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0/21 경찰의 날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09 - 이 대통령 호찌민 묘소 헌화 과거사 직접 언급안해…김대중·노무현 전대통령은 참배·사과 이명박 대통령은 21일(현지시각) 베트남 하노이 바딩광장에 있는 호찌민 전 국가주석 묘소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 대통령은 이날 오전 검은 양복 차림으로 ‘대한민국 대통령 이명박’이라고 쓴 리본이 달린 화환을 앞세우고 묘소를 찾았다. 이 대통령은 묘소 입구에서 화환의 리본을 잠시 만지며 예의를 표시하고 1~2초 간 서 있다가 자리를 떴다. 묘소는 내부 보수 중이어서 호찌민 전 주석의 주검이 있는 내부로 입장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호찌민 전 주석 묘소 참배는 베트남 전쟁 때 31만여명을 파병했던 한국의 정상으로서는 다소 예민한 문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6년 베트남 방문 때 묘소를 찾지 않았고,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은 각각 1998년과 2004년 방문때 묘소에 참배하고 과거사에 대한 ‘사과’ 뜻을 밝힌 바 있다. 청와대 관계자는 “전직 대통령들에 견줘 어떤 의전이 좋을까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며 “이 대통령이 ‘베트남 국민들이 국부(호찌민)에 대해 갖추는 예우에 우리도 맞추는 게 좋다’며 헌화를 결정했다”고 전했다. 이 대통령과 응우옌 민 찌엣 베트남 국가주석은 이날 정상회담과 기자회견에서 두 나라의 ‘과거사’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다. 이 대통령은 다만 회담 인사말에서 “베트남이 역경을 딛고, 아픈 과거를 딛고 미래를 향해 가는 것에 대해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이 발언에 과거사에 대한 이 대통령의 생각이 담긴 것”이라고 전했다. 다른 관계자는 “베트남은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희망하고 있으며, 이번 방문에서도 양쪽이 경제·통상 협력에 초점을 맞춰서 조율했다”고 말했다. 하노이/황준범 기자 /한겨레 2009-10-21 오후 07:23:04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383170.html
2009 - 5·16 쿠데타 주도세력의 인권 침해 확인, 피해자 명예 회복 특별법 제정 권고 2주만에 주요정당·사회단체 인사 2769명 ‘예비검속’ 교원노조 가입 이유로 교사 3천여명 해임·면직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위원장 안병욱)는 5·16 쿠데타 주도세력이 정당·시민단체를 탄압하는 등 시민들의 인권을 침해한 사실을 확인하고, 피해자 명예를 회복하는 특별법 제정을 국회에 권고했다. 진실화해위는 21일 보도자료를 내어 “쿠데타 직후 군부는 군과 경찰·검찰 등을 동원해 진보적 인사와 단체들을 ‘불순·용공 세력’으로 몰아 예비검속한 뒤 위헌적 절차와 법률로 처벌했다”고 밝혔다. 체포된 이들은 장기간 불법구금 상태에서 가혹행위를 당했으며, 법적 근거도 없이 설치된 ‘범법자 분류 심사 위원회’에서 분류된 뒤 혁명재판소 등에 넘겨져 처벌됐다. 한국교원노조총연합회(교원노조)와 경북사회당 등은 ‘반공임시특별법과 데모규제법 제정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반국가 행위자로 처벌됐고, 3000여명의 교사는 교원노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해임되거나 강제 면직됐다. 진실화해위 관계자는 “쿠데타 세력은 쿠데타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예비검속자들을 사회안정을 해치는 불순세력 또는 용공세력으로 몰아 부당하게 탄압하는 등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았다”고 지적했다. 동시에 쿠데타 세력은 절차나 내용 면에서 위헌적인 법률을 통해 통치 과정의 정당성 및 정권 장악을 꾀했다고 진실화해위는 밝혔다. 1961년 6월6일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제정한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은 ‘헌법 또는 법률로 규정할 사항은 국가재건최고회의령으로 정한다’며 입법, 행정, 사법에 관한 국가권력의 전권을 장악했고 당시 의장인 박정희 소장이 단독으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또 예비검속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을 1961년 6월22일 제정했는데, 이 법은 3년6개월 전의 행위까지 처벌할 수 있도록 규정해 헌법의 ‘소급효금지 원칙’을 정면으로 어겼다. 지난해 1월 서울중앙지법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도 1961년 5월18일 예비검속된 뒤 이 법에 소급적용돼 사형을 당한 것이다. 진실화해위 조사 결과, 이 두 법은 지금까지 폐지 공고가 나지 않아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진실화해위 관계자는 “5·16 쿠데타 주도세력이 제정한 국가재건비상조치법 등은 근대 입헌국가의 기본원리인 국민주권주의 및 입헌민주주의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진실화해위는 △국가에 ‘진실규명 신청인’과 유가족에 대한 사과와 재심을 △법원과 헌법재판소에는 당시 제정된 법의 위헌성 여부 판단을 △국회에는 특별법 제정을 통한 피해자들의 명예 회복을 각각 권고했다. 김민경 기자 /한겨레 2009-10-21 오후 08:06:16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83177.html
1996 - 서울국제에어쇼96 개막(~27일, 성남 서울공항) 1996 - 제1회 서울 국제에어쇼 개막 우리 나라 최초의 항공쇼인 '서울 에어쇼' 제1회 행사가 1996년 오늘 성남 서울공항에서 1주일 일정으로 개막됐다. 동북아에서 처음 열리는 이번 서울 에어쇼에 프랑스와 미국, 소련 등 21개 나라, 214개 업체가 참가했다.
1994 - 성수대교 붕괴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가 붕괴됐다. 출근길 차량들로 붐비는 아침 7시40분쯤, 성수대교 북단 5번째와 6번째 교각 사이 상판 50여m가 "꽝" 소리와 함께 북쪽 상판 이음새가 먼저 끊어지고 이어 남쪽 상판이 떨어져 나갔다. 버스와 승용차 6대가 상판과 함께 강물로 추락하고 북쪽으로 달리던 시내버스는 끊긴 다리 끝부분에 뒷바퀴가 걸리면서 한바퀴 빙글 돌아 떨어졌다.
[성수대교 연혁] 1979-10-16 성수대교 개통 1994-10-21 성수대교 붕괴 사고 1997-07-03 성수대교 재개통
- 'The Young Savage' - 'The 400 Blows'
트뤼포 [Truffaut, François, 1932.2.6~1984.10.21] 프랑스 영화감독 트뤼포 사망 누벨바그를 대표했던 프랑스 영화감독 프랑소아 트뤼포가 1984년 10월 21일 사망했다. 그는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까지 영화계를 풍미한 누벨바그를 대표했던 영화제작자이자 영화감독이었다.
1969 - '3선개헌' 개정헌법 공표 제6차 헌법개정 /세계 헌법재판소장 회의 http://www.ccourt.go.kr/home/20symposium_kor/0402.html
1969 -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에 피선 브란트 서독 총리 취임 1969년 오늘 서독 사회민주당 당수 빌리 브란트(Willy Brandt)가 서독의 새 총리로 취임한다.
1969 - 덴마크서 사상 첫 성(性)박람회 개막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 1969년 10월 21일 인류사상 처음으로 막을 올린 성박람회(性博覽會, SEXPO)는 폭발적인 관심을 모았다. 이 박람회는 개막식부터 파격적이어서 수염을 기른 2명의 대회개최자가 대회장입구에 걸쳐놓은 여자의 속옷을 가위로 잘라 테이프를 끊는 것을 대신했으며 개회사도 일장의 연설대신에 반나체의 한 아가씨를 연단에 올려놓고 온몸에 페인트칠을 함으로써 전례를 깼다. 한편 이 박람회를 관람하려고 세계 각국에서 호기심 가득한 신사들이 대거 코펜하겐으로 몰려들었고, 특히 중동지역에서는 성문제 전문가들이 전세비행기에 몸을 실을 정도였다. 전시대에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각도와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폼으로 찍은 성기의 사진들로 장관을 이루었고, 가슴을 온통 드러내 놓은 토플리스 안내양이 있는가하면 가랑잎으로 국부를 겨우 가린 남자악단들이 비틀즈 선율을 연주했다. 또한, 박람회에서 임시로 채용한 비키니차림의 아가씨들이 카메라 앞에 나타나 온갖 교태를 부렸으며 그 가운데 18세 되는 한국태생의 처녀도 있었다. /조선
1969 - 미국의 시인, 소설가 잭 케루악(Kerouac, Jack) 사망 케루악 [Kerouac, Jack, 1922.3.12~1969.10.21] 미국 소설가 겸 시인. 매사추세츠주(州) 로얼 출생. 1957년 《노상(路上) On the Road》을 발표하여 무명작가에서 일약 비트 제너레이션의 주도적 작가로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노상》은 특별한 목적도 없이 방랑하는 비트족들의 에피소드들, 즉 술·음악·성교·약품·과속운전 등으로 경험할 수 있었던 도취를 아무런 맥락(脈絡) 없이 묘사한 일종의 악한(惡漢) 소설이다. 그 밖의 대표작에 남녀의 성문제를 다룬 《지하가(地下街)의 사람들 The Subterraneans》(1958), 선(禪)의 구도정신에 강한 공감을 나타내는 《달마행자(達磨行者)들 The Dharma Buma》(1960) 등이 있다. W.휘트먼, T.울프, H.밀러 등의 영향으로 형식이나 기교에 전혀 구속되지 않는 창작을 주장하며 극도로 반문명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작품의 대부분은 기성의 사회·윤리를 떠나 감각적 자기만족을 찾으며 방랑하는 비트의 생활 바로 그것이었던 그의 반생의 경험이나 교유관계를 기반으로 한 자전소설적 색채가 농후하다. 시집에 《멕시코시티 블루스 Mexico City Blues》(1959) 가 있다. /naver
1969 - 폴란드의 수학자 바츨라프 시에르핀스키(Sierpiński, Wacław) 사망 시에르핀스키 [Sierpiński, Wacław Franciszek, 1882.3.14~1969.10.21] Wacław Sierpiński Wacław Franciszek Sierpiński (March 14, 1882, Warsaw — October 21, 1969, Warsaw) was a Polish mathematician. He was known for outstanding contributions to set theory (research on the axiom of choice and the continuum hypothesis), number theory, theory of functions and topology. He published over 700 papers and 50 books. Three well-known fractals are named after him (the Sierpinski triangle, the Sierpinski carpet and the Sierpinski curve), as are Sierpinski numbers and the associated Sierpiński problem. Education http://en.wikipedia.org/wiki/Wac%C5%82aw_Sierpi%C5%84ski
시에르핀스키 삼각형 시에르핀스키 삼각형(Sierpiński triangle)은 바츨라프 시에르핀스키의 이름이 붙은 프랙탈 도형이다. 시에르핀스키 가스켓(Sierpiński gasket)으로도 불린다. 시에르핀스키 삼각형은 다음과 같은 방법을 통해 얻을 수 있다: 1. 정삼각형 하나에서 시작한다. 2. 정삼각형의 세 변의 중점을 이으면 원래의 정삼각형 안에 작은 정삼각형이 만들어진다. 이 작은 정삼각형을 제거한다. 3. 남은 정삼각형들에 대해서도 2.를 실행한다. 4. 3.을 무한히 반복한다. (발췌) /위키백과
1967 - 워싱턴서 대규모 베트남전쟁 반전시위(21~23일) (발췌) 1967년 10월 21일 토요일. 베트남전을 반대하는 시위대 5만여 명이 링컨 기념관 앞에서 펜타곤 앞으로 행진했다. 히피족(hippie.60년대 중반 물질문명과 국가기관의 통제를 혐오하며 징병 기피, 반전을 주장한 자유주의자)이 대거 참가한 시위대는 펜타곤 정문 앞 광장에서 헌병.경찰과 유혈충돌했다. 시위대 중 과격파가 펜탄곤 진입을 시도하려다 소총을 든 헌병과 경찰에 의해 폭행을 당해 5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라크전 발발 4년 … 전쟁은 미국이 실속은 이란이] 이상일 기자 [leesi@joongang.co.kr] /중앙일보 2007.03.19 05:10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2665428&ctg=13
로마올림픽 마라톤 경기가 열린 1960년 9월 10일, 검은 피부에 깡마른 체구 더구나 맨발까지 한 아베베 비키라가 로마의 콘스탄틴 개선문에 제일 먼저 들어섰을 때 관중들은 어리둥절해했다. 듣도 보도 못한 선수였기 때문이었다. 주최측도 이름을 두 번이나 정정하며 우왕좌왕했다. 6ㆍ25참전용사였던 에티오피아 황실 근위병 아베베는 이렇게 세계 마라톤계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2시간15분16초2, 세계 신기록이었다. 아프리카 흑인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이었고 이후 펼쳐질 검은 돌풍의 서막이었다. 아베베는 운동화를 신고 4년 후 도쿄 올림픽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1964년 10월 21일, 아베베는 또 우승했다. 2시간12분11초2, 역시 세계신기록이었다. 셀라시에 에티오피아 황제는 ‘맨발의 영웅’을 일등병에서 중위로 수직상승시키고 승용차 폴크스바겐을 하사했다. 그러나 승용차는 그에게서 다리를 빼앗아간 흉기가 되고 말았다. 1969년 자동차 사고로 하반신 불수가 된 것이다. 그래도 아베베는 장애인 올림픽에 출전, 양궁과 탁구선수로 최선을 다하며 자신을 ‘영원한 스포츠맨’으로 세계인의 기억 속에 각인시켰다. /조선
1959 - 아이젠하워 '독일 과학자 영입' 결정 ㆍ‘로켓 선구자’ 얻어 우주개발 본격화 올해 부문별 노벨상 수상자들이 발표되면서 시선은 온통 미국으로 쏠렸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논란 많은 평화상 수상은 논외로 치더라도, 올해 7개 부문 수상자 13명 중 무려 11명이 미국 국적을 가진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미국의 돈과 야심이 노벨상 독식을 가져왔다”는 해석이 나왔고, 유럽은 연구·개발(R&D) 예산을 늘려서라도 자기네 지역 출신 수상자들을 늘려보겠다며 벼르고 있다. 구정은기자 ttalgi21@kyunghyang.com /경향신문 2009-10-20 17:48:22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10201748225
1959 -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개관 [책갈피 속의 오늘]1959년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개관 어느 날 나이 예순두 살의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1867∼1959)에게 악마가 다가온다. 악마는 라이트에게 간단한 수수께끼를 풀면 청춘을 되돌려 주겠다고 약속한다. 구겐하임 미술관은 “미술관에 소장된 수집품 중 가장 빛나는 현대미술 걸작”이라는 찬탄과 “세탁기처럼 보인다. 꼬인 리본 덩어리 같다”는 비난도 이어졌다. 또한 윌럼 드 쿠닝 같은 작가들은 자신의 그림을 곡선 벽에 전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화를 냈다. 그러나 이 미술관은 매년 90만 명 이상의 방문객이 찾는 현대미술의 메카가 됐다.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610210093
1956 - 고무우카, 폴란드 공산당 서기장 취임 고물카, 폴란드 공산당 서기장 취임 그러나 집권 후반기로 갈수록 가톨릭계와 지식인, 언론에 대한 탄압으로 점차 지지를 잃는다.
1945 - 미 군정청에 경무국 창설(국립경찰 창설) 경찰의 날[ 警察―― ] 경찰 창립을 기념하는 날로 10월 21일. 민주경찰의 사명감을 고취하고 국민과 경찰의 협조분위기를 조성하여, 사회기강 확립과 질서유지를 다짐함과 동시에 경찰관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한 기념일이다. 광복 후인 1945년 10월 21일 미군정청 안에 경무국이 창설되고, 1948년 정부수립과 동시에 국립경찰로 발족한 이래, 매년 10월 21일을 ‘국립경찰창립일’로 기념하여왔다. 이 날은 정부에서 유공경찰공무원에게 포상을 실시하며, 경찰관의 무도대회 및 사격대회 등을 개최하는 한편, 국립묘지 참배와 병원에 입원 중인 경찰관을 찾아 위문도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945.10.21 - 미군정청 경무국 창설 1948.00.00 - 미군정청 경무국 창설일인 10월 21일을 "국립경찰 창설일"로 설정 기념 1957.11.07 - 10월 21일을 “경찰의 날”로 지정 (내무부훈령) 1971.09.01 - “경찰의 날 규정” 제정 (내무부훈령) 1973.03.30 - 법정기념일로 제정
1944 - 가미카제, 연합국 함대 공습 [오늘의 경제소사/ 10월 21일] <1529> 가미카제 1944년 10월21일 오전6시15분, 필리핀 레히테만 인근 해역. 함포 사격을 위해 항진하던 연합국 함대를 일본 해군 항공대의 공습편대가 덮쳤다. 가미카제의 첫 격침 기록은 24일, 1,120톤급 예인선이 가라앉았다. 이튿날에는 7,800톤짜리 호위 항공모함 세인트로호가 격침됐다. 양측이 닷새 동안 모두 250만톤이 넘는 함정을 동원해 사상 최대 규모의 해전으로 꼽히는 '레히테만 해전'에서 일본은 완패했어도 자살공격으로 5척 격침에 23척 대파, 12척 파손이라는 성과를 거뒀다. 권홍우편집위원 /서울경제 2009/10/20 17:36:33 http://economy.hankooki.com/lpage/economy/200910/e2009102017363397490.htm
1925 - 쿠바 태생의 미국 가수 셀리아 크루스(Cruz, Celia) 출생 크루스(크루즈) [Cruz, Celia, 1925.10.21~2003.7.16] [역사 속의 인물] 살사의 여왕 셀리아 크루즈 재능을 타고났다면 굳이 숨길 필요는 없다.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면 삶의 돌파구가 된다. 그 예가 쿠바 출신 살사의 여왕 셀리아 크루즈의 경우다. 1924년 오늘 쿠바 아바나 인근에서 태어난 셀리아 크루즈는 어려서부터 노래에 뛰어났으나 아버지는 공부를 계속해 스페인어 교사가 되길 원했다. 하지만 크루즈는 스페인어 교사로부터 “교사 월급보다는 엔터테이너가 훨씬 수입이 좋다”는 충고를 들은 후부터 1등에게 케이크를 주는 아바나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가 종종 케이크를 타오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크루즈가 10대였던 1930년대는 쿠바에 다양한 음악장르와 유명 음악가들이 활동하던 시기로 특히 살사는 정열적이고 다이내믹한 8박자의 리듬이 특징이었다. 삶의 전기는 1950년 쿠바의 유명 오케스트라 ‘소노라 마탄케라’의 리드싱어가 그룹을 떠나면서 그 자리를 종신계약으로 크루즈가 채우면서부터였다. 그룹은 곧 쿠바와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유명세를 탔다. 그녀는 공연 때마다 스페인어로 ‘설탕’을 뜻하는 ‘아주카르’를 외쳐 이를 트레이드 마크로 삼았다. 이후 미국으로 이주, 대부분을 뉴저지주에 살았으며 1948년 베네주엘라에서 첫 공식 앨범을 녹음한 이래 23개의 골든 앨범을 발표해 세계적인 스타가 됐다. 1990년 그래미상을 수상했으며 2003년 뇌종양으로 사망했다. 우문기기자 /매일신문 2010년 10월 21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2609&yy=2010
1920 - 청산리 대첩(靑山里 大捷) 오늘의 역사 (10월 21일)[1920년] 청산리 대첩 1920년 만주와 간도 지방에서 독립군의 운동이 활발해지자 일본군이 대거 간도로 출병해 대대적인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 일본군의 출병 정보를 접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등 우리 독립군 2800여 명은 백두산 방면으로 이동했다. 그래도 일본군의 추격이 계속되자 북로군정서군은 백두산 동북쪽 60여km 지점에 있는 청산리 백운평 위쪽 계곡에 포위망을 쳐놓고 전투준비에 돌입했다. 1920년 10월 21일 오전9시, 일본군 부대가 계곡의 좁은 길을 따라 올라오자 매복하고 있던 북로군정서군으로부터 집중 포화가 시작됐다. 30분 만에 끝난 전투에서 200명의 일본군이 사살됐다. 6일간 10여차례의 전투 끝에 일본군 3000명을 사살한 ‘청산리 대첩’의 첫 승리였다. 다시 김좌진 부대가 밤을 새며 이동한 곳은 120리 떨어진 천수평이었다. 그 사이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은 이도구 완루구에서 일본군 400여 명을 전멸시켰다. 22일 새벽에 백운평에서 일본군 기병 27연대 소속 1개 중대를 섬멸한 김좌진 부대는 일본군 사단사령부가 있는 어랑촌으로 장소를 옮겼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 속에서도 독립군은 언제나 연전연승이었다. 독립군과 일본군 모두 최대 병력을 투입한 어랑촌전투는 청산리 대첩 가운데 가장 큰 전과를 올리며 일본군 1,000~1,200여 명을 사살했다. 26일 홍범도 부대가 고동하 골짜기 전투에서 마지막 승리를 장식함으로써 한국 독립운동사에 찬란한 승전보로 기록된 ‘청산리 대첩’도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조선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00330_0018
[그때 오늘] 청산리 대첩 빛나는 승리 1919년 3·1운동 당시 이 땅의 사람들은 타는 목마름으로 독립을 갈망했다. 그러나 평화적 시위만으로 일제의 사슬을 벗어날 수 없음을 가슴 깊이 새긴 이들은 무기를 손에 들었다. 1920년 1월 초 상해 임시정부를 이끌던 안창호가 행한 연설은 이를 웅변한다. “독립운동을 평화적으로 계속하려는 방침을 고쳐 전쟁하려 함이오. 독립전쟁에 반대하는 자는 독립에 반대하는 자요.” 서북간도의 독립군들이 펼친 국내 진공작전, 특히 홍범도가 그해 6월에 거둔 봉오동 승첩은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일제는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2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하였다. “중국 땅에서 전사한다면 개죽음과 같다. 일시 백두산 지방에 회피, 결빙을 기다려 한 발자국이라도 조선 땅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 의의 있는 희생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때 독립군은 홍범도의 증언처럼 물러서기는커녕 조국을 향해 진군하였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중앙일보 2009.10.20 19:40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ctg=2002&Total_ID=3834349
1904 - 아일랜드의 시인, 소설가 패트릭 카바나(Kavanagh, Patrick) 출생 카바나 [Kavanagh, Patrick, 1904.10.21~1967.11.30] Patrick Kavanagh (21 October 1904 – 30 November 1967) was an Irish poet and novelist. Regarded as one of the foremost poets of the 20th century, his best known works include the novel Tarry Flynn and the poems Raglan Road and The Great Hunger. His work can best be categorised as accounts of Irish life and achieved a universal appeal through reference to commonplace. Birth and early life http://en.wikipedia.org/wiki/Patrick_Kavanagh
1894 - 제2차 동학농민운동 한편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관군과 일본군은 급히 증원부대를 요청, 동학군이 공주에 이르렀을 때에는 이미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10월 21일 전봉준의 10만 호남군과 손병희의 10만 호서군은 관군과 일본 연합군을 공격, 혈전을 거듭하였으나 상대방의 막강한 근대적 무기와 화력으로 인해 우금치(于金峙)에서 결정적 패배를 당하여 논산·금구·태인 등으로 퇴각하였다. 전봉준은 순창(淳昌)에서 재기를 꾀하던 중, 11월 배반자의 밀고로 체포되어 1895년 3월 서울에서 처형되었다. 이로써 미증유(未曾有)의 광범한 민중의 무장봉기로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은 1년 동안에 걸쳐 30∼40만의 희생자를 낸 채 끝났고, 이들의 개혁의지는 이후의 정치에 큰 영향을 끼쳐 위정자의 반성과 각성을 촉구하여 갑오개혁(甲午改革)의 정치적 혁신을 가져왔다. /naver
1891 - 프랑스의 항해가 에릭 드 비숍(de Bisschop, Eric) 출생 드 비숍 [de Bisschop, Eric, 1891.10.21~1958.8.30] Eric de Bisschop (October 21, 1891-August 30, 1958) was a French seafarer, famous for his travel from Honolulu to France aboard the Polynesian sailboat Kaimiloa. He spent most of his adult life in the Pacific Ocean, notably in Honolulu (1935-37 and 1941-47) and in French Polynesia (1947-56); he was not simply a sea adventurer but had a deep interest in the Pacific and its inhabitants, whose history he tried to study. Biography http://en.wikipedia.org/wiki/Eric_de_Bisschop
<오후여담> 불 미국의 토머스 에디슨은 1879년 10월21일 진공 유리구 속에 대나무를 태운 탄소 필라멘트를 넣고 전기를 흘린 결과 40시간 이상 빛을 내게 하는 데 성공, 백열등을 발명했다. 독일 역사학자 에밀 루트비히는 에디슨의 발명에 대해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발견한 이후 인류는 두 번째 불을 발견한 것이다. 인류는 이제 어둠에서 벗어났다”고 칭송했다. 한국에서 최초로 전등을 접한 이들은 1883년 조미(朝美)조약 1주년을 기념해 미국에 파견한 보빙사절단이었다. 미국에서 전기와 전등을 보고 감동한 사절단은 고종에게 보고하고 3개월 후 에디슨전등회사에 발전설비 일체를 주문한다. 1884년 일어난 갑신정변의 혼란으로 1887년 3월에야 한국 최초의 전등이 불을 밝히게 된다. 고종이 단독출자한 회사인 한성전기는 당시로는 거금인 2만5000달러를 들여 경복궁 후원인 향원정에 발전설비를 갖추고 궁궐의 밤을 낮으로 만들었다. 당시 설비는 16촉광 전등 750개를 밝힐 수준이었지만 동양에서는 가장 훌륭한 설비였다.(한국전력 전기100년사) 그러나 잦은 고장에 유지비용도 만만치 않아 사람들은 전등불을 ‘건달불’로 불렀고 전등설비 철폐를 주장하는 상소도 빗발쳤다고 한다. 에디슨이 발명한 백열등이 130여년 만에 꺼질 처지에 몰렸다. 미 하원이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해 지난 18일 2012년부터 백열등 사용을 금지하고 형광등이나 발광다이오드(LED)를 사용케 하는 등의 새 에너지법안을 통과시키고 부시 대통령이 다음날 서명했기 때문이다. 미국에 앞서 호주, 뉴질랜드, 일본 등도 백열등 없는 세상을 이미 선언한 바 있다. 백열등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운명에 처한 것은 낮은 에너지 효율 때문. 전기로 텅스텐 필라멘트를 가열하면 섭씨 3000도의 열이 발생하는데 이중 불과 5%만이 빛으로 전환된다. 국내기업 삼성전기가 최근 미국 캘리포니아 주정부가 추진하는 6억 달러 규모의 조명등 교체 프로젝트와 관련, 주정부 산하 조 명기술연구소와 양해각서를 체결했다고 한다. 인류를 어둠에서 해방시킨 에디슨의 발명을 건달불로 부르며 일찍이 퇴장을 주장한 조상의 혜안(?)도 그렇지만 한국 최초의 전등을 수출한 그 미국에 국내기업이 새로운 조명등을 설치하게 됐다니 감회가 새롭다. [이동윤 / 논설위원] <오후여담> 오피니언 /문화일보 2008-01-01 11:54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8010101033037006002
1874 - 스위스의 군사 지도자, 민족 영웅 앙리 기장(Guisan, Henri) 출생 기장 [Guisan, Henri, 1874.10.21~1960.4.8] [역사 속의 인물] 나치 독일을 움츠리게 한 용장, 앙리 기장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 스위스군 총사령관이 된 앙리 기장. 그는 나치 독일의 침략 위협 속에서 휘하 장교들에게 기백이 넘치는 극적인 사자후를 토했다. “탄약이 떨어질 때까지 싸워라. 총알이 떨어지면 총검으로라도 싸워라. 절대 항복은 없다. 죽을 때까지 싸워라.” 제대로 된 정규군조차 없었던 스위스는 국민동원령을 선포했는데 이 연설이 알려졌기 때문인지 7일 만에 40만 명의 병력이 소집됐다. 스위스는 영세중립국으로 2차대전의 참화를 입지 않았다. 말로만 중립국을 표방한 것이 아니라 무장하고 결연한 의지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앙리 기장이 구심점 역할을 했다. 기장은 알프스의 산악 요충지를 중심으로 게릴라전을 펼치며 끝까지 저항한다는 전략을 짰다. 모든 터널과 교량을 파괴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나치 독일은 스위스 국민의 결기에 부담을 느꼈고 자국도 이용하고 있던 금융`교통 시스템이 무너질까 봐 결국 침공하지 않았다. 기장은 한편으로 나치 고위 간부와 극비리에 만나 독일이 공격하지 않으면 민병대 동원령을 내리지 않겠다고 구슬렀다. 스위스는 자국의 안위만 챙겼다는 비난도 받았으나 결국 기장의 강온 전략에 힘입어 국토를 보전할 수 있었다. 스위스 국민은 그를 국가의 영웅으로 기린다. 1874년 오늘 태어나 1960년에 86세의 나이로 숨졌다. 김지석 편집부국장 /매일신문 2014.10.21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 53132&yy=2014#axzz3Gx9ibaPF
1854 - 플로렌스 나이팅게일과 38명의 간호사 크림 전쟁 전장으로 가다 (발췌) 1844년 이후 의료시설에 강한 관심을 가지고, 유럽·이집트 등지를 견학, 귀국 후 정규 간호교육을 받고(바라던 간호사가 된 것은 30세 때였다), 런던 숙녀병원의 간호부장이 되었다. 1854년 크림전쟁의 참상에 관한 보도에 자극되어 국민모금을 통해 기금을 모은 뒤, 38명의 간호사들과 함께 이스탄불의 스쿠타리로 가서(11월 4일 스쿠타리에 도착) 야전병원에서 활약하였다. 환자쪽 입장을 살린 야전병원 개혁을 단행하여, 불과 몇 개월 내에 사망률을 반감시켰다.
1833 - 스웨덴의 발명가 알프레드 노벨(Nobel, Alfred) 출생 노벨 [Nobel, Alfred Bernhard, 1833.10.21~1896.12.10] [오늘의 경제소사/10월21일] 알프레드 노벨 전쟁과 평화. 노벨의 삶과 죽음을 압축하는 두 단어다.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주인공인 동시에 노벨상이라는 불멸의 유산을 남긴 노벨은 어려서부터 극과 극을 오가며 자랐다. 1833년 10월21일 스웨덴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파산과 재기가 반복되며 어머니의 야채행상과 형들의 성냥팔이로 겨우 생계를 꾸려나갔다. 훗날 부친이 러시아에서 무기사업에 성공한 덕에 가정교사들로부터 개별교습을 받았지만 초등학교 2학년 수료가 정규교육의 전부인 것도 이 때문이다. 베니어를 발명한 건축가이자 무기 제조업자였던 부친의 사업이 크리미아 전쟁에 패배한 러시아의 주문량 격감으로 망해갈 무렵 노벨 가문은 석유라는 새로운 기회를 잡았다. 소총 개머리판에 쓸 목재를 구하기 위해 방문한 바쿠 지역의 거대한 유전에 투자한 덕분이다. 원유를 운반하는 파이프라인과 유조선을 처음 만든 사람도 노벨 형제들이다. 노벨 자신은 다이너마이트와 ‘폭발성 젤라틴’, 무연화약을 잇따라 발명, 세계 각국에 90개 무기 및 폭약공장을 소유한 재산가로 떠올랐다. 어디서든 연구하기를 좋아했던 노벨은 폭약뿐 아니라 광학ㆍ기계공학ㆍ생리학과 수혈에 이르기까지 모두 355종의 특허를 등록했다. 다국적기업 총수로서, 발명가로서의 삶에 만족하던 노벨은 1888년 대전환의 계기를 맞았다. 바로 윗형의 죽음을 노벨의 사망으로 착각한 파리의 한 신문사가 잘못 내보낸 ‘죽음의 상인 노벨 사망’이라는 부고(訃告) 기사를 보고는 인류를 위해 공헌한 사람들을 위해 재산을 바치겠다고 결심한 것. 노벨재단과 노벨상이 탄생한 연유다. 평생 독신으로 살다 59세인 1896년 하직한 노벨의 사망일인 12월10일에는 매년 노벨상 시상식이 열린다. 권홍우 <편집위원> /서울경제 2006/10/20 17:06
- Gibraltar, 20 Pounds (Banknote)
1805 - 영국 해군제독 넬슨 트라팔가 해전서 나폴레옹 함대 격파, 전사 넬슨 [Nelson, Horatio, 1758.9.29~1805.10.21] [어제의 오늘]1805년 영국, 트라팔가르 해전 승리 ㆍ넬슨 제독, 나폴레옹의 야심 저지 세계 4대 해전 중 하나로 손꼽히는 전투다. 호레이쇼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해군이 나폴레옹 전쟁(1803~1815) 기간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면서 영국을 정복하려던 나폴레옹의 야심이 저지됐다. 최민영 기자 min@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0-10-20 21:49:43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10202149435
1790 - 프랑스의 시인, 정치가 알퐁스 드 라마르틴(Lamartine, Alphonse de) 출생 라마르틴 [Lamartine, Alphonse de, 1790.10.21~1869.2.28] 부르고뉴주(州) 마콩의 명문 출신. 리옹과 베리의 중학교에서 가톨릭 교육을 받고 1811년 이탈리아를 여행, 1814년 군무에 복무하고 1815년 제대하였다. 1816년에 연상의 유부녀 샤를 부인과 사랑에 빠졌으나, 부인은 얼마 후 병사하였다. 사랑을 잃은 절망에서 써낸 《명상시집(瞑想詩集) M ditations po tiques》(1820)은 오랫동안 잊혀져 왔던 서정시를 다시 부활시켰다. 1820∼1830년까지 외교관으로 피렌체 대사관에 근무하였으며, 영국 부인과 결혼하였다. 그 동안 《속(續) 명상시집》(1823) 《시와 종교의 조화》(1830) 등을 발표하였고, 1829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었다. 7월혁명(1830) 이후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국민의회 의원에 선출되고(1833), 2월혁명(1848) 때에는 임시정부의 외무장관에 취임하였으나, 대통령 선거전에서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 3세)에게 패하고 1851년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만년에는 막대한 빚에 몰려 많은 작품을 써냈으나 볼 만한 작품은 내지 못했다. 그는 천성적인 서정시인으로서, 정감의 흐름을 그 자신의 진지한 감동을 가지고 아름다운 음악적인 문체로 평이하게 표현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시(詩)에 《천사의 타락》(1838) 《시적 명상》(1839), 소설에 《라파엘로》(1849) 《그라지엘라 Graziella》(1849), 사서(史書)로 《지롱드 당사(黨史)》(1847) 《왕정복고사(王政復古史)》(1852) 등이 있다. /naver
1785 - 미국의 하천기선 선장, 수운업자 헨리 슈리브(Shreve, Henry) 출생 슈리브 [Shreve, Henry Miller, 1785.10.21~1851.3.6] [오늘의 경제소사/10월21일] <1221> 슈리브 선장 헨리 슈리브(Henry Shreve). 미국 건국 초의 수운업자다. 평생을 강에서 보낸 그는 경제사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독점체제를 깨뜨리고 철도 등장 전까지 물류혁신을 이끌었다. 권홍우 편집위원 /서울경제 2008/10/20 17:41:36 http://economy.hankooki.com/lpage/economy/200810/e2008102017413697490.htm
(발췌) 1815년 5월 그는 엔터프라이즈호를 타고 기선으로는 처음으로 미시시피와 오하이오에서 켄터키 루이빌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그러나 하천기선을 완전히 새롭게 설계해야 할 필요성을 느껴 워싱턴호를 제작했다. 이 배는 선체가 평평하고 흘수가 작으며, 고압증기기관을 창고가 아닌 주(主)갑판에 설치했고 이중갑판으로 되어 있다. 1816년 이 배로 피츠버그에서 뉴올리언스까지 왕복운항을 한 뒤 루이빌로 돌아옴으로써 미시시피 강의 기선 선형을 확립시켰다. /브리태니커
1772 - 영국의 시인, 비평가 새뮤얼 콜리지(Coleridge, Samuel) 출생 콜리지 [Coleridge, Samuel Taylor, 1772.10.21~1834.7.25] 데본셔의 킹즈스쿨 출생. 그의 소년 시절 신동(神童)의 모습은 친구인 C.램의 《엘리아 수필집 Essays of Elia》에 쓰여 있다. 케임브리지대학 졸업 후 친교를 맺은 W.워즈워스와 1798년 《서정 가요집 Lyrical Ballads》을 공저 ·출판하였는데, 이것은 영국 낭만주의에 기념할 만한 사건이 되었다. 서사시 《늙은 선원의 노래 The Rime of the Ancient Mariner》, 그리고 아편을 피우고 그 환상 속에서 창작하였으며, 영어로 쓰여진 최초의 초현실주의 시라고 일컬어지는 《쿠빌라이 칸[汗] Kubla Khan》, 미완성의 서사시 《크리스타벨 Christabel》 등 이상 3편의 대표작은, 환상적 ·상징적인 설정 속에서 인간 의식의 심연(深淵)을 탐구한 걸작이다. 이 밖에 《심야의 서리》 등의 ‘회화시(會話詩)’라고 불리는 몇 편의 독특한 작품도 1797∼1798년이라는 짧은 시일에 쓰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시적 창작력은 급속히 감퇴되어, 그 괴로움을 노래한 《실의의 노래》(1802)가 최후의 수작(秀作)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와 더불어 평론가 ·사상가로서 대성하였으며, 대표적 평론 《문학평전 Biographia Literaria》(1817)과, 강연 ·담화 ·수첩 등의 형식으로 셰익스피어론을 비롯한 많은 평론으로 평론사상의 거장의 위치를 확립하였다. 콜리지는 18세기 합리주의를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인간 최고의 능력으로서의 상상력의 우위를 강조한 이론적 ·철학적 방법론은 시적 직관에 뒷받침되었으며, 20세기의 ‘신비평’ 등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사색은 종교와 정치영역에까지 미쳤으며, 19세기 중엽의 그리스도교 사상에도 영향을 주었다. 오늘날에야 비로소 발간되는 그의 방대한 ‘수첩’은 프로이트를 예언하는, 심리적 통찰에 가득찬 귀중한 인간기록이기도 하다. 가장 낭만주의적인 작품을 쓴 시인 ·사회비평가 ·문학평론가 ·신학자 ·심리학자로서 그는 인간 존재와 전우주의 본질적인 창조적 원칙을 해명하고자 노력하였다. /naver
1650 - 프랑스의 해군장교 장 바르(Bart, Jean) 출생 바르 [Bart, Jean, 1650.10.21~1702.4.27] 루이 14세 시절의 많은 전쟁에서 능숙하고 대담한 작전으로 전공을 거둔 것으로 유명하다. 어부와 사략선 선원을 하던 집안에서 태어나 네덜란드 해군에 입대해 미킬 데 로이테르 제독 밑에서 군생활을 시작했다. 프랑스와 네덜란드 사이에 전쟁(1672~78)이 발발하자 됭케르크로 돌아왔다. 됭케르크 해안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의 소형 사략선들로 구성된 선대를 지휘해 대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6차례의 전투에서 적선 81척을 나포하고 루이 14세로부터 중위계급에 임명되는 포상을 받았다. 대동맹전쟁(1689~97)에서 영국군의 포로가 되었지만, 플리머스에서 탈주해 52시간 노를 저어 프랑스 해안에 도착했다. 대위로 진급한 그는 비치헤드 전투(1690)에서 '알시옹호(號)'를 지휘하고 그후 됭케르크에서 1개 전대의 군함을 지휘했다. 1694~95년의 영국군 공격으로부터 됭케르크를 방어했다. 1969년 6월 프랑스가 기근에 직면하고 있을 때 네덜란드 해안 앞바다에서 네덜란드 함대와 교전을 벌여 러시아·폴란드의 밀을 싣고 있던 96척의 배들의 호위함을 나포했다. 이 공적에 대한 보답으로 왕은 그에게 귀족계급을 수여했다. 소함대의 함대장이 된 그는 1697년 폴란드 왕위계승 후보인 콩티 공(프랑수아 루이 드 부르봉)을 호송해 6척의 쾌속범선을 이끌고 적의 엄중한 봉쇄망을 뚫고 그다인스크에 입항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는 30척의 군함을 격침하고 200척 이상의 상선을 나포했다. /브리태니커
1520 - 마젤란 해협 발견 1520년 10월 21일 스페인의 후원을 받아 항해하던 포르투갈인 마젤란(Magellan, Ferdinand, 1480~1521)이 대서양과 태평양 사이의 해협을 발견했다. 마젤란은 이 해협을 항해함으로써 최초로 세계일주 항해를 한 탐험가가 되었다. 1517년 10월 20일 스페인으로 간 마젤란은 스페인 지배하의 항로를 찾기 위한 원정대의 합동 총사령관이 되어 1519년 9월 20일 산루카르데바라메다를 떠나 항해를 시작했다. 9월 26일 테네리페에 도착한 뒤 10월 3일 브라질을 향해 떠났고 11월 29일 세인트아우구스티네 곶 남서쪽 129.6㎞ 지점에 도달한 후, 카보프리오를 돌아 12월 13일 리우데자네이루 만에 도달했다. 1520년 산티아고 근처의 산타크루스 강 어귀에 도착한 후, 10월 21일에는 버진스 곶(비르헤네스 곶)을 돌아 남위 52° 50'쯤 되는 곳에서 한 해협으로 들어섰다. 이곳이 바로 마젤란 해협이다. 이후 마젤란은 막탄 섬 원주민과의 싸움에서 죽었지만, 그의 배는 계속 서쪽으로 항해를 해서 최초로 세계일주에 성공했다. 마젤란 해협은 1914년 파나마 운하가 완공되기 전까지 대서양과 태평양 간의 중요한 항로였다.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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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