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교회 태동 역사 - 26 -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사상의 등장과 일요일 강제 법안이 태동함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사상의 등장과 일요일 강제 법안이 태동함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주로 미국 내에서의 역사로 압축되고 있는 인상을 독자들은 보고 있다.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역사로 돌아가는 것이고 한참 지나면 팔레스타인 중심으로 이어져가는 예수님 당시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시대에서 가장 근접한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서면 개신교의 탄생을 전후로 하여 새로이 일어난 성경이 말하는 예언 역사에 과녁을 맞추다보니 미국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일관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은 여러 민족이 섞여 살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지만 특별히 많은 노예들이 미국으로 건너가 노예전쟁이 일어난 곳인지라 그곳에 있는 흑인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만 하였던 곳이다. 재림교회가 태동되었던 곳은 남부지방이 아닌 북부 지방이었기에 흑인들에 대해서는 깊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었다. 교회지도자들 중에 몇 명은 노예제도의 부당성에 대하여 주장하며, 노예제도의 폐지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엘렌 화잇 여사나 존 캘로그, 존 바잉톤 같은 이들도 자유를 찾아 탈출하는 노예들을 돕기 위한 일들을 나름대로 하고 있었다. 남북전쟁이 끝난 후에 대총회는 남부의 유색인종들을 위하여 일을 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놓았으나 아직도 시대적 분위기 흑백의 분리의 장벽이 남아 있어 교단적으로 저들을 따로 보호하는 특별한 정책을 취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1870년대에 들어서야 노예 출신들에게 기초 교육을 제공하기 위하여 노력하던 중 킬고어가 인종 분규가 격화된 지역에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텍사스에 와서 설교를 하면서 전도집회를 열었다. 당시의 형편은 설교를 할 당시에 중앙에 통로를 만들어 흑백의 경계선을 만들어 설교를 하였다. 1877년과 1885년 대총회 모임에서도 흑백의 교회가 통일을 보지 못한 채로 나뉘어지는 상황으로 되어져 흑백 혼합 전도회 개최마저도 이루어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인종의 벽은 좀처럼 하나가 되기 어려운 현안이었다. 미국 내에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흑인 목사로 처음으로 테프를 끊은 이가 챨스 키니이다. 그는 1855년에 버지니아에서 노예로 태어났다가 남북전쟁이 끝난 후, 열 살 되던 해에 노예 출신 몇 사람과 더불어 미국의 서부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행운을 잡았다. 1878년에 네바다 리노에서 러프브러우의 전도집회에 참여하여 그곳에서 신생 리노 창설 멤버 7인 중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그해 7월 30일에는 엘렌 화잇이 설교할 때에 그녀의 설교 말씀을 듣고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고, 그의 불안정한 삶을 재림 신앙으로 영위되도록 교회의 극진한 사랑을 받아 교회 식구가 되면서 교회의 서기로 선출이 되고, 그를 네바다 선교협회의 서기로 고용이 되면서 그가 1883년에는 힐즈버그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특권을 얻게 되었다.
키니가 2년간의 학업을 마치고 1885년에는 흑인 인종을 상대로 사역을 시작하다가 1889년에 목사의 안수를 받고 켄터키 주 루이빌로 가서 20년이 넘도록 남부지방에서 사역하면서 여러 교회들을 세우면서 흑인들을 대변하면서 활동하였다. 1890년에는 드디어 흑인들을 위한 오우크 대학을 창설하여 미국 내에서 흑인들을 교회사업이 급속도로 발전된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미국 내에서 일어났던 재림교회가 활동하였던 분야로는 절제운동을 빼 놓을 수가 없다. 절제운동은 술과 담배의 판매를 불법화하는 일을 미국에서 라이만 비처라는 목사가 1825년에 시작을 하였다. 부절제가 인류의 적으로 인류의 최대의 희망을 꺾는 일을 전개한 일을 재림교회가 고스란히 물러받아 1870년대에 노예 폐지 운동과 함께 주정음료의 사용 금지를 부르짖으며, 재림교회는 1874년에 대대적인 집회를 개최하여 신문의 머릿기사에서 재림교회의 활동에 대한 면모를 기사로 내보냈다. 1879년에는 존 하비 캘로그의 지도 아래 미국 건강절제협회를 조직하여 나라를 위하여 건강복지 분야에 나름대로 공헌하여 지금도 이 일을 계속 꾸준하게 이행하여 오고 있는 중이다.
우리가 역사가 진행되어 오는 중에서 1872년과 1881년에 두 인물을 재림교회에서 잃게 된 것은 참으로 큰 손실이었다. 한 사람은 죠셉 베이츠 씨이고, 또 한 분은 재임스 화잇이다. 죠셉 베이츠 씨는 1872년 3월 19일 베틀 크릭의 건강개혁 기관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는 사망하기 전 무려 100회 이상의 집회를 인도한 재림운동을 선두에서 이끌어 온 노장이며 투철한 믿음의 용사였다. 죽기 바로 두 달 전에 대총회에 참석하였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보여줄 수 있는 사랑 그 모두를 보여준 분으로 죽을 때에도 하나님의 남은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보호를 위탁하였다.
베이츠는 죽을 때까지 건강을 유지하였으나 반면에 재임스 화잇은 과로로 인하여 1860년 중반에도 한 차례 뇌일혈로 쓰러졌다가 그후 불굴의 의지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나갔으나 끝내는 중풍으로 그의 생애 60년을 맞이하던 해에 사망하는 불운에 직면하여 엘렌 화잇은 말할 수 없는 적적함 속에서 날개 잃은 새처럼 남편을 그리워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남은 여생을 무려 34년을 힘겹게 버터야만 하였다. 엘렌 화잇은 아들 둘을 잃었고, 남편도 잃은 중에 인간으로서 이 죄악된 세상에 사는 고난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세상길을 걷고 있었다.
아직도 재림교회가 주님 오실 날을 위하여 걸어가야 할 길은 많이 남아 있었다. 앞에서도 잠시 거론한 바 있지만 베이츠 씨와 재임스 화잇 목사를 잃은 재림교단이 더 나아가야 할 길이 있다는 데에는 다소 침울한 느낌이 드는 바이다. 그러나 1885년부터 1900년까지는 아직도 넘어야 할 분수령이 있었다. 일어난 것 중의 하나는 재림교회 신학에서의 지각변동이었다. 사실 재림교회는 성경에 예언된 특별한 재림과 세 천사의 기별을 외침에 포커스를 마친 교회로 특별한 신학적 사상을 갖고 있지 못한 교단이었다. 이제는 설교의 초점을 그리스도에게 맞추는 한편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강조하게 된 것이다. 종전에 우리의 입장은 율법을 강조한 면이 두드러졌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의 입장이 율법을 폐지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중요성 그 자리는 그대로 지키되 구원에 대한 새 사상을 폭 깊이 수용하여야 하였다.
1888년과 1899년까지 근 10여 년 동안 대총회가 열릴 적마다 강조된 것이 구원에 대한 신학 사상으로 구세주와 성령에 대한 인식을 주장하여 교육에 대한 일대 쇄신을 꾀하였다. 재림교회는 종전의 일반 개신교에서 믿었던 사상들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집단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 성경만이 교리의 유일한 근거, 구세주로서의 예수의 역사적 역할 및 그의 중보와 기도를 지니고 있는 것에다 독특한 무리로서의 지니는 교리인 안식일, 하늘 성소를 간직하고 있었다. 따라서 재림교인들은 남들이 믿고 있는 것에 다른 것을 포함시킨 것으로 인하여 남들과 자주 토론의 대상이 되곤 하였다. 1850년부터 1890년까지 근 40년간을 특수한 교리만을 강조한 탓으로 인하여 일반 개신교하고는 너무도 동떨어진 인상을 갖게 하였다. 이러던 때에 방향 수정을 기하기 위하여 등장한 인물이 바로 A. T. 존스와 E. J. 와거너였다. 저들은 서부 출신이다. 과거 율법에 대한 강조에서부터 그리스도와 믿음에 중점을 기함으로 신선함을 갖게 한 것이다.
당시의 교인수는 2만 5천명 정도였다. 어떠한 새로운 사조나 운동이 일어날 때에는 항상 대립되는 그룹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구진용에는 대총회장 버틀러와 서기 유라이어 스미스이고, 반대편에는 위에 언급한 두 사람뿐이다. 화잇 선지는 중립을 취하고 있다가 재림교회가 취하여할 태도가 오히려 젊은 사람들의 주장에 있음을 지지하게 되었다. 엘렌 화잇은 계 14:12의 성도의 인내에 대한 언급 중에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자들에 대한 언급에서 두 가지 사상으로 대변되어 전자에서는 하나님의 계명을, 또 다른 후자에서는 예수의 믿음에 역점을 두었었다. 여기에서 재림교회의 신학이 새롭게 파생될 것이었다. 이때에 엘렌 화잇이 존스와 왜고너를 지지함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것에 대하여 그의 편지 중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 증언은 무시되었다. 내 평생에 내가 그 때만큼 푸대접 받은 일은 결코 없었다.” 우리는 이러한 대목을 접하면서 하나님의 선지자로 이 교회와 함께 하였던 그녀였지만 남편이 죽음으로 인하여 왼팔이 잘린 형편 중에서 외롭게 설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형편을 여러 곳에서 보게 될 때에 참으로 착잡한 인간적인 연민의 정이 생겨나게 된다.
우리들은 매우 중대한 시기에 새 사상을 갖고 교회를 일대 중대한 시점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였던 E. J. 왜고너와 A. T. 존스에 대해서 살필 필요가 있다. 왜거너는 1855년 생으로 J. H. 왜고너 목사의 아들이다. 그는 1878년에 뉴욕에서 의사 학위를 받았으나 의사로서 만족함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다시 목회에 입문하여 1884년에는 사인즈 오브 더 타임즈의 부편집인으로 부름을 받아 봉사하였다. 젊은 그가 신학적 전환점을 맞은 때는 1882년 캘리포니아 힐스버그의 야영회 때에 설교를 듣던 중, 성경 이외의 계시라는 것에 체험을 하여 자신이 경험한 바를 수록하였다. “갑자기 내 주변이 빛으로 환해지고 천막 안은 나 보기에 대낮의 태양보다도 더 환하게 밝아졌다. 그때 나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나를 위하여 달리신 것을 보았다. 그 순간 난생 처음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음이 홍수처럼 밀려오며 강한 확신을 느꼈다.” 이와 같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빛으로 인하여 왜고너는 갈라디아서를 심층 연구하여 복음의 의미를 깨닫게 되어 1880년대의 재림교회에서 유명한 인사가 되어 새로운 가르침을 전수시켰다. 그는 매우 온화한 성품의 사람이었다.
이때에 세상에 대해서는 죽고 당신을 향해서는 살기를 원한다고 부르짖는 한 분이 등장하였는데, 그가 알론조 T. 존즈라는 분이다. 그는 1874년 8월 8일 침례를 받은 분으로 자신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확신을 받아 카리스마스적인 면을 지닌 분이며, 준수한 용모에 극단적인 경향이 있는 분으로 자신의 군대 무용담을 자랑으로 여긴 분으로 두려움을 모르는 자였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상대를 적으로 간주하면 마치 총탄을 퍼붓듯이 삶을 사신 분이다. 그의 말이 전투적인 말이라 상대를 많이 괴롭혀 엘렌 화잇은 그에게 심한 말에 경고를 주었으나 자신의 성품상의 결함을 시인하면서도 자신의 성격은 그리스도교 신앙이기 때문에 그것을 회개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저가 한때 다니엘 7장의 유라이어 스미스 씨의 무식한 해석에 대하여 책임이 없다고 말함으로서 선배에게 무례함을 나타내 미네아폴리스의 대총회의 분위기를 악화시키기는 하였으나, 그는 자신이 연구한 바가 옳다고 생각함으로서 자신의 견해를 굽히지 않았다. 그는 합회장으로 과격한 기질로 다소 물의를 일으켰으나, 일요일 휴업령으로 인하여 어려움에 봉착하였을 때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정부를 상대로 맹렬한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신진세대의 출현으로 새로운 신학사조가 등장할 무렵에 교단지도부를 운영하여 나가던 이들 중에는 G. I. 버틀러와 그의 오른팔 역할을 하던 유라이어 스미스가 있었다. 버틀러는 자신이 천성적으로 자신의 본성에 강철 같은 심지를 갖고 있어 예수의 사랑을 소유하지 못하였다고 자신을 토로한 분이다. 그러나 온갖 역경을 내디디면서 견뎌온 재림교회의 행정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면이 없이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젊은 왜고너와 같은 이가 등장하여 많은 마찰을 가져올 때에 나는 “예수님처럼 지혜롭고, 참을성 많고, 친절하고, 마음이 부드럽고, 솔직하고, 모든 사람에게 정당하고 공평하기를 원한다고 편지를 하였으며, 내 속에는 인간의 본성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고, 옛 사람과의 투쟁이 극심하다고 한탄하였다. 그는 자기가 죽기를 바라면서도 그 일을 이루지 못하였던 분이다. 자신의 기질을 고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자신을 아는 방법인데, 그와 같은 사실을 알면서도 고쳐지기 어려운 몀이 인간 마음속에 잠재된 면을 보게 한다.
우라이어 스미스 씨는 오래 동안 본 교단에서 중책을 짊어지고 교회와 함께 한 교회의 원로이며 가장 유능한 저자의 한 사람으로 깊이 있는 학자였다. 새로이 샛별처럼 등장하는 젊은이들에게 대항하여 고칠 양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양면으로 치달리는 상황 중에서 얻을 것이라는 별반 없었다. 이때에 엘렌 화잇 여사는 왜고너 진영과 존스 진영에 참으로 필요한 것이 겸손임을 언급하면서 자제하여 양인에게 온유와 실제적 경건을 계발함이 선을 위한 것임을 전하면서 중재 역할을 하여 왔다.
1888년을 맞아 리뷰지의 첫 논설에서 유라이어 스미스 씨는 다음과 같은 글을 실리면서 재림교회가 취하여야 하였던 자세와 앞으로의 미래 방향도 설정하고 있었다. “우리의 눈은 미래를 응시한다. 해가 갈수록 전망을 점점 더 밝아지고, 주의 오심이 임박하다는 우리의 주장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는 더욱 더 확실해지고 있다. 여러 예언은 성취를 위해 한 점으로 결집되고 있다. 사태는 계속 빨리 전진되고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은 그 주장의 진실성을 입증하고, 그 위에 세워진 소망을 결코 패함이 없다는 일념으로 모든 겸손한 신자들을 위로한다.” 버틀러 대총회장도 비슷한 견해를 표명하기를 “재림교회는 어떤 성경 해석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였다가 후에 부득불 그것을 포기해야 했던 일이 전혀 없었고, 해마다 우리를 하나의 특별한 백성으로 구별해 준 위대한 예언적 주제들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옳았음을 입증하는 증거들은 계속 쌓이고 있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이러한 역사적 줄기에서 이어져 내려왔던 것인데, 이제 바야흐로 계 13장의 짐승의 표가 일어날 것 같은 여러 징후들이 보여지는 시점에서 촉각을 곤두세우는 사건들이 등장하여 요한 계시록 14:12절의 전문에 경각심을 더하여 갔다. 1880년대에 미국에서 등장한 것이 일요일 법제화로 인하여 여러 박해가 생겨났다. 1882년 캘리포니아에서 태평양 인쇄소를 일요일에 가동하였다는 죄목으로 윌리 C. 화잇이 체포된 일이 있었다. 이 사건이 일요일 법률을 폐기함으로 다소 진정이 되었으나 다른 곳으로 계속 번져났다. 1884년에는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아메리칸 센터널 오브 릴리죠스 리버티’ 라는 잡지를 창간하여 세상에 주시시켰었다. 일요일 법제에 관련된 것들이 1885년에서 1887년까지 21건이 발생되어 이 중 2건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안식일을 지키는 교인들이 어려움을 당하였다. 이때에 보석금으로 풀려날 때에 금액이 110달에서 500불에 이르는 엄청난 벌금을 물렸다.
위에서 이와 같은 사태를 목격한 존스 같은 이는 소수인으로 종교를 신봉하는 이들에 대한 법의 가혹한 부당한 처사에 대한 항의를 한 것이다. 이 일은 카톨릭과 일반개신교들이 손을 맞잡은 데에서 일어난 일로서, 이 일로 인하여 다수의 재림교인들 중에 목사들이 일반 죄수와 함께 사슬에 매어 옥외 노동에 투입되었었다. 이러한 일이 있으면서 1888년 5월 21일에는 뉴햄프샤 주 상원의원 블레어가 미 상원에 주의 날을 종교적 경배의 날로 제정하기 위한 법안을 제출하게 되었다. 이것이 최초의 일요일 법안으로 남아져 있다. 이와 같은 일요일 법률 제정 운동을 둘러싼 말세의 흥분이 고조화되었던 때가 바로 1888년 대총회 회기였다.
한쪽에서는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 대한 예언 해석이 급물살을 타 일요일 준수와 관련된 짐승의 표와 말세에 대한 도래로 인하여 흥분이 고조화되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구원에 대한 필요한 의가 어떠한 것인가에 대한 갈라디아서에서 언급된 율법의 역할에 대한 불붙는 뜨거운 논쟁으로 비화되는 시점에 처하게 된 것이다. 헤스켈 같은 분은 안식일을 지키는 이들이 자유를 박탈당하여 법정과 감옥에서 저들이 증언할 내용에 대하여 재림교회가 지금까지 준수하여 왔던 정체성이 와해되지 않고 건전하고도 바른 생애를 영위할 수 있도록 할 일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바의 내용으로는 단 7: 7의 정체성이다. 우리는 예언 해석이 어떠냐에 대한 문제에 골몰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떠한 사태에 대하여 갖추어야 할 정신 자세가 중요한 것이다. 아무리 어려운 사태라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들이 사그라지게 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