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책을 추억함
안영희
대형마트 문구코너에서
전혀 작정한 적 없는 공책 한 권을 사 담은 건
또 누구 짓이었담?
고딕식 교회와 적포도주빛 지붕들의 표지
표백 안 한 호밀빵 빛깔의 속지들···, 켜켜한 시간의 질감
숙직실 무쇠솥에 죽처럼 끓인 구호품 우유,
본량국민학교 6학년 아이는 전교생 앞에 불려나가
상을 받았네
난생처음 맡아본 황홀한 이국의 향내!
눈 시린 담홍색 필통에 든 연필에서도, 지우개에서도
두꺼운 두 권의 공책 표지에는
보기만 해도 눈물 고이게 행복해 뵈는,
색종이빛 지붕의 집들
겹겹 에워싼 애들이 그랬네 야야 그게다 미제야! 미제!
전쟁이 찢어 패대기친 어린 가지 툰드라에
홀연 켜진 요술램프!
열세 살의 소공녀
걸어 나와, 또다시
늘 또다시
공책을 사 담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