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천자 묘(경남 진해 웅천, 해남 마봉리 외)
1. 주천자 묘에 관한 설화.
* 주천자(朱天子)는 명(明)을 건국한 주원장(朱元璋 1328~1398, 고려말 부터 이조 태조 시대)을 말한다. 어릴 때 숙식을 해결하기 위하여 승려 노릇을 하다가 원나라 말기 홍건적난을 계기로 오나라를 근거지로 하여 군벌로 성장한 다음 원(元)을 몰아내고 명(1368~1644)을 건국하였다. 세계적으로 자수성가한 인물로 꼽힌다. 명을 건국한 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공신 5만명을 숙청한 잔인함을 보였으나 이성계의 조선에 대하여 평화적 태도를 취하였다. 임란때는 지원군을 보내어 왜적을 물리친 공덕으로 청(淸)에 의하여 명(明)이 망할 때까지 조선인들은 명을 섬겼다. 김상현과 같은 주자학자는 백성이 죽더라도 명을 섬겨야된다고 주장하였다.
* 어떤 연구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주천자 묘와 관련된 설화가 있는 지역은 30여 곳 된다고 한다. 설화는 대략 2~3 종류가 있는 바, ① 주천자가 조선 땅에 묻어달라고 유언함에 따라 조선의 명당을 찾아 묻었다는 설화(장성 고성산, 춘천 우두산, 제천 금수산등 내륙지방) ② 중국상인이 부모시신을 모시고 와서 어린 주원장에게 물 밑에 있는 부처석상의 왼쪽 귀에 걸어달라고 부탁하면서 주원장에게는 부모시신을 오른쪽 귀에 걸어라고 지시하였는데 주원장이 상인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부친시신을 왼쪽에 건 다음 중국상인을 따라 중국에 건너가 명을 건국하였다는 설화(진해 웅천, 해남 혜원저수지등 해변지역) ③주원장은 전남 해남 한씨집 머슴이었는데 그 집 딸과 눈이 맞아 중국으로 도망쳐 명을 건국하였다는 설이다.
2. 설화를 검토
설화가 일부라도 사실일 가능성이 있는가, 음택명당이 있는가를 검토한다.
* 주원장의 묘는 종리현(現 안후이성 추저우시 평양현)에 큰 규모로 만들어져 있고 명 효릉이라 하며 명대 왕릉의 표준규격으로 후대 왕릉건설에 모델이 되었다. 그러므로 유언설은 허구이다. 다만 주원장은 자기의 선조는 조선인이고 선조 묘가 조선에 있다고 말한 사실이 있다고 한다.(명나라 공적 지리서인 大明一統志) 주원장의 출신이 불명하고 비천한 탓으로 나온 말일지도 모르겠다.
* 내륙의 설화 지역은 고산으로 탈살과 장풍이 안되어 대혈은 없다. 진해 웅천의 바다 속 석상은 있는지 여부를 알 수 없고 해남 혜원저수지 한가운데에 작은 섬이 있는데 물이 빠지면 밑둥이 들어나 유골을 묻을 마땅한 장소가 없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다만 저수지주변에 중등중급의 좋은 혈처는 있더라.
* 진해 웅천은 해중(海中)음택을 찾지 못하지만 음미해 볼 점이 있다. 그리고 한씨집 머슴이었다는 설화는 중국에서 어릴 때 탁발승이었던 행적으로 보아 허구이다. 다만 주원장은 후궁이 많아서 26남 16여를 두었고 조강지처는 마씨부인으로 현명한 황후로 칭송받는다.
3. 진해 웅천
* 주원장과 같은 주(朱)씨가 집성촌(신안주씨 웅천파)을 이루었고 그 지역의 유력자이었다. 중국 주자의 증손 주잠(주희)이 몽골의 억압을 피하여 1224년 능주(現 화순)로 망명하여 신안주씨의 시조가 되었다. 신안주씨대종회의 공식기록에는 없지만 주희의 8세손 주초일(1268), 9세손 주오사(1298), 10세손 주원장(1328~1398)이라는 주장이 있다.
* 주원장은 진해 웅천 백일리(現 창원 진해구 북부동)에서 태어나 중국으로 건너가 천자가 되었다는 설화가 있다. 백일리는 천자봉 아래에 있는 오랜 마을인데 만약 주원장이 태어났다면 천자봉의 기운을 받는 양택명당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한국기독교의 선구자이요 일제의 모진 고문에도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주도하다가 1944.4 평양감옥에서 순절한 주기철 목사와 제헌국회의원 주기용(신안주씨 30세손)도 백일리 출신이다. 주목사님 생가부근으로 추측되는 곳에 생기가 왕성하였다. 이 마을에 명성황후가 머물면서 천자봉에 올라 순종의 장수를 기도하였다는 말이 있으나 기록에 없는 말이다.(2024.2)
* 백일리지도---
* 명 효릉----
첫댓글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