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겁게 서로 사랑하자(벧전4:7-8)
마지막 때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③
2021.7.18 김상수목사(안흥교회)
지금까지 한국이 배출한 세계적인 최고의 가수는 누구라고 생각되는가? 논란의 여지없이 방탄소년단(BTS)이다. 지난 11일에 세계보건기구(WHO) 거브러여수스(T. A. Ghebreyesus) 사무총장이 자신의 SNS를 통해 방탄소년단의 신곡인 퍼미션 투 댄스’(Permission to Dance)의 뮤직비디오를 보고 전 세계 15억 명의 청각장애자들을 대신해서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그가 이렇게 감사한 이유는 이 노래의 안무 동작 중에 수화를 넣어서 장애우들을 배려했기 때문이다. 세계의 수많은 언론들은 BTS의 차트 성적보다도 이들의 이러한 인성과 음악적인 성과를 더 칭찬하고 있다. 세상의 일반 가수들도 약한 사람들을 이처럼 배려하고 덮어 준다면 하물며 성도들은 어떠해야겠는가?
오늘 본문 말씀인 베드로전서 4장에 보면, 사도 베드로는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할지를 말했다. 지난 주일에 나누었던 ‘정신 차리고 살자’는 말씀이 주로 자기 자신이나 하나님과의 관계에 해당한다면(7절), 오늘 나누는 8절 말씀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7-8)
이 말씀을 보면, 사랑과 용서를 서로 연관 지어 권면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쉽게 말하면 뜨겁게 서로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이 마지막 때 성도들의 마땅한 삶의 자세인데, 이러한 삶을 살기 원하는 사람은 서로의 죄를 덮어 줘야 한다는 말씀이다. 만약 덮어주기는 커녕 까발리고 정죄하는 것에 더 집중하는 것은 사랑을 간직한 성도의 모습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여기서의 죄는 실제적인 범죄 행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에게 범한 실수, 그의 실력부족, 또는 나를 짜증나게 하는 고약한 성품이나 연약한 점들이 다 포함된다. 심지어 보복할 수 있는 권리까지도 포기하는 것이 뜨겁게 사랑하면서 덮어 주는 것이다.
만약 우리들이 서로의 죄와 허물들을 덮어 주기는 커녕(용서하지 않고) 오히려 뒤에서 까발리거나 보복하고 파괴하는 것에만 더 관심을 둔다면, 그것은 마치 모두의 생명과 행복의 밧줄을 자르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성도들은 이렇게 하면 안된다. 좌측에 있는 그림을 보라. 내가 꼴을 보지 못하고, 몰래 가위질을 하는 대상이 때로는 가족이나 이웃 또는 성도들일 수도 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우리들이 다른 사람의 허다한 죄나 실수 등을 덮어주고 용서해야 할까? 그것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들을 덮어 주셨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의 대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좋아하는 것은 그 사람으로 인해 내가 행복해졌으면 하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이 나로 인해 행복해 졌으면 하는 것입니다. 좋아하면 욕심이 생기고, 사랑하면 그 욕심을 포기하게 됩니다. 꽃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 꽃을 꺾지만, 꽃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꽃에 물을 줍니다.“
주님은 우리를 단지 좋아하는 수준이 아니라, 죽도록 사랑하셨다. 그래서 당신의 보혈로 우리를 덮어 주셨다. 이렇게 우리의 죄를 덮어주신 장소가 바로 십자가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우리도 주님처럼 다른 사람이 나에게 범했던 죄와 허물과 무례하고 불쾌했던 행동을 용서해야 한다. 이처럼 뜨겁게 서로 사랑하려는 사람에게 전도의 문도 더 잘 열린다. 왜냐하면 추운 사람은 따뜻한 곳에 모여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늘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우리들이(내가) 평소 뜨겁게 사랑하지 못하는 미지근한 모습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우리들이 가장 덮어주지 못하는 죄들(최소한 죄까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참아주지 못하고, 꼴을 못 보는 것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를 깊이 생각해 보았다. 머리에서만 머무는 사랑이 바로 미지근하고 덮어주지 못하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머리의 사랑은 논리적이고 계산적이고 선명하지만 그렇게 뜨겁지 않다. 그래서 금방 한계를 드러낸다. 그러나 가슴의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얼음장같은 마음도 결국은 녹여낸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바로 가슴의 사랑이다.
오래전에 “나미”라는 가수가 부른 “빙글빙글”이라는 노래가 있었다. 이 노래 가사 중에 “어떻게 하나 우리 만남은 빙글빙글 돌고……. 아~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우리 두 사람”이라는 부분이 있다. 혹시 이 가사처럼 지금 하나님과 나 또는 나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상태에 머물러 있는지는 않는가? 만약 우리들이 사랑을 말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꼴을 못보고(미운털), 뭔가 나보다 약해 보이는(돈, 신체, 실력, 외모 등) 사람에게는 은근히 쉽게 대하고 심지어 자기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까지 무례한 말들을 쏟아내면, 그 관계는 더 이상 발전하지 않고 늘 빙글빙글도는 수준에만 머물게 될 것이다.
그러면 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뜨겁게 사랑하지 못하고, 덮어주지 않고, 용서하지 못하면서 빙글빙글 돌까? 잘 보면 이 마음의 중심에 “나(ego)”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금만 나에게 불편함을 주는 상황이 발생하면 즉시 “C"소리가 나온다. 이것을 보통 혈기라고 말하지만, 결국 그 혈기의 정체는 욕심과 죄악으로 둘러싸인 ”나“이다. 여기에서 온갖 교만과 열등감이 발원 한다.
그러면 정말 가슴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고, 허다한 죄를 덮어주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십자가 앞에서 내가 원래부터 부족한 사람, 죄인이라는 것부터 인정해야 한다. 이것을 자기부인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처럼 나를 부인했다면, 그 다음은 내 마음의 중심에 “나”대신 “성령 하나님”을 놓으면 된다. 이것을 다른 말로 성령충만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나와 하나님을 서로 위치이동 시키는 것이다. 이처럼 십자가 앞에 다 내려놓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비로소 다른 사람의 약함과 상처와 눈물이 눈에 보인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용서하고 덮어주는 가슴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간다.
미국 “미네소타 크리스천 크로니클” 이라는 잡지에 이런 글이 실린 적이 있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72년 미군은 트랑방 마을에 고온의 화염을 내는 네이팜탄을 투하하기 시작했다. 그때 마을 어린이들과 함께 한 소녀가 불이 붙은 옷을 벗고 맨몸으로 뛰어가는 장면이 AP통신 사진기자 닉 우트의 카메라에 찍혔다. 그 사진기자는 후에 그 사진 때문에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사진에 찍힌 아이의 이름은 “킴 푹”인데, 당시 전신의 30%에 3도 화상을 입었다. 킴 푹은 그 후 사진기자의 도움으로 쿠바를 거쳐 캐나다에 정착하게 되었고 무려 17차례의 수술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예수님을 믿고, 신실한 성도가 되었다.
킴 푹 여인이 1996년 워싱턴에선 월남전 기념비 제막식에 초청되어 연설을 하는 중에 이런 일이 있었다. 그녀는 연설에서 폭탄을 투하한 비행기 조종사를 만나면 용서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자리에 네이팜탄을 투하했던 존 머플러라는 조종사도 와있었다. 그는 그녀의 말을 듣고 일어나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제가 그 조종사입니다. 저의 오판으로 고통을 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
일로 인해 저도 그동안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살아왔습니다. 용서해 주시오. 용서해 주시오"
그 말을 들은 킴 푹 여인은 감격하면서 진심으로 용서를 받아들였다. 그 장면을 본 사람들은 감격하면서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어떻게 그들이 서로 용서하고 용서를 받아줄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신문은 그녀가 월남전 이후에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비행기 조종사 역시 오래전부터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들의 모습이 이 마지막 때 뜨겁게 사랑하고 용서하는 삶을 살아가야할 주님이 기뻐하시는 성도들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 여러분들이여, 진정한 사랑과 용서는 둘이 아니고 하나이다. 가슴으로 사랑하지 않고, 용서가 없는 관계는 늘 빙글빙글 돌 뿐이다. 때로는 나를 그토록 힘들게 했던 사람, 용서는커녕 덮어 주고 싶지 않는 원수라 할지라도 생각해 보면, 과거에 힘든 불행도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누리는 행복이 더 가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이 마지막 때 십자가의 사랑을 품고 더 뜨겁게 더 많이 더 깊이 사랑하자. 서로의 죄와 실수들을 덮어주자. 그래서 작은 별이든 큰 별이든 상관없이 중요한 것은 빛나는 별이 되는 것이다. 마지막 때 우리 모두가 이와 같은 성도들이 되자.
첫댓글 아멘 할렐루야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