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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州韓氏(청주한씨) 始祖(시조) 韓蘭(한란)
馬韓 元王(마한 원왕)의 次男(차남)이신友諒(우량) 왕자로부터 32세 후손이시며,太祖 王建(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를 개국한開國功臣高麗三重大匡太尉(개국공신 고려 삼중대광 태위)에 오르신 분이다.
또한 吐蘭里(토란리)는 지금의 忠北 永同郡 黃澗面 蘭谷里(충북 영동군 황간면 란곡리)의 옛 이름이다.
馬韓 元王(마한 원왕)의 아들 諱 友諒(휘 우량)이 나라를 百齊(백제)에 빼앗기고 新羅(신라)에 亡命(망명)하였으므로 거주지가 신라의 영역이며 亡國(망국)의 恨(한)에 깊이 멍든 王孫(왕손)으로서 名利(명리)를 外面(외면)하고 安穩(안온)한 삶을 取(취)하기 위해서는繁雜(번잡)한 國都 慶州(국도 경주)와 거리가 멀고 故國(고국) 땅을 버리고 가는 아쉬움에 接境地帶(접경지대)인 黃澗(황간)에 居地(거지)를 정하게 된 것이 당시의 情勢(정세)로 보아 족히 首肯(수긍)할 수 있으며 여기서 世居(세거)하던 家門(가문)에서 府君(부군)께서 誕生(탄생)하신 事實(사실)이 黃澗邑誌(황간읍지)에 明記(명기)되어 傳來(전래)되어 왔음을 後裔(후예)들로서 뒤늦게나마 알 게 된 것이 한 편으로 無上(무상)의 多幸(다행)이다.
京釜線 永同驛(경부선 영동역)과 秋風嶺(추풍령) 사이에 黃澗(황간)역이 있으니 이 驛(역) 所在地(소재자)가 黃澗邑(황강읍)이요, 읍에서 東北方 二里許(동북방 2리여)에 蘭谷里(란곡리)가 있으니 蘭谷(난곡) 입구에서 좌측으로 數百步 之点(수백보 지점)에 府君(부군)의 誕生基地(탄생기지)가 보이는데 이곳을 洞里 사람들은 韓政丞 胎地(한정승 태지)라고 부른다.
府君(부군)께서 誕生(탄생)하실 때 부근 山野 一帶(산야일대)의 地面(지면)에서 땀(汗)이 흠씬 흘렀다 하여 이 동리를 土汗里(토한리)로 부르게 되었더니 후일에 吐蘭里(토란리)로 改稱(개칭)하였다가 현재는 蘭谷里(란곡리)로 되어있다.
洞里 옆 山嶝(산등)을 넘어서 訪花洞(방화동)이라 稱(칭)하는 층층 山峰(산봉)이 둘러쌓은 山谷間(산곡간)에 韓政丞 草堂(한정승 초당)터가 있으니 府君(부군)께서 構道(구도)하시던 옛 草堂 遺基(초당 기지)로서 부근 土砂(토사) 中에는 千年 前(천년 전)의 기와 조각이 아직도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草堂(초당)과 本宅(본택)과의 중간에 山麓(산록)이 가로막혀 있음으로 줄을 연결하고 양쪽 끝에 방울(鈴)을 달아 賓客(빈객)이 있거나 食事(식사)등의 용우가 있을 때는 줄을 흔들어 신호로 했다는 傳說(전설)도 全洞理(전동리)가 다 아는 有名한 說話(설화)이다.
始祖 遺基 敍事 碑文(시조유기서사비문)
우리 韓氏(한씨)는 저 高麗 王朝(고려 왕조)가 新興(신흥) 할 때부터東方大姓(동방대성)이었다.
처음 고려가 新羅(신라)를 降伏(봉복)받고百濟(백제)를 滅亡(멸망)시켜 三韓(삼한)을 統合(통합)하는 業績(업적)을 이룩할 때 당시에 勇力(용력)을 다하고 智略(지략)을 짜서 協贊(협찬)한 사람이 數十人(수십인)이었다.
그 중에 韓 蘭(한 란)이라는 어른이 있어 建國元勳(개국원훈)으로서 벼슬이 太尉三重大匡(태위삼중대광)에 이르고이름이 壁上(벽상)에 오르시니 이 어른이 바로 韓氏(한씨)의 始祖(시조)이시다.
太尉(태위)께서는 세상에 드문 材質(재질)로 草野(초야)에서 일어나서王政(왕정)의 大業(대업)을 일으켜 覇權(패권)을 잡은 功勳(공훈) 높은 業績(업적)은 自古(자고)로 드문 일이다.
또 積德(적덕)하고 積善(적선)하여 代代(대대)로 이어가면서 그 美德(미덕)의 發揮(발휘)로 子孫(자손)들이 온 朝廷(조정)의 벼슬길에 올라 高官大爵(고관대작)이 輩出(배출)되었으니 國史(국사)나 家乘(가승)에서 차례로 줄 지어 볼 수 있다.
例(예)를 들어 그 中에서 名聲(명성)이 높으신 어른만도 禮賓尹卿 光胤(예빈윤경 광윤)과 都僉中贊 康(도첨중찬 강)과 寶文閣提學 謝奇(보문각제학 사기)와 思肅公 渥(사숙공 악)과 平簡公 公義(문간공 공의)와 西原君 方信(서원군 방신), 文敬公 脩(문경공 수)가모두 功勳(공훈)이 높은 將軍(장군)이요 政丞(정승)이며 道德君子(도덕군자)요,文章大家(문장대가)로서 父子兄第(부자형제)가繼繼承承(계계승승)하여 高麗 五百年 王政(고려 오백년 왕정)을始終(시종) 같이하였고
李朝(이조)에 와서는 더욱 繁昌(번창)하여平簡公(평간공), 西原君(서원군) 兩家 子孫(양가 자손)들이 더욱 많이 朝廷(조정)에 진출하였으니 平簡公(평간공)의 후예로는文烈公 尙質(문열공 상질), 文簡公 尙敬(문간공 상경), 忠成公 明會(충성공 명회), 文襄公 繼美(문양공 계미), 文靖公 繼禧(문정공 계희), 章成公 效元(장성공 효원)이요.
西原君(서원군) 후예로는 襄節公 確(양절공 확), 襄惠公 伯倫(양혜공 백륜), 質景公 致亨(질경공 치형), 恭安公 致仁(공안공 치인), 莊簡公 致禮(장간공 치례)가모두 歷代(역대) 임금을 보필하여 名臣(명신)이 되었다.
開國(개국), 靖難(정난), 佐理(좌리), 致治(치치) 등의 功臣(공신)으로서 麒麟閣(기린각)에 입각하고 議政府(의정부)에 납신 분이 대대로 連續(연속)하였고 國舅(국부)와 駙馬(부마)가 잇달아 나셨다.
太尉公 時代(태위공 시대)에서 지금까지 七百餘年(칠백여년)되는데 자손의 번창과 가문의 발전이 갈수록 더 隆盛(융성)하니 아! 기쁜 일이로다.
湖西(호서)땅 淸州(청주)는 太尉公(태위공)의 出世(출세)하신 故鄕(고향)이니 一名 上黨(일명 상당)이라고 號稱(호칭)하게 된 것이아마도 이러한 緣由(연유)일 것이다.
이곳에 戶籍(호적)을 두고 사는子孫(자손)들이 많고 名家故宅(명가고택)의 後裔(후예)들이 아직도 남아살고 있는 터이다.작년 봄에 내 伯氏(백씨) 百謙(백겸)이 淸州牧使(청주목사)로 오시니역시 平簡公(평간공)의 후예시다.
馬車에서 내리면서 우선 宗人(종인)을 訪問(방문)하고 太尉公(태위공)의 遺基(유기)가 어디냐고 물었더니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연로하여 돌아가신지라 哀惜(애석)한 일입니다.
老人(노인)들의 말씀을 들은즉 傳說(전설)에 太尉公(태위공)께서처음 務農亭(무농정)에 살면서 農事(농사)에 힘써서 數萬石 巨富(수만석 거부)가 되었더니 高麗 太祖(고려태조)가 甄萱(견훤)을 征伐(정벌)하러 가는 行軍(행군)이 집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때 太尉公(태위공)께서 杖劍(장검)하고 이를 出迎(출영)하여 兵士(사병)을 배불리 먹이고 그 길로 從軍(종군)하시었다는 등을 云云(운운)하였다.
淸州 東南쪽 十里 쯤에 方井里(방정리)가 있으되 바로 務農亭(무농정)의 옆이요,
韓氏 後孫(한씨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文敬公 柳巷文集(문경공 류항문집)에 내 집이 方井里(방정리)라는 句節(구절)이 있고 그 後 忠成公(충성공 한명회)이 고향을 찾는 뜻에서 이 洞里에 와서 祖業(조업)을 이어 住居(주거)를 營爲(영위)한 바 있으니 여기 方井里(방정리)가 太尉公(태위공)의 遺基(유기)임을 알 게 되어 伯氏(백씨)는 다시한번 老人(노인)들에게 질문하여 太尉公 遺基(태위공의 유기)임이 的實無疑(적실무의)함을 다진 후에 雜草(잡초)를 베어 버리고 壇(단)을 쌓고 날을 받아 祭祀(제사)를 드린 후에 朝廷(조정)에 在職(재직) 中인 宗丈 淸平府原君 應寅(종자 청평부원군 응인)과 내 숙부 判書公 孝純(판서공 효순)에게 書札(서찰)을 보내 고하되 "近代(근대)의 大家(대가)인 谷城 申氏(곡성 신씨)와 安東 權氏(안동 권씨)와 같은 門中(문중)은 모두 고향에서 자기 始祖(시조)의 祭祀(제사)를 받들어서 報本(보본)하는道理(도리)를 다하거늘 況且(항차) 우리는 太尉公(태위공)의 功德(공덕)과 後孫(후손)들의 昌遠(창원)함이 저 두 집만 못할 바 없건만 옛 故鄕(고향)이라고 찾을 길이 없어서 오고 가는 자들로 하여금 본 뜰 바가 없이 되었으니 어찌 이마에 땀이 날 처지가 아니겠습니까.
이제 遺基(유기)를 찾았으니 田一筆(전일필)을 買入(매입)하여 넉넉히 祭需(제수)를 마련할 수 있게 하되 每年 봄에 位牌(위패)를 모시고 壇上(단상)에서 行祀(행사)할 것을 永久(영구)한 宗規(종규)로 하기 위하여紀律(기율)을 대강 갗추었으니 碑石(비석)을 세워서 永久(영구)히 傳(전)할 수 있도록 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더니 宗丈(종장)들이 이 말을 들으시고 可(가)하다고 認定(인정)하고 卽時(즉시)로 通文(통문)을 써서 各 宗門(각 종문)에 널리 通告(통고)하야 各自(각자) 金品(금품)을 헌납하여 이 社業(사업)에 協助(협조)토록 하고 나 浚謙(준겸)에게 그 事實(사실)을 記錄(기록)하라고 하는지라 글 솜씨가 못났다고 敢(감)히 辭避(사피) 할 수가 없어서 삼가 아뢰옵건데 내 일찍 들은 바에 따르면 源脈(원맥)이 깊은 물은 그 流域(유역)이 長遠(장원)하고 뿌리가 堅實(견실)한 나무는 그 枝葉(지엽)이 茂盛(무성)하며 사람이 德(덕)을 쌓고 仁(인)을 베풀면 그 子孫(자손)이 繁昌(번창)한다고 하니 우리 韓氏 家門(한씨 가문)이 여러 代(대)를 이어 오면서 高官大爵(고관대작)이 輩出(배출)됨은 太尉公(태위공)께서 積德施仁(적덕시인)하신 餘蔭(여음)이 아니겠는가.
孟子(맹자)의 말씀에 君子(군자)의 流澤(유택)도 五世(오세)면 끊기고 小人(소인)의 餘韻(여운)도 五世(오세)면 없어진다고 하셨으니 善惡間(선악간)에 人間(인간)의 流澤(유택)이 五世(오세) 以上(이상) 傳(전)하지 못한다는 말씀인데 數十世(수십세)가 되도록 끊어지지 않았으니 이것은 孟子(맹자)께서도 豫期(예기)치 못하였던 일이다.
況且(항차) 王覇(왕패)가 光武帝(광무제)를 死境(사경)에서 잘 補佐(보좌)한 것도 一時的(일시적)인 氣數(기수)와의 關練(관련)이 있는 까닭에 王哀(왕애)와 隆替(융체)를 國家(국가)와 더불어 처음부터 終末(종말)까지 그 運命(운명)을 같이 하지 않을 수없었던 것이다.
옛날 사람이 子文(자문)의 善(선)함을 稱贊(칭찬)하는 것도 楚(초)나라의 後世(후세)까지 傳(전)하여 오지 못하였고 晋(진)나라의 王謝(왕사)나 唐(당)나라의 崔盧(최로)가 높은 官職(관직)을 누린 것도 當代(당대)의 호사로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우리 韓氏(한씨)같이 빛나는 門閥(문벌)이 여러 代(대)를 하루같이 連綿(연면)하는 집은 自古及今(자고급금)에 그 例(예)를 보지 못하였다.
崇嶽山(숭악산)에 精氣(정기)가 쌓이고 沙麓(사록)에 瑞氣(서기)가 어리여 하늘이 주는 敦厚(돈후)한 性質(성질)을 받아 特異(특이)한 人物(인물)을 낳았으니 여러 차례 國母(국모;왕비)를 誕育(탄육)하여 우리 朝鮮 億萬年(조선 억만년)의 運命(운명)을 開拓(개척)하였다.
이것만 가지고 말하더라도 그 遺基(유기)를 잘 다듬어서 옛날 事跡(사적)을 宣揚(선양)하는 것이 어찌 韓氏 子孫(한씨 자손)만을 爲(위)하는 私的(사적)이겠는가?
마땅히 育司序例(육사서열)에 넣어 奉祝(봉사)하는 儀典(의전)에 따라 每年 香幣(매년 향폐)를 내려주시어 그 勳德(훈덕)을 旌表(시표)하여야 할 터인데 아직 이것을 서둘러 하지 못하였다.
한심한 일이로다. 自古(자고)로 名門巨族(명문거족)은 先祖(선조)의 忠孝(충효)와 勤儉(근검)으로 이루어진 것이요, 子孫(자손)이 고루하고 오만함으로서 墜敗(추패)하는 것이다.
太尉公(태위공)께서 아직 出世(출세)하시기 전에 草野(초야)에서 근근이 살다가 出身(출신)과 同時(동시)에 家門(가문)을 일으켰고 忠孝(출효)의 大業(대업)을 이루시니 그 子孫(자손)들이 祖上傳來(조상전래)의 遺業(유업)을 힘써 닦고 家法(가법)의 傳統(전통)을 잘 익혀 永久(영구)히 天祿(천록)을 亨受(형수)한다면 이것이 바로 朝廷(조정)의 典型(전형)이요. 子孫(자손)의 儀範(의범)이 되는 것이다.
그 奇居(기거)하시던 宅里(택리)를 表揚(표양)하여 後世(후세) 사람들이 보고 感興(감흥)토록 한다면 그것이 社會敎化(사회교화)에 育效(육효)한 바 적지 않으리라.
太尉公(태위공)의 墓所(묘소)가 옛날부터 平安道 嘉山郡(평안도 가산군)에 있다고 하였으나 年代가 오래되어 眞假(진가)를 알 수가 없으므로 子孫(자손)들의一大 蹉恥(일대수치)였는데 이제 내 伯氏(백씨)가 옛날 根本(근본)을 잘 찾아서이런 일을 함으로서 그 美蹟(미저)을 드러내게 되었다.
옛말에 天下萬事(천하만사)가 사람을 만나야 된다고 하였는데그 사람이 바로 가까운 내 門中(문중)에서 나온 것이 더욱 嘉尙(가상)하도다.
今後(금후)로 太尉公(태위공)의 後孫(후손)된 者로서 이곳을 지나갈 때에는반드시 拜謁(배알)하고 祖上 傳來(조상 전래)의 鄕里(향리)에 대한 경건한 誠意(성의)를 갖게 하고 他人(타인)이라도 그 祖上(조상)에 關(관)한勤念(근념)이 薄弱(박약)한 사람들은 이 法典(법전)을 본받아先祖(선조)에 奉祀(봉사)하는誠意(성의)를 다하도록 하게 된다면 太尉公(태위공)의 遺風(유풍)과 餘韻(여운)이 여기서 이루어져서 永遠(영원)토록 빛나리라.
그러므로 글자에 새겨두지 않을 수가 없어서 傳來(전래)의 系派(계파)와 아울러 立石(입석)한 始末(시말)을 記錄(기록)하여 後人(후인)들에게 告(고)하는 바이다.
萬歷 33년(宣祖 38년:단기 3938년) 9월 일 후손 이조참판 준겸 찬
遺基 方井里(유기 방정리)
始祖 太尉公(시조 태위공)의 遺基(유기)가 지금의 淸原郡 南一面 方西里(충북 청원군 남일면 방정리) 方井 部落(방정 부락) 俗名(속칭) <대머리>로 呼稱(호칭)한다.
府君(부군)께서 當初(당초)에 이 吉地(길지)를 擇占(택점)하시고 마을 앞의 岩石(암석)을 쪼아 方井(방정)을 파서 用水(용수)에 이바지하고 後麓 高原(후록;뒷산 높은 곳)에 務農亭(무농정)을 建立(건립)하시어 여기서 起居(기거)하시면서 美德(미덕)을 修養(수양)하시고 몸소 農事(농사)에 힘을 써서 累萬石 巨富(누만석 거부)가 되시었다.
運回時來(운회시래; 운이 좋은 때를 맞아)하여 高麗 太祖(고려태조)가 甄萱(견훤)을 征伐(정벌)할 때 行軍(행군)하는 路程(로정)이 淸州(청주)를 通過(통과)하게 되어 門前(문전)에 當到(당도)커늘 公(공)께서 杖劍 出迎(장검출영;긴칼을 차고 맞이) 하니 이는 偶然(우연)한 邂逅(해후)가 아니었다.
英雄(영웅)을 찾은 意志(의지)와 英雄(영웅)의 意志(의지)가 融然相合(융연상합)한지라주린 軍士(군사)를 배불리 먹이고 사기를 충전 시킨 후드디어 從軍(종군)하여 후삼국을 統合(통합)한 開國 元勳(개국 원훈)이 되시었다.
이 곳 方井里(방정리)는 公(공)의 品性(품성)을 善養(선양)하고 智略(지략)을 練磨(연마)하시던 곳이요.
高麗 創業(고려 창업)에 協贊(협찬)하는 第一步(제일보)를 決行(결행)하시던 곳이며그 뜻을 바탕으로 千枝萬葉(천지만엽)으로 繁昌(번창)한 不億子孫(불억자손)의 뿌리가 深固(심고)하게 박힌 靈地(영지)로서 우리 韓氏(한씨)의 發祥之地(발상지지)이다.
公의 遺香(유향)이 깃들인 이 舊基(구기)를 後孫(후손)들이 몇 代(대)나連綿傳襲(연금실습;잃어 버리고 찾지 못하다)하여 왔던가.또 언제부터 主人(주인)없는 廢墟(폐허)로 몇 백년이나 지내왔던가.文敬公 柳巷集(문경공 류항집) 中에 내 집이 方井里(방정리)에 있다는 文句(문구)가 있으되 몇 代 또는 몇 년간 거주하였다는 考證(고증)이 없으며 李朝(이조)때에 忠成公(충성공; 한명회)이故鄕(고향)을 그리는 뜻에서 이 洞里(동리)에 찾아와서 世業(세업)을 이어設壇致祭(설단치제;제단을 차리고 제사를 올림)하였다고 전한 바 있으나 久遠(구원)을 期(기)치 못하고 또다시 廢墟(폐허)가 되어 이제 方井(방정)의 所在(주소)도 아는 子孫(자손)이 없이 되었다.
그 후 宣祖(선조) 38년 乙巳(을사년 단기 3938, 서기 1605년)에 久菴 百謙(구암 백겸)이淸州 牧使(청주 목사)로 到任(도임) 즉시 여러 宗人(종인)들과 盡力探索(진력탐색)하여築壇竪碑(축단수비;제단을 다시 짓고 비를 세우다)하고 祭田(제전)을 買入(매입)하여매년 歲一祭(세일제)를 奉行(봉행)할 기틀을 樹立(수립)한 바 있었는데 그 후 12年이 되는 丁巳(정사)년에 石灘公 孝仲(석탄공 효중)이 西原 縣監(서원 현감)으로 來任(래임)하게되어 壇(단)을 修築(수축)하고 床具(상구)를 마련하여 歲一祭 奉行(세일제 봉행)에 萬全(만전)을 期(기)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場所(장소)가 方井里(방정리)의 隣接 部落(인근부락)인 月午里(월오리)로서 지금도 이 碑石(비석)은 月午洞後 山麓(월오동 뒷산)에 우뚝 서있다.
려溟公 震英(려명공 진영)은 忠簡公 理(충간공 리)의 後裔(후예)로서 判書 李時發(판서 이시발)의 侄壻(질서; 조카사위)가 된다.
光海 戊午(광해 무오년 단기 3951, 서기 1618년)에 李判書(이판서)가 장차 隱退(은토) 할 宅地(택지)를 求(구)하려고 淸州 東南方 地帶(청주 동남 쪽 지대)를돌아 보다가 한 地点(지점)에 當到(당도)하여 周圍(고위)를 觀望(관망)하던 中 一弊衣寒士(일순의한사)가 나타나서 이르되 여기는 韓太尉(한태위)의 遺墟 方井里(유허 방정리)인즉 韓氏(한씨)가 아니면 占居(기거)할 수 없다
하거늘 李判書(이판서) 이 事實(사실)을 侄壻(질서)인 려溟公(려명공)에게 傳(전)하니 려溟公(려명공)은 이 말을 듣고 門中(문중)의 宿願(숙원)이 이제야 成就(성추)됨을 歡喜不禁(환희불금)하야 즉시로 方井里(방정리)에 찾아가서 荒凉(황량)한 옛 터를 다듬어서家屋(가옥)을 세우고 方井(방정)을 浚渫(준설)하여 率眷搬移(솔권반이;반성하고 바로잡아 옮김)하니 이것이 興廢(흥폐)가 無常(무상)한 歲月(세월) 속에 千年舊基 方井里(천년구기 방정리)가다시 옛 主人(주인)을 찾은 顚末(전말)이다.
務農亭(무농정:충청북도 지방 기념물 제 85호)
務農亭(무농정)은 東北方(동북방)에 雄座(웅좌)한 上黨山(산당산)을등에 지고 남서편으로 전개되어 있는 30여리의 大野(대야) 務農坪(무농평)을 향하여 金盤玉案形(금반옥안형)으로 유명한 勝地(승지) 方井里 後麓(방정리 후록)에 자리잡고 있다.
太尉 府君(태위 부군)께서 이 亭子(정자)를 創建(창건)하시고 여기서 기거하시면서 農業(농업)을 勸奬(권장)하시고 濟世經綸(제세경론)을 鍊磨(연마)하시던 道場(도장)이니 方井(방정)과 아울러 公(공)의 餘香(여향)이 맥맥히 흐르고 있는貴蹟(귀적)이다.
이후 천여년에 사물의 消長盛衰(소장성쇄)가 無常(무상) 한지라 方井里(방정리)가 일시 폐허(一時 廢墟)로 황량(荒凉)한 처지에 있게 되니 務農井(무농정)의 所在(소재)를 알 수 없게 되었다.
李朝 肅宗 元年(이조 숙종 원년 단기4021, 서기1688년)에 후손 根(근)이 秉馬節度使(병마절도사)로 청주에 錦衣還鄕(금의환향)하자 우선 方井里(방정리)에 찾아와서 무농정의 옛터(務農亭의 舊址)를 찾아 碑石(비석)을 세워 表識(표식)을 해 두었고 광복 후 己丑年(기미년 단기4282, 서기1949년)에 방정리 宗中(종중)의 發起(발기)로 全國 宗門(전국 종문)의 誠意(성의)를 모아 亭子(정자)를 重建하였다.
務農亭 碑文 (後孫 生員 益著 識) 原文: 務農亭古我始祖太尉公之所創也太尉方其末遇也隱德邱園臨祁作亭비래田功命名曰務農坪之得號者亦以此也伊後八百餘?後孫韓公根節度湖西錦還本州首就方井舊里遂與宗人遡泰尉之遺跡卽所謂務農亭祗傳其號末見其存者於是謀所以依式寫其遺址築土而封焉樹石而表之以爲後人之徵信噫公之來也旣新乎返始之堂又標乎務農之亭譬之如室旣鎭其맹嗚休哉 崇禎後戊辰(단기4021, 서기1688)
夏立해설; 무농정 비문 무농정은 우리 시조인 태위공께서 창건하셨다.태위께서 아직 출세하시기 전에 林園(임원)에 隱居(은거)하시면서 앞 들을 향하여 정자를 세우시고 여기서 農耕(농경)의 政策(정책)을 講究(강구)하셔서 정자의 이름을 務農(무농)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그 800여년 후에 후손 根(근)이 충청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고향인 청주에 오게 되어 방정리 종인들과 더불어 태위공의 유적을 찾아본 즉 무농정은 겨우 그 이름만 전하여 올 뿐이고 실물은 볼 수가 없었다.
여기서 후세에 조상 숭배의 본뜰 바를 강구하고자 그 遺址(유지)를 찾아 土臺(토대)를 築造(축조)하고 그 위에 表石(표석)을 세워 후손들의 考徵(고증)할 信標(신표)가 되게 하였다.
아! 公(공)이 여기 오신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이미 返始堂(반시당)도 새롭게 해 놓았고 또 무농정의 표석까지 세워놓았다.큰일을 완전하게 畢力(필력)하였으니 진실로 훌륭한 일이로다.
숙종 14년(단기4021, 서기1688년) 여름에 세움.
方井(방정)충청북도 지방 기념물 제84호)
方井(방정)은 務農亭(무농정) 아래 동리 앞에 위치하고 있다.
太尉公(태위공)께서 처음에 여기를 住居地(주거지)로 삼으시면서 食水(식수)와 用水(용수)로 쓰시던 샘이니 正方型(정방형)으로 築造(축조)하여 方井(방정)으로 이름하니 자연적 동리 이름도 方井里(방정리)로 號稱(호칭)하게 되었다.
水質(수질)이 淸新(청신)하고 風味(풍미)가 甘美(감미)로워 養生(양생)에 最適(최적)하며 水源(수원)이 深長(심장)하여 큰 가뭄에도 湧出量(용출량)이 減小(감소)되지 않고 항상 豊堯(풍요)한 것도 좋거니와 그보다도 愛飮(애음)하던 분이 稀世(희세)의 偉人(위인)인太尉公(태위공)이시기에 더욱 有名(유명)하게 된 것이다.
淸州邑志 古蹟條(청주읍지 고적조)에 高麗 太祖(고려 태조)가 견훤을 정벌하러 가는 도중 행군이 마침 이 門前(문전)을 지나가게 되자 太尉公(태위공)이 이를 맞이하여 십만대병이 이물을 마시는데 수량이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하여 "方井(방정)"이라는 井號(정호)를 받았다는 사실이 記載(기재)되어 있다.
太尉公(諱蘭)에 관한 고려기록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원년 8월 辛亥(신해)일에공(功)을 표시(表示)하며 조(詔; 고하다)에 말하기를 인신(人臣)이 좌시(佐時)의 기략(奇略)을 움직여 개세(蓋世)의 높은 공훈(功勳)을 세우는 자는 분모(分茅)와 조토(昨土)를 포상으로 주고준질(峻秩)과 숭반(崇班)으로 높이는 것은 이것이 백대(百代)의 상전(常典)이요,천고(千古)의 굉규(宏規)이다.
나는 측미(測微)한 지위(地位)로 나와서 재식(才識)도 용화한데진실로 군망(群望)을 취하여 극히 홍기(弘基)를 이행하였으니 그 폭주(暴主·포악한 군주)를 폐할 때를 당하여 충신의 절(節)을 극진히 하는 자는 마땅히 상뢰(상을 준다는 뜻)를 행하여훈노(勳勞)를 추장(推裝)하여야 되는 것이니,
홍 유(洪 儒, 賜名 殷悅 ; 은열이란 이름을 내림. 남양 홍씨의 시조),배현경(裵玄慶 ; 경주 배씨의 중시조),신숭겸(申崇謙 ; 평산 신씨 시조),복지겸(卜知謙 ; 면천 복씨 시조)으로 제1등 공신에 지정하고
견 권(堅 權),능 식(能 寔),권 신(權 愼),염 상(廉 湘), 김 낙(金 樂 ; 당악 김씨 시조)연 주(連 珠),마 난(麻 煖),최 응(崔 疑 ; 개성 최씨의 원조),유금필(庾금弼 ; 평산 유씨 시조)김선평(金宣平 ; 안동 김씨 시조),장 길(張 吉 ; 賜名 貞弼 ; 정필이란 이름을 하사; 안동 장씨 시조)류차달(柳車達 ; 문화 류씨 시조),이 도(李 棹 ; 전의 이씨 시조),함 규(威 規 ; 양근 함씨 시조),김선궁(金宣弓 ; 선산 김씨 시조),왕희순(王希順),김훤술(金萱述 ; 해평 김씨 시조)윤신달(尹辛達 ; 파평 윤씨 시조),박윤웅(朴允雄 ; 울산 박씨 시조),왕식렴(王式廉),진 평(陳 評),박희술(朴希術),김홍술(金洪述),박수경(朴守聊),홍 규(洪 規 : 홍주 홍씨 시조),총 일(聰 逸),강궁진(姜弓珍 ; 금천 강씨 중시조),이총언(李총言 : 벽진 이씨 시조),이능희(李能希 : 청주 이씨 시조),이견웅(李堅雄 ; 수안 이씨 시조),지중익(池重翼, 賜姓 魚重翼 ; 어씨라는 성을 하사함, 충주 어씨 시조),예 언(倪 言),제 궁(제 弓),사도귀(思道貴),최준옹(崔俊邕),한 란(韓 蘭 ; 청주 한씨 시조),전종회(田宗會),관 준(寬 駿),만 세(萬 歲),조 암(趙 岩 ; 改名 孟 ; 풍양 조씨 시조),경함필(卿含弼),영 준(英 俊),김 길(金 吉 ; 광산 김씨 선조),김 철(金 哲),금 강(금 剛),곡긍회(曲矜會),배운태(裵運泰),국 현(國 鉉),적 철(狄 鐵),열 평(烈 評),황보선장(皇甫善長),송 회(宋 會),석 담(昔 淡),조 창(曺 昌),유지방(柳志防),황 승(黃 勝),홍 관(洪 琯),석 광(昔 光),임 정(林 程),장 개(蔣 凱),염 뢰(廉 쾨) 등을 제2등으로 지정하고,각각 금은기(金銀器)와 금수기(金繡綺), 피욕(被褥)과 능라(綾羅)와 포백(布帛)과곡미(殺米)를 차별있게 하사하였다.
태조 2년 겨울 10월에 배현경이 글을 올려평양(平壞)에 축성(築城)하는 것을 의논하여태조가 그의 말대로 염 상(廉湘)과 한 란(韓 蘭)에게 영을 내리고 현지로 가서 독려토록 했는데 때마침 염 상은 중도에서 병이 생겼기에 강윤형(康允珩)과 함께 감독하여 완성하였다.
태조 11년(928)에는 태조가 후백제 견 훤(顆 萱)을 정벌하려 남행할 때한 란(韓蘭)이 방정리(方井里)에서 왕건태조를 환영하고 10만 군사에게 하루동안 휴식하는데 필요한 모든 주육급식(酒肉給食)을 베풀었으며후삼국 통합에 혁혁한 공헌을 하였다.
태조 13년(930) 12월 겨울에는 신흥사(新興孝)를 중수(重修)하고 공신당(功巨堂)을 설치하여 삼한공신(三韓功臣)을 동서벽에 도화하였는데(벽상공신) 그 수는 29명에 달하였다고 하며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홍 유(洪 儒, 賜名 殷悅 ; 은열이란 이름을 내림. 남양 홍씨의 시조),배현경(裵玄慶 ; 경주 배씨의 중시조),신숭겸(申崇謙 ; 평산신씨 시조),복지겸(卜知謙 ; 면천 복씨 시조) 유금필(庾금弼 ; 무송 유씨 시조),김선궁(金宣弓 ; 선산 김씨 시조),이총언(李悤言 ; 벽진 이씨 시조),김선평(金宣平 ; 안동 김씨 시조),권 행(權 幸 ; 안동 권씨 시조),윤신달(尹莘達 ; 파평 윤씨 시조),최준옹(崔俊邕 ; 동주 최씨 시조),문다성(文多省 ; 남평 문씨 시조),이능희(李能希 ; 청주 이씨 시조),이 도(李 棹 ; 전의 이씨 시조),허선문(許宣文 ; 양천 허씨 시조),구존유(具存裕 ; 능성 구씨 시조),원극유(元克猷 ; 원주 원씨 시조),금용식(琴容式 ; 봉화 금씨 시조),김훤술(金萱術 ; 해평 김씨 시조),한 란(韓 蘭 ; 청주 한씨 시조),강여청(姜餘淸 ; 금천 강씨 시조),손긍훈(孫兢訓 ; 밀양 손씨 시조),방계홍(房係弘 ; 남양 방씨 시조),나총례(羅聰禮 ; 금천 나씨 시조),이희목(李希穆 ; 부평 이씨 시조),염나명(廉那明 ; 서원 염씨 시조),최필달(崔必達 ; 강릉 최씨 시조),김홍술(金弘述 ; 의성 김씨 시조) 등이다.
始祖(시조) 韓蘭(한란) 묘소
墓所(충청북도 지방 기념물 제 72호)
太尉公(태위공)의 墓所(묘소)는 淸原郡 南一面 駕山里(청원군 남일면 가산리)에 있으니 鵲道山(작도산)으로부터 國師峰(국사봉)이 左便(좌편)으로 돌면서 庚兌方(경태방)으로 뻗어 내려온 行龍(행룡)이分土洞 艾田洞(분토동 애전동)을 지나 亥方(해방)에 入首(입수)한 乾坐巽向版局(건좌손향판국)이요,
물은 坤申方(곤신방)에서 辰方(진방)으로 들어간다.
대체로 山은 俗離山(속리산)의 來자락이요,
물은 楮子山(저자산)에서 發源(발원)하여 心川(무심천)으로 下流(하류)하다가 다시 鵲川(작천)과 합류하여 錦江(금강)으로 들어간다.
玉女峰(옥녀봉)과 筆峰(필봉)이 甲方(갑방)에서 侍立(특위)하였는데 俗離山(속리산)이 亦是(역시) 甲方(갑방)이라 地家書(지가서)에 이르기를<回龍顧祖(회룡고조)>라 하여吉地(길지)라고 世稱(세칭)하게 된 것이다.
(前方(전방)에 展開(전개)한 30里 廣野(광야)는 務農亭(무농정) 앞까지 連廷(연정)하였고上黨山城(상당산성)은 方井里 背後 洛迦山(방정리 배후 낙가산) 옆에 자리 잡고 있다. 청주시를 起点(기점)으로 한 大路(대로)가 方井里(방정리)를 경유하여 報恩(보은) 삼거리에 와서 갈라지니 左線(좌선)은 米院(미원)을 경유하여報恩(보은), 俗離(속리)에 이르고 右線(우선)은 文義(문의)로 통하는데 대교를 건너서약 백여보 지점에서 다시 分岐(분지)되니 左側(좌측)이 文義문의)에 이르는 대로요,
右側(우측)이 駕山 墓所(가산 묘소)에 이르는 도로이다.
이와같이 명당에 모신 산소가 언제부터인가.
不知中 失護(부지중 실호)되어 이를 哀惜(애석)하게 追慕(추모)하는 후손들이 壇(단)을 모으고 碑(비)를 세워 매년 歲一祭(세일제)를 받들며 <墓在駕山(묘재가산)>이라는 文獻(문헌)을 참고로 平安道 嘉山(평안도 가산), 懷仁 嘉山(회인 가산)등의音(음)이 相以(상이)한 地名(지명)을 가진 곳은 모두 두루 살펴보았으나 徒勞(도로)에 불과 하였다.그러나 大人(대인)의 幽宅(유택)은 湮滅(인멸)하는 일이 없는 법이다.
인물의 卓越(탁월)한 名聲(명성)과 墓域(묘역)의 雄莊(웅장)한 規模(규모)가 庶人(서인)의 무덤과는 달라서 洞里 父老(동리 부로)들이나 婦女(부녀)들의 傳說(전설)로口傳(구전)되어 오다가 언젠가는 發露(발로)되는 法(법)이다.
肅宗(숙종) 14년 戊辰(무진년 단기4021, 서기1688년)에 墓下(묘하) 民家(민가)에서 顧傭(고용)하던 韓某(한모)가 있어그 동리에 사는 盧哥(노가)가 太尉公(태위공)의 山所 封墳(산소 봉분)을 破壤(파양)하고墓碣(묘갈)은 中間(중문;가운데)을 折斷(단절)하여 우물 바닥에 묻어 치운 後(후)에 山所 前後面(산소 전후면)에 倫葬(윤장)하였다는 情報(정보)를 듣자즉시 方井里(방정리)에 찾아와서 聖憲(성헌)에게 소상하게 告(고)하였다.
聖憲(성헌)이 이 말을 듣고 생각하여 본 즉 嘉山(가산)의 嘉字(가자)와 駕山(가산)의 駕字(가자)는 音相以(음상이)하고駕山(가산)은 咫尺間(지척간)이라 十分疑心(십분의심)할 바 없으므로 때마침 淸州兵使(청주병사)로 재임 중인 후손 根(근)에게 제보하고 根(근)과 더불어 駕山(가산)에 달려가 조사한 즉 碑石(비석)은 비록 中絶(중절)되었으나 字劃(자획)이 宛然(완연)하여 太尉公(태위공)의 墓(묘)임을 確認(확인)하게 되었다.翌年(익년) 己巳(기사)에 후손 參判 聖佑(참판 성우), 掌今 濚(장금 령), 郡守 塾(군수 숙)등이 連署(연서)로 官(관)에 提訴(제소)하니 마침내 상감께서도 알게 되어 朝廷(조정)에서 京兆郞(경도랑)을 派遣(파견)하여 奸惡(간악)한 犯行(범행)을 摘發(적발)하고 壙中(광중)을 열어보니誌石(지석)이 발견되었다.
이리하여 倫塚(윤총)을 掘去(굴거;파내어 제거하다)하여 墓域(묘역)을 改封築(개봉축)한 後(후)에 表石(표석)을 세우고誌石(지석)을 埋藏(매장)하였으며 祭田(제전)과 墓直(묘직), 齊室(제실) 등을 차례로 설치하였으며그 후 英祖戊子(영조 무자년 단기4101, 서기1768년)에 新道碑(신도비)를 세웠다.
高麗三重大匡太尉韓公夫人宋氏合葬墓誌(고려 삼중대광 태위공 부인 합장 묘지) 原文:太尉諱蘭姓韓氏本上黨人上黨之韓出自箕子箕子氏世衰爲馬韓子孫居上黨稱韓氏魏志具載其事太尉佐麗朝統合三韓勳名事業照映方策子孫昌大號爲甲族上黨淸州之號州東南務農亭有方井里卽太尉遺墟也又其南七八里有駕山卽太尉葬地也舊有表石三重大匡太尉韓七字州之耆老四大夫多見而言之者子孫不知也會有州人盧峰者 孝廟十年偸其父於太尉墓後峰死又葬於太尉墓前今 上十四年後孫掌今濚持平聖佑始聞而知之與諸宗人訟于懷德縣峰之隣族不敢隱其言古老傳說事甚悉峰之子再微廢其父祖兩世塚是歲十月節度使根等會祭太尉墓啓舊封改築之壙上築石三層甚整麗時石葬之制然也遂仍舊加封周三十二尺高九尺餘翌年秋奸孼再寬嗾執法者誣 上廳至于啓視壙中得三鍊石四鐵釘雖再寬以誣 上被罪회郞以犯壙削職守臣以上命封築嗚呼太尉泉壤之禍有不忍言者矣請啓視者京兆尹李宇鼎潼視者參軍閔光魯也太尉內外子孫其麗不億不可悉記只敍墳墓旣失復得之由偈之碑葬之誌裨後來有所攷徵皇明崇禎後庚午八月 日 後孫 生員 塾 謹識
역문 해설 : 太尉公配位宋氏夫人合葬墓誌(태위공 배위 송씨 부인 합장 묘지)
太尉(태위)의 諱(휘)는 蘭(란)이요.姓(성)은 韓氏(한씨)니 本貫(본관)은 上黨(상당)이다.上黨 韓氏(상당 한씨)는 箕子(기자)로부터 系出(계출)한 바 箕子(기자)의 世代(세대)가 衰退(쇠퇴)하여 馬韓(마한)이 되었고 그 자손이 上黨縣(상당현)에 살면서 韓氏(한씨)라고 칭하였으니 그 사실은 魏誌(위지)에 昭詳(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太尉(태위)께서 麗祖(려조)를 輔佑(보우)하여 三韓(삼한)을 統合(통합)하시니 그 勳名(공훈)높은 事蹟(사적)이 史書(사서)에 燦爛(찬란)하게 빛나게 되고 자손이 번성하여 甲族(갑족)이라 칭하게 되었다.上黨(상당)은 淸州(청주)의 옛 이름이며 淸州邑(청주읍)에서 東南(동남)으로 務農亭(무농정)이 있는 方井里(방정리)는太尉公(태위공)의 遺噓(유허)이고 또 거기서 남쪽으로 七八里 餘에 駕山(가산)이 있으니 이 곳이 太尉公 墓所(태위공 묘소)가 계신 곳이다.옛날에 三重大匡太尉韓(삼중대광태위한)이라는 일곱자가 刻字(각자)된 表石(표석)이 있는 것을 읍내에 사는 노인이나 사대부들이 目見(목견)하였다고 말하는 자가 많았으나 자손으로서는 아는 이가 없었다. 마침 군민 중에 盧峰(노봉)이란 자가 있어孝宗十年(숙종 10년 단기 3992, 서기 1659년)에 제 아비를 太尉公(태위공) 묘소 뒷쪽에 매장하고 峰(봉)이 사망하니 또 太尉公(태위공)의 묘 전면에다 盜葬(도장;묘를 몰래 쓰다)하였다.肅宗 十四年(숙종14년 서기 1688)에 후손 掌今 濚(장금 령)과 持平 聖佑(시평 성우)가 처음으로 이 사실을 듣고 알게 되어서 諸宗(제종)과 더불어懷德顯監(회덕 현감)에게 提訴(제소)하였더니盧峰(노봉)의 族屬(족속)들이 敢(감)히 隱避(은피)하지 못하고 古老(고로)들의 傳說(전설)을 事實(사실) 그대로 告白(고백)하고峰(봉)의 子息(자식)은 그 父祖兩代(부조양대)의 무덤을 發掘(발굴)하여 갔다.같은 해 10월에 節度使 根(절도사 근) 등이 太尉公(태위공) 묘 앞에 모여 祭祀(제사)를 드리고옛 封墳(봉분)을 헐고 改封築(개봉축)하였는데壙中(광중) 안에 三層石築(3층석축)이 完壁(완벽)하게 整頓(정돈)되어 있으니高麗 時代(고려 시대)의 石葬制度(석장제도) 였던 것이다.마침내 舊制(구제)데로 封築(구축)하니 둘레가 三十二尺(32척)이요,높이가 九尺(9척) 餘(여)였다.그 翌年(익년) 가을에 간악한 천민 再寬(재관)이란 자가 法官(법관)을 先動(선동)해서임금의 聰聞(총문)을 속여 壙中(광중)을 파보니 거기서 三鍊石(삼련석)과 四鐵釘(사철정)을 보게 되었다.再寬(재관)이는 임금 속인 죄로 벌을 받고 법관 恢郞(회랑)은 犯壙(범광;남의 묘소를 파헤치다)한 죄로 관직을 削奪(삭탈=박탈) 당하였으며왕이 郡守(군수)에게 명하여 墳墓(분묘)를 改封築(개봉축)케 하였다.아! 怨痛(원통)함이다.太尉公(태위공)의 地下(지하)에까지 미치는 禍(화)는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開壙(개광) 할 것을 요청한 자는 京兆尹李宇鼎(경조윤 이우정)이요,일을 맡아 본 자는 參軍閔光盧(참군 민광로)였다.太尉公(태위공)의 내외 자손들이 그 수가 많아서 모두 기록할 수는 없고 다만 산소를 失傳(실전)하였다가 다시 尋得(심득)한 사유를 서술하여 碑石(비석)에 새기고 誌石(지석)을 埋藏(매장)하여 後人(후인)들의 考徵(고증)이 되도록 하련다.皇明崇禎後庚午(檀紀 4023, 西紀 1690) 八月 日 後孫 生員 塾 謹識 主: 이 誌石文(지석문)은 始祖(시조) 太尉府君(태위부군)의 묘소가 오랫동안 失護(실호)되어盧(노)와 李(이) 兩姓(양성)이 冒葬(모장)하였던 것을 肅宗(숙종) 14년 (단기4021, 서기1688년) 戊辰(무진년)에 尋得(심득; 어렵게 찿다)하고 翌年(익년) 己巳(기사년)에 參判 聖佑(참판 성우), 掌今 濚(장금 령),塾(숙)이 관에 提訴(제소)하여 冒葬(모장)을 掘除(굴제)하고 塋域(영역)을改封築(개봉축)할 때 후일을 위하여 奉藏(봉장)한 誌石文(지석문)으로生員 塾(생원 숙)의 撰(찬)으로 되어있다.庚申年(경신년 단기4313, 서기1980년)에 始祖(시조) 묘역 미화 사업으로 封墳(봉분)을 改修(개수)할 때 發見(발견)된 것인데시조 묘소의 숙원사업을 명료하게 기록하였기에 이를 전재한다.
난곡리 유사 (蘭谷理 遺事)
原文; 竊惟(절유)韓氏는 東邦之閥族으로 三韓甲族이라 本自殷太師箕聖之後而歷 1131年하고 至馬韓末에 8世 元王이 有子三人하니 長은 友平이며 次는 友諒이요, 孝는 友城이라 馬韓이 爲百濟之所 掠奪하니 友諒이 歸于新羅脫解王朝하야 爲上當韓氏러니 至二九世하야 有諱邦亨이 官은 新羅侍中이니 憲康王朝에 湖西之黃澗芝藏山下로 奠居하야 生諱光宗이 侍中이요, 生諱는 智原이니 學行이 箸世하고 贈侍中이라 有子四人하니 長은 蔓 次는 簡, 蘭, 英이니 三子 諱 蘭이 卽 太尉公야라 公이 生于新羅眞聖女王年間이라 公이 胎生시 天地가 感應하고 松岳이 降精하야 附近 山野가 呈吐汗之而端故로 後人이 山與村名을 皆而土汗而開稱吐汗하고 又因公之諱蘭하야 洞號를 亦以吐蘭而又稱蘭谷이라 至今千有餘載에 爲國家行政便宣하야 區域變更及地名改易이 非再非三而次洞名도 雖亦隨時改稱이나 然必不越乎太尉公之因緣也로다. 蘭谷里之主脈은 必稱俗離山하니 玄山이 南走而西하야 其來也有埈而急者는 如熊奔虎走하고 秀而참者는 如鳳顧鵠立하야 墳墳叢叢如前者呼하고 後者應하야 완정百餘里而突然聳起하니 其名曰芝藏山이라 北分枝가 宛如兩腕抱兒之狀而闢一區하니 所謂 蘭谷里가 是也라 峽中에 有澗하니 其名도 蘭谷川이다. 北原이 出自芝藏山하야 貫黃澗邑하야 榮회月留峰而合流錦江이라 山脈이 如是하고 水勢 亦然하니 豈無地靈乎아 此可謂別有天地也라. 生家右便 數百步許에 有淸淨之地하니 泉石이 窈窕하고 松篁이 蒼울하니 此公之講道故址也라. 講道之遠近士友가 送子請業則謬然不辭하고 訓誨不怠하니 鄕隣親友恃之若砥柱하고 仰之若山斗無己라 하고 生家與講堂 中間에 隔一小麓하야 繩懸鈴하야 有事之時에 必搖而鳴之하야 爲處事符號라하니 如是古說이 世世流傳하야 至于今不絶. 一日에 公이 就寢於堂이러니 忽然成夢에 有一老人이 來現曰 主人은 將來必有多孫成大業之望하니 卽離此洞云謂이어늘 蒼曰離父祖之鄕而之於何所리요. 老人曰 淸州蜈倉坪이 泉甘土肥하고 俗淳人厚하고 地運이 旺盛하니 大吉이라 夢覺에 老人은 己居無赤하고 默然覃思에 奇且怪哉라 半信半疑하야 對家人 說夢하니 家人이 曰 大人之夢은 必有不靈矣라 故로 應從老人之言하야 將欲離鄕爲計運般家具하니 鄕理人士가 信賴欽服이 久矣라 嗟惜善人之離하야 挽而留之者不少焉이라 太尉公 以後에 所居故宅은 鄕人이 仰慕公之德望而爲之修葺을 年年不廢焉이러라. 講堂之建物은 世久年深하야 自然朽하고 其基地는 變爲桑麻圃田하고 惟瓦礫이 堆積하고 遺墟餘存하다.
해설: 청주한씨는 삼한시대부터 세력있는 족속이라 원래 은나라 태사인 箕子이후 역사가 1311년이며, 마한말 8세 원왕에게 아들이 셋 있었으니 첫째 우평과 둘째 우량, 셋째 우성이라 마한이 백제에 멸망하고 흡수되니 우량은 신라로 귀화하여 탈해 왕조에 벼슬하면서부터 청주(상당) 한씨라 칭하게 되었으니 이후 이십구대가 지나 諱(휘) 邦亨(방형)이란 분이 계셔 벼슬은 신라 시중이며 헌강왕 때에 황간 지장산 아래로 이주하시어 諱 光宗(광종), 후대로 智原(지원)이란 자손을 두셨으니 학행이 뛰어나 벼슬은 증시중이니 그 후대로 蔓(만), 簡(간), 蘭(란), 英(영)의 네 아들을 두셨는데 그 중 셋째인 諱 蘭(란)이 즉 태사공이라. 公은 또한 신라 진성 여왕의 고문격이며, 公이 태어날 때 천지가 감응하여 부근 산야가 땀을 흘렸다고 하여 후인들이 지명을 토한리로 부르다가 公께서 태생한 곳이라 하여 토란리로 부르다 이후 행정 개편에 의해 란곡리로 개칭되어 천 여년이 지난 지금도 불리어 지고 있다. 란곡리의 지맥은 속리산에서 뻗어 내린 곳이니 어떤 이는 곰과 범이 달려가는 형상이라 하고, 또는 봉황이 내려 앉은 자리라 하나 어쨌든 부근 산하에서는 이보다 뛰어난 산세가 없으니 바로 지장산이며 여기를 흐른는 맑은 물이 란곡천이라. 북쪽으로 뻗은 산맥이 맺힌 지장산 아래의 황간읍이며, 월류봉의 물이 흘러 란곡천을 통해 합치는 것이 바로 금강이니 과연 별천지라 일컬음한다. 생가 우측 약 백 여보의 거리에 公이 주위 잡인을 피하여 구도하고 공부하던 곳이 있는데 중간에 종을 달고 끈을 연결하여 문중의 꼭 필요한 일이 있을 때만 출입을 허용하고 상담하였다는 일화는 지금도 그 동리의 연로한 분들로부터 전해오는 일화로 확인되었다. 어느날 公의 꿈속에 한 노인이 현몽하여 장래에 자손이 번성하고 가업이 성대해지려면 선조를 모시고 이주하라고 명하고 청주가 물과 흙이 비옥하고 땅기운이 왕성하고 대길이라 깨어보니 노인은 흔적이 없고 괴이한 일이라 반신반의하여 주위 사람에 꿈 얘기를 하니 틀림없이 고향을 떠나라는 하늘의 계시라 하니 식솔이 모두 이주하였다.
始祖
諱 :
蘭(란)
遺 事 :
座高麗統合三韓開國壁上功臣三重大匡門下太尉諡威襄公誕生于忠北永同郡黃澗邑蘭谷舊土汗里一云土蘭里遺基餘講堂遺址尙今有傳事載永同郡誌移居于淸州治東方井里服田力檣積穀累萬後唐天成三年戊子高麗太祖征甄萱路出宅前公杖劍出迎以濟一日之餉遂從以驅馳贊成統合之勳輿地勝覽錄公于淸州人物
풀이: 삼한을 통합한 고려의 개국 공신으로 벼슬이 벽상공신삼중대광에 오르심. 충북 영동 황간 구 토란리(일명 란곡리, 토란리 또는 토한리)에서 탄생하시어 청주 방정리로 이주하신 후 만석의 부를 쌓아 고려 태조 견훤이 정벌을 나갈 때 장검을 차고 출영하여 고려의 개국 공훈이 되시었다.
墓 :
淸州治男十五里許南一面駕山里乾坐坤申得水辰破合兆遺基遺宅俱爲屢世失護忠成公明會一時尊得遺基設壇致祭百有餘年後于失傳宣祖乙巳後孫百謙爲淸州牧使亦尊遺基設壇立碑其弟西平府院君浚謙撰遺基碑築壇行歲一祭方井里東便現雲東里後麓碑石尙存光海十年戊午後孫震英尊得遺基誤傳墓在嘉山蓋嘉駕同音而麗相希愈墓在嘉山故也肅宗戊辰後孫根爲淸州兵使時後孫聖憲探門山所盧李兩姓부碣爲井而冒葬矣與兵使掘井尊得古碣字劃宛然後孫參判聖佑掌令濚郡守塾卞于官朝家도至遺京兆郞開壙搜誌得信蹟掘去偸塚諸孫開封築立碣埋誌置祭田墓直後孫領相翼暮撰神道碑銘後孫承旨九撰墓表生員益著撰務農亭碑陰記定祖19年甲寅及庚申後孫合力增置祭田純祖11年庚午重建齊閣檀紀4283年庚寅重建務農亭及神道碑閣檀紀4321年再衆建務農亭歲一祭陰十月初一日奉行
해석 : 청주에서 시오리 떨어진 남일면 가산리에 있으며 배 송씨와 합장되었다. 세월이 흐른 후 실호 되었다가 충성공 한명회가 찾아 내어 단을 설치하고 제를 올려 왔으나 여러 전쟁과 병화로 몇 번의 거듭되는 실호와 존득을 거치는 우여곡절 끝에 선조 때 후손 백겸이 청주목사로 부임하여 단을 세우고 준겸이 글을 써 비를 세웠다. 그후 세일제와 많은 후손들이 제전을 늘리고 무농정을 중건하고 신도비를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무농정 세일제는 매년 음력 10월 초하룻날에 봉행한다.
遺基 方井里
始祖 太尉公의 遺基가 只今의 淸原郡 南一面 方西里 方井 部落인 俗名 <대머리>로 呼稱한다. 府君께서 當初에 이 吉地를 擇占하시고 村前의 岩石을 쪼아 方井을 파서 用水에 이바지하고 後麓 高原에 務農亭을 建立하여 여기서 起居하시면서 美德을 修養하시고 몸소 農事에 힘을 써서 累萬石 巨富가 되시었다. 運回時來하여 高麗 太祖가 甄萱을 征伐할 때 行軍하는 路程이 淸州를 通過하게 되어 門前에 當到커늘 公께서 杖劍 出迎하니 이는 偶然한 邂逅가 아니었다. 英雄을 찾은 意志와 英雄을 意志가 融然相合한지라 주린 軍士를 호饋(음식을 배불리 먹이다)하여 軍機를 鼓吹시킨 후 드디어 從軍하여 三韓을 統合한 開國 元勳이 되시었다. 이 곳 方井里는 公의 品性을 善養하고 智略을 練磨하시던 곳이요. 高麗 創業에 協贊하는 第一步를 決行하시던 곳이며 그 餘慶을 바탕으로 千枝萬葉으로 繁昌한 不億子孫의 뿌리가 深固하게 박힌 靈地로서 우리 韓氏의 發祥之地이다. 公의 遺香이 깃들인 이 舊基를 後孫들이 몇代나 連綿傳襲하여 왔던가. 또 언제부터 主人없는 廢墟로 몇百年이나 지내왔던가. 文敬公 柳巷集 中에 내 집이 方井里에 있다는 文句가 있으되 몇代 또는 몇 年間 住居하였다는 考證이 없으며 李朝때에 忠成公이 故鄕을 그리는 뜻에서 이 洞里에 찾아와서 世業을 이어 設壇致祭하였다고 傳聞한 바 있으나 久遠을 期치 못하고 또다시 廢墟가 되어 이제 方井의 所在도 아는 子孫이 없이 되었다. 其後 宣祖 38년 乙巳(단기 3938, 서기 1605년)에 久菴 百謙이 淸州 牧使로 到任 卽時 여러 宗人들과 盡力探索하여 築壇竪碑하고 祭田을 買入하여 每年 歲一祭를 奉行할 기틀을 樹立한 바 있었는데 그後 12年이 되는 丁巳년에 石灘公 孝仲이 西原 縣監으로 來任하게되어 壇을 修築하고 床具를 마련하여 歲一祭 奉行에 萬全을 期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場所가 方井里의 隣接 部落인 月午里로서 只今도 이 碑石은 月午洞後 山麓에 우뚝 서있다. 려宴公 震英은 忠簡公 諱 理의 後裔로서 前判書 李時發의 侄壻가 된다. 光海 戊午(단기 3951, 서기 1618년)에 李判書가 장차 隱退 할 宅地를 求하려고 淸州 東南方 地帶를 循歷하다가 한 地点에 當到하여 周圍를 觀望하던 中 一弊衣寒士가 나타나서 이르되 여기는 韓太尉의 遺墟 方井里인즉 韓氏가 아니면 占居할 수 없다 하거늘 李判書 이 事實을 侄壻인 려宴公에게 傳하니 려宴公은 이말을 듣고 吾韓門中의 宿願이 이제야 成就됨을 歡喜不禁하야 卽時로 方井里에 찾아가서 荒凉한 옛 터를 다듬어서 家屋을 세우고 方井을 浚渫하여 率春搬移하니 이것이 興廢가 無常한 歲月 속에 千年舊基 方井里가 다시 옛 主人을 찾은 顚末이다.
淸州邑志 抄
原文: 方井里在淸州治南六里許務農坪東卽韓太尉所居之地太尉方其未遇也隱德邱園服田力穡積穀累巨萬麗太祖征甄萱之時師出宅前太尉杖劍出迎以濟十萬兵一日之餉遂從而宣力聘智滅濟降羅以成統合之績
역문: 방정리는 청주읍 남방 육리쯤 務農坪 東쪽에 있으니 한태위가 살던 곳이다. 태위가 아직 출세할 기회를 만나지 못하고 전원에 은거하면서 몸소 농사에 힘써 수만석 거부가 되었더니 麗太祖가 견훤을 정벌하러 갈 때 그 행군이 문전에 이르거늘 태위공이 장검 영접하여 십만대병을 배불리 먹이고 드디어 종군하여 용력을 떨치며 지모를 짜서 백제를 토벌하고 신라를 봉복받아 통합하는 훈업을 성취하였다.
始祖 遺基 敍事 碑文(역문)
지은이: 宣祖 38年 吏曹參判 浚謙 (萬歷 33년(宣祖 38년:단기 3938년) 9월 후손 이조참판 준겸)
우리 韓氏는 저 高麗 王朝가 新興 할 때부터 東方大姓이었다. 처음 麗祖가 新羅를 降伏받고 百濟를 滅亡시켜 三韓을 統合하는 業績을 이룩할 때 당시의 勇力을 다하고 智略을 짜서 協贊한 사람이 數十人이었다. 그 중에 韓 蘭하시는 어른이 있어 建國元勳으로서 벼슬이 太尉三重大匡에 이르고 이름이 壁上에 오르시니 이 어른이 바로 韓氏의 始祖이시다. 太尉께서는 세상에 드문 材質로 草野에서 일어나서 王政의 大業을 일으켜 覇權을 잡은 功勳높은 業績은 自古로 드문 일이다. 또 積德하고 積善하여 代代로 이어가면서 그 美德의 發揮로 子孫들이 온 朝廷에 벼슬길에 올라가서 高官大爵이 輩出되었으니 國史나 家乘에서 차례로 줄지어 볼 수 있다. 例를들어 그 中에서 名聲이 높으신 어른만도 禮賓옹卿 光胤과 都僉中贊 康과 寶文閣提學謝 奇와 思肅公 渥과 平簡公 公義어와 西原君 方信, 文敬公 脩가 모두 功勳이 높은 將軍이요 政丞이며 道德君子요 文章大家로서 父子兄第가 繼繼承承하여 高麗 五百年 王政을 始終 같이하였고 李朝에 와서는 더욱 繁昌하여 平簡公 西原君 兩家 子孫들이 더욱 많이 朝廷에 進出하였으니 平簡公 後裔로는 文烈公 尙質 文簡公 尙敬 忠成公 明會 文襄公 繼美 文靖公 繼禧 章成公 效元이요. 西原君 後裔로는 襄節公 確 襄惠公 伯倫 質景公 致亨 恭安公 致仁 莊簡公 致禮레가 모두 歷代 임금을 補弼하여 名臣이 되었다. 開國 靖難 佐理 致治功臣으로서 麒麟閣에 入閣하고 議政府에 납신분이 代代로 連續하였고 國舅와 駙馬가 잇달아 나셨다. 太尉公 時代에서 지금까지 七百餘年되는데 子孫의 繁昌한 것과 家門의 顯赫한 것이 갈수록 더 隆盛하니 아! 기쁜일이로다. 湖西땅 淸州는 太尉公의 出世하신 故鄕이니 一名 上黨이라고 號稱하게된 것이 아마도 이러한 緣由일 것이다. 이곳에 戶籍을 두고 사는 子孫들이 많고 名家故宅의 後裔들이 아직도 남아 살고 있는 터이다. 작년 봄에 내 伯氏 百謙이 淸州牧使로 오시니 역시 平簡公의 後裔이시다. 馬車에서 내리면서 우선 宗人을 訪問하고 太尉公의 遺基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대답인즉 哀惜한 일입니다. 老人들의 말씀을 들은즉 傳說에 太尉公께서 처음 務農亭에 살면서 農事에 힘써서 數萬石 巨富가 되었더니 高麗 太祖가 甄萱을 征伐하러 가는 行軍이 집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때 太尉公께서 杖劍하고 이를 出迎하여 兵士을 배불리 먹이고 그 길로 從軍하시었다. 云云하였다. 淸州 東南쪽 十里쯤에 方井里가 있으되 바로 務農亭의 옆이요, 韓氏 後孫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文敬公 柳巷文集에 내집이 方井里라는 句節이 있고 그 後 忠成公이 故鄕을 찾는 뜻에서 이 洞里에 와서 祖業을 이어 住居를 營爲한 바 있으니 여기 方井里가 太尉公의 遺基임을 알게되어 伯氏는 다시한번 老人들에게 질문하여 太尉公 遺基임이 的實無疑함을 다진 後에 雜草를 베어 버리고 壇을 쌓고 날을 받아 祭祀를 드린 후에 朝廷에 在職 中인 宗丈 淸平府原君 應寅과 내 叔父 判書公 孝純에게 書札을 보내 告하되 "近代의 大家인 谷城 申氏와 安東 權氏와 같은 門中은 모두 故鄕에서 자기 始祖의 祭祀를 받들어서 報本하는 道理를 다하거늘 況且 우리는 太尉公의 功德과 後孫들의 昌遠함이 저 두집만 못할바 없건만 옛 故鄕이라고 찾을 길이 없어서 오고가는 者들로 하여금 본뜰바가 없이 되었으니 어찌 이마에 땀이 날 처지가 아니겠습니까. 이제 遺基를 찾았으니 田一筆을 買入하여 넉넉히 祭需를 마련할 수 있게하고 宗人들이 서로 替番해서 掌理하도록 하되 每年 봄에 位牌를 모시고 壇上에서 行祀할 것을 永久한 宗規로 하기 爲하여 紀律을 대강 갗추었으니 碑石을 세워서 永久히 傳할 수 있도록 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더니 宗丈들이 이 말을 들으시고 可하다고 認定하고 卽時로 通文을 써서 各 宗門에 널리 通告하야 各自 金品을 獻誠하여 이 社業에 協助토록 하고 나 浚謙에게 그 事實을 記錄하라고 하는지라 글솜씨가 掘劣하다고 敢히 辭避할 수가 없어서 삼가 아뢰옵건데 내 일찍 들은 바에 따르면 源脈이 깊은 물은 其流域이 長遠하고 뿌리가 堅實한 나무는 其枝葉이 茂盛하며 사람이 德을 쌓고 仁을 베푼 者는 其子孫이 繁昌한다고 하니 우리 韓氏 家門이 여러代를 이어 오면서 高官大爵이 輩出됨은 太尉公께서 積德施仁하신 餘蔭이 아니겠는가. 孟子의 말씀에 君子의 流澤도 五世면 끊기고 小人의 餘韻도 五世면 없어진다고 하셨으니 善惡間에 人間의 流澤이 五世 以上 傳하지 못한다는 말씀인데 數十世가 되도록 끊어지지 않았으니 이것은 孟子께서도 豫期치 못하였던 일이다. 況且 王覇가 光武帝를 死境에서 잘 補佐한 것도 一時的인 氣數와의 關練이 있는 까닭에 王哀와 隆替를 國家와 더불어 처음부터 終末까지 그 運命을 같이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옛날 사람이 子文의 善함을 稱贊하는 것도 楚나라의 後世까지 傳하여 오지 못하였고 晋나라의 王謝나 唐나라의 崔盧가 높은 官職을 누린 것도 當代의 호사로서 끝나고 말았다. 우리 韓氏같이 빛나는 門閥이 여러 代를 하루같이 連綿하는 집은 自古及今에 그例를 보지 못하였다. 崇嶽山에 精氣가 쌓이고 沙麓에 瑞氣가 어리여 하늘이 주는 敦厚한 性質을 받아 特異한 人物을 낳았으니 여러차례 國母를 誕育하여 우리 朝鮮 億萬年의 運命을 開拓하였다. 이것만 가지고 말하더라도 그 遺基를 잘 다듬어서 옛날 事跡을 宣揚하는 것이 어찌 韓氏 子孫만을 爲하는 私的이겠는가?. 마땅히 育司序例에 넣어 奉祝하는 儀典에 따라 每年 香幣를 내려주시어 그 勳德을 旌表하여야 할 터인데 아직 이것을 서둘러 하지 못하였다. 한심한 일이로다. 自古로 名門巨族은 先祖의 忠孝와 勤儉으로 이루어진 것이요 子孫이 고루하고 오만함으로서 墜敗하는 것이다. 太尉公께서 아직 出世하시기 전에 草野에서 근근이 살다가 出身과 同時에 家門을 일으켰고 忠孝의 大業을 이루시니 그 子孫들이 祖上傳來의 遺業을 힘써 닦아서 家法의 傳統을 잘 익혀 永久히 天祿을 亨受한다면 이것이 바로 朝廷의 典型이요. 子孫의 儀範이 되는 것이다. 그 奇居하시던 宅里를 表揚하여 後世 사람들이 보고 感興토록 한다면 그것이 社會敎化에 育效한 바 적지 않으리라. 太尉公의 墓所가 옛날부터 平安道 嘉山郡에 있다고 하였으나 年代가 오래되어 眞假를 알 수가 없으므로 子孫들의 一大 蹉恥였는데 이제 내 伯氏가 옛날 根本을 잘 찾아서 이런 일을 함으로서 그 美蹟을 드러내게 되었다. 옛말에 天下萬事가 사람을 만나야 된다고 하였는데 그 사람이 바로 가까운 내 門中에서 나온 것이 더욱 嘉尙하도다. 今後로 太尉公의 後孫된 者로서 이곳을 지나갈 때에는 반드시 拜謁하고 祖上 傳來의 鄕里에 대한 敬虔한 誠意를 갖게하고 他人이라도 그 祖上에 關한 勤念이 薄弱한 사람들은 이 法典을 본받아 先祖에 奉祀하는 誠意를 다하도록 하게된다면 太尉公의 遺風과 餘韻이 여기서 이루어져서 永遠토록 빛나리라. 그러므로 글자에 새겨두지 않을 수가 없어서 傳來의 系派와 아울러 立石한 始末을 記錄하여 後人들에게 告하는 바이다.
萬歷 33년(宣祖 38년:단기 3938년) 9월 일 후손 이조참판 준겸 찬
墓所(충청북도 지방 기념물 제 72호)
太尉公의 墓所는 淸原郡 南一面 駕山里에 있으니 鵲道山으로부터 國師峰이 左便으로 돌면서 庚兌方으로 뻗어 내려온 行龍이 分土洞 艾田洞을 지나 亥方에 入首한 乾坐巽向版局이요, 물은 坤申方에서 辰方으로 들어간다. 대체로 山은 俗離山의 來자락이요, 물은 楮子山에서 發源하여 無心川으로 下流하다가 다시 鵲川과 合流하여 錦江으로 들어간다. 玉女峰과 筆峰이 甲方에서 侍立하였는데 俗離山이 亦是 甲方이라 地家書에 이르기를 <回龍顧祖>라 하여 吉地라고 世稱하게 된 것이다. 前方에 展開한 30里 廣野는 務農亭 앞까지 連廷하였고 上黨山城은 方井里 背後 洛迦山 옆에 자리잡고 있다. 청주시를 起点으로 한 大路가 方井里를 經由하여 報恩 3거리에 와서 分岐하니 左線은 米院을 經由하여 報恩 俗離에 이르고 右線은 文義로 通하는데 大橋를 건너서 약 백 여보 地点에서 다시 分岐되니 左側이 文義에 이르는 大路요, 右側이 駕山 墓所에 이르는 道路이다. 이와같이 名堂에 모신 山所가 언제부터인가. 不知中 失護되어 이를 哀惜하게 追慕하는 後孫들이 壇을 모으고 碑를 세워 每年 歲一祭를 받들며 <墓在駕山>이라는 文獻을 參考로 平安道 嘉山 懷仁 嘉山등 音이 相以한 地名을 가진 곳은 모두 두루 살펴 보았으나 徒勞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大人의 幽宅은 湮滅하는 일이 없는 法이다. 人物의 卓越한 名聲과 墓域의 雄莊한 規模가 庶人의 무덤과는 달라서 洞里 父老들이나 婦女들의 傳說로 口傳되어 오다가 언젠가는 發露되는 法이다. 肅宗 14년 戊辰(단기4021, 서기1688년)에 墓下 民家에서 顧傭하던 韓某가 있어 그 洞里에 사는 盧哥가 太尉公 山所 封墳을 破壤하고 墓碣은 中間을 折斷하여 우물 바닥에 묻어 치운 後에 山所 前後面에 倫葬하였다는 情報를 듣자 卽時로 方井里에 찾아와서 聖憲에게 昭詳하게 告하였다. 聖憲이 이 말을 듣고 생각하여 본 즉 嘉山의 嘉字와 駕山의 駕字는 音相以하고 駕山은 咫尺間이라 十分疑心할 바 없으므로 때마침 淸州兵使로 在任 中인 後孫 根에게 提報하고 根과 더불어 駕山에 달려가 조사한 즉 碑石은 비록 中絶되었으나 字劃이 宛然하여 太尉公 墓임을 確認하게 되었다. 翌年 己巳에 後孫 參判聖佑 掌今濚 郡守 塾등이 連署로 官에 提訴하니 마침내 상감께서도 알게 되어 朝廷에서 京兆郞을 派遣하여 奸惡한 犯行을 摘發하고 壙中을 열어보니 誌石이 發見되었다. 이리하여 倫塚을 掘去하여 墓域을 改封築한 後에 表石을 세우고 誌石을 埋藏하였으며 祭田과 墓直 齊室等을 차례로 설치하였으며 그후 英祖戊子(단기4101, 서기1768년)에 新道碑를 세웠다.
高麗三重大匡太尉韓公夫人宋氏合葬墓誌(原文)
原文 : 太尉諱蘭姓韓氏本上黨人上黨之韓出自箕子箕子氏世衰爲馬韓子孫居上黨稱韓氏魏志具載其事太尉佐麗朝統合三韓勳名事業照映方策子孫昌大號爲甲族上黨淸州之號州東南務農亭有方井里卽太尉遺墟也又其南七八里有駕山卽太尉葬地也舊有表石三重大匡太尉韓七字州之耆老四大夫多見而言之者子孫不知也會有州人盧峰者 孝廟十年偸其父於太尉墓後峰死又葬於太尉墓前今 上十四年後孫掌今濚持平聖佑始聞而知之與諸宗人訟于懷德縣峰之隣族不敢隱其言古老傳說事甚悉峰之子再微廢其父祖兩世塚是歲十月節度使根等會祭太尉墓啓舊封改築之壙上築石三層甚整麗時石葬之制然也遂仍舊加封周三十二尺高九尺餘翌年秋奸孼再寬嗾執法者誣 上廳至于啓視壙中得三鍊石四鐵釘雖再寬以誣 上被罪회郞以犯壙削職守臣以上命封築嗚呼太尉泉壤之禍有不忍言者矣請啓視者京兆尹李宇鼎潼視者參軍閔光魯也太尉內外子孫其麗不億不可悉記只敍墳墓旣失復得之由偈之碑葬之誌裨後來有所攷徵
皇明崇禎後庚午八月 日 後孫 生員 塾 謹識
역문 : 太尉公配位宋氏夫人合葬墓誌
退하여 馬韓이 되었고 그 子孫이 上黨縣에 살면서 韓氏라고 稱하였으니 그 事實은 魏誌에 昭詳하게 記錄되어 있다. 太尉께서 麗祖를 輔佑하여 三韓을 統合하시니 그 勳名높은 事蹟이 史書에 燦爛하게 빛나게 되고 子孫이 繁盛하여 甲族이라 稱하게 되었다. 上黨은 淸州의 옛 이름이며 淸州邑에서 東南으로 務農亭이 있는 方井里는 太尉公의 遺噓이고 또 거기서 南쪽으로 七八里 餘에 駕山이 있으니 이 곳이 太尉公 墓所가 계신 곳이다. 옛날에 三重大匡太尉韓이라는 七字가 刻字된 表石이 있는 것을 邑內에 사는 老人이나 四大夫들이 目見하였다고 말하는 者가 많았으나 子孫으로서는 아는 이가 없었다. 마침 郡民 中 盧峰이란 者가 있어 孝宗十年(檀紀 3992, 西紀 1659년)에 제 아비를 太尉公 墓所 뒷 쪽에 매장하고 峰이 死亡하니 또 太尉公 墓前面에다 盜葬하였다. 肅宗 十四年(西紀 1688)에 後孫 掌今 濚과 持平 聖佑가 처음으로 이 事實을 듣고 알게 되어서 諸宗과 더불어 懷德顯監에게 提訴하였더니 盧峰의 族屬들이 敢히 隱避하지 못하고 古老들의 傳說을 事實 그대로 告白하고 峰의 子息은 그 父祖兩代의 무덤을 發掘하여 갔다. 同年 十月에 節度使 根等이 太尉公 墓前에 모여 祭祀를 드리고 옛 封墳을 헐고 改封築하였는데 壙中 안에 三層石築이 完壁하게 整頓되어 있으니 高麗時代의 石葬制度 였던 것이다. 마침내 舊制데로 封築하니 둘레가 三十二尺이요, 높이가 九尺 餘였다. 그 翌年 가을에 奸惡한 賤民 再寬이란 者가 法官을 先動해서 임금의 聰聞을 속여 壙中을 파보니 거기서 三鍊石과 四鐵釘을 보게 되었다. 再寬이는 임금 속인 罪로 罰을 받고 恢郞은 犯壙(남의 墓所를 犯하다)한 罪로 官職을 削奪(삭탈=박탈) 當하였으며 王이 郡守에게 命하여 墳墓를 改封築케 하였다.
아! 怨痛함이다. 太尉公의 地下에까지 미치는 禍는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開壙 할 것을 要請한 者는 京兆尹李宇鼎이요, 일을 맡아 본 者는 參軍閔光盧였다. 太尉公의 內外 子孫들이 그 數가 많아서 모두 記錄 할 수는 없고 다만 山所를 失傳하였다가 다시 尋得한 事由를 敍述하여 碑石에 새기고 誌石을 埋藏하여 後人들의 考徵이 되도록 하련다.
皇明崇禎後庚午(檀紀 4023, 西紀 1690) 八月 日 後孫 生員 塾 謹識
主: 이 誌石文은 始祖 太尉府君의 墓所가 오랫동안 失護되어 盧 李 兩姓이 冒葬하였던 것을 肅宗 14년 (단기4021, 서기1688년) 戊辰에 信蹟을 尋得하고 翌年 己巳에 參判 聖佑 掌今 濚 塾이 官에 提訴하여 冒葬을 掘除하고 塋域을 改封築할 때 후일을 爲하여 奉藏한 誌石文으로 生員 塾의 撰으로 되어있다. 庚申年(단기4313, 서기1980년)에始祖 墓域 美化 事業으로 封墳을 改修할 때 發見된 것인데 始祖 墓所의 晦顯事實을 明瞭하게 記錄하였기에 이를 轉載한다.
墓所改築時祝文
原文: 惟此駕山寔公眞宅務農亭傍方井在北世代旣遠香火久絶守護無人耕犁遽及他人入葬石羊無迹귀(험준할;귀)然大塚저(속적삼;저)留半月民俗傳言往事如昨豊碑在口奚待片石事必待時辛有今日掃去汚穢改築塋域恐致震驚미(점점;미)增愴陽眩陳厥由敢薦洞酌
역문: 이 산줄기 駕山이라 公의 산소 여기있고 무농정이 이웃이요 방정리가 北에있오 世代가 멀어지며 오랜 세월 궐사했오 수호인이 없는 틈에 파고 갈아 밭이 되고 타인들이 도장하니 석물조차 간곳없소 우뚝 솟은 큰 봉분이 반달 같이 남아 있어 동네사람 전설 속에 지난 일이 어제같소 공덕비가 예있으니 표석 찾을 필요없고 天時人事 때가있 어 오늘에야 運이와서 더러운 것 쓸어내고 묘역 개축 하옵나니 영령께서 놀라실까 황송하고 비통하여 이 사연을 아뢰오며 삼가 잔을 드립니다.
`方井(충청북도 지방 기념물 제84호)
方井은 務農亭 아래 洞里 앞에 위치하고 있다. 太尉公께서 처음에 여기를 住居地로 삼으시면서 食水와 用水로 쓰시던 샘이니 正方型으로 築造하여 方井으로 이름하니 자연적 동리 이름도 방정리로 號稱하게 되었다. 水質이 淸新하고 風味가 甘美로워 養生에 最適하며 水源이 深長하여 큰 가뭄에도 湧出量이 減小되지 않고 항상 豊堯한 것도 좋거니와 그보다도 愛飮하던 분이 稀世의 偉人인 太尉公이시기에 더욱 有名하게 된 것이다. 淸州邑志 古蹟條에 高麗 太祖가 견훤을 정벌하러 가는 도중 행군이 마침 이 門前을 지나가게 되자 太尉公이 이를 맞이하여 십만대병이 이물을 마시는데 수량이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하여 "方井"이라는 井號를 받았다는 사실이 記載되어 있다.
務農亭
(무농정:충청북도 지방 기념물 제 84호)
務農亭은 東北方에 雄座한 上黨山을 등에 지고 南西편으로 展開한 30리 大野 務農坪을 向하여 金盤玉案形으로 有名한 勝地方井里後麓에 자리잡고 있다. 太尉 府君께서 이 亭子를 創建하시고 여기서 起居하시면서 農業을 勸奬하시고 濟世經綸을 鍊磨하시던 道場이니 方井과 아울러 公의 餘香이 맥맥히 흐르고 있는 貴蹟이다. 爾後 千餘年에 事物의 消長盛衰가 無常한지라 方井里가 一時 廢墟로 荒凉한 처지에 있게 되니 務農井의 所在를 알 수 없게 되었다. 李朝 肅宗 元年(단기4021, 서기1688년)에 後孫 根이 秉馬節度使로 本州에 錦衣還鄕하자 우선 方井里에 찾아와서 무농정의 옛터를 찾아 碑石을 세워 表識을 해 두었고 광복 후 己丑年(단기4282, 서기1949년)에 방정리 宗中의 發起로 全國 宗門의 誠意를 모아 亭子를 重建하였다. 그러나 그후 6,25동란으로 인한 관리소홀로 원형보전이 어렵게 되어 지난 戊辰(단기4321, 서기1988년)에 中央 宗親會가 주관하고 청주市가 고려 건축 양식에 따라 원형대로 設計하여 정부보조금과 후손들의 성금으로 再重建하였다.
출처 청주한씨문정공파종중http://cafe.daum.net/han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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