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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2-시인 이흥우를 다시 생각하며
308 _ 황환택
선산을 지킨 한 그루 소나무,
그리고 자아를 찾아가는 진실한 몸짓
황 환 택(《사비문학》 편집국장)
으레 고향 선산에 가보면 선산을 지키는 오래된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모진 비바람과 태풍과 서리를 견디며 홀로 외로이 선산을 지켜
온 소나무는 바로 선산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선산에 오른
사람들은 그 소나무를 보면서 위로도 받고 기운을 얻으며 또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된다.
어디 선산에만 오래된 소나무가 있으랴? 우리 곁에도 늘 선산의 소
나무처럼 외로이 그러나 굳건히 선산을 지켜온 이가 있다. 부여 문학
이라는 큰 산에서 많은 이들이 떠나가고 다시 와도 늘 그 자리에서
소나무처럼 지켜온 이가 있다. 오랜 세월 동안 부여 문학이라는 산을
말없이 지켜왔고, 그의 아호 들샘[野井]처럼 목마른 이에게 아낌없이
베풀어 온 사람, 바로 들샘 이흥우 시인이다.
시인은 스스로를 한 곳에만 머물며 사는 텃새라 생각한다. 텃새로
살아온 시인은 한 번도 부여를 떠나 살아본 적이 없다. 이곳 백제의
왕도 부여는 지형이 완만한 산과 반월의 백마강이 흐르는 곳이다. 이
에 사람의 인성도 지형을 닮아 온순하고 넉넉한 인심에 자연적으로
문화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배출된다. 이는 백제금동대향로
1차 교정용
특집2-시인 이흥우를 다시 생각하며|
황환택 _ 309
를 보아도 바로 알 수 있듯이, 뛰어난 예술작품으로 백제의 문화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곳 토박이 시인의 부친도 매년 봄가을 부소산에서 선비들이 모여
한시를 쓰고, 그날의 시 한 수에 기쁨을 갖고서 들려주신 부친의 한
시를 지금도 기억한다 한다. 6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 부친의 시
적 영향을 받았고, 고향의 아름다움을 시로 승화시키고 싶은 열정 때
문에 지금까지 텃새로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또한 부여의 지리적 특
성과 백제의 후예의 얼이 깃들어 많은 텃새 문인들이 배출된 것 같
다.
그 텃새 시인이 고향을 벗어나 오랜 공로를 인정받아 부여 문학 최
초로 영예로운 수상을 하게 되었다. 바로 2020 제6회 ‘한국문학인상’
을 수상하게 된 것이다. 이 작은 상 하나로 그가 평생 걸어온 길과
공로를 어찌 말할 수 있을까마는 그래도 이제야 세상이 선산을 지켜
온 소나무의 공로를 이제라도 알아주니 이 또한 큰 기쁨이요 경사다.
그의 시조가 탄생하는 곳 시화원에 들른 일이 있다. 이름 그대로
시화원엔 시와 꽃이 있다. 바로 시인의 손에서 사시사철 꽃이 피어나
고, 꽃을 피운 그 손에서 다시 시가 핀다. 그러니 그의 시에선 늘 꽃
향기가 피어난다. 꽃의 향기는 손의 향기요 시인의 향기다. 넉넉하고
남 주기 좋아하는 시인의 마음이 늘 향기로 꽃이 되고 시가 된다. 퇴
직 후 700여 평의 개인 땅에 들샘 시화원이란 전원주택을 짓고 작은
문학공원을 조성하여 이곳에다 현재 부여지부 회원의 시비설치 및 빈
항아리에 회원 시를 전시 중이다.
1차 교정용
|특집2-시인 이흥우를 다시 생각하며
310 _ 황환택
아울러 시낭송 등 지부의 각종 모임은 물론 충남문협 이사회를 갖
기도 했다. 앞으로도 더 많은 지부 회원의 시를 빈 항아리와 자연석
에 시를 새겨 작은 문학공원의 쉼터이자 누구나 쉬어갈 수 있는 들샘
시화원으로 만들고 싶다 한다. 시화원은 각종 아름다운 꽃으로 어우
러져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이제 그의 시 이야기를 시작해 본다. 시인은 초등학교 시절 ‘농민도
장’이라는 백제초등학교 분교에서 공부했다. 이 분교에 시를 좋아하시
는 임원재 담임 선생님이 계셨다. 선생님은 똑똑한 학생 5명 정도를
골라 시 쓰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그 선생님 덕분에 난생처음 학생
백일장대회에 참가하여 큼직한 상장을 받았다. 이는 시인의 꿈을 실
현하는 계기가 되었다
(초등4학년 백일장대회 상)
1차 교정용
특집2-시인 이흥우를 다시 생각하며|
황환택 _ 311
(중학교 백일장대회 상)
군 제대를 한 후에도 지방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결혼과 함께 부
여 고향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직장을 다니면서 수시로 책과 함
께 글을 쓰면서 시인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주경야독으로 한국방송
통신대학 경제학과를 8년 만에 졸업하고, 석사과정도 직장을 다니면
서 수료하였다. 그러던 1991년, 그러니까 지금부터 30년 전에 《사비
문학》이 창간되었다. 창간호를 보면 모두 19분이 문인들의 글이 실려
있다. 그런데 이 19분 중 현재도 《사비문학》에서 작품 활동을 하는
분은 단 한 분뿐이다. 이흥우 시인이다. 세상을 떠나신 분도 있고, 고
향을 떠나 타지로 가신 분도 있고, 더 이상 《사비문학》에 글을 쓰지
않으시는 분도 있지만, 이흥우 시인만은 긴 세월을 우직하게 《사비문
학》에 소나무처럼 서 있는 것이다.
창간호에 실린 시인의 시를 읽어보았다. 처음에는 자유시를 쓰고
1차 교정용
|특집2-시인 이흥우를 다시 생각하며
312 _ 황환택
있어 좀 의외였다. 처음부터 시조를 쓴 줄 알았는데 말이다. 창간호에
실린 시 <내 고향은>의 일부를 잠시 읽어보자.
검정 고무신 벗겨 들고
왕파 끝 호롱벌 잡아 빙빙 돌리며
힘껏 달리다 풀 속에 쓰러져
엄마의 젖가슴처럼 마냥 그리워지는 곳
고향에 아련한 그리움이 살아나게 하는 자유시다. 검정 고무신, 왕
파, 호롱벌 등의 소재가 고향을 떠올리게 하고 있다. 이러 자유시는
2003년 첫 시조집 『봄비 너는 꽃 엽서』를 내면서 시조로 자리를 옮
긴다. 결국 이때가 새로운 시조 시인의 탄생 시점이 된 것이다. 이 첫
시조집에 나온 시 한 <맥 짚어 내린 비>를 감상한다.
바지랑대 높이만큼
사모하는 촉수는
꽃대궁 고개 쳐든
도라지 모습처럼
나긋한
눈빛 다가와
마주 보는 별 하나
글은 사람을 닮는다. 그의 시조를 보면 바로 그 사람 같다. 그의
시조가 돋보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진실한 몸짓이 있기 때문
이다. 동천(冬天)을 지나면서 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면서 써온 그의 시조가 흘러왔다. 시조의 불모지인 이곳 사비에
1차 교정용
특집2-시인 이흥우를 다시 생각하며|
황환택 _ 313
서 그가 이루어낸 일들이 족적처럼 찍혀 있다. 이 시조도 그렇다. 바
지랑대, 꽃대궁, 도라지, 별 등 토속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시어들로 그
의 시조는 창조되었다.
그의 시조를 보면 고전적 통찰과 완미한 형식미학을 갖추면서 그
안에 견결하고 깊은 마음의 상태를 새겨간 현대시조의 심미적 화첩으
로 모자람이 없다. 시인은 ‘시조가 중심이 되는 시대’를 꿈꾸면서 늘
시조를 통해 가장 고매하고 아름다운 마음의 차원을 사유해 가고 있
다.
시조는 우리의 정서와 슬기가 아우러진 장르다. 어쩌면 초가지붕의
용마름처럼 엮어지고, 된장이나 간장처럼 세월로 곰삭혀져 대대손손
이어받기 좋은 문학 장르다. 선조들이 면면히 창작하고 부른 전통적
노래에는 향가, 고려가요, 경기체가, 가사, 시조 등 여러 시가(詩歌)가
있었다. 그 시가 중에는 한때 성황을 이루다가 서서히 사라진 노래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조는 유독 900여 년간을 이어져 오고
있으며, 현대시조는 최남선 이후 100년을 이어오고 있다. 왜 그럴까.
그건 시조의 형식과 내용이 지극히 한국적인 까닭이다. 무엇보다 우
리 민족의 성정에 알맞은 양식이기에 그렇다.
이제 그가 2020 제6회 ‘한국문학인상’을 수상하게 된 시 <새벽달을
보며>를 감상해보자. (물론 재론하지 않아도 이 상을 받은 일은 모두
가 아는 것이지만 다시 한 번 축하의 인사를 올린다.)
겨울비 내린 새벽
은 쟁반 새벽달이
1차 교정용
|특집2-시인 이흥우를 다시 생각하며
314 _ 황환택
산뜻한 몸단장에
사랑에 취한 간밤
노을빛
대숲에 안겨
긴 늦잠을 청한다
시는 그림이고 시는 음악이다. 이 시조를 보면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하고 명곡 한 곡을 듣는 느낌이다. 그것도 머리가 시원해지는,
영혼이 맑아지는, 그래서 잠시 신선이라도 된 듯한 그런 느낌이다. 겨
울비가 내린 서늘하다 못해 몸이 시린 새벽에 더해 은 쟁반의 차가운
새벽달이 떴다. 겨울비 내린 이른 새벽 청명한 서쪽 하늘에 지지 못
한 은쟁반 새벽달이 마치 분 화장한 여인 얼굴을 보듯 한눈에 들어와
반긴 새벽녘 달이다. 이는 밤새 사랑놀이하다 늦게 집을 찾는 것처럼
대나무 숲 가지에 걸려 늦잠을 청하는 것 같았다. 그 새벽달을 보며
그는 사랑에 취했던 간밤을 떠올린다. 그리고는 다시 대숲에 안겨 평
화로운 늦잠을 청하고 있다. 이 얼마나 신선의 모습인가? 세속적이면
서도 그 세속에서 본인만의 평화와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 인간의 모
습이 잘 그려지고 있다.
시인의 시조에는 고향에 대한 시조가 많다. 훗설은 고향을 “고향
세계는 모든 인간과 모든 인간 공동체를 둘러싸고 있는 친척 및 이웃
같은 절친한 사람들과 아는 사람들의 영역이다. 이 영역은 개인과 공
동체에 제각각 다르게 매우 광범위하고, 그러면서도 유한한 것이다.
고향의 의식적이고 형이상학적 측면을 볼 때 그 고향의 본질은 불변
하고, 또 그것은 영구적인 것이다. 또 그것은 자연적 공간만이 아닌
것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볼노프는 “고향은 인격이 태어나고 자라
1차 교정용
특집2-시인 이흥우를 다시 생각하며|
황환택 _ 315
고 또 일반적으로 계속 집으로 가지고 있는 삶의 영역이다. 고향은
그에게서 부모와 자식, 형제자매 등과 같은 가족 내에서의 친밀한 인
간관계들과 함께 시작된다. 이 요소 외에 고향은 마을과 같은 공간적
인 차원과 또 전통 같은 시간적인 차원을 지니고 있다.”고 하였다.
시인이 아니더라도 고향에 대한 향수는 누구나 지니기 마련이고,
시인이라면 누구나 사랑에 대한 시를 써 보듯, 고향에 대한 시도 쓸
것이다. 그러나 시인이 고향에서 살면서도 고향을 그리워하며 시조를
쓰는 것은 남다르다. 이제 이 시인은 앞으로도 고향과 시와 시조를
사랑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의 시화원에도 더 많은 시와 꽃들이 피어
날 것이다. 그렇게 피어난 시는 세상을 떠돌며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맑게 할 것이다. 사시사철 활짝 피어난 꽃들은 그 아름다운 빛깔과
향기로 온 세상을 더욱 살기 좋게 만들 것이다.
그렇다. 이흥우는 시인이다. 아무리 보아도 그는 시인일 수밖에 없
다. 그 시인이 더 좋은 시를 쓰고 더 아름다운 꽃을 피워 세상과 인
간을 행복할 수 있을 지 우리는 더 큰 기대를 갖고 지켜볼 것이다.
선산을 지켜온 소나무처럼 오래오래 그는 부여 문학의 산을 지킬 것
이기 때문이다.
1차 교정용
|특집2-시인 이흥우를 다시 생각하며
316 _ 이흥우
이흥우#시인의 대표작들
내 고향은
(1991년 《사비문학》 창간호)
닭 우는 소리에 하루가 열려
백마강변에 안개가 깔리고
기침만 하여도 메아리쳐올 산천은
찔레꽃 향기 감도는 곳
기다란 미루나무 바람 잎 사이로
싱그러운 태양이 숨 쉬는 곳
검정 고무신 벗겨 들고
왕파 끝 호롱벌 잡아 빙빙 돌리며
힘껏 달리다 품속에 쓰러져
엄마의 젖가슴처럼 마냥 그리워지는 곳
징검다리 사이로 물고기 술래 잡아
물장구치다 해는 서산에 기울어
다람쥐 쫓아 붉은 산딸기 따 먹고
# 아호 : 들샘,
《시조문학》 2001봄호 <바닷가의 아침>으로 등단
한국문인협회 부여지부장 및 월하시조문학회장 역임
현, 한국문인협회 이사
저서 : 시조집 『 고향 사랑채』 외 5권
1차 교정용
특집2-시인 이흥우를 다시 생각하며|
이흥우 _ 317
눈 발자국 따라 토끼몰이하던 곳
시냇물 나뭇잎배 띄우다 눈이 마주쳐
뻐꾸기 울어 임 소식 전해주고
누런 꾀꼬리 날갯짓에
밤꽃 냄새 풍겨오는 곳
|특집2-시인 이흥우를 다시 생각하며
318 _ 이흥우
다락논
(1998년 《열린문학》 신인상 작)
장암 골 고갯마루
산 다랭이 자투리 논
자지러진 나락은
주인 일손 손짓하고
찬바람 된서리에
진눈개비 맞는구나
논 주인 허수아비
침묵으로 기다리다
티눈으로 찌든 세월
허리 휜 채 누웠으니
휴경 답 예약인가
몰려드는 새떼 무리
특집2-시인 이흥우를 다시 생각하며|
이흥우 _ 319
바닷가의 아침
(2001년 계간 시조 전문지 《시조문학》 등단 작)
먼 바다 흰 톱니 되어
파도는 몰려온다
밤새껏 품에 안겨
낳은 정 뽀얀 조약돌
새벽을 달려가 맞는
흰 도화지 발자국
고깃배 만선 깃발
높새바람에 펄럭일 때
가르는 아침 햇살
그대는 살찐 인어
하늘 끝 작은 섬들이
눈 비비며 손짓한다
꽉 메인 목구멍도
얽혀버린 답답함도
단숨에 뚫리는 새벽
열병을 앓던 나는
대팻밥 뱉어내듯이
후련하게 씻는다
|특집2-시인 이흥우를 다시 생각하며
320 _ 이흥우
봄비 너는 꽃 엽서 1
(2003년 첫 시조집 『봄비 너는 꽃 엽서』)
감칠맛 손끝으로
싸리문 열어놓고
겨우내 옴츠린 몸
기지개로 들추니
내 알몸
벗겨 주는 이 봄비 너는 꽃 엽서
좋은 임 술 한잔에
얼굴 또한 붉어서
터질 듯 꽃눈마다
입술처럼 여는가
망울진
산자락마다 물들여진 연초록
빛바랜 추억들이
새 봄날 꽃이 되어
연분홍 마음으로
하루가 즐거운 날
지난날 앙금을 씻어 화창한 봄 맞는다
특집2-시인 이흥우를 다시 생각하며|
이흥우 _ 321
맥 짚어 내린 단비
(2003년 첫 시조집 『봄비 너는 꽃 엽서』)
바지랑대 높이만큼
사모하는 촉수는
꽃대궁 고개 쳐든
도라지 모습처럼
나긋한
눈빛 다가와
마주보는 별 하나
얼어붙은 가슴에
내리꽂는 단비는
세월 무게 받쳐 든
주춧돌도 뚫고서
순잎에
눈물로 맺힌
빗물방울 속앓이
|특집2-시인 이흥우를 다시 생각하며
322 _ 이흥우
고향의 밤은 반딧불이도 시를 쓴다
(2007년 두 번째 시조집 『천년 달빛이 흐르는 강』)
실개천 맑은 물에
낮은 음 놓고 가면
한낮엔 꽃잎 띄워
밤에는 별빛 씻네
달빛에
홀로 취한 밤
도깨비불 이야기
은 달빛 먼 산자락
선을 긋는 두메산골
반짝이는 그리움
바람결에 띄우면
별똥별
반딧불이 되어
긴 흘림체 시를 쓴다
특집2-시인 이흥우를 다시 생각하며|
이흥우 _ 323
대나무 숲에서
(2007년 두 번째 시조집 『천년 달빛이 흐르는 강』)
키 작은 바람에도
몸 비비며 우는 넌
은 달빛 무게에도
휘어질 줄 알았지
칼날 위
마음을 비운
네 모습이 부럽다
|특집2-시인 이흥우를 다시 생각하며
324 _ 이흥우
마중물
(2009년 세 번째 시조집 『내 사랑도 거미줄을 치고 싶다』)
낮에 뜬 반달처럼
임 마중 설레임이
강아지 꼬리치듯
해오름 만남으로
작두 샘
마중물 되어
두 손 잡는 반가움
특집2-시인 이흥우를 다시 생각하며|
이흥우 _ 325
백련과 홍련
(2009년 세 번째 시조집 『내 사랑도 거미줄을 치고 싶다』)
시궁창 젖은 꽃대
이슬로 목욕하고
우려낸 천년 달빛
등 밝혀 티 없어라
오신 임
가슴속에도
하얀 달빛 매단다.
못 다한 천년사랑
수줍은 노을처럼
뻥 뚫린 연밥마다
얼비친 마음 담아
가는 임
발걸음마다
향기 가득 배었다
|특집2-시인 이흥우를 다시 생각하며
326 _ 이흥우
눈 내린 산사 아침
(2013년 네 번째 시조집 『노을빛 하늘은 구름이 있기에 아름답다』)
새소리 울림에도 부러질 삭정가지
눈 쌓인 고요함에 등 밝혀 웃는 홍시
산새는 매달린 쌀밥 아침 공양하는 중
겸손한 소나무는 흰 모자 덮어쓰고
앞서 간 첫 발자국 산토끼 동행 삼아
하얀 맘 갈지자로 간 발자국을 접는다
특집2-시인 이흥우를 다시 생각하며|
이흥우 _ 327
노을 빛 하늘은 구름이 있기에 아름답다
(2013년 네 번째 시조집 『노을빛 하늘은 구름이 있기에 아름답다』)
숨죽인 명지바람 구름장 깔밋하다
노을빛 너른 하게 맞이한 하룻머리
드맑은 웃음 따라서 구름발치 살갑다
가벼운 깃털 구름 바람에 맡긴 여정
색칠한 세월 무게 느낌표 매달고서
노을로 분화장하고 아침 여는 마음 창
|특집2-시인 이흥우를 다시 생각하며
328 _ 이흥우
그날의 함성 - 석성산성 옥녀봉에서 -
(2016년 4월 석성산성 보존회 시비 건립)
한눈에 비단강이
손바닥 쳐다뵈듯
산 아래 백리길이
훤하게 펼쳐진 곳
여기는 대백제 요새 석성산성 옥녀봉
파진산 기슭마다
구절초 눈물 맺혀
무명용사 꽃 넋으로
함초롬 피었구나
아우성 조각난 기와 혼백 되어 뒹군다
뼈조차 삭아버린
고드름 눈물처럼
충혼을 불 지펴서
저녁놀에 물든 백강
애닯다 그날의 함성 핏빛으로 물들었네
해맞이 제단 위에
충절을 기리고자
산성을 복원하며
천제를 올리오니
이 땅의 새날을 여는 하늘빛도 곱구나
특집2-시인 이흥우를 다시 생각하며|
이흥우 _ 329
백제보에서
(2018년 다섯 번째 시조집 『고향 사랑채』)
갈꽃 속 비단강은
석양에 눈이 부셔
맑은 물 맑은 바람
강 언덕 얹어 두면
낮달이 술잔 되어서 장승 가슴 녹인다
강물에 화답하며
얼굴 씻는 반달은
천년세월 씻겨 낸
애환 속 황포돛배
천정대 달빛에 누워 철새 떼가 울고 간다
꿩 바위 백제보에
들국화 곱게 피면
노을빛 저녁 하늘
조각달 물에 젖어
목어는 앞산이 잠긴 물수제비 그린다
|특집2-시인 이흥우를 다시 생각하며
330 _ 이흥우
눈 오는 날에
(2018년 다섯 번째 시조집 『고향 사랑채』)
얼마를 기다려야 곰삭아 사라질까
그리움 재가 되어 흰 눈이 내립니다
오늘도 고드름 되어 눈물 뚝뚝 시리다
삽살개 꼬리치며 흰 눈을 좋아하듯
보고픈 마음일까 눈물이 눈꽃 되어
그 이름 휑한 가슴에 하얀 눈이 쌓인다
처마 끝 낙숫물은 염불을 외우는지
닫힌 문 손님 맞듯 목탁 소리 들려와
그린내 하얀 눈물이 먹물 되어 번진다
특집2-시인 이흥우를 다시 생각하며|
이흥우 _ 331
마음에 고약을 바르며
(2007년 충남문학 시조 부문 작품상)
병원서 못 고치는
깊은 병 하나 있네
안 보면 보고 싶고
보면 미워 죽을 병
고약을
과녁 중앙에
백일정성 붙인다
|특집2-시인 이흥우를 다시 생각하며
332 _ 이흥우
비에 젖은 수채화
앞만 보고 달려온
우리네 발자취들
아름답게 찍어둔
발자국에 물 고여
자화상
뒤돌아보니
물에 번진 수채화
쉼표 찍은 개구리
펄쩍 뛰어 도망치듯
봄비에 순잎으로
초록 산하 물들면
메마른
갈대 같은 삶
훨훨 털어 순잎 핀다
특집2-시인 이흥우를 다시 생각하며|
이흥우 _ 333
새벽달을 보며
(2020년 한국문인협회 ‘한국문학인상’ 수상작)
겨울비 내린 새벽
은 쟁반 새벽달이
산뜻한 몸단장에
사랑에 취한 간밤
노을빛
대숲에 안겨
긴 늦잠을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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