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9 장
완전한 때에 도살할 양으로
죽는 자만 이김으로
살아난다는 불편한 진실 (2)
(고전15:42) 42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육의 몸이 죽고 영으로 살았는데 그에게 여전히 육의 몸도 있다. 그런데 그 몸 안에 신령한 몸이 있다.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된 것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이 있는 자요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 아담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났느니라."
부활: 육의 몸 = [‘쏘마 프쉬키코스, σώμα ψυχικὸς’]. / [‘프쉬케, Ψυχή’] = 목숨이 달린 기식하는 생명. 노아의 홍수 때 [프쉬케, Ψυχή, 기식하는 것]은 다 죽었다. / 신령한 몸 = [‘프뉴마티코스, πνευματικός, 영적인 존재] / 영 = 말, 그 말이 무엇인지 깨달은 존재 = ‘프뉴마티코스, ’ / ‘프쉬키코스’로 죽고 ‘프뉴마티코스’로 사는 것 => [부활, ‘아나스시타스, άνάστασις’]
부활 => 일차적으로 예수라는 율법의 죽음과 그리스도라는 영의 살아남, 그 진리로 살아나는 것을 뜻한다. / 그 안에서 함께 죽은 우리의 육과 그 육 안으로 들어와 우리의 생명이 된 그 진리의 말씀은 생명이라고 한다. -> 45절: 첫 사람 아담 = [‘프토코스 안트로포스, πτωχός άνθρωπος]’ = 창세기의 그 아담 / 그 아담 안에 우리도 들어가 있다. [아담 = ‘붉다, 죄인, 사람’ = ‘프쉬케 자오, Ψυχή ζαω’] / 프쉬케 = 목숨만 붙어 있는 상태의 산 자 = 히브리어로 [‘하이, חי’]. -> 진리로 살리거나 또는 죄인으로 멸망시키려고 그냥 살려둔 상태 = [‘프쉬케’ 또는 ‘네페쉬 하이, נֶפֶשׁ חי’] / 첫 사람 아담 = 프쉬케의 상태인 육. / [마지막 아담, 에스카토스 아담, εσχατος אָדָם]은 살려주는 [영, ‘프뉴마 포이에오, πνεύμα ποιέω’]이다.
- 영은 곧 말씀, 진리이므로 진리의 말씀이 내 안에 있으면 나는 살려 주는 영이 된다. 내 입에서 그 열매가 맺힐 것이고, 내가 바로 그 양식이 될 것이다. /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의 이야기는 창세 때의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인 동시에,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내 안에 첫 사람 아담이 육으로 존재하고 마지막 아담이 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 영으로 이 육은 함몰되어 가기 시작한다.
예수님이 육으로 와서 영으로 살아나셨다. 그분의 육이 진리에 의해 재해석되자 없어진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처음이고 마지막이다”라고 말씀하셨다. -> 내 안에 그분이 있는 우리도 처음과 마지막을 가지고 있다. 그게 알파요 오메가라는 말이다. / 예수님이 “알파요 오메가이고 내가 시작이요 나중이다”. 바로 내 안에서 다 일어난다. 여러분 안에서 그게 다 일어나야 한다. / 반드시 육이 있는 자에서 시작해서 그 육이 죽는 경험을 해야 신령한 자의 출현으로 이어진다. -> 반드시 선악과에서 출발해서 생명나무로 가야 하고, 율법으로 시작하여 진리로 가야 하고, 죄인으로 시작하여 의인으로 가야 한다. / 여러분도 지금 부활한 것이 맞다. ‘아나시스타스’라는 말 자체가 [이스테미, ‘위로 똑바로 서다’]인데, ‘아 그거구나’ 하고 위로 똑바로 섰으니 여러분은 부활한 것이다. 그래야 주님이 우리의 머리라는 명제가 참이 된다.
첫 사람 아담은 땅에서 났다. / 땅 = 하늘을 설명하려고 준 모든 것. / 거기에 ‘호’라는 관사가 붙어서 ‘호게’ -> 항상 성전이다. / 첫 사람 아담은 성전, 율법, 땅에 속하지만 마지막 아담은 하늘에서 난다. 주님이 니고데모에게 “너는 거듭나야지, 위로부터 나야지” 할 때 그게 [‘아노뗀’ = ‘위로 나다’] -> ‘하늘에서 낳다’. / 막연히 추측해서 정의하는 말들이 아니다. 이것은 명확하게 정의되고 해석되는 용어들이다.
주님이 승천하실 때 우리는 어디에 있었나? -> 주님 안에 있었다. => 우리도 승천한 것이다. (승천한 것이 되어야 한다.) / 어떻게 승천하는가? 승천한다고 할 때의 그 하늘은 어디인가? 우주 공간일까? 만약에 우주에 있는 어떤 공간이라면 인간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거기에 가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승천한다고 할 때의 그 하늘은 그런 곳이 아니어야 한다. 인간의 능력과 노력으로 절대 도달할 수 없는 곳이어야 한다.
[승천, ἀναβαίνω(아나바이노)' ‘아날랩씨스?’] = [‘아날람바노, ἀναλαμβάνω, 위로 넘겨지다, 위에다 두다’] -> 승천 ≠ ‘하늘로 올라가다’ / 정리하면 ‘하늘’이란 말도 없고 그냥 넘겨주다, 위로 두다, 위에다 두다의 뜻. / => 여러분이 아래의 것으로 위의 것을 알아 위의 존재가 되었으면 바로 승천한 것이다.
(고후12:2-4) 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 몸 안과 밖이 그 세 번째 하늘에 올라갔더니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 말씀에 나온 낙원이 여러분이 가고 싶어 하는 곳인데 거기에 갔더니 말할 수 없는 말, 사람의 말로는 말이 되지 않는 말이 있다. 아무리 둘러봐도 내가 원하는 것은 없다. 거기가 하늘이다. 거기에는 사람의 말로는 말이 되지 않는 그 말이 있다.
<하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설명해 주시려고
1) 첫 번째로 준 하늘 = 성전, 율법. / ‘호 우라노스’(단수) = 성전. 창세기 때도 그렇다. / ‘베레쉬트 바라 엘로힘 에트 솨마임 에트 에레츠.’ = ‘내가 땅으로 그 하늘들을 설명하기 위해, 엘로힘을 담아서 그것으로 너희에게 창조했다’ -> 여기서도 ‘하늘들’은 복수 -> 땅(성전, 율법)이 무엇인지를 알아 그것을 마음으로 갖게 되면 그것을 하늘들이라고 한다. / [하늘 = ‘솨마임, שמים’] -> 파자: 하나님이 분석하여 말씀을 주시는데 진리로 주신다. 그것이 곧 하늘이다. ‘솨마임’ = [‘쉠, שם, 이름’]+[‘마임, מָ֫יִם, 물’]. -> ‘거기에 물이 있다, 진리가 있다.’ -> 그것이 하늘이다. -> 여러분의 마음 안에 진리가 있다. 그래서 여러분을 하늘이라고 한다. 마태복음에 “그 하늘들 안에 그 아버지”라고 하는데 그것이 나를 낳는 진리의 말씀이 되면 그게 내 아버지가 되기 때문에 그게 하늘이다.
2) 두 번째로 준 하늘 = 예수님. / 하늘로 오신 분이 “말 못하는 성전을 주었더니 너희가 오해하기 때문에 이 성전이 왔다”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두 번째 하늘이다. -> 그런데 너희들이 그것도 못 깨달았다.
3) 세 번째로 준 하늘 = 그리스도의 영 (= 세 번째 성전.) / 그 영이 내 안에 들어왔다. -> 예수님은 “이 성전을 헐라” 말씀하심. => 두 번째 성전 즉 육으로 오신 예수를 헐라는 뜻. 그분도 헐려야 된다. / “내가 사흘 만에가 아니라 세 번째로 세워 줄게”라고 말씀신 것. -> 우리 안에 세워질 성전. / 바울: “너희 안에 성령이 있다. 너희들이 성전이다.”(고린도후서). -> 나는 세 번째 성전이 되었다. 이것이 세 번째 하늘이다. / 그 세 번째 하늘에 바울이 놓여졌다. -> [아날람바노, 위로 넘겨지다] / 위로 넘겨졌더니 사람의 말로는 말이 되지 않는 그 말이 귀에 들린다. 바울이 거기서 왔다 갔다 하는데 그게 승천한 것이다. -> 여러분은 말이 하늘이 된 것이므로 승천한 것이다(아날람바노). 꼴까닥 갔단 말이 아니다.
그 하늘들 안에 그 아버지(말씀)를 갖게 된 성도들이 이웃에게 그 아버지(말씀)를 전하기 위해서는 그분에게 가야 한다. 이것을 [‘파루시아, παρουσία, 재림, 강림’] 이라고 한다. / (‘파루시아’ = ‘파라’+ ‘에이미’) -> 에이미가 be 동사니까 ‘옆에 있다’, ‘나타났다’. / 멀리 있는 것 같았는데 옆에 있다· 내 안에 내 마음으로, 내 말로 있다고 할 정도로 가까이 있다. / 감추어져 있던 것이 내 옆에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걸 재림이라고 한다. / 예수님이 저 먼 하늘로 가신 것 같았는데 그리스도의 영으로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신다. 영은 말이니까 말로, 진리로 들어와 버렸다. 그걸 [‘강림, 재림, 파루시아’]라고 한다.
‘파루시아’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나중에 그분이 나타났을 때 “저게 뭐야?” 할 것이다. /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내 밖으로 강림하시는 그분을 보게 되면 그것은 심판이다. / 내 안에 그분이 나타나야 한다. 그게 ‘파루시아’이다. / 여러분이 이웃에게 가서 그 진리를 전해 주면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 안에 그 진리가 마음으로 들어간다. 그러면 내가 그에게 재림한 자가 된다. / 그리고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 승천과 재림은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크로노스 속에서, 카이로스로 경험하게 된다. / 다시 한번 강조하는데 여러분과 무관한, 주워들은 진리는 참 진리가 아니다. 그냥 소문으로 들은 것일 뿐이다. -> 그게 내 것이 되어야 진리이고 생명이며 구원이 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듣고 만다. 그걸 마음으로 갖는 이는 별로 없다.
(벧후3:3)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 사도행전에서 성령이 오시면 그때부터 말세라고 했다. / 자기 정욕을 따라 행하는 것은 ‘에피뚜미아’의 마음을 좇아 행하는 것이다. / (벧후3:4)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바로 재림(파루시아)이다. 언제 오실까? 이미 내 안에 와 계시는데 언제 오시냐고 묻고 있다. 이미 내 안에 일어난 그 파루시아를 이해하지 못하고 언젠가 올 파루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벧후3:5). -> 일부러 잊으려 함이라는 말은 깨닫지 못했다는 말이다.
->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고, 땅도 [마임, 물]에서 나와 그 물로 존재하는 것임을 알지 못한 것이다. -> 물이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그게 말씀이라는 걸 깨닫지 못한 것이다.
(벧후3:6-7) “이로 말미암아 그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 하늘과 땅은 그게 무엇인지 모르는 자들을 멸망시키려고 한다. 그 안에 진리가 들어 있는데 깨닫지 못하니까 그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 그런데 마지막 때가 되면 그 하늘과 그 땅이 도르르 말려 없어진다. 이제 진리가 된 이들, 마지막 그 사람까지 승천, 하늘이 되어 버리면 그때부턴 옛 하늘과 옛 땅이 필요 없어 도르르 말려 올라가는 것이다. 따라서 재림이라는 건 우리 곁에 와 있는 눈에 보이는 모형과 말씀 속에서 진리의 말씀을 깨달아 알 수 있으면 우리 가까이에 이미 와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 진리를 나타내는 역할을 할 수 있을 때 우리가 그 옆의 존재, 나타난 존재, 나타내는 존재, 파루지아의 존재가 된다. 그런데 여기서 앞뒤 내용 다 자르고 “내가 재림이니 뭐니”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안 된다. 그건 이단이다. 설명할 수 없으면 말을 하지 말아라. 육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재림은 우리 안에서 다 이루어지며 그것을 연합이라고 한다.
바울은 그러한 사람이 누리는 그 자유, 부활, 승천, 재림, 이러한 것들을 이미 육신 안에서 영으로 경험하고 있는 사람을 무엇이 파괴할 수 있느냐고 한다. 지옥의 불길이 그 자유를 막겠느냐? 아니면 천국의 화려함이 그를 미혹하겠느냐? 그런 사람은 어떤 곳에 갖다 놓아도 괜찮다. 그는 이미 환경이나 조건에 상관없이 영으로 누리는 자유를 가진 사람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아등바등 사는 걸 보면 백 년도 못사는 삶을 왜 저리 힘들게 살아야 하나 싶어 측은지심이 든다.
그는 언약을 성취한 사람이므로 그가 가는 곳이 천국이고 약속의 땅이다. 그 땅이 어디 따로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가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진리의 말씀이 뭔지 모르면 거기가 애굽이다.”라고 말씀하셨다. / 약속된 사람들이 선 곳이 천국이다. 그런 사람은 이 세상 사람들이 그려 놓은 그 지옥 같은 환경에 떨어져도 자유롭게 살고, 천국 같은 환경에 놓아두어도 마음을 뺏기지 않는다. / 천국과 지옥은 그런 곳이 아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그려 낼 수 있는 천국은 인간들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만들어 낼 수 있는 곳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천국이 설마 그 정도밖에 안 될까? / 그래서 크로노스의 역사 속에서 카이로스를 사는 사람을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자”라고 부르고, 세상의 말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그는 누구도 심판할 수 없다. / 그 안에서 용서가 일어났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를 심판할 수 없다. / 그는 죄가 무엇인지, 악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 안에서 좌우가 해결되었고 위아래가 해결되었고 빛과 어둠이 해결되었다. 그런데 누가 그를 정죄하고 심판하겠는가? 아무도 못 한다. 하나님도 “내가 이 어두움을 근거로 너를 심판하려고 했는데 네가 그게 빛인 걸 알아버렸네!" 하실 것이다.
저한테 “예수 안 믿으면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지옥 갑니까?" 이런 질문 하지 마세요. 착하고 악한 게 무엇입니까? 성선설 선악설이 무엇인가? 이 세상 모든 것이 ‘선’인 하나님의 진리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알면 성선설이고, 그것을 그냥 껍데기로만 알아서 잘못 사용하면 그게 [악, ‘라아, רע’]이다. 성선설이나 선악설이나 똑같은 이야기이다. / 착함과 악함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선을 추구하고 악은 어떻게 해서든지 멀리하겠다는 것인데 그게 인간의 [‘에피뚜미아 노미조, ἐπιθυμία νομίζω’]하는 두 마음이다. 이렇게 구분하는 게 잘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악이 선을 먹어 버린다. 이게 지킬 박사와 하이드이다. -> 하이드가 지킬을 죽여 버리는 것이 인간의 결국이다.
진리는 대단히 복잡한 소설 이야기가 아니다. 명확한 내용이다. 분명한 건 착하게 살아서 천국 가는 게 아니고, 악하게 살아서 지옥 가는 게 아니다. 악은 선이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는 모형일 뿐이고, 선은 악을 통해 알 수밖에 없다. 그래서 착하게 살지 않아서 지옥에 가는 게 아니라 착함과 악함이 뭔지를 모르고 여전히 구별하기 때문에 지옥에 간다. -> 바로 그 상태가 지옥이다. 그런 자들에게 환난이나 핍박이나 생명이나 천사가 무엇인가? 이미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영과 연합된 이들에게 무엇이 자기의 가치이고 무엇이 두려움의 대상인가? 성경은 이러한 연합, 통일의 진리를 설명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