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북유모(북경유학생의 모임,한인모임)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 중국 여행 정보&Tip 스크랩 ◈ 여행기 대동시 주변 돌아보기
김봉선 추천 0 조회 230 07.05.30 22:4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山西省 大同

           불교 4대명산의 하나 五臺山

              목탑의 진수 應縣木塔

          벼랑에 걸린 懸空寺

     중국 3대 석굴의 하나 云岡石窟




 

 

 

 

 

 

 

 

 

 

 

 

입장하기

 북경에 처음 온 06년 3월 몇몇 분들이 토요일 일요일을 통해 버스를 대여해서 대동을 간다고 했다. 나 역시 가고픈 맘이 굴뚝같았는데, 다른 일이 겹쳐서 동행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맘속으로 벼르기만 했지 실제로 가보지 못한 대동이었다. 그런데 올 5월 노동절이 막 시작하려는 시점에 다시 대동행이 추진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나에게는 맞지 않는 시간계획이었다. 마침 노동절이 시작되면서 하영이와 지민이가 30일까지 학교를 등교하게 되었다. 하영이는 졸업시험과 겹쳐서 더군다나 학교를 빠질 수가 없었다. 보통 때 같으면, 칭지아(請暇)를 신청하고 갈 수도 있겠지만, 시험이라 어찌 다를 방도가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분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한채 노동절을 맞았다. 그래도 이번엔 내 기필코 대동의 현공사와 운강석굴을 보고야 말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노동절 전에 신문에 많은 여행사상품이 즐비하게 나왔다. 그 중에 한 두 곳을 스크랩하여 전화상으로 문의를 하니 어느새 5월1일자 출발은 마감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맘에 30일 발품을 팔았다. 집에서 가까운 몇 곳을 찾아 나섰다. 마침 왕징따샤의 cits여행사에 5월2일에 출발하는 상품이 있었다. 요금은 680위앤이었다. 2박3일 일정이고 버스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요금은 그다지 비싸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버스를 이용하는 것이 조금은 맘에 걸린다. 장시간 버스를 타야 한다는 것이 아이들에게 부담이 될 수 있기에. 일단 계약을 하고 돌아온다. 5명, 성인 기준으로.

 Tips ; 오대산 1

 화북의 지붕(華北屋脊)>에 자리잡고 있는 오대산은 산서성(山西省) 동북부, 태원시(太原市)와 230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오대산은 사천 아미산(四川峨眉山), 절강 보타산(浙江普陀山), 안휘 구화산(安徽九華山)과 함께 중국의 유명한 불교 4대 명산(佛敎四大名山)으로 불리운다.

 오대산은 대회진(臺懷鎭)을 중심으로 하여 주위에 동, 서, 남, 북, 중 다섯개 봉우리가 둘러쌓여 있고 5峰의 이름은 솟아있는 모양이 흙을 층층이 쌓은 臺와 같다 하여 불리운 이름이다. 이곳에는 산들이 첩첩하고 골짜기들이 여기저기 있으며 시내물이 흐르고 수목이 우거졌다. 기후가 아주 독특한바 제일 추운 곳은 해마다 추울 때는 결빙하고 제일 더운 곳은 겨울에 얼음이 얼지 않으며, 일년 가도 서리가 내리지 않으며, 한해 기온차이가 아주 크다. 5대산은 산봉이 높아 무더운 여름철이면 기후가 시원하므로 <청량산(淸凉山)>이라고도 불린다.

기이하고 험준한 절벽과 하늘을 찌를 듯 치솟은 고목들, 은은한 구름바다, 금빛휘황한 사찰건축들은 오대산의 기이하면서도 화려한 경관을 형성한다. 더운 여름날 북대(北臺) 정상에 올라 멀리 바라보면 천개의 봉우리가 아름다움을 이루고 구름바다가 뒤번진다. 어떤 때에는 보기 힘든 기이한 경관도 나타난다. 산 밑에선 큰비가 오나 산정에는 햇빛이 강하고, 산 밑에는 녹음이 우거졌으나 산정상에는 백설이 덮여 있다.

오대산의 현존 사찰은 47곳, 그중 남선사(南禪寺)와 불광사(佛光寺)는 당(唐)나라 때 세워진 것으로 중국의 현존하는 제일 오랜 목조구조의 건물이다. 이 사찰은 기세가 웅장하고 조각이 정교하여 역사의 빛을 더해준다. 이런 우아한 예술진품들과 진귀한 자료들은 중국 고대 종교와 건축예술 발전의 역사를 보여 줄뿐만 아니라 천 여년이래 중화민족의 문화예술의 정수가 깃들어 있기도 하다.

출처:http://korean.cri.cn


5월 2일-첫째 날

 2일 아침 서둘러 집을 나선다. 지하철 2호선 崇文門역까지 가야한다. 이곳에서 버스가 출발하기로 했다. 오전 6시 30분까지 가면 바로 출발하기로 되어 있었다. 우리는 시간여유를 두고 도착했다. 택시 한 대를 타고 갈 수 있어 다행이었다. 집 앞에서 택시를 타는데 이른 아침이어서 그런지 택시기사가 5명 타는 것을 흔쾌하게 허락해준다. 출발부터 시작이 좋은 셈인가? 택시비가 42원이 나온다. 45원을 주면서 많지 않지만 잔돈을 받지 않았다. 기사에게 “고맙다”는 말과 함께 미소를 전한다.

 어느새 버스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도착을 하여 자리를 잡고 있다. 6시 30분이 되었는데 한 사람이 미도착이다. 약 10여분 늦게 도착한다. 버스는 예정된 시간을 10분 늦게 출발한다. 북경시의 서쪽 경계선을 빠져나가 고속도로를 탄다. 석가장으로 가는 고속도로이다. 휴일이라 그런지 제법 차량들이 많다. 그래도 막힘은 없다. 국내처럼 휴일 때 여기저기 막히는 현상은 벌어지지 않아 다행이다. 또 집사람이 걱정하던 버스의 좌석간 간격리도 제법 넓어 큰 불편은 없다. 버스 좌석이 좁으면 장거리 타고 가는데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이전에 스마타이 장성갔다 올 때는 버스가 소형이어서 좌석간 간격이 좁아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이 불편했었다. 

 

 버스는 고속도로를 잘 달린다. 약 2시간가량 달려서 휴게소에 잠깐 선다. 버릴 것도 좀 버리고 바람도 좀 쐬고, 날이 제법 덥다. 차 안이라서 몰랐지 밖은 기온이 높은 편이다. 다시 올라 버스는 달린다.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保定이라는 시내로 들어간다. 이제부터는 고속도로가 아닌 국도를 타는 모양이다. 한참 시내를 빠져나와 조금 외곽도로를 달린다. 보정이라는 곳은 대추가 유명한 모양이다. 대추를 알리는 간판이 제법 있다. 이 보정외곽을 달리는데 길은 1차선 왕복도로이다. 길은 곧게 길게 뻗어 있는데, 좁으니 맘껏 달리지를 못한다. 앞으로 옆으로는 경운기 같은 것이 앞을 막기도하고 더러는 화물차가 속도를 내지 못하면서 우리 버스의 앞길을 막는다. 아무래도 기사가 조금 불편하겠다. 상황 되는대로 추월을 하고 크랙숀을 자주 울려댄다. 이 보정을 지나는 길 양옆으로는 딸기를 파는 상인들이 종종 눈에 보인다. 이 동네가 딸기가 주산지인 모양이다. 조금 더 가니 양 옆으로 복숭아 과수원이 많이 보인다. 복숭아도 이곳이 주산지인 모양이다. 이 길은 가로수가 특이하다. 백양나무라고 불리는 미루나무가 길 양옆으로 빽빽이 들어서 있다. 그것도 두 줄로. 크기도 비슷한 나무들이 도로를 감싸고 있는 것이다. 아름답다고 해야 하나. 멋지다고 해야 하나. 암튼 제 속력을 내고 달리지 못하는 것이 아쉬움이지 길의 풍경은 참으로 좋았다. 이렇게 추월하다 또는 뒷차를 따라 천천히 가기를 반복하면서 차는 말없이 달린다.

 내가 알기로는 오늘 저녁을 스스로 해결하는 것으로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점심이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었다. 저녁은 오대산 식당에서 먹게 되어있었다. 난 잘못알고 있어 점심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우리는. 차 안에서 군것질을 하긴 했지만, 아이들도 왜 점심을 먹지 않나 하고 의아해 했다.


 애초의 계획은 첫날 대동으로 가서 운강석굴을 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정을 바꾸어 운강석굴을 마지막 날 보고 첫 날은 오대산으로 가서 사찰을 보는 것이다. 첫 날과 마지막 날의 일정이 맞 바뀐 것이다. 오대산까지의 운행시간은 7시간이 넘는다. 우리가 오대산에 오후 1시 30분경에 도착했으니 꼬박 7시간 버스를 탄 것이다. 오대산으로 가는 길은 순탄한 길은 아니었다. 밖으로는 민둥산이 보이고 돌산이 보인다. 돌산을 깨서 돌을 나르는 트럭과 우리의 경운기 같은 작은 차들이 수시로 오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길옆으로도 돌을 채취하는 공사현장이 많이 있었다. 그 탓인지 뿌연 먼지가 온 동네를 뒤 덮고 있다. 오대산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면서는 주변의 석탄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탄광은 아니지만 군데군데 검은 석탄을 쌓아놓고 판매하는 곳이었다. 말하자면 중간 처리장이라고 할까. 요즘말로 하면 중간 물류창고 정도 되나 모르겠다. 석탄이 많이 있지만, 주변은 그다지 지저분해보이지 않는다. 동네의 광고는 석탄 판매 한다는 것과 석탄 채집기 광고가 대부분이다. 지금은 구시대의 자원인 석탄이 아직도 이곳에서는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 이채롭다. 아니 한국에서도 고유가로 인하여 다시금 연탄난로가 인기를 끌고 있다는 점을 보면, 지금의 이 환경이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언젠가는 저 검은 자원에서 벗어나겠지만, 다시 찾게 될지도 모르니까.


 오대산이 70km 남았다는 이정표를 보니 다 온 것 같다. 앞에 산이 보이니 이곳이 오대산이 아닌가 싶다. 버스는 커다란 산 하나를 넘는다. 그리고 다시 평지로 내려선다. 그렇게 산 하나를 넘고 평지에 이른다고 했는데 이곳이 해발 1500m 이상은 되는 곳이다. 오대산 정상이 3058m 라고 하는데 우리가 도착한 오대산 자락은 해발 1,600m 라고 한다. 오대산 입구에 이르기 전에 버스는 다시 한 번 정차한다. 배설을 위한 정차이다. 주유소 옆에 차를 정차한다. 작은 간이 화장실이 있다. 보지 않아도 그 내부가 어떨지 상상이 가는 곳이다. 나를 비롯한 남자들이야 대강 적당한 곳에서 용변을 보지만, 어디 여자들이야 그런가. 사실 화장실이라고 해도 크게 가려지는 곳도 아니지만. 이렇게 잠시 휴식을 취하고 다시 버스를 달리니 오대산 입구가 나온다. 커다란 대문이 있다. 그 옆에 매표소도 있고. 매표소에서 가이드 아가씨가 표를 사러 가고 우리는 내린다. 표를 확인하고 지하철 개찰구식으로 된 출입문을 통과한다. 그리곤 버스는 버스 나름대로 통과한다. 입장문을 통과하여 다시 버스에 오른다.


 이 오대산 입장문은 많은 절들이 있는 곳보다 한 참 아래 위치해 있다. 이곳에서 최초로 보게된 鎭海寺까지는 거리가 10여km 정도 된다. 이전에 가 보았던 황산이나 화산처럼 산이라고 하면 좀 절벽도 있고 나무도 있고 그런 산을 기대했는데, 이번에 본 오대산은 정말 산 같지가 않다. 앞에 보이는 등성이에는 나무도 많지 않다. 큰 나무도 보이지 않는다. 무슨 산이 이런가 싶다. 말 그대로 민둥산이다. 이런 산 자락 속에 절은 자그마치 108개 정도나 있다고 한다. 한 다리 건너 절이다. 우리네 절이라 하면, 깊은 산 속에 조용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생각이 앞서는데, 이곳에서 보는 절은 아니올시다이다. 첫 인상부터가 절 같지 않다는 생각이다. 왜 그럴까. 입구에서 버스를 타고 조금 오르니 제법 넓은 터가 있다. 이곳이 진해사 앞의 주차장이다. 왼쪽에 언덕에 진해사가 자리잡고 있다. 진해사를 알리는 표지가 흰 벽에 제법 크게 적혀있다. 그 주변에는 수령이 오래되어 보이는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한참이나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다. 그리곤 진해사로 오른다. 오르니 역시 입장료를 다시 낸다. 4원한다. 앞에서 두 스님인 듯한 청년 두 세사람이 표를 한 손에 쥐고 있고 가이드와 함께 입장하는 머릿수를 헤아리고 표를 가이드에게 준다. 철저하게 센다. 한 두사람의 미꾸라지도 없을 것 같다. 허허 절이 제법 엄격하다. 아무래도 수입과 관련이 되니 그러겠지. 조금은 허술한 면도 보였으면 하련만……. 내 생각만 이런가?


 절의 첫 인상은 정겹다거나 푸근함을 주지 않는다. 그저 조금은 을씨년스럽고 음침하다고나 할까. 암튼 반가운 것은 아니다. 7시간의 버스여행을 마친 후 처음 만나는 절이다. 가이드를 따라 이곳저곳을 다닌다. 이곳 사람들이 일행을 맞아 설명을 한다. 사실 긴 설명을 죄다 알아들을 수 없음에 우리는 따로 행동하기로 한다. 우리가 보고싶은대로 먼저 가기도 하고 뒤쳐져 가기도 한다. 사진도 찍고.

 진해사는 오대산 대회진 남쪽 청수하의 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 즉 앞쪽으로 淸水河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진해사 일주문 앞에 이르면 앞으로 보이는 산등성이가 있다. 앞을 턱 하고 가로막는 것이다. 대회진에서 약 10리정도 떨어져 있고 해발 1,600m이다. 이 진해사는 두 마리의 용이 구슬을 물고 있는 풍수지리상으로 아주 좋은 寶地이다. 좌우 양측으로 산봉우리에 둘러싸여 있다. 마치 두 마리의 용이 川 아래로 날라와 내리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절은 두 산이 합쳐져 내려오는 한 곳의 돌산 입구에 자리 잡아 지어졌다. 주변에는 제법 큰 老松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노송사이를 걷노라면 마치 솔잎의 부딪치는 소리를 들려오는 것 같다. 절에 올라 사방을 돌아보면, 먼저 남측으로는 산봉우리가 있는데 이곳은 삼나무와 양나무가 빽빽하고 자라고 있으며, 북측의 산봉우리 꼭대기에는 천년고송이 바위사이를 뚫고 자라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곳은 오대산 풍경구중의 한 곳으로 농염하고 비색 창연한 고송의 그림자가 산사를 감싸고 있는 오대산 사찰군의 작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진해사의 입구는 작다. 흔히 절의 대문은 일주문이거늘, 이런 문이 없다. 절 현판이 있는 작은 문을 들어서면, 가운데 불상이 하나 있다. 사진도 찍지 못하게 한다. 이 불상을 중심으로 좌우로 사람들이 들어가며, 다시 이 좌우 벽에 흔히들 있는 무서운 얼굴을 한 귀신조각들이 있다. 이 출입문을 지나면 바로 앞에 대웅전이 있다. 대웅전이라고 해야 크지도 않다. 내부에 불상을 모셔놓고 있으며, 각 불단 앞에는 몇 가지 음식들이 차려져 있는데, 이 진해사의 공통점은 모두가 인스터트 음식이라는 것이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캔종류의 음료수이다. 이 캔을 여러 층 쌓아놓고 있다. 이곳 불상들은 인스턴트 음식만 좋아하나보다 하고 우스개 소리로 집사람과 농담을 나누기도 했다. 이 대웅전을 옆으로해서 좌측으로 담을 통하여 들어가면 앞에 커다란 탑이 하나 자리하고 있다. 흰색의 탑이다. 흔히들 이런 탑을 백탑이라고 하나. 그러나 탑 아래는 팔각을 이루고 있지만, 위로 올라가면서 원형을 이룬다. 그리고 각 단에는 다양한 색으로 채색을 하였다. 각 벽에 작은 불상들이 조각되어 있고 그 주변도 채색을 아름답게 하였다. 다만 시간이 오래되어 조금 낡은 모습을 보이긴 하지만 말이다. 탑 이름은 정확하게 章嘉活佛塔이다. 스님의 이름을 딴 것 같은데, 정확하게 설명을 듣지 않아 모르겠다. 대략 들려오는 이야기로는 강희제가 어쩌구 저쩌구 한다. 이 탑의 기단에는 알아볼 수 없는 글씨를 적은 손수건 모양의 종이가 많이 붙어 있다. 우리가 산에 올라 열쇠뭉치가 걸려 있는 것처럼 무수히도 붙어 있다. 글씨는 아랍글씨인지? 이슬람글씨인지? 아마도 복을 비는 한 종류이겠지. 이 탑을 돌아 다시 앞으로 나가면 작은 불전이 하나 있고 그 앞 좌우로 커다란 소나무가 두 그루 있다. 하나는 長壽松이고 하나는 生子松이다. 나무의 굵기는 대략 어른의 한 아름정도 된다. 높이도 제법 높고, 나무 기둥에 오색의 천이 둘러져 있다. 빨강 파랑 노랑 흰색 등. 장수송을 쓰다듬으면 오래 살 수 있다고 하고, 생자송을 역시 어루만지면 득남할 수 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나무란다. 관람객 모두가 한 번씩은 어루만져보고 쓰다듬어보고 간다. 장수송은 대부분 어르신들이 만져보고, 생자송은 가만 보니 여자분들이 만져보고 간다. 정말 오래살고 득남할 수 있을 것인지?


 이 장수송을 보고 다시 담을 하나 넘어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제법 넓은 공터가 있다 .이 앞에 역시 알 수 없는 글씨가 새겨진 비석 같은 푯말이 있다. 이 푯말 뒤에 다시 불전이 하나 있으며, 이 불전을 통해서 나가는 문이 된다. 이 공터 담장을 아래로 화장실이 하나 있다. 이 불전의 마당 기둥에는 이런 저런 글귀들이 적혀있다. 이를테면, 한끼 식사는 불심을 잊게 한다 등. 이 절의 규모는 크지는 않다. 옹기종기 각 건물들이 모여 있는 듯하다. 또 각 불전 앞에는 크고 작은 공덕비들이 있다. 무슨 공덕비가 이리도 많은지. 이곳 오대산 사찰들의 공통점이 이 공덕비가 많다는 점일게다. 그 내용을 자세하게 읽어보지 못하였지만 아무래도 각 절에 대한 이런저런 공을 들인 것이겠지. 들어오는 곳과 달리 나가는 문에는 여자 셋이 지키고 서 있다. 이곳을 통하여 입장하는 사람들도 있나 보다. 우리는 가이드 일행보다 앞서 둘러보았다. 그래서 장수송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 온 문으로 나가겠거니 하고. 그런데 가이드가 우릴 찾으러 왔다. 어느새 일행들은 나가는 문을 통하여 내려간 것이다. 우리는 가이드를 따라 열심히 내려간다. 밖에서 보는 절 담장은 높아만 보이기보다는 어딘가 모르게 허술해 보인다. 담장 아래로 자리 잡고 있는 화장실에서는 그 귀한 냄새가 진동을 하고. 조금 내려오니 작은 건물이 또 있다. 이 건물들로 들어간다. 내부는 어둡다. 작은 촛불들이 켜있기도 하고 한쪽으로는 장막이 쳐져 있다. 헤치고 들어가 본다. 우리 일행들도 다른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다. 벽면에는 불상들이 있고 절을 할 수 있도록 다른 불전처럼 음식도 마련되어 있다. 그 가운데 젊은 중이 한 분 앉아 있다. 그리곤 사람들은 한 사람씩 접견을 하는 것 같다 손을 펴보면서 작은 실 하나를 주면서 어떤 사람은 오른쪽으로 어떤 사람은 왼쪽으로 가라고 한다. 일종의 큰스님 접견하는 식인 것 같다. 그 젊은 스님 옆으로 있는 공간에는 지시해 준 방향으로 관람객들이 들어간다. 가만 옆문으로 보니 그 공간에는 각종 절 관련 물건들을 파는 것이다. 이 젊은 중이 뭐라 말을 하고 방향을 일러주면 그리 가서 사람들은 향이며 각종 절관련 물건을 사는 것이었다. 그 대금은 불전함에 넣는다. 어떤 이는 200원이 되기도 하고 그 이상도 이하도 되는 모양이다. 사람들이 그렇게 절에 대하여 시주형식으로 하는 것 같다. 내가 가만 보니 상술이 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중국사람들이야 어찌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긴 신앙이 깊어 무언가 절에 대하여 시주를 하고픈 마음이 있다면 그 액수가 문제가 되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이 과정을 통과하면서 기도를 하고 자신의 소원을 기원하는 모양이다.


 이 진해사를 내려오는 길목에 역시 큰 노송들이 있다. 해가 저무는 시간이 다가오면서 하늘이 조금은 흐려지는 것 같다. 바람도 제법 분다. 우리는 다시 버스에 올라 다시 왔던 길을 내려간다. 아까 오면서 자세히 보지 못한 부분을 이번에 창밖을 통하여 자세하게 보고자 한다. 관광지라서 그런지 대부분 식당이고 호텔이다. 무슨 호텔이 이리 많은지. 크고 작은 식당들도 즐비하다. 이번에 우리가 가는 곳은 普化禪寺이다. 아까 말한 청수하를 건너 산 아래 자리 잡고 있다. 진해사보다는 그 규모가 크다. 절 앞의 작은 다리를 건너 입구에 이르니 보화선사라고 적힌 커다란 담장이 있다. 담장이라기보다는 현판이겠지. 이 보화선사의 입장료금은 없다. 무료이다. 그래서 가볍게 들어가는 모양이다. 원래 계획에 없던 것 같은데, 시간을 만들기 위하여 가이드가 일정에 포함시키는 것 같았다. 이 절은 그냥 자유스럽게 개별적으로 구경하게 한다. 절 입구에서는 여러 잡상인들이 있다. 알 수 없는 열매를 많이도 판다. 물어보니 뭐라곤 하는데, 머릿속에 저장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 값이 비싸다. 한 근에 15원이나 하니까. 중국인들은 조금씩 잘도 산다. 생전 보도 못한 열매인지. 뿌리인지.


 첫 관문인 들어가는 문은 가운데 3개의 문이 있다. 그중 가운데 문만 이용한다. 그 앞마당에는 사자 두 마리가 지키고 서 있고. 제일먼저 다가오는 불전은 천왕전이고 이어서 대웅보전, 삼불전, 와불전 이 일직선상으로 연결이 되어 있고 그 좌우로 작은 전각들이 있다. 주로 현지 거주하는 스님들의 행랑채인가, 관람객들의 출입을 금지하는 푯말이 적혀 있다. 천왕전 오른쪽으로는 손님을 맞을 수 있는 客房이 마련되어 있다. 이곳에서 투숙도 가능한 모양이다. 그 둘레를 살펴보니 연탄흔적이 남아 있다. 아직 이곳의 난방재료는 연탄인 모양이다. 이 보화사의 가장 뒷자리에는 와불전이 있다. 폭 12m, 길이 37m의 불전인데, 내부에 누워있는 불상이 있다. 그리하여 와불전이라고 한다. 이 와불전은 원래 이름이 옥황각이었다고 한다. 이 와불전에서 내려다보는 보화사의 지붕들은 절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지 않는다. 거무티티한 색이 일단 맘에 들지 않는다. 처마 안쪽으로는 채색도 하고 해서 절 다운 맛이 나긴 하지만 외형으로만 보면 절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저 규모가 큰 일반 집이라고나 할까. 그렇지만 내부는 오밀조밀하게 잘 만들어 놓았다. 처마의 채색이며, 조각 등이 제법 멋지고 아름다움을 갖게 한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들어가 보니 臥佛居라는 곳이 있다. 가만 현관으로 가보니 이른바 호텔이다. 이곳 관람객들이 묵을 수 있는 숙소인 것이다. 다시 이곳을 나와 주변을 돌아본다. 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는 건물들이 있는데, 그 외부는 무척이나 낡아 보인다. 창살도 그렇고 문도 기둥도 모든 것이 색이 바래고 낡아 보인다. 금방이라도 주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겠지. 단지 손질을 덜해서이겠지. 마당 한가운데는 우물도 있다. 펌프가 설치되어 물을 사용할 수 있나 보다. 경내에는 나이 드신 스님도 보이고 동자승도 보인다. 동자승은 얼굴이 거무잡잡하다. 우리가 국내의 절에 가서 보면 동자승이 조금은 애처로와 보이기도 하지만 나름대로 풍기는 분위기가 있어 감히 범접하지 못할 것 같은데, 이곳에서 보는 동자승은 동자승인지 아닌지 잘 모르지만, 일단 동자승이라고하고 보면, 애처러움도 있지만, 왠지 모르게 측은한 맘이 간다. 왜 그럴까? 또 한 마당에는 맷돌 같은 큰 돌이 하나 있었는데, 그 위에는 쌀알아 흩어져 있었다. 누군가 일부러 그래놓은 것인가. 내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 절이니까. 날짐승들 모이로 남겨놓은 것이라곤 했지만, 맞는지 모르겠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데. 이 절에는 각 건물마다 노란딱지로 해서 건물 이름을 적고 책임자가 적혀져 있었다. 건물 관리를 잘 하는 모양이다. 

 Tips; 오대산 2

 오대산은 산서성 동북부에 위치하고 있다. 최고높이는 3058m이다. 산 주위가 무려 250km이다. 다섯 봉우리가 있는데 각 봉우리는 평탄하고 넓은 편이다. 중국북부의 중심산맥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 오대산이며, 국가급 관광구이기도하다. 오대산은 중국 4대 불교명산중의 하나이다. 불교가 흥성한 곳이기도 하며, 문수보살이 이 오대산에서 설법을 한 도장으로 유명하다. 또한 불교신도와 기타 도교 유교 신도들이 자주 찾는 곳이 오대산 사찰 群이다. 오대산은 문물이 다양하고 역사가 유구하며, 현재 존재하는 사찰이 100여곳이 넘으며, 당나라부터 시작하여 송, 원, 명, 청대에 이어 민국에 이르기까지 고대 건축의 집합지이기도 하여 고도의 기술과 예술적 가치가 있는 곳으로 중국역사문화유산의 보고이다.

 오대산의 봉우리는 흔히 臺라는 글자가 붙는다. 이름하여 東臺頂(望海峰), 北臺頂(葉頭峰), 西臺頂(挂月峰), 南臺頂(錦綉峰), 中臺頂(翠岩峰)이다. 그리하여 5대 봉우리가 이 東臺, 北臺, 西臺, 南臺, 中臺이다. 가장 높은 봉우리는  北臺로 높이가 해발 3058m 이다. 다음이 中臺로 해발 2893m, 다음이 西臺로 2773m, 南臺는 2474m이고 東臺는 2795m이다.

 또한 오대산은 동타이를 중심으로 하는 東臺景區, 서타이를 중심으로 하는 三臺景區, 난타이를 중심으로 하는 南臺景區, 산 중심의 九龍崗景區, 臺懷寺廟群이 있는 臺懷景區, 觀音洞주변의 懷南景區北, 淸凉寺가 있는 淸凉景區 등 모두 7개 지역으로 구분되어 진다. 그중 많이 찾는 곳이 臺懷鎭寺廟群이다. 이곳은 보화사를 시작으로 오부묘, 탑원사, 수상사, 삼탑사 등 사찰들이 자리잡고 있어 많은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자료 : 오대산 관광지도 안내문>

Ϩ


 이곳 보화사가 오늘 일정의 마지막 이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다시 아래로 움직인다. 근처의 숙소를 찾아 나선다. 숙소입구에 내려 들어가니 느낌에 제법 그럴싸한데 우리가 묵을 숙소는 그 뒤편이다. 원래 2성급이라고 했으니, 龍華賓館 앞 건물은 제법 그럴싸한데 뒷마당에 있는 별관은 별로이다. 우리가 묵을 곳은 이 별관이다. 열쇠를 받아 방문을 따고 들어가니 여태 다니던 중 최악의 잠자리가 될 것 같다. 일단 난방이 되지 않는다. 내부는 한 겨울 같다. 이렇게 싸늘해서 어찌 잔단말인가. 또 온수도 밤에 2시간동안만 나오고 아침에도 역시 그렇단다. 이런 일이……. 우리가 숙소에 들어온 시간이 대략 4시 40분 정도 된다. 이곳에서 약 1시간가량 휴식을 취하고 5시 30분에 이 숙소 식당에서 저녁을 먹기로 한다. 오늘 일정이 생각보다 일찍 정리가 된 셈이다. 방 내부가 싸늘하니 옷을 벗을 생각도 못하겠다. 이곳 오대산은 3월이 되면 모든 난방이 끊긴단다. 씻는 것도 주저한 채 잠을 잘 일이 걱정인 것이다. 난 잠시 숙소 밖을 정찰하러 나간다. 뭐 좀 볼 것이 있나 싶어 나가보는데 뭐 볼 것이 없다. 큰 길 가로 나가니 중학교가 하나 보인다. 교문은 잠겨져 있으나 학교 안에는 학생들이 많다. 교문 옆 수위실은 매점을 겸하나 보다. 가만 들여다보니 물건들이 보이고 학생들도 물건을 사기 위해 들락거린다. 이곳은 오대산중학이다. 이 오대산중학은 대만사람인 李智仁이라는 사람이 인민폐 4만위앤을 기부하여 건립된 학교라고 한다. 교문을 들어서면 큰 담장에 학교 교훈이 쓰여져 있다. 담장에는 교육은 백년대계라는 글자도 큼지막하게 적혀있다. 도시에서 보던 흔한 학교는 아니다. 운동장도 그냥 맨땅이다. 도시에서는 인조잔디를 많이 보았는데. 노동절 연휴인데 학교 안은 학생들로 붐비는 것을 보니 휴일이 아닌 모양이다. 시간도 5시가 다 되어 가는데, 아직도 교정에 학생들이 있다는 것이 좀 의아하다.

 이 학교를 뒤로 하고 숙소로 간다. 빗방울이 한 두방울 떨어진다. 비가 오려나 보다. 숙소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다. 저녁이라야 8가지 정도의 반찬에 탕 2개 그리고 밥이다. 아이들은 카레를 준비하여 먹는다. 나와 성제엄마는 그냥 주는대로 먹긴 한다. 밥에다 나물류 몇 가지 그리고 가져간 김치와 고추장으로 저녁을 든든하게 먹는다. 그렇지만 든든하게 먹어도 뭔가 허전하다. 왜 그럴까? 매번 여행에서 느끼는 공통점이다. 저녁을 먹고 잠시 숙소 앞의 슈퍼로 간다. 내일 차안에서 아이들이 먹을 간식거리와 물을 산다.


 주위가 어두워지고 날이 쌀쌀하니 거리로 나서볼 생각이 나질 않는다.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 나가 산책이라도 해봤으면 싶은데 실내가 춥고 밖 역시 쌀쌀하니 아예 포기하고 들어눕는다. 아직 더운 물이 나올 시간은 아니다. 아이들에게는 옷 입고 있는 이불 다 덮고 자라고 이른다. 우리도 다른 일 없이 바로 침대에 눕는다. 케케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왠만하면 아무소리 하지 않는 성제녀석도 오늘은 투정이 있다. 냄새가 난다는 등 춥다는 등.

 적당하게 씻고 눕는다. 일찍 자는 것이다. 종일 버스에 시달렸으니 더운 물로 씻으면 개운하려만 추운 탓에 감히 용기를 내지 못한다. 실내 기온이 차니 잠을 편하게 잘 수가 없다. 이리뒤척 저리뒤척 하면서 잠을 설친다. 내일 일정이 고될 것 같다. 성제도 집사람도 한 자세로 잠을 자지 못하고 자주 자세가 변한다. 춥다는 이야기다. 어깨가 시리고 발이 시리다. 어허 산장도 아니고 이게 뭐람. 성제 엄마 曰, “ 이번 여행은 썩 내키지 않았는데, 실제 와보니 잠자리도 맘에 들지 않는단다.” 이런 나의 선택이 훌륭하지 못한 것이 되었다.

 

 

 

 

 

 

 

 

 

 

 

 

 


5월 3일- 이틀째

 아침이 밝았다. 밤새 빗방울이 조금 떨어진 모양이다. 그러나 아침 날씨는 좋다. 신선하고 상쾌하다. 산자락이라 공기도 좋고. 오랜만에 맑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게 되는 것 같다. 오늘 일정은 6시 30분에 아침 전에 한 곳을 둘러보기로 했다. 그런데 우리는 6시 30분으로 알고 있었는데 모이는 시간이 6시란다. 우리가 약 10분정도 늦게 차에 올랐다. 다른 사람들은 어느새 차에 올라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새벽부터 미안하게 된 것이다. 다행인 것은 우리보다 늦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조금 덜 미안해해도 될 것 같지. 버스를 타고 조금 간다. 하긴 걸어갈 거리이기도하지만. 이번에 가는 곳은 五斧廟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萬佛閣이다. 절의 규모가 제법 크다. 새벽인데도 사람들이 무척이나 많다. 무슨 사람들이 새벽부터 이렇게 북적거리는지 모르겠다. 절 앞에는 커다란 화로가 있다. 중국 절의 어딜가나 공통점은 입구에 또는 전각 앞에 향을 피우는 화로가 있고 이 화로에는 항시 향이 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오부묘 앞의 화로는 크기도 클뿐 아니라 불길도 장난이 아니다. 옆으로 가면 뜨거워서 가만있지 못할 정도이다. 우리네가 동네에서 장작불 때듯이 그 불길이 거세다. 무슨 향이 이렇게 잘 타는지 모르겠다. 오부묘 입장은 무료이다. 그런데 입구 왼편에 상점이 하나있다. 들어가보니 향 관련 물품을 판다. 상자로 잘 포장된 것도 있다. 그 상자 안에는 다시 작은 상자 낱개로 들어가 있는데, 이 향을 모두 꺼내는 것이 아니라 가운데에서 한 개만 조금 꺼나 상자 밖으로 나오게 하여 불을 붙여 큰 상자 통째로 화로에 넣는다. 그리곤 모두 타게 만든다. 또 다른 상자는 우리의 작은 찻잔 만하게 연꽃모양으로 만든 초이다. 이 역시 한 두 개에 불을 붙여 통째로 던져 넣는다. 또한 연꽃 모양의 향도 크기가 다양하다. 화로 한쪽에서는 불만 붙여주는 분이 따로 있다. 참으로 대단한 열정들이다. 향를 피우면서 개인마다 다른 소원을 빌겠지. 우리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주변에서 살펴보기만 한다. 이 중국사람들은 불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향을 사서 피우는 것에 아끼지 않는 것 같다. 거금을 쾌척한다. 하긴 시주하는 것인데 무슨 손 떨림이 있겠는가. 이왕 하는 것 맘 편하게 해야지. 암튼 이 오부묘 입구는 향을 불사르는 사람들로 엄청나게 붐빈다.

 우리는 오부묘 내부로 들어간다. 역시 들어가도 붐빈다. 불전 앞에 다시 향을 피우는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불상 앞에서 절을 하는 사람들로 역시 줄을 서고 있다. 경내도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이제 막 아침 7시가 넘은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절을 찾아 소원을 비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각 불전의 불상 앞에는 엎드려 절하는 사람, 합장을 하고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다. 각 불전은 하나의 불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보통 3개 더 넓은 곳은 5개 정도가 크기가 달리 있다. 각 모양도 다르고. 우리 5명은 짧은 시간에 경내를 둘러보고 나온다. 경내 뒤뜰로 해서 한 계단 오르는 곳이 있어 가보니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스님인지 한 분이 갈 곳이 없다라고 말을 건네온다. 그 뒤로 큰 백탑이 있어 갈 수 있는 길이 있나 살펴본 것인데, 담으로 막혀 있다. 그 백탑은 다른 절의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 오부묘 왼쪽으로 커다란 일주문 같은 문이 있다. 이 문을 통해서 들어가면 탑원사로 가는 길이다. 우리는 층계를 올라 탑원사 입구에 까지 갔으나 별도로 입장표를 사야 한다. 그래서 다시 돌아 나왔다. 여기까지 보고는 다시 내려간다. 주차장으로. 주차장에 가니 우리 일행들이 몇 사람 기다린다. 그러나 버스는 보이질 않는다. 버스위치를 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일행이 두 군데로 나누어지나 보다. 일부는 오부묘 입구에 있고 일부는 아래 주차장으로 내려오고. 한참을 기다리는데 가이드가 내려온다. 벌써 만나는 시간을 한참이나 지나쳤다. 몇 사람이 가이드에게 뭐라고 한다. 우리는 가이드를 따로 오부묘 입구에서 다른 주차장으로 가 버스를 타고 다시 숙소 식당으로 온다. 이때가 벌써 8시이다. 약 1시간가량이 늦어졌다. 오늘 일정에서. 아까 주차장에 내려서 보니 저 멀리 보이는 산이 하얗게 보인다. 산등성이에 흰 눈이 아직 있는 것이다. 다는 아니지만 약간의 설산이 보인 것이다. 계절은 5월인데 저 산꼭대기에는 눈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 이곳 오대산 정상이 3천미터가 넘으니 잔설이 있을만도 하다. 나무가 우거진 산도 아니다. 또 암석이 있는 산도 아니다. 그저 민둥산이다. 그런데 흰눈과 얼음이 남아 있다. 그 흰산을 뒷배경으로 사진을 박아본다. 그러나 흰 눈은 선명하게 비추어지지 않는다.


 아침을 먹고 9시에 다시 숙소를 나와 두 번째 날의 일정을 시작한다. 이번엔 새벽에 갔던 그 주차장이다. 바로 앞에 殊像寺라는 절이 있다. 수상사 입구를 오르면 바로 왼쪽에 望佛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이 정자는 1948년 3월 23일 모택동, 주은래, 임표 등이 다녀갔다는 표지석이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표지석 앞에서 기웃거린다. 푸른색 바탕에 금색으로 수상사라는 현판을 달아 놓았다. 그리 크지도 않다. 또 작지도 않고. 이 불전이 입구는 아니다. 이 불전 좌측으로 돌아들어가야 경내로 들어간다. 또 마당 왼편에는 몇 개의 공덕비 누각이 있다. 경내로 들어가면 전면에 大文殊殿이라는 2층 지붕의 불전이 있다. 이 내부에도 역시 불상이 자리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이 불상 앞에서 절을 하고 기도를 한다. 이 문수전은 수상사에서 가장 규모가 큰 불전이다. 강희제가 쓴 편액으로 “瑞相天然”과 건륭제가 쓴 편액 “大圓鏡智”가 걸려있기도 하다. 불전의 내부 양쪽에는 오백나한상이 강을 건너는 모습의 부조가 있어 그 기묘함을 더해준다. 또한 뒷면에는 관음보살이 역시 바다를 건너는 부조가 조각되어 있다. 또 한쪽에는 誕生堂 이라는 작은 불전이 있다. 이곳에서 아기 탄생을 기도하는 모양이다. 경내는 여전히 향연기로 가득하다. 처음엔 좋은 향인 듯하지만, 너무 진하니 조금은 싫어진다. 좋은 것도 너무 많거나 잦으면 싫어지는 모양이다. 뒤이어 대자연수보전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전은 이 수상사의 끝 전각이다. 이렇게 간단하게 수상사를 견학하고 다시 나와 우리는 아침에 오른 길로 올라간다. 이번엔 오부묘 옆의 탑원사를 찾는 것이다. 저 멀리 높이 보이는 백탑을 보러 간다. 멀리서도 잘 보이는데, 궂이 가까이 갈 필요가 있을까마는. 그래도 옆에서 봐야지. 이 탑원사의 백탑이 이 오대산의 상징이라고 한다. 워낙 크고 해서 어디서나 잘 보인다.

 

 탑원사는 당대의 화엄사의 한 閣院이란다. 영락제 5년 즉 1407년에 건축이 시작되었다고 하며, 현재의 전당은 당 만력6년 즉 1578년에 칙령에 따라 건축되었다고 한다. 천왕전이 첫 전각이다. 천왕전은 바로 山門이고 이 천왕전 앞에는 좌우로 돌사자상이 서 있다. 이 탑원사 역시 1948년 4월9일에 모택동, 주은래, 임표 등이 하루 묵어 간 역사가 있어 꽤나 의미있는 절로 취급받고 있는 실정이다. 중국 현대 역사의 족적이 남아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 탑원사는 성급보호문화재라고 하는 것이다.

 입구로 들어가면 왼쪽에 몇 사람의 스님들이 자리를 깔고 이상한 자세로 절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처음은 기본적인 자세로 절을 하면서 엎드려진 다음에는 두 손을 앞으로 밀면서 엎드리는 자세로까지 갔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자세이다. 특이한 절 자세이다. 어떤 이의 말로는 이런 자세로 절을 하다가 죽는 사람들이 신강에는 있다고 한다. 진짜일까?


 아침이라 그런지 탑 주변으로는 사람들이 무수히도 많다. 건물과 건물 사이가 거의 없다. 그 사이에 불상 앞에 절과 기도를 하려는 사람들로 몇 줄이 늘어서 있다. 암튼 사찰을 가면 기도하고 절하는 사람들로 늘어선 줄을 볼 수 있다. 참으로 대단한 인내력의 사람들이다. 이 대백탑 아래에는 티벳불교에서 볼 수 있는 동으로 된 모양의 통(法輪)이 있다. 이 통을 손으로 밀치면서 탑돌이를 한다. 이 통은 사람들의 손짓으로 쉬지 않고 돌아간다. 그 손때인지 이 법륜은 반질반질하다. 그리고 그 탑 아래 벽면에는 여러 가지 부조물들이 있다. 그 부조물들은 사람들의 손길로 인하여 빤질빤질 윤이 난다. 중간 중간 파인 곳에 불상이나 다른 조각들도 있다.

 이 대백탑의 원래 명칭은 釋迦牟尼佛 眞身舍利寶塔이다. 탑의 높이가 54.37m 이다. 중국최고의 覆金飾탑이다. 이 탑은 한 개의 받침석 구조로 만들어진 탑이며, 원나라 大德5년에 시작하여 후에 몇 차례 보수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탑 밑은 팔각형태이고, 주위는 모두 회전복도식으로 33간의 방이 있다. 복도 주위에는 원통형 法輪이 모두 123개가 있다.    천왕전을 지나면 바로 조사전이 백탑과의 사이에 있다. 이 백탑 밑부분이 8각형태라고 있는데, 각진 곳마다 작은 종이 매달려 있고 또 그 종 아래에는 다양한 채색을 한 작은 불상들이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특이한 모습이다. 이 회전복도를 법륜을 굴리면서 주문을 외라고 ‘옴마니반메홈’ 이라는 주문이 여기저기 붙어 있다. 이 백탑을 뒤로 하면 大藏經閣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 이 탑원사에서 가장 큰 전각이다. 건물 폭이 25.3m, 내부길이가 13m이다. 이 대장경각은 당 만력9년에 건축되었다고 하며, 이 전각 내부에는 33층의 높이 11.3m의 華藏世界轉輪藏이 있고 전륜장 앞에는 비로사나불상, 후면에는 大佛9개가 있으며, 양 벽에는 8대 보살이 있다. 2층 경서루에는 한족 몽고족 장족 등 여러나라 문자로 된 경서가 약 2만여책이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파란 하늘 속에 올려다보는 흰색의 탑신이 잘 어울리는 아침나절이다. 오늘 날이 너무도 맑고 푸르다. 산행하기에 아주 좋은 날이다. 천천히 산행을 했으면 싶다. 그러나 우리의 일정엔 산행이 잡혀있지 않다.


 이렇게 탑원사를 둘러보고 나온다. 조금 오르면서 廣仁寺를 덤으로 들린다. 다른 사찰에 비해 이 사찰에는 인적이 드물다. 관람객도 우리 40여명 빼고는 거의 없다. 사찰내의 스님들도 보이질 않는다. 아주 조용한 사찰이다. 그냥 한 바퀴 둘러보고 나온다. 나와 만나는 앞길은 차들이 움직이질 않는다. 조금만 내려가면 큰 길인데 우리가 올 때와는 또 다르다. 이렇게 차가 많아졌다니. 우리 버스는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어느새 점심 먹을 시간이다. 조금 이른 감은 있지만 점심을 먹고 이 오대산을 떠나야한다. 멀리 이동하지 않고 주변의 식당에 들어간다. 아마도 미리 정해놓은 곳은 아닌가보다. 그냥 때 되면 아무 곳이나 적당한 곳 찾아간다. 이번 여행의 특색이다. 먹을 곳을 미리 찜해놓은 것이 아니라 그냥 그때그때 찾아서 먹는다. 버스에는 우리의 식량이 있는데, 버스가 있는 곳이 멀다하니 가져올 수도 없다. 난 점심시간에 카메라를 잠깐이나마 충전을 하고 싶었는데 계획이 빗나간다. 할 수 없지. 건전지를 아끼는 수밖에. 오후에 응현목탑에서도 사용해야 하는데 말야. 성제가 점심을 먹을 것이 없다. 별도로 볶음밥을 1인분 주문한다. 나 역시 이 식당의 것은 별로이다. 대강 먹는다. 맨밥이라도 먹어야 움직이니까.


 점심을 먹고 버스가 있는 주차장으로 이동한다. 얕은 개천을 지나가니 주차장이 있다. 이 주차장 입구에도 장마당이 열려있다. 먹을 것에서부터 각종 골동품과 기념품들을 판다. 우리는 어여 버스에 올라 이 오대산 사찰군을 벗어나고자 한다. 11시 30분에 점심을 먹고 버스에 올라 출발하는 시각이 12시 30분이다. 오대산 東台頂을 넘어가는 도로이다. 꾸불꾸불 그리고 오른쪽으로는 낭떠러지가 보인다. 해발 1600에서 시작한 운행이다. 눈 아래로 보이는 산들이 까마득하다. 그러나 산 같지가 않다. 나무가 없다. 그저 풀이 조금 있다. 그리곤 가까이 보이는 곳은 또 맨땅이다. 물줄기가 흐른 흔적이 역력하다. 장대비라도 쏟아지면 아마 큰 산사태가 날 것 같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동쪽 산 정상에는 작은 건물이 하나 보이고 오르는 짚차도 희끗희끗 보인다. 막 정상고개를 넘어간다. 푯말도 있고 몇몇 사람들이 멈추어 있다. 차량들도 서 있고, 생각엔 잠깐 내려 구경을 하고 갔으면 좋으련만, 버스는 그냥 내려간다. 내려가는 길도 꾸불꾸불이다. 그래도 버스는 잘만 달린다. 정상을 넘어 내려오니 앞에 보이는 산은 또 바위산이다. 이 오대산과는 다른 산인가? 암튼 오대산은 산으로서는 정말 빵점이다. 점수를 줄만한 건덕지가 하나도 없다. 그저 사찰이 많은 것만 빼고는. 나무도 울창하지 않고 그렇다고 산세가 절경인 것도 아니다. 돌멩이라도 있어 그 값을 하는 것도 아니다. 정말 이름 없는 민둥산이다. 그런데 이곳에 있는 절들로 하여금 오대산을 찾게 하는 모양이다. 왜 이곳이 불교 또는 도교 등의 성지가 되었을까. 내가 알 수 없는 이유가 있겠지.

 버스는 산자락으로 난 굽이굽이 길을 내려달려 평지에 이른다. 평지라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 색다른 것이 없다. 주변은 온통 흙투성이다. 협곡처럼 갈라진 구릉이 많다. 땅 위는 아무런 식물도 없다. 그저 마른 풀이 듬성듬성 나 있다. 비가 내리면 주변은 온통 황토물로 물들 것 같다. 주변은. 이런 곳은 농작물도 자라지 않을 것 같다. 하긴 둘러보니 농작물을 재배하는 곳을 발견할 수가 없다. 아무것도 심어져 있지 않은 황무지이다. 이런 주변을 한 참을 달린다. 다시 산자락을 하나 넘어 굽이길로 접어든다. 그런데 이 길은 공사중이다. 길 가장자리 가이드 레일을 설치하는 것이다. 시멘트벽으로 해서, 도로 군데군데 돌무더기가 있고 돌을 나르는 차량들이 간간이 보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도로 입구에 공사중 안내 표지도 없다. 그러면서 공사중이다. 공사에 필요한 흙더미며 돌무더기가 도로를 막고 있다. 대형버스가 겨우 빠져나갈 공간만 두고. 그런고 앞뒤로 이렇다 할 안내표지도 없다. 오가는 차량도 뜸하다. 자가용 몇 대 그리고 트럭 몇 대등이다.

 도중에 어려운 일을 맞이한다. 길 한 복판에 돌무더기가 있다. 버스내 사람들이 모두 내린다. 기사가 어렵게 통과한다. 다시 버스에 올라 달린다. 그러다 이번에도 역시 돌무더기를 만나는데 그 옆에는 작업인부들이 작업중이다. 그러나 들은 척도 아니한다. 도로를 막아놓고도 아무런 미안한 내색이 없다. 결국 기사와 사람들이 내려 돌무더기를 치우고 하여 겨우 통과한다. 그래도 남의 일처럼 보기만 할 뿐이다. 이런 개망나니 같은 경우가 어디 있는지. 여기서나 가능하지. 참 어이가 없다. 최소한 자기들의 일로 오가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면 최소한의 예의는 있어야 하거늘. 남의 일처럼 보고 웃는다. 고소하다는 식으로. 고얀놈들 같으니라고.

 이렇게 서너군데 도로 험한 곳을 통과하여 산을 넘었다. 그리하여 응현시내 가까이 접어들었는데 마지막 관문이 앞을 막고 서있다. 이번엔 아예 도로가 막혀있다 응현시내로 들어가는 도로와 우리가 산을 넘어 온 도로가 만나게 되어있는데 나가는 출구가 흙무더기로 막혀있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 가관인 것은 겨우 차 하나 빠져나갈 정도로 공간이 있는데 이곳을 포크레인이 막고 서있고 기사는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우리보다 앞선 자가용 몇 대도 역시 빠져나가지 못하고 서있다. 가이드 아가씨가 내려 관리인은 찾고 포크레인 기사를 찾아 나선다. 여기저기 살펴 찾아와서 기사가 포크레인을 빼주어 겨우 통과한다. 그러니 바로 포크레인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길을 막는다. 여기서 응현목탑을 멀지 않다. 이제 약 10km 남았다.


 응현목탑은 응현시 한 복판에 있어 보인다. 시내 중심가인 듯싶은데, 버스가 상가 앞 주차장으로 들어간다. 가만 보니 우측에 목탑이 보인다. 들어가는 입구는 보행가처럼 거리를 만들었고 좌우로 상가가 자리하고 있다. 이 보행거리 위에는 줄을 이어서 오색종이가 걸려 있다. 양 쪽의 건물은 기와지붕을 얹은 것이고 2층이다. 각 종 상가가 늘어서 있다. 보행가 끝에는 응현목탑이 우뚝 서있다. 목탑입구에 이른다. 사람들이 제법 많다. 입구에는 골동품 좌판상도 많이 있다. 이곳 표는 전자표이다. 카드식 표를 받아 응현목탑에 이른다. 이 표를 구입하면 응현목탑을 오를 수 있다. 목탑은 2층까지만 오를 수 있다. 그 이상을 오르지 못한다. 응현목탑 앞은 제법 넓다. 잔디밭이고 앞에는 흰색이 불상이 하나 있다. 그 좌우로 라일락꽃이 피어 있어 그 향기가 매우 그윽하다. 오랜만에 보는 라일락꽃이고 맡는 향기이다. 이 꽃나무 주변에서 탑을 뒷 배경으로 사진을 촬영하는 무리들이 많다.

 개찰구 입구는 기와집 형태이고 왼쪽의 벽으로는 목탑의 설명이 있다. 개찰구를 통과하면, 좌우로 작은 정자가 있는데 오른쪽 누각에는 쇠종이 하나 있다. 누각이 오래된 탓인지 받침대가 받치고 있다. 누각의 나무의 바랜 색으로 보아 그 오래됨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왼쪽 누각에는 나무 북이 누각 윗층에 모셔져 있다. 목탑은 처마지붕이 5층으로 되어 있다.

 탑 근처에 이르니 유리 상자안에 隕石이 한 조각 전시되어 있다. 요나라 때 응주경계지역에 떨어진 운석이라고 한다. 불규칙하게 청색을 띠고 있단다. 응현목탑을 건설할 즈음에 天地가 반긴 징조로 탑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뽕나무밭 물가에 탑의 건축을 축하하기 위하여 떨어졌다고 한단다. 그리하여 이 운석을 탑 앞에 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또 돌 기단 벽에는 팔괘석이 새겨져 있다. 이 팔괘석은 900여년전 요대의 유물이라고 한다. 또한 이 팔괘석 벽면위에는 雲漢石이라는 큼지막한 돌이 놓여 있다. 이 돌은 요시대 때 이 탑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발굴된 돌이라고 하며, 그 색이 청색바탕에 가운데로 흰 줄이 나 있다. 그리고 이 돌은 마치 하늘에 나있는 하나의 강 같다 하여 천한경이라는 정자를 만들어 이 탑을 보호하였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천 여년 전에 임금이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석가모니가 한 곳을 가르키면서 그곳에 가면 한 여자가 떨군 돌이 있다고 하여 문무백관이 몇 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찾아 낸 것이 이 돌이라고 한다.

 입장하니 앞에 커다란 좌불상이 있다. 높이는 약 4m정도 되는 것 같다. 어찌 사진을 한 장 박으려고 하니 못하게 한다. 나중에 내려와서 뒷문으로 나가면서 그 불상의 뒷모습만 카메라에 담았다. 그 불상의 뒷모습이 다른 불상과 다른 적삼을 입고 있었다. 그 왼쪽으로 상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가파르다. 나무계단이고 경사가 심하다. 또 어둡기도 하고 조금 키가 큰 사람은 오르다 이마를 찧기도 할 것 같다. 이 탑은 2층까지 오를 수 있게 하였다. 이전에는 6층까지 오르게 했다는데, 요즘은 탑의 안전상 2층까지만 오르게 한다. 2층에 오르니 탑 중심부에 석가모니상이 있고 두 명의 서있는 보살과 두 명의 앉아있는 보살이 있다. 모두 5개의 불상이다 이 석가모니상 때문에 석가탑이라고 했을까? 아니면 1층에 있는 불상을 보고 그랬을까?

 

 탑을 지탱하고 있는 나무들이 굵기가 대단하다. 쇠붙이를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나무만으로 하여 지탱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참 대단한 건축기술이다. 현대기술로 만든 건물과 다리가 그냥 주저앉는 지금인데 천 여년 전에 만든 나무 구조물이 아직도 건강하게 버티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은가? 나무와 나무로 만나고 이어지게 하는 그 엮음 기술은 참 대단한 것 같다. 이 목탑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있다고 한다. 2층에서 내려다보는 탑 부지는 제법 넓다. 절터라 그런가? 주변도 제법 잘 보인다. 응현시가 멀리 바라보인다. 탑의 각 층의 처마 밑에는 현판이 하나씩 있다. ‘정직’, ‘석가탑’, ‘香風花雨 ’ 등의 성어가 적혀져 있다. 밑에서 보나 위에 올라가서 보나 탑은 참으로 대단하다는 감탄이 나오게 한다. 어찌 이렇게 큰 목탑을 만들 수 있었는지 궁금하고 신기하다.

 여기서 가이드는 동행하지 않고 입장만 시키고는 다른 곳에서 기다린다. 우리는 나와 다시 주차장으로 향한다. 어느새 시간은 5시가 가까워온다. 제법 일정이 늦어진 것이다. 생각보다 탑이 주는 느낌은 대단치 않은 것 같다. 너무 큰 기대를 가지고 와서 그런가? 아님 이 탑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어서 일까? 그렇지만 오랜 세월 그 내력을 가지고 있는 탑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천 여년 동안 모진 풍파에도 견디었고 그 잦은 지진이나 벼락에도 끄떡하지 않고 버티고 있다는 것이 건축기술만의 힘은 아니겠지. 부처님의 보살핌이 있어서겠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닐까? 점점 약해져간다는 저 목탑. 잘 관리하고 지켜야만 대대손손 보존하리라. 남의 나라 것이라고 해서 마구 대할 것은 아닌 것 같다. 중국의 유산이기도 하면서 인류의 유산이기도 하니까. 이 응현목탑의 입장료금은 성인기준으로 60위앤이다. 1.4m 이하의 어린이에게는 무료입장할 수 있다. 역시 키가 크면 대접을 받을 수 없는 중국의 현실이다. 학생은 반값이다. 그리고 탑 위 즉 2층으로 올라가는데 60원의 추가입장요금이 있다. 별것도 아니면서, 고액의 입장요금을 더 받는 것이다. 꼭대기까지 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암튼 갈수록 높아만 가는 중국 관광지의 입장요금체계이다. 한 해 두 해 가면서 인상만 된다. 시설은 별반 좋아지는 것이 없는 것 같은데 말이다. 이 응현목탑의 개방시간은 하절기 7:30—17:00 동절기 8:30—17: 00 연락전화 :0349——5035244

 Tips : 응현목탑

 중국각지에는 수많은 불탑이 있다. 중국의 불교는 인도에서 전해졌지만, 중국의 불탑건축양식은 중국의 전통적인 정자와 누각의 건축특징이 결합되어 가지각색의 명탑을 형성하였다. 산서응현목탑은 중국에서 현존하는 제일 크고 제일 오래된 목조불탑이다.

 중국 북부 산서성에 위치해 있는 불궁사 석가탑은 산서응현목탑이라고도 불리운다. 이 탑은 기원1056년 요나라 때부터 건설되기 시작하여 140년에 걸쳐 전부 완공되었다. 높이가 4m나 되는 돌기단위에 세워진 이 목탑은 높이 67.31m이고 아래층 직경은 30.12m이다. 이 목탑건설에는 홍송목재가 3000입방미터에에 약 3000톤이 들었다.

 응현목탑의 구조는 한나라와 당나라 이래 민족적 특징을 가진 중루형식을 대담하게 계승한 것으로써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설계되었다. 목탑은 평면팔각형으로 되어있는데 외관으로 보면 5층이지만 층마다 암층이 설치되어 있어 실제로는 8각9층탑이다. 층마다 내외 두 바퀴의 기둥에 의해 지탱되어있고 층마다 밖에는 24개 기둥이 있고 안에는 8개의 기둥이 있다. 그리고 모든 기둥사이에 바팀목과 들보를 비롯한 여러가지 가림대가 설치되어있어 이중들보식 나무틀을 형성하였다. 탑내는 두공구조를 널리 채납하여 두공으로 들보와 기둥을 하나의 중심으로 연결시킴으로써 탑의 모든 층을 팔각형 중공구조로 만들었다. 목탑 매층의 처마밑에는 풍경이 매달려 있어 바람이 불 때면 듣기 좋은 풍경소리가 울려나온다. 전체 목탑은 호방하면서도 정교하고 옛스럽고 소박하면서도 우아해 보입니다.

 응현목탑은 건설된 지난 900여년동안 여러차례의 강한 지진을 맞이하였으나 큰 피해가 없었다. 역사자료에 따르면 목탑이 건설된 근 300년이 지난 때 진도 6.5의 지진이 일어나 그 여진이 한주일간 지속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 목탑주변의 살림집들이 전부 허물어졌지만 목탑만이 끄떡없이 버니고 솟아있었다고 한다. 최근에는 응현부근에서 일어난 강한 지진들이 거의 다 목탑에 여파를 미쳤으나 목탑전체가 흔들리고 풍경이 전부 울리었을 뿐 목탑은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   근대 중국 군벌이 싸움을 벌리는 시기 목탑은 200여발의 포탄에 명중되었으나 목탑의 전체 구조에는 이상이 없었다. 중국에서 수많은 고대 탑들이 벼락에 맞아 파괴되었지만 응현목탑은 강한 벼락에 명중되었어도 끄떡하지 않았다. 그러니 사람들은 <응현목탑을 관람할 적에 어떤 독특한 점이 있길래 이처럼 많은 재난을 피하였을까?>고 묻게 된다.

 알고보면 응현목탑의 엄밀한 과학적 구조가 여기에서 큰 공을 세운 것이다. 이를 테면 응현목탑이 강한 지진을 이겨내는 능력을 가진 것은 목탑이 여러 층의 기틀을 가지고 있는데 그 원인이 있다. 이것은 현대건물이 가지는 지진방지수단과 유사하다. 그 다음으로는 목탑에 사용된 목재는 유연성목재이므로 외재적인 힘에 의해 쉽게 변형되지 않은데다가 일정한 정도에서 원상태로 회복될 능력을 가지고 있기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목탑의 4개 암층에서 탑의 전체구조를 강화하였기 때문이다. 응현목탑의 대량 두공은 탄성을 가진 매듭처럼 강한 유연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외부의 압력을 받을 때 그 충격력을 흡수하여 감소시킬 수 있다. 하여 탑은 지진을 이겨낼 수 있는 강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벼락의 파피해를 피할 수 있는 것은 탑정에 철찰이 설치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높이 14m나 되는 철찰은 탑을 장식하는 역할을 할뿐만 아니라 벼락을 막는 역할도 하고 있다. 목탑사위에 설치된 8갈래의 쇠사슬은 벼락을 지하로 유도할 수 있으며, 바로 이러한 벼락방지시설이 있었기때문에 응현목탑은 벼락의 피해를 받지않았던 것이다.

 응현목탑은 세계적으로 가장 완벽하게 보존되고 구조가 기의하고 정교하며 외형이 가장 웅장한 고대 고층목탑으로서 중국 고대 목공들의 구조구성과 역학균형 및 지진과 벼락을 방지하는 분야에서 창조한 위대한 성과를 충분히 발휘한 건축물이다.

<자료 :http://fp.cri.com.cn/korea>

 

 

 

 

 

 

 

 

 

 

 응현목탑을 보고 버스는 다시 대동시 쪽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길은 한산하다. 양편으로 농지들이 보이고 당나귀가 앞에서 끄는 쟁기로 밭을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네는 보통 소가 쟁기를 끌고 논밭의 이랑을 갈았는데, 이곳서는 소보다는 당나귀가 보인다. 더러는 말도 보이고. 아마도 당나귀나 말이 흔한 탓인가? 밭가는 농부를 창가로 보니 이전 생각이 난다. 우리네도 지금 이맘때가 모내기철일 것이다. 이때쯤이면 소 두 마리가 끄는 쟁기를 가지고 논을 갈면서 모내기 준비를 하였다. 지금이야 기계가 있어 좋았지만, 나 살던 80년초는 쟁기질 하는 소가 동네에 몇 마리 없어 항시 사용할 날을 잡아 예약을 했어야 했다. 이 소들은 항상 두 마리가 짝을 이루어 여기저기 논과 밭을 갈러 다니곤 했다. 참으로 피곤한 일이었는데, 소들은 말없이 주인 따라 잘도 따라다녔다. 응현목탑을 떠난 시간이 근 5시가 다 되었는데도 주변은 아직 대낮이다. 이 시간에 현공사를 갈 수 있나 싶다. 약 1시간 가량을 달린다. 삼거리가 나오면서 현공사와 대동시 이정표가 나온다. 대동시는 여기서도 약 70km를 더 가야한다고 한다. 현공사는 그리 멀지 않아 보이고, 버스가 우회전을 하니 앞쪽에 흙산이 보인다. 저기 어디쯤에 있겠지 하는 추측을 해본다. 버스는 이 흙산 사이로 접어든다. 그러자 앞에 깍아지른듯한 절벽들이 나타난다. 이어서 현공사를 알리는 탑이 보이고 이 탑을 우측으로 두고 아래로 내려간다. 가만 보니 이 현공사가 있는 자리는 계곡자리이다. 물이 지나는 자리 같다. 지금이야 관광지가 되어서 건물이 있고 주차장이 있지만 그 이전엔 물이 흐르는 곳이었던 것 같다. 버스에서 내려다보니 앞쪽으로 둑이 있다. 가보지는 않았지만 그곳은 물막이를 한 댐 같았다. 사방에 높이 솟은 산봉우리는 절벽이다 .갑자기 주차장으로 내려간 우리는 어두운 곳에 내려진 것 같다. 바람도 제법 세게 분다. 아직은 해가 있어 충분히 볼 수 있는 시간이 있는 것 같다. 저 앞에 절벽 사이에 걸린 사찰 건물이 보인다. 말로만 듣고 사진으로만 보던 현공사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이다. 사진으로 볼 때는 일부분이어서 그 규모를 짐작하지 못했다. 또 절이라고 해서 제법 규모가 클 것이라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직접 보니 그 규모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벼랑벽에 서너개의 건물이 매달려 있는 모습이었다. 멀찌감치 바라보니 더 작아 보인다. 장난감 같기도 하고. 

 가이드를 따라 표를 사고 입장을 하러 간다. 매표소와 현공사 사이의 길은 작은 물이 있었고 그 물 위로 출렁다리가 작게 놓여 있었다. 이 다리를 건너면서 어찌 가만 있겠는가? 껑충 뛰어보면서 다리를 흔들어 본다. 앞에서 오는 중국 꼬마도 덩달아 뛴다. 다리는 길지 않아 그 흔들림이 강하진 않지만 그래도 흔들다리라 느낌이 다르다. 잠깐이지만 무서워하는 사람도 있고. 저 앞의 현공사 오르는 길에는 사람들이 줄지어 선 모습이 보인다. 늦은 시간인데도 제법 약 100여m는 줄지어 있다. 한 번에 사람을 제한적으로 입장을 시키고 있다. 난 우리 일행에 앞서 먼저 줄로 끼어든다. 약 15분 정도 있으니 한 무리씩 올려 보낸다. 그러다 6시가 넘으니 조금 많이 올려 보낸다. 끝물이라 그런 모양이다. 우리 일행이 거의 마지막 손님인 셈이다. 우리 뒤로 줄지어서는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오는 한 두사람이지 단체는 없다. 약 30분정도 기다려 현공사 앞의 개찰구를 통과한다. 표를 사서 줄을 서고 다시 올려 보내주면 바로 입구에서 표를 보이고 들어가게 한다. 난 표 없이 혼자 먼저 올라섰는데 들어갈 수가 없다. 마침 가이드가 표를 가지고 올라오길래 얼른 이야기 하고 들어간다. 그런데 나 혼자다. 이어서 지민이와 성제가 올라와 함께 들어간다.

 이 현공사가 매달려 있는 절벽과 앞 절벽사이에 계곡이 금룡협(金龍峽)이다. 이 현공사는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있고 별 4개의 4성급 관광지이고 산서성의 5대 관광단지 중 하나이면서 10대 절경중의 하나에 속한다고 한다. 그래서 이 늦은시간인데도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것인가? 어느새 해는 저 높은 절벽 등성이로 숨어 들어간다. 계곡에는 시나브로 저녁놀로 물들어가기 시작한다.


 현공사는 북위 태화 15년(491년)에 처음 지어졌다고 하니, 약 150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절이 매달려 있는 절벽 아래 즉 현공사를 오르는 계단초입에 제법 큰 바위가 하나 버티고 서 있다. 이 바위에는 ‘壯觀’ 이라고 크게 새겨져 있다. 이 글씨는 詩仙 이백의 글씨라고 한다. 명나라의 유명한 여행가 徐霞客 - 이 양반은 “중국에 五嶽이 있어, 五嶽을 올라보면 다른 산은 갈 필요가 없고, 만약 황산을 오른다면 五嶽을 갈 필요가 없다”고 한 유명한 말을 남겼다. - 도 이곳에 와서는 “天下巨觀”이라고 했다고 한다.
암튼 이 절은 외형적으로는 특이하긴 하다. 절벽에 걸린 듯이 하고 있는 것이 말이다. 이  현공사를 들어가는 문은 아주 작다. 개찰구를 통과하면 바로 오른쪽에 현공사라고 적힌 흰바탕의 검은색 글로 적은 작은 돌 푯말이 있고 이 푯말이 있는 계단을 몇 개 오르면 절벽왼쪽에 작은 입구 문이 있다. 철문으로 되어 있다. 보통 우리들이 사는 아파트의 현관문보다도 작다. 성인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갈 정도이니. 이 문을 통과하면 약 15m정도는 복도이다. 이 복도를 왼쪽에는 절벽을 끼고 공간이 있는데 이곳에서 기념품을 팔기도 한다. 이 길을 건너가면 1층 높이 정도 올라가는 계단이 있는데 정말 좁다, 머리도 숙이고 올라가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이마에 혹을 하나 만들기에 충분하다. 이 작고 좁은 계단을 몇 개 올라가면 우리의 원두막 같은 규모의 정자가 나온다. 이 정자 바닥에 오르내리는 출입구가 있다. 이곳에 현공사를 올라 사방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뒤에 따르는 하영이와 집사람을 찾아본다. 그리곤 어여 올라오라고 손짓을 한다. 사람들이 줄을 서고 천천히 올라간다. 한꺼번에 많이 오를 수 없다. 공간과 다닐 수 있는 통로가 좁다. 이 정자를 지나 다시 작은 통로를 통해 다른 전각에 이른다. 이 전각은 지붕으로 보면 3층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나는 길은 1층이다. 다른 전각을 둘러보고 내려올 때 3층을 지나 올 수 있게 된다. 오른쪽으로는 절벽이다. 전각을 받치고 있는 나무 기둥이 바람에 요동친다. 만져보니 흔들흔들 금방이라도 튕겨져 나갈 것 같다. 가만 기둥의 위를 쳐다본다. 쇠꺽쇠로 두 군데를 박아 고정을 시켜 놓았다. 아래를 바라본다. 그냥 바위 위에 세워 놓은 것이다. 주먹으로 툭 치면 금방 떨어져 나갈 것 같다. 가슴이 쿵닥거려 더 이상 아래를 바라볼 수가 없다. 무섭다. 겉으론 태연한 척 해보지만 맘은 떨린다. 원래 높은 곳을 싫어하는 편이라서.

 Tips: 현공사

 일반 사찰은 평지에 세운 것이지만 중국 북부의 산서성에는 벼랑끝에 세워진 사절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현공사(懸空寺)이다. 현공사는 산서성 북부의 대동시 부근에 있으며 1400년전에 세워진 것이다. 이는 중국에서 유일한 불교, 도교, 유교 3교합일의 독특한 사절이다. 현공사는 원래 <현공각(玄空閣)>이라 부르며 <현>은 중국 전통종교도교교리에서 기원되었고 <공>은 불교의 교리에서 나왔으며 후에 이름을 <현공사>라고 고쳤다. 이는 전반 사절이 벼랑끝에 걸려있는 것 같으므로 한자중 <현(懸)>과 <현(玄)>의 동음에서 불리운 이름이다. 중국 북부의 산서성에는 중국의 五嶽중의 북악인 恒山"이 있다. 이 항산의 한쪽에 특이한 모습을 한 절이 하나 있다. 이름하여 하늘에 매달려 있는" 현공사(懸空寺)라고 하는 사찰이다.

 이 현공사는 산서성 북부 대동시 부근에 위치해 있다. 지금으로부터 1400년전에 건설된 현공사는 지금까지 중국에 현존하는 불교와 도교, 유교 3교가 한 사찰에 어우러져 있는 독특한 사찰이다. 현공사는 원래 현공각(玄空閣)이라고 불렀는데, <현(玄)>은 중국의 전통적인 종교인 도교의 교리에서 유래된 것이고 <공(空)>은 불교의 교리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후 <현공사(懸空寺)>로 이름을 고치게 된 것은 전반 사원이 하늘 공중에 매달려 있는 듯, 절벽에 걸려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수많은 건축물 중에서 현공사는 아주 특이한 건축물이다. 이 특이하다는 것은 진정 직접 눈으로 봐야만 그 특이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보통상식으로는 상상하지 못한 건축방식으로 사찰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현공사는 심산협곡내의 한 자그마한 분지에 위치해 있는데, 양쪽은 높이 100여m나 되는 수직절벽이다. 절의 나무로 된 잔도를 걷다가 위를 쳐다보면 마치 지붕처럼 절벽이 위를 가리고 있기도 하다.  현공사는 마치 한쪽 절벽에 붙어있는 듯 지면과 약 50m 떨어져있는 공중에 매달려있다. 아니 깍아지른 절벽 벼랑에 붙어 있는 것이라고 해야 옳은 표현일 것이다.

 현공사의 여러 겹으로 되어있는 전각(殿閣)은 10cm 굵기의 18개의 가느다란 나무기둥에 의해 지탱되고 있고 사원이 위치해 있는 산 정상에서 밖으로 삐져나온 큰 암석은 앞으로 약간 기울어져 당장이라고 떨어지는 듯하여 보는 이의 마음을 졸이게 한다.

  현공사에는 크고 작은 망루와 전각이 40칸 있으며, 전각사이는 잔도(棧道. 절벽과 절벽 사이에 사다리처럽 높이 걸쳐 놓은 다리)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 잔도는 금방이라도 허물어질듯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어 잔도에 올라선 많은 관광객들은 누가 뭐라고 하기라도 한 듯 조심스럽게 발꿈치를 들고 숨을 죽여 걷는다. 이 잔도를 받치고 있는 기둥이 바로 앞에서 언급한 굵기 10cm의 18개의 긴 장대이다. 아래는 바위 표면에 받쳐져 있고 위로는 전각의 처마나 위의 잔도 나무아래에 걸쳐 있다. 윗 부분은 꺽쇠를 이용하여 움직이지 않게 고정시키긴 했지만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흔들 한다. 이 기둥은 길이가 각기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대략 10m 정도는 된다. 약한 바람에도 중간이 흔들흔들 요동을 친다. 보는 이로 하여금 움찔하게 만든다. 가만 잔도를 걸으면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한 위기감이 온 몸을 감싼다. 이 잔도는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삐걱삐걱 소리를 내지만 벼랑에 걸려 있는 사찰은 그 기둥이 바람에 흔들거리지만 전혀 끄떡하지 않는다. 

현공사의 건축특징에 대해 말하면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경탄을 자아내는 것은 그 기이함(奇)에 있다.  현공사는 절벽의 한 가운데 걸려있고 절벽 정상에서 삐져나온 부분은 마치도 큰 우산과도 같이 사찰을 위해 비바람을 막아주고, 산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을 막아준다. 사찰주위의 산봉우리들은 햇빛을 가려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때문에 여름이라고 할지라도 현공사가 햇볕에 직접 노출되는 시간은 하루 낮시간에 겨우 3시간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이 또한 자연의 이기를 충분히 이용한 건축상의 아름다움이 아닐지? 나무구조로 된 현공사가 근 천 오백여년이라는 세월을 겪으면서도 훌륭하게 보존되어 있는 것도 빛에 노출되는 시간이 적은 것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다음으로는 현(懸), 즉, 매달려 있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현공사가 그 밑에 받쳐진 18대의 나무 기둥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나무 기둥들 중에는 힘을 전혀 쓰지 않는 기둥도 있다. 진정으로 사찰을 지탱하는 것은 암석에 박아둔 횡목비량(橫木飛梁)이다. 이런 횡목비량은 현지의 솔송나무를 방형목량으로 가공한 후 굳은 암석에 수평으로 구멍을 내어 깊이 박아 넣은 것이다. 동유를 먹인 횡목비량은 흰개미의 침식을 막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부식도 방지할 수 있다. 물론 현공사을 바치고 있는 입목(立木)도 전체 사원이 공중에 떠 있게 하는데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현공사를 받치고 있는 18대 기둥의 모든 낙착점은 정밀한 계산 끝에 정해진 것이라 일부는 사찰를 받쳐주는 역할을 하고 일부는 건물의 높낮이의 균형을 맞추어 준다.

 현공사의 다른 한 특색은 교묘(巧)하다는 것이다. 이는 주로 사찰 건설 초기 현지의 지형에 근거하여 절벽의 자연 상태에 따라 사찰을 세운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를테면 사찰에서 가장 큰 두개의 건물 중의 하나인 삼궁전은 바로 절벽의 공간을 이용하여 건설되었다. 말하자면 삼궁전 앞 부분은 나무로 건설한 전각(殿閣)이고 뒤에는 암석에 넓은 동굴을 파서 전당을 보다 넓게 만들었다. 현공사의 기타 전당은 모두 작고 아담하며, 전당안의 조각상도 상대적으로 작다. 그리고 전당의 분포도 아주 재미있다. 이런 전당들은 산세에 따라 건설되었는데, 대칭되면서도 변화가 많다. 관람객들은 잔도에 들어서면 마치 신비한 궁전에 들어선 듯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기 어려운 정도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옛 사람들이 사찰을 절벽에 매달리게 지었는지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다. 과거 오늘날의 현공사가 위치해 있는 산기슭으로 강물이 흘러 지났는데, 폭우가 내릴 때마다 홍수피해가 생기곤 했다. 당시 사람들은 이런 홍수피해가 금용(金龍)의 장난에 의한 것이라고 여겨 탑을 세워 그 용을 누르고자 현공사를 세웠다. 그러나 당시 오늘날의 현공사가 있는 밑 부분의 공간이 교통 요충지였기에 옛 사람들은 사찰을 절벽에 매달리게 짓는 방법을 생각해내게 된 것이다. 교통요충지의 공중에 사찰을 지은 것은 또 신자들이 사찰을 찾는데도 큰 편리를 제공했다.

 현공사의 잔도석벽에는 <공수천교>(公輸天巧)란 네 개의 큰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현공사의 건축기교를 칭송하는 것이다. <공수>는 지금으로부터 2000여년 전의 공예가인 공수반으로서 중국 건축공예가들이 공인하는 조상이다. 이 네 글자는 공수반과 같은 재능이 있는 공예가만이 이런 건물을 만들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출처:http://korean.cri.cn/chinaabc/chapter16/chapter160306.htm>

 

『이 절은 거의 수직절벽에 사각형의 구멍을 파서 그 구멍에 나무를 수평으로 꽂아 버팀목을 만들고 그 위에 판자를 걸쳐 받침대를 만든 후에 이를 기초로 하여 건물을 세운 것이라고 한다. 그리곤 수직으로는 나무기둥을 받쳐 그 하중을 견뎌내게 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이렇게 가로의 나무 받침대만을 기초로 하는 건축물은 구조적으로 불안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건축물들은 하중을 줄이기 위한 설계가 반영되었다. 중량이 많이 나가는 대들보는 생략되거나 최소한으로 설치되었고 기둥과 대들보가 하나의 구조로 결합되었다. 지붕을 받치기 위한 공포도 하중을 줄이기 위하여 생략되었다. 이렇게 공포가 생략되자 양쪽 두 기둥 사이 가운데 지붕 하중을 지탱하기 위하여 난간의 중간 기둥을 길게 위로 올려 중간 지붕의 서까래를 받치게 하였다. 그리고는 세로의 긴 지지대를 전체 건축물 아래 가로 받침대에 수직으로 세워 전체 건축물 하중에 대한 기초적인 보강을 하였다. 건축물이 비교적 절벽의 공간 밖으로 크게 돌출된 곳에 세워진 누각은 팔작지붕인데 박공이 개방되어 있고 누각의 네 벽은 벽문이 없는 터진 공간으로 처리되었다. 이는 바람의 저항을 피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전반적인 지붕은 용마루 양쪽의 치미, 그리고 내림 마루의 시작과 끝에 정교한 용머리 장식을 배치하였고 또 마루부분에는 꽃과 기하학적인 식물의 잎과 줄기로 장식된 마루기와를 사용 한껏 멋을 부렸다. 기와는 황실에서나 사용하는 황금색 유리기와를 사용하였으며, 또 지붕 끝단에는 봉황 무늬와 귀면 무늬의 암. 수막새를 푸른색 유리기와로 색을 달리 사용하여 대비의 효과와 함께 산뜻한 마감미를 준다. 내림마루선을 따라 가장 길게 뻗은 서까래의 끝에는 용머리 장식의 토수를 달아 빗물에 의한 서까래의 부식을 방지하였고, 그 끝에는 풍경을 매달아 장식을 더 하였다. 처마마루 끝부분 위의 잡상은 한 개씩만을 남겼는데 마루의 길이가 짧아서 인듯하다. 전반적으로 나무 건축물에 비해 지붕의 장식에 많은 신경을 쓴 것 같이 보이는데 아마도 절의 구조상 지붕을 내려다보는 부분이 많아 이렇게 지붕에 멋을 많이 부린  하다. 또한 절벽의 기복에 따라 층층이 건축한 건물들을 절묘한 배치로 돌아들고 나오게 연결하였다.
절의 가장 높은 부분은 三敎堂이다. 지상에서의 높이가 60여 미터에 달한다고 한다. 통로가 좁고 난간의 높이가 허리 아래정도라서 제법 두려움을 갖게 한다. 이 현공사에서 가장 높은 곳이니 그럴만도 하다.
이 현공사 또 하나의 가장 특이한 것 중 하나가, 이 절은 유교, 불교, 도교를 함께 신봉하고 있다는 것이다. 입장권 뒷면의 설명에는 “三敎合一”이라고 해 놓았다. 이 삼교당을 들여다 보면 공자님, 노자님, 부처님 세분이 좁은 공간 안에 사이좋게 나란히 앉아 계신다. 閣, 殿, 堂 으로 불리지 않고 寺로 불리는 이유는 대웅보전이 있어서 일 것 같다. 결과적으로 부처님이 계신 공간에 공자님과 노자님이 함께 들어와 계신 거다. 불교가 가지는 넓은 포용성을 새삼 느낀다. 석가모니부처, 좌우의 협시보살은 십대 제자인 아난과 가섭이다. 또한 공자의 상도 있다. 이렇게 세분의 교조가 같이 있는 공간은 이곳 말고 한 곳이 더 있다. 바로 대웅보전이다. 여기는 세분의 교조가 각각의 협시불, 수행도사, 제자들을 좌우에 한 분씩 거느리시고 사이좋게 한 공간을 나누어 쓰고 계신다.

 전체 전각은 약 40간의 공간이 있다고 하는데 동, 철, 돌, 진흙으로 빚거나 조각한 80여 개의 조상이 있다고 한다.』

 

 

 

 

 

 

 

 

 

 

 

 

 

 

 

 

 

 

 

 


 절 앞쪽의 절벽으로는 시멘트로 잔교를 이어 댐을 구경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입장료를 10원 또 받는다. 우리는 날이 저물어 이 댐을 볼 시간이 없다. 일행들이 모두 내려간 시간이라 홀로 댐을 구경하겠다고 나설 수가 없다. 절벽사이로 난 계단을 따라 댐둑에 올라 물이 얼마나 있는지 또 보다 높은 곳에서 저녁놀에 비치는 현공사를 볼 수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그 기회가 내게는 주어지지 않는다. 아쉽다. 어느새 일행들은 저 아래 매표소 입구에서 모여 기다리는데. 부지런이 뛰어 내려간다. 어둑해진 시위에 묻혀서. 이 댐의 높이는 69m나 된다고 한다.

 곧 저녁을 먹을 시간이다. 저녁은 현공사 매표소 주변의 식당에서 해결한다. 역시 간단한 저녁이다. 어디 멀리서 찾지 않는 식당이기에 기대도 하지 않는다. 난 버스로 다시 가서 고추장이면 김치 등을 가지고 온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 저녁인 셈이다. 저녁을 일단 배불리 먹는다. 먹을 것이야 없다고 해도 우선 배는 채워야지. 이제 대동시로 돌아가려면 제법 가야하는데. 잠도 자야하고. 저녁을 먹고 마침 가방에 커피믹스가 두 봉지 있어 제맛은 아니나지만 커피를 한 잔 하면서 하루를 마감하고자 한다. 어느새 사위는 어두워졌다. 저 앞의 절벽에 걸린 절이 아래의 물빛 조명을 받아 조금은 특이하게 다가온다. 다시 카메라를 켜고 그 모습을 담아본다. 조용하다. 떠들썩하고 복잡하던 이곳이 잠시만에 조용하고 한가해졌다. 많은 관람객들이 썰물빠지듯 빠져나갔다. 주차장도 텅 비었다. 바람만이 그 텅빈 공간을 쓸고 간다. 저녁때라 그런지 바람이 제법 거세다.

 저녁을 먹고 식당 맞은편의 기념품점에 잠시 기웃거린다. 성제엄마는 언제 봐두었는지 동으로 만든 작은 주전자를 하나 구입했다. 뭐 별것도 아니다. 가만 보니 이음새 부분 한쪽이 뚫여 있기도 하다. 무언가를 담을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냥 보기 좋아서 샀단다. 지민이도 들어간다. 막상 둘러보니 이것이다 하고 맘에 쏙 들어오는 것은 없다. 지민이가 작은 쇠로 된 동물모형이 든 조형물을 든다. 어른 엄지손가락 만하다. 하나에 10원을 달란다. 이런 고얀놈들. 쇠붙이 하나에 10원이라니. 두 개에 10원을 주고 나온다.


 버스는 다시 대동시를 향해 달린다. 대동시까지는 근 80여km는 되는 것 같다. 어두운 거리를 잘 도 달린다. 주변은 조용하고 적막하다. 마주 오는 차의 불빛만이 환하다. 약 1시간 가량 달렸나. 시내거리가 나타난다. 이제야 사람 사는 곳에 온 듯싶다. 대동시에 들어온 것이다. 시내는 깨끗하다. 밤에 봐서 그런가. 불빛도 환하고 거리도 넓고 크다. 시내 중심가를 통과하여 우리는 숙소를 찾아 간다. 대동역 바로 앞이다. 우체국빌딩인데 이곳 14,15,16층을 일반 숙소로 이용한다. 나머지 층은 업무용이고. 방의 열쇠를 받아 올라간다. 우리는 15층을 받았다. 가이들말로도 역시 물은 시간제로 나온다고 한다. 더운물이. 어허 여기서도 힘든 하룻밤이 될 것 같다. 그러나 오대산만큼 춥지가 않아 다행이다. 숙소 내부도 오대산 산장보다는 훨씬 좋다. 아이들도 그렇게 평을 하고. 우리가 들어간 방의 화장실에는 다행인지 열탕기가 하나 설치되어 있었다. 전원을 연결하여 물을 데핀다. 하영이 방을 알아보니 그 방에는 없었다. 아마 우리가 묵을 방에만 있는 모양이다. 더운 물이 잘 나온다.

 씻고 성제엄마랑 잠시 주변을 나가본다. 물과 다른 간식거리를 살까하고 나가보니 쓸만한 가게가 없다. 오른쪽으로 돌아가니 대동역이 보인다. 역앞인데도 커다란 슈퍼가 없다. 작은 매점에 들러 물과 음료수 하나를 사서 들어간다. 역앞이라 늦은시간까지 사람들의 왕래가 있다.

 이번 여행이 마지막 밤이 된다. 그래도 어제보다는 편한 잠을 잘 수 있어 다행이다. 잠을 잘 자야 여행이 수월한 것이거늘... 어제는 너무 힘든 밤이었다.


 

5월 4일- 삼일째

 마지막 날 아침 6시에 기상을 한다. 서둘러 씻고 카메라를 둘러메고 홀로 나선다. 집사람과 아이들은 아직 잔다. 7시 30분에 아침 먹고 8시에 모이기로 했으니까, 오늘아침은 조금 여유가 있는 것이다. 난 구룡벽을 보고자 나선 것이다.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혹시나 문을 열었나 싶어서. 숙소를 조금 걸어 나와 큰 길에서 택시를 탄다. 구룡벽까지 거리는 약 3km이다. 걸어가도 될만하지만 일단 시간적으로 여유를 가지려고 택시를 탄다. 택시비는 기본요금이 5원이다. km당 1,2원이 올라간다. 7.2원이 나왔는데 4마오 이하는 절하시켜 받지 않는단다. 7원만 내고 구룡벽 앞에서 내린다. 푯말은 있지만 매표소와 입구는 굳게 닫혀있다. 너무 이르게 온 모양이다. 거리도 청소하는 아저씨 한 두분 외에는 사람이 없다. 간혹 등교하는 학생들인지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모습을 본다. 구룡벽은 약 2m의 높이 담으로 둘러쌓여 있다. 그 안에 구룡벽이 있는데 볼 수가 없다. 아쉽다. 자금성에 있는 것과 북해공원에 있는 것 그리고 이 대동시에 있는 것 모두 3개가 중국에 있는 이름난 구룡벽이다. 이 대동시에 있는 것이 가장 크다고 하니까. 이 대동시에 유명한 화엄사 절도 있고. 구룡벽 주변은 시내 한 복판이기도 한데 조금 허술하다. 바로 옆에 공용 화장실이 있고 담장 주변으로의 주택들은 허름하기 짝이 없다. 구룡벽 앞 길 건너는 골동품골목이다. 옆으로 제법 큼직한 골동품 상가도 있다. 그러나 이른 시간이어서 그런지 문도 아직 열지 않았고 한가하다. 길가에서 운동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보일뿐이다. 난 다시 걸어나가 어제 밤에 버스를 타고 오면서 본 길 한 복판의 우리의 남대문 같은 건물을 보러 나선다. 이름하여 鼓樓였다. 3층 높이의 건물로서 사방으로 문이 있고 각 층의 처마 밑에는 현판 글씨가 각기 다르게 걸려 있었다. 이 고루를 한 바퀴 둘러보고 다시 택시를 타고 대동역 앞으로 간다. 이번에 탄 택시 기사는 내가 한국인이라고 하니 아는 척을 하고 반갑게 말을 건다. 한류가 상당하다는 등, 나름대로 한국에 대한 관심이 많고 알고 있는 것도 상당한 것 같다. 대동역에 내려 대동역 광장을 한 번 둘러보고 숙소로 들어간다.


 7시 30분에 아침을 먹으로 올라간다. 아침은 매번 같은 메뉴이다. 달걀도 하나 먹고, 빵도 먹고 요우티아도 먹는다. 그래도 적당히 먹어두어야 움직일 수 있으니까. 아침을 먹고 가방을 메고 나와 버스에 오른다. 그런데 이번에 가이드가 늦어진다. 누군가 열쇠를 아니 주었다는 것이다. 8시에 출발하려는 계획이 조금 늦어진다. 30분이나.

 버스는 운강석굴을 향해 달린다. 가까운 곳의 이정표로는 19km라고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버스는 시내쪽으로 간다. 출근시간대라 그런지 도로엔 제법 차량들이 많다. 신호등마다 걸려 차를 세운다. 우리 숙소에서 바로 가는 길이 있는데, 시내쪽으로 돌아간다. 그 이유를 조금 지나 안다. 가이드가 잠시 여행사 사무실에 들린다. 이 때문에 차가 조금 돌아 온 모양이다.

 버스는 시내를 빠져나와 조금 한적한 길을 달린다. 주변에 공구상가도 있다. 그리 먼 거리가 아니다. 운강석굴이 가까워 오면서 주변이 탄광지역임을 알리는 간판을 볼 수 있다. 생각에 운강석굴은 커다란 산비탈에나 있을 법하다. 그러나 주변을 돌아보니 제법 높은 산은 보이질 않는다. 그럼 석굴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조금 가니 운강석굴 공원 푯말이 보인다. 이곳이겠다 싶다. 맞다. 버스는 이 공원 주차장에 들어가 멈추고 우리를 쏟아낸다. 제법 이른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주차장은 차량들로 가득하다. 버스며, 승용차며. 여기저기 차량에서 내려 줄을 맞추는 일행들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주차장과 석굴 입구와 이어진 시장통을 통해 간다. 이 시장통을 각종 기념품 가게들이 좌우로 즐비하다. 가만 보니 각 상점마다 상품들이 비슷하다. 탄광석으로 만든 비석 종류나 얼굴 그림을 새긴 것들, 옥 종류 등. 점원들이 자기들 가게로 들어오라고 손짓을 한다. 우리는 혼잡한 이곳을 통과하여 매표소에 이른다. 매표소도 사람들로 붐빈다. 바로 앞이 석굴이 있는 언덕이 보인다. 굴이 있을만하지 않다. 겉으로 보기에는. 얕은 흙산이 언덕처럼 있다. 그 앞에 기와지붕이 보인다. 절 같다. 그 건물 안이 석굴인 모양이다. 매표소를 지나면, 세계문화유산 운강석굴이라는 돌 표지석이 큰 것이 하나있다. 그 표지석을 가까이 가면 오른쪽에 석굴 표시도가 또 큼지막하게 우리를 기다린다. 운강석굴의 전체를 조감할 수 있는 것이다. 오른쪽으로부터 동굴 번호가 순서대로 붙여져 있다. 1번부터 45번까진 있다. 그렇지만 관람객들이 주로 보는 굴은 3,4,5,6,7,8,9,10,11,13,14,15,16,17,18,19,20굴 정도이다. 나머지는 대강 보는 것 같다. 가이드도 이 동굴에만 안내를 하고 나머진 그냥 둘러보라고 한다. 45굴까지 표지에는 있지만, 20굴 이상의 왼쪽은 무슨 공사중이다. 그리고 20굴 이상은 아직 볼 수가 없다. 개방을 아니한 것인지. 아님 아직 발굴이 덜된 것인지 모르겠다.

 이곳에 잠시 서서 가이드가 설명을 시작하자 일행 중의 한사람이 “그만하고 먼저 들어가자”고 한다. 가이드가 설명을 중단하고 입장한다. 입구에는 사람들로 붐빈다. 가장 처음에 만나는 굴이 3,4호굴이다. 절처럼 기와지붕에 큰 나무 기둥으로 만든 대문이 보인다. 비록 문은 좁고 작지만 굴 안의 널찍하다. 불상이 온통 조각되어 있다.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중앙의 가장 큰 불상은 채색되어 있다. 시간이 무지하게 오래되었건만 잘 보존되어 있는 것 같다. 수많은 사람들의 입김과 공기 접촉을 하였을 것인데 아직도 멀쩡한 것 같다. 물론 깊이 보면 파손되고 망가지는 부분이 있겠지만, 겉으로는 아직은 괜찮아 보인다. 

 운강석굴은 대동시의 서남쪽 15km 떨어진 무주산의 남쪽 사암절벽에 조성되어 있다. 좌우 1.6km의 절벽사이에 작은 협곡이 두 개가 있어 전체적으로 세부분의 절벽으로 나누어진다. 주차장에서 매표소까지 가는 길목엔 제법 큰 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북경의 판자위앤 같기는 하지만, 그 규모는 작고 판매하는 물품도 제한적이다. 일종의 기념품 가게이다. 이곳의 특산물인 탄광석으로 만든 조각품들도 많다.

 

 

 

 

 

 

 

 

 

 

 

 

 

 

 


 각 굴 입구에는 작은 표지판이 하나씩 있다. 제 몇호 굴이라는 표지와 간략한 설명이 적혀있다. 영문과 중문으로 석국에 조각된 의미와 연대 등 가장 기본적인 내용이 적혀있다. 그 작은 몇 단어로만은 굴을 다 알 수가 없다. 더구나 불교관련 석굴인데 불교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경우는 그저 눈으로 ‘아! 이런 것이 있구나.’하는 감상뿐일 듯싶다. 나 역시 마찬가지고. 그러니 따라다니는 아이들은 어떨까?


 『
가장 규모가 큰 굴인 제5굴과 6굴은 그 전면을 목조건축으로 만들어져 있다. 처마 층수로 보면 4층 높이이다. 사찰의 한 전각 같다. 이 목조건축물은 다양한 모양을 하고 있다. 큰 기둥에 처마 밑으로는 절의 건물 같이 단청을 그리기도 하고 갖가지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고 채색되어 있다. 또한 2층, 3층으로는 창문도 있고 하니 그 건물 안에 공간도 있는 것 같다. 그 아래 굴이 있는지 모를 정도이다. 굴 입구를 들어가야 아 여기가 굴이구나 하는 실감이 들 정도이다. 보와 기둥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귀면장식이 현공사에서 본 그 양식이다. 이 목조 건축물은 모든 굴의 앞에 세워져 있었지만, 세월의 역사에 모두 스러지고 지금은 제5~8굴의 입구에만 있다. 특히 5~6굴의 목조 건축물은 청나라 때(1681년) 건축된 것이다. 5굴과 6굴의 귀면 모습이 형태나 색상에서 조금씩 다르고 또 층간마다도 조금씩 다른 것을 보면 무언가 의미가 있는듯하나

Tips: 운강석굴 1

『석굴은 북위시대에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그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진시황에 의해 통일된 중국은 곧 한에 의해 멸망하고 한 역시 후한 대에 그 힘을 잃어 위, 오, 촉의 삼국으로 분열된다. 조조의 위에 의해 잠시 통일이 되었지만, 곧바로 사마씨의 진나라에게 그 권력을 넘겨야 했다.
호시 탐탐 중원을 노리고 있던 북부의 유목민족들에게는 이런 중원의 혼란은 기회였다. 기회는 이용하는 사람에게만 그 결실을 가져다주는 법. 호족들은 바로 말위에 올라 중원을 쳐들어가고 이를 견딜 수 없었던 중원의 한족들은 남쪽으로 쫓겨 가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급급하게 된다. 수양제가 다시 중국을 통일하기 전까지, 화북과 화남이 분열된 시대, 이른바 중국의 남북조시대(420~589)의 시작이다.
이때 화북을 쳐들어 왔던 유목민족은 다섯 민족으로 이들은 점령한 화북의 넓은 땅에 서로 깃발을 꽂아 국가를 세우고 세력다툼을 하기 시작한다. 북조는 이 다섯 개의 오랑캐가 세운 16개 국가의 시대라고 하여 5胡16國 시대라 부른다. 중국 역사상 최초로 이민족이 한족을 지배하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16개국은 그 이전 그리고 이후의 중국의 역사가 항상 그렇듯이 분열의 시대 다음의 통합의 시대로 넘어가 점차 하나로 합쳐지기 시작한다. 그 최후의 패권을 잡은 나라는 선비족 탁발씨가 세운 북위이다.
몽골족의 원류로 생각되는 이 덜 문명화된 침입자들은 토착민족인 한족을 호화(胡化)시키는 대신 재빨리 한족의 귀족문화를 받아들이고 초원을 버리고 대동과 낙양으로 천도하면서 한족과의 결혼정책을 통해 중국식 국가를 건설한다. 이들은 또 자신들의 국가를 지배하기 위한 새로운 사회적인 사상을 적극 모색하고 받아들이는데 필요했던 것이 바로 불교다.

 이 운강석굴은 동굴 개수가 53개로 동쪽에 4개, 중부에 9개 서부에 40개가 있다, 크고 작은 불상이 1100여개, 석각조상은 모두 51,000여개라고 한다. 그 숫자로도 그 규모를 어림짐작할 수 있겠다. 이 운강석굴이 차지하고 있는 점유면적은 총 40만평방미터라고 한다. 』

오랑캐가 세운 16개 국가의 시대라고 하여 5胡16國 시대라 부른다. 중국 역사상 최초로 이민족이 한족을 지배하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16개국은 그 이전 그리고 이후의 중국의 역사가 항상 그렇듯이 분열의 시대 다음의 통합의 시대로 넘어가 점차 하나로 합쳐지기 시작한다. 그 최후의 패권을 잡은 나라는 선비족 탁발씨가 세운 북위이다.
몽골족의 원류로 생각되는 이 덜 문명화된 침입자들은 토착민족인 한족을 호화(胡化)시키는 대신 재빨리 한족귈족�Ĥ초원을 버리໠̤qӼϠ?Ϡ?정책을 통해 중국식 국가를 건설한다. 이들은 또 자신들의 국가를 지배하기 위한 새로운 사회적인 사상을 적극 모색하고 받아들이는데 필요했던 것이 바로 불교다.А̠̠ʨðꋈ̣̠ʨðꋈ̣̠ʨðꋈ̣

 제6굴은 중앙에 커다란 탑이 조성되었다. 탑신과 사면 벽, 그리고 천장에 이르기까지의 화려한 조각과 색 장식은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는 숨이 턱 막힐 정도이다. 탑신 주위의 사면 벽에는 부처가 태어나서 성불하기까지의 과정이 33장의 벽 부조로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다. 탑신은 오른쪽 어깨를 탑신쪽으로 하고 시계방향으로 돌아야 한다. 』

Tips: 운강석굴 2

『삼황오제의 신화시대를 거쳐 하, 상, 주를 거쳐 위대한 사상가의 시대인 전국시대에 이르러 중국민족의 사유는 기본적인 완성을 이룬다. 이때 수많은 제자백가 중에서 단연 백미는 군자의 도라고 일컬어지는 유교이다. 진나라 이후의 모든 중국의 역대 황조는 이 유교를 사회질서의 근본으로 삼았다. 사회의 지도이념으로서 유교는 공자의 君君臣臣父父子子-군주는 군주답게 다스리고, 신하는 신하답게 섬기고, 아비는 아비답게 행동하고, 아들은 아들답게 행동해야 한다.-로 간략히 설명된다. 상하의 질서와 복종의 개념은 국가유교로까지 발전되어 받아들여진다. 중국의 어느 역대 왕조도 이 유교적 상하우열의 계층을 강조하고 예와 덕으로 표현되는 군자의 도덕적 가치이념을 최고의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그러나 유교는 지배층의 통치이념이었고 실제 국가의 일반 백성에 대한 지배 이념은 신상필벌(信賞必罰)을 질서의 수단으로 삼는 상앙, 한비자, 이사의 법가였다. 진시황이 법가사상을 적극 받아들여 천하를 통일한 후로 중국의 어느 역대 황조도 이 두 가지 유교와 법가의 법치주의를 포기한 적이 없다.
진과 한나라의 국가유교에 의한 최초의 통일의 시대는 곧 그 내부의 모순으로 붕괴되었다. 전쟁은 계속되고 일반 백성은 전쟁과 부역으로 고통을 받았다. 공자에 조금 앞서 태어난 노자는 이런 고통받는 일반 백성에게 무위라는 일종의 사상적 피난처를 제공한 것으로 추앙받았다. 도교는 유교적 규범에 가장 강하게 반기를 든 학파였다.
중국의 토착 종교인 도교와 외래 종교인 불교가 아무리 번성했다 하더라도, 통치라는 단계로 관리역량을 조직화하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 유교적 교육을 받은 국가의 관리는 항상 사찰과 도관의 토지와 재산, 승려와 도사들을 등록하여 통제하고 관리하려고 힘썼다.
자신들의 수보다 훨씬 많은 선진화된 민족을 다스리기 위한 선비족 지배층은 자신들의 문화를 버리고 적극적으로 한족의 문화를 받아들이기에 힘썼다. 유교와 도교는 둘 다 그들의 새로운 지배이념에 맞지 않았다. 결국 그 대안은 당시 점차 중국 사회에서 그 세력을 넓히기 시작했던 불교가 될 수밖에 없었다.
4세기 이후 화북에 들어온 이민족 침입자들이 불교를 수용한 것은 대체로 불교가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대신한 구질서의 외부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불교 승려들은 대중에게 순종의 미덕을 기르게 하는 동맹자가 되었다.
현생의 고달픈 삶이 황제나 제국의 끊임없는 확장의 핍박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생의 업(카르마)에 연기되어 나타난 결과이며, 그리고 현생에서 자비를 실천행으로, 내세의 열반을 추구하는 구도 방법은 새로운 이민족 지배층에게는 아주 적절한 것이었다. 그들은 곧 불교의 열렬한 신봉자가 되었으며, 이에 편승하여 불교를 전파하려는 승려들은 이 지배층과 결탁하여 그들의 세력을 넓힐 수 있었다. 그 결과는 국가의 지원을 받는 대대적인 불사(佛事)로 나타나 운강석굴과 용문석굴이 탄생하게 되었다.』

 

 동굴 안은 사람들로 발디딜 틈이 없다. 좁은 공간에 관람객들이 밀어닥치니 복잡하기만 하다. 뭐 하나 제대로 살펴볼 틈이 없다. 조금 있다싶으면 밀리고 밀치고 한다. 물론 내부에 전등이 있어 적당히 밝기는 하지만 사진을 찍을 정도는 아니다. 더러는 사진 촬영을 금지하지 않아 누구나 찍을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많아서 제대로 된 장면을 포착할 수가 없다. 잡을라치면 어느새 사람이 지나가고 한다. 그저 지나가면서 듬성듬성 살짝살짝 찍어본다. 플래시를 터트리지 않고 한다. 그러니 어둡기도 하고 조금 흔들리기도 하고 해서 맘에 드는 사진은 아니다. 그래도 이렇게나마 흔적을 담아볼 수 있어 좋다. 내부에서는 한 무리씩 가이드를 따라 설명을 듣는다. 웅성웅성 떠들썩하여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다. 물론 알아듣지도 못하지만, 그저 무리와 조금 떨어져 개별적으로 살펴보고 감상하고 사진도 찍고 한다. 그러다보니 일행을 놓치기가 일쑤다.

『제7굴과 8굴 역시 쌍굴 형식이다. 굴 내부의 모습들은 비슷하다. 제9굴의 입구. 제9굴과 제10굴, 그리고 제11굴과 제12굴(470~493)도 쌍굴이다. 이 굴들은 대단히 비슷하다. 제11굴~12굴은 입장할 수가 없다. 울타리를 쳐 놓았고 그냥 외부에서 굴 내부를 살펴볼 수 있다. 굴이 그다지 크지 않아 밖에서도 충분히 볼 수가 있다. 
9굴과 10굴의 전실 앞면은 여러 개의 기둥으로 조성되었다. 전면의 기둥들은 최근에 보수하여 쌓아 놓은 것이다. 전실의 후면 벽 조각은 대단히 화려하고 특히 중단부의 조각은 불법의 세계인 수미산을 묘사한 것이다. 좌우 양측에는 비슈누와 시바신이 해와 달을 들고 있고 보살들과 동물들이 많이 있다. 현세와 내세는 두 마리의 뱀으로 구분이 되는 것 같다.
입구에 세워져 있는 설명판에는 용으로 되어 있다. 동물 중에서 특히 뱀은 불교에서 용과 구분이 잘 되지 않는데, 고대 인도에서는 서양과 달리 뱀은 그렇게 사악한 존재로는 생각되지 않는 것 같다. 중국의 건국신화 중에 나오는 여와와 복희씨의 하반신도 뱀으로 묘사되어 있으므로 인도와 고대 중국의 신화에 나오는 두 마리의 뱀은 상당한 연관성이 있지 않나 생각된다.
제12굴 벽과 천장이 맞닿는 최상층부에 조각되어 있는 기악대. 고대 악기와 연주 형태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라고 한다. 남미의 팬풀릇과 비슷한 악기가 특히 눈에 뜨인다.
제11굴 전실 벽과 전실 앞의 구조물을 연결하는 들보를 비천이 받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였다. 9굴과 10굴의 明窓 천정부의 연화문과 비천. 조각이 세밀하면서도 뚜렷하고 힘찬 느낌이 든다. 제11굴의 전실 서쪽 벽면장식. 중앙의 감실에 부처가 앉아 있는 형상이다. 감실의 지붕을 보면 기와지붕의 서까래 아래 공포가 있고, 용마루의 양쪽 끝에는 용두가 있다. 완전한 중국식 건물의 표현이다. 서역에서 건너온 불교미술 양식이 점차 중국화 되어가는 과정으로 보여진다.』

Tips: 운강석굴 3

『대동은 선비족의 북위(北魏) 왕조가 초기 96년간(서기 398-494년) 도읍했던 평성(平城)이 있던 곳이다. 북위의 역사서인 위서에 따르면 종교장관격인 사문통 담요가 460년 당시 문성제에게 석굴조영을 주청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현재 이 석굴에 봉안된 크고 작은 불상만 5만개가 넘는다고 하는데 실제로 가장 큰 불상은 제3굴과 제5굴 그리고 담요 5굴이라 불리는 제16에서 20굴까지의 10개가 채 못 된다.
도문제 탁발규는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고 북위를 건립했다.(386년) 그는 한족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평성, 지금의 대동에 도읍을 정하고 천도(398)한다. 그리고 6대 효문제 때 다시 낙양으로 천도(494년)하기까지 약 100여 년 동안 대동은 북위의 수도였다. 운강석굴은 이 시대 중기에 파여졌다. 운강석굴은 북위왕조의 불교성지였다.
도문제 탁발규는 시내에 커다란 불교 사원을 건립하는 한편 사문 법과로 하여금 승단을 이끌게 하였다. 법과는 사문불례속(沙門不禮俗)의 전통을 깨고 황제에게 예배하였다. 황제는 곧 부처가 되었다. “當今如來”. 여기에 그치지 않고 석굴에 조성된 부처의 모습은 역대의 황제의 모습을 본 따 조각되었다.』

기 96년간(서기 398-494년) 도읍했던 평성(平城)이 있던 곳이다. 북위의 역사서인 위서에 따르면 종교장관격인 사문통 담요가 460년 당시 문성제에게 석굴조영을 주청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현재 이 석굴에 봉안된 크고 작은 불상만 5만개가 넘는다고 하는데 실제로 가장 큰 불상은 제3굴과 제5굴 그리고 담요 5굴이라 불리는 제16에서 20굴까지의 10개가 채 못 된다. <BR> 도문제 탁발규는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고 북위를 건립했다.(386년) 그는 한족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평성, 지금의 대동에 도읍을 정하고 천도(398)한다. 그리고 6대 효문제 때 다시 낙양으로 천도(494년)하기까지 약 100여 년 동안 대동은 북위의 수도였다. 운강석굴은 이 시대 중기에 파여졌다. 운강석굴은 북위왕조의 불교성지였다. <BR> 도문제 탁발규는 시내에 커다란 불교 사원을 건립하는 한편 사문 법과로 하여금 승단을 이끌게 하였다. 법과는 사문불례속(沙門不禮俗)의 전통을 깨고 황제에게 예배하였다. 황제는 곧 부처


 『제16굴, 제16굴~제20굴(460~465)은 담요가 당시 북위의 황제인 문성제의 주청을 받아 처음 운강석굴을 조성한 가장 초기의 굴로 속칭 담요5굴로 불리운다. 문성제 이전의 다섯 황제의 모습을 본 따 조성한 것이라 하는데, 어느 굴이 어느 황제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고 한다. 북위 초기 중국 복식으로 개혁을 한 후의 모습이라고 한다.

 담요 5굴의 특징은 전실과 후실의 구분이 없이 돔형 천장의 단일 구조로 되어 있다. 커다란 불상을 중간에 모시고는 좌우 벽을 온통 크고 작은 부처로 장식을 한 것이다. 소위 천불동, 만불동으로 불리우는 이유다. 사진에 보면 작은 부처도 옷 모양이나 형태가 조금씩 다 다르다.

 제18굴. 담요 오굴의 불상 중 서있는 입상을 보면 상반신이 하반신에 비해 길다는 느낌이 든다. 아마도 입상의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각도가 많으므로 일부러 그렇게 표현한 듯도 싶다. 그러나 멀리서 보면 이 차이는 확연히 드러나 보인다.
제19굴. 눈꼬리가 길고 코의 선이 길쭉하고 시원하게 내리 뻗었다. 확실히 요즘 한족은 아니고 중앙아시아 민족의 모습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서양에서나 동양에서나 위대한 사람은 얼굴에서나 몸에서 빛이 나는 모양이다. 불상 조각에서는 빛이 몸과 얼굴 부분에서 나오는 모습을 얼굴 뒷부분에 빗살로 표현하거나 원형으로 한 다음 그 주위를 화염 무늬로 하였다. 여기 운강에서는 화염의 안쪽에 한쪽 무릎을 꿇거나, 가부좌로 앉아 있는 부처나 보살상을 새겨 넣어 그 존귀함을 더 하였다.

 제20굴. 운강석굴을 대표하는 높이 13.7m의 석가모니상이다. 결가부좌에 수인은 비록 훼손이 많이 되었다. 대개 한국의 불상은 약간은 풍만한 몸집에 대개 눈을 지긋이 반쯤 감은 선정에 든 모습이 많다. 자비와 온화한 모습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여기 운강의 불상은 비록 선정에 있다고 하더라도 눈을 크게 뜨고 미소를 지은 모습이다. 약간은 길쭉한 얼굴선과 특히 복장의 선이 강조되어 직선적이고 활달하며 역동적인 이미지이다. 초기 중국에 전래되어 그 교세를 확장하려는 불교 지도자들의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이미지가 반영이 되어서인가 추측해 본다. 이 굴의 전면부와 왼쪽에 있어야 할 입상은 매우 이른 시기에 무너져 내렸다한다. 윗부분에는 목조 구조물을 지탱한 듯한 사각형의 구멍이 보인다.』


Tips: 운강석굴 5

『운강석굴은 석굴의 형식과 내용에 따라 3기로 나누어 질 수 있다.

제1기는 담요가 문성제의 지원을 받아 파기 시작한 16굴에서 20굴의 속칭 담요 5굴(460~465)이다. 이 굴의 특징은 내부 공간을 원형의 돔형으로 파고 중앙에 삼세불을 모시고 그 사방벽을 수많은 작은 부처로 장식하였다. 삼세불 중 주불은 특별히 커서 공간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문성제 이전의 다섯황제의 모습을 본 따 조성되었다고 하는데 어느 굴이 어느 황제의 모습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제2기는 문성제가 사망한 후, 낙양으로 천도하기 전의 효문제 시기(465~495)이다. 운강석굴의 최대의 굴인 제3굴이 조성되었다. 이 시기 석굴의 특징은 평면다방형이다. 전실과 후실로 구획이 나뉘고 일부 굴의 경우는 중앙에 기둥형의 탑주가 건축되었다. (제6굴, 13미터) 사방의 벽은 상하단 층층이 구분이 되어 수많은 정교한 불상과 부처 그리고 본생담(자타카)이나 사문유희 등 불교 관련 고사들이 세밀히 조각되었다. 형상과 소재에서 다양화가 이루어졌다. 특히 중국전통의 건축형식과 장식 그리고 부처와 보살들의 복장에서도 중국적인 문양과 양식이 많이 사용되었다. 7굴 후실의 남벽상부의 6척 공양인, 제9굴, 10굴 전실 북벽상의 기악천 제9굴 제2도 명창 정부의 비천부조 등 예술 수준이 높다. 화려한 불국의 열기를 묘사하였다.
제3기는 494년 효문제가 낙양으로 천도한 후 파여진 굴이다. 낙양 천도 후 평성 즉 대동은 北都가 되었고 중요한 불교 성지로 남았다. 이 시기는 조성 중 중단되어 미완성으로 남은 굴이 많고 크기도 중소형의 굴이 많이 조성되었고, 소박하고 작은 불감형식의 굴이 많이 파여졌다. 동굴 내부 평면도 단순 직사각형의 양식이 많아졌다. 중앙에 탑이나 사면 벽에 불감을 조각한 형식의 굴이다. 굴 문의 외벽에 문양이 생겨나고 제 2기의 다양한 형식의 변화의 기세는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전체적으로 운강석굴은 간다라 미술의 영향력을 많이 받았고 부처나 보살들의 자태가 생동적이고 선이 간결하며 옷 문양의 강조, 초기 인도 불교의 요소가 많은 것 등이 큰 특징이라고 한다.』


 전체 운강석굴 보는 것을 마치고 모일 시간을 안내하고 자유시간이 조금 있다. 난 1,2굴을 보고자 굴 오른편으로 가고자 한다. 그런데 시간이 부족한 것 같다. 가이드가 정한 시간에 다녀오기는 무리일 것 같다. 발길을 돌린다. 나오는 길에 좌판에서 운강석굴 관련 책을 한 권 보고 산다. 그리곤 다시 출구로 나간다. 나가기 전 20굴 좌상 앞에서 사진을 한 장 박고 부지런히 뛰어 나간다. 나가면서 다시 상가를 기웃 거린다. 무언가 운강석굴을 기념할 만한 물건을 하나 찾아보고자 한다. 그런데 마땅한 것이 없다. 그놈이 다 그놈이다. 잠깐 누런 빛의 죽간 같은 것이 있어 눈여겨본다. 재질은 돌 비슷한데, 돌은 아닌 것 같고, 죽간처럼 열 개 정도의 조각을 서로 이어 둘둘 말게 만들었다. 그 표면에는 춘화를 새겨 넣었다. 내가 살 듯 하면서 살펴보면서 값을 물었다. 150원이란다. 에그그 너무 비싸다. 그 조각 하나에 150원 이라니. 그래서 주인장이 내게 묻는다. “얼마했으면 좋겠냐”고, 내 딴에는 한참 내려 “60원”을 불렀다. 그러니 고개를 흔든다. 그냥 돌아서 온다. 원래 사고픈 맘도 없었다. 그냥 값이나 물어본다고 한 것이다. 돌아서 오는데 부른다. 뒤돌아보지도 않고 걷는다. 북경으로 돌아와 배드민턴 운동을 다녀오다가 리두반점 옆의 리어카 골동품상이 있어 두리번거렸다. 마침 같은 물건이 있어 물어보니 40원 달란다. 역시 관광지에서는 물건 값이 비싸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친다. 사지않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결국 운강석굴에서도 이렇다한 기념품을 하나 건지지 못했다. 그저 운강석굴 관련 책자 한 권과 대동시내 안내지도 한 장이다. 그런데 운강석굴 안내 책자는 제본이 잘못되었는지, 가지고 와서 펴보닌 낱장으로 떨어져 나간다. 허허 이를 어쩌나? 바꾸러 갈 수도 없거늘….


 이 운강석굴을 마지막으로 대동시 여행을 마친다. 이젠 다시 나와 점심식사를 하기로 한다. 나오는 길에 잠깐 대동시 특산물 가게에 들린다. 별 것 없다. 대추며 건과류와 사탕류 등이다 살펴보았지만 살 만한 것이 없다. 대추 한 봉지 산다. 다른 분들은 이것저것 많이도 산다. 왕징 슈펴에서 팔던 메밀차가 두 배 값을 하는 것 같다. 상품이 똑 같은데 말이다. 역시 관광지는 물건 값이 비싼가보다. 버스를 시내 방향으로 나온다. 점심식사 할 곳을 찾는데 가이드가 여기 저기 전화를 한다. 위치를 정확하게 찾지 못하는 것 같다 갔던 길을 되돌아 나와 겨우 찾아간다. 일반 호텔의 식당이다. 몇 번의 식사 중 가장 나은 곳 같다. 점심을 듬뿍 먹는다. 먹는 것이라야 뻔한 것이지만, 일단 밥과 가지고 간 김치 등을 모두 비운다. 점심을 먹고 나온다. 이젠 대동시를 떠나야 한다.바로 고속도로로 진입한다. 고속도로가 진입로가 가까워서 다행이다. 고속도로는 한가하다. 간만에 차가 제 속력을 낸다. 시원스레 뚫린 고속도로를 타니 북경에 다 온 듯하다. 고속도로 옆의 주변은 한가하다. 농가도 있고 공장도 보이고 산도 보이고 논밭도 보여, 일손을 볼 수 있다. 중간에 맞이하는 산은 벌거숭이 산이 대부분이다. 수풀이 없다. 저래서 어찌 산이라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사막이 달리 없는 것 같다. 모래만 있는 것이 사막이 아니라 저 산도 사막이다. 나무와 풀이 없는 산이 무슨 산이런가? 비라도 많이 내리친다면 산사태가 나기에 안성마춤이다. 북경으로 진입하면서 바라보는 들녘은 정말 초라했다. 이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학교도 보내기 어렵겠지만 더 어려운 것은 생활 같았다. 주변에 논밭도 없거니와 토지가 황폐하여 무슨 농사도 아니될 것 같았다. 그렇다고 달리 생업을 할 수 있는 것이 없어보였다. 일감을 찾으러 고향을 떠나 도회지로 나가겠지. 이전의 우리가 돈벌이를 위해 무작성 도회지로 나가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다만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거의 두 시간 정도를 달려 휴게실에 이른다. 휴게실에 내려 잠시 볼일을 보고 바람을 쐰다. 휴게실의 부지는 정말 넓다. 그러나 차량을 별로 많지 않다. 한가하다. 다시 버스는 달린다. 북경 이정표가 보이고 엔칭과 용경협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인다. 곧 북경에 이르는 것이다 이때 사고가 발생한다. 우리 하영이가 배가 아프단다. 아까 휴게실에 좀 내려 쉬었으면 되었을텐데, 내리지 않고 가만있었다. 그러나 가만 보니 차가 멈출만한 곳이 없다. 기사에게 부탁을 해보지만 마땅한 곳이 없단다. 계속 차는 달린다. 팔달령 터널을 지나자 내리막길 오른편에 공터가 있다. 버스가 이리로 진입하여 차를 세운다. 다행이다. 그런데 화장실은 가까이 없다. 이곳은 시내버스가 잠시 정차하는 곳이다. 하영이는 얼른 내려 저 위쪽의 건물로 치닫는다. 일을 보고 다시 버스에 올라 출발한다. 팔달령고속도로를 타는데 제법 차가 많다. 버스는 창평쪽에 한 번 정차하여 두 사람을 내려주고 계속 달려 3환선에서 한 번 정차한다. 반 정도의 사람들이 내린다. 우리도 이곳서 내려 택시 2대에 나누어타고 왕징을 향한다. 집에 도착하니 6시하고 조금 넘었다. 집에 돌아오니 편하다. 2박3일의 버스 여행이 마침표를 찍었다. 조금은 피곤하고 힘든 일정이었다. 버스를 많이 타고 다닌 탓이었나 보다. 그래도 무사하게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어 행복하다. 이렇게 집이 편하고 좋은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역시 집을 나서면 고생이고 힘든 것인가 보다. 힘든 일정을 잘 따라준 집사람과 아이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퇴장하기

 다섯 번째 맞이하는 노동절 휴가이다. 작년에 서안에 이어 노동절때 나가보는 두 번째 여행이었다. 아이들도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유쾌하지만은 않은 여행이었나보다. 우선 첫날밤 숙소가 불편해서 더욱 이런 맘을 갖게 하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번 여행지역은 워낙 많이 알려져 있고 많은 이들이 다녀간 곳이라 신선함이나 새로움은 없었다. 책이나 다른 분들의 여행소감 등을 통해서 많이 본 부분이고 또 한 번은 보고 싶은 곳이긴 했어도 실제 만난 느낌은 크지 않아 무덤덤한 것 같았다. 그렇지만 역사적 가치가 있었고 또 유산으로서도 볼 만한 가치가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그리 나쁜 일정은 아니었나 보다.

 처음으로 해본 버스 여행이었다. 이전에는 주로 기차를 타거나 오고가는 것은 비행기도 타 본적이 있지만, 온 일정을 버스로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 조금은 힘들고 피곤이 쌓이는 일정이었는지 모른다.

 간간이 투정도 했지만, 탈없이 기간을 모두 마치고 귀가할 수있어 다행이다. 지금 당장이야 모르겠지만,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에게도 무언가 가슴속에 남을 수있는 여행이 되었으리라 감히 기대해본다. 설령 그렇지않더라도 나중에 자신들이 필요를 느껴서 지금보다 더 충분한 준비와 노력을 가지고 찾는다면 오늘의 이 시간들이 좋은 자산으로 이바지 하지 않을까 하는 위로를 받고자 한다. 내 생각이겠지. 그러나 조금은 그런 기대를 갖는 것도 나쁘진 않잖아. 그렇지.






참고문헌 :

雲岡石窟 旅游 禮佛一本通, 苗旭宏 편저, 내몽고인민출판사, 2007.2

五臺山 導游圖, 山西省測繪資料檔案館編制, 湖南地圖出版社, 2006.4

참고 웹사이트           

http://blog.daum.net/lamadalai/

http://korean.cri.cn/chinaabc/chapter22/chapter220103.htm

http://korean.cri.cn

http://fp.cri.com.cn/korea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