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맥 창립 40주년을 맞아 그동안 건맥 발전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한 전 회원들에게 깊이 감사 드린다.
창립 40주년을 맞은 오늘, 그간의 세월을 되새겨 보니 감회가 새롭다. 오늘을 기하여 앞으로 우리 건맥의 무궁한 발전의 기틀이 한층 공고히 다져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난날을 회상해본다.
우리가 영남대학(구 청구대학) 건축과에 입학하던 1961년은 5․16 군사 혁명이 일어나던 해이다. 당시 청구대학 공학부는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신암동 큰고개를 지나 대구선 철도를 통과하면 아양교 못미쳐 오른쪽 언덕배기에 있었다. 학교 남쪽엔 개성 목장이 있고 주위가 야산이어서 지금 생각하면 꾀나 전원적인 풍경이었다.
지금은 공학부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섰고, 인문학부가 있던 본관(야간부 수업은 전부 이곳에서 했슴)은 청구대학과 대구대학이 통합하여 1967년도에 영남대학으로 탄생한 이후 국세청으로 쓰다가 민간기업으로 매각되었다.
1961년도 당시 우리나라는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이었다. 나는 안동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안동군 일직면 명진리 산골에서 학교를 다닌 그야말로 순 촌놈이었다. 선친께서 자식 교육을 위하여 영천으로 이사를 오게 되어 그곳에서 통학을 했는데 촌놈이 호롱불 밑에서 공부하다가 전기가 들어오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 가 없었다. 전기만 하더라도 일반등은 저녁 10시에 단전되고 비상등은 밤새 전기를 공급하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대구시는 인구 30만 정도였고 도시권은 북쪽으로 칠성시장, 남쪽으론 경북여고까지이고 지금 영선시장 자리에는 영선못이 있었고 주변은 논이었으며, 동쪽은 동인로타리까지인데 지금 국민주택 자리는 전부 논이었다. 서쪽은 서문시장까지 였다.
나는 영천에서 통학했는데 버스비 2원을 아끼려고 동촌역에 내려서 학교까지 도보로 다녔으며, 간혹 대구역에 내려서 버스를 타고 학교로 갈때에는 칠성다리를 넘으면 측후소 앞 신암동이 있을 뿐이었는데 도로는 좁은 2차선이고, 신암동 도로변에는 기름 짜는 집이 많아서 신암동을 지날 때에는 버스안까지 풍기는 참기름 냄새로 콧요기를 실컷 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초라한 대구였는데도 내게는 그렇게 큰 도시로 보였고 신기한 것도 많았던 것을 보면 나도 어지간히 촌놈은 촌놈이었던 모양이라 실소를 금할 수 없다.
또 하나 내가 건축과를 선택한 것은 어릴 적 촌에서 한옥을 짓는 것을 보고 관심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나 초등학교 동기인 김선웅 군의 권유가 컸다. 그 당시 번듯한 건축물이라야 시내 중국집 2층 정도였고, 콘크리트 공사는 현장 손비빔 시절이었다. 그런 건축 환경에도 불구하고 건축과를 지망한 나를 생각해볼 때 좋게 보아서 오늘날 같은 장래를 예측했다고 할 수 있으나 실로 촌놈치고는 간이 배밖에 나온 놈이 아니었나 싶어진다.
당시 공학부에는 토목․건축․화공․섬유․기계과가 있었다. 그리고 교양과목의 경우 대부분 계단 강의실에서 합동강의를 해서 많은 학생이 한 교실에 모이기 때문에 얼굴 익히기에 바빴으며 그렇게 나는 교우관계나 장래설계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몇 개월을 지냈다. 이렇게 1학년을 마치고 2학년에 접어들면서 과별 수업이 많아져서 건축학과만이 수업을 받게되어 서로가 친숙해 진 시기가 되었다.
1962년 5월경 중우가 보자고 했다. 마음 맞는 친구끼리 모여서 학창 생활을 보람 있게 보내도록 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나 또한 그런 제의를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고, 중우의 눌변은 나를 압도하기에 충분해서 흔쾌히 의기 투합했다. 이것이 건맥의 태동이라 볼 수 있겠다. 그 당시는 막걸리를 마시던 시절이라 우리는 그 후 막걸리 잔을 앞에 놓고 장래며 학창시절이며 건축을 또는 인생을 담론하는 날을 수없이 되풀이하였다. 지금 돌이켜 보면 호연지기도 있었고 가당찮은 꿈도 있었다. 요즘 대두되는 CM개념으로 하는 건축설계며 시공을 통합관리 하는 기구 이야기도 했었고 더 나아가 재료까지 취급하자는 종합 컴퍼니 같은 구상도 하였다. 더더욱 평생을 이바지하며 살지 소인배 같이 살아서 무엇하겠느냐는 중우의 당찬 인생 설계는 오늘날까지 내 뇌리에 지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모이게 된 것이 건맥의 출발이었다.
이중우, 김원, 김종환, 조상철, 정태웅 그리고 나 이렇게 여섯이 모여서 1962년 6월 첫째 토요일에 막걸리 집을 찾게 되었다. 만나보니 다 좋은 친구들이라 그 이후 우리는 형제같이 지내며 영원히 이어지는 맥 즉 건맥을 만들고 건맥의 장래를 함께 걱정하는 동지가 된 것이다. 지금도 당시의 건맥을 구상하고 장래를 예지하며 항상 건맥을 선도한 중우의 선견지명과 그 추진력에 진심으로 감사 드릴 따름이다.
우리 건맥은 전국의 어느 대학 동아리보다 역사가 깊고 순수하다고 자부할 수 있다. 회원수도 그렇고 사회에 진출한 회원 중에는 자기 분야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훌륭한 회원도 많다. 선배로서 흐뭇함을 느끼는 바이며 건맥 정신이 이어지고 있음에 감사 드리며 모든 회원이 잘 되어 지기를 기원한다.
여기서 하나 밝혀둘 것은 건맥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회원은 사회생활이나 자기 개인도 알찬 발전을 이루는 것을 볼 수 있고, 비협조적인 회원은 자기 발전에도 문제가 있음을 볼 수 있다. 후배 여러분도 이점을 깊이 통찰하여 건맥인으로나 각자 개인으로나 모든 면에 적극적 사고로 추진하여 개인적으로 알찬 발전 이루기를 바라는 바이다. 인간은 참으로 묘한 것이어서 적극적 사고와 강력한 실천력으로 추진하면 반드시 그 결실이 훌륭하고, 요령과 기만으로 요행을 바라는 것은 곧 자기 파멸일 뿐 이라는 교훈이 있는 것이다.
건맥 결성후 나의 학창 생활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미더운 친구가 있어 즐거웠고, 더불어 산다는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 학과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인생을 논하기도 했다. 동화사 등지로 야유회도 자주 가졌다. 우리는 정말 의기 투합하였기에 학과 동료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아마 이시기가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보람 있던 시기이며 인생에 있어 가장 즐거웠던 시기였던 것 같다.
1962년 10월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나는 육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은 나의 입영 환송식이었다. 같이 통학을 하던 토목과 강양우가 경주 자기집에서 환송회를 하자고 제의하며 우리 모두가 경주로 가서 하루를 지내며 술도 마시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날 첨성대 아래서 씨름 시합이 있었는데 중우가 장사가 되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비쩍 말라도 씨름만은 1등이었다.
휴가를 나오면 야유회로 나를 즐겁게 해 주었고 내가 대전 삼관구 사령부 근무 때 중우와 태웅이가 면회 온 일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그 시절 박카스라는 드링크제가 처음 나왔는데 정태웅은 드링크제를 참 좋아한 것 같다. 대전 여관에 가보니 태웅이 머릿맡에 빈병이 2개나 있었다.
1965년도 내가 제대하여 2학년 2학기 복학을 해보니 건맥 5기까지 조직이 되어 있었고 활동도 아주 활발하여 많은 발전을 했음을 느꼈고, 앞으로의 발전가능성을 점쳐보게 되었다.
1965년에는 부모님 내외분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가며 월례회를 하기로 하였다. 군 복무를 앞두고 복무기간이라도 건맥 모임을 부모님들로 하여 지속하게 하자는 의미도 있었지만 우리가 형제간처럼 지내는 것을 부모님들이 보셨으면 했다. 아무튼 부모님들 간에도 정의가 두터워지신 효과뿐만 아니라, 건맥 모임을 부모님 모임으로까지 확대하게 되었는데, 이는 아주 보기 드문 일이라고 생각된다.
1966년도부터 나는 지금 대구공항 앞 중우집에서 기거하며 학교엘 다녔다. 원, 태웅, 상철이는 ROTC로 임관하고 중우, 종환이는 사병으로 입대하였다. 이시기 건맥 1기는 부모님들의 모임으로 이어져 갔는데 2달에 한번 모이시고 회비는 내가 수금하였는데 월 200원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모임이 없는 달은 토요일을 기하여 내가 집집마다 돌면서 수금( ? )을 하였는데 집집마다 과일이랑 먹을 것을 주시는 바람에 그날 내 위장은 잔칫날이었다. 아마 어른들께 큰 절 올려 인사드린 대리 효자 노릇 덕이기도 했겠지만... .
토요일 오후 동촌 중우집에서 점심을 먹고 탱자나무 울타리 길을 지나 아양교 입구에서 버스를 타고 신암동 입구에 내려 태웅이 집부터 먼저 들르게 되는데, 고령이신 할머님께서는 앞이 잘 보이지 않으셔 내 음성만 들으시고도 그렇게 반갑게 맞아 주셨다. 신천동 종환이네 집은 대구공고네거리에서 신암지하를 지나면 논이 이어지고 지금은 없어진 못이 하나 있었는데 종환이네 집은 못의 서남쪽에 위치한 대문채가 있는 제법 큰 기와집이었다. 논둑길을 따라 가노라면 그렇게 요란히 울어대던 개구리 울음소리가 지금도 귀에 선하다. 지금은 천지가 개벽한 셈이니 격세지감을 금할 길 없다. 다음은 삼덕동 상철이네 집인데 동신교를 지나 삼덕 초등학교 옆 상철네 집까지 걸어오면 어지간히 녹초가 되곤 하였다. 상철이네 집 부근은 지금도 거의 그대로 보존되고 있어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다음은 원이네 집인데 대봉동 청운맨션 부근쯤인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원이네 집에 들르면 거의 저녁때가 되는데 어머님께서 꼭 밥한술이라도 먹여보내시려는 자상함을 잊을 수가 없다.
친구들이 군 복무하는 기간동안 부모님들의 사랑으로 이렇게 건맥은 그 맥을 이어왔다. 참으로 고마우신 부모님들이신데 금년 1월 작고하신 중우 아버님을 마지막으로 아버님들께서는 전부 고인이 되시고 지금은 중우 어머님, 원이 어머님, 태웅이 어머님, 상철이 어머님 이렇게 네분이 살아 계신다. 그 당시 가이없는 자식 사랑으로 건맥을 지원해 주신 어른들이셨는데 어른들께서 가시고 나니 자식된 도리를 못다한 죄스러움이 가슴을 메이게 하는구나. 그 시절 논뚝길 밭뚝길 따라 집집마다 내가 회비를 받고 부모님들의 안부를 전하고 하던 시절... . 그렇게 건맥이 있었다.
내 군복무 시절 1964년도 12월에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고 영천 우리집은 없어졌다. 제대후 학교 복학을 포기한 상태에서 중우는 내게 복학을 권유하였고, 학비며 숙식을 해결할 방법이 없는 내게 동촌 중우집에서 1년여간 기거하게 해주어 학업을 계속 할 수 있었다. 지금도 동촌 시절을 잊을 수가 없으며 오늘날 나를 있게 해 주신 부모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1967년에 나는 경북대학교 시설과(당시 경리과 영선계)에 근무하고 야간학부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중우는 당시 청구대학 ROTC 사병으로 오게 되었다. 중우가 ROTC에 근무하게 됨으로 건맥은 또 한번 활기를 띄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오늘 우리 건맥 창립 40주년을 맞이하였다. 학교 써클로는 역사가 가장 깊을 뿐 아니라 회원 각자가 맡은바 사회적 직분을 성실히 수행하여 타의 모범이 될만한 분이 많다. 대구와 서울에서 폭 넓은 활동을 한 점, 후배회원들께서 성심껏 건맥 발전을 위해 헌신하려는 노력, 이 모두가 흐믓하며 감회에 젖게 한다.
아무쪼록 못난 선배지만 앞으로 여생동안 건맥 발전을 위해 진력 할 것을 다짐하며 건맥 초창기를 회상해 본다.
서정학의 建脈이 있었다. 는 추억담을 읽고 옛날을 생각하게 되다. 그때 그래찌 그때를 생각하니 꿈도많았고 희망도 컸단다. 우리 정말 행복했단다.그러나 나는 그행복한 많큼 친구들 에게 서툴게 살고있어 미안하구나/ 외롭고 어려운 친구들께 따듯한 위로 말 없이 바쁘다는 핑개로 나혼자 살아온 것이 부끄럽구나/ 미안
첫댓글 서선배님의 글을 읽자니 마음이 숙연해 지고 선배님들의 애틋한 사랑과 노력으로 만들어진 건맥에 다시한번 사랑을 느낍니다. 정말 한시대를 실제 살아온것처럼 생동감있게 기고 해 주셨네요. 아무쪼록 선배님들의 노력이 훼손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서정학의 建脈이 있었다. 는 추억담을 읽고 옛날을 생각하게 되다. 그때 그래찌 그때를 생각하니 꿈도많았고 희망도 컸단다. 우리 정말 행복했단다.그러나 나는 그행복한 많큼 친구들 에게 서툴게 살고있어 미안하구나/ 외롭고 어려운 친구들께 따듯한 위로 말 없이 바쁘다는 핑개로 나혼자 살아온 것이 부끄럽구나/ 미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