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가 부슬부슬 언덕을 촉촉이 적시고 있다. 바구니를 옆에 놓고 막 뾰족뾰족 세상 구경 나온 봄 쑥을 캤다. 그 쑥으로 국을 끓여 동네 사람들과 식사를 한다. 죽음이 뭔지 알 수 없고 표현할 수 없었던 큰 아버지의 세상 떠나시던 날의 모습이다. 그때 큰 어머니는 27세의 젊디 젊은 새댁이었다. 젊은 큰 어머니에게 남매와 삶의 무게는 얼마나 힘겨우셨을까. 그 후 남매는 작은 아버지 댁에 맡겨졌다. 이미 작은집에도 4남매의 자녀들이 있었다. 모두가 풍족하지 못하던 시절에 조카 둘을 맡아 양육과 학업을 지속하기엔 당연히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형수님이 재혼하지 않은 것만도 너무나 감사하다" 말씀을 하시면서 돌보셨다. 정작 작은 집 4남매 중 딸을 외할머니와 외삼촌이 있는 안양에 떠나보내 교육과 양육을 부탁하셨다. 어쩌다 방학 때면 딸은 부모님이 계신 시골집에 간다. 그때마다 따뜻한 도시락을 들고 등교하는 모습이 부럽기도 하고 시샘도 나고 마음속으로 원망스럽기도 했다. 정작 이러한 마음도 몰라주면서 "부모 없는 조카들에게 더 잘해야 한다"며 나보다 더 아픈 마음을 삭히신 부모님이 세월이 지나고 보니 너무나 따뜻한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과수원의 복숭아, 풋자두에 단맛이 오르면 아이를 업은 아낙이 광주리에 과일을 담아 집집마다 팔러 다닌다. 우리는 잔뜩 기대를 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광주리 아주머니를 빙 둘러선다. 그때마다 통보리쌀을 몇 됫박 퍼주면서 정작 과일은 받지 않는다. 동생들은 막무가내로 펄쩍펄쩍 울고불고 난리다. 먼발치에서 광주리를 이고 가는 아주머니에게 업힌 등의 아기가 고개를 젖히고 잠이 들었다.
그 후 조카인 사촌은 신학을 하고 목회자가 되어 수원에서 큰 교회 목회자가 되었다. "작은 어머니 덕분에 오늘 이렇게 잘 자라서 목회자가 되었습니다"라고 이야기를 들을 때면 괜히 내가 보람과 감사를 느낀다. 장마가 할퀴고 간 어려운 이웃에게 식량이며 냉장고를 다 털어 베푸시고 당시 유일한 취사도구인 곤로*를 내주시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