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씨의 시조 3
충주어씨(忠州魚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 (始祖本貫由來)
충주 어씨(忠州魚氏)의 시조(始祖) 어중익(魚重翼)은 본성(本姓)이 지씨(池氏)였으나 태어날 때부터 체모(體貌)가 기이하고 겨드랑에 세개의 비늘(鱗)이 있어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어씨(魚氏)로 사성(賜姓)했다고 한다.
그후 시조 중익(重翼)의 후손 승진(升震)이 고려 말에 성균진사(成均進士)가 되어 가세(家勢)를 일으켰으며, 그의 증손(曾孫) 유소(有沼)가 조선(朝鮮) 세조(世祖)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토평하는데 좌대장(左大將)으로 공(功)을 세워 적개일등공신(敵愾一等功臣)에 책록되고 예성군(蘂城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승진(升震)을 일세조(一世祖)로 받들고 본관(本貫)을 충주(忠州)로 삼게 되었다. 17세 때 내금위(內禁衛)에 들어갔다가 1456년(세조 2) 무과(武科)에 장원으로 급제했던 유소(有沼)는 백 근짜리 무거운 활을 지고다니며 북변의 야인정벌에 공을 세운 치장(治將)으로 유명했다.
특히 그느 북변의 오랑캐를 잘 다스려 이름을 떨쳤는데, 오랑캐가 예물을 가지고 와서 뵈면 그는 “너희들에게 취하지 않고, 추호라도 범하지 아니하리”하며 거절하였기로 야인들이 손을 들어 이마에 올리면서 “공은 우리 아버지시다”라고 하였다. 그가 다시 북병사로 기용되었을 때 노모를 핑계삼아 사양하니 성종은 “북변을 편하게 함이 경보다 나은이가 없어 그런 것이니 어머니는 걱정말라”하면서 유소의 어머니에게 태후와 동등한 예우를 하도록 하사품(下賜品)을 내렸다고 한다.
구후 나라에서는 오랑캐들과 무슨 외교를 진행하면서 말을 잘 듣지 않으면, <어령공(魚令公)을 오시게 한다>고 공갈하여 곧잘 화의를 보았으며, 그들은 <어령공이 정말 오시는가, 오신다면 그이는 곧 우리 아버지이니 만
나뵐 수 있을까>하며 반가와 했다고 한다.
오늘날 충주 어씨(忠州魚氏)는 충주 지씨(忠州池氏)와는 통혼(通婚)을 하지 않으며, 경기도를 비롯한 서울과 충청북도․강원도 등지에 많이 살고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충주 어씨(忠州魚氏)는 남한(南韓)에 총 825가구, 3,50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