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불법진리(佛法眞理) 공부는 혼의 의무교육
불교는 기독교보다 영계(靈界) 사정에 자세하다
여기서는 생명의 영원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이것은 종교에서는 원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테마입니다만, 기회가 있을 때마다 되풀이하여 이 테마를 말해 두지 않으면 잊혀져 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인간의 혼(魂)은 영원불멸의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대체 얼마만큼의 의미를 갖는가?」를 인간은 실체험(實體驗)을 통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깨달아가게 됩니다.빛으로 가득 찬 인생을 산 사람은 이 세상을 떠난 세계에서도 역시 빛으로 가득 찬 인생이 되어 오랜 행복을 계속해 가게 됩니다.
다른 한편 생명을 유한한 것이라 생각하여 이 세상에서 부처의 자녀, 신의 자녀로서 충분한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에게는 사후의 생명이 영원하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형벌이기도 합니다.불교에서는 지옥이라는 세계에 대해 설해지고 있습니다만, 불교의 지옥은 「언젠가 시기가 되면 구제되어 천상계로 돌아갈 수 있다」는 의미를 가진 세계입니다.
하지만 기독교에서의 지옥은 「영원히 구제될 수 없는 세계」라는 관점을 취하고 있어서, 「지옥에 떨어지면 그것으로 끝장」이라는 세계입니다.
그 때문에 「그래서는 너무 심하다」고 해서, 기독교에서는 천국과 지옥의 중간에 연옥(煉獄)이라는 세계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연옥이란 「지옥과 같은 곳이기는 하지만, 자손이 기독교를 믿거나 여러 가지로 선행을 쌓거나 하면 천국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조건부로 구제를 받을 가능성이 있는 세계입니다. 그와 같은 중간지대의 사상이 나중에 생겨났던 것입니다.
불교의 지옥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연옥에 해당하며, 불교에는 기독교적인 의미에서의 지옥은 없습니다. 다만 그것에 가까운 것이 있다고 하면 무간지옥(無間地獄)이라고 하여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지옥이 그에 해당할지도 모릅니다. 혹은 악마라고 하여 성불할 것 같지도 않은 존재는 기독교적인 의미의 지옥에 떨어져 있다고 해도 좋을지 모릅니다.
사상적으로는 그런 차이가 있으며, 불교의 지옥사상이 「모든 혼(魂)들을 언젠가는 구제한다」는 사상에 뒷받침되어 있다는 점은 대단히 희망찬 내용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기독교적으로 「선이냐 악이냐에 의해 딱 나누어 그것으로 끝」이라는 것이 아니라, 「불합격했어도 아직 “추가시험”이 있다. 구제받을 기회는 몇 번이고 있다」는 사고방식입니다. 그렇게 「사후의 세계에서도 여전히 구제활동은 계속된다」는 사상이 있습니다.따라서 불교는 기독교보다 영계(靈界) 사정에 자세하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 세상은 거울유리가 붙은 취조실과 같은 것
「인간의 생명은 영원(永遠)하다」는 것을 지상 사람들이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가 하면,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실제 상황일 것입니다.
어렴풋이 감지하거나 이야기로서 이해하는 경우는 있지만, 「실감으로서 생명의 영원을 믿고 그것을 스스로의 인생관으로 삼아 살아간다」는 수준까지 간 사람은 소수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사람들 앞에서 하면 이 세상의 상식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에게서 조롱당하거나 반발을 사거나 하는 형태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 싸움이 영원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나 신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어째서 그것을 좀 더 잘 알 수 있게 해주지 않는가? 누구에게도 알 수 있도록 해주었더라면 그렇게 헤매지 않아도 될 텐데, 어째서 고심참담하지 않으면 깨달음을 얻을 수 없도록 되어 있는 것인가? 이 세상에서도 횡단보도에 흰색 선을 긋거나 신호등을 빨강ᆞ파랑ᆞ노랑으로 표시하거나 하는데, 사람들이 틀리지 않도록 좀 더 잘 알 수 있는 형태로 해줘도 좋지 않은가?」라는 사고방식도 일부에는 있을 것이고, 있어서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알 수 없게 해 놓고서, 왜 사후에 심판이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가? 그 점이 불명료하고 공평치 못하다. 또 과학적,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사고방식도 있을 것입니다.
다만 나는 영적(靈的)인 체험을 하고 있는 소수의 인간 중의 한 사람으로서, 「알 수 없는 데에는 알 수 없을 만한 이유가 있다」고 절실히 느낍니다.
실제로 영(靈)들의 모습이 보이거나 목소리가 들리거나, 영들이 하는 일이나 그들이 지상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을 알거나 하는 상태에서, 이 세상 인간이 지상 생활을 다하기란 극히 힘든 일입니다. 「영들이 다 보고 있다」는 것을 모르도록 되어 있으므로, 이 세상의 인간은 프라이버시를 유지할 수가 있고 여러 가지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투명한 유리 너머로 다 드러난 상태로 영들이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TV 드라마 등에서, 경찰의 취조실에 「여기서는 보이지 않지만 반대쪽에서는 보인다」는 거울유리(mirror glass)가 붙어 있어서, 그것을 통하여 본인은 알 수 없도록 다른 방에서 관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만, 이 세상과 저 세상의 관계도 실은 그와 같이 되어 있습니다. 「저 세상의 영인(靈人)들은 이 세상을 자유롭게 볼 수가 있지만, 이 세상에서는 저 세상이 보이지 않는다」는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불합리하다고 보는 견해도 있겠지만, 영적인 세계를 실체험하고 있는 입장에서 보면, 이 세상의 생활에서는 영적인 것이 보이거나 들리지 않는 쪽이 좋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차원세계(異次元世界)와의 교류를 하면서 이 세상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면이 있어 생활에 지장을 초래할 것입니다.
다만 그런 세계를 잊어버려서는 안되므로, 영능력자(靈能力者)나 예언자, 종교가 등, 예외로서 인정된 일부의 사람이 나와 영적인 세계에 대해 설하고 그것을 퍼뜨려 가는 것입니다만, 대다수의 사람은 그것을 실제로 체험하는 일은 없습니다. 혹은 사람들이 완전히 망각하지 않을 정도로 때때로 영적인 체험을 시킵니다만, 평소에는 영적인 것을 느끼지 않도록 해두고 있습니다.
이런 시스템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렇습니다. 예를 들면 「오늘 점심은 무얼 먹을까?」하고 생각했더니, 「이걸로 해라」는 목소리가 여기 저기서 들려오거나 하면 보통 생활은 하기 어려워집니다.또 뭔가를 할 때마다 일일이 저 세상의 목소리가 들리거나 저 세상 사람의 모습이 보이거나 하면, 이 세상에 사는 인간의 주체성이 없어지는 면도 있습니다. 그와 같은 환경 아래에서는 이 세상의 인간으로서 책임이나 자각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판단하면서 살아가기는 상당히 어려워질 것입니다.
그와 같은 양면을 고려해서 이런 형태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은 다음에 나는 어떻게 되는가?」라는 것에 대해서는 「결과는 뚜껑을 열어봐야 안다」는 부분이 있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수행으로서는 재미있다」고 하면 어폐가 있습니다만, 「모르기 때문에 수행으로서는 장애물경주와 같아서 좋은 면이 있다」는 것입니다.믿고 안 믿고는 자유이고, 믿은 결과 어떻게 하는지도 자유이며, 믿지 않은 결과 어떻게 하는지도 자유입니다. 그러나 최후에는 그 모든 것에 대해서 강평(講評), 판정이 행하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혼의 본래 모습을 잊어서는 안된다
영원한 생명의 흐름에서 보면, 이 세상의 수명은 역시 짧습니다. 길어야 백여 년이고 눈깜짝할 사이에 끝나는, 정말로 덧없이 짧은 것입니다.그 속에서 인간은 여러 가지 경험을 합니다. 「사고팔고(四苦八苦)라고 하는 괴로움과도 만납니다.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다」는 「생ᆞ노ᆞ병ᆞ사」의 괴로움과,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괴로움[애별리고(愛別離苦)], 싫은 사람과 만나는 괴로움[원증회고(怨憎會苦)], 구해도 얻을 수 없는 괴로움[구부득고(求不得苦)], 혼이 본래의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육체감각에 지배되어 육체를 자기자신이라고 간주하여 「오관(五官)을 행복하게 만족시키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미혹이나 환상[오음성고(五陰盛苦)]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로부터 종교가 계속 설해왔던 것이기는 하지만, 「육체의 감각을 자기라고 생각하여, 혼이 주체로서의 자리를 잃어버린다」고 하는 미혹이 야기(惹起)됩니다.
이에 대하여 종교는 되풀이하여 가르침을 설하고 있습니다만, 사람들은 웬만해서 납득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현대적 사회가 되면 여름은 시원하고 겨울은 따뜻하게 보낼 수 있도록 모든 환경이 갖춰져 있습니다. 식생활에서 주거환경까지 쾌적한 쪽으로 모든 것이 흘러가고 있으므로, 오래된 종교가 가르치는 것이 왠지 어울리지 않고 시대에 뒤떨어진 듯이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이 세상적으로 쾌적한 것을 누구나가 추구해 갑니다.
그 의미에서 「종교가 이 세상적인 것을 부정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이 세상이 좋아지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닌가?」라는 사고방식도 일부에는 있습니다.「실내는 에어컨이나 난방이 되어 있고 습도도 조절된다. 먹을 것은 냉장고 안에서 보존되고, 가열하는 것도 간단히 할 수 있다. 음식재료는 바로 가공할 수 있는 것이 넘쳐나고 있다」는 상황과 고대 인도의 요가 수행자와 같은 난행고행(難行苦行)의 세계를 비교하여, 대체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대부분의 사람은 망설임 없이 현대생활 쪽을 택하겠지요. 「난행고행은 불신(佛神)을 향해 가는 길이다」라는 말을 들어도 납득하지 못하는 마음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확실히 옛날 사람들의 사고방식에는 너무나도 단순한 면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현대적인 진화 그 자체를 부정할 마음은 나에게는 없습니다. 이 세상을 경험을 쌓기 위한 하나의 공간이라고 본다면, 그 속에서 「인간으로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를 여러 가지 형태로 시험해 보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속에서 자신의 혼의 본래의 상태, 본래의 모습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을 잊지 않는다면 더욱 새로운 경험을 쌓는 것 자체는 나쁜 일이 아닙니다.
고도의 과학기술 문명에 어울리는 영성(靈性)이 필요하다
현대사회에 수많은 혼이 태어나고 있는 현실을 본다면, 역시 지금의 세상은 상당히 매력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때문에 많은 혼이 또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2천5백 년 전의 석가불교는 「이 세상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이 세상에 돌아오지 않게 되는 것이 행복」이라고 설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이 발전하고 환경이 좋아졌기 때문에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시대는 석존의 교설(敎說)과는 반대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상적인 싸움의 매듭이 지어져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도에서는 불교가 쇠하고, 현세를 긍정하는 힌두교가 퍼져서 인구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석존의 가르침과 반대로 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이와 같이 「종교적 사상은 현대에서 새로 검증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입니다.
여기서 내가 기본적인 입장으로서 말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새로운 종교로서는 앞으로도 일취월장하게 될 과학기술문명 자체를 부정하는 형태의 종교로는 만들고 싶지 않다. 세상이 편리해지는 것은 좋은 일이다」라는 내용입니다.
예전에는 이동수단이 말[馬]이 되고, 철도가 되고, 비행기가 되고, 리니어 모터카(linear motorcar, 차량의 구동방식에 직선형 전동기를 이용한 차량)가 되어가는 것 자체는, 그것은 그것으로 좋을 것입니다. 그만큼 밀도가 높은 인생경험을 쌓을 수 있게 되므로 그것을 종교적으로 부정하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한 혼의 상태가 아니면 우주공간을 갈 수 없었는데, 스페이스 셔틀과 같은 우주선에 의해 육체를 가진 채 우주에 갈 수 있는 시대가 온 것도 종교적으로 부정하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고도의 과학기술문명에 어울릴 만한 영성(靈性), 영적(靈的)인 균형감각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이 진보하고 살기 편해짐에 따라 저 세상적인 것, 영적인 것을 잊어 간다」는 것이라면,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 많은 사람들이 지옥 인구로 전화(轉化)할 가능성이 극히 높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시대이기 때문에 영적인 사상을 믿는 사람들의 저변을 넓혀 가야만 합니다. 「영적인 사상은 결코 고대만의 것이 아니라 현대에도 필요한 것이다」라는 사실을 전할 사명이 행복의 과학에 부과되어 있습니다.
그와 같은 것을 마음속 깊이 다짐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불법진리(佛法眞理)는 인생에서의 교과서
「지금 행복의 과학이 싸우고 있는 상대는 대체 무엇인가」하면, 그것은 현대인의 상식이며, 학교교육에서 「교과서에는 쓰지 않는다」고 되어 있는 사고방식입니다. 교과서에 쓰여 있지 않은 것이나 매스컴 등에서 냉소적, 비판적으로 다루어지는 사항 속에 실은 진실한 것이 있으며, 그것은 인간으로서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에서의 교과서에 해당하는 것이 행복의 과학의 불법진리(佛法眞理)입니다. 인생에서의 교과서인 이상, 의무교육과 마찬가지로 모든 국민, 전 세계 사람들이 기본적인 부분을 공부해 주어야만 합니다.
불법진리에 관해서는 「일부 사람들만이 공부한다」는 엘리트교육이어서는 곤란합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이것의 혼(魂)의 의무교육이며, 기본적으로 예외를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기본적인 사상에 대해서는 한 사람도 놓치지 않고 전원에게 이해시키고 싶다」는 바램을 강하게 가져야만 합니다.물론 불법진리에 대한 이해에는 「상근ᆞ중근ᆞ하근(上根ᆞ中根ᆞ下根)」의 단계가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 이해하는 정도에 차이가 있음은 역사적으로 보아도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학교 시험에서도 백 점을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60점을 받는 사람도 30점을 받는 사람도 있어서 각각 배움의 차이는 있지만, 교과서 그 자체는 내용적으로 일정한 레벨로 만들어져 있습니다.불법진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해의 정도에 차이는 있겠지만, 기본적인 것, 바탕이 되는 것에 대해서는 의무교육으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가르쳐야만 합니다. 그러나 학교도 학원도 부모도 현재 그 사명을 충분히 다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종교가 「영성(靈性)의 공교육(公敎育)」을 해야만 합니다. 그것을 강하게 호소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행복의 과학의 전도활동도 아직 충분하지 않으며, 불법진리의 영화를 제작해서 상영해도 꼭 충분하게 널리 알려졌다고는 할 수 없으며, 할 일은 무한히 많습니다. 그와 같은 강한 사명감을 가져야만 합니다. 「아직도 안되었다. 이제부터다」라는 마음을 강하고 강하게 가져 주었으면 합니다.덧붙여 말하자면 과거의 종교가들은 여러 가지 가르침을 설했지만, 그 후 그 사람을 뛰어넘을 만한 사람이 거의 나오지 않으므로, 가르침이 그 시점에서 멈추어버려 잘 알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불교도, 석존이 최고이며, 그 후에 나온 불제자는 석존의 수준까지는 가지 못했습니다. 2천5백 년이 지나서 「분명히 석존을 뛰어넘었다」고 할 수 있는 불교의 승려가 있었는가 하면 없습니다. 작은 분파(分派)를 만들고 하나의 파(派)를 일으켜 퍼뜨린 사람은 많지만, 전체적인 사상을 설하는 데까지는 가지 못했습니다.
후세의 불제자들은 경전 한 두 권을 거론하며 「이것이야말로 진짜다」라고 주장하는 형태로 전도를 하였습니다. 확실히 대장경(大藏經)은 분량이 너무 많으므로 「대장경을 전부 배우지 않으면 깨달을 수 없다」고 한다면 거기서 끝장입니다. 그 때문에 「내가 여러 가지로 공부한 결과, 이 경전이 가장 좋다」고 하며 분파(分派)의 시조들이 여러 가지로 가르침을 퍼뜨린 것은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그 반면, 불교의 본질 그 자체에서는 유감스럽게도 상실된 부분이 큽니다.
그 때문에 지금 나는 수많은 가르침을 계속 설하면서도, 하나의 본질을 분명히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 점을 아무쪼록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2. 많은 사람들에게 진리의 등불을 전하는 노력을
깨달음만 가지고 있으면 저 세상에서 자유자재해질 수 있다
이 세상에는 행복이나 성공뿐 아니라 육체적인 문제 등 여러 가지 일이 있겠습니다만, 「죽으면 자유자재해질 수가 있다」는 것을 부디 잊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뇌(腦)의 외과의사가 무슨 말을 하든, 인간은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이지 뇌로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뇌는 컴퓨터와 같은 “기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계의 기능이 충분하지 않으면 생각을 전달할 수 없지만, 생각 자체는 완전합니다.
또한 사후 2, 3년 지나면 본인이 가장 활약했던 시기의 연령의 젊음으로 돌아갑니다. 그와 같이 영계(靈界)에서는 연령도 젊어집니다. 본인이 희망하는 연령, 본인이 자기 이미지로서 가지고 있는 연령 정도까지로 되돌아갑니다.
그리고 만년에는 몸이 부자유해져서 손발이나 뇌, 입, 눈, 귀 등 여러 부분이 부자유해지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죽은 단계에서 사라집니다. 따라서 거기에 구애되어서는 안됩니다. 「혼의 부분은 완전하며, 완벽하게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사후의 세계가 있고 죽으면 이렇게 된다」라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인생은 역시 훌륭하다고 느낍니다.
이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가령 이 세상적으로는 무명(無名)이더라도, 지위가 높지 않더라도 깨달음만 제대로 가지고 있다면 됩니다.
이 세상의 상식에는 어긋날지도 모르지만, 사람들을 진정한 의미로 인도하고 계몽하는 일을 한 사람은 사후에 반드시 평가받고 저 세상에서 자유자재한 세계로 들어가 더욱 더 활약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이 세상적인 것에서 최종 목표를 지향해서는 안됩니다. 이 세상적인 시점이 아니라 늘 실재계(實在界)의 시점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자신의 삶이나 수행방법, 대인관계, 처세방법 등을 생각하고 판단해야 합니다.자기자신이 영적인 향상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영적으로 플러스가 되는 방향으로, 그리고 주위 사람들도 영적인 인식이 높아지는 방향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 주셨으면 합니다.「깨달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자신의 사명을 할 수 있는 데까지 끝까지 해낸다
저 세상에 돌아가면 거주하는 세계가 완전히 달라서 악마와 만나는 일은 없습니다.이 세상에서 육체에 깃들어 있는 동안에는 육체의 상태가 나빠지거나 나이가 들거나 하면 사명을 방해하려는 자들에게서 이런 저런 공격을 받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연못의 물은 표면이 깨끗하고 아래가 탁한 것처럼, 저 세상에 돌아간다면 아래의 탁한 세계에 살고 있는 자와 위쪽에 살고 있는 자가 함께 지내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오로지 이 세상에서만 옥석혼효(玉石混淆)여서 여러 가지 것이 뒤섞여 있습니다. 이 세상은 어떤 의미에서 지옥계에 대단히 가깝기 때문에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은 지옥계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살아 있는 동안에는 간난신고(艱難辛苦)가 찾아오는 일도 있겠지요.
예를 들면 진리를 전도하는 일을 방해하려고 이 세상적으로 경제적인 위기가 오거나, 부부의 위기, 부모와 자녀 관계의 위기가 오거나 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회사 등 여러 가지로 직장에서 불리한 대우를 받거나 다른 사람에게 매도당하거나 업신여김을 당하거나 박해를 받는 일이 있겠지요.그 결과, 마음에 괴로움을 만들고, 일시기 악령이나 악마에게 공격당하여 불우한 말년을 보내다 죽는 일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깨달음만 확실히 가지고 있다면, 설령 어떤 결말이 나더라고 저 세상에 갔을 때는 마땅히 돌아가야 할 곳으로 제대로 돌아가게 되며, 그 후에는 완전히 원래대로의 일에 복귀할 수 있습니다. 이는 틀림없이 보증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오히려 빛의 천사나 그 예비군이기 때문에 더더욱 마(魔)가 다투어 일어나 여러 가지로 방해를 해옵니다.
보통사람이라면 악마나 악령도 쓸데없이 건드리지 않을 만한 정말로 사소한 마음의 잘못, 마음가짐의 잘못이라도, 빛의 천사일 경우에는 그것을 악마나 악령이 공격해 오는 일이 있습니다. 보통사람이라면 공격할 정도까지는 아닌 실로 별 것도 아닌 틈을 노려, 그곳을 억지로 비집고 들어와서는 동요시키거나 헤매게 만들거나 하는 것입니다.
다만 그런 일이 일어나면 일어날수록 「지금 내 불퇴전(不退轉)의 심경을 시험 당하고 있구나. 신앙심을 잃어버리지 않는지 어떤지 시험 당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고, 꾸준히 끊임없는 노력을 해주셨으면 합니다.이 세상적으로 결과주의자가 된다면 그것을 극복할 수는 없겠지요. 「언제 다 불타버려도 좋으니까, 할 수 있는 만큼의 일을 계속해 가겠다」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이 세상적인 결과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실재계의 시점으로 생각할 일입니다. 고귀한 일을 한 사람은 확실히 공정하게 평가를 받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완전함이나 완벽함을 바랄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의 사명을 할 수 있는 데까지 이루어 낼 일입니다.
자기로서 할 수 있는 데까지 했다면 그 결과에 대하여 이 세상적인 평가, 가족이나 주위 사람들의 평가 등을 너무 깊이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는 사람은 알고 있습니다. 실재계의 눈은 절대로 흐려지는 일 없이 제대로 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진리의 등불을 전한다」는 노력을 해 주십시오. 이번 이야기가 여러분의 진리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진다면 다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