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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군산시 영명길 29 (구암동 358-2번지)
063-454-5940
관람시간 : 하계(3월~10월) 매일 09:00 - 18:00 / 동계(11월~2월) 매일 09:00 - 17:00
매주 월요일 휴관
무료주차를 하고 걸어가는 길... 길고양이들이 많이 보인다. 녀석들도 어디가 안전한 곳인지를 아는 모양이다.
군산 3.1운동 100주년 기념관은 1919년 한강 이남 최초 3.5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는 곳이다.
주차를 한 곳이 예전 구암교회가 있던 자리로 3.1운동 역사영상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고딕 양식의 회색빛 건물 석조 예배당이고
지금의 구암교회를 지나 쭉 걸어오면 된다. 구암교회 아래쪽 길로 내려가면 커다란 주차장이 새로 생겼다.
건물외관이 심상치 않다 했더니...
건물은 교사와 학생이 주도적으로 3.5만세운동을 이끈 군산 영명학교를 재현해 3층규모 벽돌건물로 조성했다.
건물도 이렇게 의미를 부여해서 짓다니 진심이 느껴져서 너무 좋다. 그냥 건물 자체로도 의미를 지닌다.
학교 건물이어서 그런지 실용성도 있어보이고 내구성도 좋아보이고...여러모로 의미있어 보여 한참을 밖에서 건물 구경을 했다.
3.1만세운동이 일어난 이후 한강 이남과 호남에서 최초로 만세운동이 일어난 군산의 3.5만세운동은
군산 영명학교를 졸업한 김병수가 1919년 2월 28일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이강섭(세브란스 병원근무)과 접촉하여
독립선언문 200장을 건네 받고 군산으로 내려와 영명학교 교사 이두열, 박연세, 송헌옥, 고석주, 김수영에게 전했으며,
이를 전해받은 영명학교 교사와 학생대표는 거사일을 군중이 많이 모이는 서래장날인 3월 6일로 정하고 준비를 했으나
일본경찰에 사전에 발각되어 학교를 급습, 인쇄된 독립선언문과 태극기 등 독립만세운동에 관련된 각종 문서를 압수하고
박영세, 이두열 두 교사를 압송했다.
이를 지켜본 교사와 학생 70여명은 이날 오후 군산경찰서 앞에서 연행한 두 교사를 석방하라는 구호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만세시위는 한강 이남의 최초며 호남의 최초로 기록되고 있다. (3월 5일)
이튿날 3월 6일 예정대로 군산영명학교 교사와 학생, 예수병원 직원, 구암교회 신도, 일반시민 등 700여명이 서래장터를 지나
군산경찰서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군산에서 3월5일부터 8일까지 만세운동으로 검거된 사람은 90명이었고 63명이 구속 송치되었다.
당시 군산지방은 3.5만세운동을 기점으로 군산보통학교 방화 항일운동, 옥구대야 장날 항일운동, 임피장터 만세운동,
군사재판소 판결 불복 시위 등 만세시위가 연이어 일어났다.
이러한 사건으로 사망 53명, 실종 73명, 부상 195명이나 되었다. 이로 인한 사상자수는 전북 도내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입장료는 성인 1000원 청소년 군인 700원 어린이 500원이긴하나
통합권을 사용해서 들어가도 되고 우리처럼 전북투어패스를 사용해도 된다.
2022. 10. 26(수) - 2023. 3. 31.(금) 문화재 태극기 기획전을 하고 있다. 등록문화재로 등록된 태극기 사진 20여점을 전시한다.
실물이 아닌 사진이긴 하지만 여기가 국립박물관도 아니고 나름 의미있는 전시라고 생각했다.
자전거는 군산 3.5만세운동 당시 선교사들이 타고다니던 자전거를 연출한 모습이다.
데니 태극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등록문화재 제382호]
고종황제가 미국인 외교 고문이었던 미국인 데니(Denny)에게 하사한 태극기이다.
데니는 1886년부터 1890년까지 고종황제의 정치, 외교고문으로 활동하였고 귀국 때 태극기를 가져갔다가
후손이 1981년 우리나라에 기증하였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태극기 실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동덕여자의숙 태극기 [동덕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 등록문화재 제384호]
1908년 동덕여자의숙 개교 당시 교정에 게양된 태극기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장롱 속 나무상장와 땅 속에 간직되었고, 6.25전쟁 때는 교장이 태극기를 옷 속에 꿰매고 괴나리봇짐에 넣어
피난하는 등 소중히 간직하여 100여 년간 학교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 상징성이 큰 자료이다.
베델 태극기 [신문박물관 소장 / 등록문화재 제483호]
1904년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영국인 베델의 유물이다.
이 태극기는 일본의 언론탄압 속에서 외국인의 치외법권을 이용하여
우리 민족의 항일투쟁 등을 신속하게 보도한 대한매일신보사에 게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태극기 목판 [독립기념관 소장 / 등록문화재 제385호]
3.1운동 당시 태극기를 찍어내기 위해 목재에 태극과 4괘를 새긴 목판이다.
인쇄기술을 이용하기 쉽지 않았던 일제강점기에 만세운동에 필요한 태극기를 신속하게 대량으로 만들어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하고자 제작된 자료이다
불원복(不遠復) 태극기 [고영준 소장 / 등록문화재 제394호]
전남 구례 일대에서 활약한 고광순 의병장 사용한 태극기이다.
일제가 1905년 을사늑약을 강제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자 의병투쟁에 나선 고광순이
태극기에 "머지않아 국권을 회복한다(不遠復)"는 글자를 수놓고 의병활동의 정신적 지주로 삼아 활용하였다.
명신여학교 태극기 [숙명여자고등학교 소장 / 등록문화재 제468호]
순헌 황귀비 엄씨가 1906년 5월 설립한 명신여학교의 초기 태극기이다.
명신여학교라는 교명이 붓글씨로 쓰여 있으며, 교육 현장에서 발견된 최초의 태극기라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크다.
김구 서명문 태극기 [독립기념관 소장 / 등록문화재 제388호]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가 1941년 중국에서 미국으로 가는 매우사 신부에게 준 김구 서명문 태극기이다.
광복군에 대한 우리 동포의 지원을 당부하는 김구의 친필 묵서가 쓰여 있어
김구의 나라사랑정신을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추모의 벽(Memorial Wall)을 만들어 추모의 공간도 마련해 놓았다.
전북지역 3.1운동 전개 상황을 보면 군산이 왜 나름의 프라이드를 가지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에서 전킨(Jun Kin 한국명 전위렴) 선교사 부부와 드루(Drew 한국명 유대모) 의료선교사 부부가
1895년 현 해신동에 있는 수덕산에 정착하였다가 군산선교스테이션(Gunsan Mission Satation)이라 하여
현재 공원이 위치하고 있는 궁멀마을(현 구암동) 지역으로 옮겨왔고
구암교회, 구암예수병원, 군산구암유치원, 군산알락소학교(현 군산구암초등학교), 군산영면학교(현 군산제일중학교, 고등학교),
군산멜본딘여학교(현 군산영광중학교, 군산영광여자고등학교)를 설립하여 선교 및 의료교육사업을 하였던 곳이다.
1919년 3월 5일 한강 이남 최초의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군산영면학교와 군산멜본딘여학교의 교사와 학생들
그리고 구암예수병원 사무원들과 구암교회 성도들이 주축이 되었다.
그 자리에 바로 군산 3.1운동 100주년 기념관과 구암역사공원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여기 모형이 있구나!
왼쪽 모형이 군산 3.1운동 100주년 기념관의 모델이 된 군산영명학교의 모습이다. 정말로 똑같이 지었다.
군산지도를 모형으로 제작해 놓았다. 군산영명학교와 궁멀교회, 구암예수병원, 멜본딘여학교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독립군이 사용했던 총과 권총 그리고 군복이 전시되어 있다.
독립군은 한국이 일본에게 빼앗긴 국권을 찾기 위해 1910년에서 1945년까지 일제에 무력으로 항쟁한 군대로
이 옷은 당시 독립군이 사용했던 군복이다.
군산지역의 항일투쟁을 3기로 나누어 설명한다.
1기 의병장 임병찬과 의병들의 활동
2기 호남 최초의 3.1운동
3기 1920년대~1930년대 민족주의, 사회주의 운동
남상락 자수태극기 [독립기념관 소장 / 등록문화재 제386호]
남상락이 부인과 함께 손바느질로 만들어 만세운동에 사용한 태극기이다.
남상락은 1919년 3월 광무황제의 장례를 참관하고자 서울에 왔다가 만세운동에 동참한 후
다시 충남 당진 대로지면으로 내려와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대한민국임시의정원 태극기 [이군옥 소장 / 등록문화재 제395호]
1923년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에 게양된 것으로 전해지는 태극기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등을 지낸 김붕준이 부인 노영재 여사와 함께 제작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사용된 태극기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진관사 소장 태극기 [대한불교 조계종 진관사 소장 / 등록문화재 제458호]
2009년 5월 진관사 칠성전 해체 보수과정에서 내부 불단과 벽체 사이에서 독립신문 등과 함께 발견된 태극기이다.
1919년 3.1운동 당시 진관사에 있던 스님이 독립운동에 참여하면서 현장에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장기에 청색을 덧칠하고 4괘를 그려 제작되었다.
한국광복군 서명문 태극기 [독립기념관 소장 / 등록문화재 제389호]
한국광복군 제3지대 제2구대에서 활동하던 문웅명(일명 문수열)이 1946년 1월 다른 부대로 옮기게 되자
동료 대원들이 서명한 태극기이다.
태극기 바탕에는 조국의 완전한 독립을 염원하고 결의를 다지고자
한국광복군 대원들이 남긴 글귀와 서명 70여건이 빼곡하게 적혀있다.
이런 이국적인 모양의 태극기가 있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재미동포가 큰 일을 하셨는데... 이름 정도는 알아야되지 않을까?
이제 역사재현실(그날의 함성 속으로) 2층으로 올라간다.
유관종 부대원 태극기 [독립기념관 소장 / 등록문화재 제390호]
유관종 소위가 6.25전쟁 발발 후인 1950년 10월 초 호남지구 진격 작전 당시 사용한 태극기이다.
손으로 그린 태극기 위에 정의를 지키고 무운장구(武運長久)를 염원하는 글귀와 서명 등이 적혀있다.
전쟁 중 긴박한 상황 속에서 우리 국군의 호국정신이 생생하게 담겨있는 자료이다.
이철희 "사변폭발" 태극기 [독립기념관 소장 / 등록문화재 제393호]
6.25전쟁 당시 특무상사였던 이철희의 유품이다. 태극기의 네 모서리에 "사변폭발"이, 맨 뒤에는 "단기 4283. 6. 25"이 적혀있다.
단기 4283년은 1950년이다. 태극의 오른쪽은 북한군의 남침경로가, 왼쪽은 국군의 북진경로가 각각 적혀 있어
6.25전쟁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경주 학도병 서명문 태극기 [독립기념관 소장 / 등록문화재 제391호]
6.25전쟁 당시 경주에서 자원한 19명 학도병이 전쟁에 나가기 전에 각자의 소감을 적고 서명한 태극기이다.
중간에 "남북통일"이 한자로 적혀있고 그밖에도 "공부는 다음에, 충성은 이 순간" 등 조국수호를 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전쟁에 나선 학도병의 굳은 의지와 각오가 글귀에 잘 담겨져 있다.
건국법정대학 학도병 서명문 태극기 [독립기념관 소장 / 등록문화재 제392호]
1950년 9월 1일 제3차 학도병 모집에 자원하여 입대한 부산의 건국법정대학 법률과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서명한 태극기이다.
태극문양과 4괘를 찍어낸 태극기 위에 "필승 학병" 등 글귀와 서명을 적었다.
생사를 넘나드는 전쟁터에서도 고이 간직해 온 태극기로 가치가 크다.
미 해병대원 버스비어(Busbea) 기증 태극기 [하남역사박물관 소장 / 등록문화재 제383호]
미국 해병대원으로 6.25전쟁에 참여한 버스비어가(A. W. Busbea)가 서울수복 전투 중 우리 국민에게 건네받아
군용트럭에 꽂고 다닌 태극기이다. 일장기를 태극기로 고쳐 그린 것으로, 50년 간 소중히 보관하다가
2005년 리틀락시에서 열린 "한국전쟁기념광장" 기공식에서 자매도시인 하남시에 기증하였다.
군산3.5만세운동을 이끈 사람들
이두열(1888-1954, 예족장(1990), 당시 영명학교 교사)
고석주(1867-미상, 예족장(1990), 당시 영명학교 교사)
김수남(1900-1967, 애국장(1990), 군산보통학교 방화)
윌리엄 린튼(1891-1960, 예족장(2010), 당시 영명학교 교장)
위 네분은 국가보훈처에 의해 2022년 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그런데 솔직히 군산지역에서는 큰 인물일 지 모르나 소위 전국구 스타는 아니어서 서울사람인 내겐 모두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3.5만세운동이라는 표현도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전시공간을 엄청 세련되게 잘 꾸며 놓았다. 마치 설치미술을 해 놓은 것처럼 감각적인 구성이 돋보이는 배치를 해 놓았다.
재판정으로 꾸며진 곳에서는 당시 군산영명학교 교사였던 박연세의 독백이 흘러나온다.
"사랑하는 교인들과 가족들, 이 나라를 위해 투쟁하는 동지들을 위해 절대 굽혀서는 안 된다.
주여, 이 믿음이 헛되지 않기를 도와주소서. 이 나라의 국민으로 하여금 독립을 부르짖게 하소서."
한쪽에는 영명학교 교사 출신으로 4월 4일 이리 장날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일본 경찰의 칼에 찔러 순국한 문용기의 피 묻은 흰색 두루마기 복제본이 전시돼 있다.
문용기는 일본 경찰이 오른팔을 베자 왼손으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쳤고,
다시 왼팔을 베자 두 팔을 잃은 몸으로 뛰어가며 만세를 부르다 난자를 당했다고 한다.
군산의 3.5만세운동만으로도 이렇게 풍성한 관람을 만들었다는 것도 신기하고 놀랍지만
무엇보다도 군산시민의 자긍심이 느껴져서 가슴이 따뜻해진다.
3.5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군산의 주요 장소들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실루엣과 함께 소개하는 공간이다.
군산경찰서
일제시대 경찰업무는 우리 민족을 감시하고 핍박하던 대표기관으로 이식되었다.
군산경찰서는 1910년 일본총독부령에 의해 전북도 경무부 군산경찰서가 설립되었다.
중앙로에 소재했었던 구) 군산경찰서 건물은
3.1운동때 많은 군산시민들이 만세 시위를 하다 체포 당하거나 부상 다하였던 곳이다.
일제의 무단정치는 3.1운동의 거국적인 저항에 부딪쳐 철회되었고 일반행정구역에 따르는 보통경찰시대로 접어들었다.
독립을 꿈꾸다
"자네가 군산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해 주게나"
그날을 위한 준비
마치 소설을 써도 이렇게 극적이지는 못할 거 같은데... 조만만 아마 꼬꼬무에서 3.5만세운동을 보게되지 않을까?
그날의 함성 속으로 역사재현을 해본 2층의 관람을 모두 마쳤다.
3층은 체험교육실(그들과의 이어짐)으로 구성되어 있다.
당신은 군산3.5만세운동을 준비하는 학생입니다. 독립선언서를 넘겨받기 위해 김병수를 만나러 왔습니다.
김병수의 손을 만져보세요.
김병수의 손을 누르면 김병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군산으로 가보자! [미로체험]
이제 김병수 학생이 되어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군산으로 가야합니다.
태극기 모양의 미로를 지나면 성공적으로 군산에 도착하게 됩니다.
일본군에게 들키지 않게 조심해서 군산에 도착하세요!
3.5만세운동의 리더가 되어서 앞장을 서서 군중을 이끌어 보는 포토존이 있다.
어색~ 앞장 서는 사람이 있으면 뒤따르는 사람도 있는거지 뭐... 우린 뒤따라 가는 걸로...
인력거에 탑승하는 체험도 있다.
물론 움직이지는 않지만...
태극기를 만들자!
모두 다 같이 영명학교의 학생들이 되어 군산3.5만세운동에 사용할 태극기 퍼즐을 맞추어 주세요.
이 태극기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모두에게 전달될 것입니다.
한참을 맞춰보지만... 결국 포기~
태극기 탁본을 뜨는 체험도 할 수 있다.
터치 스크린으로 문제를 풀어보는 코너도 있다.
1층과 2층의 전시내용들을 잘 기억하면 풀 수 있는 문제들이다.
만세운동을 전파하는 게임이다.
화면에 나온 화살표와 순서를 잘 기억해서 그대로 입력하면 된다.
겨례의 함성
일본군들의 총을 피해 독립운동지로 가야 한다.
일본군들이 나오면 빨간버튼을 눌러 태극방패로 총알을 잘 막아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
스피드로 승부를 보는 막내아들 민수의 사투가 펼쳐진다.
드디어, 미션 완수!
당신 덕분에 군중들이 무사할 수 있었어요!
"대한민국 임시정부" 안으로 들어가면 독립군 기념촬영을 할 수 있다.
옷과 모자를 골라서 쓰고 독립군이 되어 촬영을 할 수 있다.
옷이 다 작다며... 입지 않더니...
그나마 큰 거를 골라서 입고 찍어본다.
이런 사진은 이봉창 의사처럼 수류탄 들고 찍어야 하는건데....
옷을 제자리에 놓고 모든 관람을 마무리했다.
군산여행에서 미리 계획했던 일정은 아니었지만...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군산의 이야기였지만 3.1운동과 서로 맞닿아 있었고 세삼 3.1운동의 위대함을 다시 되새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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