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를 다녀와야 사람이 된다고? - 소설가 김종광
입대를 앞둔 청년들이 가장 많이 듣는 덕담은? ‘군대를 다녀와야 사람이 된다!’가
아닐는지. 아니, 지금은 사람이 아니란 말인가. 군대를 안 다녀온 어른들은 사람이
아니란 말인가? 물론 사람이다. 따라서 ‘군대를 다녀와야 사람이 된다’에서
말하는 사람은, ‘본능적 인간’이 아니라 ‘민주적 인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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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가르치고 배우는 곳
<팔도 사나이>라는 군가가 있다. 말 그대로 전국 8도의 청년들이 모인 데가 군대다. 산지사방에서 살다온 청년들이 모여 사는 것이다. 초·중·고등학교 12년 동안 표준어를 배우고, 군대에서는 군대용어와 군대억양을 습득했지만, 자기가 살던 지방 고유의 사투리가 몸에 배어있다. 지방에 따라 생각과 행동이 다르기도 하다. 이러한 서로 다름이 완벽히 섞이는 것이다. 당연한 것 같지만 놀랍지 않은가.
학력도 다 다르다. 과거에는 대학생이냐, 대학생이 아니냐가 중요했다. 대학생 극소수 비대학생 대다수이던 시대에서,대학생 반 비대학생 반이던 시대를 거쳐, 대학생 대다수 비대학생 극소수인 시대가 되었다. 따라서 지금은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가 중요하다. 스카이대냐 서울 안에 있는 대학이냐 수도권대냐 지방에 있는 국립이냐 생전 처음 들어보는 대학이냐. 천차만별이 다 모였다.
집안 형편도 각양각색이다. 국회의원이나 장차관급을 부모로 둔 청년에서부터, 부모가 있어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만큼 ‘불우한 이웃’이나 ‘소외된 계층’으로 불리는 청년까지 골고루 집합하는 것이다. 30명 정도가 생활하는 내무실에서 입대 전의 알바 경험이나 취업 경력을 각각 얘기한다면 ‘인생극장’ 혹은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드라마 백 편은 나올 테다.
군복무기간 20여 개월은 그토록 다른 청년들을 짬뽕밥으로 만들지 못한다. 서로 다른 청년들은 자기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으면서도,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20여 개월을 무난히 살아내는 것이다. 서로 존중하지 않고 배려하지 않으면 도무지 살아갈 수가 없는 곳이다. 엄친아와 공장노동자의 아들이 동고 동락하고, 스카이대 청년과 지방의 모모대 청년이 고민을 나누는 모습은 군대에서만 볼 수 있다.
결국 군대생활은 사람 공부다. 군대 이전에도 군대 이후에도 자기랑 맞는 사람과만 어울린다. 자기와 통하는 사람과만 교류한다. 하지만 군대에서는 자기랑 맞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야한다. 자기랑 맞지 않는 사람들과 별문제 없이 지내며 나라 지키는 대의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자기 이외의 사람을 끝없이 관찰하고 공부하지 않을 수 없다.거기에서 존중과 배려가 싹튼다. 이렇게 완벽한사람 공부는 군대에서만 가능하다.
민주주의, 복잡하게들 이야기하지만 결국 자기랑 생각과 행동이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하자는 것 아닌가. 민주주의를 가르치고 배워야 할 곳은 학교다. 하지만 알다시피 학교는 대학가기 위한 공부, 취업하기 위한 공부, 그런 영양가 없는 공부나 하는데다. 역설적으로 가장 획일적 사회로 알려진 군대가, 민주주의를 교육하고 있는 셈이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곳
군대생활을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이다. 병사는 깊은 밤에 어둠을 바라보고 있다. 물론 그의 눈은 어떠한 적의 침입도 발견할수있을 만큼 예리하게 빛나고 있다. 하지만 머릿 속은 생각이란걸 하지 않을 수 없다.
군대는 허구한 날 고된 훈련만 하는 데가 아니다. 휴전선의 육군은 철책선을 지키고 전투경찰은 경찰서나 시위현장을 지키고 해병은 바다를 지키고 공군은 하늘을 지킨다. 지키는 동안 생각이란 걸 하지 않을 수 없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화두하나 붙잡고 용맹정진 한다는 스님이나 마찬가지다. 짧은 생애지만 생각하려고 들면 무궁무진하다. 학창시절의 파노라마가 새록새록 떠오른다. 아,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로소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비로소 ‘효자’가 되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계획을 수백 번 수천 번 고쳐쓴다. 생각, 생각, 또 생각이다.
이토록 치열하게 생각을 20여 개월이나 계속 하는 경우는 인생에서 딱 한 번뿐이다. 사람이 생각을 하면,생각이 지나쳐서 위험한 행동으로 주위 사람을 슬프게 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대개는 성숙해진다. 문장을 잘 쓰려면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고 많이 읽으면 된다. 하나도 안쓰고 하나도 안읽는 사람도 많이 생각하면, 문장을 잘못 쓰더라도 사고력은 깊어진다. 세상을 보는 눈이 밝아지고 사회와 더불어 사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심도 높아진다.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알게 된다.
스마트폰이 등장한 이후, 사색하는 청년들이 드물어졌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스마트폰으로 뭔가를 한다. 스마트폰으로 뭔가를 하는 것도 생각의 연속이기는 하겠지만, 사색이라고 할 수는 없다. 입대를 앞둔 청년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말을 하자면, 군대는 사람으로 살아가는데 무엇보다도 간절히 필요한, 사색을 하지 않고는 못배기게 하는 데다.
사람이 된다는 것
‘군대를 다녀와야 사람이 된다’는 말은 ‘조선 사람은 몽둥이가 약이다’와 동급으로 나쁜 말이었다. 군대 가서 구타와 얼차려를 죽도록 받고 와야 사장님이나 윗사람 말 잘 듣는 고분고분한 젊은이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건 옛날 이야기다. 이제 그런 것 없다. 뉴스에서 봤는데 없다니! 하루 종일 청소해도 어딘가에 먼지 한 점은 있다. 자기 소개서를 쓰고 백번을 살펴보아도 오타 한두 개는 있기 마련이다. 완벽 할 수 없다. 그러니까 뉴스에 나오는 것이다. 구타와 얼차려가 일상이던 시대에는 그런게 뉴스거리가 될 수 없었다. 구타와 얼차려가 뉴스에 크게 보도 되는 이유는, 그만큼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일부 청소년들이 사고 칠 때마다 뉴스는 청소년들이 집단적으로 망가진 것처럼 보도하지만 절대다수의 청소년들은 학교와 학원에서 모범생으로 살아가고 있다. 마찬가지다. 극소수 미꾸라지 같은 군인이 사고 칠 때마다 뉴스는 군인들이 집단적으로 허수아비가 된 것처럼 보도하지만 절대다수의 군인들은 모범병사로 살아가고 있다.
구타와 얼차려가 사라진 시대에, ‘군대를 다녀와야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군대 가서 자신과 너무나도 다른 사람들을 수도 없이 겪으니 더불어 사는 이들에 대한 존중심과 배려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또 큰 문제든 작은 문제든 다른 사람이든 나 자신이든 무언가에 대해 끝없이 사색하여 성찰하는 능력을 기를수 있다. 그러니 거의 2차원적이었던 동물적 사람에서 최소한 3차원은 되는 민주적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이왕 가야만하는 군대라면, 제대로 한번 ‘사람’을 공부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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