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4장
1. 육체의 남은 때(1-6)
성도는 성령을 받은 사람으로서, 성령 받기 전과는 분명 다른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지금 여러분을 성령 받은 자로 간주한다면, 성령 받기 전의 모습과 비교해서, 무엇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행동이 좀 더 윤리적으로 변했다는 차원에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성령의 오심이 성도를 지극히 윤리적이고, 인격적인 사람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오심으로써 성도가 달라지는 것은, 세상에서의 자신을 나그네로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그 나라를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게 될 때, 하나님에 대한 시각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 소원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영원한 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해, 결코 우리의 뜻대로 일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1-2절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육체의 고난을 받으시는 분으로 오셨습니다. 곧 육체가 잘되는 것과는, 전혀 반대된 길을 가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육체가 잘되는 것이 관심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만이 전부였던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이 마음으로 갑옷을 삼아야 합니다. 그럴 때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됩니다.
사람의 정욕은 항상 육체를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육체가 세상 속에서 가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정욕으로 살아가기에, 십자가로부터는 그 마음이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다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그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안에서, 주와 함께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주님이 사시는 것입니다.
곧 내 뜻대로 살고자 하는 나는 죽고, 주님이 사시는 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사시는 내가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내 뜻대로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이 내 안에 사심으로써, 주님의 인도를 받는 삶이 되었는데, 주님이 우리를 정욕을 따라 살게 하시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는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성도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으로 인도하고자 하시는데, 정작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를 언급하면서, 내 뜻이 이루어지고 육신이 잘되는 길로 인도해 달라고 한다면, 그것이 곧 나의 주인이신 주님께 순종하지 않는 것이고, 내가 내 주인이 되어 있는 것이기에 악이 되는 것입니다.
3절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음란, 정욕, 술취함, 방탕, 향락, 우상숭배와 같은 것은,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열매들이며, 성령 받지 못한 자가 주인 되신, 주님으로부터 다스림을 받지 않을 때의 열매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성령 받은 자로서, 예수 안에서 죽은 자로 살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영접한 자로 살아가는 지금, 그러한 것은 모두 지나간 때의 모습으로 끝난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성도를 이방인의 뜻을 따라 사는 길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는 길로만 인도하십니다. 이것을 위해 성도를 고난으로 인도하시고, 고난을 통해서 육신을 향한 우리의 뜻을 포기 하게 하시고, 주님이 가신 길에 순종하도록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은 성도를 성도답게 만들어 가는 필수 과정이며, 그러므로 성도에게 고난이 그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를 내버려두신 것으로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오직 자신이 원하는, 자기 뜻을 고집하기 때문에, 원하지 않는 길로 인도 받게 되면, 마치 하나님이 자신에게서 멀리 계신 것처럼 여기지만, 사실은 멀리 계신 것이 아니라, 성도로 하여금 자신의 뜻을 포기 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로 만드시기 위해, 그의 육체의 남은 때를 관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는 하나님의 관리 아래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관리하셔서 육체에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에 모든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강건한 영혼으로 만드시기 위해, 날마다 일하시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자신의 뜻을 위해 살던 때는, 이미 지나간 과거입니다. 이러한 성도의 모습이 세상이 볼 때는, 납득할 수 없고 이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4절에서 이랗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성도는 세상과 같은 길을 가지 않습니다. 세상이 볼 때는 미련하고, 어리석고,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길을 가는 것이 성도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그러한 성도를 비방합니다.
만약 성도가 이방인의 뜻을 따라 살던 때에 갔던 길을 여전히 간다면, 세상으로부터 비방을 받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성도로서 합당한 길을 가지 않은 결과일 뿐입니다.
세상이 가는 길의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하나님이 없이 자신의 뜻을 따라 사는 길의 마지막에는,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오직 심판이 기다릴 뿐입니다. 그러한 길에 소망을 두고, 또 다시 그 길을 가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께는 아무런 소망이 없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서의 번성과 풍요로움으로, 그 인생 전부를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성도에게는,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할 뿐입니다.
세상에서 말할 수 없는 풍요와 번성을 누린다고 해도, 그 기간은 극히 짧은 한시적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영원의 문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준비하신 세상의 참된 현실입니다. 성도는 이 참된 현실을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
6절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복음은 우리의 육체를 심판합니다. 그러나 영으로는 살게 합니다.
하지만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않는 자들은, 영혼과 육체가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남은 때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만이 지혜입니다.
2.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7-11)
성도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용서를 받고, 주님의 은혜를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사람의 정욕을 따라 살 수는 없습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면, 그 삶도 새로운 삶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그 새로운 삶이 곧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내 정욕을 따라 살던 삶은, 성령 받기 전의 것으로 그치고, 이제는 은혜를 알고 사랑을 알게 된 새로운 자로서, 육체의 남은 때를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성도에게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7절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곧 성도가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해야 할 근거, 그 이유가 마지막 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마지막 때의 가까움을 보지 않고 사는 자들에게는, 정신 차리고 근신하고 기도할 이유가 없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마지막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았을 때, 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해야 합니까? 그것은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라면, 육체의 남은 때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정욕을 따라 살기를 좋아합니다. 그것이 습성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자기 정욕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곧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과는 반대의 길이기 때문에, 정신 차리고 근신하며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도하는 것이, 곧 자신의 뜻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때를 잊고 살면, 기도를 한다고 해도, 여전히 자기 정욕을 따라 하게 됩니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생각도 없게 됩니다. 다만 자신의 정욕대로 이루어지기를 소원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성도가 정신 차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에서 세상이, 어떤 현실에 처해있는가를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이루실 그 나라를 보지 못합니다. 다만 보이는 세상에 모든 의미를 두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 있으면 남들처럼 웃고, 나쁜 일이 있으면 울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가 이르면, 우리가 울고 웃었던 모든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허망한 것들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지금, 미리 바라보며 사는 것이,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8절부터는 마지막 때, 육체의 남은 때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때, 증거되는 삶의 내용에 대해 말합니다.
사람이 정욕을 따라 살 때, 나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3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음란, 정욕, 술취함, 방탕, 향락, 우상숭배, 이 모든 것이 이방인의 뜻을 따라, 자기 정욕대로 사는 흔적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면, 사람의 정욕에서 볼 수 없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중 첫 번째가 뜨겁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8절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우리의 사랑으로 뜨겁게 사랑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사랑에는 우리의 사랑, 곧 인간적인 사랑이 있는 반면에, 주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는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입니다. 주님의 한없는 사랑 앞에서, 우리들이 가지고 있던 사랑은, 사랑도 아님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소망하게 되는 것은, 주님의 사랑을 나타내고 증거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성도가 주님께 받은 그 사랑을, 서로 나타내고 증거하는 일에 힘쓰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도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주님께 받은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주님께 받은 사랑은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된 것입니다.
우리의 악한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고 용납해 주신 그 사랑으로, 서로 만나고 교제하는 것이, 성도의 사랑입니다. 결국 서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 안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성도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덮으시고, 용서하신 분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예수님의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한다면, 그 감사는 자신의 말과 생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형제를 향한 용서와 허물을 덮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으로 자신이 하나님께 어떤 은혜를 받았는가가, 확인되고 증거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인간적 마음으로 사랑하려고 하지 말고, 주님의 사랑을 묵상하면서, 그 사랑에 깊이 빠져 들기 바랍니다. 그럴 때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을 강권하여, 뜨겁게 사랑하는 길을 가도록 할 것입니다.
9절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대접을 하는데 왜 원망이 나오게 될까요? 원망은 대접을 하고 대접을 받으면서, 상대방과 자신을 비교할 때 발생합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환경과 형편에 있지 못합니다. 나은 환경에 있는 사람이라면, 풍족하게 대접할 수 있고, 못한 환경에 있다면, 그보다 못한 대접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대개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존심일 뿐입니다. 그 자존심이 원망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라는 말에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만나고 교제하는 관계가 될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그러한 말씀을 합니다. 10절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 받은 분량만큼, 봉사할 것을 말합니다.
적게 주고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주신 것만큼 봉사한다면, 서로를 비교하고 경쟁하면서, 적게 받은 것으로 원망할 이유는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받았다고 해도,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봉사하는 자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것으로 한 것이기에, 어떤 봉사를 해도, 그것을 자신의 자랑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봉사의 정신을 1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1절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처럼 말한다면, 자신을 위한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한다면, 결국 내 힘으로 하는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자신을 위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 받는 자의 복(12-19)
12-13절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상식에 도무지 맞지 않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신을 찾는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이유는, 자신에게 올 수 있는 모든 재앙에서, 벗어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너희를 연단하려고 하는 불시험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말합니다.
과연 어떤 사람이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 할 수 있겠습니까? 고난을 회피대상 1호처럼 여기고 살아가는 것이 사람인데, 과연 누가 고난으로 즐거워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바로 성도라는 것입니다.
14절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세상이 원하는 복은 말씀드리지 않아도 뻔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복을 원합니까? 사도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라고 말합니다.
고난이든 치욕을 당하는 것이든, 세상은 결코 복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물론 모든 고난과 모든 치욕이 복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는 것이 복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연단하기 위해, 불시험을 주신다고 하시는데, 대개 연단이라는 말에서 생각하는 것은, 믿음이 강해지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앙을 강하게 만들기 위해, 연단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의미도 있겠지만, 먼저 생각할 것은 믿음이 강해지는 것을, 내가 강한 믿음을 가지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나를 사랑하는 것에서 주님만 사랑하게 되는 것으로, 이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곧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만 사랑하는 신앙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성도를 연단하시는 것은, 성도로 하여금 주님만 사랑하는 자로, 만들어 가시는 것임을 생각한다면, 성도에게 주어지는 고난이나 연단 이유를,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하나님은 연단을 통해서, 주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주님께 더욱 마음을 두게 되는, 믿음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단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주님만 사랑하기를 원하는 성도라면, 하나님이 주시는 연단을 마다하지 않게 됩니다.
13절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오히려 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는 것처럼, 연단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즐거움을 누가 원하고 이해하겠습니까?
성도가 서로 사랑하고 대접하고 봉사하며 산다고 해서, 세상이 그것을 알아주고 높여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 증거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사랑을 베푸셨고, 자신의 생명으로 죄인들을 대접하셨고, 피를 흘리심으로써 봉사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예수님을 세상은 박해하고 죽이는 것으로 대접했습니다. 그런데 성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는 사람이고,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길을 가신 예수님을 믿으면서, 자신의 이름이 높아지기를 원하고, 대접받기를 원하고, 자랑스러운 존재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야 말로, 그 마음에 주님을 두지 않고 있는 흔적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즐거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고난이 즐거움이 되려면, 고난에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사도는 영광으로 말합니다.
예수님이 고난의 길을 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그 마지막은 하늘의 영광 보좌였습니다. 곧 하늘의 영광에 참여될 자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길에 참여한 자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위해 봉사했다고 해서, 영광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고난의 길을 가시고 영광으로 들어가셨다면, 우리 역시 예수님의 고난의 길에 참여하는 것만이, 하늘의 영광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늘의 영광에 참여되기를 원합니까? 영광의 면류관을 소원합니까? 예수님이 받으신 영광에 참여되기를 진심으로 원한다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싫어할 리 없습니다. 오히려 즐거움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되는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개의 사람들이 예수를 말할 뿐, 예수님의 영광도 고난도 생명에도 관심이 멀어진 채, 오로지 자신만을 바라본 채 살아가기 때문에, 고난도 연단도 벗어날 대상으로만 여기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리스도를 높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사람을 높일 리가 만무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았던 사도들이, 세상으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았습니까?
그들 모두 하나같이, 주님이 가신 고난의 길을 갔습니다. 그럼에도 그 길을 마다하지 않는 것은, 사도들이 그 길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15절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물론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자신의 악한 행동으로 인해서, 욕을 먹는 것은 없어야 합니다.
16절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하지만 이렇게 말씀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받는 것이면,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마지막 때가 되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기 때문입니다.
심판에 대해 17-1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왜 심판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하신다고 합니까? 하나님의 집은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러면 교회에서 심판이 시작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알곡이 있는 반면에, 가라지가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 가라지를 추수 때에 심판하시기 때문에, 교회에서 심판이 시작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 안에 있는 쭉정이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심판이 임하는 것이야, 불을 보듯 뻔한 일이 아니냐는 의미로 하시는 말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성도를 욕하고 조롱을 해도,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존재에 불과함을 알고,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성도를 구원의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어떤 열심과 의지로 일하시는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평생을 자신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우리를 붙드시고 다스리시며, 고난과 연단으로 이끌어 가시면서, 고치심으로 얻어지는 구원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경건하지 않은 자들은 어떻게 대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사도는 19절에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