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편완결이 난 방탄소년단 진 빙의글「방가방가 김햄찌」의 번외편입니다.
딱히 영업은 아니지만 방가방가 김햄찌를 읽으셔야 내용이 이해되기 쉬우실 겁니다ㅎㅎ
어느날부터 아름은 예전과는 다른 꿈을 꾸기 시작했다. 사고가 있던 날이 되풀이되는 꿈보다 더 무서운 종류의 꿈이었다. 그녀는 병실에 누워 산소호흡기를 꽂고 마지막 호흡을 내뱉는 한 여자를 보았다. 뒷산에서 목을 매어 죽었다는 시신 위로 덮인 하얀 천과, 그 아래에 비죽 나와있는 낯설고 주름진 손을 보았다. 정처없이 달리면서 악을 쓰는 꿈도 있었다. 어두운 방구석에 앉아 서럽게 우는 꿈도, 날카로운 무언가로 수없이 자신의 몸을 그어대는 꿈도.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건 전부 호석의 기억들이었다. 아름은 어깨에 흐리지만 거의 다 나타났다는 징표를 괜히 더듬어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것 때문에 내가 그의 과거들을 볼 수 있는걸까. 우리 둘이 좀 더 긴밀하게 연결된걸까. 기억들을 보고나서는 항상 끝이 보이지않는 지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원래 꾸던 악몽을 꾸는게 낫다 싶을 정도로 참담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끝끝내 호석에게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호석에게 전보다 더 자주 포옹을 해주었다. 겨우 잊고 지내고 있을텐데 또 끄집어내게 만들기는 싫었다.
호석이 카톡메세지 소리를 재현하는건 귀여웠지만 아름은 잠시 오소소 돋는 소름을 주체하지 못했다. 아름이 들어갔었던 화장실은 문을 일일히 열었다가 닫아야하는 구조였다. 게다가 호석은 화장실에서 나와 긴 복도를 지나야 있는 휴게실에 앉아있었다. 그 거리에서 호석이 물소리는 물론 카톡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건 불가능했다.
정말로 내가 그의 기억들을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도 내 눈으로 보고, 내 귀로 들을 수 있게 된걸까.
"무서웠지."
호석이 가만히 서 있는 그녀를 천천히 끌어안았다.
"눈앞이 안보이는게 그렇게 무서운건지 몰랐어..... 소리만 들린다는게 그렇게 무서운 일인줄은- 응? 왜그래? 갑자기 왜 웃어?"
"아, 어떡하지. 나 진짜 못됐다."
결국 비실비실 새어나오는 미소을 감추지 못하고 아름이 크게 웃어버렸다. 그리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을 호석의 허리를 마주 안아주었다.
"무슨 말이야?"
"우리 진짜 너무너무 특별한 사이가 되어버린거잖아. 이 세상에 이런 방식으로 연결된 사람들이 또 있을까? 나 정말 못된게, 너는 무서웠다면서 날 걱정해주는데 나는 그냥 지금 너무 좋아죽겠다는거야."
아름이 호석의 가슴팍에 얼굴을 쿡 박고 부비적거렸다. 무슨 약이라도 잘못 먹은 것처럼,
"우리 이제 계속 함께인거야. 한 사람이 어딜가도 금방 알아챌 수 있게 됐으니까."
"......"
"너무 좋다. 진짜."
"그렇게는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데."
잠시 멍하니 서 있던 호석이 아름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아름은 그 손길을 느끼며 온몸으로 그의 심장소리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도 좋다. 진짜."
[방가방가 김햄찌/번외] 달세뇨 (Dal Segno)
아름은 까만 밤하늘을 보며 다리 위에 서 있었다. 뒤에서 차가 쉴새없이 쌩쌩 지나가는 소리들이 들려오고 저멀리에는 눈부신 도시의 야경이 보였다. 아름은 눈을 내리깔아 밑을 보았다. 짙은색의 피부에 가늘고 긴 손가락을 가진 손이 다리의 난간을 붙잡고 있었다. 그 아래에는 까만 강물이 바람을 따라 넘실거렸다. 시선은 한참동안 강물에 머물렀다.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다.
아름은 잠깐 보았던 도시의 야경이 익숙하다는걸 깨달았다. 그러자 여기가 어딘지 쉽게 알 수 있었다. 혼자 출사를 하러 자주 찾아가는 곳들 중 하나였던 곳이었다.
서울의 한강다리들 중 자살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은 곳.
그 생각을 한 순간 그녀는 번득 눈을 떴다.
"희.... 희망아...... 희망아! 희망아!!! 정호석!!!!!!"
실로 오랜만에 앞이 안보이는게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요양병원에서도 경험해보지 못한 엄청난 공포감이 온몸을 압박했다. 아름은 다급히 희망이를 찾았다.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방문이 달칵 열렸다. 익숙한 체향이 훅하고 느껴지자마자 그녀는 그를 와락 껴안았다. 당황한 호석이 아름의 등을 살짝 토닥이며 물었다.
"왜그래? 또 그 꿈을 꾼거야?"
"...... 너, 마포대교 간 적 있어?"
"마포대교?"
"네가 거기 서 있는 꿈을 꿨어. 밤이었는데, 뒤에는 차들이 막 달리고, 사람들은 하나도 없고-."
"모르겠는데..... 그냥 꿈일거야. 괜찮아. 나 여깄어."
품에 안겨있으면서도 겁에 질려 덜덜 떨었다. 아름은 그게 단순한 꿈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난간을 붙잡고 있던 손은 그녀가 수도 없이 만지고 잡았던 호석의 손이었다. 기억을 못하더라도 그는 분명히 밤에 마포대교를 간 적이 있었다. 새카만 강물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던 적이 있었다.
가족들의 죽음을 목격하거나 자해를 하는 기억이 차라리 나았다.
"희망아, 그러면 안돼. 알았지?"
아름이 울먹거렸다.
"너 정말로- 정말로 그러면 안돼. 그거 진짜 나쁜 짓이야. 나한테 그랬잖아. 아무리 힘들어도 그러면 안된다고 그랬잖아....."
"아름아."
"내가 후회했으면 좋겠댔지. 나 지금 많이 후회돼. 너무 후회돼."
"......"
"여기서 더 후회하게 만들지 말아줘.....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런 생각 안해. 진짜야. 나한테 사과할 필요 없어. 네 덕분에 지금 이순간 흘러가는 1분1초를 내가 숨 쉬며 살고 있다는게 행복한데, 왜 그런 생각을 하겠어."
호석이 아름을 품에서 떼어냈다. 그리고 휴지를 가져다가 아름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그 다정다감한 행동에 아름은 눈물을 그쳤다. 행복하다고 했다. 나 때문에 행복하다고 했다.
그 말이 진짜였으면 좋겠다. 내가 네게 위안을 받는 것처럼,
그리고 여느 때처럼 더듬어서 확인해본 호석의 얼굴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날은 복지관에서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특강이 있는 날이었다. 강의가 오전, 오후로 꽤 길었기 때문에 호석은 집에 있기로 했다. 강의내용은 둘째치고 아름은 살면서 단 한번도 이렇게 많은 시각장애인들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몇몇은 이미 서로 친한건지 웃으면서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보호자와 같이 온 사람들도 꽤 되는 것 같았다. 아름은 입을 삐죽였다. 나도 희망이랑 같이 올걸 그랬나봐. 괜히 집에 있으라고 했어.
잠깐 쉬는 시간이 되자 아름은 시각장애인용 지팡이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감기기운이 있는건지 머리가 조금 아팠다. 복지관 사람을 찾아 타이레놀 좀 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강의실에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출구를 못 찾고 자꾸 부딪혔다.
"실례합니다. 실례합니다. 죄송해요....."
"어, 그쪽이 아니예요."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고 어딘가로 힘있게 끌었다. 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아름은 조용한 복도에 나와 있었다. 그제야 아름이 감사하다고 꾸벅 인사를 했다. 남자가 웃었다.
"아니예요. 제 할일인걸요."
"아, 자원봉사자세요?"
"네. 오늘 특강 때문에 나와달라고 해서 왔어요."
"처음 듣는 목소리인데...... 저 여기 복지관 자주 오거든요."
"알아요. 김아름 씨 맞죠? 저는 종종 뵀어요."
타이레놀이 필요하다는 그녀의 말에 남자가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했다. 비상약은 침대가 있는 휴게실에 구비해놨다면서 남자는 아름을 어떤 방으로 안내했다. 붙임성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녀를 친절하게 침대가에 앉혀주기까지 했다. 아름은 복지관에 올 때마다 항상 호석과 함께여서 자원봉사자들이랑 친해질 기회가 없었다. 심지어 호석은 경계를 했다. - "여기 봉사자들은 왜 전부 남자지? 아름아, 친하게 지내면 안돼. 말도 섞지마. 남자들은 나 빼고 다 늑대야." "하지만 너도 이구아나잖아." "..... 너무해." - 하지만 이 자원봉사자는 좋은 사람인 것 같았다. 오후에 희망이 오면 말해줘야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구급상자를 찾는 듯 뒤적거리는 소리를 내던 남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
"오실 떄마다 어떤 남자분이랑 동행하지 않으셨어요? 오늘은 혼자네요."
"아, 네. 맞아요. 좀 이따가 데리러 올 거예요. 강의가 워낙 길어서 집에 있으라고 했거든요."
"아아..... 남자친구분?"
"아뇨. 더 특별한 관계예요."
아름이 뿌듯하게 말하자 남자가 웃었다. 낮은 톤의 웃음소리가 다정했다.
"정말로 많이 좋아하시나봐요."
"세상에서 제일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예요. 안 좋아할 수가 없어요. 어- 안보이는 주제에 이렇게 말하면 좀 웃기지만, 진짜진짜 잘생겼어요. 코도 예쁘게 생겼구. 그쵸?"
"음- 그랬던 것 같네요."
"오후에 오면 소개해줄게요. 대학생이라고 하셨죠? 아마 또래이실거예요."
"글쎄요."
벌려놓았던 서랍들을 하나씩 다 닫고 나서 남자가 뒤돌아섰다. 부산스럽게 여기저기를 뒤지던 남자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은데."
"..... 네?"
"아름씨, 나한테도 세상에서 제일 착하고, 다정하고, 잘생긴 남자애가 있었어요."
남자가 주머니에 손을 꽂고 천천히 그녀에게 걸어갔다. 아름은 어깨를 움츠렸다. 보이지 않아도 느껴지는게 있었다. 남자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따뜻하고 살가웠는데, 갑자기 얼음장처럼 냉기가 서렸다.
아니, 냉기보다 더 지독하고 차가운 무언가가.
"흠이 없었죠. 저주에 걸렸다는 것 빼고는."
"......"
"그래도 걔는 너무나 착해빠져서, 다 자기 탓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머니의 죽음까지도."
"......"
"그래서 집에 불을 질러버리고 죽으려고 했어요. 그러지도 못하고 차라리 죽는게 낫다 싶은 상태가 되어버렸지만."
아름의 바로 앞에 멈춰선 남자가 고개를 돌려 허공을 바라보았다.
"나는 이해가 안가요."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말에 씁쓸함이 묻어났다. 동생을 사랑한다 말하지만, 정작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도 함께.
"태생부터 고귀했던 아이인데 왜 그런 말도 안되는 일을 당해야 했을까. 왜 그런 좆같은 삶을 살아야했을까."
"......"
"왜 날개없는 천사나 다름없는 내 동생이 아니라, 엄한 놈에게 열쇠가 생겼을까."
뱉어내듯이 한 마지막 말에는 칼이 돋아나있었다. 아름은 또다시 몸을 움츠렸다.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어하고 있었다. 동생에게 부당하고 불공평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기에 온 것이리라.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만들어주기 위해서.
"왜 떨고 있어요? 무서워요? 죽음이?"
남자가 바들바들 떨리고 있는 아름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툭 밀쳤다.
"우리 형태는 항상 죽기를 원했는데, 넌 죽는게 무서워?"
"......"
"축복으로 알아야 할거예요. 지금 죽을 수 있다는거."
비아냥거리는 남자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갑자기 시야를 가리고 있던 어둠이 걷혀지고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아름은, 아니 호석은 아파트 복도를 내달리고 있었다. 그러다 잠시 멈춰서서 손을 내렸다. 손에 쥐어져 있는 핸드폰 화면에는 [고모]라는 수신자명이 적혀있었다. 아직 통화가 연결되지 않았지만 호석은 거침없이 종료버튼을 눌렀다. 쿵쾅쿵쾅거리며 정신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곧 1층 엘리베이터 앞으로 뛰쳐나왔다. 현관을 지나 밖으로 나가기 전, 그는 한번 더 멈춰서서 폰을 들었다. 단축번호 1번을 누르자 아름의 번호가 떴다. 곧장 귀에 가져다댔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아파트 현관 벽에 걸린 거울에는 처음 보는 남자가 서 있었다. 전체적으로 말랐지만 자신에게 어울리게 옷을 잘 입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마를 다 덮고 있는 머리카락은 갈색이었고, 소매가 긴 회색 티셔츠에 무릎이 찢어진 블랙진을 입고 있었다. 남자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귀에 폰을 갖다댄채, 헐떡거리며 숨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뇨. 난 죽는게 무섭지 않아요."
거울 속의 남자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아름의 시야로 다시 어둠이 밀려왔다. 하지만 아름은 절망하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훨씬 심각하고 무서운 상황임을 아는데도 자꾸 입꼬리가 올라갔다. 결국 아름은 웃고 말았다. 남자가 자길 미친여자 보듯이 내려다보고 있을걸 알았지만 참을 수 없었다.
말을 잘못했었다. 얼굴이 별로 길지 않았다.
생각보다 훨씬 잘생겼잖아.
"내가 무서운건 지금 내 옆에 호석이가 없기 때문이예요. 이럴 때는 항상 그 애가 달려와줬는데, 지금은 아니니까. 그러기엔 너무- 너무 늦었을테니까."
복지관을 향해 달려오고 있을 것이다. 보통 사람이 걸어갈땐 20분 밖에 안걸리는 거리를, 아름이 걸어갈 때는 3,40분씩 걸려서 호석과 함께 버스를 타곤 했다. 하지만 버스를 기다렸다가 타고 오진 않을거다. 그렇다고 걸어가는 길을 잘 알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결국 그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에는 모든게 다 끝나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름은 담담했다. 그녀는 무릎 위에 올려둔 손에 힘을 주었다. 의연하고 당당하게 이 상황을 받아들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처럼, 남은 인생을 장님으로 살아야한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처럼.
"눈물겨운 로맨스네."
"그거 알아요? 열쇠가 죽으면 저주받은 사람도 같이 죽어요."
아름은 믿고 있었다. 근거 없고 증명할 수도 없었지만 호석은 분명히 자신의 시점에서 지금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달리고 또 달리다가, 또다시 앞이 캄캄해져서 더럭 겁을 먹고 그 자리에 멈춰섰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아름은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됐다.
"그 어떤 끔찍한 짓을 저지르던 당신은 걔랑 나를 막을 수 없을 거예요."
듣고 있어? 너무 무서워하지마.
우린 함께일거야.
"넌 손에 피를 묻히고 지옥으로 떨어지겠지만, 우리는 아니라는거야. 이 악마야."
순간 남자가 무언가를 아름의 목덜미에 내리꽂았다. 아름은 그 충격에 입을 크게 벌렸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라서가 아니었다. 독극물의 효과는 대단히 빨랐다. 침대 위로 쓰러진 아름이 온몸을 고통스럽게 뒤틀기 시작했다. 입으로 피를 토해도 이상하지 않을만큼 끔찍한 아픔이 세포 구석구석에 퍼지기 시작했다.
"알고 있어."
남자가 여전히 침대에 걸터앉아서 주체없이 떨리고 있는 여자의 하반신을 친절하게 침대 위로 올려주며 태연하게 말했다.
"근데 막상 귀로 들으니까 기분 되게 더럽네."
"크윽, 컥. 아윽. 으으......"
"좀 후회된다. 더 고통스럽게 죽일걸. 아, 나는 왜 여자들한테 약해서는-."
"으윽. 으으으...... 으으......"
"지금은 힘들겠지만 조금만 견디면 편해질거야. 그 독은 굉장히 빨리 퍼지거든."
남자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서 어디론가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그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휴게실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전화를 바로 받는 상대에게 입을 여는 남자의 목소리에서는 친절함이나 다정함 따위 찾아볼 수 없었다.
"나야. 지금 바로 시작해."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관절과 근육이 전부 흐물흐물 녹는 느낌이었고 팔다리가 제멋대로 뒤틀렸다. 눈물샘이 터졌다. 타는 냄새가 아까부터 진동했다. 방 안이 뜨겁기도 한 것 같은데 감각이 마비된지 오래라 분간이 가지 않았다. 잔인하게도 후각과 청각은 일찍 꺼지지않고 남아서 마지막을 함께했다. 앞서서 정지되었을거라고 예상했던 사고회로도 마찬가지였다. 온통 한 사람 생각 뿐이었지만.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늘 하던대로 사랑을 가득 담아 희망아- 하고 부르고 싶었다.
하지만 입에서 나오는건 고통스러운 신음소리 뿐이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그가 그녀의 시선을 침범하고 있지 않기를 바랐다. 자신에 대한 일이라면 그 누구보다 걱정하고 아파할 사람이었으니까. 생각해보면 항상 걱정하고 힘들게 만들었다. 같이 하자는 일도 많았는데 다 못하고. 오늘도 따라가겠다는데 됐다고 말리고. 난 항상 널 속상하게 만드는구나. 미안해. 미안해, 희망아.
그래도.
먼저 갈테니까 얼른 따라와줘.
그녀는 종교가 없었다. 신에 대해 고민해 본 적도 없었고 사람들이 흔히 믿는 극락, 천국, 지옥 등의 사후세계에 대해도 아무 생각없었다. 있으면 있나보다 했고, 없으면 없나보다 했다. 한창 죽겠다고 난리를 칠 때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어차피 죽으면 다 끝이잖아. 천국이 있든 없든, 일단 끝이겠지.
아름은 입술을 깨물었다.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던 과거의 자신이 미워졌다. 무섭지 않다고 큰소리 땅땅 쳤는데, 갑자기 너무 무서워졌다.
정말 끝이면 어떡하지.
이제야 네 얼굴을 봤는데 널 아예 잊어버리면 어떡하지.
만날 수 있을까, 우리.
그때 무언가 반짝이는게 눈앞에 부스스 떨어지기 시작했다.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조금씩 떨어지던 그것은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다. 아름은 손을 내밀어 그것을 받았다. 초등학교 때 곧잘 가지고 놀았던 반짝이풀 가루 같았다. 아름은 그 중에서 금색을 가장 좋아했는데 이것들은 색깔이 하나가 아니었다. 검정색, 하얀색, 파란색, 노랑색, 빨간색- 셀 수 없이 여러가지의 색을 가진 반짝이가루들이 우르르 쏟아지고 있었다. 쏟아져서는 회오리치듯 아름의 주위를 빠르게 맴돌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그녀는 더이상 어둠 속에 갇혀 있지 않았다.
아름이 웃었다.
D.S.
"아.... 저저..... 뭔가 불안한데......"
아름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녀는 다리를 건너서 여의나루로 가는 길이었다. 어차피 마포역과 여의나루역 둘 다 5호선이었기에 마포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가도 되었겠지만, 마포대교는 그녀가 낮이고 밤이고 가리지 않고 자주 가는 출사장소 중 하나였다. 이곳에서 찍은 괜찮은 사진들도 꽤 되었다. 내일은 지도교수님 전시회를 가야해서 집에 일찍 들어가는 편이 좋았지만, 아름은 오늘도 뭐 하나 건져볼까 해서 일부러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장면을 목격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하기야 원래도 자살로 유명한 곳이긴 했지만.
일곱 발자국 쯤 떨어져 있는 곳에 서 있는 남자는 난간을 꼭 붙잡고 있었다. 처음에 발견했을 땐 아련한 얼굴로 저 멀리 야경에 시선을 던지고 있길래 냅다 멈춰서서 목에 걸린 카메라를 들었다. 주홍빛 불빛으로 일렁이는 배경도, 어딘가 애절한 눈빛의 모델도, 전부 들어맞는 끝내주는 그림이었다. 아름은 특히 남자의 옆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오똑하고 매끄러운 콧날이 자연산인지 의심될 정도로 기가 막히게 생겼다. 심지어 옷도 잘 입네. 팔소매가 까만 카키색 항공점퍼에다 짙은색 청바지를 입고 붉은빛 도는 갈색 워커를 신었다. 직업이 혹시 전문모델인가. 그렇다기엔 키가 좀 작긴 한데. 실없이 생각하며 아름은 카메라를 내렸다. 초상권에 대한 허락을 받기 위해 남자에게 말을 걸 생각이었다.
그런데 남자의 시선이 난간 아래 강물로 향했다. 아름은 순간 섬뜩했다. 남자의 표정은 어둠 그 자체였다. 처음에 얼핏 봤을 때는 그냥 분위기에 취해 감정이라도 잡고 있나 했는데, 지금 보니까 우울해서 그늘이 잔뜩 진 얼굴이다. 혹시, 저 사람 설마-.
그때부터 아름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남자를 지켜보면서 서 있는 것이었다.
"가, 가서 말이라도 걸어야하나......"
아름은 지나온 난간에 적혀있던, 자살방지용이랍시고 시에서 마련한 문구들을 떠올렸다. 오늘 하루 어땠어? 많이 힘들었구나~ 는 개뿔. 그런 오그라드는 말을 어떻게 초면인 사람한테 건네. 그러다가 저 사람이 날 끌어안고 같이 뛰어내리기라도 하면? 그럴 일은 없으려나.
별의별 생각을 하면서 남자를 보고 있는데 그가 드디어 움직였다. 아름은 움찔하면서 잔뜩 긴장하고 그를 주시했다. 난간에서 손을 뗀 남자가 아름에게 등을 진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름은 망설이다가 그 뒤를 따라 조심스럽게 걷기 시작했다. 어차피 가고 있던 방향이기도 했고, 앞질러 갔다가는 저도 모르는 새에 소중한 생명 하나를 놓칠까봐 불안해서였다. 점퍼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넣은 남자의 뒷모습은 어쩐지 좀 힘겨워보였다. 약간 비틀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쓰러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아름은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미연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정말 그 오그라드는 문구로라도 말을 건네봐야하는 것일까. 저기요. 안녕하세요. 오늘 하루 어떠셨어요. 많이 힘드셨나요.
그러나 다리 끝에 도착할 때까지 아름은 결국 말을 걸지 못했다. 아무래도 지나친 오지랖이라는 생각때문이었다. 남자가 또다시 수상한 행동을 보였다면 얼른 달려가 어깨를 붙들었겠지만, 그런 기미도 없었다. 여의나루역 쪽으로 가기 전, 아름은 멈춰서서 고개를 돌렸다. 다리를 다 건넌 남자는 그녀와 정 반대편으로 가고 있었다. 아까보다는 조금 더 힘이 실린 걸음걸이였지만, 아름은 쉽사리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한참을 서있었다. 얼른 걸어가서 역에 도착해야 자정 전까지 집에 들어갈 수 있을텐데, 그래야 통금시간을 중요하게 여기시는 아빠께 조금이라도 덜 혼날텐데 어째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분명히 오늘 처음 본 사람인데, 굉장히 낯선 사람인데.
어쩐지, 자꾸 보고싶게 만들어지는 사람이었다.
Fine.
*
안녕하세요 레몬마카롱입니다.
월요일에 들고 왔어야 할 것을..... 아니 일요일에 끝내야 할 것을..... 수요일 새벽에 들고 오네요.....ㅎ
이번편은 김햄찌 본편 중 22-1편과 같이 읽으시는걸 추천드립니당 왜인지는 다들 아시겠져?
제목의 의미 먼저 설명해드릴게여
피아노 배우셨던 분들은 아시겠지만 번외제목인 달세뇨(D.S.)는 음악기호 중 하나로,
'세뇨()에서 돌아가서 피네(Fine)에서 끝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안돌아가는 머리를 굴리고 또 굴리다가 이미 써놓은 글의 전개를 보고 이런 제목을 지었습니당 그러니까 아름이 전체 인생을 한 악보로 봤을때, 아름이가 죽고 나서 바로 달세뇨(D.S.)가 있었죠! 거기서 세뇨가 있던 부분으로 돌아가보면 그게 바로 마포대교 위에서 호석이를 발견하는 장면! 인겁니다.
하지만 피네가 있죠.... 녜..... 더 전개안하고 끝낸다는거죠 ㅎ
'처음으로 돌아가라'는 뜻의 다카포도 잠시 고민했었지만 그거슨 제가 생각해도 넘나 잔인한것..... 이 가슴아픈 스토리를 다시 반복하라니..... 그렇지만 음 사실 세뇨가 있는 부분은 아름이가 미처 기억해내거나 알지 못했던 과거거든요. 그러니까 제목을 달세뇨로 해도 이 슬픈 스토리는 결말에 변화가 없을 거라는거....
만약 아름이가 호석이에게 말을 걸었다면 이야기가 완전히 뒤바뀌어버렸겠지만요.
제목과 결말에 대한 떡밥은 中-2 에 잔뜩이랍니다 호호
그리고 그 편을 다시 읽고 와보시면 아~ 하시는것도 그렇지만 많이 슬프실거예요.... 특히 호비가 여주한테 말하다가 이구아나로 변신해버리는 그 장면..... 제가 노리고 넣었는데여..... 아닌가.... 별로 안슬픈가..... 난 울면서 썼는데 (시무룩)
달세뇨의 전체적인 브금은 아무래도 Save Me가 아닐까 싶습니다.
진심.... 이번앨범 모든 아미들의 최애곡..... 안무도 대박이시져..... 애들파트 가사가 다 주옥같구여.....
여담이지만 근데 사실 세이브미는 꾹토끼 수정하면서 오~ 어울리겠는데? 했긴했었어요. 꾸기가 바이크를 몰고 서울 밖으로 도망치는 장면이 전주랑 잘 어울릴 것 같달까..... 하지만 지금보면 꾹토끼보단 달세뇨 맞춤형인것 같습니다. 특히나 가사가 ㅠㅠ
난 알았지~ 너란 구원이 (홋! 홋!) 내 삶의 일부며 아픔을 감싸줄 유일한 손길~
호석이 파트 말고도 내 심장소~릴 들어봐~ 이 파트도 달세뇨에 맞는 가사네여....
이거 가사 다 누가 썼냐.... 진심 찬양하라 세이브미 찬양하라 갓방탄
윤기번외는 안늦을게여 진짜로 (하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재밌게 읽어주셔서 늘 감사드립니다 모두들 사랑해요 하트뿅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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