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 -
☆ 2012년 12월25일 예수 성탄 대축일
[청주] 성탄의 의미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독서 : 이사 52, 7 - 10
† 독서 : 히브 1, 1 - 6
† 복음 : 요한 1, 1 - 18(또는 1, 1 - 5. 9 - 14)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거룩한 밤입니다. 주님께서는 가장 가난한
곳에서 가장 가난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헤아리시는 주님께서 오셨기에 이 밤이 더욱 거룩한 것입니다.
주님의 평화를 청하면서 우리 가운데 오신 주님을 맞이합시다.
★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어둠 속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빛을 비추어 주실 것이라고 예언한다.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왕권이 그의 어깨에 놓이며, 그 왕권에서 비롯된 평화는 끝이 없을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 바오로 사도는 티토에게 보낸 서간에서 하느님의 구원의 은총이
나타났다고 선포한다. 주님께서 오심으로써 우리가 복된 희망을
품고 살며 그 은총의 힘으로 우리가 의롭고 경건하게 살게 된다는
것이다(제2독서).
★ 황제의 칙령에 따라 호적 등록을 하러 베들레헴으로 간 요셉과
마리아는 거기서 해산 날이 되어 아기를 낳는다. 그 밤에, 목자들에게
주님의 천사가 다가오고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 구원자가 태어나셨다는
기쁜 소식을 전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성탄 대축일 밤 미사의 강론 시간 때에 마르타 할머니에게 출산
얘기를 해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는데, 그날 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마르타 할머니는 가난한 시골로 시집와 농가의 셋방을
얻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우연히도 주인집 아주머니와 같은
달에 아이를 가졌습니다. 같은 달에 같은 집에서 아이들을 낳으면 한
아이가 죽는다는 속설을 믿던 주인은 그녀에게 집에서 나가 아이를
낳을 것을 요구했습니다.
12월 엄동설한에 마르타 씨는 자신의 신세가 부끄럽고, 딱히 갈 곳도
없어서 허름한 외양간을 찾아갔습니다. 이내 통증이 오더니 급기야
그녀는 혼자서 아이를 낳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동안 정신을
잃었던 그녀는 등에 온기가 있음을 느꼈습니다. 뒤를 돌아다보니
소가 등을 기대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한겨울에 아이를 낳으려고
외양간을 찾은 손님을 소가 안쓰럽게 여겼나 봅니다. 그녀가 정신을
차려 보니 아이의 몸은 한겨울 추위에 싸늘하게 식어 있었습니다.
가난한 부모 때문에 아이를 죽였다는 서러움이 북받쳤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아이를 안고 집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죽은 것처럼 보였던 아이가 차츰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자라서 지금은 유치원 원장으로 아이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요즈음 많은 이는 예수님께서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을 동화
속의 이야기처럼 생각합니다. 성전에 꾸며 놓은 구유와 마구간은
상상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풍요로운 시대에
살면서 가난이 몸에 배어 있지 않은 탓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도 마구간에서 태어난 아이가 있다면 저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마르타
할머니를 통하여 이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매일 미사 -
◈ [수도회] 내 안에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2012년 다해 12월25일 예수 성탄 대축일
내 안에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성탄하면 빼놓을 수 없는 성인(聖人)이 한 분 계십니다. 예수님
성탄을 한 평생 자신의 화두로 삼았던 예로니모(AD 340-420)
성인이십니다. 성인께서 예수님의 성탄과 관련해서 신앙의 후배들인
우리들에게 남긴 말씀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아무리 성탄이 수
백 번 계속된다 해도 여러분 각자 마음 안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정말 지당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독일 태생의 도미니코 수도회 회원으로서 신비가이자 대 영성가였던
마이스터 에카르트의 권고를 올 성탄 기도주제이자 묵상거리로
삼아보시면 좋을 듯합니다. “마리아에게서처럼 우리 각자 안에서도
아기 예수의 잉태와 탄생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예수를 낳지 못한다면 마리아가 그때 거기에서
예수를 낳았다는 사실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늘 새롭게
태어나셔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영혼 속에서 ‘하느님의 탄생’을 이루어 낼 때, 비로소 한
인간은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내 안에
잉태하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 옛날 나자렛의 마리아가
그랬듯이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다양한 목소리를 통해 다가오는
천사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무엇보다도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마리아가 그랬듯이 안락한 삶을
포기해야 합니다. 본능과 이기심, 자기중심적 삶을 철저하게도
배제시켜야 합니다. 안개 자욱한 낯선 길을 떠나야만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과 멸시를 꿋꿋이 견뎌내야 합니다.
홀로 성탄 구유 앞에서
언젠가 성대한 성탄 전야 미사가 끝나고 행사에 오신 분들이 모두
썰물처럼 성탄 축하행사 자리로 빠져나간 뒤였습니다. 저 역시
서둘러 행사 자리로 발길을 돌리려는 순간, 제 시선이 성당 제대
앞에 마련된 구유에 머물렀습니다. 작고 소박하지만 정성껏 장식된
성탄 구유, 그 안에 모셔진 아기 예수님, 마리아와 요셉, 목동들,
동방박사들, 가축들...저는 갓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홀로
남겨두는 것에 대한 송구스러움에 발길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아무도 없는 캄캄한 성전 성탄 구유 앞에 홀로 앉았습니다.
2천 년 전으로 돌아가 봤습니다. 침묵 가운데 편안한 자세로 앉아
한 인물 인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주 좋은 묵상 기도가 되더군요.
아기 예수님
아둔한 인간의 머리로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아기 예수님의
성탄입니다. 이왕이면 구중궁궐 깊숙한 방, 가장 따뜻하고 안락한
방에서, 내놓으라는 명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안전하게 탄생하지
않으시고 어째서 찬바람 숭숭 들어오는 마구간입니까? 만왕의 왕
구세주 하느님께서 동물들 사이에 태어나시다니요? 결국 아기
예수님의 탄생, 하느님의 육화강생은 억울한 일, 이해하지 못할
일, 정말 감당하기 힘든 일로 힘겨워하는 우리들을 위한
탄생이겠지요? 가장 밑바닥 탄생을 통해 적당히 밑바닥인 우리를
위로하시기 위한 마구간 탄생이겠지요? 가장 밑바닥에서 시작하심을
통해 이류, 삼류여서 억울해하는 우리에게 자신감과 힘을 주시는
아기 예수님의 성탄이겠지요?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던지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세상에 내려오신 하느님, 측량할 수 없는 무한한
당신 사랑 앞에 그저 우리의 기도는 감사와 찬미뿐입니다.
성모님
구세주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을
직접 내 팔에 안았습니다. 직접 젖을 먹이고 내 손으로 키웠습니다.
그분께서 내 도움에 힘입어 무럭무럭 성장해나갔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행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언제나 묵묵히 아기 예수님을 위해
엄마로서의 최선을 다했습니다. 아기 예수님 곁에 언제나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필요한 것이 있을 때 언제든지 기쁘게
응했습니다. 잠시도 떨어져있지 않고 예수님 주변만을 맴돌았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사랑했습니다. 예수님만을 연구하고
관상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나를 바라 보거라. 그저
예라고 대답하고, 그저 묵묵히 견뎌내며, 늘 예수님 주변을 떠나지
않고, 그분 얼굴을 바라보며, 그분 얼굴을 관상하며, 그렇게
살아온 내 얼굴을 바라 보거라.”
요셉
예수님의 잉태로 인해 그간 꿈꾸었던 소박하나마 단란한 결혼생활은
완전히 물 건너갔습니다. 성령께서 뭔가 메시지를 전해주었지만 전혀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내 앞에 펼쳐진 현실은 무엇 하나 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마치 짙은 안개 속을 걷는 듯 했습니다.
갑작스럽게 황당하고 기이한 사건의 중심에 서게 되니 참으로
난감했습니다. 누구에게 이야기하기도 그랬습니다. 어디다 하소연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저 침묵 가운데 묵묵히 하느님을 뜻을 찾아나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이었지만 성령의
이끄심에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니
맞아들였습니다. 이집트로 피신하라니 피신하였습니다. 나자렛으로
돌아오라니 돌아왔습니다. 그저 묵묵히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그대로
실천에 옮겼습니다. 내가 말하기보다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도록
내 귀를 열었습니다.
동방박사
준비해온 예물을 다 바쳤고, 또 그토록 뵙고 싶어 했던 아기 예수님을
드디어 발견하고 경배했습니다. 정말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구세주
하느님을 우리들의 눈으로 직접 뵙는 기쁨에 황홀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이루었기에 더 이상 여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없이 구유
앞에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이제 구세주를 뵌 기쁨을 가슴에
담고 또 다시 일상생활로 되돌아가야 하겠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에게 또 다른 떠남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목동들
시골 목동들도 구세주의 탄생을 크게 기뻐합니다. 저희 유목민들
삶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이동’입니다. 더 나은 초원을 향해,
더 적합한 기후를 찾아 부단히 이동합니다. 끊임없는 이동이
습관화된 저희들은 한 가지 진리를 터득했습니다. 보다 간단히,
보다 신속히 이동하기 위해 방법은 오직 한 가지, 꼭 필요한 것
외에 짐을 최소화하는 것입니다. 때로 아쉽지만 불필요한 것,
거추장스러운 것, 부차적인 것들은 과감히 버립니다. 이런
저희들이었기에 구세주 하느님의 육화강생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큰 선물이 다가왔습니다.
성탄은 하느님께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향해 공개적으로
당신을 드러내신 인류 역사상 가장 은혜로운 대사건입니다.
참으로 고마우신 하느님의 배려로 인해 인류 모두는 단 한명도
빠지지 않고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되었습니다. 이토록 헤아릴
길 없는 큰 은총 앞에 우리가 취해야할 태도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기뻐하면서, 감사하면서, 행복해하면서, 아기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일입니다. 침묵 가운데 우리 가운데 오신 하느님의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보는 일입니다. 그분을 우리 내면에 다시금
탄생하시게 우리 영혼의 문을 활짝 여는 일입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청주] 성탄의 의미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2년 다해 12월25일 성탄 낮 미사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 요한 1,1-18<또는 1,1-5.9-14>
성탄의 의미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많이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하시기에 당신의 아들을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 주셨습니다.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예수아기는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구세주이십니다. 구세주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화가 여러분과
가정에, 온 누리에 함께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성탄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인간역사 속으로 들어오신
뜻 깊은 날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께서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내 앞에 오신 날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하필이면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사람이 사는 집에는 방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구간을 통해서 모든 가난한 사람의 힘이 되고 위로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성장하면서도 목수인 아버지 요셉과 함께 일하심으로써
사람들의 노고와 땀, 보람을 몸소 체험하심으로써 위로와 격려를
주십니다. 그리고 끝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 이들에 의해 십자가에
처형되었습니다. 총독은 그분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다고 말하면서도
사형선고를 내리고 손을 씻었습니다. 그분은 세상의 죄악을 짊어지고
죽으셨으나 부활을 통해 죽음을 이기셨고 사랑의 승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이렇게 부활하시어 영원히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 사람들에게 오신 날이 바로 오늘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탄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사람이
되고 예수님과 함께 죽지 않는 삶을 사는 새사람으로 이
성탄축일에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내
마음 안에서 거듭 거듭 태어나시도록 마음의 방을 내 드려야
하겠습니다. 성탄은 단순히 과거 사건이 아니라 오늘도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날 소명을 확인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날, 마더데레사 수녀님이 길을 지나시다가 한 어린이의 고름을
만지며 치료하고 있을 때 함께 살고 있던 분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수녀님, 수녀님은 잘사는 사람이나 편안하게 살아가는 사람,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볼 때 질투나 시기심이 생기지 않나요?
수녀님은 정말 이런 삶에 만족하십니까? 그랬더니 수녀님께서
“허리를 굽히고 섬기는 사람에게는 위를 쳐다볼 수 있는 시간이
없습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녀님은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마르9,35)는 주님의 삶을 이미 살고 계셨습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마태20,28) 하신 말씀이
가슴 안에 담겨있었습니다.
진정으로 자신을 낮추지 않고는 주님을 만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당시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끝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메시아가
탄생하면 당연히 자신들을 찾아와서 메시아임을 증명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잘난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잘 믿고,
교리도 많이 알고 그래서 주님이 다시 오실 때는 자신 만만하게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겐 아는 게 병입니다.
헤로데 왕은 권력의 욕심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처음부터 자기가
아닌 다른 왕이 태어난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입으로는 나중에 동방박사들에게 경배하겠다고 했을 뿐 마음으로는
이미 아기를 죽여 없애버렸습니다. 이는 누구든지 나보다 더 낫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유형입니다. 학식이나 인물, 돈을 잘 번다든지
인기가 높다든지 칭찬을 더 받든 나 보다 더 나은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유형이 있습니다. 시기와 질투, 정말 이것도 큰 병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고유한 달란트를 가지고 그것을 활용하기도 힘든
데 말 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는 분은 데레사 수녀님처럼 허리를
굽히는 사람입니다. 허리를 굽혀야 하고 말구유로 내려오신
밥통 안에서 ‘나는 네 밥이야’ 하고 자신을 아낌없이 내놓는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하는 사람만이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리2,5).
주님께서는 높은 데가 아니고 낮은 데에 계십니다. 우리가 이런
분을 생각하면 거기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아니 거기에
이미 와 계십니다. 혹 우리가 이미 와 계신 분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내 마음의 문이 아직 그분에게 향하고 있지 못한 까닭입니다.
우리 마음을 주님께로 돌려야 하겠습니다. 자기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에로 돌리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분과 함께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눈으로 보고 그분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15,12). 그것이 매일의 성탄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사랑에 굶주려 그대를 바라보십니다.
친절에 목말라 그분은 그대에게 구걸하십니다.
충절에 헐벗어 그분은 그대에게 희망을 겁니다.
그대 안에 머물 집이 없어 그분은 간청하십니다.
그대는 그 한 사람이 되어줄 수 있겠습니까? - 마더 데레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이 되어서 세상을 밝게 비추고
기쁨과 평화를 나누어 주시길 희망합니다. 우리의 이웃이 여러분을
만난 것이 참 기쁨이 되고 큰 복이 라는 것을 알게 되도록 그에 걸
맞는 삶을 봉헌하시길 바랍니다. 내 삶의 자리에 예수님을 낳아드리는
매일의 성탄을 이루시길 기도드리며 다시 한 번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2012년 다해 12월25일 성탄 대축일
<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
복음 : 요한 1,1-18
<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
1982년 호주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원인도 알 수 없이
양 팔과 다리가 없이 태어났습니다. 그는 세계 곳곳을 누비며 특히
젊은이들에게 감동과 희망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가 강연하는
것은 매우 감동적인데 특히 일부러 앞으로 넘어져서 머리와 아주
작은 다리를 이용해 일어나는 모습을 보여줄 때는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온 몸이 성하면서도 지금까지 넘어져
일어서지 못했던 절망의 시절을 반성하며 다시 일어서려는 희망을
갖게 됩니다. 그는 또 최근에 아리따운 여인과 결혼까지 하게
되어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삶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힘든 시기도 있었습니다.
“나는 왜 팔다리가 없이 태어났을까?”
학교에 입학해 친구들로부터 신체적인 차이로 따돌림을 당해야 했고,
8살 때는 자살시도도 합니다. 그러나 15세 때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며
그의 인생은 변하게 됩니다.
그는 끊임없이 ‘신이 있다면 나를 왜 이렇게 태어나게 했을까?’
라고 불만을 가졌습니다. 그러던 중 요한복음 9장의 태생소경의
이야기를 듣고 크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길을 지나면서 눈이 없이 태어난 소경 거지를
봅니다. 당시에 병과 불구는 죄의 탓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이상야릇한 대답을 하십니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하느님의 일이 그 사람을 통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이유가 하느님의 뜻을 위해서라는 말씀입니다. 다
이유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는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발라줍니다.
그리고는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합니다. 그가 실로암에 가서
씻으니 눈이 다시 생겨났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게
가서 없던 눈을 다시 만들어 줄 수 있는 분은 분명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증언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병이 고쳐지는
것으로는 그들에게 믿음을 줄 수가 없어서, 하느님이 태초에
진흙으로 인간을 만드셨듯이 없던 것을 다시 만들어 줄 수 있는
분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분이 아닐 수 없음을 입증하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수없이 읽었겠지만, 닉 부이치치에게는 15세 때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자신이 그렇게 태어나게 하신 이유는 자신을 통해 절망하고 쓰러져
일어날 힘이 없는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주게 하심이었다고 믿게
됩니다. 말씀을 진정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는 희망
전도사로서 항상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말씀이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말씀은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가 구체적으로 변화하게 만듭니다. 말씀은 끊임없이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육화하기 위해 온 세상을 돌아다닙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이는 마치 요셉과
잉태한 마리아를 어떤 집에서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것과
같습니다.
다만 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집, 마구간만이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는 불쌍한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그랬더니 그 안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시고, 그 보잘 것 없는 마구간은 세상의 어떤 왕궁보다도
귀한 집이 됩니다. 목자들은 물론 먼 곳에서부터 그 마구간을
찾아옵니다. 삼왕은 헤로데의 궁전에 머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사람이 된 그 마구간에 비하면 돌덩이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 마구간이 바로 성모님이셨습니다. 누구나 다 자기 집의 주인이
자기라고 말하며 또 다른 주인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때 성모님만이
자신의 집은 하느님 것이라 하며 당신을 ‘종’이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말씀이 육화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화되면 그 집은 이전의
집과 같지 않습니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부모님으로부터 어마어마한 재산을 물려받았던
안토니오란 청년이 있었습니다. 많은 재산이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허전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미사 때 돈 많은 부자청년 이야기를
듣습니다. 부자청년이 와서 그리스도께 완전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당신을 따르면 완전해 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듣던 수많은 부자들이 있었지만 오직 안토니오만이 그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은 사막으로 갑니다. 그 곳에서 그리스도교 최초의
수도생활이 시작된 것입니다.
말씀은 언제나 온 세상에 뿌려집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는 적습니다. 말씀은 그 받아들이는 사람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는데, 이것이 말씀이 사람이 되시는 것입니다.
말씀이 성모님 안에서만 온전히 사람이 되실 수 있었던 이유는
성모님만이 그 말씀을 참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아기를
가지면 감기약도 먹지 못합니다. 아기에게 나쁜 영향이 간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안다고 하지만 남들이 하는 말을
믿는 것입니다. 믿으면 그래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수많은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온전히 믿는 이에게서만 육화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 제 안에 육화되었던 가장 큰 말씀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나에게 붙어있는 가지는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였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위해 이것저것 좋은 일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그저
마리아와 마르타의 경우에서처럼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것만이
유일하게 필요한 것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때부터 저는 시험기간에도 성체조배를 할 정도로 ‘기도만
하면 다 된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잘 되었습니다. 성적도 잘 나왔고, 유학 가서도 기도하면
기적과 같은 일들이 발생했습니다.
사제가 되어서도 저는 성체조배만 꾸준히 하면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매우
적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받아들였던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기적과 같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남편이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아 도망쳤는데 일주일도 안 되어
돌아왔고, 또 다른 자매님은 그와 비슷한 남편을 용서해서 오랜만에
들어오면 따듯한 밥도 지어서 먹여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받아들인 이들은 극히 적었습니다. 말씀은 믿는
이들에게만 육화됩니다.
저는 이번 성탄 때 이것을 콘셉트로 구유도 꾸미고 성당 트리
장식도 하였습니다. 성서 위에 아기 예수님을 모시는 구유를
만들었습니다. 특히 성당 밖에는 별 하나에서 수많은 빛이 세상에
퍼지는 것을 형상화 했습니다. 하느님이 세상에 말씀을 뿌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직
성모님만이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빛줄기 세 개를
성모님 위로 비추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성모님 앞에 구유를
안치했습니다. 바로 그 마구간이 성모님을 뜻하고 그 안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이 말씀을 받아들인 성모님의 마음 안에 육화되신 말씀을
형상화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벳은 성모님을 보고 복되다고 하십니다. 행복한 이유는 바로
‘믿으셨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이번 성탄 다만 성경 한
구절이라도 내 안에서 육화되게 합시다. 그렇지 않으면 베들레헴
집들처럼 또 한 해가 참 주인이 없는 슬픔 속에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마구간이 됩시다. 성모님의 가난한 마음을 닮읍시다.
행복이 우리 안에 육화되지 않으면, 세상에서는 그 어떤 것으로도
그 빈 곳을 채울 수 없습니다.
오산 성당 홈페이지: http://cafe.daum.net/ca-osan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인천] 2,012년째의 생신을 맞이하시는 예수님.
메리 크리스마스!! 아기 예수님의 거룩한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서울을 기준으로 10년 만에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게
되었다고 하지요? 아마 어제 성탄 성야 미사를 마치시고 정말로
기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예년과
달리 올 12월에는 강의가 별로 없어서 아주 조용하고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탄에는 저를 불러 주는
곳이 아예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왕따인가요?). 그래서 어제
하루 종일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성탄을 의미 있게 보낼까를
궁리했지요.
예수님의 탄생을 묵상하다보니 예수님께서는 소리 없이 이 땅에
오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가 오셨다고
세상에 시끄럽게 알린 것이 아니라, 적막하다고 할 수 있은 아주
조용한 마구간에서 몇 명의 사람들만이 초대된 가운데 태어나신
것이지요. 저 역시 이러한 예수님의 오심을 체험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저와 함께 조용하게 미사를 봉헌하면 어떻겠냐고 부모님께
연락을 드렸지요.
부모님과 큰형님 그리고 저. 이렇게 4명이 함께 봉헌하는 아주
작은 미사 그리고 아주 조용한 성탄 자정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이 세상에 조용히 오신 예수님을 가슴 깊숙이 느낄 수 있는 성탄
자정 미사였지요. 그러면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 자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성탄 그 자체에만 의미를 두지요. 아니
예수님의 탄생보다도 12월 25일에만 의미를 두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미사를 봉헌하는 사람들보다는 파티를 벌이면서
노는 데에만 집중하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이 날은 신나게
놀아야 하고, 이 날은 많은 선물을 받아야 하며, 이 날은 자기만의
기쁨을 위한 날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받아들였던 사람만이 예수님을 직접 뵐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명령을 받아들였던 성모님과 요셉성인. 또한 목동들과
동방박사. 그들 모두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무엇인가를 얻고자 찾아온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가장 큰 기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성탄절이라는 날 그 자체에만 의미를 두는 어리석음은 이제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보다는 이 성탄절을 맞이해서 예수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묵상하고 반성하는 소중한 시간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2,012년째의 생신을 맞이하시는 예수님. 또다시 맞이하는
연례행사로만 그치는 성탄절이 아닌, 예수님을 진심으로 내
가슴 깊숙이 모실 수 있는 특별한 성탄절을 만들면 어떨까요?
다시 한 번,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하나하나의 파도처럼 삶의 모든 순간은 특별하다. 삶은 매 순간
우리에게 선물을 보내온다. 그것을 발견하고 즐기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토머스 크럼).
부모님과 큰형님 그리고 제가 함께 봉헌한 작고 조용한 미사.
어울림의 축복
옛날에 한 공작새 부부가 예쁜 외동딸 공작새를 곱게 키워 숲으로
시집보냈습니다. 그런데 시집 간 딸이 얼마 되지 않아 잔뜩 풀이
죽은 채 친정으로 날아왔습니다. 엄마가 사연을 묻자 딸이
하소연했습니다.
“엄마! 숲의 새들이 다 저를 따돌려요. 외로워 견딜 수가 없어요.
남편도 이해 못해요.”
노련한 엄마는 무엇인가 짐작하고 물었습니다.
“너, 숲에서 아무 때나 꽁지를 활짝 펴서 다른 새들 앞에서
뽐냈지? 내 말 맞지?”
딸은 엄마가 자기의 행동을 알고 있자 깜짝 놀라 말했습니다.
“엄마! 우리 꼬리는 하느님의 선물인데 조금 펼치면 어때요?”
엄마가 말했습니다.
“얘야! 하느님이 주신 것은 남을 부끄럽게 하라고 주신 것이
아냐! 골프에는 ‘젠틀맨 골프 상식’이 있는데 그것은 주위에
골프 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절대 골프 얘기를 안 꺼내는
거야! 그 의미를 알겠니?”
딸은 고개를 끄덕이며 숲으로 날아가서 그때부터 다른 새들과
잘 어울려 지냈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아주 조용히 그리고
가장 낮은 자리로 오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와 함께 잘 어울리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아드님보다도 훨씬
부족하면서도 왜 이렇게 어울리기 위해 자기 자신을 낮추지
않는 우리는 어떻게 된 것일까요?
나를 낮추어 사람들과 어울리는 모습. 곧 예수님을 따르는
길임을 깨닫습니다.
- 인천 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성탄의 의미
예수성탄 대축일인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서의 장엄한 서론을
묵상하도록 초대받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
이 인간을 찾아 육신을 취하시어 오신 이유를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셨다.”라고
말합니다.
왜 이런 일을 하셨을까요? 사랑 때문입니다. 사람들 사이에도 사랑이
있을 때 생명이 태어납니다. 결혼한 부부 사이에 태어나는 아기,
새로운 생명이 사랑의 결실이듯이, 일상 안에서 우리가 사랑받는다고
느낄 때, 우리 안에 ‘생기’, 곧 ‘살맛 나는 힘’이 솟아나는 것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하느님이 ‘사람의 아들’이 되시고,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교환이 오직 ‘사랑’이라는 이름만으로
이루어졌다는 것,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기뻐하는 이 날의
본뜻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이들이고, 그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사도 요한이 “그분의 영광을 보았던”(1,14)
믿는 이라면, 이 신앙의 선물을 전해 받은 우리는 ‘보지 않고도
믿는 이들’입니다. 무엇을 믿기에 오늘이 우리에게 큰 축제의
날일까요?
우리가 주일과 대축일 미사 때 소리 내 고백하는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에는 ‘믿는다’라는 말이 열 번 나옵니다. 유대인들이 십계명을
받고 자신들을 선택된 백성의 표지로 여긴 것처럼, 신경에 나오는 열
개의 ‘믿는다’라는 말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말씀의 전례를 하고 성찬례를 시작하기 전에 바치는
응답입니다. 하느님이 내게 사랑으로 오시니, 나도 감사와 믿음으로
사랑이신 말씀을 받아 안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자라나야 하므로 아직 아기인
것이지요. 모든 주일이 하나의 작은 부활절이라고 한다면, 신경을
고백하는 모든 순간은 이 ‘강생하신 구세주 아기 예수’를 우리
각자의 품안에서 ‘믿음 고백’을 통해 태어나시게 하는 작은 성탄의
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의 해를 보내면서 그동안 익숙하게 바쳐온 이 신경에서 내가
‘믿는다’고 말해온 것들이 무엇인지 돌아보며, 그 ‘믿음’을
통해 성탄, 곧 주님이 내게 오심을 진심으로 기뻐하고 감사드리는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한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외아들… 성자께서는 저희
인간을 위하여 저희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셨음을 믿나이다.’
아멘.
- 이정훈 신부(서울대교구 청년 성서모임 지도신부) -
◈ [기타]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
2012년 다해 12월 25일 예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오늘 너희를 위하여 구원자가 태어나셨다.>
루카 2, 1-14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루카 2, 1-14)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다윗의
하느님, 이스라엘백성의 하느님, 모든 민족들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께서는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맺으신 당신의 계약을 잊지 않으시고,
모든 민족을 구원하시고자 구세주를 보내주셨습니다.
언제나 신실하신 주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을 지키시고
당신의 말씀의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이루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온 세상의 주인이신 분께서 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주님께서 구유에 오신 것은 인류에 대한 사랑의 행위임을
깨닫습니다.
어머니 태중에 가장 안락하게 있다가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것
자체가 고통인데, 주님께서는 거기에다 더하여, 구유에서
탄생하셨습니다.
기온의 차이가 많을수록 안정하기가 어렵고 또 추위도 많이
타는 법인데, 주님께서는 안락하고 따뜻한 요람에서 탄생하신
것이 아니라 구유에서 춥고 불안정한 상태로 태어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태어나면서 겪는 고통까지도 저희 인류를 위해서
희생으로 봉헌하셨습니다. 주님 주님의 희생의 삶은 그렇게
태어나면서 죽음까지 예고하셨습니다.
가장 가난하게 태어나시고 죽음 또한 가족들의 따뜻한 돌봄
속에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이들의 조롱을 받으며
고통스럽게 돌아가셔야했습니다. 그 또한 저희 인류의 모든
죄를 지시고 저희의 구원을 위하여 그렇게 하셨습니다.
아기 예수님, 감사를 드립니다.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아기 예수님, 저희도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기꺼이 불편함을
즐겨하고, 고난과 고통을 인내와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희생의 마음을 주소서.
지금의 세대는 불편이나 고통을 하나의 악처럼 생각하며
멀리하려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고 영원한 생명을
원한다면 저희도 주님을 닮게 하여주소서.
주님을 닮아서 일상 안에서 신앙인이기에 해야 하는 일들과
기도를 기쁨과 사랑의 마음으로 하게 하여주소서. 그래서
매일의 삶에서 주님을 만나고 주님 안에 머물며 찬미드리게
하여주소서. 아멘.
- 희망 신부님의 묵상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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