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여인
- 월리엄 아이리쉬 장편추리소설
----- 차 례 -----
1. 사형집행 전 150일 (오후 6시)
2. 사형집행 전 150일 (한밤중)
3. 사형집행 전 149일 (새 벽)
4. 사형집행 전 149일 (오후 6시)
5. 사형집행 전 91일
6. 사형집행 전 90일
7. 사형집행 전 87일
8. 사형집행 전 21일
9. 사형집행 전 18일
10. 사형집행 전 17일, 16일
11. 사형집행 전 15일
12. 사형집행 전 14일, 13일, 12일
13. 사형집행 전 11일
14. 사형집행 전 10일
15. 사형집행 전 9일
16~18. 사형집행 전 8일, 7일, 6일
19. 사형집행 전 5일
20. 사형집행 전 3일
21. 사형집행일
22. 사형집행일
23. 사형집행 뒤 하루
1. 사형집행 전 150일(오후 6시)
오후 6시
밤은 젊고 그도 젊었다. 하지만 밤의
공기는 달콤한데 비해 그의 기분은
씁쓸했다. 벌레라도 씹은 듯이 잔뜩 찌푸린
그의 표정은 상당히 떨어진 거리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그늘에 가득차 있고,
때로는 몇 시간이나 가슴에 뿌리박혀서
도무지 풀리지 않는 그런 처치곤란한
울분이었다. 그것은 또 주위의 모든 것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어서 매우 보기 흉한
느낌이 들었다. 주위 일대의 정경 중에서
그것만이 불협화음을 내고 있었다.
5월의 이 초저녁은 데이트하기에 알맞은
날씨였다. 거리의 반은 삼십대 이전의
남자들이 머리를 가지런하게 빗질하여
단정하게 매만지고선, 지갑을 두둑하게
채우고서 데이트 약속에 늦지 않으려고
발걸음도 가볍게 들떠서 외출하는 시간.
그리고 거리의 다른 반은 역시 삼십대
이전의 여자들이 얼굴에 분을 바르고,
소중히 간직해 두었던 단벌 나들이옷으로
한껏 멋을 부리고 똑같은 약속에 시간을
맞추려고 정신없이 달려가는 시간이었다.
어디를 봐도 이 거리의 모든 것이 밀회를
향하고 있었다. 길 모퉁이, 레스토랑,
술집, 약국 앞, 호텔 로비, 보석 상점의
시계 아래, 그 밖의 어디를 가도 누군가가
누군가를 기다리지 않는 장소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이런 식으로,
매우 낡긴 했지만 또한 가장 신선하기도 한
것이다. "정말 미안해! 많이 기다렸어?"
"오늘밤 당신은 정말 멋져요. 어디로 갈
거예요?"
서쪽 하늘은 주홍색을 바른 듯이 붉고 -
이것도 역시 데이트 때문에 치장을 한
것일까 - 두 개의 별이 다이아몬드처럼
저녁을 장식하고 있었다. 거리를 따라서
네온이 빛나기 시작하며, 오늘밤의 모든 게
다 그런 것처럼 길가는 사람들에게 추파를
보내고 있었다. 택시의 경적이 요란하게
울려퍼지며 모두가 한꺼번에 어딘가로
나가려 하고 있었다. 공기도 단순한 공기가
아니고, 코티 향수를 듬뿍 담은 샴페인을
흩뿌려놓은 듯했다. 멍하니 있자니 그것은
머릿속까지 스며 들어왔다. 아니, 심장
속까지도.
주위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며 걷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저렇게 불쾌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걸까 하고 사람들은
이상하다는 듯이 흘끗 쳐다보고는
지나쳤다. 신체에 이상이 있을 리는 없다.
저 정도로 빨리 걷는 걸 보면 두말할 것도
없이 건강체일 것이다. 주머니 사정 탓도
아니리라. 값비싼 옷을 어색하지 않게 입고
있는 모습은 도무지 벼락부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나이 탓도 아니다. 삼십은
넘었다고 해도 기껏해야 몇 개월이지, 몇
년까지 갈 정도의 차이는 아니었다. 얼굴도
저렇게 찡그리지만 않는다면 멋있는 남자로
보일 것 같았다. 찡그린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누가 싸움을 걸어 오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듯한 눈매, 활처럼 아래로
구부러진 입가, 말발굽을 코 아래에
붙여놓은 것 같은 표정으로 그는 성큼성큼
걷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팔에 걸친 코트가
걸을 때마다 위아래로 흔들렸다. 몹시 뒤로
눌러쓴 모자는 나중에 고쳐쓸 생각도 없이
홱 잡아당기기라도 한 듯이 엉뚱한 곳이
움푹 패어 있었다. 보도를 밟는 구두에서
불꽃이 튀지 않는 것은 밑창이 고무이기
때문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술집에 들어가긴 했지만
애초부터 그곳에 들어갈 작정으로 걸어왔던
것은 아니었다. 그 술집 앞에까지 와서
갑자기 발을 멈춘 것이 가장 좋은
증거였다. 그 동작은 글쎄 뭐라고 하면
좋을까--- 마치 한쪽 바지 자락이 다리에
휘감겨 갑자기 걸을 수 없게 된 듯한 그런
네온사인이 마침 지나는 길을 비추어주지
않았더라면 그는 그런 술집이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제라늄 같은
진홍색의 네온에는 '안젤모'라고 적혀
있고, 마치 토마토 케첩을 병째 모조리
부어놓은 것처럼 보도를 완전히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너무도 갑자기 멈춰서는 바람에 휘청거린
그는 술집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그곳은
보도에서 층계를 서너 칸 올라간, 좁고
길며 천정이 낮은 술집이었다. 안은 넓지
않았으며, 또 그때는 붐비지도 않았다.
눈이 편안해지는 장소였다. 은은한 호박색
조명이 위쪽을 향하고 있었다. 좌우의 벽을
낮게 도려내고, 안을 향해서 테이블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테이블 쪽으로는 눈길
곧바로 걸어갔다. 안쪽 벽을 등에 지고
반원형의 카운터가 술집 입구 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카운터에 어떤 손님이
먼저 와 있는지, 아니 애초부터 사람이
없었는지 어떤지조차도 그의 안중에는
없었다. 높은 의자 하나에 코트를
팽개쳐놓고 그 위에 모자를 얹은 다음 그
옆의 의자에 앉았다. 오늘밤은 이곳으로
정했다는 듯한 그런 태도였다. 어렴풋이
하얀 윗도리가 고개를 숙인 그의 시야 위로
다가와서, "어서 오십시오." 하고
인사했다.
"스카치. 그리고 물을 조금." 하고 그는
말했다. "물은 아주 조금이면 돼."
위스키 잔은 비어 가도 물에는 손도 대지
않고 그냥 놔두었다. 처음 앉을 때
것을 무의식중에 본 모양이다.
그는 아주 똑바로 앞을 보고 앉은 채로
그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렇지만 그의 손에
닿은 것은 불에 구워 모양이 뒤틀어진 게
아니라 매끈매끈한 것이었다. 그것이
갑자기 움직였다. 그는 그곳을 바라보며
뻗었던 손을 다시 거둬들였다. 다른 사람의
손이 한 발 앞서 접시 안으로 손을 뻗었던
것이다. "미안합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먼저 드시지요."
그는 또다시 얼굴을 정면으로 되돌리고는
자신의 마음속으로 젖어들어갔다. 그리고
나서 다시 한 번 고개를 돌려 새삼스럽게
여인을 바라보았다. 변함없이 침울하고
뭔가 값을 매기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녀의
모자는 좀 특이해 보였다. 호박과 매우
색깔마저 비슷했다. 타는 듯한 오렌지빛을
띠고 있어서, 그 강렬함에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 모자는 마치 가든 파티의
낮게 매달아놓은 초롱불같이 카운터를 밝게
비춰 주고 있었다. 모자 한가운데에는 얇고
기다란 새 깃털 하나가 곤충의 더듬이처럼
곤두서 있었다. 이런 기묘한 모자를 쓰고
태연하게 앉아 있을 수 있는 여자는 아마
천 명에 한 명 정도나 될까? 하지만 그녀는
그런 것을 쓰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앉아
있는 것이었다. 언뜻 보아서는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 같지만 아주 정상적인
여성이었으며, 우스꽝스러운 면은 어디에도
없었다. 모자 이외의 복장은 잘 조화된
검정 일색이어서, 등대와 같은 모자에
비하면 화려한 면은 없었다. 그 모자는
것이리라. '내가 이 모자를 쓰고 있을 때는
조심하세요!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요!'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동안 죽 그녀는 마른 안주를 씹으면서
그의 시선을 무시하려고 애쓰는 듯했다.
이윽고 입을 멈췄는데, 그것은 남에게
주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걸
나타내는 증거였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귀를
빌려주려는 듯이 약간 고개를 기울였다.
그 모습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할
이야기가 있다면 부담없이 하세요. 다만,
대답을 할지 안할지는 이야기의 내용에
따라서 결정해 보겠어요.'
그가 말하려고 한 내용은 실로
간단명료하고 솔직한, "무슨 약속이라도
있습니까?" 라는 것이었다.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을 수도
있지요......" 그녀는 순수하게 대답했다.
결코 상대를 부추기는 듯한 그런 말투는
아니었다. 미소도 보이지 않고, 또 어떤
의미에서는 상대방에게 기회를 주는 듯한
태도도 나타내 보이지 않았다. 품위 있는
말씨나 태도로 보아 값싼 여자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의 태도에서도 바람둥이 같은 점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별다른 속셈이 없는
순수한 어조로, "약속이 있으시다면
그렇다고 하시죠.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으니까." 하고 말했다.
"귀찮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지금까지의
일을."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충분히
하고 싶다고 결정하지 않았어요.' 라고.
그의 시선은 카운터 위쪽에서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는 벽시계로 향했다. "6시
10분이군요."
그녀도 시계를 쳐다보며, "그렇군요."
하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 사이에 그는 지갑을 꺼내어 그 속에서
작고 네모난 봉투를 꺼냈다. 그리고는
그것을 벌려서 연어색을 띤 가늘고 긴 표를
두 장 꺼내어 펼치며 말했다. "여기에
'카지노 극장'의 쇼 특석표가 두 장
있습니다. AA열의 통로 쪽 좌석인데,
어떻습니까, 함께 가지 않겠습니까?"
"꽤 급하시군요." 여인은 표에서 그의
얼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서두르지 않을 수 없지요." 그는 또다시
눈도 주지 않고 분노를 띤 표정으로 표를
쳐다보고 있었다. "만일, 약속이 있다면
그렇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다른 상대를
찾아볼 테니까."
여인의 눈에 언뜻 호기심 어린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표는 꼭 사용해야
하는 건가요?"
"이론상으로는 그래요."
"그런 예의에 어긋나는 짓을 해서
이상하게 오해를 받고 싶지는 않아요. 아직
서로 잘 알지도 못하는 처지에." 하고
그녀는 말하고 나서, "물론 당신에게
이상한 속셈이 없다는 것은 알겠어요.
꾸밈없고 무뚝뚝한 말투로 보면 말씀하신
그 이상의 의미는 없겠죠?"
"없소." 그의 얼굴은 여전히 잔뜩
여인은 이제는 남자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그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나는 전부터 이런 걸
은근히 기대해 왔어요.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인 모양이에요. 이번을 놓친다면
순수한 의미에서의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겠죠."
"그럼, 먼저 처음부터 약속을 하나
해둡시다. 쇼가 끝난 뒤에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도록 말이죠."
"어떤 약속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좋아요, 따르도록 하죠."
"나와 당신은 단지 오늘 하룻밤만
친구라는 겁니다. 우리 둘이 함께 식사를
하고 쇼를 보는 겁니다. 하지만 이름이나
주소, 그 밖의 다른 개인적인 신상이라든가
않기로 합시다. 다만......"
그 다음은 그녀가 대신했다. "우리 두
사람은 하룻밤만의 친구로서 함께 쇼를
구경한다. 확실히 사리에 맞고 지당하고,
또 당연하고도 꼭 필요한 약속이군요.
좋아요, 가도록 하죠. 서로 체면을 차릴
필요도 없고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이 끝날
테니까."
여인이 손을 내밀자 두 사람은 가볍게
악수를 나누었다. 여인은 미소를 지었다.
기분좋은 미소였다. 약간 달짝지근하면서도
소극적이며 조심스런 미소였다.
그는 바텐더에게 신호를 보내어 두
사람분을 계산하려고 했다.
"내 것은 당신이 오기 전에 벌써
지불했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중이었지요."
바텐더는 윗도리 호주머니에서 작은 전표
다발을 꺼내어 한 장에 '스카치
1_60'이라고 연필로 쓰고는, 그것을 찢어서
그에게 건네주었다.
전표에는 번호가 쓰여져 있었는데, 그가
받은 전표에는 위쪽 한구석에 바텐더가
새카맣고 크게 '13'이라고 쓴 것이 눈에
띄었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그 전표에
돈을 얹어서 건네주고는 그녀의 뒤를
쫓았다.
그녀는 한 발 앞서 출구로 다가서고
있었다. 벽 쪽의 테이블에 앉아 있던 젊은
여자가 조금 몸을 앞으로 내밀어, 지나가고
있는 화려한 모자를 전송하는 듯했다. 뒤를
쫓아가던 그가 그 젊은 여자의 동작을
술집을 나오자 그녀는 그를 돌아보며,
"자, 이제부터는 모든 것을 당신에게
맡기겠어요." 하고 재촉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손을 들어 두어 대 건너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택시를 불렀다. 그때 거리를
달리고 있던 다른 택시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얌체같이 새치기해서
끼어들어오려 했다. 하지만 먼젓번 택시가
재빨리 앞질러서 그들이 부른 장소 앞에
차를 갖다 대는 바람에 그의 의도가
꺾여버리자 입에 담기 어려운 욕지거리가
오고갔다. 이윽고 말싸움도 일단락되어
먼젓번 운전사가 열을 식히고 손님 쪽으로
주의를 기울였을 때는 이미 여자는 안에
타고 있었다. 동행인 남자도 바로 운전석
목적지를 말하고 나서 그녀 옆에 올라탔다.
차내등이 켜져 있었지만 두 사람은
그대로 두었다. 불을 끈다면 매우 가까운
사이로 오해받기 쉽다. 그런 것을 의식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조명을 어둡게 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라고는 두 사람 다 생각지
못했다.
이윽고 그녀가 아주 우습다는 듯이 작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도 그녀의 시선을
쫓아가다가는 무심코 웃어버렸다.
운전면허증에 붙어 있는 사진에 미남자는
드물었지만, 이 사진은 아무리 봐도 만화
같은 것이었다. 물주전자의 손잡이같이
생긴 귀, 뒤로 물러난 턱, 튀어나온 눈.
이름도 기억하기 쉽게 짧으면서도
두운(頭韻)까지 달고 있었다. 앨 앨프.
그 순간 이후로는 거의 의식하지 못했다.
'메종 블랑세'는 어깨가 뻐근할 정도의
고급 레스토랑은 아니었지만, 요리는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아무리
붐비고 있을 때라도 손님들이 잠자코
이해해서 조용한 분위기가 유지되고 있는
그런 종류의 레스토랑이었다. 단 하나의
목적 때문에 오는 단골손님들을 괴롭히는
음악 같은 것은 여기에서는 일체 금지되어
있었다.
레스토랑에 막 들어서자 그녀는 그에게서
벗어나며 말했다. "잠깐 실례해요. 화장 좀
고치고 오겠어요. 먼저 자리에 가 계시죠.
내가 찾아갈 테니까."
화장실 문이 열렸을 때 그는 그녀가
모자라도 벗으려는지 한쪽 손을 쳐드는
모자를 벗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문득 이렇게 생각했다. 저 여인은
갑자기 용기가 없어져서 저러한 태도로
나오는 것은 아닐까? 나에게서 떨어져
모자를 벗고 혼자서 식당으로 들어오면
그만큼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을 테니까.
입구에서 지배인이 반갑게 맞이했다.
"혼자이십니까?"
"아니, 두 사람 좌석을 예약했소." 하고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스코트
헨더슨."
지배인은 명단에서 그의 이름을
찾아냈다. "아, 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손님의 어깨너머를 바라보며,
"혼자이십니까, 헨더슨 씨?" 하고 물었다.
"아뇨." 하고 헨더슨은 모호하게
안을 쳐다보자 비어 있는 테이블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그 테이블은 외따로
떨어져서 벽의 움푹 팬 곳에 놓여 있었다.
삼면이 벽으로 되어 있어서 그 테이블의
손님은 정면밖에 바라볼 수 없었다. 이윽고
여인이 식당 입구에 나타났다. 모자는 쓰고
있지 않았다. 그녀를 본 그는 그 모자가
그녀를 얼마나 돋보이게 했는지를 깨닫고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갑자기 평범한 여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조금 전의 그
휘황찬란함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유난했던
그 개성도 시들고 박력도 없어져 버렸다.
요컨대 검은 드레스를 입은 짙은 갈색
머리의 흔히 볼 수 있는 여인, 단지 그
공간만을 차지하고 있는 물체, 그런
것으로밖에 볼 수 없었다. 못생기지는
키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세련되고 매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꾀죄죄하지도
않은 여인.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아주
평범한,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그런
여성에 지나지 않았다. 하나의 부호,
하나의 합성물, 갤럽 여론조사의 한 표
정도로만 말할 수 있는 그런 존재였다.
그 순간 손님들의 머리가 그녀 쪽으로
향해졌지만 그대로 잠시 머물고 있는
머리도, 또는 자기가 본 광경을 머릿속에
새기고 나서 돌린 머리도 없었다.
지배인은 마침 샐러드를 만들고 있어서
그녀를 안내할 틈이 없었다. 헨더슨이
일어나서 자기 위치를 알렸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식당 안을 걸어들어오려고
하지 않고 벽을 따라 불안스러운 듯한
왔지만 그런 것이 훨씬 사람들 눈에 띄지
않았다. 그 화려한 모자는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그리고 자리에 도착하자마자 빈
의자 위에 모자를 내려놓고서 뭐라도
묻을까 봐 걱정이 되는지 테이블보의
끝으로 모자 일부분을 살짝 가려놓는
것이었다.
"여기는 자주 오시나 보죠?" 그녀가
물었지만 그는 일부러 못 들은 체했다.
"미안해요." 하고 여인은 말을 부드럽게
낮추어서는, "이런 질문은 신상조사에
속하겠군요." 하고 말했다.
테이블 담당 보이는 턱 옆에 점이 하나
있었다. 보지 않으려고 해도 눈에 자꾸
띄었다. 헨더슨은 그녀의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고 음식을 주문했다. 그녀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지만, 주문이 끝나자
마음에 든다는 듯이 그를 슬쩍 쳐다보았다.
드디어 힘든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녀로서는 화제를 선택하는 데에도 엄격한
제약이 있었고, 게다가 그의 답답한
기분과도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남자
쪽에서는 일반적으로 남성들이 다 그렇듯이
그런 노력은 죄다 그녀에게 맡기고는
조금도 도우려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 같긴 했지만 다른
일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는 것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육체적인
고통이라도 겪는 듯이 힘겹게 마음을
현실로 되돌렸지만, 그 멍한 상태의 모습이
눈에 거슬려 상대방에게 실례를 범한다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장갑 벗는 걸 싫어하십니까?" 하고 그가
모자를 제외하고 그녀의 몸에 붙어 있는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장갑도
검은색이었다. 칵테일이나 푸레를 들 때는
그다지 기이한 느낌이 들지 않았지만,
가자미 요리에 딸려 나온 레몬 조각의 즙을
짜는 데에 포크를 가지고 눌러
찌부러뜨리려고 하는 건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여인은 곧 오른쪽 장갑을 벗었다. 왼쪽
것은 조금 시간이 걸렸다. 가능하다면 벗고
싶지 않은 모양이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아무튼 결국엔 약간 거친 동작으로
오른쪽과 마찬가지로 그것도 벗어버렸다.
그 왼손의 결혼반지를 쳐다보지 않으려고
일부러 그는 실내의 여기저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자기의 반지를 남자가
것은 그로서도 알 수 있었다.
여인은 별로 힘들이지도 않고서 이야기를
능숙하게 끌어나갔다. 얼마나 빈틈이
없는지 진부하고 무미건조한 화제는
교묘하게 피해 나갔다. 날씨 얘기,
신문기사, 지금 먹고 있는 요리 얘기
따위는 하나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
'멘도자'라고 하는 여자 말예요. 그녀는
지금 보러 가려는 쇼에 등장하는 약간
머리가 이상한 남미인인데--- 1년 전인가
내가 봤을 때는 말에 거의 사투리가
없었거든요. 그런데 그 동안 연기를 할
때마다 점점 영어를 잊어버려서 사투리가
심해진 것 같아요. 이 상태로 가면 한
시즌만 더 지나가면 그녀의 말은 완전히
스페인 어로 되돌아가 버릴지도 모를
그는 약간 웃어 주었다. 이야기하는
식으로 보아 교양이 있는 여자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만, 교양이 있는
여자라면 오늘밤 이제부터 하려는 모험
같은 건 어떠한 구실을 붙여서라도
처음부터 깨끗이 거절해서 뒤끝을 남겨두지
않으려 했을 테지만.
그녀는 딱딱하지도 않았고 흐르는 물처럼
부드럽지도 않았고, 그 중간을 취하고
있었다. 그런 점으로 봐서도, 조금만이라도
한쪽으로 치우친 면이 있었다면 아마 더욱
확실한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조금만 더
성장과정이 나빴다면 요란하고 천한 언행을
보여서 갑자기 팔자가 펴진 여자라고
느껴졌을 것이다. 반대로, 좀더 교육을
받았더라면 총명한 점을 나타내어서 그
그렇지만 그 중간에 어물쩍하게 속해
있어서 2차원적인 존재보다 조금 나은
정도였다.
식사가 끝날 때쯤 해서 그는 여인이
자기의 넥타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색상이 이상합니까?" 그는
자기 넥타이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무늬가
없는 단색 넥타이였다.
"아뇨. 넥타이만 놓고 보면 매우
좋은데요." 하고 그녀는 당황해 하며
설명했다. "다만,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요. 당신이 입고 있는 것 중에서
그것만이 조화를 이루지 않는군요. 어머,
미안해요. 뭐 꼭 당신을 탐색할 뜻은
없었어요." 그리고는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넥타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제까지 자기가 어떤 넥타이를 매고
있었는지조차 자신도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 새삼스레 그것을 알고서
놀라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에게 지적받은
색채의 부조화를 다소라도 만회하려는 듯이
윗도리 주머니에 조금 삐져나와 있던
장식용 손수건을 꾹 눌러 집어넣었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나서 잠시 코냑을
음미했다. 그런 다음 두 사람은 레스토랑을
나왔다.
다시 그녀가 모자를 쓴 것은 온몸을
비추는 큰 거울이 있는 현관 옆의 작은
방으로 나오고 나서였다. 그녀는 갑자기
생기를 되찾았다. 그제서야 그녀의
모습에서 눈에 띄게 멋진 분위기가
묘한 힘을 가졌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마치 유리 샹들리에에 전류가 통하는
것처럼---
택시가 도착하자 190 센티는 족히 될
듯한 몸집이 큰 극장의 도어맨이 택시 문을
열어주었다. 그 화려한 모자가 그의 코
옆을 홱 스쳐지나가자 그는 우스울 정도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코 아래에
새하얀 물개수염을 기르고 있는 모습이
마치 '더 뉴요커' 지(誌)에 나오는 그림
속의 극장 도어맨과 비슷했다. 튀어나올
듯한 부리부리한 눈은 모자의 주인이
택시에서 내려 그의 앞을 완전히 지나가는
것을 계속 따라가며 쳐다보았다. 헨더슨은
그 우스꽝스러운 눈초리에 마음을
빼앗겼지만 이내 완전히 잊어버렸다.
로비에서는 사람 그림자 하나 발견할 수
없었다. 입구에 있어야 할 검표원조차 이미
자리를 떠나서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로비를 지나 극장 안으로 들어서자 곧
어두운 무대의 불빛 사이로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 그림자가 - 아마 안내원이리라 -
두 사람에게 다가와서 손전등으로 표를
확인하고는 달걀형의 불빛을 뒤쪽으로 돌려
두 사람의 발밑을 비춰주면서 좌석을
안내해 주었다.
그들의 좌석은 맨 앞줄로, 무대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처음에 무대는
오렌지빛으로 부옇게 보였지만, 이윽고 두
사람의 눈은 어두운 배경에 익숙해져 갔다.
두 사람은 영화의 기법처럼 하나의
장면이 다음 장면으로 겹쳐져 가는 모습을
미소를 짓기도 하고, 가끔 커다란 소리를
내어 웃기도 했다. 그는 억지로 만들어낸
웃음을 얼굴에 나타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시끄러운 음악, 현란한 색채, 그리고
컴컴하던 조명이 최고조에 달하자 막이
양옆에서 천천히 쳐지며 제1부가 끝났다.
객석 안에 불이 켜지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나가서 담배를 한 대 피울까요?"
하고 그가 물었다.
"그냥 여기 있겠어요. 우리는 지금 막
도착했잖아요." 하고 여인이 대답했다.
그리고는 외투 깃을 여몄다. 실내의 공기는
답답할 정도였으므로, 그 동작은 될 수
있는 대로 다른 사람들에게서 얼굴을
"안면이 있는 사람이 있소?" 잠시 뒤
그녀가 미소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프로그램으로 눈을 가져갔다. 그의
손가락이 조급하게 움직이며 프로그램의
위쪽 오른편 모서리를 한장 한장 겉에서
안으로 접어넣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제는
위쪽 오른편 모서리에는 각(角)이 전부
없어지고 가지런히 접힌 작은 삼각형만이
겹쳐져 있게 되었다.
"이건 내 습관입니다. 오래 전부터
마음이 안정되지 않을 때는 이러곤 하죠.
말하자면 낙서 같은 거라고나 할까요.
하지만 내 자신은 전혀 느끼질
못한답니다."
무대 아래의 쪽문이 열리고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제2부의 연주를 하기 위해 줄지어
두 사람의 바로 옆, 난간 바로 앞에
드럼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10년 동안
한 번도 밖의 공기를 쐬어본 적이 없는,
우리 안에 갇힌 동물 같은 남자였다.
얼굴은 초췌해질 대로 초췌해져 있었고,
머리카락은 찰싹 달라붙어 있었기 때문에
마치 하얀 줄무늬가 있는 젖은
수영모자라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코 밑에는 콧물이라도 흘린 것처럼
볼품없는 수염이 붙어 있었다. 그는 객석
쪽으로는 조금도 눈을 돌리지 않고,
조급하게 의자의 위치를 바꾸기도 하고
악기를 조절하기도 했다. 이윽고 연주
준비를 마치고 무심코 객석 쪽을 향한 그의
눈에 갑자기 그녀와 그 모자가 들어왔다.
그는 묘한 걸 느낀 모양이었다. 맥빠진
갑자기 굳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물고기처럼 헤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녀 쪽을 바라보지
않으려고 했지만, 어쩔 도리 없이 자꾸만
그의 시선이 다시 그녀 쪽으로 되돌아왔다.
처음 얼마 동안은 헨더슨도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 같은 기대를 가지고서 그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그것이
그녀에게 심한 불쾌감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재빨리 얼굴 표정을 바꾸어
그 남자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그러자 그
드럼치는 남자는 당황해 하며 악보로 눈을
돌리더니 다시는 그녀 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뒤쪽을 향해 있는
그의 시선과 일부러 목에 힘을 주고 있는
모습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싶은 것을 애써
있었다.
"내가 저 남자에게 강한 인상을 준
모양이에요."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킥킥거리며 웃었다.
"드럼의 명수가 오늘밤은 엉망이군."
하고 그가 대꾸했다.
두 사람 뒤쪽의 좌석이 관객들로 채워져
갔다. 객석의 불은 어두워지고 무대의
조명이 밝아지면서 제2부의 연주곡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프로그램의 윗모서리를 계속 접어갔다.
제2부의 중간쯤에서 커다란 산장이 무대
위에 나타났다. 미국인들로 구성된 극장
전속의 오케스트라가 그 대목에선 악기를
내려놓았다. 그 대신에 이국적인 톰톰(징의
일종)이 울리며 둔한 소리의 연주가
하이라이트인 남미의 인기 연예인 에스텔라
멘도자가 등장했다.
그는 무대 위의 변화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데 옆자리의 여인이 팔꿈치로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것이었다. 그는
멍하니 여자 쪽을 쳐다보고 나서 다시
무대로 눈길을 돌렸다. 이미 두 여자는
어떤 중대한 사실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하지만 민첩하지 못한 그로서는 아직 그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조용히
속삭이는 소리가 그의 귓전에 들려왔다.
"저 여자의 얼굴을 보세요. 중간에
푸트라이트 조명이 있으니까 잘 보이죠?
마치 나를 죽일 듯한 눈초리예요."
무대 위 여자의 표정이 풍부한 검은
눈동자 속에서 증오의 빛이 뚜렷하게
있긴 했지만, 자신이 머리에 쓰고 있는
것과 똑같은 모자를 객석에서 발견하고는
그 눈동자는 불길처럼 타올랐던 것이다.
더욱이 그것은 객석의 맨 앞줄에서 이것
보란 듯이 앉아 있으니 눈에 안 들어올
수가 없는 것이다.
"겨우 알았어요. 나의 이 특별 주문품이
어디에서 힌트를 얻었는지--- " 하고
그녀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어째서 저렇게 화를 내는
걸까요? 오히려 큰소리 치며 뽐내야 할 것
같은데."
"그런 여자의 마음을 남자들이 알 리가
없지요. 여자라고 하는 것은 보석이나
금니는 잃어버려도 괜찮지만, 모자만은
절대로 안돼요. 게다가 이 경우는 이
등록상표라고도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런
걸 도둑맞았으니 화가 날 만도 하지. 저
여자가 허락해 주었을 리도 없고--- "
"일종의 도용이란 말입니까?" 정신이
얼떨떨한 정도는 아니지만, 그의 호기심은
점점 고조되어 갔다. 그녀의 연기는 아주
단순한 것이었다. 참된 예술이 대개
그렇듯이--- 그렇다고는 하지만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하는 예술도 사실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스페인 어로
노래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노래가 아니라 대체로 이런 가락의
것이었다.
치카 치카 붐 붐
치카 치카 붐 붐
이것이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그녀는
눈을 좌우로 커다랗게 움직이면서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엉덩이를 요란하게
흔들어댔다. 그리고는 옆구리에 달아맨
우묵한 바구니에서 작은 꽃다발을
꺼내어서는 여자 관객을 향해서 던지는
것이었다. 두 번째 합창이 끝날 즈음에는
앞쪽 두세 줄에 앉아 있는 여자 관객들의
손에는 모두 꽃다발이 들려져 있었다.
하지만 헨더슨 옆에 있는 여자만은
빈손이었다.
"이 모자에 대한 반감으로 일부러
나에게는 던지지 않는 거예요." 하고
그녀는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속삭였다.
사실 엉덩이를 흔들고 발뒤꿈치를 쿵쿵
구르며 춤추고 있는 그 여자는 특히 두
나쁘게 눈동자를 번뜩이곤 하는 것이었다.
그곳에 다다르기만 하면 퓨즈 같은 여자의
눈동자에서는 번개 같은 섬광이
흘러나왔다.
"잘 보세요, 이쪽을 쳐다보게 할
테니까." 헨더슨이 난처해 하지 않도록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나서
양손을 꽉 깍지끼고 얼굴 바로 아래로
가져갔다. 하지만 그러한 행동으로는 무대
위에 선 여자의 관심을 끌 수 없었다.
그녀는 꽉 움켜쥔 손을 다시 앞으로 죽
내밀었다. 무대 위의 여자 눈이 잠시
가늘어지는 듯했다가는 다시 여느때처럼
되돌아가서 다른쪽으로 돌려졌다. 그 순간,
갑자기 헨더슨 옆 여인의 손가락에서 딱
하고 커다란 소리가 났다. 오케스트라의
소리였다. 무대 위 여자의 눈동자가 커지며
광적으로 빛나더니 이쪽으로 향해졌다. 그
여자는 또다시 꽃다발을 꺼내어 던졌지만
역시 헨더슨 옆의 여인에게는 오지 않았다.
"절대로 질 수 없어." 집요한 마음을
나타내며 중얼거리는 여자의 목소리가 그의
귀에 들려왔다. 그가 미처 무슨 뜻인지
생각해 보기도 전에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얼굴 가득히 미소를 띠고는
도전적인 태도로 서 있는 것이었다. 그
순간, 두 여인 사이에 숨막히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러나 승부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연예인의 입장으로서는 아무리
방자한 태도를 보인다 해도 관객에게 대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른 관객들을 앞에
두고 자기의 상품인 감미로움과 환상적인
옆의 여인이 계속 서 있는 바람에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무대의
여인이 엉덩이를 흔들면서 중앙으로
걸어오는 모습을 좇고 있던 스포트라이트가
아래쪽을 향해 갑자기 방향을 바꾼 것이다.
그와 동시에 맨 앞줄의 좌석에서 벌떡
일어서 있는 그녀의 머리부터 어깨까지가
환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자 완전히
똑같은 두 개의 모자에 객석 안의 모든
관객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무대
근처에서부터 조그맣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마치 잔잔한 수면에 돌을
던진 것처럼 점점 더 크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무대의 여인은 모자를 벗어서 이 미묘한
비교에 종지부를 찍었다. 장내의 분위기에
푸트라이트 위로 던져서, 꽃가지는
부드러운 원을 그리며 날아갔다. 여인은
상대방을 빠뜨린 것이 미안하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 표정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당신을 못 보고 빠뜨렸어요.
미안해요. 고의로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니에요.'
그렇기는 하지만, 그 표정 뒤에는 남국
여인 특유의 거센 분노가 짙게 깔려
있었다. 헨더슨과 동행한 여인은 자기에게
던져준 꽃을 가볍게 받고서 입술을
부드럽게 움직이며 제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헨더슨만은 그녀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거친 욕설을 들을 수 있었다.
"고마워, 이 스페인 벌레야!" 그는 숨이 콱
막히는 기분이었다.
조금씩 몸을 흔들어대면서 천천히 무대
뒤쪽으로 움직여 가더니 이내 무대 위에서
사라졌다. 오케스트라의 음악도 그것에
따라서 기차 소리가 점차 멀어져 가듯이
조용히 사라져 갔다.
객석이 아직 갈채로 흔들리고 있을 때,
무대의 양 옆쪽에 있는 관객들은 아주 잠깐
동안이었지만 어떤 또렷한 모습을 눈여겨볼
수 있었다. 와이셔츠를 입은 두 개의 팔이
- 아마도 무대 감독의 팔인 것 같다 - 다시
무대로 나오려고 하는 멘도자를 꽉
붙잡았던 것이다. 그 여인은 관객에게 다시
인사하는 것 이상의 다른 의도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녀의 두 손은 곰에게
붙잡힌 것처럼 겨드랑이 쪽에 달라붙어
있었지만, 조금 전의 일에 보복을 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대는 다시
어두워지고 다음 공연 차례로 바뀌었다.
드디어 마지막 막이 내려졌다. 헨더슨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프로그램을 자신이
앉아 있던 의자에 놓으려고 했다. 그러자
동행한 여인이 그것을 주워서 자신의 것과
함께 포개며, "오늘밤의 기념이에요."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에게 그런 소녀적인 취미가
있다고는 생각지 못했소." 그는 그렇게
말하고 여인의 뒤에서 사람으로 가득찬
통로를 천천히 걸어나왔다.
"이것은 소녀적인 취미와는 다른 거예요.
가끔 나는 충동적인 행동을 생각해 내어
즐기고 싶어하거든요. 그럴 때 이것이
도움이 되지요."
생전 알지도 보지도 못한 자신과
하룻저녁을 보냈다는 의미인가?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두 사람이 극장을 나와 혼잡한 군중들을
밀어 헤치면서 택시를 잡으러 가는 도중,
갑자기 묘한 상황이 벌어졌다. 택시를
잡아서 막 타려고 하는데 장님 거지가 그녀
쪽으로 다가와서 동냥 그릇을 코앞으로
들이밀고는 그대로 가만히 서 있는
것이었다. 마침 그녀는 불이 붙은 담배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거지
때문인지, 아니면 곁에 있던 누군가에게
부딪쳤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담배가 그녀의 손에서 떨어져 거지의 동냥
그릇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헨더슨은 그
장면을 똑똑히 보았지만, 그녀는 보지 못한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 거지는
그릇 속에 손가락을 넣어 더듬다가 뜨거운
물체에 손가락이 닿자 깜짝 놀라 손을 얼른
꺼냈다. 헨더슨이 서둘러 불붙은 담배를
끄집어내고, 미안하다는 뜻으로 1달러짜리
지폐를 거지의 손에 쥐어주며, "아저씨,
미안합니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었소."
하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는
상대가 담뱃불에 덴 손가락을 고통스러운
듯이 호호 불고 있는 것을 보고는 또다시
지폐 한 장을 꺼내어 주었다. 잘못하다가는
조금 전의 일이 고의적인 것으로 오해받을
만한 소지가 다분히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행동이 절대로 고의적인 것이
아니라고 그는 장담할 수 있었다.
그녀를 따라서 그가 택시에 올라타자
택시는 달리기 시작했다.
"감동적인 장면이었군요." 그녀는
짤막하게 이렇게만 말할 뿐이었다.
그는 운전사에게 아직 행선지를 말해
주지 않았다. 이윽고 그녀가 물었다. "몇
시나 됐나요?"
"15분 전 12시요."
"그럼, 우리들이 처음 만났던 안젤모로
돌아가죠, 거기서 한잔 마시고 헤어져요.
당신은 당신의 길을, 나는 나의 길을 가는
거예요. 나는 완전한 원을 좋아하거든요."
그는 무심코, '원은 모두 속이 비었소.'
하고 말하려다가, 이런 때 그런 말은
분위기를 깨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잠자코 있었다.
술집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6시경에
비하면 꽤 붐볐다. 그는 카운터 쪽 맨 끝의
그녀를 거기에 앉으라고 하고서 자신은
그녀 곁에 섰다.
"그럼......" 여자는 이렇게 말하고,
잔을 카운터에서 3 센티미터 정도의 높이로
치켜들었다. 그리고는 의미 있는 눈길로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말했다. "이제는
이별이군요. 만나서 매우 즐거웠어요."
"그렇게 생각한다니 나도 기쁘군요."
두 사람은 건배했다. 그는 단숨에
들이켰으며, 그녀는 조금 입을 대기만
했다.
"나는 여기에서 잠시 더 있겠어요."
그녀는 그만 헤어지자는 뜻으로 이렇게
말하고는 손을 내밀었다.
"즐거운 밤이 되길 바랍니다."
"안녕히 가세요."
가볍게 악수했다. 그가 등을 돌려서
나가려고 하자, 그녀는 눈가에 주름을 짓고
웃으며 충고하듯이 말했다. "이제 기분이
가라앉았을 테니까 집에 돌아가서 부인하고
화해하세요."
그 순간 그는 깜짝 놀라 표정이 다소
굳어졌다.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은 헤어졌다. 그는
출구 쪽으로, 그녀는 술잔 쪽으로---
이렇게 해서 일장 드라마는 막을 내렸다.
밖으로 나가기 전에 그는 뒤돌아보았다.
활처럼 휜 카운터 끝의 벽 쪽에 그녀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수심에 잠긴 듯한
눈을 내리깔고--- 아마 술잔으로 장난을
치고 있으리라. 카운터의 둥근 모퉁이
근처에 앉아 있는 두 남자의 어깨가 V자
모양의 공간을 만들었으며, 그 사이로 눈에
확 띄는 오렌지빛 모자가 보였다. 눈이
부실 듯한 오렌지빛 모자---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에게서 훨씬 떨어진
건너편의 담배 연기와 그림자 속을 통해서,
그것은 마치 꿈처럼 현실도 과거도 아닌
장면 속으로 희미하게 떠올라 있었다.
첫댓글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