치 우리 예수님처럼 “아기는 날로 튼튼하게 자라면서 지혜가 풍부해지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있었다.” 자라고 있었습니다.
Ⅲ.결과
왜 이렇게 차이가 나고 있습니까? 지금의 상황으로 이야기 한다면 엘리의 가정은 목사의 가정이고 한나의 가정은 평신도의 가정이거나 사찰집사님의 가정 정도입니다. 그런데 한나의 가정의 자녀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엘리의 가정의 자녀는 죽이시기로 하나님이 작정하셨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있습니까? 그것은 자신의 삶의 알맹이 곧 가장 소중한 것을 누구를 위해 드렸는가의 차이입니다. 한나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아들 사무엘, 자신의 고개를 들개 해 주었던 아들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은 사무엘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렸습니다.
하지만 엘리 가정을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 하나를 엘리에게 보냅니다. 그리고 엘리에게 말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고 있을 때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레위지파 중에 아론지파를 택하여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제물을 살라 바치도록 맡겨 주시는 복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정해 준 재물과 곡식 예물을 멸시하여 소홀히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엘리에게 말합니다. 엘리는 하나님 보다 자식들을 더 중히 여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자신이 잘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노인이 되어서는 그 아들을 책망하였지만 엘리 제사장이 삶 속에서 보여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제물을 취급하면서 가장 중요한 부위만을 자녀들에게 먹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먼저 가장 중요한 부분을 드려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엘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자녀들이었습니다. 자녀들이 원하는 것이면 하나님을 개의치 않고 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자녀가 무엇을 원하는가가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오로지 자녀를 위해서 행동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껍데기만 주고 자녀들에게 알맹이만 주었습니다. 그렇게 했으니 그런 자녀가 커서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하나님의 제물을 귀하게 여겼겠습니까? 제사를 거룩하게 드렸겠습니까? 사람은 키운 대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렇게 망나니로 살았습니다. 자신들이 하는 것이 잘못인지도 모르고 그저 당연한 일을 하는 것처럼 살았습니다. 부모가 잘못 가르쳤기에 부모가 잘못 보여 주었기에 그런 결과를 낳았습니다. 자녀는 부모가 보여주는대로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가정에 말씀하십니다. 전에 하나님은 그 가정에 영원히 나를 섬기리라 하였지만 그 약속을 철회하겠다고 하십니다. 이제는 그러한 약속과 복을 거두워 가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존대하는 자는 소중히 여겨 주겠지만, 나를 멸시하는 자는 천대하리라” 그래서 나를 멸시한 엘리 가문의 기운을 꺽어 버리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그 집안의 늙은이가 하나 남지 못할 날이 온다고 말합니다.
후손 가운데 하나만 남아서 제단 일을 보겠지만 그 후손은 다 칼에 맞아 죽으리라고 말씀합니다. 그 못된 홉니와 비느하스는 한날에 죽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제를 세워 하나님 마음과 뜻을 이루게 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엘리 가정에 남은 자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밥벌이할 일자리를 얻으려고 굽실거리며, 제발 사제직에 붙여 주어 빵 부스러기라도 얻어먹게 해 달라고 애걸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삶에 알맹이를 어디에 사용하고 있습니까? 무엇에다 투자하고 있습니까? 자녀들입니까? 여러분의 삶입니까? 여러분의 미래입니까? 여러분의 삶의 알맹이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좋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어디에 사용하시려 하십니까? 여러분의 삶에 소중한 것이 있으면 누구에게 드리려고 하십니까? 하나님은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나님께 존중히 여길 것은 그리 큰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것은 작은 것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크고 능력이 많은신 분이기 그가 우리를 존중히 여기면 우리가 받을 것은 엄청난 것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알맹이를 어디에 드리기를 원하십니까? 부모인 여러분 자녀에게 무엇을 주고 싶습니까? 하나님의 복입니까? 아니면 물질입니까? 지금 여러분이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여러분의 가문이 달라지고 자녀들의 삶이 달라짐을 아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