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발 머리
송 희 제
요즈음은 시대가 다양하고 빠르게 변해가고 있다. 특히 사람의 모습에서도 패션이나 머리모양에서도 각자의 개성대로 자기 모습을 표출해 내고 있다. 머리 색깔 또한 화려하게 동양인들은 흑발임에도 금, 은발과 심지어 더 알록달록하게 각자의 개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나 또한 황혼기인지라 몇 년 전부터는 흑발 염색을 하지 않고 세월 따라 자연색 그대로 은발이다.
내가 어릴 적엔 친정아버지 머리는 유난히 일찍 반백이 되셨다. 키는 훤칠하시고 인물도 수려한 외모에 은발 머리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내 친구들 부모 머리가 다 흑발인데 나의 아버지만 달라서 나는 숨고 싶을 때가 많았다. 공납금을 낼 때면 내게 직접 내도록 돈을 주어도 될 것을 꼭 학교에 오셔서 돈을 내고 가셨다. 그냥 가시면 되는데 울 아버지는 막내딸의 공부하는 모습을 직접 보고 가셔야 귀가하시는 발길이 가뿐하셨나 보다. 복도 유리창 너머로 딸의 자리를 찾으려 하는 아버지의 은발 머리가 너무도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나의 모습이 아닌 척 감추려고 노력하였다. 친구들은 부모님이 삼촌 같기도, 이모 같기도 한데 나만 할아버지와 할머니 같아서 말이다.
대전에서 학교 다닐 고교 1학년 때이다. 그날도 아버진 학교에 오시어 우리 복도를 오가며 내 자리를 찾으셨다. 복도 넘어 유리창으로 나를 찾으시는 아버지의 이마 머리가 보였다. 창피하여 고개를 움츠리고 있는데 오빠들만 있는 남성 기질 짙은 `영감`이란 별명을 가진 친구가 내게 다가와 큰 새 소식이라도 전하듯 말하였다.
“희제야! 저번에도 대전 오셨을 때 학교 복도에서 만났잖아. 네 할아버지가 아까부터 널 찾는 거 같았어. 나가 봐!”
그때 나는 너무도 창피하여 의자 아래 쪼그리고 숨죽여 울다 뒷문으로 나가 아버지 뒤에 숨어 만난 적 있다.
내가 그때는 철이 없는 시절이라 그랬지만, 어른으로 중년이 된 시절에는 나도 자식에게 할머니로 보일까 봐 조심스러웠다. 나는 결혼 적령기를 좀 지나서 결혼했다. 두 아들을 낳았지만, 학부형이 되고 보니 일찍 결혼한 엄마들보다 내가 더 연상이라 내 아들의 할머니로 보일까 봐 염려스럽기도 하였다. 아들이 학교 임원을 하여 학교에 가끔 갈 때면 젊은 차림으로 차려입기도 했다. 나 어릴 때처럼 우리 아이도 그런 생각을 가질까 봐 걱정했는데 아들이라 나 같은 생각은 없었나 보다.
세월이 흘러 여고 시절 `영감`이란 별명을 가진 그 친구는 나보다 훨씬 늦게 결혼 하였다. 한동안 아이가 없다가 늦둥이 외동딸을 두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우리 아이들 중고등학교 다닐 때인 것 같다. 한동안 서로 뜸하던 시절 그녀가 갑자기 나를 만나 사과할 일이 있다고 했다. `무슨 일일까?` 결혼 후 서울에 살아 자주 만나지도 않았는데 웬일로 날 꼭 만나 할 말 있다 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내가 사는 집 근처 찻집까지 찾아왔다. 그 친구는 더 늦게 결혼하여 아이가 없어 고민하다가 기적 같은 선물로 딸아일 낳았단다. 너무도 귀하고 예뻐서 우리 아버지가 날 보러 교실 복도를 맴돌 듯 자기도 학교엘 가면 딸 공부하는 모습을 살짝 보고 오게 된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어릴 적 급우들 많은 데서 내 아버질 할아버지 왔다고 큰 소리로 말한 게 생각나 친정에 왔다가 날 보러 왔노라고 했다. 난 까마득히 오래 적이라 그 친구의 무례라고 생각지도 않는데 그걸 맘에 두고 미안했다고 해주는 배려에 고맙기도 하였다.
지금은 나도 노인으로 세월의 흔적을 감추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어 오히려 편안하다. 50대 중반 때도 반백으로 흰머리가 보일세라 감추려 염색하였다. 바빠서 염색하지 못할 때는 부분 가발을 쓰느라 뒷거울을 보며 머리 손질에 정성을 들였다.
이렇게 세월에 따라 생각은 비슷한 현상이 달리 받아들여진다. 요즈음에는 이일 저일 다 겪어 어머니와 할머니 세대를 다 끌어안고 산다. 머리만 검다고 젊은 것도 아니요, 지금처럼 은발 생머리 커트라 해서 부끄럽고 쑥스러운 것도 없다. 보이는 외모와 세월에 움츠러들지 않고 그동안 살아온 연륜에 여러 경험과 깨달음으로 내공을 쌓고 싶다. 주변에 흔들리지 않고 어떤 어려움과 갑작스러운 위기가 닥쳐도 꿋꿋한 용기와 의지로 이겨낼 수 있는 의연함을 가지고 사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있는 그대로 자연의 내 은발 머리의 모습을 가식 없이 보이면 그 또한 아름다운 황혼의 노을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