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가 조금 지나서 아시아나 항공 여객기가 후크오카 공항 활주로에 사뿐히 내렸다. 위도가 제주도와 같다고는 하지만 인천의 기후와 별로 차이가 없는 듯, 늦가을의 정취를 이곳 들판에서도 맞볼 수 있었다.
공항 터미널을 빠져 나와 관광버스에 오르며 제일먼저 접한 것이 차량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고 왼쪽 차선으로 운행 하는 것이 이색 적이었다. 차는 시가지를 벗어나 고속도로로 접어들어 구마모토로 향했다. 차창을 스치는 이국 풍경에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편도 3차선에서 2차선으로 바뀌며 조금 좁게 느껴지는 화려하지 않은 고속도로에 제한속도 80km라는 빨간 경고 등이 반짝거렸다. 감시 카메라는 보이지 않으나 티코보다 조금 큼직한 소형차들이 주를 이루며 추월하지 않고 막힘없이 물 흐르듯 달려간다. 120km속력으로도 안달하던 마음을 들킨 듯 해서 얼굴을 조금 붉혔다. 휴게소에서 잠시 정차했다. 꽤 오래된 포장에 약간 바랜 차선이 정교하게 그려져 있는 넓은 주차장은 금방 비질을 해 놓은 듯 산뜻하고, 깨끗한 주변을 닮은 듯 차량들도 먼지 하나 없이 반질거린다. 차를 닦는 기사들도 더러 보였다. 낙엽 지는 가을에 나뭇잎 하나 없이 어쩌면 저리도 깨끗할 수 있을까?
차는 다시 고속도로를 질주한다. 차창 밖으론 히노키나무와 스기나무 숲들이 무리를 지어 열병하듯 구름처럼 무성하고 가끔은 대나무 숲도 펼쳐지곤 했다. 보기에 모두 조림목인 듯 하다. 척박한 토질을 개량하여 나무 밭으로 가꾸고 있으니, 일본은 나무만 팔아도 6년은 먹고 살 수 있다는 안내원의 설명이 무리가 아닌 듯 싶다 명산 명당이면 어디를 가나 흉터처럼 자리잡고 있는 묘지는 아무리 보아도 한 곳도 찾아 볼 수 없고 산속을 지키는 사찰도 여기서는 눈에 띄지 않는다. 들판 가장자리나 집 주변 정원에 많게는 수십 개, 적게는 한 두 개의 납골당이 사리탑처럼 고풍스럽다.
추수가 끝난 들판을 끼고 납작한 기와집과 낡은 스레트 지붕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산자락 밑에도 허름한 집들이 다정하다. 잎을 잃은 감들이 탐스럽게 늘어져 있는 것을 보니 금년같은 모진 태풍을 잘도 견뎠다는 생각이 든다. 도시고 농촌이고 지나는 곳마다 모두 단층이거나 미니2층 형식 소형 목조 건물로 낡은 기와나 스레트를 이엉으로 바꾼다면 우리의 과거 초가집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고 하면 억측이라 할런지!
차는 고속도로를 벗어나 구마모토 시가지를 지난다. 중심가를 들어서며 2-3층의 현대식 건물에 관공서와 상가들이 이어지나 번듯한 간판하나 없고 그 흔한 영어 간판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모두 한문으로 표기되어 있어, 아무리 큰소리 쳐 본다 해도 중국의 영향권을 벗어나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우리의 한글이 너무도 자랑스럽
다. 우리는 이렇게 자랑스러운 고유의 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왜 푸대접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물고기가 물의 고마움을 모르고 살듯이 우리는 한글을 편리하게 쓰면서도 그 고마움을 잊고 살지는 않는지, 국경일에서 한글날을 왜 제외 했는지, 한글날 태극기 다는 가정이 몇 가구나 되는지, 시가지에 걸려있는 간판에 한글이 몇 퍼센트나 차지하고 있는지, 등등 한글의 중요성을 망각하는 행위들을 다시 한번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 본다.
구마모토성과 무사저택을 둘러보았다. 성은 우리의 독립기념관을 생각케 하였고 무사저택은 안동 하회마을과 비교해 보았다. 가등청정 과 옛 무사들을 기리기 위한 유적지라고 하여 일본 사람들은 경건한 마음과 존경의 뜻으로 엄숙히들 경배 하지만 , 적개심이 일어나 돌아볼 생각이 없었다. 왜 하필 이런곳을 관광코스로 정했는지, 관광회사의 사려가 요망된다. 너희들이 우리 선조들을 얼마나 괴롭혔으며 우리의 얼과 자존심을 얼마나 짓밟아 버렸더냐? 지나간 역사라고는 하지만 그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고 보는 시각을 일본인과 달리 해야만 했다. 우리의 안방 문만도 못하게 비좁은 성의 누각 층계와 어린애 장난감 같은 전시된 갑옷을 보며, 이렇게 옹졸한 민족에게 왜 우리 조상들은 당하기만 했는지 너무도 자존심이 상했다.
일정에 쫒기다 보니 늦은 시간에 숙소에 도착했다. 시가지의 흐린 가로등이 듬성듬성 졸고 있고 가정집 촉광은 더욱 침침하여 우리의 시골 골목길 만도 못해 음산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런 현상은 내가 본 일본 전 도시와 가옥이 비슷했으니 아마도 일본 특유의 절약형 관습인가 보다. 촉광만큼이나 통행인도 적어 사람구경이 여명에 별 찾기만큼이나 드물었다. 큐슈의 중심도시인 후크오카 캐널시티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건물 안 쇼핑센터는 우리의 백화점과 별 차이는 없었지만 밤 9시가 되니 모든 상가는 문을 닫는다. 길거리는 어둡고 한산하고 가로변에는 어디를 가나 수많은 자전거들이 줄지어 서 있고 골목길 어디에도 무단 주차한 차량을 볼 수가 없었으니, 일본 차도가 좁아도 흐름이 좋은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가 있었다.
버스는 아소산 활화산 분화구를 향해서 달렸다. 이름하여, 초천리, 끝없이 전개되는 초지에 이미 말라버린 풀포기를 뜯고 있는 소 떼들을 보며 서부 영화 속을 달리는 착각 속에 천삼백 고도의 분화구에 이르렀다. 유황 냄새가 코를 찌르고 가끔 연기가 솟는가 싶더니 삽시에 안개구름이 덮쳐 지척을 분간 할 수 없는 지라 사진 한 장 찍지 못하고 하산 하게 되었으니 아쉽기 그지없었다. 다만 화산재로 이루어진 불모지를 수많은 소와 말을 기를 수 있는 넓은 초지로 개간 한 것은 경이로운 일이었다.
벳부로 향했다. 화려하고 웅장함에 길 들여져 있는 탓인지 고속도로 매표소가 너무나 초라해 보였다.
버스는 가끔 터널을 지나며 산골짝을 가로질러 산촌의 풍경을 선사했다. 고속도로라 하지만 우리나라 일반국도 시설에도 못 미치는 시설이라고 한다면 너무 평가 절하는
아닐는지, 휴게소에서 잠시 정차했다. 제법 큰 규모의 휴게소인데도 광장엔 관광버스 두 대와 20인승 쯤 되어 보이는 승합차 몇 대에 승용차 20여대가 고작이고 식사나 간식 또는 군것질 하는 사람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일요일이라 관광객이 있을 법 한데도 너무나 한산하다. 우리나라는 오늘 같은 휴일은 아마도 여행객 등산객 예식하객 등등으로 휴게소가 초만원에 식객들의 즐거움이 하늘을 찌를 텐데, 너무도 대조적이다. 이런 실태는 지옥온천등 다른 관광지 순례에서도 마찬가지로 느낄 수 있었다. 기념품이라고 해야 한국 관광객을 낚기 위하여 진열된 것이 대부분 같고 자국 사람들은 별로 구매 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 흔한 동동주에 도토리묵 한 접시가 없다. 식당에서도 마찬가지다. 의례히 식탁에 반주 한 잔쯤은 올라서 낮 모르는 사람이라도 술잔을 건너며 대화의 숨통을 열어 주는 것이 신선한 청량제가 아닐는지! 나라마다 풍습이 달라 살아가는데는 불편함이 없겠지만, 조금은 흐트러지고 빈틈이 있어 인정을 나누어 주고 받으며 사는 것이 미풍이 아닐까 본다. .
차창 밖으로 전개되는 풍치를 우리와 비교하며 상념에 취해 있는 동안 벳부에 도착했다. 바다를 끼고 도는 산 중턱 여기저기서 짙은 골안개 무리처럼 흰 수중기가 하늘로 솟는다. 도시 전체가 일본에서 셋째 가는 온천 지대란다. 시가지가 내려다 보이는 스기노이 호텔에 여장을 풀기 바쁘게 수백 명이 동시에 입욕 할 수 있다는 타나유 노천온천으로 달려갔다. 듣던 대로 온천은 층층으로 광장을 이루고 온천수가 철철 넘쳐흐르고 있었다. 실내 온천수에서 몸을 덥힌 후 노천으로 나가니 난(暖) 한(寒)이 교차 되면서 건강이 우려되기는 했지만, “언제 또 다시 이런 곳에 와 볼 수 있으랴” 하는 생각에서 감수하고 몸을 담그고 누워 하늘의 별도 헤어보고 시가지 구경도 하고 바다를 내려다보는 황홀경에 빠져 감기가 오고 감을 염려할 틈이 없었다.
조용해서 좋기는 했지만 관광지 답게 밝은 가로등에 간판이라도 좀 번쩍거리고 흥취한 취객이라도 몇 명쯤 시가지 거리를 휘저어 간다면 운치 스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버스는 다시 후크오카 다자이후 텐만구(학문의 신인 스가와라 미치자네를 모신 신사)를 향해 달렸다 재차 보는 후크오카는 어마어마하게 큰 도시였다. 시작에서 텐만구까지 한 시간 이상을 끝없이 펼쳐진 시가지를 버스로 관통했으니 말이다. 캐널시티를 중심으로 한 주변을 제외 하고는 도시 전체가 일,이층 정도의 목조 건물이 주를 이루고 있었으니 주거지가 차지하고 있는 도시의 면적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텐만구신사는 큰 사찰 규모로 시설이 화려하고 깨끗했으며 참배객들이 다른 관광지와는 달리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참배를 하면 어린이는 영리해 지고 학생은 공부를 잘 할 수 있다는 전설에 따라 어린이들이 예쁜 기모노 차림으로 부모들의 손을 잡고 참배하는 모습이 귀엽게 보였고. 각지에서 참배 온 중 고등학교 학생들이 줄을 이었다. 우
리의 유림행사처럼 진행되는 의식은 가히 엄숙했다. 다니는 곳마다 신주를 모시고 기
도 드리는 신당이 많은 것은 우리의 토속 신앙과 흡사했다. .
짜여진 일정에 맞춰 돌아다니다 보니 4일간 여행이 꿈같이 지나갔다. 며칠간 여행으로 어찌 일본을 말할 수 있을까마는, 섬 사람들의 살아 남기위한 알뜰한 기질을 대륙적 기개를 지닌 우리에게 약간 접목만 시킨다면, 한마디로 우리에겐 우리 것이 좋은 것 같았다.
작고 허름한 집들, 뱀처럼 구분 좁은 도로, 소형차들, 옛것을 보수하고 가꾸는 명수, 있는 상태대로 깨끗하게 활용하는 수구파, 친절하나 어색한 인간미, 너무도 철저한 식생활, 등등 습관에 젖어 살기 편하여 자기네가 세계에서 제일가는 경제 대국이라고 자랑 할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그네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몇 달만 살아보면 외도하여 집을 뛰쳐나가는 배우자처럼 방황하지 않을까 생각을 해 보았다.
열심히 벌어 좋은 집에서 맛나는 음식으로 부모님 봉양하고 자식들 잘 가르치고 가족이 가끔 여행도하고 주일은 부부가 등산도 하며 일가친척 대소사에 축하와 경조금도 전하며, 좋은 친구와 운동도 하고 서로가 돌아가며 술자리를 마련하여 정담도 나누며, 씹으면 씹을수록 단물이 솔솔 나는 그런 세상살이, 바로 우리에겐 우리 것이 좋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