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명: 동화의 정체- 잭 자이프스
저: 잭 자이프스 역.김정아
잭 자이프스는 오늘날 동화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저자이자 학자이자 교수이자 번역자이자 편집자이자 액티비스트다.
출:문학동네
독:2013년 12월 23,24,25일
•1980년대는 동화문학은 주변화된 장르였고 동화 문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민속학자 뿐이었다.민속학자는 두 파로 나뉘어 한 파는 동화를 찬양, 한 파는 진정한 민담을 더럽힌다고 비난하는 파였다.
•20년 전에 한 독일 학자가 동화는 20세기의 유토피아적 에너지를 잃어버릴 것이라고 예견했다. 전 세기의 참상을 생각하면 진지한 글쓰기롤 볼 수 있는 것ㄹ은 디스토피아적 글쓰기밖에는 없으리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문명화를 믿고 예의범절의 미덕을 믿으면 동화의 역할은 오락이 아니라 휴머니티와의 접점을 상실한 문명화 과정의 전복적 대안으로 작용할 것이다. 전 세계에서 아이들은 문명화를 거쳐 세계 시민이 된다. 어느 문화에서든지 가장 좋은 것을 지켜가기 위해서는 민속 역사를 알아야하고 설화와 문학이 오늘날까지 발전하고 활용되어온 과정을 알아야 한다.
•아동 동화 문학의 역사적 기원
동화 장르는 구전 설화의 전통에서 비롯되었으며, 어른들에 의해 전개 발전했다. 아이들을 당대의 사회 규범에 적합한 존재로 문명화하기 위해 동화를 가공했고 18세기에 들어 새러 필딩과 르프랭스 드 보몽 부인 등 아동 동화 작가들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작용하고 전승된 민담들 등과 상호 작용했다.
이런 상호 작용은 16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프랑스에서 제도화된 상징 담론이 생성되었고 18세기 후반에 프랑스에서 이탈리아 설화를 모델로 한 동화 문학을 창작하나는 것은 루이 14세의 궁정이나 파리의 유명 살롱에 출입할 수 있음을 뜻했다. 구전 설화가 오래 번영했던 곳은 시골 마을과 가정의 아이들 방이었다. 귀족 곅,q과 부르주아 계급은 구전 설화를 무시했하다가 맹트농 부인이나 페늘룽의 작품에서부터 인정을 하게 되었다.
설화세계 존재는 왕과 왕비, 왕자, 공주, 군인, 농부, 동무르 초현실 존재, 요정, 엘프, 난쟁이, 요괴ㅡ, 거인이며 부르주아 계급이나 성적 사회 구성원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설화에서 그려지는 주요 이눔ㄹ이나 관심사는 군주 사회와 부계 사회, 봉건 사회에 인물, 계급 투쟁과 권력 투쟁이 벌어지는 장소는 귀족 대 귀족, 농민 대 귀족 계급이다. 따라서 15세기에서 17세기 사이의 전(前) 자본주의 시대에 퍼져 있던 모든 설화의 중심 테마는 권력이 정의다였다. 권력자만이 귀족, 재산과 토지를 축적하고 여자를 차지할 수 있다. 이때 여자는 목표인 동시에 사회적 특권이다. 구전설화를 통해 민중은 자신의 소망를 말하고 마법 가능성을 투영할 창조적 방법을 마련했다(여기서는 누구나 빛나는 갑옷의 기사도 될 수 있고 아름다운 공주도 될 수 있다.) 또 굶주림과 강간, 체벌, 착취, 폭력을 은폐하지 않았다.
동화와 아동문학은 아동을 사회화함으로써 가정과 공적 영역에서 일정한 규범적 기대에 부응하게 만든다는 목적으로 씌어졌다.
•동화 한 편을 출판한다는 것은 상징적인 공적 발언이자 작가 자신과 독자인 아이들과 문명화 과정 전체를 중제하는 행위이다. 동화가 아이들을 위한 최상의 치유책이 되어주는 것도 아이고 역사적 처방은 내면화되어 있고 강력하며 폭발적이다. 우리가 동화를 신비화한다면 그것은 동화가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인정한다는 이야기다.
• 이탈리아 동화의 기원 바실레는 1575년 나폴리 근처 주류 가정에서 태어나 부쪽을 영행하다 베네치아에 정하착, 군인으로 생계를 이으며 시를 썼다. 그는 나폴리 방언으론 50편의 동화를 썼다. <이야기들의 이야기>와 <펜타메로네>는 오페라 가수였던 그의 누이 아드리아나의 노력으로 출판되었다. 나폴리에서 그는 민담을 끌어왔고 그의 액자 이야기인 <이야기들의 이야기>는 49편의 이야기 무대가 되었다. 여기서 조자는 발레펠로사는 왕의 딸로서 웃음이 없자 왕은 딸을 웃게 하려고 사람들을 초대한다. 그런데 한 노파가 중전 문 앞에서 기름를 빨아들이려다 짓궂은 궁정 시동의 장난에 휘말려 단지를 깨뜨려버린다. 이를 본 조자가 웃음을 터뜨리자 마음이 상한 노파가 “꺼져, 네가 캄포로톤도의 왕자와 결혼하지 않는다면 남편의 그림자고 찾을 수 없을 거다”고 저주한다. 조자는 타데오라는 이름의 왕자가 사악한 요정의 주문에 걸려 무덤 속에 있다는 것을 알고 구출하기 위해 무덤의 벽에 걸려있는 주전자에 눈물로 채우는 방법 밖에 없음을 안다. 조자는 요정 셋을 찾아가 호두와 밤과 개암을 선물로 받아 이틀 동안 주전자에 대고 눈물을 흘린다. 거의 가득 찼을 즈음에 울다 지쳐 잠이 드는데 이때 한 노예 소녀가 주전자를 훔쳐내 눈물을 마저 태우고 타데오를 R쌔운 후 자기가 왕자를 살렸다고 해서 타데오와 결혼하고 아이를 갖는다. 하지만 조자는 필요한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호두와 밤과 개암을 깨뜨리며 기회를 본다. 호두에는 노래하는 작은 난쟁이가 들었고 밤에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병아리 12마리가 있었고 개암에는 황금 실을 잣는 인형이 들어 있었다. 이를 본 노예 소녀는 그 물건들을 가지려고 청하자 조자는 그것을 선물로 준다. 마지막 선물인 인형이 임신 중인 노예 소녀에게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열망를 불러와 노예 소녀는 타데오를 위협한다. 여자들을 불러들여 이야기를 하게 하지 않는다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를 죽이겠다고 한다. 타데오는 평민들 중 이야기 잘하기로 유명한 여자 10명을 초대하여 하룻밤에 한 명씩 이야기를 한다. 마지감 날 조자를 초대하자 조자는 자기가 당안 이야기를 들려주자 타데오는 조자의 이야기를 듣고 임신한 노예 소녀를 산 채로 묻고 조자와 결혼한다. 바실레는 궁정 타락상에 좌절을 느껴 시골 민중에게 끌렸으리라.
• 유럽에서 동화가 하나의 장르로 되었던 1690년대에 프랑스 작가 중 상당수가 여자였고 액자를 차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이러니와 풍자와 익살을 통해 권력 남용을 조롱하고 변화의 가능성을 보려주려는 점이 이탈리아와 프랑스 동화의 공통점이다. 유럽 역사는 책 형식이ㅣ 모든 사회 계급에 점점 많은 영향력을 주었고 동화 문학이 자리 잡았다. 21세기에도 여전히 아이들과 어른들을 문형화하는 수단으로 채택되오 있고 라디오와 영화, 연극, 옾라, 인터넷을 통해 그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남녀 차이, 행실, 폭력조정 등에 관한 생각들을 논의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 최근 이기 동화영화 <슈렉>과 <슈렉 2>처럼 부와 권력을 남용하는 세력은 여전히 존재한다. 명사로 행세하고 가난한 자를 괴롭히며 예법의 기준을 지키는 척 위선을 떨면서 제멋대로 권력을 휘두른다. 시대가 바뀐 것같지만 바실레가 동화를 만들어낸 덕분에 여전히 동화의 내러티브 전략에 의존해 현실을 직시한다.
• 페로의 동화에서 여자 주인공이 신분 상승을 성취하는 것은 문명화된 여성은 아름답고 예의, 품위, 부지런하고 옷 잘 입고 자제하는 여자이야. 복종의 시험을 통과 못한 여자는 빨간 모자처럼 벌을 받는다. 페로의 이상형 여성은 자기에게 맞는 남성이 나타나 자기 미덕을 알아보고 아내로 삼아줄 때까지 수동적 태도를 가진다. 여성이 사는 방법은 오직 남성이며 사는 목적은 오직 결혼이다. 남성은 행동하고 여성은 기다린다. 여성은 자신의 본능 충동을 공손 말씨와 올바른 예질과 우아한 옷으로 덮어야 한다. 페로가 보기에 여성의 똑똑함은 위험할 수 있다. 남자들이 보기에 아름다움은 여성의 자질이고 똑똑함은 남성의 자질이다.
여자가 주인공인 동화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는 결혼인 반면에 남자가 주인공인 동화는 사회적 성공과 업적이 아내를 얻는 것보다 중요하다. 다시 말해 여성에게는 남자가 삶의 목적이지만 남자에게는 여자가 부수주적 존재일 뿐이다.
•빨간 모자에서 마녀와 늑대는 자기 이해에 필수적 존재이다. 고대 사고 방식에 따르면 광야 세계와 문명 세계를 구분하는 담장이나 울타리는 극복할 수 없는 경계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담장은 정해진 때가 되면 무너졌다. 담장을 의식하는 상태로 담장 안에 살고자 하는 사람은 살면서 적어도 한 번은 담장 밖%으로 떠나보아야 했다. 즉 사람은 늑대로서 또는 야만인으로서 숲 속을 방황해보아야 했다. 자기 안의 광야와 자신의 동물적 본성을 체험해 보아야 했다. 담장 밖으로 나가 자신의 두 번 째 얼굴에 스스로를 내던져 본 사람은 필기아를 볼 수 있다.
•좋은 부모와 나쁜 부모간의 투쟁은 유년기 중대 문제다 . 나쁜 엄마는 흔히 마녀(남근적 엄마)로 그려진다. 훌륭한 남자, 곧 아빠 형상(오디푸스)은 동화의 어린 주인공에게 영웅이 될 사람, 본보기를 상징한다. 사회, 심리적 변화가 그려지는 것은 어린 아이가트은 방식으로 진행되며 주로 마법을 통해 이루어진다. 한펴 소망 충족을 위한 투쟁 경험은 사회 규범의 수용과 납득으로 귀결된다.
•<탁자, 당나귀, 막개디>에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 가부장적 가족과 염소, 주인과 도제, 여관 주인과 아들 등의 관계로 등장한다. 염소가 벌을 받는 이유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싫어했기 때문이고 가자 아빠 역할을 하는 여관 주인이 벌 받은 이유는 사유 재산의 질서를 침해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위해 민담과 동활르 다시 쓰는 강력한 급진적 전통은 19세기 후반에 시작되어 바이마르 시대에 융성했고 나치가 이러한 실험을 중단시킬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멜린이 개작한 <한스와 그레텔>은 아이들의 적은 가난한 부모가 아니다. 문제 근원은 가난이다. 아이들은 부모를 돕기 위해 먹을 것을 구하러 숲으로 가 길을 잃는다. 숲에서 여자를 만나는데 이 여가자 숲에 사는 이유는 마녀이기 때문이 아니라 마을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여자는 아이들이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하게 훼방을 놓지만 아이들은 여자를 벌 주지 않고 다시 한 번 부모와 강한 협력과 사랑의 유대 관계를 맺는다.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오지만 어떤 운명이 닥칠지는 열린 결말이다.
• 피지배자의 자기 분열-안델센은
바로 신분 상승 모티브에 유달리 집착했고 하층민의 신분 상승 내러티브를 자신의 삶으로 고스란히 구현했던 인물이다. 안델센이 상층 계급에 보여줬던 비굴한 아첨은 작품에 드러난다. 자신의 태생과 귀족의 신분에 대해 모순 감정으로 시인의 재능을 타고났다는 자부심은 있었지만 상류 계급에 인정받고자 노력했다. 독서광이었던 안데르센은 독일 낭만주의 작가 작품을 모조리 읽었고 세익스피어와 스콧, 어빙을 비롯해 개인주의의 이상 구현하는 작가들을 섭력해서 안데르센 성장 과정에 낭만주의가 큰 영향을 끼쳤다. 안데르센은 자기가 알라딘이고 자기 삶이 동화라고 생각했다. 현실에서 동화 속 인물 흉내를 내었는데 일종의 분열증이다. 실제로 평생 동안 신경질환과 정신장애에 시달렸다. 자연의 법칙이 신의 사유라 생각하고 현실에 자연의 영혼이 투영 될 때 현실은 기적의 형태라고 믿었다. 이런 식의 미신은 태생적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안데르센의 욕망과 문명화의 영향력을 떨쳐내고 싶은 노력을 은폐했을 뿐이다.그러나 <그림자>나 <모든 것은 제자리에> <픽시와 잡화상> <정원사와 그의 주인>처럼 권력에 대한 솔직한 비판을 담은 작품도 있다.
•안데르센이 민담을 들었던 환경과 그가 민담을 들려준 환경은 달랐다. 그는 민담 내용을 조정했고 섹슈얼리티(성적인 것 전체)가 공공연히 드러나는 대목에서 섹슈얼리티의 모든 흔적들을 은폐하거나 삭제했다. 안데르센이 쓴 156편의 동화에는 나가 거의 없고 삼인칭으로 승화되어 있다. 삼인칭 화자는 자신을 동화에 나오는 사회적 약자 내지 피지배층과 동일시한 것 같지만 대체로 상위 권력의 승인을 추구하고 상위 권력과 동일시를 지향했다. 안데르센은 자수형인물, 곧 호레이쇼 앨저의 신화를 퍼뜨리는 부르주아적 태도로 기존의 하층 계급을 착취하는 궈력 구조에 대한 믿음을 강화했다.
•<돼지치기>에서 지배층을 대표하는 거만한 공주는 돼지치기로 변장한 왕자에게 창피를 당한다. 왕자는 목적을 달성한 뒤 공주에게 퇴짜를 놓는다.
“나는 당신을 경멸해요. 정직한 왕자를 원치 않았어요. 당신은 나이팅게일의 장미느 사랑할 줄 모르면서 장난감을 얻으려고 돼지치기에게 입을 맞추었죠. 안녕.”
안데르센은 국왕과 상류 계급 후언에 의존했지만 존중받지 못했다. <나이팅게일>에게서 보았던 것처럼 예술가는 황제에게 버림 닫아도 왕족들 섬기려고 돌아온다. <미운 오리 새끼>에 나오는 아기 백조는농가 마당에 살다가 열등한 하층 계급 동물들에게 쫓겨난다.
“난 저 고귀한 새들에게 날아갈 테야. 나같이 못생긴 새가 감히 접근하나도 나를 죽이려 들겟지. 하지만 다른 오리들에게 맞고 암탉의 부리에 쪼이고, 닭 키우는 처녀의 발에 채이고 겨울철에 떠돌다가 굶어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저 새들에게 죽는 편이 나아.”안데르센은 평민들의 운명에 경멸을 표한다. 상류 계급에게 모욕당하는 것이 하층 계급 사이에서 고난당하는 것보다 낫다고 말한다. 부르주아 본질주의 철학을 택했다. 피지배층이었던 백조가 우월한 종족의 일원으로 드러나는 순간 권력이 은밀한 방식으로 등장한다. 백조와 아름다운 정원은 오리와 닭장에 대립한다. 세련된 독자의 귀족 감성에 호소하는 안데르센은 계급 편견을 반영하며 고전적 인종주의 경향을 반영한다.
•<양치기 소녀와 굴뚝 청소부>
중국 관리는 수리를 거쳐서 예전의 모습을 되찾는다. 그러나 고개를 끄덜일 수 없게 되어 셤소 다리 괴물의 위혐에도 더 이상 결혼을 승낙할 수 없다.
“두 젊은 도자기 연인들은 헤어지지 않았어요. 그들은 할아버지 목에 박형;T는 못에 감사하며, 산산조각 날 때까지 서로를 사랑했답니다. 중국 관리가 원래 자리로 돌아간 후에 비로소 양치기 소녀와 굴뚝 청소부의 결함은 확실한 것이 된다. 중국 관리가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양치기 소녀가 음흉한 염소 다리의 성적 위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지만 굴뚝 청소부와 양치기 소녀는 중국 관리에게 연민을 느낀다. 다행히도 그들의 사랑은 순수한 사랑으로 남는다. 이 작품에서 인종차별적 함축은 <미운 오리 새끼>만큼 강하지 않지만 양치기 소녀와 굴뚝 청소부를 조롱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순수함은 연원히 지속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가짜 조화가 진짜 부조화 위에 니스처럼 칠해진 셈이다.
•안데르센 동화는 권련 비판은 언제나 상류 계급에 대한 존경심과 가난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 상쇄된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는 오만한 귀족 지주는 재미삼아 거위치기 소녀를 다리에 밀어 물속에 빠뜨린다. 그때 지나가던 봇짐장수가 소녀를 구낳다. 그리고는 ‘모든 것이 제 자리에’라고 외치며 지주를 저준한다. 그때부터 지주는 6년 동안 음주와 도박에 빠져 재산을 탕진한다. 예상대로 봇짐장수는 거위치기 소녀를 신부로 맞아 성경 말씀대로 산다. 가훈을 ‘모든 것은 제자리에’로 100년 동안 부흥한다. 이때 목사 아들이 이 집 딸 가정교사로 들어와쓴ㄴ데 한 기사가 가정교사를 조롱하자 가정교사는 버들피리를 불어 폭풍우를 일으킨다. 그때 바람을 타고 ‘모든 것이 제자리에’라는 소리가 들린다. 젗액과 마을 전체에서 사람이 발람에 날려가고 사회 지위가 역전된다. 마침내 버들피리가 찍어지고 예전의 자리로 돌아간다.
“걸국 모든 것은 제자리고 돌아갑니다. 영원은 길어요. 영원은 이 이야기보다 훨씬 더 길답니다.”
•<픽시와 잡화상>에서 가난한 학생이 저녁으로 빵과 치즈을 먹기보다 빵만 먹고 시집을 사는 것을 좋아한다.
<정원사와 그의 주인>에서 주인 귀족 부부는 자기 집의 과일과 꽃보다 다른 집 정원사가 가꾸느 과일과 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왕실은 이 집 정원사의 실력이 최고라한다. 주인 부부는 자기 집 정원사가 칭찬 받자 화가 난다. 정원사가 잘난 척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동화 속의 화자로 등장하는 안데르센은
“정원사는 잘난 척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명예를 얻는 것은 좋은 자극이었습니다. 그는 전국 최고 정원사 가운데 하나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해마다 채소와 과일을 개량하기 위해 노력했고 성공을 거둘 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정원사의 성곡이 인정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인은 ‘멜론은 좋지만 지난번에 키웠던 최고에 못 미쳐.”했다. 정원사가 거둔 가장 큰 성공은 정원 한족 구석에 ’덴마크를 대표하는 숲 속과 들만 모든 평범한 식물들‘을 심은 것이었다. 주인은 자기가 주인이라 원하면 언제든 정원사 라르센을 해고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 정원사 라르센은 안데르센이고 식물이 만발한 정원은 안데르센이 평생 가꾼 동화집이다., 정원 주인은 안데르센 후견인이고 유럽 국가들은 자신의 천재성을 인정하는데 덴마크에서는 자신의 진가를 인정하지 않아 <정원사와 그의 주인>에는 이런 상황이 상징으로 그려져 있다. 안데르센 동화는 허위의식을 정당화하려는 노력, 곧 자신이 동의한 사회 질서를 정당화하려는 문학적 실천이었다. 안데르센 동화의 힘은 보이이 않는 간극, 곧 타협이 강제될 때 느껴지는 뭔가 잘못된 느낌에서 비롯된다. 그도 그럴 것이 안데르센은 행복을 예속에 순응하는 상태로 그렸으며 그것은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결론, 안에들센은 비굴한 인물이었지만 천재성은 자신이 우러러보았던 모든 것을 동시에 혐오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데 있다.
•<가벼운 공주>에서 맥도널드는 보라리스와 마찬가지로 질서 정연한 세계를 거꾸로 뒤집는다. 왕과 왕비는 아이가 없어 아이가 태어날 때 왕의 누이 마켐노이트 공주를 아기의 명영식에 초대하지 않자. 직업이 마녀였던 그녀는 모욕을 당했다고 아이 몸무게를 없애는 저주를 한다. 공주는 걷고 싶을 때마다 몸이 하늘로 떠올라 둥실둥실 떠다닌다. 17세대 수영의 즐거움을 알게 되면 중력을 느끼게 되고 젊은 왕자를 만나게 된다. 왕자느 고웆가 그토록 좋아하는 수영을 계속할 수 있다면 기거이 자신을 희생하려 하고 공주는 수영을 계속하기 위해 와아자를 마레고 사용해 호수의 물이 더 이상 빠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이것도 마녀의 저두다) 왕자가 자기를 위해 죽어간다는 생각에 공주는 왕자를 구하려 하며 울음 터뜨리는 순간 저주가 풀리고 공주는 몸무게를 되찾는다. 공주는 물에 손을 대는 순간 물을 정말로 좋아하게 된다. 물에서는 자신의 움직임을 통제할 수 있고 왕자아 즐거움을 나눌 수 있다. 또한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사랑하느 사람이 죽어야 할 만큼 자신의 즐거움이 가치 있는 것이 안미을 깨닫게 됨으로써 이기주의를 극복한다. 공주는 왕자- 전통적인 동화의 여성사을 본떠 만들어진 희생적이고 상냥한 인물-와의 관계를 통해서 사회엊 공감의 능력을 기른다. 저주가 풀린 뒤 공주가 고통을 무릅쓰고 걷는 법을 배우는 장면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사회적 책임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해당한다.
•<오즈로 가는 길>에서 도로시는 사라의 자석을 가지고 있는 털보인간을 만난다. 돈이 사람을 거만하고 잘난 척하게 만들지만 자기는 다만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오즈에 도착한 털보인간은 여기서는 e4hs이아 마법 없어도 자기가 원하느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즈마는 털보인가에게 오즈 사람들은 뭔가를 가졌기 때문에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친절을 베풀고 착한 일을 하기 때문에 사랑을 받는다고 말해준다. 그래서 털보인간은 마법사와 마찬가지로 오즈에 머물기로 결심한다. 오즈에서는 자기의 존재 그 자체로 인정받고 사랑받기 때문이다.
• 막스 뤼터는 <동화에 나타난 가족과 지연>에서 핵가족 구조에서 가족관계를 특징짓는 것은 화목이 아니라 긴장과 불화, 갈등이라며 다음 같이 열거했다.
1. 아이는 부모 때문에 위험에 빠진다.
2. 이야기 도입두에 등장하는 것은 어린 아이가 아니라 가족과 싸우고 집을 떠나는 청년이다, 중심 테마는 개인 성숙이다.
3. 결혼은 대부분 동화에서 목표러 설정되지만 동화의 주제는 아니다. 결혼은 왕국과 마찬가지고 상징으로 보아야 한다. 남녀 주인공은 모두 결혼이라는 목표를 위해 노력하지만 가족 자체가 걸림돌이 될 때가 많다.
4. 동화에서 악당은 동물보다는 사람일 때가 많고 특히 주인공의 가족일 때가 많다.
•독일서 가장 유명한 아동 동화 14편을 가지고 상호 작용과 가족관계, 유대 지배와 경쟁에 대해 보자면 <발간 모자>와 ><늑대와 일곱 마리 아기 염소><잠자는 숨 속 미녀> <헨젤과 그레텔> 등이다.
•헤세는 1919년에 <아우구스투스>와 <시인> <다른 별에서 온 시앟한 소식> <다른 길> <꿈 속의 한 장면> <팔드룬> <이리스> 등 7편의 동화를 썼다. 모두 똑같은 메시지와 패턴 반복 경향이 있다. <아우구스투스>의 청년은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 희생한 것에 감하해 본적이 없고 방탕 삶에서 돌아와 기인이자 성자인 대부의 기도에 힘입어 죽은 어머니와 신비스럽게 합일을 이룬다. 그러나 청년은 결말에 가서도 여전히 참회하는 방랑자일 뿐이다.<시인>에서 주인공 포크는 약혼자와 가족을 버리고 시인의 삶을 살고자 가족 생화를 버림으로써 보다 중요한 뭔가를 깨닫는다. 헤세는 가족을 떠나는 대안을 해방적으로 보았지만 그의 동화에서는 강한 자기만이 엿보인다.헤세 동화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내면 세계로 도피하는데 사회의 억압적 관용 덕에 가능한 것이다. 사회는 사회 관습을 깨뜨리고 사회 행동을 통해 사회를 거부하는 저항자보다는 사회 문제에 끼어들지 않고 내면 침잠하는 사람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라프의 동화짐 <조국이 언젠가 겪은 일>에서 조국은 누가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가를 보기 위해 인간이 된다. 그는 모든 사회 유형과 모든 사회 계급을 찾아가보지만 냉대다호 무시, 얻어맞고 구걸해야 한다. 그에게 친절과 연민을 보여준 유일한 사람은 거지다. 거지는 조국에게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준다. 거지가 옛날에 사회에서 받아들여졌던 것은 그가 사회에서 뭔가를 생산하고 내놓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가 늙고 볃은 몸이 되자 아무도 그를 돌보지 않았다. 조국과 거지는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뒤이어 형제처럼 손을 잡고 잠이 든다. 이 동화에서는 독일이 행복을 누리는 하나의 거대한 가족이라는 환상이 무너진다.
• <홀레 부인과 선원의 아내>
하느님과 홀레 부인에 세상에 오는데 홀레부인은 우리나라를 아름다운 정원으로 가꾼 걸 보여주고 싶어하는데 선원의 아내와 마주친다. 그녀는 남편이 집을 비우는 것이 불만이다. 신은 남편과 아내를 장미 정원에서 살도록 해준다. 그러나 다시 찾아갔을 때 그녀는 아이들이 넓은 세상을 보고 위대한 업적을 이룰 기회가 없다고 불평해서 배를 타고 온 세상을 다니게 해준다. 몇 년 후 세 번재로 선원의 아내를 찾았을 때 아이들이 자기 곁을 떠났고 삶이 고달프다고 불평한다. 이제 신과 홀레 부인은 모든 것을 처음으로 되돌리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 믿는다. :그대부터 지금까지 착한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남자는 거친 바다로, 여자는 딸들과 함께 집에서 기다립니다.“
• 판타지가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 현대의 아동 동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옛날 옛적의 세계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옛날 옛적의 세계가 위를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우리는 아이 적에 옛날 옛적의 세계를 통째로 흡수했고 옛날 옛적의 세계가 갖고 있던 가치와 정신을 정대적 문화로 마음에 새겼으며 그것은 우리가 사실상 남자와 여라조 성장하기 오래 전부터였다. 우리는 아동 동화를 버리지 않은 채로 어른으로 성장한다. 우리가 씹어먹은 아동 동화는 아직 우리 위장 속에 들어있다. 아동 동화는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이다. 백설공주와 그녀를 구해준 영웅 왕자는 우리의 두 가지 거창한 픽션이다. 이 두 픽tus 사이에서 우리에겐 별다는 승산이 없었다. 어떤 시점에서 대구분이 지어진다. 그든(소녀들은)운 그fp타 백마에 올라타고 난쟁이를 찾아가서 밸설공주를 사오는 꿈을 꾸고, 우리(소녀들)는 시간증 환자의 욕망의 대상(순결한 희생인 잠자는 공주, 최고로 예쁜 살덩이, 잠자는 상품)되기를 소망한다. 우리는 자기고 모르게 때로는 알지만 어쩔 수 없이 우리가 배웠던 역할을 연기한다.
-안드레아 드워킨<여성 혐오>-
• 판타스틱의 용도는 문화와 노동 가족 생활이 점점 합리화되는 서구 사회의 현실에서 파생되는 결핍을 채우는 것이었고 아이들의 상상력을 옹호하는 것이었다.
• 마법은 우리를 기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계몽하기 위해 쓰인다. 무의식적 차원에서 최고의 동화는 주관적 동화 충동과 객관적 사회상을 결합함으로써 독자를 매료시키고, 각자의 이념과 신념에 따라 동화를 다양하게 해석한다.
• 불안한 낯섦은 결코 새롭거나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낯익은 어떤 것, 예전부터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어떤 것이 억압 과정을 거쳐 소외된 것이기 때문이다.
• 앙드레 파바는 <아이와 동화:재미의 기원>에서 아이들이 동화에 끌리는 잉유를 설명할 목적으로 피아제 이론의 유용성을 말한다. 파바는 피아제 이론에 따라 고전 동화(페로, 그림형제, 안데르센)의 내용과 형식이 6~8세의 아동 세계 인지 방식에 대응한다고 한다. 6~8세의 아동은 발달 단계에서 사유와 사물 사이에 마법적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무생물을 살아 있는 존재로 간주하며 권위를 보족적 장의와 처벌의 형태로 존중하고 원인과 결과를 병렬적 형태로 이해하며 자아와 외부 새계를 구별하지 않고 사물의 위치가 자신의 욕망에 따라 계속해서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한다. 파바 주장은 이런 방식으로 아동이 인지한 세계는 일반 동화에 의해 승인된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아동은 정령 신앙과 자기중심성의 단계를 거쳐 사회화의 단계, 곧 사회에서 수행되는 보다 의식적 상화 작용 단계에 이르는데, 10세에 도달한 아동은 동화를 거부하게 된다. 10세 전후의 아동은 현실 세계에 좀 더 적응하게 되고, 동화를 보다 확실한 적응 방해물로 본다. 청소년기가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사람들은 동화와 환상 문학으로 돌아오는데, 이때 사람들이 동화와 환상 문학으로 돌아오는 이유는 자기 안의 어린이를 되찾기 위해서일 때가 많다. 자기 안의 어린이를 되찾는 일은 자기 만족과 자아 실현을 위한 중대한 과제이다.
• 일반적으로 작가는 어린 독자가 이미 고전 동화를 알고 있다고 가정하고, 낯익은 내용을 낯설게 만든 방식으로 고전 동화를 다시 쓴다. 고전 동화의 변용은 전총 모티브를 파괴하거나 변환, 폭로, 재배치함으로써 독자를 인위적이고 고정적인 문학 수용에서 해방시키는 방향에서 이루어진다.
• 아이들은 대부분 변화를 싫어한다. 고전 동화가 변하는 것은 더욱 싫어한다. 옛날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던 아이들은 그 내용이 바뀌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들의 사회적 기대가 보수적인 사회화 과정에 의해 결정되어 있을 경우, 그들은 도화 변활르 코믹하게 생각하는 한편으로 동화가 바뀌는 것을 온당치 못하다고 생각하며 불안을 느낄 때가 많다. 그것은 동화가 그들에게 유익과 해방을 준다해도 마찬가지다
• 20세기 초에 동화 장르가 사회제도로서 어떤 기능을 수행했고 어떤 경향을 보였나늘 요약한다.
1. 19세기에 영국과 미국에서 동화는 아동용 장르 겸 아동용 사회제도로 육성되었고 고전동화에서는 엘리트주의와 기독교적 능력주의가 쉽게 발견되었다.
2. 동화 일어주느 사람은 어머니나 아버지였고 동화 읽는 공간은 아기방, 도서관, 학교, 침실이고 동화를 읽어주는 목적은 아이를 재미있게 해주거나 낙관적인 시각과 완결된 플릇(해피엔딩)으로 아이의 불안감을 달래주는 것이었다.
3. 동화가 책 형태를 띠면서 사고파는 상품이 되었고 새 주인은 동화를 구입했고 이렇게 재산 취득한 주인은 여가가 생길 때 동화를 읽으며 도피와 위안, 영감을 얻었다.
4. 삽화가 이야기를 풍요롭고 깊이있게 만드는 경우가 많았지만 대부분 텍스트에 종속된 것이었고, 동화가 하나의 장르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글은 점점 우위를 잃었다. 영하 테르놀로지의 발전에서 이미지가 텍스트의 중심을 차지하며 이미지 고유의 텍스트가 등장했다. 월트 디즈니를 비롯한 애니메이터들이 동화의 무대에 등장한 것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다.
• 앙동굴 속의 박쥐들은 그를 ‘쥐도 아닌 놈’이라고 부르며 놀린다. 이미 공주는 그에게 쥐란 하늘을 날도록 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말했다. 이제 쥐는 그 말 뜻을 알게 되고 요엊에게 자기를 원래대로 되돌려달라고 간청한다. 이제 쥐는 ‘쥐도 아닌 놈’에서 벗어나 진정한 쥐가 된다.
• 그림 형제가 19세게에 그랬던 것처럼 디즈니는 20세기에 모든 동화 영화를 가늠하는 세계적 첟도가 된다. 디즈니는 에니메이션의 혁신적, 실험적 양식을 발전시킴으로써 동화를 가족 오락의 주식(主食)을 복원시켰으며, 그의 이델로기적 전제들은 정당성을 잃었다. 최근 동화 영화 가운데 미국 영화 회사 드림워크스에서 재작한 <슈렉>과 <슈렉2>, 일본 영화제작가 항야오 미야자키가 감독한<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오늘 날 동화 영화가 유토피아의 변질에 문제를 제기하는 방편으로 상용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특히 두 편의 슈렉 영화에는 디즈니 주식회사와 이데올로기적 세계에 대한 분염한 암시가 나오며 그에 대한 비판과 문제 제기를 시도한다. 첫 번째 슈렉 영화에서는 그림 현제의 동화와 디즈니 영화에 등장하는 온갖 케릭터가 슈랙의 늪지대로 추방당해 행복하게 살아간다. 파콰드 영주의 야만적 청교도 권력을 피해 늪지대로 도망쳐온 것이다.
• 그림 형제의 동화는 독일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책이고 지금까지 전 세계 온작 대중매체에서 재활용되어왔다. 전 세계 아이들의 사회화 과정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상당 부분 악영향이었다. 대부분 구전 민담의 기록이지만 부르주아적 태도가 놀라울 정도로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민담 내용이 상당 부분 변경된 것은 물론, 민담의 취사 선택 과정에 이미 편견이 개입되어 있었다. 부르주아 계급의 아이에게 해로울 것 같은 이야기는 아예 목록에서 빼버렸고, 선택된 이야기 중에 해로울 것 같은 대목들은 꼼꼼하게 찾아 삭제했다. 그 자리에 부르주아 계급의 도덕률을 강화하는 메시지를 삽입했다. 그림 형제의 동화가 부르주아 계급의 허위의식을 조장하고 권위주의 교육 태도를 강화한다는 견해가 우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